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한국말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제목이다. 문과는 ‘문과 함께’라는 것이 아니다. ‘문과(文科)’라는 뜻이다. 저자인 유시민은 경제학을 공부하고 정치에 몸담기도 했으나 스스로도 말했지만, 수학과 과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책 서문에서 “인문학만 공부해서는 온전히 교양인이 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과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부가 무엇인지 새로 이해했다.”고 하고는 “과학은 인간과 사회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하는 일로 내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존재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면서 내가 누구이고,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고, 과학 공부가 그런 맛인 줄 알게 되면서 내자신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과 이론을 정확히 설명할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하고, 책은 “내가 흥미롭게 본 사실, 내게 지적 자극과 정서적 감동을 준 이론,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내 생각을 교정해 준 정보를 골라 나름대로 해석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과학을 소재로 한 인문학 잡담’쯤으로 보면 될 것이라고 했다.
‘불가능은 없다.’는 이 말은 멋지기는 해도 맞지는 않다. 인생에서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우사인 볼트’도, ‘무타즈 이사 바심’도, ‘리오넬 메시’도 될 수는 없다. 이창호, 이세돌, 신진서 같은 바둑기사가 될 수도 없다. 누구에게는 수학도 마찬가지다. 수학을 기초로 하는 과학은 물질세계를 탐구하고, 인문학은 인간과 사회를 연구한다. 대상과 방법은 다르지만, 진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과학과 인문학은 여러 면에서 다르다. 과학자는 인문학으로 건너갈 수 있으나, 인문학자가 과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는 지극히 어렵다.
과학자는 수학으로 우주를 이해하고 수학으로 대화한다. 수학을 ‘우주의 언어’라고 한 갈릴레이 견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객관적 실체와 무관한 지적, 논리적 예술로 보는 인문학과는 다르다. 과학자가 되려면 물질 현상에 대한 호기심뿐 아니라, 우주의 언어인 수학을 익힐 재능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재능을 다 가진 사람은 드물다. 수학을 모르면 과학 공부가 어렵다. 인문학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망의 산물이지만 그 욕망을 충족하려면 누구나 무에서 시작해야 한다. 단 하나의 인문학 지식도 유전으로 물려받을 수는 없다. 최근 들어 ‘인문학의 위기론’을 말하기도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뇌가 생물학적으로 진화해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인문학이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전통적 인문학인 문사철(문학·역사학·철학)은 몇천 년 전에 생겼다. 경제학·사회학·인류학 등 새로운 인문학도 몇백 년은 되었다. 인문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힘든 과제를 수행해 왔다. 인간의 몸이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세균과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와서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시대에도 그들은 생명의 유래와 존재의 이유와 인간의 본성과 죽음의 실체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는가? 어떤 힘이 사회질서와 문화를 바꾸는가? 역사에 정해진 방향이 있는가?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이것들은 어느 하나 쉬운 질문이 아니지만, 인문학자들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했고 해야했다. 이는 과학과 다른 점으로, 과학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하게 나눈다. 인문학에서는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가르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스펜스의 ‘사회다원주의’ 마르크스의 ‘역사이론’등이 다 그랬다. 과학 공부를 하면 예전에 몰랐던 질문을 여러 개 만난다. 거기에는 이런 것도 있다. ‘나는 무엇인가?’다. 이 질문은 인문학에서는 맞지 않는다. 인문학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내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어떻게 인간 본성을 밝히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과학은 마음의 상태로 단순한 사실의 집합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실체를 마주하는 방법이다.”물리학에서 화학과 생물학으로, 뿌리에서 가지와 잎으로 나아가는 과학 사실을 알려주는 《원더풀 사이언스》지에 실린 이 말은 21세기 전문과학작가 나탈리 엔서니가 한 말이다. 이것을 보고 저자는 말했다. 내용은 ‘원더풀’, 문장은 ‘뷰티풀’이라고.
16세기까지도 유럽사람들은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이 관념이어서 우리는 땅에 멈추어 있다고 생각했다. 별의 움직임과 태양계 다른 행성의 역행(逆行) 현상은 천동설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이 문제되지 않았다. 인문학 천재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상계와 천상계는 서로 다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이론으로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이 창조한 우주의 모든 천체는 완벽한 구형으로 원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의 지적 권위와 로마 교황청의 권력을 등에 업고 진리라고 군림했다. 과학에 관한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턱대고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 그 사실이 드러나는 데 2000년이 걸렸다.
이 시대 우리가 부러워하는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등 정보통신을 주도한 기업인과 엔지니어들은 인문학이 인격 성숙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세속의 성공도 가져다주는 만능열쇠임을 알고 있었다. 과학혁명의 시대에 인문학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하지만 인문학이 인간을 구한다고 주장하는 인문학자들은 정반대로 주장한다. 어느 것이 맞는 주장일까? 인문학은 생존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고 만든 학문이다. 생존을 위해 만든 기계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니 잘되기가 어렵다. 생물학자 윌슨은 그 문제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의 뇌는 생존에 필요한 것은 밝게 비춰보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객관적 진리보다는 신화와 자기기만과 부족(部族)의 정체성처럼 ‘적응의 이익’이 있는 것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 채 수천 세대를 이어가며 번식해 왔다. 과학이 제공하는 사실을 모르면 우리의 마음은 세계를 일부밖에 보지 못한다.”
월슨의 이 말은 과학의 토대 위에 서야 인문학이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과학의 이론을 활용하면, 인간과 사회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유럽의 중세 신학은 성서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학문 연구를 탄압하고 사람을 불태워 죽인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런 이념 체계로는 인문학이 될 수 없다. 여기까지가 ❶그럴법한 이야기와 확실한 진리 - (인문학과 과학)의 이야기다. ❷는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일 텐데 ‘나는 무엇인가’가 주제다.
❷ 나는 무엇인가? (뇌과학)
(여기까지가 4쪽 인데, 300쪽이 넘는 책을 31쪽으로 줄인 것이니 지겹도록 길다는 생각이 들어 따로 첨부했다. 관심 있으면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