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한 것은 이것을 실증한다.
삼국시대
<고구려>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인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7세기 이전 건립된
-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삼국 시대의 성은
-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않았다.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없는 사람은 과거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현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486년(성종)에 편찬한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86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70-1827)
Piano Concerto No.6 in D Major, Op.61a (Cadenzas: Beethoven) (arr. composer from Violin Concerto, Op.61)
베에토벤 피아노협주곡 제6번 1악장 (베에토벤 바이올린협주곡의 피아노 편곡) Felicja Blumental, Piano 1. Allegro ma non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에서 발췌 -
성씨에 얽힌 이야기
고, 양, 부(高, 梁, 夫)씨
- 제주도 한라산 기슭에 있는 삼성혈에서 나온 삼신인(고을라, 부을라, 양을라)의 전설
김해 김(金)씨
- 알에서 나온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와 구지가
경주 김(金)씨
- 경주 계림의 소나무숲속 금궤에서 나온 김알지
월성 석(昔)씨
- 옛날에 남의 집을 빼앗았다고 해서 석씨
박(朴)씨
- 박 처럼 생긴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와 용의 옆구리에서 나온 왕비
알영.
남평 문(文)씨
- 장자지라는 연못가에 있는 큰 바위에서 나온 갓난아이
파평 윤(尹)씨
- 윤씨가 잉어를 먹지않는 이유는?
손(孫)씨
- 어머니를 위해 아들을 땅에 묻으려 했던 효자 손순
영해 박(朴)씨
- 신라시대의 충신 박제상과 망부석
김해 허(許)씨
-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배를타고 온 공주 허황옥.
사성김해 김(金)씨
- 임진왜란때 일본 가등청정의 선봉장인 사야가(沙也可)가
귀순후 성을 하사받은 김충선
영도 하씨
- 로버트 할리가 귀화하여 만든 영도 하씨의 시조 하일.
개성 내(乃)씨
- "네 ?"가 내씨로..
동물 이름을 성씨로
-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왕건이 고려를 세울때 목천(충남 천원군 목천면)에 살던
백제 유민들이 백제의 재건을 위해 항쟁을 하자
화가난 태조 왕건이 목천 사람들에게 목천 우(牛-소)씨,
목천 상(象-코끼리)씨, 목천 돈(豚-돼지)씨, 목천 장(獐-노루)씨
등의 동물 성씨를 억지로 붙여 주었으나
후에 우(禹), 상(尙), 돈(頓), 장(張) 등 같은 음의 다른 글자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자동래설
에 따른 성씨들
외국의 성씨제도
외국에는 여자가 시집을 가면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
미국,영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독일,스위스,브라질 등도
원칙적으로 아내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다.
그러나 법률로 정해진것이 아니며
여자는 결혼전의 성을 그대로 가질 수도 있고
남편의 성을 사용 할 수도 있다.
러시아의 경우는
여자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이나,
법률로는 부부가 서로 의논하여 어느 한쪽의 성을 사용하거나
각자의 성을 사용 할 수도 있다.
중국에서는
부부는 각자의 성명을 사용할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는 아내는 자기의 성위에 남편의 성을 합하여 사용하는 복성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한 여자의 성은 두글자 성씨가 된다.
또한 지구상에는
성이없는 국가도 많다.
동남아시아의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이 한 예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데
다만 개인적으로 필요하거나 취미로 이름위에
이것 저것 덧붙여 사용한다고 한다.
미얀마에서는
이름위에 '우'나 '몽'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서
'우 와 '몽'이 우리나라의 김씨나 이씨 만큼 많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 이다.
그러나 '우'자는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붙이는 경칭이며 '몽'자는
미혼의 젊은 이에게 붙이는 것으로
영어의 미스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성씨는
매우 복잡하고 그 숫자로도 13만 2천여 성씨로
세계에서 제일 많은 민족중의 하나다.
일본의 성씨는 두글자 성씨가 제일 많고
한글자나 세글자 성씨도 많다.
외국의 족보연구
족보는
외국의 거의 모든 나라에 족보제도가 있다.
서구에서는 Family Tree,
중국에서는 종보(宗譜),
일본에서는 가보(家譜)라 하고
각 가문마다 문장(紋章)이 대대로 전해져서
특별한 예식이나 명절에는 예복, 모자등에 착용한다.
또한 일본에는 일본가계도학회(日本家系圖學會)가있어
전국적으로 지부가 설치되어 있으며 매월 정기적으로
'성씨와 가문(家紋)'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그 외에도 성씨가문 연구회(姓氏家紋硏究會)가있어 이에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많은 나라들에 족보학회가 있으며,
족보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도서관이 있는 나라도 있다.
미국의 족보전문 도서관에는 족보가 마이크로 필름화 되어 있으며
족보학회가 창립된지 80년이 넘어
많은 학자들이 여러가지 세미나 등을 하고 있다
.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도서관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하버드 대학에서는
우리나라의 족보제도를 연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족보들을 마이크로 필름화하여 보관하고 있다.
미국의 일부 대학에서는 계보의 작성법을 학과에 편성해 놓고
연구발표회도 활발히 진행중이다.
이외에도
일본의 동경대학과 경도대학,
중국의 남경도서관과 중국과학원, 북경도서관, 프랑스의 극동학원,
베트남의 국립도서관 등에 동양의 족보들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인터넷 검색 사이트인 야후의 계보학 분류에도
외국의 많은 성씨와 관련한 사이트가 많이 올라와 있어
외국 성씨의 유래와 족보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족보는 세계 각국에 보급되어 있을 뿐 아니라,
매우 큰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촌수 따지는 법
<| 남자 | 여자(고모계) | 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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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조부 (玄祖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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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
고조부 (高祖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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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고조 (從高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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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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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촌 |
증조부 (曾祖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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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증조 (從曾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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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종증조 (再從曾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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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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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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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촌 |
조부 (祖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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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조 (從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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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종조 (再從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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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종조 (三從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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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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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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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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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촌 |
부 (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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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숙부 (伯叔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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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백숙부 (從伯叔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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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종백숙부 (再從伯叔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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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종백숙부 (三從伯叔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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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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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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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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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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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촌 |
나 (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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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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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형제 (從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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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종형제 (再從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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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종형제 (三從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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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종형제 (四從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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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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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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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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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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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촌 |
아들 (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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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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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질 (從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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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종질 (再從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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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종질 (三從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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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종질 (四從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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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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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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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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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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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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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 (從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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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종손 (從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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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종손 (三從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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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종손 (四從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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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內從間, 고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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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高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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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촌 |
증조 (曾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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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대고모 (曾大姑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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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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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
조 (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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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고모 (大姑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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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종조 (內再從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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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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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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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촌 |
부 (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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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姑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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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종숙 (內從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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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종숙 (內再從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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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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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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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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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촌 |
나 (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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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 (姉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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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종형제 (內從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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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종형제 (內再從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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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3종형제 (內三從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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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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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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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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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촌 |
딸 (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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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질 (甥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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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종질 (內從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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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종질 (內再從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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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3종질 (內三從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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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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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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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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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촌 |
손녀 (孫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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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손 (離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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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종손 (內再從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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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3종손 (內三從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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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4종손 (內四從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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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고조 (外高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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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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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증조 (外曾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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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종증조 (外從曾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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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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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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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 (外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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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종조 (外從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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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종조 (外再從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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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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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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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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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촌 |
이모 (姨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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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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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숙 (外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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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종숙 (外從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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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종숙 (外再從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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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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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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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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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촌 |
이종형제 (姨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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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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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종형제 (外從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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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종형제 (外再從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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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3종형제 (外三從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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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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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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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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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촌 |
이종질 (姨從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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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종질 (外從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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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종질 (外再從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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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3종질 (外三從姪) |
<| 남자 | 여자(고모계) | 외가 |>
1985 인구조사 통계에서 본
본관성씨별 인구수 순위 100
1 김해김(金:가락)3,767,061
김해김씨(金海金氏, 가락) |
[유래]
시조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가락국에는
본래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촌장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 3월에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소리가 났다.
아홉 촌장과 사람들이 올라가자 "산봉우리에 흙을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 머리를 내지않으면 구어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대로 하였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
그 끈의 끝에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이것을 열어 보니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자
다음날 이 알이 여섯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제일먼저 나온 아이 이름을 수로(金首露, 42~199.3.23)로 하고
그달 보름에 왕으로고 나라 이름을 가락(대가야)이라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 이상은 "삼국유사" 중에서 - 그중 먼저 나온 수로는 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으로 하였다.
- 이상은 "개황력(開皇曆)" 중에서 - 이 수로왕을 시조로하는 성씨가 바로 김해김씨이다.
김해는 가락국의 고도로서 지명도 여러가지로 변했으나
고려 충선왕 때 김해부가 설치됨으로써 본관을 김해로 하였으며
가락김씨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수로왕이 즉위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의 고대국가)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許)씨(태인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다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도 '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김해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金庾信)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자이며
무열왕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였다.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자 각간(角干)인 김무력(金武力,
구형왕의 막내 아들)이고, 아버지는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金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가문의번영]
-경파 경파의 파조인 김목경(金牧卿)은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당시 혼란한 국정을 개탄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왕에게 상소 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 김목경의 맏아들 김보(金普)는
공민왕이 세자 때 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갈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김보의 6세손 김영견(金永堅 : 동지중추부사), 김영서(金永瑞 : 현감), 김영정(金永貞 : 성종 때 대사헌), 김영순(金永純 : 한성판관)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때 명신 김우항(金宇杭)은
김영정(金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사군파 사군파에서는 파조인 김익경(金益卿)의 손자 김진문(金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색(李穡), 박자검(朴自儉) 등과 함게 은둔 생활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김추(金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김석(金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김조는 세종 때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그는 벼슬이 옮겨질 때마다
몽은제(蒙恩祭)를 올리는 충신으로서도 이름이 났고,
세종이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 : 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化)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김진문(金振門)의 6세손 김극희(金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김완(金完 : 학천군 김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 할 때 벽동(碧潼)의 성(城)을 사수했던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우(金宇)의 아들 김여준(金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 :
인조의 맏아들 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와
인평대군(璘坪大君)을 호종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중국 심양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를 소리내어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거(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시제(時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송상현(宋象賢), 유극량(劉克良)과 더불어 삼충절(三忠節)로 일컬어진 김동광은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재직시
임진왜란 일어나 성이 함락되자 좌우를 피난시키고
성의 정문 앞에 조복단장한 채 관인을 쥐고 단좌하여
적에게 저항하다가 참살당하여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삼현파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1세조인 김관(金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김극일(金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극일의 아들 김맹(金孟)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김일손은 1486년(중종 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니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 때의 영의정(領議政) 남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김일손의 증손 김언유(金彦諭)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비(碑)와 병풍,
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김언유의 아들 김현성(金玄成)은 광해군 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金景瑞)와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에 능통했던 김덕승(金德承),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김예직(金禮直), 조선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金弘道)가 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김진희(金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김천택(金天澤) 등이 있다.
[계 파]
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148개파가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종파인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경파(京派; 영견, 영서, 영정, 영순) :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시조로 한다. - 사군파(四君派; 극조, 완, 여수, 세기) : 목경의 동생 김익경(金益卿)을 중시조로 한다. - 삼현파(三賢派; 극일, 일손, 대유) : 김관(金管)을 중시조로 한다.
[본관지]
경상남도 김해시
[기 타]
[ 연락처 ] 가락중앙종친회 : 02) 714-7459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3,767,061명이 있었다. [ 참 고 ] 근원이 다른 김해김씨가 있는데 임진왜란때 왜장 김충선이 귀화하여 성을 하사 받은 김해김씨(우록김씨)와 신라김씨 계통인 김해김씨(법흥파)가 있다.
김해김씨(金海金氏, 우록) |
[유래]
시조 김충선(金忠善,1571~1642, 자는 선지, 호는 모하당)은 본래 일본인으로 성은 사(沙)씨이며 이름은 야가(也可)이다. 그가 임진왜란때 21세의 나이로 일본군 가등청정(加藤淸正, 가또오 기요마사)의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삼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월 13일 부산 동래에 상륙 했다. 조선의 문물과 인정, 풍속에 감탄하여 상륙한지 1주일만인 4월 20일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과 김응서(金應瑞)에게 "내가 못난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싶다."라는 편지를 보내 귀순의 뜻을 밝힌 후 귀순하였다. 귀순 후 조선의 장수로 울산과 경주, 영천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조선에 화포와 조총을 만드는 법과 사용술을 보급하였고, 18개 지역의 왜적의 성을 탈환하는 등 눈부신 업적과 전공을 세우자 권율장군과 어사 한준겸(韓浚謙)이 왕에게 간청하여 정이품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선조가 그를 친히 불러 이름을 김충선으로 하사 하였다. 1603년(선조 36년) 북방에서 여진족이 국경을 어지럽히자 국경방어를 자청하여 10년간 국경을 지키다 물러났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다시 출정해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의 목을베어 평정에 공을 세웠다. 1627년(인조 5년)의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모아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서 매복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어 무훈을 떨쳤다. 그는 서른살이 되던 해 진주 목사(晋州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友鹿洞)에 뿌리를 내리고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家風)으로 살다가 1642년(인조 20년) 72세로 세상을 마쳐 가창골에 세워진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되었고, 정헌대부 지중추부사(正憲大夫 知中樞府事), 병조참판(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지금 그의 후손들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 많이 살고 있으며 우록동에 살았기 때문에 우록김씨라고도 불리운다.
- 묘소는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 삼정산에 부인의 무덤과 나란히 있다.
[가문의번영]
김충선은 슬하에 아들 5형제를두었는데 장남 김경원(金敬元)이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둘째 김경신(金敬信)은 공조참판(工曹參判)에 각각 추증되었고, 셋째 김우상(金右祥)은 상호군(上護軍)을, 넷째 김계인(金繼仁)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으며, 막내 김경인(金敬仁)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어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경원의 둘째 아들 김진영(金振英)이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참찬관(參贊官)을 역임했고, 김여삼(金汝三)은 노모가 죽자 삼성산(三聖山)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이나 시묘(侍墓)를 극진히 하여 "효행록(孝行錄)"에 실렸으며, 김용하(金龍河)는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벼슬을 사직하여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을 지켰다.
[집성촌]
경북 달성군 가창면
[본관지]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김해125,277명, 우록130명이 있었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법흥파, 김염계) |
[유래]
시조 김염(金濂)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고려 시대에 벼슬이 봉어(奉御)에 이르렀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하고있다.
김녕김씨 시조인 김시흥(金時興)의 8세손 김문기(金文起)가 단종복위운동에 찬가하여 사육신과 함께 순절하고 3족을 멸하는 위난이 닥치자 김문기의 8촌동생 김춘(金春; 김해군수)은 황해도 풍천으로 피신했다가, 성종2년에 다시 평안도 용천군 동하면 법흥동(法興洞)에 옮겨가 터를잡고 살면서 자손이 번창하자 본관을 법흥으로 하고 김춘을 관조(寬祖)로 하여 1세조로 하고 있다.
[계 파]
고강파(古姜派) 남시파(南市派) 당산파(堂山派) 동문파(東門派) 만다지도파(灣多地島派) 만진리파(灣津里派) 법흥파(원류본파)(法興派(原流本派)) 사동파(社洞派) 산후파(山後派) 선천사사파(宣川沙士破) 주의파(做義派)
[본관지]
평안도 용천군 동하면 법흥동
[기 타]
[ 연락처 ] 02)815-0227(김기보씨), 02)302-0275(김효승씨)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25,277명(우록김씨 포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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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밀양박(朴) 2,704,617
총 127개의 본관과 3,435,640명이 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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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신라가 생기기 전에 여섯개의 마을(6부)에 촌장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1. 이(李)씨의 조상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의 알평(謁平). 2. 최(崔)씨의 조상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
- 삼국유사에는 정씨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하고 있다. 3. 손(孫)씨의 조상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 4. 정(鄭)씨의 조상인 취산 진지촌( 山 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
(삼국유사에는 최씨의 조상으로 되어있다) 5. 배(裵)씨의 조상인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의 지타(只他). 6. 설(薛)씨의 조상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호진(虎珍).
기원전 69년 이들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추대할것을
의논을 하고 있었다.
이때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아래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 가서 보았더니 박같이 생긴알이 있어서 알을 깨어보니
그곳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아이를 혁연히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혁거세(赫居世)라고 하고
박에서 나왔다며 성을 박이라고 해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이라는 우물에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갈비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나왔다.
얼굴과 입술이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아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이 아이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알영(閼英)이라고 했다. 기원전 57년 이 두 아이가 13세가 되자 박혁거세는 왕이되고
알영을 왕비로 삼았으며 나라이름을 서라벌(신라)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왕은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신라 5대)과 일성왕(신라 7대)에서 갈라졌는데,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 강릉 등으로 분관했고,
비안, 우봉(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라 한다.
한편 일성왕계는 그의 25대손인 경명왕(신라 54대)과
경애왕(신라 55대) 대에서 다시 갈라졌는데,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 첫째 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 : 밀양, 반남, 진원 박씨등 - 둘째 아들 박언성의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 : 고령 박씨 - 셋째 아들 박언신의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 : 함양, 삼척 박씨 등 - 넷째 아들 박언립의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 : 죽산, 음성, 고성 박씨 - 다섯째 아들 박언창의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 : 상주, 충주 박씨 - 여섯째 아들 박언화의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 : 전주, 무안 박씨 - 일곱째 아들 박언지의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 : 순천, 춘천 박씨 등 - 여덟째 아들 박언의의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 :
경주 박씨의 8대군파와 - 아홉째 아들 박교순(朴交舜)의 국상공파(國相公派) :
울산 박씨로 분파되었다.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 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
‘8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김씨, 이씨와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다. 박씨는 옛문헌에 314본관이 있었지만 현재는 127개의 본관이 있으며 이중 46개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대한 유래는 알 수가 없다. 1960년 국세조사에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12,07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3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는 3,435,640명으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 % 순위는 275성 중 역시 김씨, 이씨,
다음으로 제3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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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주이(李) 2,379,537
전주이씨(全州李氏) |
[유래]
시조 이한(李翰)은 덕망이 높고 문장이 탁월하여
신라 문성왕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후 대대로 신라시대에 벼슬을 해왔다. 18세손되는 이안사(李安社)는
대대로 전주에 살아온 호족이었는데 새로 부임한 지주의 탐학을 규탄하자
지주가 군사를 휘둘러 보복하려하여 그를 피해 강원도 삼척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를 거처 원나라 간동으로가 그곳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지냈고
증손자 되는 이자춘(李子春)이 고려시대에 공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이자춘의 아들,
즉 시조의 22세손 이성계(李成桂)에 이르러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등 52명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
조선왕조를 창건, 전주이씨의 종시조가 되었다.
[가문의번영]
전주이씨는 조선 500년을 이끌어온 왕가이므로
가문의 번성기를 따로 기술할 필요가 없다. 전주이씨의 1백여 파중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密城君. 침=세종의 아들)파로써
6명의 정승과 3대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했으며,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정종의 아들)파가
부자 대제학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領議政)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덕천군파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
정승 1명과 숱한 문신과 무신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등이 빼어나다.
전주이씨는
오리정승(梧里政丞)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인조때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흥선대원군(興宣大元君) 이하응,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장군등 역사의 한획을 그었던 거목들을 배출하였다. 1585년(선조 18년) 이수광은 별시문과(別詩文科)에 급제,
1627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여러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왕래,
당시 명나라에 와있던 이탈리아 신부에게서 "천주실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을 얻어와 1614년(광해군 6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간행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실학발전의 선구자가 되었고 시문에도 능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계 파]
견성군파(甄城君派) 경령군파(敬寧君派) 경명군파(景明君派) 경창군파(慶昌君派) 경평군파(慶平君派) 계성군파(桂城君派) 계양군파(桂陽君派)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근령군파(謹寧君派) 금성대군파(錦城大君派) 금원군파(錦原君派) 낙선군파(樂善君派) 능원대군파(綾原大君派) 담양군파(澹陽君派) 덕양군파(德陽君派) 덕원군파(德原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도평군파(桃平君派) 무림군파(茂林君派) 무산군파(茂山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복성군파(福城君派) 봉성군파(鳳城君派) 봉안군파(鳳安君派) 석보군파(石保君派) 선성군파(宣城君派) 성령대군파(誠寧大君派) 소현세자파(昭顯世子派) 수도군파(守道君派) 수춘군파(壽春君派) 순평군파(順平君派) 순화군파(順和君派) 숭선군파(崇善君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신성군파(新城君派) 안양군파(安陽君派)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 안창대군파(安昌大君派) 안천대군파(安川大君派) 안풍대군파(安豊大君派) 안흥대군파(安興大君派) 양령대군파(讓寧大君派) 양원군파(楊原君派) 영산군파(寧山君派) 영성군파(寧城君派) 영성대군파(永城大君派) 영양군파(永陽君派) 영응대군파(永膺大君派) 영창대군파(永昌大君派) 영풍군파(永豊君派) 영해군파(寧海君派) 온령군파(溫寧君派) 완성대군파(完城大君派) 완원군파(完原君派) 완원대군파(完原大君派)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 완천대군파(完川大君派)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 용성대군파(龍城大君派) 운천군파(雲川君派) 월산대군파(月山大君派) 월평군파(月平君派) 은신군파(恩信君派) 은언군파(恩彦君派) 은전군파(恩全君派) 의안대군파(宜安大君派)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의창군파(義昌君派) 의평군파(義平君派) 이성군파(利城君派) 익령군파(益寧君派) 익안대군파(益安大君派) 익양군파(益陽君派) 익현군파(翼峴君派) 인성군파(仁城君派) 인성대군파(仁城大君派) 인평대군파(麟坪大君派) 인흥군파(仁興君派) 임성군파(任城君派) 임언군파(林堰君派) 임영대군파(臨瀛大君派) 임해군파(臨海君派) 장천군파(長川君派) 전성군파(全城君派) 정석군파(貞石君派) 제안대군파(齊安大君派) 종의군파(從義君派) 주부공파(主簿公派) 진남군파(鎭南君派) 진안대군파(鎭安大君派) 창원군파(昌原君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한남군파(漢南君派) 함령군파(함寧君派) 함령대군파(咸寧大君派) 함릉대군파(咸陵大君派) 함성대군파(咸城大君派) 함양대군파(咸陽大君派) 함원대군파(咸原大君派) 함창대군파(咸昌大君派) 함천대군파(咸川大君派) 해안군파(海安君派) 혜령군파(惠寧君派) 화의군파(和義君派) 회산군파(檜山君派)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후령군파(厚寧君派) 희령군파(熙寧君派)
[집성촌]
-경기도 연천군 중면 도연리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함경남도 북청군 거산면, 단천군 북두일면 -함북 길주군 덕산면, 장백면, 웅평면, 양사면
[본관지]
전라북도 전주시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379,537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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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주김(金) 1,523,468
경주김씨(慶州金氏) |
[유래]
경주김씨는
신라 왕실의 삼성(박,석,김) 가운데 하나다.
시조 김알지의 7세손인 미추왕(신라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경주김씨는
경순왕의 아들 9형제 중
셋째 아들인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 : 영분공파)과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 : 대안군파)을 1세조로 하는 계통이 대표적이며, 조상에 대한 계통은 확실하지 않으나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하는 김장유(金將有 : 판도판서공파), 김인관(金仁琯 : 태사공파), 김순웅(金順雄 : 대장군공파)을 1세조로 하는 계통 등
크게 5파로 갈라져 후대로 내려오면서
10여 개의 지파(支派)가 생겨났다. 그후 후손들이 번성함에 따라 현달한 인물이나 살고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분관되어 나갔다.
[가문의번영]
영분공파 파조인 김명종은
경순왕이 나라를 빼앗긴 후 고려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 김의진(金義珍)은 유학(儒學)의 종주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고,
12세손 김인경(金仁鏡)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고려의 명신으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시와 글씨로 명성을 떨쳤다. 김명종의 6세손 김예겸(金禮謙)이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김예겸의 손자 김의진(金義珍)은 고려 사학(私學) 12공도(公徒)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하였으며 문종 때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여 인재등용에 공헌하고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김의진의 증손자 김영고(金永固)는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을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며, 김영고의 아들 김인경(金仁鏡)은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고종 때 조충(趙沖)과 함께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을 세우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과 예서(隸書)로 명망이 높았다.
대안군파 파조인 김은열은
공부시랑(工部侍郞)을 거쳐 대안군에 봉군되고
그의 후손들이 여러 본관으로 분관되었다. 김은열의 8세손 김봉모(金鳳毛)는 외국어에 능하여 사신이 오면 관반사(館伴使 :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정3품 벼슬)로
천거되었으며
나라의 큰 일에는 항상 전례(典禮)의 일을 맡아보았다. 김봉모의 아들 김태서(金台瑞)는 고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특히 그의 아들 김약선(金若先 : 공부시랑), 김기손(金起孫 : 평장사), 김경손(金慶孫 : 추밀원 부사) 3형제가 유명했다.
판도판서공파 파조 김장유는 고려말에 정국이 혼란하자
충청도 보은 땅에 은둔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김장유의 후손에서는
정랑(正郞) 김효정(金孝貞)의 아들인 조선 중종 때의 명신 김정(金淨)이 뛰어났다.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중종 때에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하여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 서른 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한 일화가 "당적보(黨籍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나가 있을때 그의 옛 글벗인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이항(李沆)이 청탁편지를 부쳐왔다.
그 편지는 직함을 갖추어 쓰고 도장을 찍었으며
우정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서 하명하는 듯한 글투였다.
이에 김정은 거절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시를 써 넣었다. "서당에서 같이 배우고, 옥당에서 같이 있다가 남녘 시골로 흘러내린
병든 이 한 몸이라 천상에서 화려한 직함인 승지 이씨여
편지 쓸 즈음에 옛 벗 생각을 했는가." 이 시에 앙심을 품은 이항은 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김정의 죄를 추론하는데 앞장섰다.
그외에도 그가 제주도로 귀양가다가 해남 바닷가 노송 아래서
회포를 달래며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적은 시가 전하며,
36세로 사약을 받을 때 남긴 절명사(絶命詞)가 유명하다.
태사공파 파조 김인관은
고려 예종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에 올랐다. 김인관의 9세손 김자수(金自粹)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안고 안동에 은둔하였다. 그가 사사(賜死)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김세필(世弼)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옥중에서 입던 피묻은 옷을 가지고 나와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화를 당하여도 오히려 위에 성군(聖君)이 계셨기 때문에 다행히 살게 되었지만, 지금 임금께서는 나이가 겨우 십여 살이고 간신들이 꼭 너를 죽이려 하니, 네가 어찌 죽음을 면할 것이냐"하였다. 한편 김자수(金自粹)의 9세손 김홍익(金弘翼)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서 순절하였고,
아우 김홍욱(金弘郁)은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앞서 인조 때 사사(賜死)된 민희빈 강씨(姜氏)와 그녀의 어린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 친국(親鞠)중에 장사(杖死) 되었다. 김홍욱의 손자 김흥경(金興慶)은
영조 때의 상신(相臣)이었고,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金漢藎)은 영조 때의 부마(駙馬 :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이면서도 겨우 두 칸 집에 살면서 비단은 걸쳐 본 일도 없고 가마를 타는 법도 없이 청빈하게 살다가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인 이주를 양자로 삼았다. 참찬(參贊) 이주의 손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학문에 있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書藝)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켜
특히 예서와 행서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호장(戶長) 위영(魏英)의 증손 김부필(金富弼), 김부일(金富佾 : 수태위를 역임), 김부식(金富軾), 김부의(金富儀 : 지추밀원사를 역임)가 유명했다. 고려 문종과 의종대에 걸쳐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유명한 김부식(金富軾)은 인종이 즉위하자 왕실외척임을 빙자하여 권세를 쥐고 군신의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일삼던 이자겸(李資謙)의 방자함을 충고하여 이를 시정하게 하였고,
42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1145년(고려 인종 23년) 왕명을 받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완성하여 바치는 등 이름난 문장가(文章家)로
송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대장군파 파조 김순웅은 고려 초에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병판공파 파조 김덕재(金德載)는
김은열의 12세손으로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보좌공신(補佐功臣)에 책록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함경도 정평에서 은둔하였다.
장사랑공파 파조 김존일(金存一)은
김은열의 16세손으로 고려말에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이렇게 역사를 수놓은 경주김씨는
한말에 와서도 그 가통을 이어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고종 때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김영작(金永爵)의 아들 김홍집(金弘集)은 한말 외세와 개화의 틈에서 처참하게 희생당한 인물이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정집(金鼎集)의 아들 김창희(金昌熙)는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으며,
김철희(金喆熙)는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재직중 1885년(고종 22년) 황해도 토산에서 일어난 민란을 진압하여 승녕부 종장(承寧府從長)을 지낸 김춘희(金春熙)와 자산으로 도서관을 설립한 김인정(金仁貞),
중국 원세개(袁世凱 :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의 옥새를 새겼던
서예고문 김태석(金台錫),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를 개설한 김영제(金寧濟), 청성곡(淸聲曲)의 명수 김계선(金桂善)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김용원(金庸源)과 김도태(金道泰)는 조국의 자유수호와 광복을 위하여 몸바쳤다.
[계 파]
- 태사공파(太師公派) : 전서공파(典書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사승공파(司丞公派), 공평공파(恭平公派), 우재공파(愚齋公派), 송재공파(松齋公派) - 대안군파(大安君派) : 경파(京派), 백촌공파(白村公派), 병판공파(兵判公派), 부산파(釜山派), 성천파(成川派), 시랑공파(侍郞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예조판서공파(禮曺判書公派), 익화군파(益和君派), 차호공파(車胡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청원파(淸原派), 평창파(平昌派), 호정공파(昊亭公派) -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 감사공파(監司公派), 계림군파(鷄林君派), 공호공파(恭胡公派), 동지이판공파(同知吏判公派), 봉산파(鳳山派), 부제학공파(副堤學公派), 연동파(蓮洞派), 정수공파(貞肅公派), 춘고공파(春皐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만호공파(萬戶公派), 경재공파(敬齋公派), 망주헌고파(望主軒公派) -영분공파(永芬公派) : 강릉공파(江陵公派), 검교공파(檢校公派), 두계공파(杜溪公派), 밀직공파(密直公派), 병조판서공파(兵曺判書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수은공파(樹隱公派), 시어사공파(侍御使公派), 옥구참공파(沃溝參公派), 월성부원군파(月城府院君派), 참찬공파(參贊公派),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 감사공파(監司公派), 공조판서공파(工曺判書公派), 금제공파(金堤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식암공파(息菴公派), 장암공파(壯菴公派), 직장공파(直長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참교공파(參校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충암공파(沖菴公派)
[본관지]
경상북도 경주시
[기 타]
[ 연락처 ] 경주김씨대종친회 : 02)393-3429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523,468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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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주이(李) 1,217,279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 |
[유래]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은
박혁거세 탄생설화에 나오는 초기 신라의 6촌 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 : 급량부)의 촌장이다. 이알평은 신라의 좌명공신(左命功臣)으로 <경주이씨대종보>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왕이 된뒤 아찬(阿粲)에 올라 군사업무를 장악 했으며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양산촌 이씨로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 23년 익호(謚號)를 문선공(文宣公)으로 하였고,
무열왕 3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후손에 대한 계대가 전해지지 않아 이알평의 36세손이며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인
이거명(李居明)을 1세조로 하고 있다.
