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제목: 존 레논, 김시습 되기
조경선
가로수의 진초록 잎이 수상해 보이는 아침이었다. 가로수가 오늘 따라 점령군으로 보였다. 은빛 거미줄에 걸려 파닥이는 나비 한 마리가 자기 목숨을 옭아매는 것에 대한 저항이 고양이의발톱처럼날카롭다.
교육은 개인의 경쟁력이고, 국가의 미래니라. 그렇게 알고 너는 서울 가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아버지의 논 판 돈으로 나는 경영대학을 졸업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얻은 첫 직장은 규모가 꽤 큰 건설 업체였다. 2년 동안 그 회사에 다니는 내내 해외수주 실적은 미미했고, 내수 역시 불경기로 회사가 어려웠다. 급기야 회사가 인건비 줄이기로 들어갔고. 다른 직장으로 옮기면 되지 뭐. 하고 나는 꽃잎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사표를 냈다. 그런데 취직이 쉽지 않았다. 아버지께 더 이상 손을 내밀 수도 없었다. 하루살이 서울 생활이 힘들었다. 당분간이란 단서를 달고 거리로 나왔다. 취직이 곧 되겠지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노가다 판에 발을 들여놓은 게 어언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주로 이삿짐센터 혹은 택배 일을 전전 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그날도 벼룩시장신문을 뒤지다가 택배회사에 전화를 했다.
‘이력서를 써가지고 한번 와 보세요.’
택배회사 사무실은 낡고 허름한 건물 5층에 세 들어 있었다. 하루 일당이 다른 택배회사보다 많다. 많다고 해 봤자 동기들이 들어간 재벌 기업에서 주는 월급의 1/3 수준이다. 대학 때 단짝 친구였던 우택이와의 임금격차의 체감온도는 1/50 쯤 이었다. 아버지의 논을 팔아서 대학을 나온 것은 큰 계산 착오였다. 한국경제가 지난 50년간 땀 흘려 나라의 가치를 올린 것이 1이라면 땅으로 얻은 불로소득은 4였다. 논 팔아서 대학 다닌 것은 개인이나 국가적으로 경제적인 실패고 시간적으로도 큰 손해였다. 차라리 농사짓는 기술을 익혀서 땅도 지키고 땅에서 소득을 올리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어야 했다. 대학졸업이 최선책이던 시대는 지났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면, 아마 지금쯤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결혼도 해서 떡두꺼비 같은 자식을 두어 명 낳아 꽤 컸을 테고, 땅값도 제법 올라서 재산의 규모도 제법 될 것이다. 지금 나는 서울 생활에 지치고 뼈 속에서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외롭다.
월남전에 참가했던 아버지는 지방 공무원으로 퇴직한 60대 후반의 당찬 남자였다. 역동의 시대를 건너 온 아버지는 뭐든지 아끼고 절약하며 자신감이 넘쳤다. 아버지는 당부했다. ‘타향에 살다보면 가끔 집이 그리워 질 거야. 하지만 잘 견뎌 내야 한다. 독일어로는 하임베다. 네 마음에 새겨 두라고 되지도 않는 독일어를 하는 거야. 너도 다 알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노스탈지 는 프랑스어로 고향 병, 향수 병 아니냐. 고향에 돌아갈 수 없기에 생긴 슬픔을 말하는데 그게 처음에는 언짢고 말지만 나중까지 네 밥벌이를 제대로 못하면 타국에 있는 것 보다 더 슬플 거다. 아니면 고향에 오지 말랐다고, 이 아비한테 앙심을 품을 수도 있어. 그렇게까지 가진 않겠지. 난 내 아들을 믿어. 했다. 또 양이 안 차는 직장이라고 백수건달노릇 하다가 집으로 뽀르르 내려오는 건 더욱 더 용서할 수 없다. 사는 게 쉽지 않느니라. 집에 오려면 서울에서 자리 잡고 집에 와야 해.’ 아버지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나는 집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무슨 면목으로 집에 가겠어.
새로 들어간 택배회사에서는 배송에 문제가 생기면 물건을 배달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했다. 하루에 밥 두 끼는 본인의 돈으로 해결하고 회사에서는 하루 기름 값으로 3만원이 나왔다. 그 돈으로는 어림없다. 하루 기름 값으로 내 돈 2만원이 나가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놀 수도 없다. 앞날을 위해서 학원에 다니고 책을 사고 소주 한 병을 사 먹더라도 돈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말한 자리 잡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요원했다. 뭘 하던 지 끊임없이 움직여야 입에 풀칠이 가능했다.
