돈과 행복
국제연합의 "지속발전가능해법네트워크"(Sustainable Development Solution Network)가 옥스퍼드대학, 갤럽 등과 함께 조사해서 발표한 2024년 "세계행복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6.058로 조사대상 143개국 가운데 52위며, 선진국들 가운데 최하위다. 2021년 미국의 퓨연구소 (Pew Research Center)의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선진국은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 근원(Sources of Meaning)'으로 가족을 꼽았다. 그에 반해 한국은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 근원'으로 "물질적 안정(material well-being)"을 꼽았으며, 가정은 돈, 건강 다음 세 번 번째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 두 조사의 결과는 우리를 좀 의아하게 한다. 선진국들 가운데 물질적 소유를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한다면, 경제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른 한국인은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인은 훨씬 가난한 나라들보다 더 불행하다고 느끼는가? 그 두 조사 가운데 하나 혹은 둘이 다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삶의 의미에 대한 한국인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두 가능성 가운데 역시 후자가 이유일 개연성이 높다. 즉 물질적 풍요가 삶에 의미라고 보는 가치관이 한국인이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게 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돈을 삶의 의미의 원천으로 보는 나라가 경제적으로 넉넉해졌는데도 불행한 것은 한국인의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성, 즉 세계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의 경쟁심을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가정의 화목은 비교나 경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다른 가정의 화목에 배가 아픈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물질적 소유는 비교와 경쟁의 가장 전형적인 대상이다. 물질적 부의 경쟁이 단순히 소득증대의 기쁨이나 성취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좌우하는 것으로 인식되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소유에 대한 한국인의 유다른 집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되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혹독한 가난의 경험, 상대적으로 큰 빈부격차, 1인당 명품소비 1위, 성형수술 세계 1위 등을 만든 피상적 가치관, 유교와 무속종교의 차세중심적 (此世中心的) 세계관 등이다. 특히 "무교의 가치 기준은 윤리적 선악이 아니라,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다. 많은 것이 선이고, 없는 것이 악이다."라는 무속전문가 유동식 교수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원인이 무엇이든 물질적 소유를 중시하는 것이 한국인을 행복하게만 한다면 별로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가 불행하게 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행복하지 않으면 세계 10위권의 경제 수준, 잘 갖추어진 민주주의 (Full Democracy), 세계 3위의 교육과 건강 수준, 유명해진 연예 문화, 뒤지지 않은 과학기술 등이 모두 무슨 소용이 있는가? 벤담이나 파스칼은 행복과 고통은 인간의 삶에서 궁극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고통을 회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명하고, 그에 대한 더 기본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가난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는다. "세계행복보고서"에서도 가난한 나라들은 모두 행복지수가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넉넉하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도 아니다.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들 가운데 행복지수가 한국보다 월등하게 높은 나라는 수십 개나 된다. 물론 모든 사람, 모든 사회에 생존과 생활을 위한 기본수요는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본수요가 충족된 다음부터는 돈을 버는 것보다 돈에 대한 태도와 돈을 올바로 쓰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돈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는 미숙한 상태로 남아 있고,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명예, 사명, 의미, 성취, 체면, 위신, 수치 같은 것들이 모두 돈에 밀리고, 모든 보상은 돈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수준을 누리면서도 기부지수 (Giving Index)는 세계 88위다. (케냐 5위, 잠비아 9위, 몽고 25위) 아직도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낫다."라고 확신하며, 상장 (賞狀)보다 부상(副賞)에 더 관심이 많다.
그러나 동서고금 어느 고등종교도, 삶의 의미에 고심한 어떤 현자도 돈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불교의 금욕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으며, 셰익스피어는 돈이 "검은 것을 흰 것으로, 더러운 것을 예쁜 것으로, 그릇된 것을 바른 것으로, 비천한 것을 고상한 것으로, 늙은이를 젊은이로, 비겁한 자를 용감한 자로 둔갑시킨다."라고 비꼬았다. 마르크스는 돈을 "가시적인 신으로, 모든 인간적, 자연적 특성을 그 반대의 것으로 만들고, 보편적인 혼돈을 가져오고, 만물을 뒤집어 놓으며, 모든 불가능을 끌어모은 것이다. 모든 사람과 민족들의 보편적인 창녀일 뿐"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사유, 교양, 사랑, 윤리, 아름다움, 거룩함 같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덕목들을 전혀 갖추지 못해도 돈은 얼마든지 탐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바르게 살아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인물치고 돈을 찬양한 사람이 없고, 돈에 미친 사회가 평화롭고 정의로울 수는 없다.
반면에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많다는 충고는 동서고금에 무수히 주어졌다. 성경은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고, "거친 밥을 먹으며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 삼아 베어도 그 가운데 또한 즐거움이 있으니, 의롭지 않으며 부유하고 귀함은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라며 공자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찬양했다. 그런 가르침들을 시대착오적인 헛소리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피상적이고 어리석은 오만이다. 극심한 가난을 찬양하진 않더라도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이 삶에 가치와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결코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 수 없다. 무엇보다 돈을 탐하는 현대 한국인들의 불행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