[가문의번영]
경주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다. 8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세칭 8별(鼈) 집으로 불리우는
익재공파와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경주이씨가 조선에 배출한 상신·문형 가운데 백사집에서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명,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고려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고려 때의 경주 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였다. 조선시대에는 8형제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8문장으로 꼽히는 박팽년의 사위인 이공린(李公麟)의 아들들과 임진왜란이 터지자 유성룡을 도와 병참 책임을 맡는 등 큰 활약을 한 이시발(李時發)을 비롯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 전후 정승에 올라 당쟁 을 막는데 힘쓴
조선시대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청백리에 올랐다. 근대 인물로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과
재계의 거목이었던 삼성그룹의 이병철회장이 있다.
[계 파]
경주이씨는 중시조 이거명의 17~21세손에서 크게 14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크고 작은 70여개 파로 분파된다. -평리공파(評理公派) : 16세손 이인정(李仁珽)을 파조로 한다. -이암공파(怡庵公派) : 17세손 이관(李琯)을 파조로 한다. -익재공파(益齋公派) : 17세손 이제현(李齊賢)을 파조로 한다. -호군공파(護軍公派) : 17세손 이지정(李之正)을 파조로 한다. -국당공파(菊堂公派) : 17세손 이천을 파조로 한다. -부정공파(副正公派) : 17세손 이매(李邁)를 파조로 한다. -상서공파(尙書公派) : 17세손 이과를 파조로 한다. -사인공파(舍人公派) : 17세손 이수(李蓚)를 파조로 한다. -판전공파(判典公派) : 15세손 이강을 파조로 한다. -월성군파(月城君派) : 21세손 이지수(李之秀)를 파조로 한다. -직장공파(直長公派) : 19세손 이양오(李養吾)를 파조로 한다. -석탄공파(石灘公派) : 19세손 이존오(李存吾)를 파조로 한다. -진사공파(進士公派) : 19세손 이양중(李養中)를 파조로 한다. -교감공파(校勘公派) : 19세손 이존사(李存斯)를 파조로 한다.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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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 |
- |
- |
- |
-영(榮) |
규(圭)- |
종(鍾)- |
우(雨) |
상(相)- |
-형(炯) -희(熙)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재(在)- |
-건(鍵) -호(鎬) |
준(濬)- 제(濟)- |
-동(東) |
심(心)- 병(丙)- |
-세(世) -교(敎) |
진(鎭)- |
-구(求) |
근(根)- |
-섭(燮) |
51세 |
52세 |
53세 |
54세 |
55세 |
56세 |
57세 |
58세 |
59세 |
60세 |
-준(埈) |
선(善)- |
-태(泰) |
모(模)- |
-현(炫) |
균(均)- |
-용(鎔) |
순(淳)- |
-병(秉) |
걸(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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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해안을 낀 이곳 야산 아래 경주이씨가 자리를 잡은 것은 4백여년 전이다. 익재공 이제현(益齋公 李齊賢)의 9대손인 호암공 이반기(湖巖公 李磻琦)가 정미사화(丁未史禍)를 피해 경기도 고양에서 이곳으로 터를 옮겼다. 현재 약 100여가구가 있다.
[가문의 문화유산]
익재영정 : 국보 제110 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고려시대의 문신, 학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 중국에 머물 때 원나라의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이 영정은 오늘날 고려시대의 희소한 유품으로 남아 있는데 원나라 때의 화풍을 전하는 중요자료이다.
[족보발간]
-갑자보 : 1684년(조선 숙종 10년) -무진보 : 1748년(조선 영조 24년) -갑술보 : 1814년(조선 순조 14년) -계유보 : 1873년(조선 고종 10년) -경인보 : 1890년(조선 고종 27년) -원주보 : 1929년 -경주보 : 1930년 -대구신미보 : 1931년 -대전보 : 1933년 -경보보 : 1918년 -대전보전보 : 1978년 -중앙표준보 : 1988년
[본관지]
경상북도 경주
[기 타]
[ 연락처 ] 종친회 : 02) 742-6250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217,279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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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주강(姜:진양) 941,087
강릉 |
경주 |
곡성 |
광주 |
금천 |
김해 |
나주 |
남양 |
대전 |
동래 |
밀양 |
백천 |
보주 |
보천 |
부산 |
불갑 |
성주 |
수산 |
수원 |
순흥 |
시흥 |
안동 |
여천 |
연일 |
원주 |
인동 |
전주 |
제주 |
진주(진양) |
충주 |
평양 |
해미 |
총 32개의 본관과 958,163명이 있다.(1985년)
진주강씨(晋州姜氏) |
[유래]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 도원수를 지내며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에 수문제가 침략할 야욕으로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왕은 군신을 모아 놓고
이에 회답할 것을 논의 할 때
그는 이와 같은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이 이에 수긍하고 싸울것을 명하자
군사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臨楡關)에서 수나라 군사 30만을 단번에 격퇴하고, 603년에 수양제가 군사 100만으로 다시 침략할 때 중신회의에서 요동성 일부를 떼어주고 강화할것을 논의 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싸울것을 주장하여 을지문덕과
함께 요동성 살수(청천강) 등의 싸움에서 수군을 대파하는 등
공을 많이 세웠다.
그의 후손인 강진이 진양(진주)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문헌상의 본관은 진주, 금천, 안동, 백천 등 9본이 있으나 모두가 대종인
진주강씨의 지파로서 현재 진주 단일본으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은 모든 강씨의 도시조가 된다. -강이식 묘소는 만주 봉길선 원수림역 앞에 있으며, 음력 4월 10일에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에서 제사를 지낸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에만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5명, 대제학 1명, 원수 및 장군 25명, 명신과 공신 51명, 문과급제자 227명, 청백리 7명을 배출해
가문이 번성하였다.
-박사공파(博士公派)
중시조 국자박사(國子博士) 강계용(姜啓庸)은
1274년(고려 원종 15년) 통신사서상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손자 강사첨(姜師瞻)의 5세손 중 첫째 아들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을 통정공파(通亭公派), 둘째 아들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을
통계공파(通溪公派)로 구분하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나왔다.
통정공파의 통정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에 올랐으며,
성리학에도 밝았다.
그의 아들 강석덕(姜碩德)은 세종의 둘째 부인 영빈강씨의 아버지로서 개성유수, 지돈령부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으며,
시와 글씨에 능했다.
강석덕의 아들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형제는 통정공파의 대표적 인물로 꼽는데, 강희안은 세종 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정인지,
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뒤에 단종복위에 연루되었으나
"참으로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그는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이라 불려질 정도로 이 방면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구손(姜龜孫)은
그의 아들이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강맹경(姜孟卿)은 강희안의 4촌 형이다.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 또한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世子賓客)이 되고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통계공파에서는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과 역시 선조 때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오르고 이조, 병조판서를 거쳐 중추원판사를 지낸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과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강인(姜絪) 형제가 빼어났다.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불리는 강홍립(姜弘立)도 강신의 아들이다.
특히 강인의 후손은 고종 때에 와서 강준흠(姜浚欽), 강시영(姜時永), 강문형(姜文馨), 강난형(姜蘭馨), 강우형(姜友馨), 강국형(國馨) 등 판서급 인물을 배출해서 명가로 꼽힌다. 이 밖에 인조 때 화포술(火砲術)을 전한 강홍중(姜弘重)이 있다.
-소감공파(少監公派)
중시조 강위용(姜渭庸)은 사도소감(司徒少監)을 지냈다. -시중공파(侍中公派) 강원용(姜遠庸)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
중시조 강민첨(姜民瞻)은
인헌공파의 파조 강감찬과 더불어 자주대첩의 전공으로
고려사에 크게 무훈을
세운 명장이다. 이 파에서는 특히 강백년(姜栢年), 강현, 강세황(姜世晃)의 3대와 강노(姜老)가 유명하다.
강백년은 조선 현종 때 관찰사, 예조판서,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는데,
문명(文名)이 높았다.
그의 아들 강현은 예조, 형조판서를 거쳐 좌찬성,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강현의 아들 강세황은 한성판윤과 각조 참판을 거쳤으며,
시서화(詩書畵)로 더 유명하였다. 강노는 강세황의 증손자로,
철종 때 대사간,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계파]
대표적 파는 박사공 삼형제파, 은열공파, 인헌공파인데,
각 파는 도시조 강이식으로부터 각 중시조까지의 계보가 확실하지 않아
족보를 같이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 중 박사공 삼형제파는
다시 박사공파,
소감공파, 시중공파로 구분되고, 최근에는 족보도 같이 만들고 있다.
3형제파가 진주강씨의 3대산맥으로 그 후손이 번성하여
1백만명을 헤아린다.
-박사공파(博士公派) : 강계용을 파조로 하며, 손자 강사첨(姜師瞻)이 어사를 지냈다 하여 어사공파(御史公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감공파(少監公派) : 강위용을 파조로 한다. -시중공파(侍中公派) : 강원용을 파조로 하며, 손자 원로(元老)가 관서대장군(關西大將軍)을 지냈다 하여 관서대장군공파로 부르기도 한다. -은열공파(殷烈公派) : 강민첨(시호는 은열공) 장군을 파조로 한다. -인헌공파(仁憲公派) : 강감찬(시호는 인헌공) 장군을 파조로 하며,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서울 금천구)이므로 금천강씨로도 부른다.
[집성촌]
강씨는 진주를 중심한 경남, 부산 지방에 가장 많이 살며,
그 다음이 전남, 경북, 전북 지방에서 많이 살고 있다.
진주시 비봉산 아래에 있는 봉곡부락에는 강씨의 번영의 설화를 담은 봉(鳳)바위가 있다. 고려때 영상서(領尙書)를 지낸 정절공(正節公) 강구만(姜九萬)의 집 뒤 대봉산 중턱에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가 기묘하게도 봉의 형상을 하고 있어 봉바위라 불렀는데, 어느날 강남도사(江南道士)가 이곳을 지나다 봉바위를 보고 "강씨의 대성함이 이 바위에 있다"고 점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대봉산 산중턱에 시조의 위업을 기리고 영정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봉산사(鳳山祠)가 있다.
[가문의고향]
경남 진주
[기타]
[ 연락처 ] 진주강씨중앙종회 : (02)779-0695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 때 941,087명이 있었다. |
7 경주최(崔) 876,729
최(崔)씨의 유래
경주최씨(慶州崔氏) |
[유래]
시조 최치원(崔致遠)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24세손이며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다. 최치원은 869년(신라 경문왕 9년) 12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간지 5년후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무랑시어사에 이르고 자금어의를 하사 받았으며, 제도행영 병마도총 고변의종사관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이 되었으나 외직을 원하여 대산, 천령, 부성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고 아손이 되었다. 그후 난세를 비관하여 전국을 유랑하다가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며 수도하다 63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 계파 ]
경주 최씨는 26파로 나뉘었는데 그중 아래의 6대파가 주축을 이룬다. -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 최청 - 광정공파(匡靖公派) : 최단 - 정랑공파(正郞公派) : 최호 - 사성공파(司成公派) : 최눌 - 화숙공파(和淑公派) : 최현우 - 충렬공파(忠烈公派) : 최광위
[ 대표적 인물 ]
- 최승로(承老) :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 최항(沆) : 고려 현종 때 평장사를 지냈다. - 최제우(濟愚) : 동학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 최시형(時亨) : 동학의 제2대 교주이다. - 최익현(益鉉) : 한말의 거유(巨儒)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쳤다. - 최준(浚) : 경주시 교동에서 '최부잣집'으로 이름났다. 이 '최부잣집'은 12대 만석(萬石), 10대 진사(進士)로 유명하다. 최씨는 조선시대에 와서는 퇴조를 보여 겨우 문과에 42명을 배출하였을 뿐 상신, 대제학 가운데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항렬표]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모(模) 규(圭) |
병(柄) 용(鎔) |
탁(鐸) 문(汶) |
래(來) 동(東) |
시(時) 선(先) |
용(鏞) 재(在) |
수(洙) 탁(鐸) |
39세 |
40세 |
4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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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根) 한(漢) |
하(夏) 민(敏) |
성(聲) 식(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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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876,729명이 있다.(1985년) |
8 파평윤(尹) 846,632
파평윤씨(坡平尹氏) |
[유래]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尹莘達)은 태조 왕건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서
태자를 교육시키는 태사삼중대광에 봉해졌다.
그의 5세손인 윤관(尹瓘, 1040~1111) 장군은 고려 문종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1107년(고려 예종3년)에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뒤 여진정벌에 나서 적 5천명을 죽이고 130명을 생포하는 등
북진정책을 완수한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경기도 파평(파주)에 있는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날 이 용연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지 사흘째 되는날,
윤온이라는 할머니가 연못 한 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금궤를 건져서 열어보니 한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체속에 누워있었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윤온 할머니는 이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으며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씨가 되었다.
잉어에 대한 전설은
윤신달의 5대손인 윤관의 일대기에도 또 나온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이번에는 장군의 뒤를 쫓던 적군이 뒤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윤관 장군에게 다리를 만들어 주었던 잉어떼는 어느틈에 흩어져 버리고 없어졌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 묘는 경북 영일군 기계면 봉계동에 있다.
[ 분파 ]
- 함안파 - 남원파 - 덕산군파 - 문정공파 - 신령공파 - 대언공파 - 양주파 - 봉록군파 - 판소공파 - 야성파 - 전의공파 - 소정공파 - 원평군파 - 소도공파 - 판도공파 - 소부공파 - 태위공파
[기타]
[인구] 46,632명이 있다.(1985년) 파평 윤씨 가계도, 가훈, 시조 이야기
-윤석빈님의 홈페이지- |
9 광산김(金) 750,701
광산김씨(光山金氏) |
[유래]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신무왕의 세째 아들이다.
그는 장차 국난이 있을것을 미리 알고
현재의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하여 그 후손들이 본관을 광산으로 하게 되었고 후손들 가운데 평장사가 계속 8명이 배출되자 사람들이 그곳을 평장동이라 불렀다.
[가문의번영]
10세손 김체의 아들 김위(金位)와 김주영(金珠永) 형제 대에서 크게 두갈래로 나뉘어져 김광세(金光世)와 김광존(金光存)의
양대산맥으로 이어진다.
김광세는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고 그의 아들 김경량(金鏡亮)이 대장군(大將軍)에 올랐고,
손자 김수(金須)는 삼별초의 난 때 순절하였으며, 김주정(金周鼎)은 고려 충렬왕 때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하였다. 김수의 손자인 김광재(金光載 : 문정공 김태현의 셋째 아들)는 공민왕 때 난정이 시작되자 두문불출하였으며 어머니가 죽자 무덤가에 여막(廬幕)을 짓고 거상(居喪)하니 왕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 곳에 영창방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는 정표(旌表)를 세우게 했다. 세종 때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김예몽(金禮蒙)의 아들 김성원(金性源)은 세조 때 동국여지승람(東國與之勝覽)을 편찬했고,
손자 김구(金絿)는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의 혁신정치에 동조한 소장파로 김정(金淨), 김식(金湜), 한충(韓忠) 등과 더불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졌으며 뛰어난 필법과 명문장으로 외교문서를 집필했고 그가 살던 인수방(仁壽坊)의 마을 이름을 붙여 인수체(仁壽體)란 필체가 생겨났다. 당적보(黨籍譜)에 의하면 김구(金絿)는 중국 사람들이 자기의 글씨를 귀중히 안다는 말을 듣고는 글씨를 쓰지 않아 세상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중종 때의
우의정(右議政) 김극성(金克成)은 30여 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경륜과 계책이 비상하여 조정에서 명성을 날렸다.
김광존의 인맥을 살펴보면
그의 현손 김진이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김진의 증손 김약채(金若采)에서부터 조선 시대의 명맥이 이어졌다.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한 김약채는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를 지냈고,
그의 동생 김약항(金若恒)은 공민왕 때 대사성(大司成)으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표문(表文)이 공손치 못하다고 하여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양자강변에 유배되었다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뒤에 황제의 노여움이 풀려 가족에게 시체를 찾아가라고 하여 늙은 여종이 부인이라고 핑계하고 남경까지 가서 시체를 찾아왔다. "용재총화"에 보면 김약항의 아들 김처(金處)는 아버지가 외국에서 죽었으므로 충격을 받아 미친병이 들어 소리내어 울고 밤에는
싯귀(詩句)를 길게 읊으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비틀거리고 다녔으며,
김허(金虛)는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고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상을 당하자 여막(廬幕) 벽에다가 효경(孝經)의 상친장(喪親章)을 써서 붙이고 날마다 바라보며 읽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이도록 울기를
3년동안 조금도 쉬지 않았으니
그 비참하게 우는 소리에 듣는 사람이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김약채의 증손자 김국광(金國光)은 성종 때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좌리일등공신(佐理一等功臣)으로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일찍이 황희(黃喜)가 그를 한번 보고 큰 인물로 인정하여 자기 손녀(孫女 : 소윤 황보 신의 딸)로서 아내로 삼아 주었고 "작게 성취할 사람은 아니다"하고 그를 대할 때 반드시 갓을 썼다고 한다. 세조가 상정국(詳定局)을 열어 당시의 학문이 뛰어난 신하를 뽑아 조종의 옛 제도를 참작하고 시대의 사정에 맞게 가려내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할 때 그도 뽑히어 뛰어난 업적을 남겨 세조가
"국광같은 사람은 참으로 문과 무 를 겸비한 재사이다" 하고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친필을 써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어느 날은 편전에 있으면서 손수 자기 밥을 떠 먹여 주었다고 한다.
김국광의 동생 김겸광(金謙光)은 성종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 하는 데
공을 세워 좌리삼등공신(佐理三等功臣)으로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김국광의 아들 김극뉴는 대사간(大司諫)을, 김극복(金克福)은
찬성(贊成)을 역임하였다. 김겸광의 아들 김극핍은 연산군 때 바른 말을 하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고산현(高山縣)으로 유배되었고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을 받아 일생을 귀양지에서 생활했었다. 김극뉴의 손자 김개(金鎧)는 명종 때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오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증손 김계휘(金繼輝)는 선조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에 능통하여 국사가 있을 때마다 자문에 응했다. 김계휘의 동생 김은휘(金殷輝)가 일찍이 초야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광해군이 세자로서 동궁에 거처하게 되자
세자빈의 아버지인 류자신(柳自新)이
궁중의 서헌(西軒)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러자 김은휘(金殷輝)는 그의 무례함을 논책하면서 왕봉(王鳳 : 한나라 성제의 외삼촌으로 정권을 잡아서 무례한 행동으로 임금의 거처인 궁정을 빌린 일이 있었다)의 고사에 비교하니 깜짝 놀라서 피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송익필(宋翼弼)이 아버지인 송사련(宋祀連)의 잘못으로
세론의 증오를 받아 멸문의 궁지에 몰리자
10년 동안이나 먹여 살려 선조의 잘못으로
누를 입는 현량(賢良)들을 그늘에서 구원하였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조선 예학(禮學)의 종주(宗主)로
가문에 명문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게 한 장본인이다.
1548년(명종 3년) 대사헌(大司憲)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에 8문장가로 이름난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석학(碩學) 이율곡(李栗谷)에게 성리학을 전수받아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영수가 되었다.
천성이 겸손하며 어질고 후하여 자연히 도(道)에 가깝고
학문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종자(種子)와 주자(朱子)를 법으로 삼아
세상살이의 화려함을 싫어하였으며 당시의 예(禮)에 관한 질문은 모두 그에게로 왔다. 인조반정 때 맨 먼저 장령(掌令)에 임명하면서 안거(安車 : 늙고 병든 사람이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수레)와 임금의 친서를 보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병든 몸으로 여러 훈신들에게 글을 보내기를 "시종(始終) 삼가하여 임금의 덕을 잘 보도하며 묵은 폐단을 개혁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사로이 가까운 내시, 궁녀 등을 경계하며 염치를 존중하고 검약을 몸소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의 글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지고,
임금이 그의 재능과 덕망을 정치에 이용하고 싶어 초조해 했다고 한다. 벼슬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그쳤으며
83세에 연산에서
생을 마치며 후손에게 다음 두 가지 유언을 남겼으니,
"첫째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말 것,
둘째 내 자손이 수십대에 이르더라도 의(誼)를 두터이 지낼 것" 이었다.
그가 남긴 "경서변의(經書辯疑)" 8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권, "가례집람(家禮集覽)" 3권, "상례비요(喪禮備要)" 1권 등총21권의 저서는 한국의 예전(禮典)으로 평가된다.
김장생의 예학은 아들 김집(金集)에게 이어지고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에게 전승되어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김집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남보다 특이하여 충신효제(忠信孝悌)로서 몸을 세우는 근본을 삼았으며, 이치를 탐구하고 경(敬)를 주장하는 것으로
도학의 터전을 삼았다. 1646년(인조 24년) 산적 류탁(柳濯) 등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들에게 류탁이 말하기를 "김승지(金丞旨 : 김집)의 집을 지나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흉악한 무리들도 어진 사람을 두려워 하고 피할 줄은 안다"하였다. 그는 아버지 김장생을 40여 년간 모셨는데
그 부자의 법도를 지켜 아들이 질문했을 때 아버지는 몸이 앓는 일이 있어도 단정히 앉아서 대답한 것이라든지, 각상(各床)과 각방(各房)에서 밥을 먹을 때 아버지의 젓가락 놓는 소리를 듣지 않고는
미리 밥상을 물리는 법이 없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부인 유씨(兪氏)의 성품이 분명하지 못하여
부부의 도리를 갖출 수가 없어
마침내 이율곡(李栗谷)의 서녀(庶女)를 얻어 첩을 삼았는데 어질고 여공(女工)을 잘하였다. 유씨 부인이 죽자 그의 아버지 김장생은 아들이 상처하였으니 후처를 얻어 아들을 낳아서 선대를 계승할 수 있겠다고 속으로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유씨)과 짝이 되어 평생동안 욕을 보았는데 이제 비록 다시 장가 든다고 하여도 꼭 먼저 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습니까?"
하며 대를 잇지 못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 김반(金槃: 김집의 동생)의 아들 김익희(金益熙)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화의를 반대했고 왕을 호위하여 남한산성에 가서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싸웠으며, 그의 동생 김익겸(金益兼)은 병자호란 때 어머니 서씨(徐氏)를 데리고 강에 들어가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기 직전에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남문에 올라가 자폭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숙종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의 주역인 김익훈(金益勳 : 김반의 아들로 김익겸의 동생)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정권을 다시 잡자 강계로 유배되었다. 현종 때의 예조참판(禮曹參判) 김익경(金益炅)은 죽은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다가 양성(陽城)으로 귀양갔다. 인경왕후(仁敬王后 : 숙종의 비)의 아버지인 김만기(金萬基)와 효자 김만중(金萬重)은 김익겸의 아들로서 형제가 나란히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명신이다.
특히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남을 평생의 한으로 삼고 홀어머니 윤씨(尹氏)의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밤낮으로 어머니와 얘기하며
동물 흉내와 어린이 흉내까지 내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남해의 유배지에서 쓴
한글소설 "구운몽(九雲夢)"은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란 내용으로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썼다고 한다.
그밖의 인물로는
중종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와 혼인하여 광천위(光川慰)에 봉해진 김인경(金仁慶)과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안동지방의 학문융성 창도자로 알려진 김언기(金彦璣)가 유명했고, 전적(典籍) 김세우(金世愚)의 아들 김규는 명종 때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의 명장 김덕령(金德齡)은
충절로 가문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이다. 그는 1567년(명종 22년) 광주 석지촌에서 김붕섭(金鵬燮)의 아들로 태어나 성리학의 대가인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귀(李貴)의 천거로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고 의병을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수차에 걸친 전쟁에 공을 세웠다. 그는 젊어서부터 뛰어난 용맹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일찍이 이귀(李貴)가 그를 천거하는 글에 "지혜는 공명과 같고 용맹은 관우보다 낫다"고 하였다. 1596년(선조 29년)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 : 당시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의 무고로
국문을 받다가 옥사했다.
그가 임전했을 때는 항상 철퇴 두개를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백근이나 되어 팔도에서 그를 신장(神將)이라 불렀고, 왜군들도 그의 용맹을 무척 두려워 했다고 한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의하면 왜장 기요마사(加藤淸正)는 그 명성을 듣고 몰래 화가를 보내어 그 얼굴을 그려다가 보고는 "참으로 훌륭한 장군이다"하고 항상 계엄하였고, 뒤에 김덕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술을 마시고 기뻐 날뛰면서
"이제 양호(兩湖)는 걱정이 없다"고 했다 한다.
임진왜란 때의 김만수(金萬壽), 김천수(金千壽), 김백수(金百壽), 김구수(金九壽) 4형제는 의병을 일으켜 유극량(劉克良)의 군대와 장단에서 합세하여 임진강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김광운(金光運)과 김두남(金斗南)은 진주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선조 때 대북의 지도자였던 김질간(金質幹 : 이조 참판을 역임)은 "동몽훈설(童蒙訓說)"을 저술한 김진우(金震羽), 호남 8문장의 한 사람인 김공선(金公善)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외 선조 때 포도시(葡萄詩)로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김영남(金潁南)과 숙종 때 예서에 능했고 "옥산유고(玉山遺稿)"를 남겼던 김우형(金宇亨 : 공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감)이 뛰어났으며, 김진(金搢)은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내고 볼모로 심양에 갔다가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진력했다. 영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한 김양택(金陽澤)은 부제학(副提學)과 대사성(大司成), 우의정을 거쳐 1776년(영조 52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김상복(金相福)은 영의정을
역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
한말에 와서는
금위대장(禁衛大將) 김기석(金箕錫)과 학문과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던 김지수(金志洙) 등이 가문의 맥을 이었고, 김재풍은 친러시아파 세력에 쥐어 허덕이는 국권을 회복하는데 앞장서서 한말 풍운에서 고절(古節)있는 대인(大人)으로 추앙받았다. 김익현(金翼鉉)의 아들인 김영덕(金永悳)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한말에
죽음으로써 한일합방을 반대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김영숙(金永肅)과 함께
명문 광산김씨를 더욱 빛냈다.
[계 파]
양간공파(良簡公派) 낭장공파(郎將公派) 문숙공파(文肅公派) 문정공파(文定公派) 사온직장공파(司온直長公派)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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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진(鎭)- |
-택(澤) |
상(相)- |
-기(箕) |
재(在)- |
-현(鉉) |
영(永)- |
-수(洙) |
용(容)- |
-중(中)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선(善)- |
-순(淳) |
동(東)- |
-환(煥) |
규(奎)- |
-용(鏞) |
연(淵)- |
-식(植) |
형(炯)- |
-곤(坤) |
51세 |
52세 |
53세 |
54세 |
55세 |
56세 |
57세 |
58세 |
59세 |
60세 |
수(銖)- |
-홍(洪) |
종(鍾)- |
-헌(憲) |
중(重)- |
-흠(欽) |
태(泰)- |
-걸(杰) |
- |
- |
| |
[본관지]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
[기 타]
[ 연락처 ] 광산회관 : 02)715-5800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750,701명이 있었다.
|
10 청주한(韓) 597,596
청주한씨(淸州韓氏) |
[유래]
시조 한란(태위공)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려고 그의 집앞을 지날 때
칼을 차고 나가 종군하여
삼한통합의 공을 세우고 삼중대광 문하태위가 되고
개국벽상공신에 서훈 되었다.
'한씨세보'에 의하면
한란은 기자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며
한씨는 기자의 31세손 준왕(고조선의 마지막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와 금마(현 익산)에 마한을 세우고 스스로 한왕이라 하고
위만에게 억류된 왕자 및 친족이 성을 한이라고 한것으로 보아
준왕 이전에 한씨로 하였다고 한다.
마한 말기의 원왕에게 세형제가 있었는데
마한이 망하자 우평은 고구려에서 태원 선우씨, 우성은 백제에서 행주 기씨, 우경은 신라에서 청주 한씨가 되었다고 한다. 시조 한란은 우경의 31세손인 한지원에게 한만, 한간, 한란, 한영
네 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셋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주 한씨에서 5세손 한후저는
평산 한씨, 6세 한원서는 한양 한씨, 8세손 한란경은 양주 한씨, 9세손 한연은 안변 한씨, 9세손 한자희는 면천 한씨, 9세손 희유는 가주 한씨, 10세손 한공서는 당진 한씨, 10세손 한이는 부안 한씨, 11세손 한유충은 대흥 한씨, 14세손 한진은 보안 한씨, 15세손 한돈은 금산 한씨로 되었으며, 9세손 한악의 후손인 한승정은 서원 한씨,
9세손 세영의 후손 중 한규지는
장단 한씨, 한익지는 함흥 한씨, 한혁지는 교하 한씨,
시조인 한란의 후손 한총례는 단주 한씨로 각각 분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한란의 아버지 우경의 후손으로 전하나 확실한 계대를 알 수없는 한우신(신평 한씨), 한세찬(탐진 한씨), 한종희(대구 한씨),
한예(곡산 한씨), 한세침(보령 한씨) 등을
1세 조상으로 하는 계통이 있으나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며 대부분 합본했다고 한다.
[기타]
[인구] 597,596명이 있다.(1985년)
[항렬자]
|
11 안동권(權) 558,574
안동권씨(安東權氏) |
[유래]
시조 권행(權幸)은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본래의 성은 김씨이다. 신라말 경애왕 때 신라가 극도로 부패하고 잇단 민란으로
국운이 기울어가자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입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한다. 이에 격분한 권행은 930년(경순왕 3년) 겨울
후백제의 견훤이 대군을 몰아
이 고을에 침입하여 고려 태조와 대치했을 때 이 고을 성주 김선평(신 안동김씨 시조), 그리고 이 곳 지도급 인사 장정필(안동장씨 시조)과 의논, 함께 향병을 모으고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군 병산(지금의 안동군 와룡면 서지리)에서
견훤의 8천 대병을 함몰시키고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고창은 후삼국의 전략상 중요지역이었으며,
병산에서 이들 세사람의 도움으로 승리함으로서
열세에 있던 태조 왕건이 우세해질 수 있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병산전투의 승리는 후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항복 등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준 싸움이었다. 김행의 공을 가상히 여긴 고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했다.(能炳機達權)"라며 권씨 성을 내리고 벼슬을 삼한벽상아부공신 삼중대광태사로 제수한 후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안동을 본관으로 하였다.