나는 아침 7시 반에 회사에 도착했다. 출근도장을 찍고 바로 지하에 있는 물류 창고로 갔다. 산더미 같이 쌓인 물건 사이로 찻길이 뚫려 있어서 실제 쌓인 물건보다 두 배 이상 많아보였다. 잠시 소란이 일었다. 집하이동차가 들어오니 찻길에 떨어진 물건을 옮기라했다. 나도 같이 찻길로 비어져 나온 물건을 다른 물건 위에 올리고 끼웠다. 큰문이 열리자 늙은 나무 등걸처럼 낡은 집하 이동차가 구불거리며 나타났다. 털털하게 생긴 김 과장이 내게로 오더니 할당한 물건 110개와 송장을 주었다 에어켑 없는 물건 포장이 걱정이었다. 물건이 파손되면 파손에 대한 손해를 내가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발송순서와 지역별로 구분하여 물건을 차에 실었다. 두 시간이면 끝이 날 것을 출근 첫 날이라 3시간이나 걸렸다. 배가 고팠다. 가다가 무얼 사 먹어야지 하면서 차를 몰고 배송지로 향했다.
첫 방문지는 p대학 병원이었다. 대학병원을 비롯한 공공기관이나 상가 사무실은 핸드폰으로 본인한테 배송시간에 대한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됐다. 전화하는 시간과 핸드폰 요금이 굳어서 다소 위안이 되는 첫날이었다.
다음 날, k 지역에서 배달 사고가 났다. 벌써 배달사고? 반송 내역서의 주소는 서울 용산구 효창로 독립운동가길 31의 5 김하란이었다. 김하란이라는 이름은 학생 때 사귀던 내 연인 이름이었다. 설마 그 하란은 아니겠지. 내가 찾아간 곳은 효창공원을 마주 한 단독 주택이었다. 그녀와 사귈 그 당시 하란의 집은 마포였다. 지금은 그 자리에 말쑥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나는 혹시 그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백미러를 보고 머리 모양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손으로 옷 전체를 털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에 하란이라는 손님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전에 내가 사랑했던 감미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안도했다. 그 집 대문 앞에 서서 뜸을 들이다가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나도 모르게 그녀와 같이 불렀던 존 레논의 이메이징을 흥얼거렸다.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하려고만 하면 쉬운 일이랍니다.
우리 아래 지옥도 없고 위에는 그저 하늘만이 있는,
안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대문을 연 여자가 놀랐다.
“아니, 이게 누구야!”
“ 으 응, 아니 벌써 이런 일이 닥치다니!”
한 때 내가 사랑했던 하란이었다. 나는 낙타처럼 온순하게 눈만 껌벅였다. 그녀는 ‘세상에나 살아있었네.’ 중얼거리고 나서 들고 있던 문제의 반송 물을 내밀려다 말았다. 하란과 헤어지고 미칠 것 같던 날들이 피고 지는 사이, 이제는 나도 무덤덤해져 내 가슴에 그녀에 대한 풀 한포기 돋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래도 그녀를 보자 한때에는 천년만년 둘이서 살고 지고, 했기에 먼 길 돌아서 이제야 찾은 듯 반가운 생각이 살콤 들다 말았다. 하란에게서 풋풋한 기운은 찾을 수 없었다. 하란은 이제 목소리도 장군처럼 씩씩했고 누구야? 할 때의 눈빛은 이미 내 몸 전체를 훑어 나를 제 나름으로 파악한 뒤였고, 그다음 누그러진 눈웃음으로 나를 보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웬일이야?”
“으응, 택배가 돈이 된다 해서 시작했지.”
“잘돼?”
“요즘 택배 회사 너무 많잖아.”
그녀가 다시 천천히 내민 상자 속 문제의 물건은 오래된 엘피판 ‘베드 인’이었다. 나는 순간 하란과 헤어져 극장에 들어가 울먹였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시내를 배회하다가 찻집에 들어가 가방에서 메모장을 꺼낸 뒤, ‘베드 인 포 피스’ 라고 적었다. 그랬더니 왠지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나중에야 문득 그때 왜 내 마음이 가라앉았지? 라고 반문하게 됐고, 대답은 웃음을 불렀다. 우리는 연애가 중반 쯤 접어들자 미숙해서 자존심만 세웠던 지난날들을 보상이나 하듯이 짐승처럼 엉겨 붙어서 사랑을 했다. 너의 몸에 내 몸을 문지르면 마술가가 되는 당신! 하고 존 레논이 손을 내밀던 연상의 일본여자 오노 요쿄, ‘베드 인’은 그들이 만든 평화시위 캠페인용 노래였다. 정확하게는 월남 전 반대로 투옥된 시위군들을 위해 만들어 부른 노래였으며 신혼여행지의 침대가 평화의 캠페인 무대였다. 엘피판 ‘베드 인 ’은 내가 하란과 사권 지 100일 되는 날, 100일에다 다이아몬드만큼의 의미를 부여해서 선물한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베드 인’ 엘피판을 슬쩍했었으며 그 뒤에도 거리의 상점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오면 하란을 떠올렸다. 그녀와는 화제의 인물이 된 오노 요코에 대해서 자주 격론을 벌였다. 서서히 풀잎이 시들고 대학가 역시 일자리 문제로 낭만 대신 다급한 기운이 감돌았다. 대학 졸업을 자꾸 뒤로 미루는 학생들이 늘기 시작했고 졸업 후에도 갈데없는 졸업생들이 공부가 아닌 도피처로 대학원에 적을 두는 젊은이들이 늘었다. 나는 내가 다니는 학교의 학보에 일자리 문제에 대한 글을 몇 편 올렸다. ‘우리나라의 독특한 사회구조와 청년 일자리’ 에 대한 글이 주류였다. 그런데 그 결과가 내게 행운으로 다가왔다. 재벌기업 G사에서 일자리 제안을 해 왔다. 그때 하란은 내게 양심 있는 젊은이가 되라했다. 젊은이들에게서 혁명은 갔지만 기계화 로봇화가 일자리를 앗아가는 바람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말없는 소요가 일었다.
