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가방
얼마 전에 중국 학자들을 초청해서 학회를 연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이번에 초청한 분들은 중국 시안 (西安)에 있는 서북대학교의 교수들이었다. 그들과는 2006년부터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교류했던, 이제는 꽤 가까운 관계였다. 오랜만에 인천공항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두 차에 분승 (分乘)해서 숙소에 도착했다. 호텔에 와서 확인해 보니 일행 중 한 명의 가방이 없었다. 짐을 찾는 곳에서 그 교수가 어떤 일로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그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일행들과 우르르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분은 다른 일행들이 자신의 여행 가방을 카트에 옮겼으리라 기대했고, 일행들은 당연히 본인 가방은 스스로 챙겼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반 경이었고, 그날 저녁 6시에 리셉션 만찬이 있어서 당장 공항으로 돌아가서 짐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인천 공항의 유실물 센터에 전화해서 그분 가방의 색과 모양을 설명하고 비슷한 습득물이 있는지 확인했는데, 그런 가방은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그날 저녁은 그렇게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유실물 센터에 다시 확인했는데 여전히 그 가방은 신고되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회에서 그의 발표가 끝난 후, 그가 공항으로 직접 가보았다. 그 가방은 아직 분실물 센터로 들어오지 않았다기에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CCTV를 통해서 잃어버린 자리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 그 가방은 원래 있던 그 자리에 24시간 동안 그대로 있음을 발견했다. 공공의 장소에서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는 우리 시민의 윤리의식을 외국인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자리에 있는 가방을 24시간이 지날 때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은 공항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나가던 승객이 그 가방을 훔쳐 가지 않은 것은 좋은 소식이지만, 공항을 관리하는 당국에서 온종일 같은 자리에 있는 가방을 그대로 방치한 것은 무언가 해야 할 일을 놓친 인상이었다. 아무튼, 외국에서 온 손님에게 가방을 분실하는 경험을 하지 않게 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 문화라고 한다. 카페에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놓고 가도 훔쳐 가지 않는 것을 이방인들은 신기해하고, 상점이 길거리에 물건을 진열하고 파는 것도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라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기차를 탔을 때 검표하지 않는 것도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낯선 광경일 것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민 의식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비슷한 일화들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작년에 광주에 갔다가, 일행 중 한 명이 지갑을 지하철 안에 놓고 내린 적이 있었다. 마침 거래처의 계약금을 받은 상황이라서 적지 않은 금액의 수표가 지갑에 들어있었다. 지갑 분실을 깨달은 그는 바로 역무실로 가서 유실물을 어떻게 찾는지 알아보았고,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그 지갑은 우리가 내린 다음 정거장의 역무실에 보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갑 안에 있는 내용물이 그대로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문화가 정착되는 데에는 우리 사회가 구축해 놓은 인프라나 시스템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지고 가지 않는 이유는 우리나라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기차표 없이 승차를 시도하는 빈도가 높지 않은 것은 전산화된 자료로 승무원들이 객실을 돌아다니며 팔리지 않은 자리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큰 이유이며, 수표 역시 지급정지를 요청하면 타인이 찾아갈 수 없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기에 그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분명 우리 국민의 윤리의식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수준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감시 카메라가 버젓이 있어도 도적질이나 약탈을 일삼는 나라보다는 낫겠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기를 제안한다. 누가 보든 안 보든, CCTV가 있든 없든 내 것이 아니면 손대지 않고, 남의 물건을 습득했으면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를 만들었으면 한다.
요즘도 종종 승객이 택시에 놓고 내린 돈 가방을 기사가 신고하여 주인을 찾아준 미담이 언론을 통해서 소개된다. 수표가 아닌 현금을 분실해도 내 것이 아니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문화가 어느 정도는 정착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보이스피싱처럼 남을 속이면서 금품을 갈취하는 사례가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아직은 우리가 원하는 성숙한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의 윤리 수준까지 빠르게 도달한 것이 세계적인 자랑이듯이, 더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을 가꾸어서 K-Pop, K-드라마, K-푸드뿐만 아니라, 이제는 K-윤리도 전 세계에 자랑거리가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