-시조 권행의 묘소는 경북 안동군 서후면 성곡리 천등산 능골에 있으며 향사는 매년 한식일과 10월 중에 한다.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시조 권행과 김선평, 장정필을 모시기 위해
983년(고려 성종 2년)에 세운 삼태사묘는
경북 안동시 북문동 24번지에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제향한다.
[가문의번영]
고려 개국과 함께 이땅에 뿌리를 내린 안동권씨는
무수한 인물들을 배출한다. 고려시대 추밀원부사을 지낸 권수평(權守平)은 고려사에 청빈한 관리의 표상으로 기록된 인물, 그의 아들 권위는 태자의 태사로 권씨가문 최초로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받은인물이며, 권수평의 증손이며 찬성사 권단의 아들인 권부(權溥)는 자신을 포함해 그의 아들 5형제와 그의 사위 3명이 모두 군(君)에 봉해져서
명성을 떨쳤다. 당대 9봉군(當代九封君)은 역사상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이
가문의 자랑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서면서 안동권씨는 3백5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찬란한 꽃을 피운다.
[계 파]
[ 전체 계보도 보기 ] -검교공파 : 권척을 파조로 한다. -광석공파 : 권대의를 파조로 한다. -군기감공파 : 군기감을 지낸 권사발을 파조로 한다. -동정공파 : 고려 호장동정을 지낸 권체달을 파조로 한다. -별장공파 : 고려 별장을 지낸 권영정을 파조로 한다. -복야공파 : 고려 상서좌복야 상장군을 지낸 권수홍을 파조로 한다. -부정공파 : 고려 식록부정을 지낸 권통의를 파조로 한다. -부호장공파 : 고려 때 부호장을 지낸 권시중을 파조로 한다. -수중공파(종파) : 권수중을 파조로 한다. -시중공파 : 고려 시중을 지낸 권인가를 파조로 한다. -좌윤공파 : 고려 호장좌윤을 지낸 권지정을 파조로 한다. -중윤공파 : 고려 호장중윤을 지낸 권숙원을 파조로 한다. -호장추공파 : 고려 호장을 지낸 권추를 파조로 한다. -추밀공파 : 추밀원부사 권수평을 파조로 한다. -급사중공파 : 권형윤을 파조로 한다.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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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병(丙)- |
중(重)- |
태(泰)- |
영(寧)- |
오(五)- |
혁(赫)- |
순(純)- |
용(容)- |
구(九)- |
승(升)-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일(一) |
-원(元) |
-전(全) |
-택(澤) |
-서(書) |
-명(溟) |
-칠(七) |
-준(駿) |
-욱(旭) |
-갑(甲) |
51세 |
52세 |
53세 |
54세 |
55세 |
56세 |
57세 |
58세 |
59세 |
60세 |
의(懿)- |
항(恒)- |
옥(玉)- |
덕(德)- |
조(肇)- |
경(京)- |
세(世)- |
팔(八)- |
집(執)- |
구(求)- |
| |
[집성촌]
-경북 안동시 법상동 -경북 안동군 와룡면 이하동 -경북 안동군 북후면 연곡동 -경북 안동군 풍천면 가곡동 -경북 청송군 진보면 광덕동 -경북 월성군 양북면 구길리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저곡리 -경북 영주시 영주동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족보발간]
-성화보 : 1476년(조선 성종 7년).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이다. -을사보 : 1604년(조선 선조 38년) -갑오보 : 1654년(조선 효종 5년) -신사보 : 1701년(조선 숙종 27년) -갑인보 : 1734년(조선 영조 10년) -후갑인보 : 1794년(조선 정조 18년) -정미보 : 1907년(조선 순조 1년) -신축보 : 1961년
[본관지]
경상북도 안동
[기 타]
[ 연락처 ] 안동권씨중앙종친회 : 02) 735-2833, 737-0992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 때 558,574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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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인동장(張) 538,803
인동, 옥산장씨(仁同, 玉山張氏) |
[유래]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장정필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 때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옥산에서 살면서 본관을 옥산으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말에 옥산이 인동으로 바뀌어 인동 장씨로 하였으나
일부는 옥산을 본관으로 고집하며 사용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 장(顯光) :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당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서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장득만(得萬) : 인물화가로서 세조의 영정을 그렸다. - 장태수(泰秀) : 근세 인물로 순국지사이다. - 장지연(志淵) : 우국 언론인이다.
[기타]
[인구] 인동장씨 538,803명, 옥산장씨 2,024명이 있다.(1985년)
[계파]
- 종 파 - 황 파 - 청주파 - 울진파 - 양양파 - 진평파 - 진가파 - 남산파 - 경 파 - 김구파 - 고흥파 - 청안파 - 영광파 - 함평파 - 흥해파 - 화순파 - 문숙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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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평산신(申) 460,238
평산신씨(平山申氏) |
[유래]
시조 신숭겸(申崇謙)의 원래이름은 삼능산(三能山)이며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궁예가 세운 나라인 태봉의 기장으로 있다가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동료 기장이었던 복지겸, 배현경,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추출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한 개국원훈대장군으로
'고려사'에 고려 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루는 왕건이 장군들과 평주(평산)에 사냥을 나가는 도중에
기러기 세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서 맞힐 수있는가?" 하고 물으니 신숭겸이 자신이 맞추겠다고 하며
"몇번째 기러기를 맞출까요?" 하며
물어보자 세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추라고 하자 날아가는
세번째 기러기의 왼쪽날개를 맞추어서 떨어뜨렸다.
태조가 탄복하고 근처 땅 300결을 하사하고
함께 본관을 평산으로 삼게했다.
927년(태조 10년) 대구 공산동 전투에서 견훤에게 포위되어 전세가 위급하자 태조와 용모가 비슷한 그는 태조를 피신케하고 대신 어차를 타고 출전하여 전사 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그의 유해를 춘천에 예를 올려
장사지내고 공신으로 추봉하고 시호를 장절이라고 했다. 1120년(고려 예종 15년) 예종이 신숭겸과 김락을 추모하여
'도이장가'를 지었다.
- 묘소는 강원도 춘성군 서면 방동리에 있고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한다.
[기타]
[인구] 460,238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평산신씨 1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균(均) 규(圭) 노(老) 곤(坤) |
현(鉉) 언(彦) 윤(允) 종(鍾) |
철(澈) 식(湜) 순(淳) 영(泳) |
동(東) 상(相) 영(榮) 주(柱) |
섭(燮) 용(容) 항(恒) 환(煥) |
재(載) 숙(璹) 기(基) 배(培) |
호(鎬) 진(鎭) 일(鎰) 련(鍊)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제(濟) 준(濬) 원(源) 홍(洪) |
근(根) 화(和) 병(秉) 집(集) |
성(性) 충(忠) 찬(燦) 덕(德) |
용(用) 익(翼) 중(重) 식(軾) |
원(元) 완(完) 극(棘) 욱(旭) |
필(弼) 우(雨) 남(南) 설(卨) |
단(段) 승(承) 제(齊) 녕(寧)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51세 |
|
무(武) 빈(斌) 성(成) 무(茂) |
홍(弘) 세(世) 경(卿) 기(起) |
염(廉) 용(庸) 경(慶) 강(康) |
재(宰) 화(華) 상(常) 행(幸) |
정(廷) 승(升) 연(延) 성(聖) |
규(揆) 등(登) 계(癸) 봉(奉) |
| |
14 금녕김(金) 424,323
김녕김씨(金寧金氏) |
[유래]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김녕으로 하여 오다가
고려말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본관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 계통의 김해김씨와 혼돈되므로
김해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김씨는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후손들이 구분을 확실히 하지 못하자
1865년(고종 2년)에 김녕으로 확정하였다.
[가문의번영]
김시흥의 증손자 김중원(金重源)이
고려 시대에 안렴사(按廉使)를 거쳐 형부시랑(形部侍郞)을 지내고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특히 그는 고려가 망하자 개탄하여 단식을 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공양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김광저(金光儲 : 김중원의 손자)는 무록산(武鹿山)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충절로 절의를 지켰는데,
태종이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내려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한편 김광저(金光儲)의 아들 김순(金順)도
고려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호를 퇴휴당(退休堂)이라 하고 충북 옥천의 백지리에 정자를 짓고 망국의 한을 달랬으며, 분성군(盆城君) 김정갑(金挺甲)의 아들 김질(金秩)은 태조가 등극전의 정의(情)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 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아산 도고산에 은둔 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자호(自號)를 송암(松菴)이라 하였다. 이조판서 김관(金觀)의 아들 김문기(金文起)는
1399년(정종 1년) 2월 16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여 세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했으며,
계유정난 때 이조판서로 내외종간(內外從間)인 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다가
1456년(세조 2년) 6월 8일 사육신과 함께 순절했다. 거창과 양지현감(陽知縣監)을 거쳐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한 김현석(金玄錫)도 아버지인 김문기를 따라 순절하였고, 김문기의 손자 김충주(金忠柱)와 증손 김현남(金玄南), 5세손 김약전(金約前) 등이 모두
충효로 가문을 빛내어
"5세충효(五世忠孝)"의 정문이 세워졌다. 한편 김준(金遵)은 천문, 지리와 실학에 능통 한 인물로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3년간 복상을 한 후 벼슬을 버리고
전남 고흥으로 내려가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판서(判書) 김복룡(金福龍)의 아들 김응수(金應壽)가 형제들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랐으며,
담양부사(潭陽府使) 김언공(金彦恭)은 권율(權慄)의 영천 전투와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노량대첩(露粱大捷)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 노모를 등에 업고 팔공산 전투에서 공응 세운 김유부(金有富)와 그의 아들 김기남(金起南), 김난생(金蘭生) 형제는 병자호란에 순절하여 김준걸(金俊傑 : 선조 때의 공신), 김득성(金得誠), 김영길(金永吉 : 선전관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
부자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김진행(金鎭行)은 효행으로 정표(旌表)를 받아
충과 효의 전통을 이어왔다.
[계 파]
대사성공지파(大司成公智派) 도순찰사공문제파(都巡察使公文齊派) 만은공길상파(晩隱公吉祥派) 상서공문희파(尙書公文熙派) 송암공질파(松菴公秩派) 영돈영공준파(領敦寧公遵派) 진주목사공형파(晋州牧使公□派) 충경공경세파(忠敬公景世派) 충의공문기파(忠毅公文起派) 충정공준영파(忠貞公俊榮派)
[본관지]
경상남도 김해의 옛 지명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424,323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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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순흥안(安) 417,591
순흥안씨(順興安氏) |
[유래]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고려시대에 보승별장을 지냈으며
흥년(순흥)현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순흥으로 하였고
첫째 아들 안영유를 1파,
둘째 아들 안영인을 2파,
셋째 아들 안영화를 3파로 나누었다.
- 시조 자미의 묘는 경북 영주군 순흥면에 있었으나 없어지고
제단을 설치하여 매년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기타]
[인구] 417,591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병(柄) 상(相) 동(東) |
찬(燦) 혁(爀) 엽(燁) |
효(孝) 중(重) 길(吉) |
현(鉉) 전(銓) 용(鏞) |
태(泰) 준(準) 홍(洪) |
근(根) 주(柱) 정(楨) |
성(性) 항(恒) 제(悌)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균(均) 기(基) 수(壽) |
회(會) 령(令) 염(念) |
영(泳) 택(澤) 영(永) |
만(萬) 화(華)
|
원(愿) 우(愚) 덕(德) |
재(宰) 기(起) 규(奎) |
진(鎭) 수(銖) 련(鍊)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
해(海) 한(漢) 호(浩) |
집(集) 당(棠) 간(幹) |
용(容) 광(光) 형(亨) |
주(周) 주(疇) 곤(坤) |
흠(欽) 련(鍊) 철(鐵) |
준(濬) 원(源) 윤(潤) |
|
|
16 동래정(鄭) 414,782
동래정씨(東萊鄭氏) |
[유래]
동래정씨는 신라의 6부촌장 가운데 자산진부 촌장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이다. 시조는 신라 때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기록이 없는데다
그의 후손으로 고려 때 보윤호장을 지낸 정지원(鄭之遠) 역시 그 이후의 혈연계보가 불확실해 정지원을 1세로 하고
그후 안일호장을 지낸 정문도(鄭文道)를 중시조로 한다. 현재의 부산 동래를 세거지로 삼은 까닭에 동래를 본관으로 쓰게 됐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에 상신 17명, 대제학 2명, 호당(湖堂) 6명, 공신 4명,
판서 20여명과 문과 급제 1백98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그중에서도 14세손 정난종(鄭蘭宗)에 이르러 동래 정씨는 명문의 반석을 더욱 굳혔다.
성리학자인 그는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성종 14년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외교가로도 수완을 보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원각사비 글씨는 바로 그의 솜씨다.
그의 네아들 중 정광필(鄭光弼)은 중종때 영의정에 오르고
당시에 어진 정승으로 추앙된 인물이다.
그의 손자 정유길은 대제학, 좌의정을 지냈으며
정유길의 자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일제침략의 난세 속에서 5천년간 이어온 조선의 얼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그는 금세기 정씨가문에 또 하나의 산맥을 이룬다.
유학자이자 사학자인 그는 해방 이전에는 연희전문(연세대), 이화여전(이화여대) 등에서 국문학을 강의했고. 시대일보,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국학 발굴에 힘썼다.
그는 1892년 서울토박이로 태어나 한때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을 왕래하며 상해에서 항일독립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해방후 초대 감찰 위원장을 지내며 저술활동에도 힘을써 <조선사연구>, <양명학연표> 등의 저술을 남겼다.
[계 파]
교서랑공보파(校書郞公輔派) 첨사공필파(詹事公弼派)
[집성촌]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소가 누워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고 있는 형세라 해서 와우망월산. 이 산의 이름을 따 우망(牛望)골이라 했던 것을 고종때에 음이 같은 글자를 따 근심을 잊고 사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우망골(憂忘)로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 전체 170여가구 중 160가구가 모두 동래정씨로 27세손부터 34세손까지 8대 한 핏줄이 모여산다. 처음에는 경북 안동군 구담리에 살다 성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12세손 정균령(鄭龜齡)이 자손이 번창할 곳이 못된다 하여 약 2백40년 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또한 이 마을은 왜가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본관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414,782명이 있었다.
|
17 달성서(徐) 398,343
달성서씨(達城徐氏) |
[유래]
시조 서진(徐晋)의 출생년도는
대략 서기 1260년에서 1280년 사이로 추정되며,
부인은 초계 주(周)씨였다. 고려 때 봉익대부 판도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공을 세워 달성군에 봉해지고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이천 서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달성으로 하였다.
- 묘소는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에 있다.
[기타]
[인구] 398,343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열(烈)
|
규(圭) 곤(坤) 규(奎) |
진(鎭) 석(錫) 현(鉉) |
수(洙) 영(泳) 윤(潤) |
상(相) 동(東) 춘(春) |
교(敎) 병(丙) 병(炳) |
보(輔) 정(廷) 규(圭)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
|
|
덕(德) |
(水)변 |
(木)변 |
(火)변 |
|
|
| |
18 구안동김(金) 398,240
구 안동김씨(安東金氏) |
[유래]
시조 김숙승(金叔承)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둘째 아들로 공부시랑, 평장사를 지냈다.
중시조(1세) 김방경(金方慶, 충렬공)은 경순왕의 9세손으로 고려 원종 때의 명장으로 삼별초와 왜구를 섬멸하여 정란정국공신으로 벼슬이 시중,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판전리사사, 도원수에 이르고 상락군에 봉해졌다.
- 김방경의 향사는 음력 10월 9일에 한다.
[계 파]
김방경의 6세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 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다. - 제학공파(提學公派) : 김익달(益達) -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 김사렴(士廉) - 의익원공파(翼元公派) : 김사형(士衡) - 조선개국 1등공신. 태종때 좌정승에 올랐다. - 군사공파(郡事公派:) : 김칠양(七陽) -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 김구용(九容) - 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 : 김구정(九鼎) - 밀직사사공파(密直司事公派) - 개성윤공파 - 전서공파 - 복야공파(僕射公) - 안정공파 - 대호군공파
[ 대표적 인물 ]
- 김선 : 김방경의 아들.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를 지냈다. - 김흔 : 김방경의 아들. 찬성사를 지냈다. - 김순(恂): 김방경의 아들. 삼사판사(三司判事)를 지냈다. - 김윤(倫): 김방경의 아들.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를 지냈다. - 김승용(承用) : 김선의 아들. 대제학을 지냈다. - 김승택(承澤) : 평장사를 지냈다. - 김영돈(永暾) : 유명한 무장(武將)이다. - 김영후(永煦) : 우정승을 지내고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 김질 : 좌의정을 지냈다. - 김수동(壽童) : 영의정을 지냈다. - 김찬(瓚) : 이조판서를 지냈다. - 김자점(自點) : 인조 때 영의정으로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구안동의 세는 꺾이게 되었다. - 김제갑(悌甲) : 원주목사로 임진왜란 때 순절했다. - 김시양(時讓) : 판서를 지낸 청백리이다. - 김휘(徽) : 김시양의 아들. 이조판서를 지냈다. - 김득신(得臣) : 숙종 때의 시인이며 참판을 지냈다. - 김응하(應河) : 무장(武將)으로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 김응해(應海) : 김응하의 동생. 훈련대장을 지냈다. - 김중기(重器) : 훈련대장을 지냈다. - 김구(九) : 백범(白凡). 독립운동가, 정치가. 3.1운동후 중국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 내무총장을 지냈으며, 1928년에 항국독립당을 결성했다. 1940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되었으며, 해방되자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여 독립당 당수 등으로 있다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 족보 발행 ]
- 경진보 : 1580년(조선 선조 13년) - 기미보 : 1739년(조선 영조 15년) - 무술보 : 1778년(조선 정조 2년) - 을유보 : 1825년(조선 순조 25년) - 임인보 : 1902년(조선 고종 6년) - 을해보 : 1935년 - 기미보 : 1979년
[항렬표]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원(源) |
영(榮)- |
-묵(默) |
재(在)- |
-회(會) |
태(泰)- |
-식(植)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용(容)- |
-교(敎) |
종(鍾)- |
-우(雨) |
병(秉)- |
-희(熙) |
기(基)-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현(鉉) |
수(洙)- |
-동(東) |
연(然)- |
-혁(赫) |
진(鎭)- |
-영(泳)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근(根)- |
-병(炳) |
효(孝)- |
-용(鏞) |
택(澤)- |
-목(穆) |
희(熹)-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규(圭) |
련(鍊)- |
-준(浚) |
|
|
|
|
[기타]
[인구] 398,240명이 있다.(1985년) |
19 남양홍(洪:당홍) 382,077
남양홍씨(南陽 洪氏) - 당홍계(唐洪系) |
[유래]
시조 홍천하는
고구려 27대 왕인 영유왕때 중국 당나라에서 8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학과 문화를 혁신시켰다.
신라 27대왕인 선덕여왕때 유학의 발전에 공을세워
당성(남양)백에 봉해졌고
태자태사가 되었으며 본관을 당성으로 하였다.
당성이 후에 남양으로 지명이 바뀌어 본관을 남양으로 하고있다. 그리고 고려 개국공신며 삼중대광태사인 홍은열을 중시조로 1세 조상으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홍은열은 원래 이름이 홍유(儒)이었는데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태조가 '은(殷)나라 부열(傅說 : 중국 은나라 고종 때의 명재상)과 같다.'며 이름을 은열로 하사 했다고 한다. 회인 홍씨도 후에 합본하였다고 한다.
[ 대표적 인물 ]
- 홍처량(處亮) :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 - 홍명원(命元) : 인조 때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 홍계희(啓禧) : 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 홍명하(命夏) :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다.
[기타]
[인구] 382,077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병(秉 )
|
섭(燮)
|
재(在)
|
종(鍾)
|
순(淳)
|
표(杓) 식(植) |
성(性) 지(志)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기(基) 의(義) |
석(錫 ) 진(鎭) |
택(澤) 락(洛) |
근(根) 주(柱) |
환(煥) 희(熙) |
시(時) 중(重) |
용(鎔) 수(銖)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연(演) 홍(洪) |
영(榮) 동(東) |
사(思) 연(然) |
균(均) 철(喆) |
경(庚) 상(商) |
태(泰) 구(求) |
정(禎) 락(樂) |
50세 |
51세 |
52세 |
53세 |
54세 |
55세 |
56세 |
형(炯) 욱(煜) |
요(堯) 혁(赫) |
호(鎬) 련(連) |
수(洙) 용(溶) |
모(模) 환(桓) |
찬(燦) 훤(煊) |
증(增) 배(培) |
57세 |
58세 |
59세 |
|
|
|
|
옥(屋) 선(銑) |
윤(潤 ) 준(準) |
련( ?) 백(栢) |
|
|
|
| |
20 해주오(吳) 377,005
해주오씨(海州吳氏) |
[유래]
시조 오현보는 도시조 오첨의 24세손이다.
오현보는 1216년(고려 고종 3년)에 계단을 토평한 공으로
해주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본관을 해주으로 하고 오현보를 시조로 하였다.
그러나 고려 때에 검교군기감을 지낸 오인유를 1세조상으로 하고 있다.
[기타]
[인구] 377,005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영(泳) |
근(根) |
환(煥) |
세(世) |
석(錫) |
택(澤) |
식(植)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병(炳) |
기(基) |
진(鎭) |
원(源) |
주(柱) |
열(烈) |
균(均) |
38세 |
|
|
|
|
|
|
종(鍾) |
|
|
|
|
|
| |
21 남평문(文) 343,655
남평문씨(南平文氏) |
[유래]
시조 문다성은 신라 자비왕(20대)때의 사람으로
문다성의 출생에 대한 전설이 전해 온다.
남평현(전남 나주군 남평면)에 장자지라는 연못가에 큰 바위가 있다.
472년(신라 자비왕 15년) 2월에 군주가 바위 아래에서 놀고 있는데
그 바위 위에서 오색기운이 감돌면서 갓난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올라가 보니 돌로된 함안에 피부가 백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 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군주가 데려다 키웠는데 5살에 글을 저절로 깨우치고
무략이 뛰어나며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등 총기가 있어
성을 문이라고 하고 이름을 다성 이라고 했다(돌로된 함에 '문'자가 새겨져있어 성을 문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그후 500년(지증왕1년)에 중시아랑이 되고, 540년(진흥왕1년)에 대국사, 577년 (진지왕2년)에 대아랑 대국사가 되었다. 지금도
나주군 남평면에 장자지라는 연못과 6미터쯤되는 바위가 있고 바위위에 '문암,이라는 비석을 세워 놓아 문씨 시조의 탄생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장자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기타]
[시조의 묘소] 전남 나주군 남평면 덕용산 능사동에 있었으나 없어졌다. [향사] 장자못가에 있는 장연서원에서 매년 음력 9월에 향사한다.
[인구] 343,655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호(鎬) 현(鉉) 흠(欽) |
제(濟) 승(承) 홍(鴻) |
식(植) 모(模) 상(相) |
희(熙) 형(炯) 병(炳) |
주(周) 기(基) 균(均) |
종(鍾) 용(鎔) 동(?) |
영(泳) 수(洙) 흡(洽)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
동(東) 학(學) 환(桓) |
노(魯) 섭(燮) 훈(勳) |
재(在) 시(時) 규(圭) |
선(銑) 일(鎰) 석(錫) |
택(澤) 태(泰) 해(海) |
표(杓) 근(根) 목(穆) |
| |
22 전주최(崔) 342,849
최(崔)씨의 유래
전주최씨(全州崔氏) |
[유래]
전주 최씨는 시조를 각각 다르게 하는 4계통이 있다.
- 최순작 계통
시조 최순작(崔純爵, 시호는 문열)은 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으로 완주(현 전주) 개국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최순작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전주로 하였다.
- 최균 계통
시조 최균(崔均)은 최치원의 지손으로 고려 때 동북로도지휘사가 되어
조이총의 난 때 순절하고 완산군에 추봉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최균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전주로 하였다.
- 최군옥 계통
시조 최군옥(崔群玉. 시호는 문충)은 동주 최씨의 시조 최준옹의
후손으로
고려 때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완산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전주로 하였다.
- 최아 계통
시조 최아(崔阿)는 최순작의 7세손이다
[ 대표적 인물 ]
- 최명길(鳴吉) : 그는 인조반정 때 1등공신으로 대제학,
영의정을 역임했다. - 최석정(錫鼎) : 최명길의 아들. 숙종 때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당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6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 최석항(錫恒) : 최명길의 아들. 경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 최양(瀁) : 최군옥의 후손. 고려 말기의 절신(節臣)으로 '두문동(杜門洞) 72현록(賢錄)'에도 들어 있다.
[항렬표]
최순작계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진(鎭) |
철(澈) |
식(植) |
병(秉) |
규(奎) |
종(鍾) |
락(洛)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동(東) |
섭(燮) |
원(遠) |
호(鎬) |
승(承) |
근(根) |
용(容)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
교(敎) |
선(善) |
수(洙) |
상(相) |
양(陽) |
용(用) |
|
최균계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종(鍾) |
순(淳) |
병(秉) |
섭(燮) |
규(奎) |
진(鎭) |
원(源)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식(植) |
병(炳) |
익(翼) |
석(錫) |
영(永) |
수(秀) |
열(烈)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
선(善) |
현(鉉) |
승(承) |
동(東) |
형(炯) |
기(基) |
|
최군옥계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식(植) |
병(炳) |
규(奎) |
용(鎔) |
한(漢) |
환(桓) |
섭(燮)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
주(周) |
호(鎬) |
해(海) |
동(東) |
희(熹) |
균(均) |
|
최아 계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홍(洪) |
병(秉) |
열(烈) |
규(圭) |
호(鎬) |
락(洛) |
임(林)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
|
연(然) |
철(喆) |
용(鎔) |
준(準) |
종(種) |
|
|
[기타]
- 342,849명이 있다.(1985년) |
23 제주고(高) 317,967
강릉 |
강화 |
경주 |
고령 |
고성 |
고창 |
고흥 |
광주 |
김해 |
남양 |
대전 |
상당 |
연주 |
영월 |
영천 |
장성 |
장안 |
장택 |
전주 |
제주 |
진주 |
창평 |
충주 |
토산 |
해주 |
홍성 |
|
|
|
|
|
|
총 26개의 본관과 384,012명이 있다.(1985년)
제주 고씨(濟州 高氏) |
[유래]
고씨는 양(梁)씨, 부(夫)씨와 함께 탐라(제주)의 지배씨족으로서,
이들 세성의 시조 탄생에 대하여 삼성혈의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제주도에는 본래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인(양을라, 고을라, 부을라)이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에서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들 삼신은 짐승을 사냥해서 살았는데
어느날 동쪽으로부터 상자 하나가 바다로 떠내려와서 열어보니 그 속에는 세명의 미녀와 곡식의 씨앗,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삼신이 세명의 미녀를 각각 배필로 맞아
목축과 농사를 지어 살았다고 한다.
그중 고을라가 제주고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본관을 제주로 하였다.
후에 고을라의 45세손인 말로(제주), 말로의 증손자 공익(청주),
말로의 증손자 령신(개성), 말로의 10세손 복림(장흥),
말로의 후손 종필(연안), 말로의 16세손 응섭(안동)을 중시조로 하는 등
15개의 본관으로 나뉘었는데 같은 혈손이라며 다시 합본하여
고을라를 시조로하고 본관을 제주로 하여
'제주고씨 중앙종문회'를 만들었다.
[기타]
[합본 고씨] 개성, 고봉(고양), 금화, 담양, 안동, 연안, 옥강, 용담, 의령, 장흥, 제주, 청주, 회령, 횡성 등
[인구] 제주 고씨만 317,967명이 있다.(1985년)
|
24 경주정(鄭) 300,731
경주정씨(慶州鄭氏) |
[유래]
시조 지백호(智伯虎)는 신라 초기 6부 가운데
진지촌(珍支村)의 촌장이다.
시조(중시조) 문정공 정진원(鄭珍原)은 지백호의 42대 손으로
고려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장사(平章事) 등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월성(경주의 옛이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경주정씨가 전체 정씨(鄭氏)의 큰집 격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소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로곡리에 있으며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한다.
[가문의번영]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정극온(鄭,정이기(부마), 정현영(鄭玄英. 호부상서), 정휘(鄭暉. 문하평리)) 등이 고려사에 올라있다.
정휘의 아들인 양경공(良景公) 정희계는 이성계의 조선개국에 참여, 조선이 들어서자 개국공신 1등으로 봉해지고
좌참찬,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 들어
경주정씨는 15명의 문과급제자 30명의 무과급제자를 배출했다. 정희계(鄭熙啓)가 잘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전사한 정발(鄭撥)은 정희계의 5대 손인 군수 정명선(鄭明善)의 아들이다. 이 밖에 세종 때 좌찬성이 추증된 정지년(鄭知年),
명종 때 성리학의 대가 정지운(鄭之雲)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벽두에 장렬하게 전사한 유명한 흑의장군 정발(鄭撥)은
25살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 훈련원부정을 역임. 임진왜란이 나기 직전에 부산진 첨절제사가 되었는데, 그해 4월 왜군이 처음으로 부산에 상륙하자 다른 장수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그는 끝까지 분전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항상 검은 군복을 입고 진두에 나서 군민을 지휘하는 장군의 모습에 왜병들이 "흑의장군"의 명칭을 붙였다.
장군의 용전사실은 왜란이 끝난 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황신(黃愼)이 왜군 平調信(평조신)으로부터 무용을 극찬하는 회고담을 듣고 돌아와 조정에 알려져
뒤늦게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사당 충렬사(忠烈祠 : 부산 동래구 안락동)을 지어 배향했다.
[집성촌]
전남 승주군 주암면 선산리. 마늘모양으로 생긴 마을뒷산의 이름을 따서
산산리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정씨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임진왜란 직후에 정광형(鄭光亨)이 순천에서 옮겨 오면서 부터이다. 이후 3 백50여년 동안 한때는 60여가구의 마을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외지로 이주했다. 정광형의 2 대조 정빈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에 자진해서 쌀을 보내, 전쟁을 도왔고 정빈의 삼촌 정사립(鄭思立)등도
순천지방에 몰려온 왜군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싸워 공을 세웠다.
이충무공의 난중일기에도 이들의 무공이 기록돼어 전해진다.
[본관지]
경상북도 경주시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300,731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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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창녕조(曺) 299,642
창녕조씨(曺氏) |
[유래]
시조 조계룡(曺繼龍)은 신라 진평왕의 사위이다.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禮香)으로
조계룡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에 한 남자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후 달이 차서 진평왕 48년에 아들이 태어나니 용모가 준수하고 겨드랑이 밑에 조자가 붉게 씌여져 있었다. 이것을 본 학사는 이상히 여겨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도 신기하게 여기며 성은 조,
이름은 계룡 자는 인경(鱗卿)이라
특별히 하사하였다고 한다. 뒤에 부마를 삼음으로써
창성부원군에 봉해 지고 벼슬이 보국대장군 상주국대도독 총지휘제군사(輔國大將軍 上柱國大都督 總指揮諸軍事) 금자광록대부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 太子太師)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본관을 창녕으로 하고있다.