양심 있다는 게 뭔데? 나는 내 능력을 인정해준 그 대기업에 감사해. 두뇌 집단이 되어버린 대기업에서 오라는데 포기해야겠어? 포기하지 않는다고 나더러 양심 없다는 거야? 의식 있는 너까지 꼭 그래야 되겠어? 재벌위주로 돌아가는 우리나라 경제구조에 대해서, 혹은 중소기업이 우리의 미래다. 뭐 그런 글로 대학생들을 부추겨 놓고 자기는 대기업으로 가시겠다 이거잖아. 부추기다니? 인생이 걸린 문젠데 부추긴다고 애들이 가냐? 내 말은 대기업이 원하는 취업자 수는 한정되어있다. 중소기업도 찾아보면 좋은 곳이 많다. 그런 취지로 글을 쓴 거야. 그러니 잘 알고나 말해. 너와 결혼도 하고, 집도 살려면 당연히 대기업에 가야지. 됐어. 됐다고. 자기는 일단 안전한 밥벌이 꾼, 이기적인 사기꾼이 되겠다고? 우선은 우리 사회도 재벌 기업이 필요하다. 최고의 고급인력과 그에 걸 맞는 최고의 대접, 첨단 기술력을 자랑하는 최고의 시스템이라야 세계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아니야. 정경유착으로 백성 대부분이 노예화 될 수도 있어. 하지만 나 범준은 이 땅의 고급인력이고 싶다. 범준아, 그런 일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 결국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해. 학보에 실은 자기 글은 글 자랑이었어? 넌 춤이나 제대로 춰. 춤꾼이 별 걸 다 참견해.
그 일이 빌미가 되어서 그녀와 헤어졌다. 이별 뒤, 독이 든 주사를 맞은 듯 모든 의욕을 잃고 나는 무기력해져서 대기업을 맥없이 포기하고 말았다. 나중에 중견 건설업체에 취직했다. 그러나 세계 건설 붐이 사그라지면서 내가 다니던 회사도 최소한의 인력으로 꾸려가야 했다. 나는 2년 치 월급을 미리 받는 조건으로 퇴직해야 했다.
소유가 없는 세상, 욕심도 없고, 배고픈 사람도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이 있다면 정말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노래 덕분에 존 레논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평화의 상징으로, 거의 우상처럼 숭배를 받았다. 종교와 내세에 대한 부정, 소유에 대한 부정, 또 국가와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이 담겨있는 존 레논의 노래 ‘Imagine’…. 이 노래는 평화를 상징하는 노래로 시위나 특별한 행사 때 많이 불리웠다.
나도 탐욕스럽게 사랑했던 때가 있었구나 하면서도, 월남전에 참가한 기념으로 가져온 것들 중 하나였던 엘피판이 없어졌다고 난리치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래도 내 대학시절이 엘피판을 훔쳐다가 선물할 정도로 뜨거운 때가 있었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사랑의 노래가 흐르던 그때에는 아버지의 논다랑이가 한몫했다. 하지만 몸이 배고픈 지금은 사랑은커녕 빵이 문제였다.
하란은 그 엘피판을 친구에게 빌려줬다.
“하란아, 너 유학 못 가면 유흥업소에 가서 춤출 거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범준이가 뭐라 했다고?”
“낙타 한 마리 살 돈 마련해서 사막에 가자했지.”
“낙타는 종일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아. 거기다 비라도 와 봐. 눈을 껌뻑이면서 먼 하늘을 향해 제 어미를 부르는 것 같단 말이야.”
“그래 범준이도 낙타는 영혼이 있는 것 같다면서 낙타를 원했어.”
“걘 좀 달랐어. 나도 걔 땜에 잠깐 철지난 학생운동에 가담했었지. 범준이는 인간에 대 한 물음표가 많았어. 빈부간의 격차라던가 생명문제라던가. 의식 있는 젊은이지. 그래서 내 가 좋아했지.”
하란은 범준과 연애 중에 받았던 선물얘기가 나와 친구에게 ‘베드 인’을 빌려주었다. 그런데 친구에게 빌려준 엘피판이 내 직전에 일하던 택배원의 배달 부주의로 못 쓰게 됐다.
