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하기 1년전 한문공부...
글 이 용 구
나는 초등학교에 가기전 1년을 앞두고 8세에 우리 동네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였다 선생님(사부님)은 동네에서 손꼽히는 분으로
나와 같은 초등학교 동기동창생의 아버지 였다
당시 그리 많은 수는 아니나 웬만한 가정에는 적극 한문을
가르켰다 왜냐하면 특히 우리나라 국민은 향학열이 어느나라 보다
강하고 일본정치(日本政治)에 맞서 대항 하고자 배워야 산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가령 당시 우체부 편지 배달부도 한자(漢字)를 알아야
무난히 취직을 하였고 면서기(面書記)도 배운 사람이어야
할수있기 때문에 "알아야 면장한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것으로
안다 그래서 부모들은 나는 못 배웠으나 자식만은 아무리 살기
어려워도 서당에 보냈다
이 서당은 TV에서 소개하는 정통있는 경남 지리산 밑에 있는
한학과 예절을 익히는 청학동(靑鶴洞)의 이름난 서당같이 제복과
규율이 있는게 아니라 같은 마을 선생님댁 사랑방에서
약 10여명이 모여 배웠다
크게 규율은 없었고 아침 먹고 자유롭게 책을 들고 나와 한 두줄
배우고 선생님 따라 읽고 뜻을 새겨 들으며 우주만물의 진리와
이치등 예의범절을 터득해 나갔으며 인간의 본분인 윤리 도덕과
충효와 인간의 기본인 효도의 범절을 깨우치고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붓글씨 도 쓰고 집에 가면 되었다
이때 먹은 세심하게 갈고 붓은 힘것 붓대를 꽉 잡으라 하였다
그리고 간혹 친구와 싸워 종아리도 피가 맺히도록 맞은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이것이 밑 걸음이 되어 이제까지 남에게
뒤지지 않고 지내온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어릴적의 사부님의
가리킴의 덕분이 아니었나 하고 매년 마다 있는 스승의 날에
잠시나마 추모하며 고마움을 전하고있다
당시 한문 공부도 순서가 있었다 천자문 다음에 사자소학
(四字小學)-동몽선습(童蒙先習)-명심보감(明心寶鑑)-소학
(小學: 5卷)-다음에 -중학(中學)-논어(論語:또는 孔子)-맹자
(孟子: 4書)가 있는데 보통은 기초로 천자문과 동몽선습으로
끝내고 나머지는 전문가나 힘써 배웠던 것으로 아는데 갈수록
깊고 깊어 끝이 없는것이 한문공부 였다
약 1년간에 걸처 천자문을 다 배우면 "책씨시개"라 하여 집에서
정성것 떡을 만들어 다가 서로가 먹으며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축하를 했다 그래 그런지 그 덕분으로 많은 혜택(蕙澤)을 입었다
초등학교 당시 조선어(당시 우리말)책에 나오는 한문을 손쉽게
발음하고 해득을 했으며 늙으막인 이제까지 유식계급
(有識階級)으로 덕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당시 이상한 것은 서당에는 나의 두 누님을 비롯하여 동네
누님들인 여자(女子)들은 서당에 한 명도 없었으니 이상 했다
그 만큼 배움에도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구습이
었었던 것으로 추측 되었다
알고 보니 당시 여자는 집에서 부모님 으로부터 한문을 배웠을뿐
여아(女兒)는 그리 가리키지 않았으며 그저 가정 수업이나
잘 받고 좋은 가문으로 시집이나 가면 된다는 것으로 남존여비
(男尊女卑) 사상이 농후(濃厚)한 우리 나라의 실정 이었다
끝으로 한가지 덧 붙일것은 천자문 창조자인 중국 주홍사
(朱興嗣)란 학자가 있었는데 화장실 에서까지 골몰했다한다
어느날 부인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주흥사를 보니 머리가 희게
되었다 하여 일명 백수문(白首文)이라 고도 불렀다 하는 이야기를
사부님으로 부터 들은바 있었는데 지금도 잊혀 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고대에는 중국과 일본 한국등 3국간 교류는 오로지
한자를 통해 정치 경제 문화등을 한자 교류로 의사 소통을
하였으니 얼마나 깊고 맣은 한자 공부를 했나 하는 선조님들의
노고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물론 현재에도 계속 한문학 전문
연구가가 있겠으나 가령 수시로 발굴되는 어느 고분에서 출토된
고한문 해득등을 위해 앞을 내다보며 더욱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려야 할것으로 안다
▶♬배경음악:Ralf Bach / Angel Ki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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