[가문의번영]
고려시대에 좌정승을 지낸 조익청(曺益淸)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을 지낸 조민수(曺敏修), 조선시대에 부제학을 지낸 조상치(曺尙治), 공조판서를 지낸 조비형(曺備衡), 세종 때에 영의정을 지낸 조석문(曺錫文), 예조참판의 조효문(曺孝門), 대사헌의 조숙기(曺淑沂) 등
많은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번성하였다. 성종 때의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간에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던 조위(曺偉)는
가문의 번영을 더하였다. 조신(曺伸)과 조한보(曺漢輔)는 시인과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고, 조계상(曺繼商)은 149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대사헌,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조광원(曺光遠)은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조식은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그는 지리산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구, 여러 대가의 서적을 섭렵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했으며 조정에서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해방 후의 조만식(曺晩植. 1883~1950) 선생은
민족운동가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를 자기사상과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아 연정회(硏政會), 신간회(新幹會),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시켰으며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계 파]
낭장공파(郎將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문익공파(文翊公派) 문정공파(文貞公派)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병조참의공파(兵曹參議公派)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양평공파(襄平公派) 장양공파(壯襄公派) 좌시중공파(左侍中公派) 중추공파(中樞公派) 지중추공파(知中樞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청구당공파(靑邱堂公派) 충간공파(忠簡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헌납공파(獻納公派)
[집성촌]
-전남 화순군 북면과 동면 -전남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 -경북 영천군 금호읍 -경남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경남 산청군 삼장면
[본관지]
-경상남도 창녕군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99,642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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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수원백(白) 295,640
경기 |
경주 |
광주 |
김해 |
나주 |
남원 |
남포 |
남해 |
대흥 |
문경 |
밀양 |
백천 |
부여 |
성산 |
성주 |
수원 |
순천 |
순흥 |
원주 |
임천 |
적성(순창) |
전주 |
직산 |
진주 |
청도 |
충주 |
태인 |
평산 |
해미 |
흥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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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0개의 본관과 309,572명이 있다.(1985년)
수원백씨(水原白氏) |
[유래]
시조 백우경(白宇經 - 시호는 문경)은 중국 소주 사람으로 황제 헌원의 16세손인 을병의 후손이다. 그는 780년(신라 선덕왕1년) 우리나라에 와서 계림의 자옥산 아래에 정착하여 살면서 신라때에 좌복사공대사도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경명왕(신라 54대)때에 중랑장을 지낸 백창직을 중시조로 하며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본관의 유래는 중시조 백창직의 증손자인 명휘가 고려때 대사마대장군으로 수원군에 봉해졌다는 설과 백창직의 9세손인 백천장이 중국에서 이부상서를 거쳐 우승상으로 수성백에 봉해지고 고려때 수원백에 봉해져서 수원으로 하였다는 두가지의 설이 있다. 이밖에 남포백씨, 부여백씨, 대흥백씨도 모두
수원 백씨에서 갈려나간 성씨다. 그러나 현재는 모두 수원백씨로 통용되고 있다.
[시조의 묘소]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에 있으며
향사는 양력 5월 첫째 일요일에 한다. [인구] 295,640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수원파
16세 |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영(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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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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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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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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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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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華) 태(兌) |
용(龍) 상(尙)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사(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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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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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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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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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樂)
|
남(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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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均) 기(基)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현(鉉) 호(鎬) 흠(欽) |
승(承) 운(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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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鍾) 인(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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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烈) 하(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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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圭) 재(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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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 용(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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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淳) 태(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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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식(植) 근(根) |
환(煥) 섭(燮) |
수(壽) 중(重) |
상(尙) 경(庚) |
윤(潤) 해(海) |
영(榮) 주(柱) |
연(然) 희(熙) |
[항렬표] 장흥파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희(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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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基)
|
흠(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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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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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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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亨) 남(南) |
선(善) 교(敎)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종(鍾) 용(鎔) |
순(淳) 준(浚) |
계(桂) 병(柄) |
열(烈) 경(炅) |
재(在) 규(圭) |
호(鎬) 전(銓) |
홍(洪) 문(汶) |
36세 |
37세 |
3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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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秀) 근(根) |
찬(燦) 휴(烋) |
균(均) 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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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표] 대흥파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옥(玉) |
거(居) |
운(運) |
중(重) |
진(鎭) |
순(淳) |
운(雲) |
32세 |
3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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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董) |
토(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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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한양조(趙) 273,408
한양조씨(漢陽趙氏) |
[유래]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나
연대는 알 수 없고,
고려 중엽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후 후손들이 조선 개국 때 한성(현재의 서울)으로 옮겨 가세가 크게 번영하였고,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므로 본관을 한양으로 하고 있다.
[가문의번영]
고려시대에 시조 조지수의 외아들로
고려 고종 45년(1258)
원(몽고)의 쌍성총관부 초대쌍성총관을 지낸 조휘(趙暉),
조휘의 아들로 13세의 나이로 제2대 총관이 되고
부원수를 지낸 조양기(趙良琪), 공부상서와 예의판서를 역임하고
삼중대광 용성군에 이른 조돈(趙暾),
판의덕부사를 지낸 조인벽(趙仁璧) 등의 인물이 있었고, 조선시대에 이조판서를 지낸 조인옥(趙仁沃), 개국공신 한천부원군 양절공 조온(趙溫)과 한평부원군 양경공 조연(趙涓)등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면서 가문의 기틀을 세웠다. 중종 때에 조광조는
일찌기 김굉필에게 수학하고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유가 되었다.
1515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여씨향약을 실시케 하고 소격서를 폐지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훈구파의 반발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조병옥은 1909년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왜경에게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고,
1937년 수양동지회사건으로
다시 2연간 복역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노선을 비판하며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나섰으며 1960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입후보 했으나 병사하고 말았다.
그에게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청록파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조지훈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집성촌]
-충북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 유포리, 삼봉리
[본관지]
-서울
[기 타]
[ 연락처 ] 한양조씨 대종회 : 02-3675-7136, 3672-4399, 서울 종로구 충신동 120번지 신일빌딩 2층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73,408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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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나주임(林) 262,862
나주임씨(羅州林氏) |
[유래]
시조는 고려의 대장군 임비(林庇)이다. 임비는 1281년(충렬왕 7년) 왕과 함께 원나라에 다녀온 공으로
시종보좌공신 2등에 책록되고 대장군,
충청도 도지휘사 판재사사에 이르렀다.
임비의 9세손 임탁이 해남 현무를 지내다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회진으로 돌아가 살면서 본관을 회진으로 하였으나, 회진현이 나주에 속해짐에 따라 본관을 나주로 바꾸었다.
[ 대표적 인물 ]
- 임서 : 인조 때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 임담 : 임서의 아들.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유탁(柳濯)의 모반사건을 처결하고 이조판서, 의금부판사를 지냈다. - 임한호(漢浩) : 승지 임상원(象元)의 아들. 정조 때 문과에 급제,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순조 때 우의정을 역임했는데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여 서자도 벼슬할 수 있게 하였다. - 임득명(得明) : 시, 서, 화의 삼절(三絶)로 불리었다.
[ 분파 ]
- 장수공파 : 임익(임탁의 8세손) - 정자공파 : 임복(임탁의 8세손) - 절도공파 : 임진(임탁의 8세손) - 첨지공파 : 임몽(임탁의 8세손) - 도정공파 : 임유소(임탁의 손자)
[기타]
[인구] 나주 262,862명, 회진 3,629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부사공파 - 임세춘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진(鎭)
|
수(洙)
|
상(相)
|
병(炳) 묵(默) |
규(圭)
|
종(鍾)
|
택(澤)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채(采) |
섭(燮) |
재(在) |
현(鉉) |
해(海) |
동(東) |
환(煥) | |
29 문화유(柳) 255,632
문화유씨(文化柳氏) |
[유래]
시조 유차달(柳車達)은 원래 차(車)씨이며
차무일(車無一)의 38세손이다. 유차달의 5대조상인 차승색은 신라 애장왕 때 벼슬이 좌승상이었는데
809년(신라 애장왕 10년)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金彦昇, 41대 헌덕왕)이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차승색은 애장왕의 복수를 위해 좌승상의 벼슬을
버리고 아들 차공숙과 함께 헌덕왕을 죽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차공숙을 데리고 도피하여 유주(문화의 당시 지명) 구월산 목방동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할머니의 성인 양(楊)씨를 모방하여
유씨로 성을 바꾸고 이름도 색으로 고쳤으며,
아들 공숙도 숙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유차달에 이르러 그 지방의 호부가 되었다.
유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이 어려움을 알고 재산을 털어
차 천량을 제작하고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익찬 벽상공신에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에 올랐다.
그의 조상에서 성을 바꾼 사실을 안 태조가 "차씨의 공을 잊을 수 없고 유씨로 성을 바꾼지 6세가 지났으니 유씨도 없앨 수없다."하며
유차달의 첫째 아들 효전에게 차씨를 계승하게 하여
연안 차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인 효금에게는 유주에 살면서 유씨를 계승하게 하였다. 유주가 문화로 지명이 바뀌면서 본관을 문화로 하였다.
[기타]
[인구] 255,632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근(根) 인(寅) 병(炳) 재(裁) |
열(烈) 걸(杰) 훈(薰) 성(城) |
지(志) 재(在) 정(廷) 정(柾) |
선(善) 현(鉉) 록(錄) 강(堈) |
제(濟) 호(浩) 원(洹) 남(楠) |
환(桓) 서(?) 식(植) 우(?) |
영(榮) 황(煌) 경(炅) 상(桑)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곤(坤) 헌(憲) 기(圻) 은(垠) |
종(鍾) 용(鏞) 은(銀) 길(桔) |
영(泳) 승(承) 옥(沃) 규(圭) |
래(來) 채(采) 삼(森) 재(材) |
희(熙) 휴(烋) 담(擔) 탄(坦) |
응(膺) 증(增) 행(幸) 주(株) |
호(鎬) 구(銶) 정(釘) 기(基)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51세 |
온(溫) 준(濬) 홍(洪) 춘(椿) |
억(檍) 락(樂) 정(?) 정(?) |
병(炳) 형(炯) 영(營) 동(棟) |
기(?) 재(裁) 평(坪) 당(塘) |
회(會) 회(澮) 옥(鈺) 원(?) |
우(雨) 하(河) 현(泫) 균(均) |
본(本) 빈(彬) 모(模) 서(栖) |
52세 |
53세 |
54세 |
55세 |
56세 |
57세 |
58세 |
연(然) 훈(勳) 소(炤) 경(坰) |
수(壽) 수(垂) 사(士) 내(奈) |
탁(鐸) 갑(鉀) 소(?) 준(埈) |
명(溟) 한(瀚) 원(源) 주(柱) |
동(東) 병(秉) 업(業) 보(報) |
령(寧) 응(應) 도(燾) 상(相) |
주(周) 요(堯) 집(執) 훈(塤) |
59세 |
6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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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針) 전(銓) 거(鉅) 정(楨) |
기(沂) 태(泰) 왕(汪) 장(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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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밀양손(孫) 243,655
밀양손씨(密陽孫氏) |
[유래]
시조 손순(孫順)의 손자 손익감, 손익담, 손익원 3형제중
손익감孫(翼減)이 신라때에 공을 세워 응천(밀양의 옛이름)군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가문의번영]
중흥조(中興祖) 손긍훈(孫兢訓)이
고려 태조와 함께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특히 손긍훈은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비적(匪賊)을 방어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花郞道)의 근본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귀산(貴山)과 추항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을 보위하는데 앞장섰다.
고려 때
천안부 판관(天安府判官)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른
손변과 평장사(平章事) 손효려(孫孝麗)가
유명했으며,손빈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상서(兵部尙書)에 올라 변방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시켜 온성(穩城)에 전승비(戰勝碑)가 세워졌고, 1340년(충혜왕 복위 1년)에 일어난 조적의 반란 때는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이를 토평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와 정당문학(正堂文學), 상장군(上將軍) 등을 거쳐
사도(司徒)에 오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현감 손중견(孫仲堅)의 증손 손책(孫策)은
고려 말의 절신(節臣)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수주 목사(樹州牧使)에 이르러
조선개국에 항거하다가 처형되었으며, 충혜왕을 원나라에 호종(扈從)했던 손수경(孫守卿)은 추성선력익대정원공신(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으로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에 봉해지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문종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손서륜이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1457년(세조 3년) 순흥(順興)에 유배중인
금성대군(錦城大君) 및 장인인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죽음을 당했다. 현감 손민(孫敏)의 아들 손비장(孫比長)은 성종 때 등과하여 시무사조(時務四條)를 왕에게 상소했으며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監)을 찬진한 후 공조참의(工曹參議)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에 이르렀고, 손홍록(孫弘祿)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實錄)을 보존케 하여
역사(歷史)의 공신(功臣)으로 유명했다.
퇴계 이황의 문인(門人)으로 학명(學名)을 떨쳤던 손영제(英濟)는
선조 때 도산서원 건립 때 사재를 털어 조력(助力)했으며, 손덕심(孫德沈)과 손덕순(孫德淳)은 임진왜란 때
영천의 창암(倉巖)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이순신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안골포(安骨浦) 전투에서 순절한 손응록(孫應祿)과 광해군 때의 난정을 개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던
성리학자 손기양(孫起提)이 뛰어났으며,
손상륭(孫尙隆)은 숙종 때 학행과 효성으로 명망이 높았다.
구한말에 와서는
33인의 민족대표를 주도하여 3.1운동에 참여했던 손병희(孫秉熙)가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가 되어 구한말과
일제의 암흑기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망국의 민족혼(民族魂) 을 혁신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선교사이자 항일투사인 손정도(孫貞道)는 만주로 건너가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3.1 운동 후에는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의 흥사단에 참여하여 차이석(車利錫), 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흥사단보(興士團報)를 간행했으며 만주 길림성에서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바쳐, 1935년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 섰던 손일민(孫一民)과 함께 밀양손씨를 빛냈다.
[계 파]
군사공영파(郡事公榮派) 오곡공파(梧谷公派) 전농공하파(典農公賀派) 좌사전탁파(左師傳晫派) 중서공택파(中書公택派)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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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 |
- |
- |
- |
-한(漢) 영(永)- |
동(東)- 병(秉)- |
-열(烈) -섭(燮) |
중(重)- -기(基) |
-현(鉉) -종(鍾) |
-태(泰) 승(承)- |
51세 |
52세 |
53세 |
54세 |
55세 |
56세 |
57세 |
58세 |
59세 |
60세 |
-계(桂) -표(杓) -선(瑄) |
-환(煥) -희(熹) -형(炯) |
재(在)- -순(純) -재(載) |
-석(錫) -호(鎬) |
-태(泰) -구(求) -수(洙) |
-식(植) -근(根) |
-찬(燦) -직(直) |
-규(圭) -배(培) |
-진(鎭) -전(銓) |
-락(洛) -옥(沃) |
61세 |
62세 |
63세 |
64세 |
65세 |
66세 |
67세 |
68세 |
69세 |
70세 |
-업(業) -정(楨) |
-조(照) -병(炳)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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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지]
경상남도 밀양군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43,655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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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연일정(鄭) 237,218
연일정씨(迎日鄭氏, 영일, 오천) |
[유래]
연일정씨는 시조를 다르게하는 두개의 파가 있다.
이 두파는 신라 6부시대의 지백호의 후손으로 그 중간 계보를 잃어버려
서로 촌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족보 및 종친회를 각각 다르게 하고 있다. 신라 때 간관(諫官) 정종은(鄭宗殷)을 도시조로 하고 그 후손인 정습명(鄭襲明)을 1세조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정극유(鄭克儒)를 1세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가 있다. 정습명은 고려 의종때의 중신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지냈으며,
그의 선대에 정의경이 연일호장을 지냈고, 다시 연일현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연일(현 영일)로 하였다. 그러나 본고장인 오천(烏川)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으로 쓰기도 했으나
지금은 연일로 통일해서 쓰고있다.
[가문의번영]
연일정씨는 조선시대에 5명의 상신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감무공파] 조선시대 중엽 송강 정철(鄭澈)은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우리 고전문학의 쌍벽으로 불리는
가사의 최고봉이다.
그는 당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에서
서인의 영수로 동인세력과 끝까지 맞서
싸운 투사였고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 홍명은 인조때 대제학을 지냈으며,
정철의 현손인 정호는 영조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정호 손자 역시 대제학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증손 정이환은 참판과 제학을 지냈다. 그밖에
고려 공민왕 때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진 정사도(鄭思道)와 조선 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정홍명(鄭弘溟), 영조 때 영의정 정호(鄭澔),
영조 때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등을 들 수 있다.
[지주사공파] 충신, 효자, 의인으로 일컬어지는 포은 정몽주(鄭夢周)는
나면서부터 어깨에 북두칠성처럼 검은점 7개가 박혀있어 이웃사람들도 모두 큰인물이 될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9세때 집에서 부리는 여종이 군에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그자리서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달은찼다 이지러지지만
첩의 마음은 항시 변치 않습니다"라고 써주었다. 짧은 한시로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마음을 표현한 소년의 재능에 글방 스승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는 24세에 과거에 급제,
56세로 일생을 마칠때까지
기우는 민생을 구하는 일에 열과 성을 쏟았다. 그밖에 현종 때의 우의정을지낸 정유성(鄭維成)과 정유성의 손자인 양명학의 거성 정제두(鄭齊斗), 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 효종 때 학자 정극후(鄭克後), 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 등이 있다.
[집성촌]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마을에서 1Km남짓한 문수산 기슭에 연일정씨의 정신적 지주인 포은 정몽주의 묘소가 있고 후손들은 조상의 묘를 지키며 2백여년 산아래에서 살아온다. 마을의 40여가구가 정씨 한집안으로 출세한 사람은 없지만 인근에서는 양반동네로 알아준다.
[본관지]
-경상북도 영일군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연일 237,218명, 영일 46,922명, 오천 22,033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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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함안조(趙) 231,728
함안조씨(咸安趙氏) |
[유래]
시조 조정(趙鼎)은 후당(後唐) 사람으로
신라 말기에 두 동생 조부(趙釜)와 조당을 데리고
절강사람 장길(張吉)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김선평, 권행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며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931년 고창성(현 안동)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을 대파하고 동경주현(東京州縣) 대부분을 항복받아 고려통일에 큰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함안에 살면서 본관을 함안으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명한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여(旅)로 그는 시조의 10대손이다.
여의 후손은 모두 현달하였는데,
현손 종도(宗道)와 임도(任道)가 유명하다.
종도는 선조 때의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임도는 전원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인조반정 후에 공조좌랑을 지냈다.
영조 때에는 시·서·화 삼절(三絶)로 이름난 영우(榮祐)가 있고,
조선 후기에는 화가로 산수·인물에 뛰어난
정규(廷奎)와 희룡(熙龍)이 있다.
-안동의 칠현사(七賢祠), 동주의 충렬사(忠烈祠)에서 제향한다.
[가문의번영]
조승소는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에 가서 저작랑(著作郞)을 지내다가 귀국하여
부여감무(扶餘監務)를 지냈다. 조선 중종 때의 인물인 조연(趙淵)은
151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음보로 등용되어 1529년 선릉삼봉(宣陵參奉)을 거쳐 뒤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 등을 역임하였으며,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조여(趙旅), 조임도(趙任道)는 인조반정 후에 공조좌랑(工曺佐郞), 조평(趙平)은 찰방(察訪), 조봉원(趙逢源)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지냈다. 또 조영우(趙榮祐)는 171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첨지중추(僉知中樞)를 지냈고, 조근(趙根)은 166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를 지냈으며, 조영복(趙榮福)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하였다. 영조 때의 조중회(趙重晦)는 1736년 정시문과(庭試文科)로 급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지냈다. 조석진(趙錫晋)은
화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산수, 인물, 화조 등에 모두 능했다.
고종의 초상화를 그린 공으로 영춘군수(永春郡守)가 되고,
품계가 정3품에 올랐다.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을 드높인 조명하(趙明河)는
1963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단장을 수여받았고,
조용은(趙鏞殷)은 임시정부의장을 지내면서 시사촉진회(時事促進會)를 조직했다. 그는 해방 후에 국민의회의 상암위원회의장을 지내고, 1948년 남북협상에 찬동하여 평양에 갔으나 실패하고 1950년 5월에 있은 국회의원 선거에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점으로 당선되었으나
6.25사변 때 납북되었다.
[집성촌]
-경북 청송군 현동면 -경남 함안군 가야면 도항리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본관지]
-경상남도 함안군
[기 타]
[ 연락처 ] 02-2275-3109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31,728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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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진양정(鄭:진주) 231,289
진양정씨(晋陽鄭氏, 진주) |
[유래]
진양정씨는 동성동본이면서도 각각 시조를 달리하는 8개파가 있어
흔히 진양(현재의 진주) 8정이라고들 일컫는다. 원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6촌장 중 한 사람인 자산진부의 촌장 지백호(智伯虎)이며, 그의 후대에서 정씨의 분관, 분파가 이루어졌다. 충장공파(忠莊公派), 은열공파(殷烈公派), 공대공파(恭戴公派), 어사공파(御史公派) 등은 진양정씨의 4대 봉우리로,
현재의 진양정씨는 이들 후손들이 주류을 형성하고 있다. 본관지 진양은 고려시대에 선조들이 살아오던 곳이다.
[가문의번영]
고려 때 양관대제학을 지낸 정시양(鄭時陽),
병부상서를 역임한 정신열(鄭臣烈), 판도판서인 정임덕(鄭任德), 예의판서의 정유(鄭愈), 대제학을 지낸 정수(鄭需), 평장사를 지낸 정록, 찬성사를 지낸
정을보(鄭乙輔) 등이 있다. 공민왕 때 전객령(典客令)을 지내고,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장인으로 목화종자를 재배하고 보급하는데
큰 공적을 남긴 정천익(鄭天益)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상신 1명(그의 아들이 정지산(鄭之産)이다),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59명과 정척(鄭陟),
정성근(鄭誠謹) 등의 청백리를 배출해냈다. 조선 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정경세(鄭經世),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수제자였던 그는 나이 스물셋에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혔던 수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웠고 성리학 뿐만아니라 예학에도 밝아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파를 형성했다.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용(鄭起龍)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상주성 탈환, 정유재란때의 성주, 초계, 의령성 탈환 전투에도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광해군 9년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남해안을 방어하던 중 통영진중에서 숨졌다.
[계 파]
-충장공파(忠莊公派) : 고려의 건국공신으로 문하 시중평장사를 지낸 정예(鄭藝)를 시조로 한다. -은열공파(殷烈公派) : 호장을 지낸 정자우(鄭子友)를 시조로 한다. -공대공파(恭戴公派) : 고려 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 를 지낸 정장(鄭莊)을 시조로 한다. -첨정공파(僉政公派) : 고려 때 검정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시조로 한다. -우곡공파(愚谷公派) : 고려 때 대사헌을 지낸 정온(鄭溫)을 시조로 한다. 정헌(鄭櫶) 계통 -어사공파(御史公派) : 고려 때 감찰어사를 지낸 정택(鄭澤)을 시조로 한다. 정헌(鄭櫶) 계통 -지후공파(祗侯公派) : 고려 때 지후를 지낸 정신(鄭侁)을 시조로 한다.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 고려 때 판내부사를 지낸 정안교(鄭安校)를 시조로 한다.
[집성촌]
전라남도 나주군 봉황면 철천리. 속칭 철야마을. 4백여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덕룡산 기슭 울창한 느티나무 숲속에 철야마을은 묻혀있다. 마을 입구에 지붕을 드리운 만호정(挽湖亨)은 이 마을 유림들이 산수를 노래하며 노닐었던 유서깊은 사교장이다. 마을 뒤 덕룡산은 피비린내나는 의병전적지였다. 나주군 일대의 의병들은 산세가 험한 덕룡산에 숨어 일본군과 대치하며 전투를 계속했고 밤이면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 폭에 찐감자 등 먹을 것을 감춰
산으로 날랐다고 한다.
[본관지]
-경상남도 진주시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31,289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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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창원황(黃) 220,810
창원황씨(昌原黃氏) |
[유래]
창원황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각각 선조를 달리하는 8파가 있는데, 이들 8파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며, 족보도 각기 따로따로 편찬한다. 시중공(侍中公)파 : 황신. 토황(土黃)으로도 불리운다. 공희공(恭僖公)파 : 황석기(회산군). 당황(唐黃)으로도 불리운다. 호장공(戶長公)파 : 황량충. 예빈동정공파 : 황성찬. 전서공파 : 황윤기. 호장공파 : 황우용. 규정공파
시중공파의 시조 황신의 원조는 고려때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이며
그후의 세계는 알수가 없으나, 창원황씨가 확실하다고 한다.
공희공파의 파조 황석기(黃石奇)는
원래 고려 공민왕 때의 중서문하 평장사이었다. 종래에는 그가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미 이전에 그는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1339년에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등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1348년 고려 제29대 충목왕이 죽자 황석기는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30대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청하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앞서 원나라에 와 있던 공민왕(江陵大君)이 원나라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하여 귀국하게 되자 황석기는 그때 따라 왔던 것이다.
[가문의번영]
[ 시중공파 ] ·황자(梓) :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갑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편술하였다. ·황인검(仁儉) : 황자의 큰아들. 형조판서를 지냈다. ·황인점(仁點) : 황자의 둘째 아들.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 정조 때에는 동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 호장공파 ] ·황사우(士祐) : 호조, 예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다. ·황응규(應奎) : 황사우의 아들. 이퇴계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르고 돈녕부지사를 지냈다. ·황섬(暹) : 황사우의 손자.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으나, 계축옥사(1613) 이후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소북파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의 처남이다.
[ 공희공파 ] ·황상(裳) : 황석기의 아들. 문하찬성사·서강도원수 등을 지냈다. ·황형(衡) : 황상의 6세손. 공조판서를 지냈다. ·황기(琦) : 황형의 아들. 직제학·대사간을 거쳐 도승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황신(愼) : 황형의 증손. 이율곡(李栗谷)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1589) 때 정언(正言)으로서 대신들이 서로 직언을 회피한 사실을 논박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후에 공조, 호조판서를 지냈다.
이 밖에 창원황씨의 인물로는 ·황구하(龜河) :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냈다. ·황사영(嗣永) : 신유박해 때 순교한 백서(帛書)사건의 주인공이다. ·황기천(基天) : 순조 때의 명문장이며 명필이다. ·황재영(在英) : 고종 때의 학자이다. ·황필수(必秀) : 명의(名醫)이다.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20,810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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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의성김(金) 219,947
의성김씨(義城金氏) |
[유래]
시조 김석(金錫)은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자로 의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의성으로 하였다. 그리고 후손 김용비(龍庇), 김용필(龍弼), 김용주(龍珠) 형제대에 이르러
파가 갈린다.
[ 대표적 인물 ]
- 김안국(安國) : 대제학, 학자이다. - 김정국(正國) : 참판, 학자이다. - 김성일(誠一) : 부제학을 지냈다 - 김우옹 : 대사헌을 지냈다 - 김흥락(興洛) : 학자이다. - 김창숙(昌淑) : 독립운동가, 유학자이다.
[기타]
[인구] 219,947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락(洛) 영(永) 호(浩) 영(泳) 연(淵) 한(漢)
|
모(模) 병(秉) 동(東) 식(植) 임(林) 상(相)
|
환(煥) 형(衡) 대(大) 섭(燮) 창(昌) 노(魯)
|
시(時) 규(奎) 달(達) 재(在) 성(聲) 중(重)
|
종(鍾) 호(鎬) 용(鏞) 수(銖) 선(善) 희(熙) 현(鉉) |
수(洙) 원(源) 택(澤) 태(泰) 순(淳) 하(河)
|
권(權) 목(穆) 근(根) 래(來) 직(稷) 영(榮)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헌(憲) 엽(燁) 형(炯) 훈(勳) 희(熙) 덕(德) 덕(悳) |
규(圭) 혁(赫) 규(珪) 주(周) 재(裁) 은(垠)
|
건(鍵) 옥(鈺) 일(鎰) 전(銓) 련(鍊)
|
용(溶) 제(濟) 해(海) 준(浚) 홍(洪)
|
병(柄) 정(楨) 화(和) 수(秀) 빈(彬)
|
영(榮) 병(炳) 엽(燁) 문(文) 도(道)
|
건(建) 배(培) 균(均) 달(達) 중(中)
| |
36 남원양(梁) 219,911
남원양씨(南原梁氏) |
[유래]
양을라와 양탕의 후손이며
중시조인 양우경이 757년(신라 경덕왕) 공을 세워 남원백에 봉해지고
남원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기타]
[인구] 219,911명이 있다.(1985년)
[계파]
- 병부공파 : 양능량 - 예성군파 : 양능길 - 청주파 : 양성준 - 대방군파 : 양수정 - 용성군파 : 양주운 - 장영공파 : 양윤위 |
37 여산송(宋) 200,323
여산송씨(礪山宋氏) |
[유래]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 때에 진사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이며 중시조인 송례는 유익의 4세손으로 고려 원종때 문하시중 판전리사사상장군으로 여양(여산)부원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송례를 중시조로하고 1세 조상으로 하였으며, 여산을 본관으로 하였다.
- 묘소는 여산 문수동에 있으며 매년 동지에 향사 한다.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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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 |
- |
- |
- |
- |
인(寅) |
현(顯) |
의(義) |
범(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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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00,323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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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평택임(林:팽성) 194,550
평택임씨(平澤林氏) |
[유래]
시조 임팔급(林八及)은 당나라 사람으로
840~900년경에 신라에 와서 이부상서를 역임하고 팽성(현재의 평택)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기록이 없어서
고려 말에 세자전객령을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중시조(1세)로 하고 있다. 나주, 회진임씨를 제외한 대부분의 임씨는 평택임씨에서 분관했다.
[ 대표적 인물 ]
- 임정(整) : 임세춘의 증손. 태종 때 예조판서를 지내고
성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 임황(篁) : 임세춘의 10세손. 중추부영사를 지냈다. - 임경업(林慶業) : 임황의 여덟 아들 중 넷째 아들.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 병자호란 때는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용맹을 떨쳤는데
김자점(金自點)의 모함으로 피살되었다. - 임언수(林彦修) : 고려 말 삼중대광을 지내고 충정공파의 파시조이다. - 임성미(成味) : 임언수의 아들. 고려 우왕 때 왜구를 무찔러
삼사우사에 이르렀다. - 임견미(堅味) : 임언수의 아들. 홍건적의 난 때 1등공신이 되고, 제주 목호의 난과 왜구를 쳐서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후에 전횡을 일삼다가 최영, 이성계에게 살해되었다. - 임제미(齊味) : 임언수의 아들. 판개성윤을 지냈다.