하란의 남편은 경동시장에서 한약재상을 했고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은 중학교 2학년이었다. 부모 곁을 떠나 혼자 자립하고 싶다며 지금은 미국 유학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 밥 먹고 가라고 했다. 출출하던 차에 잘 됐다. 그녀가 차려준 밥상을 받다니! 나는 일어나고 싶은 충동과 밥을 먹어야하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렇다고 이미 거실을 가로질러 간 식탁 앞이다. 이미 거절할 때를 놓쳐버린 셈이다. 봄에는 연인처럼 칼칼한 음식이 제격인데 하란의 음식이 그랬다. 일상의 자잘한 문제에 찌들어 사는 대중들에게 잘 만든 영화 한편이 위로가 되듯, 계획에 없던 하란의 아침상이 얼떨떨한 가운데 위로가 됐다. 밥을 먹고 현관문을 나오면서 문제의 엘피판에 키스를 한 뒤, 돌아선 내 등 뒤에서 그녀가 소리쳤다.
“범준아, 차 조심하고 오늘도 굿 타임!”
한 마리의 나비였고 백조였던 하란이 저리 푸근해지다니! 무용과였던 그녀의 발가락에도 굳은살이 박여서 신발 사 신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발가락의 굳은살만큼 노력하는 사람이고 그 시대를 고민했던 여자였다. 비난 받던 존 레논 부부의 평화 시위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녀가 내게 밥을 나누고 차를 나누는 일이 이웃을 대하듯 했다. 적어도 그녀를 따라서 집안으로 들어올 때의 내 심정은 착잡하고 위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호젓한 그녀의 관심과 언어, 눈빛으로라도 나를 만지기를 바랐다. 대기업에 들어간 사람이 또 택배사업까지 뛰어든 거야? 힐난하다가 그것도모자라서 내게 뼈아픈 말로 물어뜯기라도 할 때를 위해서 내 나름의 반격을 준비했었다. 하란의 이별통보로 세상을 놓듯, 대기업의 손짓을 뿌리쳐 버린 게 누구 때문인 줄 알기나해? 전처럼 하란의 공격적인 성격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노라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차를 몰고 택배지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나는 배는 부르지만 초라한 상태로 하란을 만난 게 못내 우울했다. 용산의 한 오피스텔에 도착한 나는 우울한 김에 힘이라도 써 보자 싶어서 턱없이 무거운 짐을 혼자서 들고 낑낑댔다. 혼자서는 해볼 도리가 없어서 물건 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물건 주인과 같이 물건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 사내의 오피스텔 현관문을 열자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침대 하나, 책 상 하나 그게 다인 오피스텔 원룸이었다. 화장실과 부엌을 함께 쓰는 아주 비좁은 공간이었다. 가난한 젊은이는 여기에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회사에 다녔던 나는 2층 양옥을 통째로 빌려 살고 있었다.
저녁에는 존레논과 오노 요코의 ‘베드 인’을 사기 위해 음반가게가 붙어있는 대형서점에 갔다. 서점안의 음반가게에 ‘베드 인’ 엘피판은 없었다. 나중에 다니다가 엘피판 가게에서 ‘베드 인’을 만나면 사기로 하고 당장은 CD로 된 ‘베드 인’으로 대체했다. 하란에게 빈손으로 가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다.
“택배요.”
두 번째 그녀의 집을 방문한 날에도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가 내게 밥을 먹게 했다. 우리는 밥을 먹는 내내 학교 다닐 때의 추억만 얘기했다. 우리는 논쟁으로 시작해서 다툼으로 끝을 냈던 대학시절과는 달리, 그녀는 상대를 배려해 가면서 둘만 있을 때의 위험한 대화거리는 피해 갔다. 내가 시계를 보자 하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학 다닐 때, 하란은 무용과고 나는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하란은 사치스러웠고, 나는 좀 로맨틱 했다. 하란은 춤을 잘 추었다. 그녀는 한 마리의 백조가 되기도 하고, 봄날 장다리 밭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는 한 마리 나비가 되기도 했다. 하란은 앞장서서 대문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나 더러 따라 오라했다.
“……?”
“재미있는 것을 보여줄게.”
나는 좀 얼떨떨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란은 침실을 낀 좁은 복도로 들어서기에 농익은 섹스를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멈춰서더니 좁은 지하 문을 열었다. 다시 컴컴하고 비스듬한 계단을 10개쯤 내려갔다. 거기 꽤 너른 지하공간이 나타났다. 젓갈이 발효되는 퀴퀴한 냄새와 냉기가 다가왔다. 머리가 띵했다. 그곳은 술을 담아 저장하고 생선을 저장하고 젓갈을 저장 했다. 다시 서쪽에 붙은 작은 통로로 들어서는 쪽문을 열었다. 갱단의 마약뭉치를 떠올리면서 주춤 그 자리에 섰다. 하란이 서쪽 벽으로 가더니 딱, 소리 나게 불을 켰다. 그러자 존레논. 김시습이라 쓴 작은 편액이 보였다.
“우리의 게츠비, 조선 시대 김시습의 뇌를 방문하는 거야.”
“……?”