[기타]
[인구] 194,550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부사공파 - 임세춘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규(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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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鍾) 수(銖) |
수(洙) 옥(沃) |
동(東) 근(根) |
용(容) 환(煥) |
주(周) 기(起) |
은(銀) 전(銓) |
31세 |
32세 |
3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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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泰) 영(泳) |
상(相) 후(朽) |
회(會) 형(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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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은진송(宋) 179,247
은진송씨(恩津宋氏) |
[유래]
시조 송대원(宋大源)은 여산 송씨의 시조 송유익의 아우 송천이의 후손으로 대대로 은진에서 살아왔으나 송천익 이후의 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고려때에 판원사를 지내고 은진군에 봉해진 송대원을 시조 및 1세 조상으로 하고 본관을 은진으로 하였다.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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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
12세 |
13세 |
14세 |
15세 |
16세 |
17세 |
18세 |
19세 |
20세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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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一) 환(煥) |
인(仁) 규(圭)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노(老) 흠(欽) |
용(用) 수(洙) |
석(錫) 병(秉) |
영(永) 헌(憲) |
인(寅) 재(在) |
기(基) 호(鎬) |
치(致) 영(永) |
선(善) 근(根) |
영(榮) 성(性) |
중(重) 균(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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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79,247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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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해주최(崔) 161,782
최(崔)씨의 유래
해주최씨(海州崔氏) |
[유래]
시조 최온(崔溫)은
널리 알려진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의 아버지로
해주 대령군 수양산밑에서 오래동안 살았다고 하며
그곳의 별칭이 고죽군이어서 고죽최씨라고도 한다. 시조 최온은 일찌기 해주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이름을 떨쳤으며 문장으로도 명성이 높았고, 뒤에 판사부사(判吏部事)를 지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해주에서 이루어졌고 또 여러 대에 걸쳐 해주서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하여 대를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 최충 : 최온의 아들. 동방 유학(儒學)의 비조(鼻祖)인 성제(惺齊) 최충, 그는 고려 목 종8 년에 문과에 장원, 문종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은퇴하여 開京에 최초의 사학(私學)인 구제학당(九齊學堂)을 열어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그의 두 아들 최유선(惟善)과 최유길(惟吉)은 모두 宰相의 자리에 올라 부자 2 대에 名門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된다.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의하면 "동방 학교의 일어남이 최충에서 비롯되었고 최충의 자손으로 재상에 오른 사람이 수십명이 된다"고 했다.
- 최경회(崔慶會) :
그 유명한 논개(論介)의 남편으로 전해진다. 논개는 사실 기생이 아니고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남편이 진주에서 전사하자 기생을 가장, 왜장들의 승전축하연에 참석해 왜장을 안고
투신했다고 밝혀지고 있다.
[항렬표]
·사평공파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 |
- |
- |
- |
- |
- |
-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문(文) |
극(克) |
선(善) |
우(雨) |
상(相) |
훈(薰) |
규(圭)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
진(鎭) |
영(泳) |
환(桓) |
병(丙) |
- |
- |
|
·좌랑공파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 |
- |
- |
- |
- |
- |
-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환(煥) |
재(載) |
현(鉉) |
승(承) |
식(植) |
광(光) |
수(壽)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
진(鎭) |
구(求) |
종(種) |
용(容) |
- |
- |
|
·전한공파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 |
- |
- |
- |
- |
- |
-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옥(玉) |
석(錫) |
부(溥) |
병(秉) |
섭(燮) |
노(老) |
호(鎬)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
일(一) |
- |
- |
- |
- |
- |
|
[기타]
- 161,782명이 있다.(1985년) |
41 강릉유(劉:한양) 161,634
강남 |
강릉 |
강원 |
강화 |
개성 |
거창 |
고부 |
공주 |
광주 |
금성 |
남원 |
무주 |
백천 |
수원 |
순흥 |
안동 |
연백 |
영월 |
옥천 |
원주 |
진주 |
창녕 |
천안 |
청주 |
충주 |
파평 |
풍산 |
해주 |
|
|
|
|
총 28개의 본관과 218,445명이 있다.(1985년)
거창, 강릉, 배천유씨(居昌, 江陵, 白川劉氏) |
[유래]
유씨는 원래 중국 제요의 후손이 유땅에 봉해지면서
유씨로 성을 받은 것이다. 그후 수천년을 지나 초한 시대에 이르러 유방(한고조)이 중원을 통일하고 한제국을 창건하면서
유씨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우리나라 유씨의 도시조인 유전(劉筌, 시호는 문양)은
한고조의 41세손으로 도학과 문장이 뛰어났고
송나라에서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1082년(고려 문종 36년) 8학사의 일원으로 고려에 들어온 후
경북 영일군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고려 공민왕 때에 이르러 특명으로 그를 위한 사우가 건립되고 고려 태조와 함께
7왕을 모신 숭의전에 배향되고 있다.
거창 유씨 - 유전의 첫째 아들 유견규가 거타(거창)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거창으로 했다. 강릉 유씨 - 유전의 12세손인 유창이 조선개국공신 2등으로 옥천(강릉) 부원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백천 유씨 - 유전의 8세손 유국추가 배천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백천으로 하였다.
- 유전의 묘소는 경북영천군 영천읍 녹전동에 있다.
[기타]
[인구] 강릉유씨 161,634명, 거창유씨 32,790명,
배천유 8,910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 3본관 공통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정(釘) 옥(鈺) ?(?) |
숙(淑) 소(沼) 호(浩) |
락(樂) 재(裁) 계(桂) |
훈(勳) 혁(爀) 조(照) |
지(址) 요(堯) 훈(塤) |
록(錄) 은(銀) 건(鍵) |
관(?) 태(泰) 광(洸) |
48세 |
49세 |
50세 |
51세 |
52세 |
53세 |
54세 |
두(杜) 권(權) 직(稙) |
경(炅) 연(燕) 승(昇) |
곤(坤) 준(埈) 경(坰) |
동(銅) 청(?) 민(?) |
준(浚) 순(淳) 택(澤) |
주(柱) 수(樹) 양(楊) |
형(炯) 엽(燁) 경(景) |
55세 |
56세 |
57세 |
58세 |
59세 |
60세 |
61세 |
용(埇) 은(垠) 원(垣) |
탁(鐸) 균(鈞) 흠(欽) |
락(洛) 강(江) 빈(濱) |
함(?) 극(極) 격(格) |
?(?) 영(煐) 희(熹) |
방(坊) 광(?) 규(奎) |
금(錦) 석(?) 환(?) | |
42 창녕성(成) 158,335
강릉 |
경주 |
나주 |
달성 |
달진 |
양근 |
예산 |
전주 |
창녕 |
창원 |
청룡 |
청양 |
청주 |
|
|
|
총 13개의 본관과 163,513명이 있다.(1985년)
성씨는 원래 중국 성씨로 주나라 문왕의 일곱째 아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 자손이 나라 이름인 성(成에 읍변이 붙은 것)을 성씨로 삼았으나 초나라에게 나라가 망하자 읍변을 떼어버리고 成씨라고 하였다. 그후 당나라 때에 학사 성경이가 우리나라로 건너왔고 백제에는 성충, 신라에는 성저라는 사람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의 성씨와의 관계는 고증할 수가 없다.
창녕성씨(昌寧成氏) |
[유래]
시조 성인보의 아버지는 성숙생으로 신라 대관 성저의 후예라고 한다. 성인보는 창녕에서 대대로 살아온 선비이며 창녕에서 호장중윤을 지냈다. 후손들도 창녕에서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본관을 창녕으로 하였다.
[기타]
[인구] 158,335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문(文) 무(武) |
균(均) 배(培) |
선(善) 은(銀) |
강(康) 우(雨) |
원(元) 춘(春) |
하(夏) 연(然) |
신(信) 교(敎)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구(九) 의(義) |
승(承) 만(滿) |
동(東) 채(彩) |
용(容) 지(志) |
중(中) 재(在) |
상(商) 금(錦) |
준(準) 홍(洪)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51세 |
52세 |
|
화(和) 수(秀) |
남(南) 칠(七) |
효(孝) 치(致) |
백(百) 록(錄) |
운(雲) 호(浩) |
래(來) 상(相) |
| |
43 연안차(車) 154,641
경주 |
고령 |
광산 |
나주 |
남해 |
대전 |
문화 |
밀양 |
송림 |
수원 |
안성 |
연안 |
영월 |
영일 |
용성 |
전주 |
정안 |
진주 |
천안 |
평산 |
평택 |
해주 |
|
|
총22개의 본관과 159,679명이 있다.(1985년)
연안차씨(延安車氏) |
[유래]
시조 차효전은
차무일(車無一)의 38세손인 유차달(문화 유씨의 시조)의
첫째 아들이다. 유차달의 5대조상인 차승색은 신라 애장왕 때 벼슬이 좌승상이었는데
809년(신라 애장왕 10년)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金彦昇, 41대 헌덕왕)이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차승색은 애장왕의 복수를 위해 좌승상의 벼슬을 버리고 아들 차공숙과 함께 사냥가는 헌덕왕을 죽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차공숙을 데리고 도피하여 유주(문화의 당시 지명) 구월산 목방동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할머니의 성인 양(楊)씨를 모방하여 유씨로 성을 바꾸고 이름도 색으로 고쳤으며,
아들 공숙도 숙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유차달에 이르러 그 지방의 호부가 되었다.
유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이 어려움을 알고 재산을 털어 차 천량을 제작하고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익찬 벽상공신에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에 올랐다.
그의 조상에서 성을 바꾼 사실을 안 태조가 "차씨의 공을 잊을 수 없고 유씨로 성을 바꾼지 6세가 지났으니 유씨도 없앨 수없다."하며 유차달의 첫째 아들 차효전에게는 대광백에 봉하고 연안을 식읍으로 하사 하고 차씨를 계승하게 하여 연안 차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인 효금에게는 유씨를 계승하게 하였다.
[기타]
[인구] 154,641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훈(壎)
|
용(鏞) 종(鍾) |
순(淳) 준(濬) |
상(相) 병(秉) |
환(煥) 열(烈) |
재(載) 재(在) |
현(鉉) 호(鎬)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영(永) 태(泰) |
수(秀) 식(植) |
광(光) 용(容) |
기(基) 배(培) |
회(會) 선(善) |
수(洙) 승(承) |
동(東) 승(乘) | |
44 성주이(李) 153,146
성주이씨(星州李氏) |
[유래]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동생 이돈유(李敦由)와 함께
신라 경순왕 때 벼슬하여 재상(宰相)에 올랐으나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痲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나라를 구하려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하고 이름까지도
이극신(李克臣)이라 고쳐
경산(京山. 성주의 옛 이름)으로 옮겨 살았다.
그 절의에 감복한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며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고려 고종 때 시조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이 호장을 지내면서 덕망이 높았고 이장경의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 가서 벼슬할 때 공이 많아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郡公)에 추봉하였으므로
처음에 농서이씨로 하였으나, 그후 그의 아들 5형제 밀직사사 이백년(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李千年), 낭장 이만년(李萬年), 참찬 이억년(李億年),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가 문과에 급제하고 가세가 번성해지자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에따라 본관을 성주라 했다.
[가문의번영]
고려 때 이승경은 평장사가 되어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이만연(李萬年)을 비롯하여 이포(李褒)와 이인부(李仁復) 그리고 이인임(李仁任)은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이인민(李仁敏)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서 개국공신 2명을 냈고, 문과 급제자 107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이발(李潑)은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숭문(李崇文)을 비롯하여
이지활(李智活)과 이지원(李智源)
그리고 이견기(李堅基)와 이집 등은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리고 이직(李稷)은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이의(李誼)와 이자건(李自建) 등은 대사헌이 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승지와 부사, 현감 등이 배출되었다.
이조연(李兆年)은
1285년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하였고 다시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인품이 근엄하고 곧아서 충심으로 간언하는 일이 많았으며 시문에 뛰어났는데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는 그의 유명한 작품이다. 또한 이문건은
15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죽자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옛 친구나 문하생들이 조문을 못했는데 그는 조문하고 통곡하여 9년동안 과거를 못 보았으나 청백하기로 유명했으며 글씨에 뛰어났고 부모의 묘소에 처음으로 직접 써서 세운 한글비는 매우 유명하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계 파]
-간성공파(杆城公派) -경무공파(景武公派) -고은공파(孤隱公派) -광평군파(廣平君派) -도은공파(陶隱公派) -도정공파(都正公派) -동지공파(同知公派) -문경공파(文景公派) -문과공파(文科公派) -문열공파(文烈公派) -밀직공파(密直公派) -봉예공파(奉禮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유수공파(留守公派) -장절공파(章節公派) -참지공파(參知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첨추공파(僉樞公派) -초은공파(樵隱公派) -총제공파(摠制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평간공파(平簡公派)
[집성촌]
-충북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에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다. -경기도 용인, 강화 -강원도 철원, 금화군 -충북 영동군, 괴산군 -전북 남원군, 정읍군 -전남 보성군 -경북 성주군, 금릉군
[족보발간]
갑신보(1464년. 1권):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이윤손(李尹孫)이 편찬 했으며 책은 현재 전하지 않고 다만 그 서문(序文)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한국 최고의 족보 서문이다.
계축보(1613년. 1권): 경연참찬관 이욱(李稶)이 임란뒤에 많은 탐문으로 흩어진 종친들을 규합하여 갑신보를 증보한 것으로서 귀중한 책이다.
정묘보(1687년. 3권): 중추관수찬 이광적(李光迪)이 편찬한것으로 후손 이준(李竣)이 계축보를 교정할 때에 갑신보를 필사하여 간직한것을 보고 증수한 것이다.
신미보(1751년. 7권): 대사간 이응협(李應協)이 신유(1741)년에 시작하여 10년만에 펴낸 활자본이다.
이에 앞선 5권본이 있었다고 하나 미상이다.
정사보(1797년.12권): 정와(靜窩) 이택진(李澤鎭)이 서울에 보청을 두고 편찬 하다가(어떤 문제가 있는 듯하다.) 뒤에 서화가인 감역(監役) 이한진(李漢鎭)이 보완하여 간행 하였다.
경인보(1830년. 21권): 진사 이기흠(李箕欽),오재(梧齋),이춘우(李春遇)외 3명이 수보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대단한 힘을 기울인 작품으로서 전국을 거의 망라한 거보이다, 계유(1873)년에 참판 이종률(李鍾律)이 속수(續修)할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갑자보(1924년. 27권): 종손의 환향(還鄕)으로 보본사 건립과 병행된 문사인데 세덕편에 안산서원 세진록과 보본사실기가 이때에 첫권(首卷)에 수록 된 대동보로서 통상 갑자대보라고 한다. 이조혁(李祖赫),이병희 (李柄憘)가 주관 하였는데 이때에 직접 참여한 전국의 유림과 종친은 천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을미보(1955년. 5권): 종손 이봉훈(李鳳勳)공이 주관하여 편찬한 것으로 지질이나 내용이 좋지않아 반질할때 비난이 많았으므로
소장한 종친이 많지 않다.
을묘보(1975년. 9권): 청명희 이규동(李圭東)공이 애썼으며 북한거주 일족이 미편된인쇄본인데 국역을 하지 않은것이 흠이라 하겠다.
임술파보(1982년. 2권): 종문(宗門) 밀직공계 처음으로 편찬한 파보로서 이원혁(李源赫), 이준용(李準鎔)이 주역(主役)으로 시작하여 이동옥(李東玉)의 사서로서 이창기(李敞杞)의 명의로 46배판으로 발행한 한문본이며 [밀직공파보]라 제(題)하였다.
[본관지]
경상북도 성주군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53,146명이 있었다.
|
45 단양우(禹) 152,298
강주(영천) |
경주 |
남양 |
단양 |
달성 |
안동 |
안양 |
영주 |
예안 |
진양 |
창녕 |
한양 |
해주 |
|
|
|
총 13개의 본관과 155,456명이 있다.(1985년)
단양우씨(丹陽禹氏) |
[유래]
시조 우현은 중국 하나라 우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우현이 고려 때 우리나라에 와서 단양에서 살면서 1014년(고려 현종 5년)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정조호장을 지내고 문하시중평창사에 추증 되었다. 그의 10세손 우현보가 고려 공양왕 때 단양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단양으로 하였다.
[기타]
[인구] 152,298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영(榮) |
정(鼎) |
명(命) |
종(鍾) |
제(濟) |
식(植) |
희(熙)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철(喆) |
용(鎔) |
수(洙) |
병(柄) |
섭(燮) |
재(在) |
호(鎬)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
영(永) |
근(根) |
경(炅) |
균(均) |
진(鎭) |
순(淳) |
| |
46 강릉김(金) 150,576
강릉김씨(江陵金氏) |
[유래]
시조 김주원(金周元)은 신라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6세손이다. 원래 김주원은 각간(角干)으로
시중(侍中; 신라 최고 관직) 겸 병부령(兵部令; 군사 총책임자)를 지냈다. 785년(신라 선덕왕 6년) 선덕왕이 후손이 없이 죽자 군신 회의 끝에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하였으나 경주의 알천 북쪽 20리 밖에 살던 김주원이 갑자기 큰비가 내려 알천을 건널 수 없어 입궐을 못하였다.
이에 군신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다" 하여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 원성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가 개인다음 그가 대궐에 들어가자 원성왕은 그에게 즉위 할 것을 권유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에 내려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하고
명주(溟州: 강릉), 익령(翼嶺: 양양), 근을어(斤乙於: 평해),
삼척, 울진 등을 다스리게 하고 그 땅을 식읍으로 하사 하였다. 김주원은 명주성을 쌓고 영동일대를 통치했으며
이에 따라 후손 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하였다.
(참고 : 삼국유사, 삼국사기)
- 묘는 강원도 명주군 성산면 보광리 삼왕릉에 있다.
[가문의번영]
김주원은 김종기(金宗基), 김헌창(金憲昌), 김신(金身)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 김헌창은 헌덕왕 때 공주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전라, 충청도 지방을 점령했으나
실패로 끝나 자결했다. 첫째 아들 김종기의 손자 김양(金陽)은 838년(민애왕 1년)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죽게하고 왕위에오른 민애왕을 제거하고 김우징(金祐徵)을 신무왕으로 추대하고 각간시중 겸 병부령을 지냈다. 김순식(金順式)은
고려 건국초 명주(溟州)장군으로 끝까지 항거하다 왕건에게 설득을 받고 왕건에게 협력하여 후백제 정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대광(大匡)에 오르고 왕씨 성을 하사 받았으나 조선개국 후 왕씨가 탄압을 받자 원래 성인 김씨로 환원하였다. 9세손 김상기(金上琦)가 고려 예종 때 평장사(平章事: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인존(金仁存)은 문하평장사 상주국(門下平章事上柱國)으로 고려 인종 때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에 책록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중요한 국사(國事)가 있을 때마다
왕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대표적이다. 1435년(세종 17년) 성균관 부근에서 김일성(金日省)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신재(神才)로 불리워진 그는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시(詩)를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黃雲片片四方分)"
그가 5세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여 이 소식을 접한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총애했다고 하며, 40여 년간 대사성을 지낸 김반(金泮: 후손을 강서김씨라 함)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 일컬어진 윤상(尹詳)에게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21세 때인 1455년(단종 3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를 찬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특히
그는 세조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며 9년 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으며,
서기 1463년(세조 9년) 책을 구하러 한양(漢陽)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2남)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다시 입산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금오산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와 1468년(세조 13년)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다. 서기 1481년(성종 12년) 환속(還俗)하여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2년 뒤 다시 한양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애를 마쳤다.
사예(司藝) 김충정(金忠貞)의 아들 김첨경(김添慶)은
1549년(명종 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어사(御史), 부수찬(副修撰), 지평(持平) 등을 거쳐 1561년(명종 16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정(僉正)을 지내고 강릉부사(江陵府史)로 나갔다가 뒤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그외 감찰(監察) 김종윤(金宗胤)의 아들 김충렬(金忠烈)이 중종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한성부 판관, 경기도사를 거쳐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館: 시정을 기록하는 관청의 정3품 벼슬)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김국평(金國坪)의 아들 김행(金行)은 선조 때 무장현감(茂長縣監)이 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셋째 아들)의 증도가(證道歌)를 간행하고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예조 판서 김첨경(添慶)의 현손(玄孫)인 김시혁은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으며, 김시환(김始煥)과 김시형(金始炯)도 예조(禮曹) 및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우참찬(右參贊),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낸 계락(啓洛)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618년(광해군 1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한 김기종(金起宗)은 김철명(金哲命)의 아들로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 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무훈을 세워 진무2등공신(振武二等功臣)으로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호조판서를 지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대사간(大司諫),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 예조, 호조(吏禮戶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김상성(金尙星)과 영조 때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 조선 때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가서 봉조하(奉朝賀)가 된
김상익(尙翼), 예조(禮曹) 및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한 김상적(金尙迪)이 유명했다. 김시현(金始炫)의 아들 김상중(金尙重)은
영조 때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 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김상집(金尙集)과
학자로 유명한 김홍운(金鴻運), 형조판서(刑曹判書) 김화진(金華鎭)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김상철은 1775년(영조 51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학덕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고, 일찍이 우의정(右議政) 때 편집청을 두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편의를 가져오게 하였다.
[계 파]
강릉가평파(江陵柯坪派) 강릉노암공파(江陵魯岩公派) 강릉모안파(江陵慕顔派) 강릉선연파(江陵蟬淵派) 강릉송림파(江陵松林派) 강릉옥가파(江陵玉街派) 강릉옥계파(江陵玉溪派) 강릉호명파(江陵虎鳴派) 공청간파(公淸簡派) 김강덕원파(金江德原派) 만호공파(萬戶公派) 모암공파(慕庵公派) 모전파(茅田派) 목천복귀형파(木川伏龜亨派) 문의파(文義派) 백동파(栢洞派) 삼괴당공파(三愧堂公派) 삼척파(三陟派) 상주파(尙州派) 송오공파(松塢公派) 습독공파(習讀公派) 신당파(信堂派) 안동파(安東派) 양양공파(襄陽公派) 여산파(礪山派) 원산파(元山派) 월봉공파(月峰公派) 유천파(楡川派) 임경공파(臨鏡公派) 장보공파(長甫公派) 제주공파(濟州公派) 조항파(鳥項派) 지산군파(支山君派) 찬성공파(贊成公派) 청풍파(淸風派) 초당파(草堂派) 파주능동파(坡州陵洞派) 풍덕파(豊德派) 학포파(鶴浦派) 회와공파(晦窩公派) 횡성파(橫城派)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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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 |
- |
- |
병(秉)- |
연(演)- |
-경(卿) |
진(振)- |
-기(起) |
남(南)- |
-래(來)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동(東)- |
-유(猷) |
성(成)- |
-현(玄) |
만(萬)- |
-구(九) |
명(命)- |
-영(寧) |
무(茂)- |
-기(紀) |
51세 |
52세 |
53세 |
54세 |
55세 |
56세 |
57세 |
58세 |
59세 |
60세 |
유(庾) |
재(宰) |
성(聖) 중(重) |
규(揆) |
하(夏) |
원(元) |
두(斗) |
택(澤) |
오(吾) |
장(章) |
61세 |
62세 |
63세 |
64세 |
65세 |
66세 |
67세 |
68세 |
69세 |
70세 |
세(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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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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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지]
강원도 강릉시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50,576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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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진주하(河) 148,208
진주하씨(晋州河氏) |
[유래]
시조 하공진(河拱辰)은
고려 현종 때 상서공부시랑을 지내고 평장사에 추증되었다. 그는 진주 출생으로, 1010년(현종 1년) 강화 교섭사로 적진에 들어 갔다가 거란군에게 잡혀갔다가 요(遼)나라 왕 성종(聖宗)의 회유를 받았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진주 하씨는 그 계통이 뚜렷하지 않은 대략 3파로 분파된다.
[ 시랑공파(侍郞公派) ]
하공진을 시조로 하며
하공진, 하측충(則忠), 하탁회(卓回), 하정재(挺才), 하남수(南秀), 하소(邵), 하부심(富深), 하식(湜)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륜(崙, 문충공)이 그 후손이다.
[ 사직공파(司直公派) ]
고려 정종 때 사직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며
하진, 하영상(永尙), 하맹공(孟恭), 하원경(元慶), 하백부(白富), 하의(義), 하보(保), 하직의로 되어 있으며,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演)은 하륜과 서로 교분이 두터웠던, 같은 시대의 정승이었으나 서로 계보를 상고(詳考)할 길이 없었던 것 같다.
[ 단계공파(丹溪公派) ] - 단계 하씨
고려 때 주부를 지낸 하성(河成)을 시조로 하며
하성, 하희보(希甫), 하공정(公正), 하현(玄), 하윤(胤), 하지백(之伯), 하담(澹)으로 되어 있으며,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단계(丹溪) 하위지(緯地)의 집안이다. 흔히 단계 하씨로 알려져 있으며
하담은 하위지의 부친이다.
진주 하씨가 본관을 진주로 한것은
하공진의 11세손인 하륜이 진산부원군에 추봉되고, 하진(사직공파)의 9세손 하접이 진천부원군에, 10세손 하윤원이 진산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으로 알려져있다.(진산, 진천은 모두 진주의 별호이다)
[ 대표적 인물 ]
- 하윤린 : 고려 충숙왕 때 순흥부사, 예의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 하윤원(允源) :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 수복에 공을 세우고 우왕 때 대사헌이 되었다. - 하을지(乙沚) : 고려 때 전라도원수가 되어 왜선의 나포에 공을 세웠다. - 하경복(敬復) : 조선시대에 함경도 병마도절제사로서 15년 동안 북방수비에 큰 공을 세웠다. - 하윤(潤) : 조선 성종 때 예문관검열을 지내고 임사홍(任士洪)의 서용(敍用)을 반대했다. - 하응림(應臨) :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진보(晉寶), 명종 때 당대의 '8문장' 으로 문명을 날렸다. - 하규일(圭一) : 구한말의 국악사(國樂士)로 중년 이후에 관계(官界)에 진출하였는데, 그는 무용에도 유능했으며 가곡의 정통을 지킨 사람이다. - 하난사(蘭史) : 여류 선각자로 미국 유학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1919년에는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기타]
- 148,208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현(賢) 수(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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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運) 도(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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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載) 치(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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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鎭) 준(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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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永) 석(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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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根) 태(泰) 제(濟) |
근(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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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이천서(徐) 144,204
이천서씨(利川徐氏) |
[유래]
시조 서신일(徐神逸)은
신라 52대왕인 효공왕 때에 아우를 지내다가 나라의 운이 다함을 알고
이천 효양산에 복성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자칭 처사라하고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그래서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하였다. 서신일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그의 처음 조상인 서두라(신라 개국공신)는 아성(이천의 옛이름) 대장군으로 있었고, 서신일 대에 이르러 산촌(山村)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슴 한 마리가 화살을 맞은 채 사냥꾼에게 쫓겨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오므로 불쌍히 여겨 화살을 빼주고
먹이를 주며 극진히 간호해 준 다음 다시 산으로 놓아주었다.
그날 밤 꿈에 한 백발의 산신령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그대의 집에 왔던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꾼의 화살을 맞아 죽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대의 은덕으로 살게 되었으니 그대의 자손이 대대로 재상을 지 내리라"고 했다. 나이 80이 되도록 슬하에 혈육이 없던 그는 그날부터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요,
서필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서희(徐熙) 장군이다.
- 묘소는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산촌리 효양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 한다.
[기타]
[인구] 144,204명이 있다.(1985년) |
49 신안주(朱) 142,590
강릉 |
결성 |
경주 |
공주 |
광주 |
김해 |
나주 |
남원 |
능성 |
밀양 |
신안 |
신흥 |
안동 |
압해 |
연안 |
영주 |
웅천 |
전주 |
진주 |
창녕 |
청주 |
태천 |
함흥 |
해남 |
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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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개의 본관과 153,474명이 있다.(1985년)
50 하동정(鄭) 142,418
하동정씨(河東鄭氏) |
[유래]
하동정씨는 본관을 같이하면서 계통이 다른 3파가 있다. [밀직공 국룡파(密直公 國龍派)] 평장사에 오른 정도정(鄭道正)을 시조로 하고
그후 후손의 기록이 없어 고려때 문하시중을 지낸 후손 정석숭(鄭碩崇)을 1세조로 10세 정인지(鄭麟趾), 12세 정여창(鄭汝昌)등으로 이어져 왔다.
[정승공 응파(政丞公 膺派)] 고려 덕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김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도첨의 좌정승(都僉議左政丞)등을 지낸 정응(鄭膺)을 시조로 하고 6세 정희(鄭熙), 7세 정초(鄭招)로 이어져왔다.
[지부사공 손위파(知部事公 遜位派)] 고려 숙종때부터 명종등 5왕조에 걸쳐 벼슬을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 지례부사(知禮部事), 응양대장군(膺揚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하동백에 봉해진 정손위(鄭遜位)를 시조로 하고 있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에 들어와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1명과
58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초, 정인지 등을 들 수있다. 정초는 1405년 문과에 급제, 14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좌정언(左正言)이되었다. 그후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를 거쳐
함길도도관찰사, 예조, 형조, 이조의 참판등을 역임하고
이어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정인지와 함께 역법(歷法)을 개정했다. 정인지는 1414년 문과에 장원 1425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1427년에는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한 수재였다.
1453년 계유정난에 수양대군을 도와 우의정에 승진하고
정난공신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55년 세조 즉위 후 영의정에 올랐다. 정택뢰(鄭澤雷)는 1617년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을 제기하자 그부당함을 논하다 화를 입게된 이지익(李之翼)을 극력 변호,
이이첨 일당을 죽일것을 상소하여
어머니 강(姜)씨와 함께 남해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고
1623년 인조반정 후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정봉수(鄭鳳壽)는 1592년 무과에 급제하고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왕을 모신 뒤 1605년 무안현대장(務安縣代將)으로 흑산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군을 섬멸하였으며 1627년 정유호란 때에는 철산의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워 그 공으로 철산부사에 특진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집성촌]
-평북 철산군
[본관지]
-경상남도 하동군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42,418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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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광주이(李) 141,830
광주이씨(廣州李氏) |
[유래]
시조는 이당(李唐)은 고려말에 국자감 생원시에 합격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흥지승람(興地勝覽)" 경기도 광주인물편에 의하면 그는 원래 광주출신 관리로 국자(國子) 생원(生員)에 올라 행실이 어질었으며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이씨 계파간에 시조에 대한 의견이 달라 우탄공파는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고 있다. 이자성은 칠원에서 살아온 집안의 후손으로
신라 내물왕 때의 내사령(內史令)으로 서기935년 신라 패망시에 이자성은 항복을 거부하고 고려 왕건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같은 이유로 준안(准安. 현 경기도 광주)으로 강제이주시켜 역리(驛吏)로 삼았고, 그래서 광주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내물왕 부터 고려 때 까지 살았다면 600년간 살았다는 것이되므로
설득력이 없다.
[가문의번영]
광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88명, 정승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다. 광주이씨를 중흥시킨 조상은 이당의 아들로
고려 말의 학자 둔촌(遁村) 이집(李集)이다.
그는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과 깊이 사귀었는데 공민왕 때 국정을 전횡하던 신돈(辛旽)을 논박하고 영천으로 피신했다가 신돈이 살해된 후에 돌아왔다. 그의 세아들 이지직(李之直)은 형조참의를 지냈는데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이지강(李之剛)은 좌참찬, 이지유(李之柔)는 사간을 지냈다. 이지직의 아들 이장손(李長孫)은 사인(舍人)을 지냈고, 이인손(李仁孫)은 세조 때 우의정에 이르고, 이예손(李禮孫)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이예손의 아들 이극기(李克基)는 참판을 지내고 성리학자이었다. 이중경(李重慶)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숙종 때 이조참판 이담명(李聃命)은
1690년(조선 숙종 16년) 영남 대흉년에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오성과 한음"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선조 때에
가문을 빛낸 광주이씨 가문의 큰별이다. 32살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이된 그는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에 오른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외교수완으로 5만의 원병을 끌어들여 서울수복에 수훈을 세웠다.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중 체포되어 순국한 이수택(李壽澤), 을사조약후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직한 이백래(李白來),
3.1운동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종훈(李鍾勳)등의 인물이 있다.
[계 파]
-우탄공파(右灘公派) : 이익강을 중흥시조로 한다. -암탄공파(巖灘公派) : 이양몽을 파조로 한다. -율정공파(栗亭公派) : 이녹생을 중흥시조로 한다. -둔촌공파(遁村公派) -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 -좌통예공파(左通禮公派) -목사공파(牧使公派) -광릉부원군파(廣陵府院君派) -광천군파(廣川君派) -광송군파(廣城君派) -문경공파(文景公派) -광원군파(光原君派) -참판공파(參判公派) -문숙공파(文肅公派)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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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
2세 |
3세 |
4세 |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병(丙)- |
중(重)- |
태(泰)- |
영(寧)- |
오(五)- |
혁(赫)- |
순(純)- |
용(容)-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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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지]
경기도 광주
[기 타]
[ 연락처 ] 광주이씨대종회 : 02) 735-1720, 734-1620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41,830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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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여흥민(閔) 137,314
경주 |
대전 |
여주 |
여흥 |
영운 |
영원 |
영인 |
정선 |
창원 |
청주 |
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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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1개의 본관과 141,328명이 있다.(1985년)
여흥 민씨(驪興 閔氏) |
[유래]
민씨는 본래 공자의 10제자중의 한명인 자건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왔다가
여흥(경기도 여주)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시조 민칭도(閔稱道)는 고려때 벼슬을 했으며 고려 충숙왕(27대)때에 수정승을 지낸 학자인 민지를 시조로하는 '문인공파'와 같은 시기에
대제학을 지낸 민적을 시조로하는 '문순공파'로 나뉘어 진다.
[기타]
[인구] 137,314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백(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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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赫) 현(顯) |
치(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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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鎬) 용(鏞) |
영(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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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植)
|
병(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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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기(基) 규(圭) 배(培) |
경(庚)
|
홍(泓) 원(源)
|
동(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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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熙)
|
형(馨) 재(在)
|
석(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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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준(準) |
권(權) |
용(容) |
범(範) |
선(善) |
순(淳) |
상(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
영(榮) |
원(遠) |
종(鍾) |
태(泰) |
주(柱) |
양(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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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강릉최(崔) 132,300
최(崔)씨의 유래
강릉최씨(江陵崔氏) |
강릉 최씨는 시조를 다르게하는 2계통의 최씨가 있다.
[ 최필달 계통 ]
시조 최필달(崔必達)은
고려 개국때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으로 좌정승이 되고 경원(강릉) 부원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 최치운(致雲) : 시조 최필달의 17세손으로 세종 때의 명신이었으며 특히 형옥(刑獄)에 밝아 왕명을 받고 '무원록(無寃錄)'을 주석하였다.
- ·최수성(壽城) : 최치운의 증손으로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시문, 서화, 음률, 수리(數理) 등 다방면에 뛰어난 당대의
기재절필(奇才絶筆)이었다.
[항렬표]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형(亨) |
중(重) |
정(貞) |
중(重) |
록(祿) |
[ 최흔봉 계통 ]
시조 최흔봉은 고려 태조의 부마이다. 그의 12세손 최입지가 고려말에 문하평리 상호군을 지내면서 공을세워 강릉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현재 삼척, 양양, 평창 등지에 수천 가구가 살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 최자점(自霑) : 조선 세조 때 이조참판을 지냈다. - 최세건(世楗) : 성종 때 이조판서을 지냈다. - 최응천(應天) : 인조 때 진주목사을 지냈다
[항렬표]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계(桂) |
병(炳) |
규(奎) |
홍(弘) |
근(根) |
철(澈) |
동(東) |
[기타]
132,300명이 있다.(1985년) |
54 의령남(南) 130,179
경주 |
고령 |
고성 |
남양 |
남원 |
남평 |
밀양 |
보성 |
선령 |
안동 |
영양 |
율영 |
의령 |
일흥 |
진주 |
창녕 |
함열 |
해밀 |
총 18개의 본관과 222,246명이 있다.(1985년)
고성, 영양, 의령, 남씨(固城,英陽,宜寧 南氏) |
[유래]
원조 김충(金忠)은
당나라 하남성 봉양부 여남 사람으로서 형주자사를 지냈다.
755년(신라 경덕왕14년, 당나라 현종)에 안염사(安廉使)가 되어 당의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오는 도중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신라 유린지(有隣地,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에 도착하게 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이를 알고 당나라에 통보 하였으나
당나라 천자가 김충의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경덕왕이 영양군(지금의 경북 영양군)에 봉하며
여남(汝南)에서 왔다며(혹은 남쪽에서 왔다고) 성을 남(南)씨로 하고
민첩하다하며 이름을 민(敏)으로 함으로써 남씨가 시작되었다.
그후 고려 충렬왕 때에 김충의 후손인 홍보, 군보, 광보 세명의 형제가
공을 세워 남홍보는 영양군, 남군보는 의령군,
남광보는 칠성(고성)군에 봉해져서 각각
세 본관의 중시조가 되었으며
중시조를 1세 조상으로하고 대를 이어오고있다.
그러나 원조인 김충이 함께 일본에 다녀오던
그의 첫째 아들인 김석중(金錫中)은
성을 받기 전에 출생 하였으므로 본래의 성을 따라 영양 김씨로 하였다.
그래서 영양김씨와 남씨는 성은 틀리나 원조는 김충으로 같다.
[ 고성남씨 항렬표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기(基) |
현(鉉) |
승(承) |
근(根) |
사(思) |
중(中) |
진(鎭) |
구(求) |
영(榮) |
훈(薰) |
재(載) |
흠(欽)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용(溶) |
화(和) |
충(忠) |
회(匯) |
상(商) |
영(永) |
극(極) |
응(應) |
중(重) |
용(鎔) |
태(泰) |
병(秉) |
[ 영양남씨 항렬표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수(守) |
우(佑) |
정(禎) |
욱(旭) |
장(章) |
세(世) |
원(元) |
규(圭) |
영(寧) |
정(正) |
철(喆) |
호(鎬)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영(永) |
표(杓) |
병(丙) |
배(培) |
수(銖) |
한(漢) |
화(和) |
걸(杰) |
재(在) |
용(鎔) |
하(河) |
영(榮) |
[ 의령남씨 항렬표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기(基) |
현(鉉) |
윤(潤) |
식(植) |
병(炳) |
균(均) |
진(鎭) |
구(求) |
주(柱) |
섭(燮) |
규(圭) |
호(鎬)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순(淳) |
근(根) |
영(榮) |
찬(瓚) |
종(鍾) |
수(洙) |
정(禎) |
엽(燁) |
주(周) |
일(鎰) |
영(永) |
표(杓) |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 때 고성 20,599명, 의령 130,179명, 영양 62,761명이 있었다. |
55 현풍곽(郭) 127,322
현풍 곽씨(玄風 郭氏) |
[유래]
시조 곽경(郭鏡)은
원래 송나라 관서지방 홍농사람으로
1133년(고려 인종11년)에 귀화하여 평장사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금자광록대부의 작위와 포산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포산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 포산이 현풍으로 개편되어 현풍으로 개칭하였다.
그외에도 선산, 해미, 봉산 등 여러 본관이 있으나 1976년에 현풍으로 합본하였다. 현풍은 경상북도 달성군에 속한 지명이다.
[기타]
[묘소]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무건리에 있으며,
매년 11월 두째 일요일에 향사한다.
[인구] 127,322명이 있다.(1985년) |
56 장수황(黃) 126,810
장수황씨(長水黃氏) |
[유래]
시조 황경은
신라 경순왕의 부마로 벼슬은 시중을 지냈다.
그후 10세손 황공유가 고려 명종 때에 전중감으로 이의방의 난이 있은 후로 장수로 낙향 하였고, 15세손 황감평이 후학을위한 덕망있는 학자 였다는 것 외에는 18세손 황석부 까지는 고증할 자료가 없다. 중시조 황석부는 황희의 증조부로 사후에 호조참의로 추증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황석부를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 황희(黃喜) : 조선시대의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정승의 지위에 24년간,
그 중 영의정에 18년간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과 예법의 개정,
서얼의 천역(賤役) 면제 등 치적을 쌓았으며, 소신이 굳으면서도 원만하고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히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 황치신(致身): 황희의 아들. 중추부판사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 황수신(守身): 황희의 아들.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 황정욱(廷彧):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광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 황경원(景源): 대제학을 비롯해 이조, 예조,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 황맹헌(孟獻): 황여헌(汝獻), 황효헌(孝獻)
3형제: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다. - 황윤길(允吉): 선조 때 일본에 다녀와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예고했다. - 황엽(曄): 숙종 때의 학자로 의학뿐 아니라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 '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했다. - 황승원(昇源) : 순조 때의 명신 , 한말의 야사(野史)를 엮었다. - 황현(玹) :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이다.
[기타]
[인구] 126,744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주(周)
|
의(義)
|
연(淵)
|
(示)변 인(仁) |
(土)변 하(夏) |
(水)변 규(圭) |
(人)변 상(商) |
24세 |
25세 |
|
|
|
|
|
(火)변 영(永) |
(土)변 진(震) |
|
|
|
|
| |
57 연안이(李) 126,569
연안이씨(延安李氏) |
[유래]
시조는 당나라의 장수 이무(李茂)이다. 그는 신라가 백제를 평정하던 서기 660년(신라 무열왕 7년) 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따라온 중랑장(中郞將)이었다. 이무는 전쟁이 끝난 후 신라에 귀화 하였으며 이에 조정에서는 통일신라에 기여한 그의 무공을 높이사 연안백(延安伯)으로 봉한다(후에 연안후로 가봉됨). 그러나 신라시대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각파의 중시조를 1세조로하고 있다. 후손들이 시조가 식읍으로 하사 받은 연안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번영]
고려시대에 태자첨사 이습홍(李襲洪),
판소부감(判少府監) 이현여(李賢呂),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이지(李漬), 대장군(大將軍) 이송(李松) 등은
연안이씨의 맥을 이어온 4대 산맥이다.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 연안이씨의 주류를 이룬다.
조선시대에 와서
총 250명의 문과 급제자와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배출해 조선의 명문으로서 위세를 떨쳤다. 영조와 순조 때에 부자 대제학, 3대 대제학을 배출하여 명성을 날리고
그와 함께 8정문(旌門)을 자랑한다. 효자 이지남(李至男)에서 부터 아들, 손자, 며느리 8명이
효부, 열녀로 정문을 받아 8정문 집안이 되었다.
이호민(李好閔)은 연안이씨가 자랑하는 외교의 명수.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조좌랑(吏曺佐郞)으로
명나라의 구원병을 끌어들이는데 공을 세웠으며
그 후 부제학(副提學)에 올라 대명외교문서를 도맡아 기초하는 등
탁월한 외교 솜씨를 발휘했다.
전란이 끝난 후 대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이귀(李貴)는 학자의 가문인 연안이씨의 번영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여 명실공히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선조 36년 문과에 급제, 평산부사로 있다가 광해군의 폭정을 개탄하고 사직했다. 1623년 반정을 주동하여 인조를 옹립하여
이공으로 대사헌, 좌찬성에 오르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계 파]
-대장군공파(大將君公派)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이부시랑공파(吏部侍郞公派)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첨사공파(詹事公派)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판소부감공파(判少府監公派)
[집성촌]
충청북도 괴산군 감물면 백양리. 성불산 송림 사이에 연안이씨 한 성받이들이 처마를 맞대고 모였다. 마을 전체 190여 가구 중 반수가 넘는 150여 가구 7백여명이 한 할아버지의 자손들이다. 연안이씨는 당연히 이 마을의 터줏대감이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산뿐인 이 산골에
최초로 연안 이씨의 못자리를 낸 인물은
세종~성종대의 명신 이석형(李石亨)의 손자 이효장(李孝長).
약 4 백년 전 조정의 사화를 피해 첩첩산골로 은신하여
황무지를 개척하며 자손들을 번성시켰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본관지]
황해도 연백군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26,569명이 있었다.
|
58 김해김(金:우록) 125,277
김해김씨(金海金氏, 우록) |
[유래]
시조 김충선(金忠善,1571~1642, 자는 선지, 호는 모하당)은
본래 일본인으로 성은 사(沙)씨이며 이름은 야가(也可)이다. 그가 임진왜란때
21세의 나이로 일본군 가등청정(加藤淸正, 가또오 기요마사)의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삼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월 13일 부산 동래에 상륙 했다. 조선의 문물과 인정, 풍속에 감탄하여 상륙한지 1주일만인 4월 20일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과 김응서(金應瑞)에게
"내가 못난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싶다."라는 편지를 보내
귀순의 뜻을 밝힌 후 귀순하였다. 귀순 후 조선의 장수로 울산과 경주, 영천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조선에 화포와 조총을 만드는 법과 사용술을 보급하였고,
18개 지역의 왜적의 성을 탈환하는 등 눈부신 업적과 전공을 세우자 권율장군과 어사 한준겸(韓浚謙)이 왕에게 간청하여
정이품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선조가 그를 친히 불러 이름을 김충선으로 하사 하였다. 1603년(선조 36년) 북방에서 여진족이 국경을 어지럽히자 국경방어를 자청하여 10년간 국경을 지키다 물러났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다시 출정해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의 목을베어 평정에 공을 세웠다. 1627년(인조 5년)의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모아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서 매복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어 무훈을 떨쳤다. 그는 서른살이 되던 해 진주 목사(晋州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友鹿洞)에 뿌리를 내리고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家風)으로 살다가 1642년(인조 20년) 72세로 세상을 마쳐 가창골에 세워진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되었고, 정헌대부 지중추부사(正憲大夫 知中樞府事),
병조참판(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지금 그의 후손들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 많이 살고 있으며 우록동에 살았기 때문에 우록김씨라고도 불리운다.
- 묘소는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 삼정산에
부인의 무덤과 나란히 있다.
[가문의번영]
김충선은 슬하에 아들 5형제를두었는데
장남 김경원(金敬元)이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둘째 김경신(金敬信)은 공조참판(工曹參判)에 각각 추증되었고, 셋째 김우상(金右祥)은 상호군(上護軍)을, 넷째 김계인(金繼仁)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으며,
막내 김경인(金敬仁)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어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경원의 둘째 아들 김진영(金振英)이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참찬관(參贊官)을 역임했고, 김여삼(金汝三)은 노모가 죽자 삼성산(三聖山)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이나 시묘(侍墓)를 극진히 하여 "효행록(孝行錄)"에 실렸으며, 김용하(金龍河)는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벼슬을 사직하여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을 지켰다.
[집성촌]
경북 달성군 가창면
[본관지]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김해125,277명,
우록130명이 있었다.
|
59 정선전(全) 124,993
정선전씨(旌善全氏) |
[유래]
시조 전섭은 백제 개국공신이다.
그는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 아들 온조(溫祚)가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할때 오간(烏干), 을음(乙音)등과 함께
온조를 도운 10명의 공신중의 한사람으로
후에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전란속에 전섭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7세에 걸쳐 소멸되었다. 신라통일 이후 8세손 전선이
성덕왕 22년 당나라에 입국하여 중국의 문물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로 후에 벼슬이 전법(典法)판서에 오르고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섭을 시조로 하고 전선을 득관중시조로하고 있다. 전씨문중은 정선,천안,성산 등 18본으로 분관되지만 모든 전씨는 전섭을 도시조로 하고 정선을 대종으로 한다.
[ 대표적 인물 ]
전씨는 역사깊은 명문벌족으로
신라, 고려시대를 통틀어 군(君)에 봉해진 사람이 35명, 정승 12명, 판서 43명을
배출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만 57명을 배출했다.
이러한 전씨문중에서
특히 고려개국 삼충공(三忠公)인 전이갑(全以甲), 전락(全樂)등 3형 제를 빼놓을수 없다. 이들은 후삼국 통일의 야망을 키우던 왕건이 팔공산
오동숲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사와 일대 접전을 벌이다
적에게 포위를 당하자 전이갑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적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왕건을 탈출시키고
3형제는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 한다.
이밖에도 정선아리랑의 작가 전오륜(全五倫)과 고려왕가에 충절을 지킨
고려말 공조판서 전순(全順)과 병부상서에 올랐던 전신(全信)등이있다.
조선말기의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땅에 최초로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트게한 동학혁명의 지도자이다.
그는 삼충공의 한 사람인 전락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되자 사회개혁을 결심하고 30세때 동학에 입문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가 된다.
그리고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백성의 고통 받자 보다 못해
동학혁명을 일으켜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일깨워준다.
처음에는 계속 승전하여 전주를 점령하고 크게 전세를 떨쳤으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들어오고,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해 일본군도 입국하자 이천, 목천, 공주의 혈전에서 패배하고,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韓信賢)등의 지방민에 의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이러한 동학혁명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중혼은 일제의 암흑기에 이르러 숱한 독립투사를 배 출한다. 안창호선생과 신민회를 조직,
적극적으로 배일(排日)운동을 벌였던
전덕기와 의병장 전덕원 등이 그들이다.
[기타]
[인구] 124,993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47세 |
48세 |
49세 |
50세 |
51세 |
52세 |
53세 |
형(鎣) |
우(雨) |
인(寅) |
병(炳) |
영(瑛) |
탁(鐸) |
제(濟) |
54세 |
55세 |
56세 |
57세 |
58세 |
59세 |
60세 |
표(杓) |
찬(燦) |
재(宰) |
상(商) |
구(求) |
계(桂) |
휴(烋) |
61세 |
62세 |
63세 |
64세 |
65세 |
66세 |
67세 |
규(珪) |
태(兌) |
한(翰) |
목(穆) |
형(炯) |
순(珣) |
용(鏞) |
68세 |
69세 |
70세 |
71세 |
72세 |
73세 |
74세 |
준(濬) |
장(樟) |
도(燾) |
정(珽) |
일(鎰) |
홍(泓) |
환(桓) |
75세 |
76세 |
77세 |
78세 |
79세 |
80세 |
81세 |
희(火義) |
선(璿) |
훈(金義) |
흡(洽) |
기(杞) |
효(火高) |
배(培) |
82세 |
83세 |
84세 |
85세 |
86세 |
87세 |
88세 |
옥(鈺) |
박(薄) |
모(模) |
경(炅) |
준(埈) |
주(鑄) |
환(渙) |
89세 |
90세 |
91세 |
92세 |
93세 |
94세 |
95세 |
병(柄) |
걸(杰) |
찬(瓚) |
수(銖) |
형(泂) |
? |
황(煌) |
96세 |
97세 |
98세 |
99세 |
100세 |
|
|
은(垠) |
강(鋼) |
철(澈) |
종(棕) |
욱(煜) |
|
| |
60 평해황(黃) 124,072
평해황씨(平海黃氏) |
[유래]
시조 황온인(黃溫仁)은 황락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황은인은 고려 때 금오위장군 태자검교를 지내고 평해에서 대대로 살았으므로 황온인을 1세조상으로 하고 본관을 평해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 황희석(希碩) :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개국공신 2등에 올랐다. - 황현(鉉) : 세종 때 대사성을 지낸 조선 전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 황여일(汝一) :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뒤에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 기록한
'조천록(朝天錄)' 등의 저서가 있다. - 윤석(允錫) : 영조 때의 실학자, 언어학자로서 그의 문집인 '이재유고'와 그가 저술한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는 오늘날 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기타]
[인구] 124,072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섭(燮) 윤(潤) 구(九) |
재(載) 식(植) 병(昞) |
석(錫) 찬(燦) 범(範) |
하(河) 달(達) 현(鉉) |
주(柱) 종(鍾) 수(洙) |
환(煥) 영(永) 래(來) |
기(基) 동(東) 열(烈)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흠(欽) 희(熙) 재(在) |
태(泰) 규(奎) 호(鎬) |
식(植) 호(鎬) 순(淳) |
병(炳) 한(漢) 식(植) |
규(奎) 락(樂) 찬(燦) |
종(鍾) 경(景) 배(培) |
순(淳) 기(基) 련(鍊) | |
61 김해허(許) 121,603
김해허씨(金海許氏) |
[유래]
시조 허염(許琰)은
수로왕비 허황옥의 35세손으로 고려 문종때 출생하여 공을세워
삼중대광으로 가락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김해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김해로 하였다.
[기타]
파는 가락군(인전)파, 호은공(기)파, 중승공(린)파, 전직공(인부)파, 증성군(구년)파, 판서공(언용)파, 상서공(상)파가 있다. |
62 선산김(金:일선) 120,214
선산김씨(善山金氏, 일선) |
[유래]
시조 김선궁(金宣弓)의 원래 이름은 김선(宣)이며
신라 문성왕의 8세손이며 김알지의 30세손이다.
그는 어렸을때 아버지에게 상해를 입힌자의 목을 베고 처벌을 자청하여
투옥이 된후 조정에서 효자라며 석방하고 표창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 할때
선산군에 이르러 군사를 모집했는데
종군할것을 희망하자 태조가 기뻐하여 친히 어궁을 하사하고
선궁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때 부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워 정란보국공신에 오르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하고
본관을 일선으로 했는데 조선 태종때 일선이 선산으로 지명이 바뀌어
선산김씨로 본관을 바꾸었다. 그의 아들 시중을 역임한 김봉술(奉述)과
삼사우윤 김봉문(奉文)의 형제대에서 세계가 갈라졌다.
[ 대표적 인물 ]
- 김봉술계에서 고려 말의 절신(節臣)인 김제(濟), 김주(澍)와 조선시대의 좌의정 김응기(應箕), 동인의 영수 김효원(孝元), 판서 김이원(履元), 김세렴(世廉) 등이 있다. - 김봉문계에서는 거유(巨儒) 김숙자(淑滋), 판서 및
학자인 김종직(宗直) 등이 있다. - 조선시대에 문과 60명을 배출하였다.
[기타]
[인구] 120,214명이 있다.(1985년, 김추계와 합한 숫자임)
|
선산 김씨(善山 金氏, 김추계) |
[유래]
시조 김추(金錘)는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이다. 김추가 고려 태조의 외손자로 일선(선산)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선산으로 하였다.
[항렬표]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원(遠) 병(秉) |
동(東) 용(容) |
묵(默) 재(載) |
교(敎) 호(鎬) |
조(祚) 승(承) |
사(思) 집(集) |
구(九)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
|
우(雨) |
녕(寧) |
성(誠) |
기(記) |
재(宰) |
| |
63 한산이(李) 119,174
한산이씨(韓山李氏) |
[유래]
한산이씨는 같은 뿌리이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한산이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장공계의 시조는
고려 숙종 때 호족으로서
권지호장직(權知戶長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그러나 시조라 할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다. 이곡은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우탁 이동(易東),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워
한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권지공계(權知公系)의 시조 이윤우(李允佑)는 고려시대에 문과에 올라 왕의 신임을 얻어 동생 이윤경과 함께
각각 한산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장공계의 족보에는 두사람이 형제였다는 내용이없다. 권지공계는 여러대를 독자로 자손을 이어 왔으므로
아는 사람이 드믈고 현달한 사람도 없다.
[가문의번영]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 대문장가 이산해(李山海) 등으로써
이름난 한산이씨는 조선시대 상신 4명, 대제학(大提學) 2명,
청백리(淸白吏) 5명, 공신 12명과 문과 급제자 195 명을 배출했다.
이종선(李種善)은
명문으로서 여흥부사 등을 지내고 1417년 풍해도와
충청도의 도관찰사를역임한 후 문성유후(門城留後)에 이어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이맹균은
1385년 문과에 급제, 성균직학(成均直學)을 거쳐 조선개국 후 1418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425년 진위사(陳尉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와 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고려말의 석학(碩學)이요,
대유(大儒)로서 조선조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이색은
원나라 제과에 급제,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하자 여주, 장흥 등지로 유배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여강(驪江)으로 가던중 간신들에의해 주중폭사(舟中暴死)하였다. 유명한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 또한 한산이씨 가문을 불사이군의 충절로서 빛낸 인물이었다.
그는 1436년 문과에 급제하여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1456년 직제학에 이르렀다. 성삼문(成三門),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근세인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를 들 수 있다.
[계 파]
-감찰공파(監察公派) -공무공파(恭武公派) -광목공파(光牧公派) -문열공파(文烈公派) -문혜공파(文惠公派) -순절공파(順節公派) -양도공파(良度公派) -직강공파(直講公派) -진목공파(晋牧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총제공파(摠制公派)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
권지공계 : 통례공파(通例公派), 경력공파(經歷公派), 동추공파(同樞公派), 한천군파(韓川君派), 현령공파(縣令公派)
[집성촌]
-경기도 광주, 포천, 가평, 용인군 -강원도 회양군 상북면 -충북 청원군 북일면 -충남 공주, 대덕, 보령, 예산군, 서천군 한산면, -전북 옥구군 성산면 도암리 -황해도 해주군 -함경북도 경성군
[본관지]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19,174명이 있었다.
|
64 반남박(朴) 118,838
반남박씨(潘南朴氏) |
[유래]
시조 박응주(朴應珠)는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선조를 알수가 없으나
반남현(나주)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선비집안의 후손으로 호장을 지냈고
그의 6세손 박은이 조선초기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익재동덕좌명공신으로 좌의정에 이르렀고 반남군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박응주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반남으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박은, 박숭질(崇質), 박세채(世采), 박종악(宗岳), 박종훈(宗薰), 박회수(晦壽) 등의 상신,박태상(泰尙), 박규수(珪壽) 등의 대제학, 박세당(世堂), 박지원(趾源) 등의 뛰어난 학자가 있으며, 박소(紹), 박응남(應男), 박응복(應福), 박태보(泰輔) 등의 인물이 있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15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과 조선 후기에 판서급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박씨 중에서 벼슬이 가장 화려하다.
[기타]
[인구] 118,838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緖 |
贊○ |
○雨(夏,儁) |
天(仁,持)○ |
○春(承) |
憲(寧)○ |
○吾(五)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章(宰)○ |
○虎(純) |
謙(善)○ |
○旭(九) |
平(斗)○ |
|
| |
|
65 충주지(池) 118,410
경주 |
광주 |
단양 |
전주 |
진주 |
청송 |
청주 |
충남 |
충북 |
충주 |
평산 |
평창 |
해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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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13개의 본관과 125,624명이 있다.(1985년)
충주지씨(忠州池氏) |
[유래]
시조 지경(池鏡, 903~1003,
시호는 선의, 자는 자운, 호는 암곡)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 사람으로
960년(고려 광종 11년)에 귀화했다. 당시 태학사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경의 6세손인 지종해(池宗海)가 충주에 살았으며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로 충주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또 본래는 충주 지씨였다가
고려 태조에게
충주 어씨로 성을 하사 받은 어중익(魚重翼)도 충주 지씨 6세이다. '충주지씨대동보'는 시조 지경의 아들에 지해관(海貫, 찬성사), 지도관(道貫, 평장사) 형제가 있고, 지해관의 아들에 지윤(胤, 안렴사), 지영(瀛, 부원수) 형제가 있으며, 지영의 아들에 지득상(得尙, 평장사), 지응상(應尙, 찬성사)이 있어 지득상의 손자가 지종해(평장사)이고 지응상의 손자가 지중익, 즉 어중익(평장사)으로 기록되어 있다.
-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 대표적 인물 ]
- 지용수(龍壽) : 고려 공민왕 때 서북면지병마사로 홍건적을 물리쳐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 지윤(奫) : 우왕 때 서북면도원수가 되고 다시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 지용기(湧奇) : 고려 우왕 때 이성계 휘하에서 위화도 회군에 참가하여 충원부원군에 봉해졌다. - 지여해(汝海) : 조선시대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지계최 :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 지덕해(德海) : 병자호란 때 활약하였다. - 지석영(錫永) : 우두법을 처음으로 보급한 의학자이다. - 지운영(運英) : 지석영의 형. 서화가(書畵家)로 유명하다. 그밖에 독립운동가로 지청천(靑天:일명 李靑天), 지하영(霞榮) 및 의병장 지홍문(弘文)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 10명을 배출했다.
[기타]
[인구] 118,410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재(載) 대(大) |
현(鉉) 호(鎬) |
구(求 ) 영(永) |
근(根) 식(植) |
환(煥) 묵(默) |
배(培) 철(喆) |
선(善)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
|
|
태(泰) |
수(秀) |
열(烈) |
균(均) |
|
|
| |
66 고령신(申) 117,333
고령신씨(高靈申氏) |
[유래]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검교 군기감을 역임했다.
신성용의 선조는 신라의 선비로 대대로 고령에 살면서
호장을 지내왔으므로
후손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8세손 신숙주가 익재좌리공신으로 고령 부원군에 봉해졌다.
[기타]
[인구] 117,333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권(權) |
록(錄) |
모(模) |
구(求) |
휴(休) 빈(彬) |
우(雨) |
식(植)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호(浩) |
수(秀) |
희(熙) |
규(圭) |
종(鍾) |
영(永) |
상(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
|
섭(燮) |
재(在) |
용(鎔) |
태(泰) |
근(根) |
|
| |
67 양천허(許) 114,863
양천허씨(陽川許氏) |
[유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의 30세손으로 고려조 대광공(大匡公)이었다.
대대로 공암촌에 살면서 농사에 힘을 써 거부가 되었다.
마침 고려태조가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이 부족하여였는데
군량을 보급하여 군의 사기를 회복케 함으로서
후백제 견훤을 대파하였다.
태조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가부(假父)라 칭하고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이로 인하 여 본관을 공암(양천)으로 하였다.