“색다른 체험일 걸. 자, 그럼 지금부터 15분간 김시습의 뇌를 체험하겠습니다. 여기 체험 문에 머리를 디미십시오.”
8호 짜리 그림만한 문 하나가 내 앞에 다가섰다. 다음은 안경점의 시력검사대에 선 사람처럼 턱을 내밀고 김시습의 뇌를 응시했다.
“……? 여기 머리를 디 밀면 5세 천재 어린 김시습부터 시작된다 이거야? 이거 누구 발상이야?”
“우리 남편의 생각이야. 물론 논쟁으로 시작해서 논쟁으로 끝나는 내 성격 때문에 남편이 나중에는 존레논과 김시습에 대해 연구했어. 그게 그의 취미생활이 되어 버렸어. 그이는 시간 만 나면 여기 와 살어.”
어린 시습은 단시간에 시 한 편으로 세종대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왕은 시습의 시를 읽고 나서 무릎을 탁 치더니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았다.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 시습에게 다가온 왕은 시습을 번쩍 들어 올려 안았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놀란 그는 울어 버렸다. 왕은 허허 이놈 봐라. 글은 청산유수인데 나이는 어쩔 수 없구나. 하며 그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이번에 왕은 그를 들어서 자신의 무릎위에 앉혔다. 그렇게 특별한 사람의 사랑을 받아본 시습은 집에서 세종의 너털웃음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 뒤, 세종대왕은 시습의 인생 전부를 지배했다.
왕이 내린 하사품 비단 50필을 받아 든 어린 시습은 그중 분홍 비단 한필을 빼서 몸에 감고 궁궐을 나왔다. 나중에 시습의 태도를 전해들은 왕은 고놈 참, 하였다. 물론 나머지 비단은 집에 보내 달라 부탁하고 함께 간 형과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는 길에 피곤한 시습은 나무 그늘을 만나자 피륙위에 올라가더니 낮잠을 청했다. 왕의 무릎에 앉아보았던 흥분이 가라앉기 전이라 그런지 자면서도 배냇짓이 잦았다. 산천은 푸르고 시냇물은 맑게 흘렀다. 꿈속에 어머니가 보이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꿈도 꾸었다. 가다가 호랑이를 만났지만 호랑이가 길을 비껴주었다. 어머니는 호랑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산으로 가는 꿈이었다. 어머니는 아마도 산에다가 슬픔을 버리러 가는 지 울었다. 눈을 뜨자 오색천이 너울거리는 성황당이 보이면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늘어지게 잔 것처럼 기지개를 켜는 귀여운 천재 시습은 산천을 휘 둘러봤다. 그리고는 형에게 피륙위에서 일으켜 세워 달래더니 이번에는 형에게 성황당에다 그 피륙을 걸어 달랬다.
“세종대왕님, 만수무강하세요.”
형과 나란히 서서 서울을 향해 축수한 다음, 이번에는 그 피륙을 그네로 매 달랬다.
왕은 김시습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거라고 했다. 조선의 거목으로 왕 옆에 두고 쓸 거라고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나라를 크게 발전시킨 능력 있는 세종대왕의 예측은 빗나갔다. 예측은 틀리게 마련이다. 미래에 대해서는 틀릴 수 있지만 적어도 예측을 하고 행동을 하거나 말한 사람은 그 당시에는 진실이었다.
21살이 된 청년시습은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되기 위해서 삼각산에 있는 사찰에 들어 열심히 공부 했다. 악몽에 시달리다 깬 날 오후에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켰다는 소식을 들고 서울에서 사람이 왔다. 그는 대성통곡을 했다. 나중에는 반 실성한 것처럼 굴더니 마실 줄 모르는 술을 입에 쏟아 부었다. 그러더니 그만 발광을 했다. 주지가 똥간에 갔다. 누군가 똥간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잽싸게 두 번 눈을 씻었다. 저 아래 똥간을 자세히 봤다. 멀쩡하던 시습이 실성하여 똥간에서 쥐와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허어 이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하더니 이제 돌아버렸군.’ 혼잣말을 하던 주지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시습과 쥐를 꺼내 깨끗이 씻긴 후, 그 둘을 방에 넣고 그만 시습의 방에 자물쇠를 물려 버렸다. 그가 쥐와 씨름하는 동안, 근심걱정이 사라지라는 처방이었다. 쥐 잡느라 헤매다 보면 지칠 테고 지치면 곯아떨어지겠지. 과연 주지의 생각이 맞았다. 잠깐이지만 시습은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를 고민했다. 며칠 후 쥐에게서 답을 얻은 그는 그만 짐을 꾸려 삼각산을 내려왔다.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쥐가 답을 준 셈이었다. 사람은 먹고 싸는 것이다. 쥐도 먹고 싸는 것이다. 간단한 이치를 가지고 삼각산까지 갔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습은 산을 내려왔다. 사는 게 별거냐? 