[기타]
허씨네 집안의 뿌리찾기
-허찬회님의 홈페이지- |
68 영월엄(嚴) 114,191
총 8개의 본관과 116,002명이 있다.(1985년)
영월엄씨(寧越嚴氏) |
[유래]
시조 엄임의(嚴林義)는
원래 중국의 당나라 사람으로 신시랑(영주 莘씨의 시조)과 함께
사신으로 신라 35대 경덕왕때 우리나라에 파락사라는 사신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엄씨와는 서로 종씨라 부르며
혼인도 하지 않고 의좋게 살았었다고 한다. 엄임의가 고려 때에 호부 원외랑을 지내고
첫째 아들 엄태인이 군기감을 지내고 영월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 엄임의의 묘소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동산에 있다.
[기타]
[인구] 114,191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석(錫) |
영(永) |
주(柱) |
섭(燮) |
기(基) |
용(鎔) |
태(泰) |
3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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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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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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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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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천안전(全) 114,016
천안전씨(天安全氏) |
[유래]
시조 전섭은
온조왕이 백제를 개국할 때
오간(烏干), 마경(馬?),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등 9사람과 함께 개국에 공을 세우고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歡城, 천안의 별호)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천안으로 하고 16세손 전낙을 중시조로 한다.
- 천원군 풍세면 삼대리에 단(壇)을 만들고 음력10월 1일 향사한다.
[ 대표적 인물 ]
고려 충숙왕때의 전신(全信)은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지냈 으며
백이정, 이제현(李齊賢) 등 당시의 석학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조선 선조36년 무과에 급제한 전상의(全尙毅)는 여러 벼슬을 거쳐
인조 5년 정묘호란 때 구성부사로서
안주성(安州城)을 지키다가 순절했다.
전동흘(全東屹)은 효종 때 무과에 급제해
특히 용병에 능하여 이상진(李尙眞), 소두산(蘇斗山)과 함께 삼걸(三傑)이라 불렀으며 현종때 7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숙종때는 훈련대장(訓鍊大將)등을 지냈는데
통영(統營)에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지기까지 했다.
전동흘(全東屹)은
철산부사 시절에 장화와 홍련의 원한을 풀어준 일화로도 유명하다.
[기타]
[인구] 114,016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52세 |
53세 |
54세 |
55세 |
56세 |
57세 |
58세 |
용(用) |
원(元) |
상(尙) |
래(來) |
무(茂) |
범(範) |
상(庠) |
59세 |
60세 |
61세 |
62세 |
63세 |
64세 |
65세 |
재(宰) |
정(廷) |
옥(沃) |
위(胃) |
욱(旭) |
남(南) |
우(雨) |
66세 |
67세 |
68세 |
69세 |
|
|
|
성(晟) |
기(起) |
강(康) |
장(章) |
| |
70 제주양(梁) 113.419
제주양씨(濟州梁氏) |
[유래]
중시조 양순은 양탕의 후손이며
682년(신라 신무왕 2년) 신라에 입국하여 국학에 입학하고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러나 대신들이 외국인 고관을 꺼렬 승진을 못하게 되자
왕이 한라군에 봉하게 되어 중시조가 되고 본관을 제주로 하였다.
[기타]
[인구] 113,419명이 있다.(1985년)
[계파]
- 유격장군파 : 양보승 - 천호공파 : 양중덕 - 사직공파 : 양유침 - 중랑장공파 : 양흥 - 서두봉관파 : 양의 |
71 전의이(李) 112,087
전의이씨(全義李氏) |
[유래]
시조 이도(李棹)의 초명은 치(齒)며 익호는 성절(聖節)이다. 본래 공주에 세거했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고자 남하하여
공주에 도착했을 때,
금강이 범람하자 태조를 도와 무사히 강을 건너게했다.
그래서 태조로부터 도라 는 이름을 하사받고,
통합삼한개국익찬(統合三韓開國翊贊) 2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고
전산(全山. 현재의 전의)후에 봉해졌다. 그후 전의 계성산 아래로 이사해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전의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묘소는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력 3월 3일과 10월 2일이다.
[가문의번영]
고려시대에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낸 이혼(李混)을 비롯하여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이지저,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지낸
이언충(李彦沖) 등 많은 관직자를 배출, 가문의 기틀을 잡았다. 특히, 이사경(李思敬)은 1356년 서북면 병마부사를 지내고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에 올랐다.
조선시대에 이정간(李貞幹)은 음보로 등용되어
강원도 도관찰사(都觀察使)에 이르러서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세종으로부터 궤장, 주악(酒樂)과 "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라는 여덟자의 친서를 받았다. 세조때의 이예장(李禮長)은 병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이덕양(李德良)은 호조판서를 지냈는데
그는 벼슬하면서 청렴으로 일관했다. 이수남(李壽男)은 1458년 문과급제하고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전산군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효석(李孝碩)은 음보(陰補)로 정평부사(定平府使)로 재임중 침입한 호적(胡賊)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명종때의 이준민(李俊民)은
1549년 문과급제하고 여러 내외직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이제신(李濟臣)은 1564년 문과급제, 1568년 사은사(謝恩使)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시문과 서예에 능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인조때의 이상진(李尙眞)은 1645년 문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우의정을 지냈고, 이천상(李天相)은 배유장(裵幼樟)에게 수학, 성리학에 정통했으며, 이황과 이재를 사숙했다. 그는 학행으로 참봉에 주어졌으나
취임하지 않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계 파]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문장공파(文莊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문의공파(文義公派)
[집성촌]
-경기도 성남시 구미동, 연천군 남면 선곡리 -충북 청원군 오창면 학소리, 중원군 이류면 검단리 -전북 완주군 봉동읍 낙평리, 옥구군 개정면 운회리 -전남 나주군 세지면 교산리 -경북 고령군 다산면 상곡동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의령군 유곡면 세우리 -황해도 벽성군 고산면 수정리
[본관지]
충남 연기군 전의면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12,087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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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능성구(具) 111,747
능성 구씨(綾城 具氏) |
[유래]
시조는 구존유이며
관직은 검교상 장군에 이르렀다.
구존유의 장인인 주잠(朱潛)은 송나라 한림학자로서 송나라가 몽고에 패망하자 1224년(송 희정7년) 구존유와 함께 망명하였다.
주잠이 릉성에서 살며 2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이 구존유에게 출가하여 릉성에서 살게되자
구존유가 릉성을 본관으로 하였다.
[기타]
[시조 묘소] 화순군 한천면 정리에 있었으나 없어졌다.
[인구] 111,747명이 있다.(1985년) |
73 담양전(田) 109,213
담양전씨(潭陽田氏) |
[유래]
시조 충원공 전득시(田得時)의 익호(瀷號)는 충원(忠元)이다. 그는 고려 중엽 때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고 고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으며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의 후대에 와서는 10여개의 파로 분류되지만 관향을 담양으 로하는 한 할아버지의 자손으로 단일본이다.
[가문의번영]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문과 급제자 127명, 봉군 15명 판서급 22명, 정승 3 명 등을 배출한다. 시조 전득시의 후손은 6세(世)까지 독자로 내려오다가 7세에 이르러 전녹생(田祿生), 전귀생(田貴生), 전조생(田祖生)의 3형제가 태어났는데 이들이 "삼은전선생(三隱田先生)"으로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고려말의 석학 전조생은
충혜왕이 임종시 어린 두 왕자의 보필, 정사를 처리해 줄 것을 부탁했던 당대의 명 신이요 대문장가였다. 후에 충정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치가 문란, 이 때문에 찬성사를 끝으로 벼슬을 사양했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충정왕을 강화까지 호송하고 은거하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두문동에 들어가 순절했다. 전우(田愚)는
한말 성리학의 대가로 13 세때 사서삼경을 읽고 20세 안에 초과, 중과 등 양과에 오른 수재 였으며 만년에는 부안의 계화도에 은거, 많은 후진들을 길러냈다. 그 는 우리나라 500년 유문(儒門)의
도통(道統)을 계승한 최후의 대종(大宗)이었다. 영조 때 삼도통제사 등을 지낸면서 병선과 병차 를 제작했던
전운상(田雲祥)도 담양 전씨가 배출한 명장이었다.
그가 만든 해골선은 거북선에 필적하는 해전용 철갑선이다. 그밖에 임진왜란 때 왕의 의주 피난길을 도와 호성(扈聖)원종공신에 오른 전윤(田潤)과 전득우(田得雨) 등이 있다.
[계 파]
양은공파 : 7세손 전녹생(田祿生) 뇌은공파 : 7세손 전귀생(田貴生) 경은공파 : 7세손 전조생(田祖生)
[집성촌]
경남 의령군 용덕면 죽전리. 담양 전씨 가문이 20여대에 걸쳐 5백여 년 동안 내리 살아온
전씨 집성촌이다. 자손이 대나무처럼 죽죽 자라 번성한다해서 죽전리(竹田里)인 마을에 담양 전씨의뿌리를 내 린 최초의 인물은 고려시대의 명신 전조생(田祖生)의 6세손인 운암공(雲菴公) 전훈(田勳)이다.
그가 관향인 담양에서 이 마을로 이주하게 된 내력은확실치 않다.
[본관지]
-전남 담양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 109,213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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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함평이(李) 103,696
함평이씨(咸平李氏) |
[유래]
시조 이언(李彦)은
고려 광종때에 신무위 대장군(神武衛 大將軍)으로 봉해졌고,
이어 충숙왕때 고손되는 이광봉(李光逢)이 벽상삼한삼중대의 보국숭록대부 좌명공신으로 함풍(咸豊. 함평의 옛이름) 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여러대에 걸쳐 그곳에서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함평으로 하였다.
[가문의번영]
조선초기에 무로써 가문을 일으켜 조선시대에만 70여명의 문신,
무신을 배출하였다. 중시조는 시조의 10대손인 이종생(李從生),
그는 세조때의 무장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야인 정벌등에 용맹을 떨치고
각도의 병마절도사를 두루 역임했는데 함평이씨의 뛰어난 인물은
거의가 그의 후손이다. 그의 아들 이양(李良)장군 또한 연산군~중종 때에 전라,
충청 수군절도사, 함경도 병마절도사등을 지냈던 인물이다.
이대원(李大源)은
선조16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남해안에 출몰한 왜적을 추격하여 적장을 사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흥양지방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백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3일간의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포로가 됐으나 항복을 거부하고 순국했다. 그의 충정을 기리는 뜻에서 쌍충사(雙忠祠)가 건립되었다. 선조때 이덕일(李德一)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왜적과 싸웠다.
그는 화살하나로 두명의 적을 쓰러트릴만큼 활솜씨가 뛰어나 이같은 용맹이 알려져 이순신장군의 참모로 기용되어 임진왜란을 종결시키는데 크게 공을세워
절충(折衝)장군(정3품)에 올랐다.
[계 파]
-감정공파(監正公派) -교수공파(敎授公派) -기성군파(箕城君派) -기와공파(箕窩公派) -대교공파(待敎公派) -목사공파(牧使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운봉공파(雲峯公派) -지평공파(持平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철성군파(鐵城君派) -판관공파(判官公派) -함성군파(咸城君派) -현감공파(縣監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효우공파(孝友公派)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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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 |
- |
유(儒)- |
-서(緖) |
민(敏)- |
-헌(憲) |
계(啓)- |
-범(範) |
재(載)- |
-행(行)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건(建)- |
-성(聖) |
규(奎)- |
-선(善) |
원(源)- |
-식(植) |
희(熙)- |
-기(基) |
진(鎭)- |
-수(洙)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병(秉)- |
-열(烈)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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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함평군은
고려 충숙왕때 함평부원군에 봉해진 이광봉의 못자리를 잡은 이후
그 후손들이 7 백여년 동안 문전옥답을 가꾸며 살았다.
초포리는 마을전체 1백여가구 500여명이 모두 함평이씨이었다.
초포리에 처음 뿌리를 내린 조상은 수사(水使)를 지냈던 이춘수(李春秀)로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함평에 정착하여 후학들을 양성했다. 세종때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긍(李兢)은 그의 아들이다. 함평은 일제하에서 전남지방 항일운동의 산실로 유명해져 호남사람들이 강골촌(剛骨村)으로 꼽는 3성(장성, 곡성, 보성),
3평(함평, 남평, 창평)에 뽑히는 영예를 누릴수 있었다.
[본관지]
-전라남도 함평군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03,696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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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함양박(朴) 103,220
함양박씨(咸陽朴氏) |
[유래]
시조 박언신(朴彦信, 속함대군)은
신라 경명왕(박혁거세의 29세손)의 셋째 아들이다.
그가 속함대군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였으나 문헌이 없어져서 고증을 하지 못하고 고려 때 예부상서를 지낸 박선(朴善)을
중시조로 하고 1세조상으로 하였으며
속함이 함양으로 개칭되어 본관을 함양으로 하였다.
고종 때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응천군에 봉해진 박신유의 여섯 아들에서 6파로 갈라졌으며 세칭 '육지파(六之派)' 라고 한다.
- 중시조 박선의 묘소는 경남 함양군 함양읍 사금동에 있다.
[ 대표적 인물 ]
박충좌(忠佐), 박초(礎), 박습(習), 박대립(大立), 박세영(世榮), 박세무(世茂), 박세옹(世), 박민헌(民獻), 박헌(軒) 등이다. 조선시대에 6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 계파 ]
- 군기소감공파(軍器少監公派) : 박지문(之文) - 문원공파(文元公派) : 박지빈(之彬) -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 : 박지량(之亮) - 부사공파(副使公派) : 박지수(之秀) - 어사공파(御史公派) : 박지온(之溫) -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 박지영(之穎)
[기타]
[인구] 103,220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2세 |
23세 |
24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진(鎭) |
한(漢) |
상(相) |
재(在) |
석(錫) |
철(澈) |
채(采)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
|
혁(赫) |
균(均) |
현(鉉) |
태(泰) |
주(柱) |
|
| |
76 풍천임(任) 103,108
풍천임씨(豊川任氏) |
[유래]
시조 임온(任溫)은
중국 소홍부 자계현 사람으로 그의 6세손 임주(任澍)가
1275년(고려 충렬왕 1년)에 충렬왕의 왕비이며
원나라의 황녀인 제국공주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와 귀화하여
경상도 추동 안찰사를 거쳐 어사대부, 감문위 대장군을 지내고 풍천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풍천 임씨는 임주의 아들대에서 충숙왕 때 삼사판사 임자송(子松)과
민부전서 임자순(子順)의 두 갈래로 크게 나뉜다.
- 임주의 묘소는 풍천 전석산 아래에 있으며, 음력 9월 13일에 향사한다.
[ 대표적 인물 ]
- 임원준(元濬) : 임자송의 5세손. 조선 세종~성종 때의 총신이며 학자였다. 아들 임사홍이 중종반정에 연루되어 관작이 추탈되었다. - 임사홍(士洪) : 임원준의 아들. 아들 임광재(光載)가 예종의 사위가 되고, 임숭재(崇載)가 성종의 사위가 되면서 정권의 중심에 등장하여 권신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하여 중종반정 때 피살되었다. - 임희재(熙載) : 임숭재의 동생. 성종 때 직제학을 지냈는데 아버지, 형과는 달리 연산군을 비방하여 갑자사화 때 화를 입었다. - 임열(說) : 임자송의 8세손. 명종 때 한성판윤, 제학을 지냈다. - 임유겸(由謙) : 임자순의 7세손. 중종 때 한성판윤,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 임유후(有後) : 임열의 후손. 현종 때 병조참판이며 명신으로 이름났다.
[기타]
[인구] 14,110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준(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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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鎬)
|
재(宰)
|
공(公) 순(淳)
|
빈(彬) 식(植) 동(東) |
혁(赫) 희(熙) 열(烈) |
중(中) 균(均) 세(世)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종(鍾) 선(善) 진(鎭) |
원(源) 수(洙) 한(漢) |
계(桂) 상(相) 구(九) |
병(炳) 헌(憲) 환(煥) |
효(孝) 범(範) 규(圭) |
현(鉉) 진(鎭) 옥(鈺) |
연(淵) 우(雨)
|
39세 |
40세 |
|
|
|
|
|
근(根) |
열(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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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원주원(元) 102,748
강원 |
경주 |
남원 |
대전 |
영월 |
원주 |
전주 |
청주 |
해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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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개의 본관과 104,472명이 있다.(1985년)
원주원씨(原州元氏) |
[유래]
원씨는 4파가 있는데 각각 시조를 다르게 하고 있다.
응암 운곡계는 당나라 태종 때 우리나라에 파견온 원경을 시조로 하며,
원성백계는 원극유, 시중공계는 원익겸,
충숙공계는 원충갑을 시조로 하고 있다.
[기타]
[인구] 102,748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응암 운곡계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규(圭)
|
호(鎬)
|
영(永) 승(承) |
식(植) 직(稙) |
묵(默) 훈(勳) |
치(致) 교(敎) |
종(鍾) 용(鏞)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구(求) 수(洙) |
동(東) 상(相) |
우(愚) 노(魯) |
혁(赫) 철(喆) |
회(會) 선(善) |
태(泰) 제(濟) |
수(秀) 목(穆) |
51세 |
52세 |
53세 |
54세 |
55세 |
56세 |
|
병(炳) 형(炯) |
균(均) 기(基) |
상(商) 정(正) |
준(浚) 택(澤) |
인(寅) 진(震) |
열(烈) 섭(燮) |
|
원성백계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후(厚) |
의(義) |
제(濟) |
식(植) |
유(裕) |
재(載) |
종(鍾)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호(浩) |
영(榮) |
성(性) |
규(圭) |
석(錫) |
윤(潤) |
동(東)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현(顯) |
배(培) |
진(鎭) |
수(洙) |
상(相) |
용(容) |
중(重) |
50세 |
|
|
|
|
|
|
호(鎬) |
|
|
|
|
|
|
시중공계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세(世) |
상(常) |
용(容) |
희(憙) |
종(鍾) |
연(淵) |
동(東)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섭(燮) |
치(致) |
선(善) |
태(泰) |
모(模) |
병(丙) |
기(基)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현(鉉) |
영(泳) |
주(柱) |
열(烈) |
재(載) |
용(鎔) |
홍(洪)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51세 |
근(根) |
희(熙) |
배(培) |
경(庚) |
제(濟) |
영(榮) |
노(魯) | |
78 여양진(陳) 100,232
강릉 |
경주 |
광동 |
김해 |
나주 |
남해 |
덕창 |
밀양 |
복주 |
부여 |
삼척 |
신광 |
안동 |
양산 |
양주 |
여양 |
여주 |
여홍 |
연안 |
영양 |
온양 |
의령 |
암파 |
전주 |
죽산 |
진산 |
진주 |
청주 |
충주 |
평신 |
함양 |
해주 |
홍덕 |
홍성 |
흥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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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35개의 본관과 123,087명이 있다.(1985년)
옛문헌에 120여개의 본관이 나오나 여양 진씨이외에는
시로와 유래를 알 수가 없다. 삼척 진씨, 나주 진씨, 강릉 진씨는 이미 여양 진씨로 합본하였으며 진산, 광동을 본관으로 하는 진씨는 여양 진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여양진씨(驪陽陳氏) |
[유래]
진씨는 원래 중국 송나라 때 복주 출신인 진수가
우윤 벼슬을 지내다 국난이 일어나자 우리나라에 건너와
여양현(현 충남 홍성군 장곡면) 더걍산 아래 정착하여 살았는데
그의 후손인 진총후가 고려 예종 때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여양군에 봉해져서 그의 후손들이 진총후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여양으로 하였다.
[기타]
[인구] 100,232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하(夏)
|
성(成)
|
범(範) 희(熙) |
용(庸) 광(廣) |
장(章) 언(彦) |
수(壽) 선(善) |
호(昊) 환(奐)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익(翼) 우(遇) |
원(元) 구(九) |
상(商) 남(南) |
녕(寧) 전(殿) |
재(載) 무(茂) |
면(勉) 기(紀) |
도(度) 경(慶)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달(達) 재(宰) |
성(聖) 정(廷) |
규(揆) 발(發) |
기(冀) 용(用) |
집(執) 광(光) |
주(周) 동(同) |
백(百) 형(衡) |
45세 |
46세 |
47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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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咸) 의(義) |
용(龍) 선(選) |
상(庠) 곽(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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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나주나(羅) 99,089
나주 나씨(羅州 羅氏) |
[유래]
당 태종때에 수선관을 지낸 나부가 정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나주에 살면서 그의 후손들이 나부를 시조로 하고 여황 나씨로 하였으나,
고려 성종때 여황이 나주로 바뀌면서 나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후손의 기록을 알수 없어 나득규를 중시조로 1세조로 하고있다.
[기타]
[시조의 제단] 전남 나주군 나주읍 송월리에 있으며
매년 3월 15일에 향사 한다.
[인구] 99,089명이 있다.(1985년) |
80 합천이(李) 98,595
합천이씨(陜川李氏) |
[유래]
시조 이개(李開)는
신라 때 벼슬하여 강양(江陽 : 지금의 합천)군에 봉해졌고
고려가 건국되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태조의 부름을 거역
가수현장(嘉樹縣長)으로 강등되었다가
합천호장(陜川戶長)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시조로 삼고 합천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그의 조상은 신라 6촌중 하나인 알천 양산촌의 촌장 알평이다.
-묘소는 경남 합천군 용주면 월평리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력 10월 1일이다.
[가문의번영]
고려시대에 이문저(李文著)는
음보로 벼슬에 나가 이부시랑, 상서좌승 등을 거쳐
1179년 김자광록대부 수사공특진 상서우복야 태자소보(金紫光祿大夫 守司空特進 尙書右僕射 太子少保)에 이르렀다. 이순목(李淳牧)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이신손(李信孫)은 좌서윤(左庶尹)을 지냈으며,
이덕손(李德孫)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이승로(李承老)는
충목왕 때 밀직사사를 지내고 1354년 지밀직사사에 이어
정당문학에 승진한 후 강양백(江陽伯)에 봉해졌으며,
이운목(李云牧)은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냈다.
조선 중종 때의 이복로(李福老)는
1495년 사마시를 거쳐 151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봉상사판관(奉常寺判官) 등을 거쳐 초계군수를 지냈다. 이윤검(李允儉)은
1472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중종때의 이희민(李希閔)은 1516년 별시문과에 급제,
이조정랑을 지냈으며,
이희증(李希曾)은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희안(李希顔)은
14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거쳐 고령현감으로 부임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심했으며,
이윤서(李胤緖)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와 더불어 공을 세우고
이괄의 난때 순절하여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태경(李台卿)과 이중필(李重弼)은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이 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曺參判)에 추증되었다.
[계 파]
-교리공파(校理公派) -목사공파(牧使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사간공파(司諫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제학공파(提學公派) -참지공양실파(參知公良實派) -참지공양진파(參知公良眞) -첨사공파(詹事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
[집성촌]
-경남 합천군 합천면 -충남 논산군 -경남 산청군 단성면
[본관지]
-경상남도 합천군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98,595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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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기계유(兪) 97,382
기계유씨(杞溪兪氏) |
[유래]
시조 유삼재(兪三宰)는 신라 때 아손을 지냈다.
그후 유의신이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 태조에 불복하자
태조가 기계현(경주에 속한 현)에 호장으로 복촉하게 하여
후손들이 그곳에 살면서 본관을 기계로 하였다.
[기타]
[인구] 97,382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준(濬) |
근(根) |
병(炳) |
재(在) |
선(善) |
연(淵) |
모(模)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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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燮) |
균(均) |
호(鎬) |
원(源) |
동(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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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영천이(李:寧川) 95,473
영천이씨(寧川李氏) |
[유래]
시조 이능간(李凌幹)의 호는 송헌(松軒)으로
남원에서 나서 1320년(고려 충숙왕 7년) 반전별감으로
원나라에서 왕을 토번(吐蕃)으로 유배시킬 때 왕을 호위하였고
왕이 죽자 재궁(梓宮)을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1326년(충숙왕 13년) 지사사우상시(知司事右常侍)로
원나라가 고려를 없애고
성(省)을 두겠다는 조치가 있자 이를 중지시켜 면좌당(免左堂)이라는 액호(額號)를 사림(士林)으로부터 받았다. 1332년(충혜왕 2년) 문하시중으로 있으면서 조적의 난을 평정하여 1등공신이 되고 영천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영천으로 하였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에 계중엽(季重燁)과 이부춘(李富春) 그리고 이상규(李尙奎)와 이재행, 이재흠(李在欽)과 이재성(李在誠) 등은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으며
이덕근(李德根)과 이복겸(李福謙)은 통정대부에 추증 되었다. 이탕휴(李湯休)는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는데 현재 두문동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이탕휴의 아들 이분(李芬)은 조선시대에 벼슬을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현금(玄琴)을 즐겨 곡을 지었다고 한다.
[집성촌]
-전북 남원군 이백면 초촌리 -전북 남원군 주천면 용담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95,473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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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경주배(裵) 90,027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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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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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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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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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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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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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산 (고양) |
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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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
금성 |
김해 |
나주 |
남양 |
남원 |
남해 |
달성 |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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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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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성 (김해) |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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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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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
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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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
수원 |
아낙 |
안동 |
안성 |
온양 |
의성 |
전주 |
창녕 |
청산 |
청주 |
평산 |
풍산 |
풍성 |
함흥 |
해주 |
협계 |
홍해 |
화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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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5개의 본관과 323,004명이 있다.(1985년)
경주배씨(慶州裵氏) |
[유래]
경주 배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금산 가리촌장(金山 加利村) 지타(只他)가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고 총재태사에 올랐다.
그후 32년(유리왕 9년)에 금산 가리촌을 한지부로 고치고
성을 배씨로 하사하였다.
후에 한지부가 경주로 이름이 바뀌어서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그러나 그후의 후손은 기록이 없으며,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로 하고있으나
배현경은 원래 이름이 성이 없이 백옥(白玉)이었으며
나중에 성을 배씨라고 했다고 한다.
중시조 배현경은 담력이 크고 용맹하며 지략이 뛰어나
궁예가 고구려에서 태봉이란 나라를 세울때에 이를 도와
행오에서 출발하여 기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동료 기장이었던 신숭겸, 복지겸,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하고 개국 일등원훈에 서훈되었으며
'고려사'에 고려 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919년(고려 태조2년)에 도읍지를 송도로 옮길때
개주 도찰사가 되어 새 도읍을 건설하는데 공을 세우고 궁예의 잔당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워 대상행이조상서 겸
순군부령도총 병마대장에 이르렀다. 936년(태조 19년) 그가 병으로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며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 하고 나가자 죽었다.
왕이 부음을 접하자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였다.
995년(성종15년)에 평산 태백성에 태사사를 세워
매년 봄, 가을에 향사한다.
우리나라 배씨는
모두 지타(태사공)의 후손이었으나 자손이 번성해짐에 따라 본관과 파가 나뉘어져 분성 배씨, 성산 배씨, 달성 배씨, 흥해 배씨, 협계 배씨,
화순 배씨, 함흥 배씨 등이 있으며,
대동보를 부정하고 다르게 족보를 만든파도 있다.
[기타]
[인구] 경주배씨는 90,027명이 있다.(1985년) |
84 영양천(千) 83,990
강릉 |
강화 |
개성 |
경주 |
광주 |
김해 |
나주 |
남양 |
남원 |
단양 |
목천 |
밀양 |
수원 |
안동 |
양평 |
언양 |
영양 |
영천 |
예양 |
옥천 |
온양 |
이양 |
인천 |
전주 |
진주 |
청주 |
충주 |
한양 |
해남 |
화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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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30개의 본관과 97,634명이 있다.(1985년)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천씨가 97개의 본관으로 나타나 있으며, 현재도 30개의 본관이 있으나
모두 영양 천씨의 세거지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양천씨(潁陽千氏) |
[유래]
시조 천암은 명나라초에 조신을 지냈고
그 후손이 영양에서 살았다고 하며 원래 중국 성씨이다. 중시조 천만리(시호는 충장)는 명나라 말기에 문과에 장원하고
태청전수위사 겸 총독 오군수를 역임하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영량사겸 총독장으로 아들 천상, 천희 형제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군량수송을 담당 하였고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후 정유재란때에도
직산, 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우리나라에 귀화 하자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자헌대부에 봉하고 화산군에 봉했다.
- 천만리의 묘소는 전북 남원군 금지면 방촌리에 있다. - 경남 고성군 동해면 장좌리 호암서원에서 음력 8월 1일에 향사한다.
[기타]
[인구] 83,990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12세 |
13세 |
14세 |
15세 |
16세 |
17세 |
18세 |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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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冀) 익(翼) 우(愚) |
봉(鳳) 윤(胤) 욱(旭) |
병(昞) 병(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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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宇) 영(寧) 필(弼) |
성(成) 세(歲) 기(璣) |
희(熙) 범(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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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용(庸) 강(康) |
재(宰) 벽(壁) |
정(廷) 임(任) |
규(揆) 규(葵) |
홍(洪) 해(海) |
임(林) 식(植) |
영(煐) 형(炯) |
2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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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均) 기(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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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초계정(鄭) 83,311
초계정씨(草溪鄭氏) |
[유래]
시조 정배걸(鄭倍傑)은 초계성산에 정착해 살았으나
그 선조에 대해서는알 수 없다. 그는 1017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종 때 예부상서, 중추원부사를 지냈으며 사학을 창시하여 홍문공도(弘文公徒)를 이루었는데 12공도 중 문헌공도(文憲公徒)와 함께 최성(最盛)하여
유가(儒家)의 대가요, 백세의 존사(尊師)라 일컬었다.
홍문광학 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 推誠贊化功臣)으로 문하시중 상주국 광유후(門下侍中 上柱國 光儒侯)에 이르고 초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 57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고려 때 예부상서를 지낸 정문(鄭文)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우참찬의 관직에 오른 정엽(鄭曄), 우찬성 정종영(鄭宗榮), 한성부좌윤 정기광(鄭基廣), 대제학 정선등을 그대표적 인물로 꼽는다. 우참찬(右參贊) 정화는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1587년 감찰, 형조좌랑을 거쳐 1593년 광주판관으로서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중화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그후 대사간, 공조참판등을 역임한 뒤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1년만에 사퇴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대사성(大使成) 겸 동지경연(同知經筵)이 되었고 대사헌, 우참찬 등을지냈다.
대표적 인물은 이조참판 정온(鄭蘊)이다.
그는 성품 이 곧고 절개가 높기로 유명하여
광해군 6년에 강화도에 귀양가있던 영창대군이 죽음을 당하자
그 하수인 강화부사 정항의 처형을 주장, 광해군의 비위를 거슬려 10년 동안이나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겪었다. 귀양생활 중에 지은 "망북두시(望北斗詩)",
"망백운가(望白雲歌)" 등은 그의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한 것이었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경상도 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이조참판에 이르러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나 마침내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덕유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본관지]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83,311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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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청풍김(金) 82,882
청풍김씨(淸風金氏) |
[유래]
시조 김대유(金大猷)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은열의 첫째 아들 김정구의 17세손이다.
그는 고려 말에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청성(청풍)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청풍으로 하였다.