별 이상한 체험을 다한 시습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사람을 탐욕스럽게 물어뜯는 바람에 소중한 개인의 삶이 소중한 줄 모르고 지나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돌 속에 앉은 인간이 염불소리 들으며 출세를 위해 글을 읽는다고? 그 사이에 어린 왕이 죽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맛난 식사를 하고 더러운 똥만 싼 세월이었다. 똥간은 그사이 똥을 받아 발효시켜 거름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결국 사람은 그 똥이 만든 맛있는 작물을 먹고 다시 더러운 똥을 싸고, 경전은 똥간에 있었다. 왕실이 세상에 못 박는 데 그런 왕실에 들어가 뭣 하겠어? 시습은 하늘을 보고 허허 힛힛 한참을 웃었다. 하찮은 미물한데서 교훈을 얻은 그는 전과는 달리 잘 웃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에게로 아가씨가 다가왔다. 그녀 역시 지배층을 못마땅해 했다. 오만하면서 교활한 사람들이 백성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룬단 말씀이야. 퉤. 양반을 말할 때에는 소화가 안 되는 얼굴을 했고 물속의 뻐꾸기 감돌고기마냥 물속을 헤엄치는 대신 그녀는 숲으로 가서 놀다오길 좋아했다. 시습 역시 자유를 사랑했다. 돈을 형님처럼 대하는 기득권의 횡포를 몹시 역겨워했다.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 때문에 세상이 싫어졌는데 또 다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그의 처소로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세조가 신진 세력인 그의 친구들을 잡아다 처형했다. 그는 죽은 친구들을 장사지내고 산으로 아주 들어가 버렸다. 경상도 금오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세상과 연을 끊어버렸다. 그 뒤, 소설을 쓰고 시를 지어 후세에 영원한 보물을 전했다. 하지만 존 레논처럼 적극적인 삶을 살지 않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람과의 교류의 문을 닫아걸었다. 물론 시습의 초막 앞에는 시습을 상징하듯, 곧고 푸른 대나무가 우아하고 유연함을 뽐내면서 바람에 흔들렸다.
배달물건이 80개나 남아서 서둘러야 했다. 택배 물건이 빼곡히 쌓인 트럭에서 차문을 열면 바로 버티고 있는 생수와 쌀을 먼저 배달해야 했다. 쌀을 배달하고, 생수를 배달해야 그나마 택배 운송 차의 입구에 빈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무거운 것부터 배달하고 나면 힘이 빠지고 지쳤다. 어찌 되었건 어서 서두르자! 차를 몰면서도 김시습을 생각했다. 그의 뇌로 들어가자 확실히 마음이 차분해지고 온 몸이 편안해졌다. 그 시대를 사는 백성들의 생활은 가난했다. 가장이 자식 둘과 병든 아내가 있는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더니 품안에서 보자기에 싼 밥주발을 내놓았다.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너희들은 좀 참아야한다. 엄마가 아프다. 남자는 누워있던 아내를 일으켜 세우더니 파리한 그의 아내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안쓰럽고 가여워하는 빛이 역역했다. 아직 식지 않아 따끈한 밥을 한술 떠서 아내의 입에 넣자 여자는 오만상을 찡그렸다. 초등학교 고학년 생으로 보이는 그 집 큰딸이 얼른 부엌으로 내려갔다. 매운 연기를 마시면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더니 금방 데운 김치 국을 국그릇에 담아내왔다. 남자는 밥숟갈을 국물에 적셔 병든 아내에게 먹였다. 어린 자식들이 배고프다고 낮게 칭얼댔으나 장면이 정답다. 남자는 그런 자식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은 굶어서 푹 꺼져 쾡 했으며 얼굴 전체가 어둡고 무거웠다. 그 장면이 스크린처럼 휘뜩 지나가고 김시습의 싸한 아픔이 내 가슴에 전해졌다. 천지엔 봄빛이 찬란한데 그 집에는 가난이 병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靑春亡社稷(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白首汚江湖(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 조선 시대 수양대군을 도와 단종을 왕위에서 밀어낸 한명회가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며 쓴 시를 김시습이 딱 2자 바꿔 조롱한 시다.
특히 열심히 생산하지만 가혹한 수탈로 가난을 면치 못하는 백성들의 한탄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 심정을 「산가(山家)의 고통을 읊다」여덟 수에 담았는데 그중 셋째 수가 이렇다.
척박한 땅 싹이 자라면 사슴 돼지 먹어대고 薄田苗長麕豝吃
수숫대에 목이 나오면 새와 쥐가 훔쳐 먹네 莠粟登場鳥鼠偸
세금을 내고 나면 들어간 비용도 건지지 못하는데 官稅盡收無剩費
빚을 감당할 수 없어 소까지 빼앗기네 可堪私債奪耕牛
시습은 팔도를 다니면서 백성들의 가난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보았다. 그의 시나 짧은 단편은 가난한 백성들을 대신한 절규였다.
앞에 거렁뱅이 둘이 걸어가고 있었다. 하나는 김시습이고 하나는 그의 몸종 돌쇠였다. 돌쇠가 돌아서서 소변보는 사이에 그는 낡아 너덜거리는 저고리 자락을 손으로 뜯어내고 있었다.
“나리, 여씨의 농락으로 정권이 기울어 진 한나라 사람들이 궁색한 살림에 보태느라 집에 있던 피륙을 내다 팔았잖아요. 그때 싼 가격으로 피륙을 사서 여태 잘 입으시고는 왜 그리 그 옷을 홀대 하십니까?”
“돌쇠야, 이렇게 꽃잎 흩날리는 봄이면 이 옷을 지어 내게 입힌 왕녀가 사무치게 그립구나. 바보 같은 내 인생을 뜯어서 봄바람에 날려 보내는 거야. 이제 조선 팔도를 누비는 일도 힘들고 지치는구나.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집이 있는데 우리는 발길 닿는 곳이 바로 집이고 침실이구나. 그리하길 10년, 그만 소요산으로 돌아갈까? 돌쇠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나리가 서울에 있을 사람인가요? 역마살이 켜로 끼어 떠돌지 않으면 발에 곰팡이가 피고 입안에 가시가 돋는 분이신데 일시적으로 맴 먹는다고 한들 지가 곧이듣나요?”
“허허 참 이 눔 봐라. 나도 이제 그동안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융융한 바람소리에도 움츠릴 줄 알고 꽃피는 세상이 좋다고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어서 흙 밟고 억세 꺾으며 시조가락 읊던 일들을 정리하련다. 이제 죽을 나이도 됐으니 서서히 글도 정리하고 저세상 갈 채비를 해야겠다. 친구인 사육신들이 죽은 뒤, 나도 살고 싶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나저나 사랑 소설 하나 써야겠다. 돌쇠, 네 진짜 이름이 양생이라고 했겠다. 알았어. 주인공은 양생이여. 양생이가 어여쁘고 지혜로운 여인을 만나 사랑을 했어. 그녀는 전쟁 통에 죽은 처녀 귀신이었어. 나는 그녀가 귀신이건 아니건 그녀만을 사랑할 거야. 새벽닭이 울면 그녀가 떠날 테지, 물론 허망하고 슬프겠지만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뭐든 다 할 거야. 다음 사랑은 없어.”
말을 끝낸 중년 김시습은 서울을 향해 두 손을 모은다. 세종대왕과 단종에 대한 충성의 표시였다. 불우한 천재의 뒷모습은 거지였으나 그는 사랑하는 사람, 흠모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더 없이 행복해 보였다. 즉 사모했던 세종대왕과 단종을 그리며 죽은 그들이 죽어서라도 찾아오면 놓지 않으리라는 비장감 깃든 소설내용이었다.
나는 시계를 봤다. 벌써 택배차를 몰고 회사를 나온 지 4시간이 지났다. 하란이네 집에서 존 레논의 뇌에도 들어가 보았다. 15분을 더 보태어 썼다.
존 레논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옥빛 바다를 내려다 봤다. 그는 바다와 하늘이 보이는 넓고 아름다운 집에서 살고 있었다. 차차 해무에 잠긴 바다로 바뀌더니 그곳에서 예쁜 2층 벽돌집이 나타났다. 돈은 벌었지만 자신한테 쏟아지는 비난과 칭찬이 버거웠다. 존은 그런 나날이 전쟁 같았다. 하루는 그가 클럽활동을 시작할 때 저지른 기인행세를 했다. 변기를 뒤집어쓰고 기타 현을 요란하게 뜯었다. 이번에는 난데없이 여자의 커다란 엉덩이가 클로즈업 되는 화면이 떴다. ‘평화를 사랑하자.’ 오노 요코. 티브이를 보고 있던 영국인들과 세계인들은 대부분 못마땅해서 표정을 한껏 구긴 뒤, 욕을 했다. 하지만 오노 요코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저녁뉴스에는 월남전으로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워싱턴 D.C에서도 2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베트남 전쟁반대 시위를 했다. 다시 안개에 휩싸인 시위 장면이 지나가고 신혼여행 길의 호텔에서 존과 오노가 신혼여행지 호텔방의 베드 위에서 전쟁반대 시위를 하는 장면이 떴다. 그때 만든 음악이 ‘베드 인’혹은 ‘베드인 포 피스’였다. 평화를 구현하려는 그들의 행동은 세간의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이번에는 복수하듯 이상한 평화시위 광고가 떴다. 푸른 바다에 살빛 커다란 엉덩이가 떴다. 사람들은 너무 섬뜩하여 뒤로 물러앉았다. 바다에 비행기 길 같은 한줄기 하얀 길이 나타났다. 그 길 위에 ‘누구를 위한 전쟁이냐? 평화를 사랑하자.’ 라는 글이 떴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허공에 대고 헛웃음을 날렸다. 존과 오노 의 아이디어에 그저 손들었다. 는 듯, 티브이를 보던 사람들은 허물어진 몸을 의자 깊숙이 묻고 말았다.