- 묘소는 충북 제천시 수산면 도전리에 있다
[대표적 인물 ]
- 김식(湜) : 성리학자이며 대사성을 지냈다. - 김육(堉) : 영의정을 지냈다. - 김좌명(佐明) : 판서를 지냈다. - 김우명(佑明) : 현종의 국구이다. - 김석주(錫胄) : 우의정을 지냈다. - 김시묵(時默) : 정종의 국구이며 판서를 지냈다. - 김구(構) : 우의정이며 그의 아들 김재로(在魯)와 손자 김치인(致仁)은 부자 영의정으로 유명하다. - 김종수(鍾秀) : 좌의정을 지냈다. - 김종후(鍾厚) : 성리학자이다. - 김취로(取魯) : 판서를 지냈다. - 김약로(若魯) : 좌의정을 지냈다. - 김상로(尙魯) : 영의정을 지냈다. - 그밖에 판서를 지낸 김원식(元植), 김경선(景善), 김익문(益文), 김종정(鍾正), 김동건(東健), 김학성(學性)이 있다.
[기타]
[연락처] 청풍김씨 대종회 : 02-765-1928 [인구] 82,882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주(周) |
구(九) |
병(昞) |
녕(寧) |
성(成) |
기(紀) |
용(庸) |
33세 |
34세 |
3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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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宰) |
중(重) |
규(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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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로상장군공파(淸虜上將軍公派),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에만 적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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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나주정(丁) 82,554
압해정씨(押海丁氏, 나주) |
[유래]
시조 정윤종(丁允宗)은 고려시대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냈다. 나주정씨는 조선 숙종과 경종 때 까지는 본관을 압해로 써오다가
영조 때 압해가 나주에 속하게 되자 본관을 나주로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의번영]
옥당(玉堂)이란 홍문관의 별칭으로
그의 가문은 "9대옥당"으로 유명한데
옥당은 옛날 삼사(三司 :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벼슬 중에서도 문장과 도덕이 특출한 인물들만 들어갈 수 있었으니 곧 옥당벼슬인 수찬(修撰), 교리(校理), 응교(應敎), 제학(提學)은 선비로서 가장 바람직하고 영예로운 자리였다.
그러기에 "9대옥당"은 자랑할 만한 일로서
정조도 "옥당은 정씨의 세전물(世傳物)"이라며 찬탄했다고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정조때 형조참의를 지내고 규장각의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뒤에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강진에 유배되었다.
그 무렵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19년간 학문탐구와 저술에 전념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했으며 1818년 귀양에서 풀려나와 만년에는 저술생활로 일관하였다.
[계 파]
교리공파(校理公派) : 부사공파(府使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사련공파(司鍊公派) 서윤공파(庶尹公派) 야은공파(野隱公派) 어사공파(御史公派) 연안부사공파(延安府使公派) 월헌공파(月軒公派) : 공안공파(恭安公派), 문화공파(文化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전적공파(典籍公派)
[본관지]
-전라남도 나주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 나주 62,554명,
압해 55,893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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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경주손(孫) 81,550
경주손씨(慶州孫氏, 월성) |
[유래]
시조 손순(孫順)의 손자
손익감, 손익담, 손익원 3형제중 손익원이 월성(경주)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경주로 했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을 알 수없어서 후손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손경원(孫敬源)을 1세 조상으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가문의번영]
손경원의 증손 손사성(孫士晟:)이
조선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손욱(孫旭)과 손소(孫昭)의 형제가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가문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손소는 1459년(세조 5년) 김종직(金宗直)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고 주부(主簿)와 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한 후 형인 영북 어사(嶺北御史) 손욱과 함께 이시애의 난 때 평정에 참여하여
손욱은 함흥에서 순절하였고,
그는 난을 평정한 후 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으로 책록되어 내섬시정(內贍寺正)에 특진, 성주 목사(星州牧使)와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거쳐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졌으며, 안동 부사(安東府使)와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하며 특히 문장(文章)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다. 손소의 둘째 아들로 탁월한 문장과 경륜(經倫)에 밝았던
손중돈(孫仲暾)은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1489년(성종 2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를 시작으로 여러 청환직(淸宦職)과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지낸 후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라 연산군의 폭정으로 간관(諫官)들이 거의 다 쫓겨날 때 파직당했으나 중종반정 후에 복직,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그의 공덕을 추모했으며,
1517년(중종 12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공조(工曹)와 이조(吏曹) 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도승지(都承旨)를 3번, 대사간(大司諫)을 4번, 경상, 전라, 충청,
함경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 외 정언(正言)을 지낸 손회종(孫會宗),
부사(府使) 손만웅(孫萬雄), 현감(縣 監) 손경익(孫景翼), 감찰(監察) 손회경(孫會慶), 이조 좌랑(吏曹佐郞) 손병주(孫秉周),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손상일(孫相馹),
손기영(孫耆永) 등이 유명했고, 손번(孫蕃)은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지내고 편수사(編修事)가 되어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중종 때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다.
손윤원(孫潤源)은 군자감(軍資監)의 봉사(奉事)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창암(倉巖)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세웠으며,
손영곤(孫永坤)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손종로(孫宗老)는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 선조의 계비, 영창대군의 어머니)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 후에 남포 현감(藍浦縣監)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허완(許完)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이천의 쌍령(雙嶺) 싸움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순절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추증되었고
정조 때 왕명으로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그밖에
진해 현감(鎭海縣監) 손식(孫湜), 부사(府使) 손종책(孫鍾策), 군수(郡守) 손병수(孫秉秀) 등이 경주손씨를 빛냈다.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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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
2세 |
3세 |
4세 |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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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종(宗) 신(愼) |
11세 |
12세 |
13세 |
14세 |
15세 |
16세 |
17세 |
18세 |
19세 |
20세 |
金변 人변 만(萬) 후(厚) |
여(汝) 태(泰) 승(升) 충(忠) 경(景) |
시(是) 저(著) 운(雲) 이(以) 수(壽) |
걸(杰) 현(顯) 석(錫) |
구(九) 시(時) 경(慶) 사(思) 홍(弘) |
성(星) 진(鎭) |
종(鍾) 석(石) 락(洛) 모(謨) |
영(永) |
수(秀) 조(祚) |
진(晋) 병(炳) 현(顯)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익(翼) 달(達) 원(遠) 규(奎) |
호(鎬) 현(鉉) |
락(洛) 하(河) 준(準) |
동(東) |
훈(薰) |
효(孝)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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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지]
경상북도 경주시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81,550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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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벽진이(李) 80,662
벽진이씨(碧珍李氏) |
[유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벽진(碧珍)장군 이총언이다. 이총언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우는데 큰공을 세워 태조는 그를 고려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벽진장군에 봉하고 "백자천손 대대로 이마음을 길이 간직하자"는 친서를 보내 금석(金石)의 교(交)를 맺었다고 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벽진으로 하였다.
-매년 10월 3일 경북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 경수당(敬收堂)에서 시조를 숭조하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가문의번영]
시조 이총언의 아들 이영(李永)은 18세의 나이로 왕건을 따라 삼국을 정복,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대제학에 올랐고 손자 이방회(李芳淮)는 추밀원사, 증손 이경석(李慶錫)은 평장사에 이르는등 초기부터 명문거족으로 번성한 벽진이씨는
후에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해냈다.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이회(李會), 이실(李實), 이극송(李克松), 이옹(李雍)등을 꼽는데 이중 이극송은 고려 고종23년 명경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청렴강직한 청백리로 판삼사사의 벼슬에
올라 "맑고 깨끗하여 아무티가 없는 정신을 지녔다" 하여
고종이 친히 영옥(永玉)이라는 호를 내렸다. 특히 시조의 10세손 이옹의 아들 4 형제중 장남 이견간(李堅幹)은 고려 충열, 충선, 충숙왕등 3왕대에 걸쳐 벼슬이 진현관대제학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킨 이맹전(李孟專) 들어 이씨가문의 충의와 절개의 맥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사람이다. 세종때 친시문과에 급제 사간원 정언등에 오른 그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찬탈을 꾀하는데 분개,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내려가 거짓으로 눈멀고 귀먹었다며 초야에 묻혔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때 대사성에 이른 이철균(李鐵均), 병자호란때 강화에서 자결한 이상길(李尙吉)은 높은학문과 충의의 인물로 이씨가문을 빛냈다. 또한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사람으로 중종때 대사헌, 병조판서를 지낸 이장곤(李長坤), 조선말기의 거유(巨儒) 이항로(李恒老) 등이 있다.
[계 파]
-금릉공파(金陵公派) -문정공파(文靖公派) -산화공파(山花公派) -지후대장군공파(祗侯大將軍公派)
[집성촌]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 1리 속칭 홈실(명곡)마을. 팔작(八作) 지붕의 골기왓집이 처마를 맞대고 43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고풍스런 마을이다. 43가구중 5 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벽진이씨 한 성으로 8백여년전 고려인종때 금자광록대부이던 입향조 이방화(李芳華)가 당나라 풍수지리의 명당을 찾아 이곳 곡성산 아래터를 잡았다. 그러나 누대에 5형제가 태어나 고관대작의 벼슬에 오르면 마을을 떠나라는 유언으로 불과 8대를 살다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 5 형제가 벼슬길에 오르고 숙질간에 8판서가 나와 명문대가로 번창했으나 곧 쇠운을 맞았던것이다. 2백여년 후 후손들이 가문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관지]
벽진 : 경북 성주군의 통일신라 때 지명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80,662명이 있었다.
|
90 순천박(朴) 75,888
순천박씨(順天朴氏) |
[유래]
시조 박영규(朴英規)는
신라 경명왕(박혁거세의 29세손)의
일곱째 아들 박언지(강남대군)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 신라 유리왕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고증할 자료는 없고 전설로만 전해온다. 그는 승주(昇州, 순천의 옛이름) 사람이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고, 후백제 견훤의 사위로,
처음에는 견훤의 막하에 있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할 때
부인 견씨와 함께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견훤의 세력을 추출하는데 공을 세워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좌승(左丞)에 제수 되었으며
승주군(昇州君)에 봉해졌다. 박영규는 왕건과 사돈을 맺어
그의 큰딸은 왕건의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이 되었다. 그러나 후손의 계대(系代)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후손 박난봉(朴蘭鳳)이
고려시대에 과거에 등과하여 정승을 역임하고 평양(平陽, 순천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자 그를 득관조로 하였고 , 다시 그 후의 계대(系代)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중시조 박숙정(朴淑貞)을 1세 조상으로 하여 본관을 순천으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 박중림(仲林),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인 박팽년(彭年), 박계창(繼昌), 박원종(元宗), 박이장(而章), 박광일(光一), 박기정(基正) 등이 있다. - 박팽년의 둘째 자부가 낳은 비(婢) 소년의 일화는 유명하며, 간신히 이어진 그 일족을 '묫골박씨' 라고 했다. -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35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기타]
[인구] 75,888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현(鉉) |
해(海)- |
-동(東) |
노(魯)- |
-규(圭) |
종(鍾)- |
-순(淳) |
상(相)- |
-환(煥)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
재(在)- |
-선(善) |
승(承)- |
-식(植) |
병(炳)- |
-균(均) |
정(正)- |
-원(源) | |
91 온양방(方) 75,265
결성 |
경주 |
군위 |
김해 |
나주 |
남원 |
무안 |
상주 |
수원 |
신창 |
안산 |
안성 |
양산 |
온양 |
원영 |
진주 |
창성 |
충주 |
해남 |
|
|
|
|
|
총 19개의 본관과 81,416명이 있다.(1985년)
온양방씨(溫陽方氏) |
[유래]
중국 염제 신농씨의 13세손인 방뢰가
중국 하남지방에 살때 방씨란 성을 받았다.
온양 방씨의 시조인 방지는 방뢰의 134세손이며,
당나라에서 한림학자로서 황제의 명을 받고
669년(신라 문문왕9년) 신라에 와서 설총과 함께
육례 구경의 대지를 밝힌 동방유학의 한사람이다.
그후 상주에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상주란 본관을 사용했고
그후 방운이 온수(온양)군에 봉해짐에 따라 온양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시조인 방지로부터 방운 까지는 문헌이 없어져서
방운을 1세 조상으로 하고있다.
상주 방씨, 신창 방씨, 군위 방씨는 모두 온양으로 합본되었다.
[인구] 75,265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호(浩) 순(淳) 처(處) |
동(東) 재(裁) 진(鎭) |
문(文) 용(容) 원(源) |
찬(瓚) 효(孝) 정(楨) |
혁(赫) 석(錫) 종(鍾) |
제(濟) 승(承) 규(圭) |
식(植)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병(炳) |
배(培) |
호(鎬) |
태(泰) |
병(秉) |
열(烈) |
기(基)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
현(鉉) |
해(海) |
래(來) |
희(熙) |
주(周) |
용(鎔) |
| |
92 진주유(柳) 72,827
진주유씨(晋州柳氏) |
[유래]
시조 유정은
원래 진주에 대를이어 살아온 선비집안의 후예로
고려 시대에 벼슬이 좌우위상장군에 이르고 진강(진주) 부원군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문화 유씨에서 분파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문헌상 고증이 없다.
[기타]
[인구] 72,827명이 있다. - 유인자을 시조로 하는 진주 유씨와 중복됨.(1985년)
[항렬표]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원(遠) 도(道)
|
수(秀)
|
해(海) 치(致)
|
형(馨) 복(馥)
|
승(承) 영(永)
|
상(相) 모(模) 정(楨) |
병(炳) 환(煥) 제(濟)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기(基) 균(均) 구(球) |
종(鍾) 진(鎭) 공(恭) |
순(淳) 호(浩) 휴(休) |
동(東) 주(柱) 하(河) |
희(熙) 섭(燮)
|
재(在) 교(敎)
|
현(鉉) 흠(欽)
|
38세 |
|
|
|
|
|
|
철(徹) 태(泰) |
|
|
|
|
|
| |
93 고성이(李) 71,910
고성이씨(固城李氏, 철성) |
[유래]
한나라 무제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이었던 이반(李槃)이 무제가 우리나라를 공략할 때
군사를 이끌고 나왔다가 전쟁 이 끝난 후에도 머물러 살게 되었다. 시조 이황(李璜)은
이반의 24 세손으로 고려 덕종 초에 문과에 급제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033년 거란이 침입할 때 공을 세워 문종 때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라
철령군(鐵嶺君. 현 고성)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고성으로 했다. 철성이씨도 같은 뿌리로 철성(鐵城)은 고성의 옛이름이다.
-경남 고성군 회화면 봉덕리의 금봉제에서 음력 10월 3일에 제향한다.
[가문의번영]
6세손인 이진(李瑨)은
고려 고종 때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학사(承文學士)가 되었으며,이존비(李尊庇)는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냈다. 그리고 이우(李瑀)는
충숙왕 때 사람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문장과 덕행이 높아 후에 철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또 충선왕 때의 이암은
1313년 문과에 급제,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고 공민왕 때의 이림(李琳)은 문하시중을 지냈다.
조선시대의 이근(李懃)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원(李原)은 좌의정, 이육(李陸)은 병조참판을 지냈다. 또 중종 때의 이택(李澤)은 예조판서, 이성길(李成吉)은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괄은 조선 선조 때의 사람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刑曺佐郞),
태안군수(泰安郡守)를 역임하였으며,
1622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반정을 성공케 했다.
1624년에는 무능한 정신(廷臣)들을 제거코자 의병을 일으켜 서울을 무혈점령(無血占領)했으나, 장만(張晩)이 거느린 관군에 의해 평정되었다(이괄의 난). 구한말의 이기(李沂)는
일찌기 실학을 연구하여 정약용,유형원 등의 학통을 계승하고,장지연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1907년 결사대 자신회(自新會)를 조직,
을사5적의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계 파]
-안정공파(安靖公派) -둔재공파(鈍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동추공파(同樞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사암공파(思菴公派) -도촌공파(桃村公派) -은암공파(隱菴公派)
[항렬표]
|
|
도촌공파 - 이황을 1세조로 한다.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 |
- |
- |
선(宣)- -춘(春) |
-증(曾) 득(得)- |
하(夏)- -도(道) |
-인(寅) 행(行)- |
종(種)- |
-열(烈) |
기(基)-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호(鎬) |
한(漢)- |
-모(模) |
희(熙)- |
-재(在) |
용(鎔)- |
-영(永) |
근(根)- |
-연(煙) |
- |
| |
호군공파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 |
- |
- |
혁(赫)- 시(時)- |
재(栽)- -언(彦) |
현(鉉)- |
-원(原) |
동(東)- |
-열(烈) |
기(基)-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흠(欽) -호(鎬) |
영(泳)- 영(永)- |
-환(桓) -근(根) |
형(炯)- 경(炅)- |
-균(均) -규(圭) |
강(綱)- 종(鍾)- |
-수(洙) -구(求) |
영(榮)- 계(桂)- |
-희(熙) -휴(烋) |
- |
| |
94 삼척김(金) 71,764
삼척김씨(三陟金氏) |
[유래]
시조 김위옹(金渭翁)은
신라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인 김추(일선군)의 아들이다.
김위옹은 고려때에 삼한벽상공신으로 벼슬이 좌승상에 이르고
실직(삼척)군왕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삼척으로 하였다.
- 묘소는 삼척군 삼척읍 성내리 갈야산에 있으며 음력 3월 25일 향사한다.
[ 대표적 인물 ]
- 김복영(僕永) : 고려때 관찰사를 지냈다. - 김인궤(仁軌) : 시중을 지냈다. - 김의궤(義軌) : 시중을 지냈다. - 김영(泳) : 평장사를 지냈다. - 김양보(良輔) : 조선때 왕자사부이다. - 김기문(起文) : 공신이다.
[기타]
[인구] 71,764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흥(興)
|
호(鎬) 횡(鐄) |
원(源) 숙(淑) |
영(榮) 식(植) |
형(炯)
|
수(壽) 기(基) |
진(鎭) 련(鍊)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태(泰)
|
동(東) 근(根) |
현(炫) 환(煥) |
재(在) 규(圭) |
용(鎔) 석(錫) |
수(洙) 락(洛) |
개(?) 극(極)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병(炳) 희(熙) |
혁(赫) 철(喆) |
종(鍾) 옥(鈺) |
순(淳) 택(澤) |
상(相) 계(桂) |
노(魯) 열(烈) |
선(善) 중(重)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51세 |
52세 |
53세 |
록(錄) 일(鎰) |
영(永) 한(漢) |
환(桓) 래(來) |
연(然) 남(南) |
준(埈) 균(均) |
경(鏡) 정(鉦) |
구(求) 용(溶) | |
95 곡부공(孔) 68,951
총 8개의 본관과 72,382명이 있다.(1985년)
곡부 공씨(曲阜 孔氏) |
[유래]
공씨는 중국의 곡부(산동성)를 본관으로 삼고
공자 탄생이래 그를 시조로하고 단일본으로 하여 계승해 왔다.
공자의 53세손 공완의 첫째 아들 공사회는 중국에 살았고
둘째아들 공소(孔紹)는 원나라 순제때 한림학자로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하였고 문하시랑 평장사로 회원군에 봉해지고 창원 공씨로하여 우리나라 공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그후 노국의 공씨와 같은 조상이다 하여
1794년에 다시 곡부를 본관으로하였다.
한편 '임자시월정원일기'에 의하면
1792년10월27일(임자년 정조16년) 좌의정 이하 여러 신하가 입시한 자리에서
정조가 전교하기를,고려 말기에 공자의 54세손 공소가
원나라의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하였고,
그 후손인 공서린(孔瑞麟)이 태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태학사가 된 후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기묘명현(己卯名賢)이 되었는데,
그의 9대손 공윤항(孔胤恒)이 경기도 용인군에 살고 있으니,
그들 자손에게는 세습제로 하여 녹용(祿用)하는 것이 어떠냐고 의논하여
주달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의 신중한 논의를 거쳐 왕의 전교대로 결정하고 공윤항의 맏아들 공영수(孔營洙)에게 녹과 벼슬을 주는 한편,
공씨의 본관을 곡부로 정하라고 명령한 사실 등의 기록이있다.
[기타]
[시조 묘소] 경남 창원군 서면 두능리 두척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제사 지낸다.
[인구] 68,951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74세 |
75세 |
76세 |
77세 |
78세 |
79세 |
80세 |
동(東) |
열(烈) |
재(在) |
석(錫) |
영(泳) |
식(植) |
희(熙) |
81세 |
82세 |
83세 |
84세 |
85세 |
86세 |
87세 |
배(培) |
종(鍾) |
호(浩) |
권(權) |
섭(燮) |
규(圭) |
용(鎔) | |
96 연안김(金) 68,939
연안김씨(延安金氏) |
[유래]
시조 김섬한(金暹漢)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고려 때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냈다.
그의 선조중에 이름을 알 수없는 형제가 왕에게 직간을 하다
형은 북빈경(현 강릉)으로, 동생은 고염성(현 연안)으로 각각 유배 되었는데
김섬한은 연안으로 간 동생의 후손이라고 한다.
- 묘소는 없어지고 경남 통영군 도산면 원산리에 단을 세우고 10월 13일에 향사 한다.
[ 대표적 인물 ]
- 김도(濤) : 6세손. 고려 때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냈다. - 김자지(自知), 김여지(汝知), 김하(何) : 김도의 아들. 조선시대에 판서를 지냈다. - 김전(詮), 김근사(謹思) : 조선시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 김감(勘) : 대제학을 지냈다. - 김안로(安老) : 영의정을 지냈다.
[기타]
[인구] 68,939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12세 |
13세 |
14세 |
15세 |
16세 |
17세 |
18세 |
안(安) |
남(男) |
(玉)변 |
석(錫) |
(水)변 |
상(相) |
(火)변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재(載)
|
(金)변
|
연(淵)
|
수(秀)
|
사(思)
|
기(基) 섭(燮) |
종(鍾) 환(煥)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영(泳) 지(持) |
주(柱) 전(銓) |
성(性) 제(濟) |
중(重) 식(植) |
현(鉉) 희(熙) |
원(源) 재(在) |
식(植) 건(鍵)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헌(憲) 순(淳) |
규(圭) 동(東) |
진(鎭)
|
택(澤)
|
근(根)
|
희(熙)
|
배(培)
|
40세 |
41세 |
|
|
|
|
|
균(鈞) |
철(澈) |
|
|
|
|
| |
97 안동장(張) 64,814
안동장씨(安東張氏) |
[유래]
시조 장정필(張貞弼, 888~?, 시호는 충헌)은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장군인 장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5살 되던 892년(신라 진성여왕 4년) 아버지가 나라 정치가 문란하자
이를 피해 신라에 망명 할 때에 따라 들어와서 강릉에 살다가
경북 노전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그후 18세 때에 중국으로 파견하는 정조사를 따라
다시 중국에 들어가 24세 때에 문과에 장원 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제자를 가르쳤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명성이 천자에게 까지 알려져서 한때 벼슬이 이부상서에 까지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우리나라에 다시 들어와 경북 인동 노전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930년(경순왕 4년)에
김선평, 권행과 함께 향병을 모아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그 공으로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 태사에 오르고
고창(안동)군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다.
- 경북 인동 노산서원과 안동시 북문동 삼태사묘 에서 제향한다
[ 대표적 인물 ]
- 장사길(思吉) : 의주의 토호로서 1390년(고려 공양왕 2) 밀직부사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공을 세워 회군공신이 되었고,
조선 개국에도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으로 중추원지사에 올랐다. - 장철(哲) : 장사길의 아들. 고려 말기 무과에 급제하여 1388년(우왕 14) 아버지와 함께 위화도회군에 공을 세웠고 첨절제사, 영흥부사 등을 지냈다. - 그밖에 학자로는 장흥효(興孝), 장세량(世良) 등이 있으며,
홍경래의 난 때 크게 공을 세운
장몽열(夢說), 장낙현(洛賢) 부자도 있다.
[기타]
[인구] 64,814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재(載) |
선(善) |
태(泰) |
주(柱) |
훈(勳) |
현(玹) |
용(鎔)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수(洙) |
래(來) |
엽(燁) |
효(孝) |
철(鐵) |
영(永) |
상(相) |
45세 |
46세 |
47세 |
|
|
|
|
환(煥) |
기(基) |
호(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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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성산이(李) 64,735
성산이씨(星山李氏) |
[유래]
시조 이능일(李能一)은
고려개국공신으로 신라말엽 성산(현 성주군) 일대를 통치해온 호족이었다.
그는 12년동안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수훈을 세웠다. 그의 원래의 이름은 능(能) 또는 능필(能弼)이었는데
고려태조가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했다는 뜻으로 통일을 상징하는 일(一)자를 내려 능일로 부르게 했다고 한다. 고려건국후
태조왕건의 딸인 정순궁주(淨順宮州)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벼슬은 사공(司空. 정1품)에 이르고 성산백에 봉해 지자
후손들이 성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성산은 조선시대에 지명이 성주로 바뀌어 성주를 본관으로하는
성주이씨나 성산이씨(광평이씨)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 뿌리 부터가 다르다.
[가문의번영]
고려 초기 이견수(李堅守)는
이광(李匡)과 이직(李直)등 4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5부자가 모두 과거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이후 정당문학과 종2품에 오른 이우당(李宇唐), 지인주사(知仁州事)를 지낸 이여충(李汝忠), 금산 군사(郡事)를 지낸 이여신(李汝信),
안염부사(按廉副使)를 지낸 이여양(李汝良)등이 고려시대의 인물이다.
조선초기에는
중종때 대사간과 이조참의를 지낸 이세인(李世仁)은
연산군때 직언으로 이름난 명신이었다.
그는 사간으로 있을 당시 간신배를 탄핵하다 나주로 유배되는등
전후 두차례에 걸쳐 귀향길에 오르는 시련도 겪었다. 그밖에 병조, 예조, 이조판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이항 부자등이 돋보인다.
조선 인조 때의 李士龍(李士龍)은
명과 청이 중국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1640년,
그는 청의 강요로 조선이 명을 치는데 합세했을 때 출전했으나 명나라에 대한 옛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올곧은 선비로 당시 그는 포사(砲士)였으나 그는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군사를 어찌 공격하겠느냐"며 끝까지 포쏘기를 거절하다 처형당했다. 그가 숨지자 청나라 태종도 그의 기개에 감복하여
그의 유해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인 이석문(李碩文)은 고향에 낙향해 자기집 북쪽에 문을 내고 세자가 묻힌 북녁을 향해 매일같이 재배했던 절신이다.
[계 파]
-검계공파(儉溪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부사직파(副司直派) -선교랑파(宣敎郞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종사랑파(從仕郞派) -직장공파(直長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충순당파(忠順堂派) -충순위파(忠順衛派) -학성공파(學性公派) -한은공파(閒隱公派) -황곡공파(篁谷公派)
[집성촌]
성주군 월항면 대산동. 행정구역상의 지명보다 한개(大浦) 마을로 더욱 알려진 성산이씨의 아성이다. 입향조는 조선초 진주목사를 지냈던 이우(李友). 그가 조상대대로 살아온 성주읍내에서 한개마을로 이주한 내력은 확실치않다. 다만 조선초 영남지방 교통의 요충지였던 성주목(星州牧)에 역사가 들어서고 말과 역을 관리하는 중인들이 득실거리자 "성주는 체통있는 양반이 살곳은 못된다" 고 해서 문중의 묘를 한개마을로 옮겼다는 얘기가 전해내려올뿐이다. 아직도 집집마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가묘를 보존하며 5백년 유가(儒家)의 가풍을 잇는다.
[본관지]
경상북도 성주군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64,735명(이무재계 포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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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무안박(朴) 64,695
무안박씨(務安朴氏) |
[유래]
무안박씨의 시조 박진승(朴進昇)은
신라 경명왕(박혁거세의 29세손)의 여섯째 아들인 박언화(완산대군)의 9대손이다. 그는 벼슬이 국자제주에 이르고 고려 초에 공을 세워
무안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정착하여 살면서 본관을 무안으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고려시대의 박승중(朴昇中), 조선시대의 박의장(毅長), 박홍장(弘長), 박창하(昌夏), 박호(浩) 등이 있고, 현대인물로는 한글 점자(點字)의 창안자인 박두성(斗星)이 있다.. 조선시대에 21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기타]
[인구] 64,695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재(載) 정(廷) |
성(聖) 현(賢) |
인(仁) 현(鉉) |
민(敏) 주(朱) |
용(容) 정(楨) |
규(奎) 섭(燮) |
진(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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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
28세 |
29세 |
3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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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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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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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燮) 형(炯) |
재(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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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고흥유(柳) 64,465
고흥유씨(高興柳氏) |
[유래]
시조 유영은 원래 신라의 선비로
신라말에 정치가 혼란하자 흥양(고흥)으로 이사 하여
고려 개국후 호장을 지냈다.
그리고 그의 7세손 유청신이 고려 충선왕 때 도첨의 정승을 지내고
고흥 부원군에 봉해짐에 따라 후손들이 본관을 고흥으로 하였다.
- 묘소는 경기도 개풍군 미륵산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력 10월이다.
[기타]
[인구] 64,465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석(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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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濟) 해(海) |
상(相) 식(植) |
연(然) 희(熙) |
규(圭) 균(均) |
종(鍾) 현(鉉) |
세(洗) 영(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래(來) 동(東) |
열(烈) 섭(燮) |
재(在) 시(時) |
옥(鈺) 회(會) |
태(泰) 호(浩) |
근(根) 걸(杰) |
광(光) 경(炅) |
41세 |
4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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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培) 기(基) |
용(鎔) 진(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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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후기
성씨의 역사와 유래등
우리나라의 수많은
선조님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즐거웠고 과거속으로의 시간여행은
많은 안타까움과 기쁨을 동시에 주었다.
이분들이 그랬던것 처럼
우리는 오늘도 선의의 경쟁을 통하여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각 성씨의 뿌리를 통하여
오늘날 만나게 되는 수도없이 많은 사람들이
길흉화복의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한 모습은
곧 나의 거울이므로
이분들이 그랬던것 처럼 최선을 다하여 지혜롭게 사랑하며 사는길이다.
쉽지 않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남의 집안에 대한 글을 옮길때 마다
혹 실수나 하지 않을까 우려 했다.
<실수를 용서 바랍니다! 시간이 허락하면 재 도전!>
나는 역사를 전공하지도 않았거니와 글 솜씨 또한 형편이 없다.
그냥 일부 독수리 타법으로 완성한것이니 이해바란다.
칡뿌리도 제대로 못켄 내가
1000년 이상된,
아니 수천년을 거슬러
뿌리를 켄다는 것은 첨부터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힘을 더한것은
이 분들 의원 때문이었다.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뿌리되신 선조님의 음덕 때문이다.
지하에 계신 선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004.팔월 한가위
뿌리를 찿아서
참고문헌: 1985 한국의 100대 성 ,벽진이씨 홈피 및 각 성씨 홈피,
daum블로그, 뿌리를 찿아서, 세계백과 엔싸이버, 단기고사,
go2744.com, 천부경 etc
<각 출판사명은 기재않음>
음악<음원>은 내용중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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