존은 하늘과 바다가 보이는 탁 트인 집이었지만 답답했다. 결국 존은 전쟁 없는 세상,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앞을 가리던 해무가 걷히면서 하얀 정장을 한 자그마한 동양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자신이 입은 하얀 옷을 가위를 든 타인들에게 내맡기고 있었다. 가위든 여자들 둘과 남자 셋은 재밌다 는 듯, 가위로 그녀의 하얀 정장을 듬성듬성 잘라냈다. 그들은 다시 그녀의 바지를 두 조각으로 절개하려고 했다. 오노는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대신 바지 밑단부터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면서 가위질을 하라했다. 연필로 미리 그려놨나 그들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예술가들의 솜씨로나 가능한 것들을 만들면서 잘려나갔다. 갓 지은 흰색 정장차림은 평화와 순결을 의미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옷이 아닌 쓰레기로 변해 버린 것들을 그녀는 내려다 봤다. 속옷만 남은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자 가위 든 사람들은 더욱 열을 올렸다. 한 조각의 속옷마저 싹둑 잘라버렸다. 알몸이 된 여인의 젖가슴 양쪽에 ‘본질’ 이라는 글이 나타났다. 본질만 남은 그녀는 허구를 위해서 뭐 그리 천문학적인 돈을 쓰고 가꾸느냐? 묻고 있었다. 그것은 가면이고 탐욕이고 욕망이며 모든 죄악의 근원들이다. 뭐 그런 의미인 듯 했다. 손님들은 배달한다는 시간에서 조금만 지연되어도 택배회사로 즉각 항의전화를 했다. 차는 잠실로 접어들었고 조금 전에 헤어진 하란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남편의 취미생활 구경 잘 했어? 너나없이 돈 없다고 기죽을 필요 없어. 다행히 내 남 편은 나를 믿어. 서로 믿고 살면 더불어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거야. 니 것 네 것이 없는 세상, 니것 네 것이 없으니까 싸울 필요도 없는 세상, 배고픈 사람이 없는 세상, 싸움과 전쟁이 없는 세상, 종교와 지옥이 없는데 어떻게 천당이 있겠어? 단지 푸른 하늘만 있는 세상, 나라도 없고 국경도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일찍 세상 뜬 존 레논이 꿈꾸던 세상이야. 인생 짧다지만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결코 짧은 인생이 아냐. 실컷 자고 실컷 즐기고도 잘 살았노라 세상에 손을 흔들며 떠날 수 있어. 그러니까 너무 그리 서둘지 말란 말이야. 어때? 헌데 왜 자기감옥에 갇혀서 쩔쩔 매냔 말이야. 지금 본 것들을 이용해서 사업을 한번 해보시지? 재밌지 않을까? 남편이 아마 들어 줄 거야. 아니면 약초에 관한 일도 많으니 그것도 괜찮다면 얘기해볼게.”
“알았어. 주위에 하란, 자네 같이 토양이 좋은 사람이 있으니 행운이지.”이건 단순히 착하고 악하고의 문제가 아냐. 이 땅에 태어남에 감사하고 탐욕을 버리자. 각자의 토양에 맞게 살며 자연을 사랑하자.”
하란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자 갑자기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던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금시 눈앞에 부모님과 동생들과 코스모스 핀 누런 들판이 펼쳐졌다. 반듯한 직업이 없다고 명절 때에도 고향에 못 갔던 암울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허긴 현실적인 삶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에 늘 내 가슴에 공허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바람만 가득 찬 공허는 사람을 불안하게 했고 자신감을 잃게 했다. 오늘은 일단 집에 가서 쉬자. 내일은 내일의 바람 따라 살면 되니까. 차량 통행이 조금 적은 길가에 택배차를 세웠다. 멍하니 앞을 봤다. 달리는 차들 위로 6월의 눈부신 태양이 잘게 폭발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를 바라봤다. 운전석에 앉아서 현실감이 떨어진 채, 멍해져서 앞만 바라봤다.
조금 전의 체험을 이용해 돈을 벌어보라는 하란의 말을 골똘히 생각했다. 갑자기 내 고향 김제의 뒷동산의 개암나무열매, 다래 열매가 눈에 선하다. 푸르디푸른 들녘과 석양 무렵 눈물 나게 아름다운 지평선이 보고 싶다. 가슴이 아리도록 부모형제가 그립다. 차에 시동을 걸어 천천히 찻길로 들어섰다. 어서어서 일을 하자. 밤늦게까지 라도 배달을 끝내고 내일은 고향에 내려가자. 그게 내 안의 전쟁을 끝내는 일이고 아버지와 화해하는 길이다. 그게 탐욕을 내려놓는 일이고 푸른 하늘만 있게 하는 일이다. 아버지께 내가 존 레논을 만나고 김시습과 함께 했던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쩌면 아버지도 자신의 성체에서 걸어 나올지도 모른다. 사람은 무한함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아니다.
찬란한 6월이여, 고향에 가기로 맘먹은 내게 행운을!
- 끝 -
2017.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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