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옛 교부들은 마치 하와가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왔듯이
교회가 상처로 열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셨고,
그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것을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상징으로 보아 왔다.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이
그 증거로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는 처녀의 요구에 따라
어머니의 심장을 빼앗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심장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렇게 굴러가면서도 어머니의 심장은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라고 말했단다.
옛날 고려시대에는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부모님이 늙으면 깊은 산속에 내다 버리는 악습이었다.
하루는 어떤 아들이 어머니의 나이가 많아져
고려장의 풍습대로 어머니를 지게에 얹어 산 속으로 들어갔다.
산이 깊고 길이 험하여 날이 어둑해지자 지게 위에 앉아있던 노모가
머리위로 지나가는 나뭇가지를 꺾어 자꾸만 길 위에 던지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아들이 왜 나뭇가지를 꺾어 길 위에 던지느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날도 어두워 지는데,
네가 돌아갈 때 길을 잃어버릴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런단다"
이렇듯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인 심장처럼
교회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성심 위에 세워졌다.
예수님의 성심은 당신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 당신의 몸과 마음 모두를
다 내어주신 예수님의 마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거기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리하여 예언의 말씀이 다 이루어진다(요한 19,31-37).
오늘 복음에서는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전합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십자가 위에서 잠드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생겼고,
한 병사가 창으로 그 거룩한 옆구리를 헤쳐
우리 구원의 대가인 피와 물이 흘러나오도록 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태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는 마음을 달리 표현하여 영혼 또는 생명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이 말씀처럼 마음은 생명을 뜻합니다.
또한 마음은 사랑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우리의 생명을 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고,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한 양식이 되셨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고통을 알게 될 때 성숙해집니다.
부모의 아픔을 보고 자란 자식은 쉽게 벗나가지 않습니다.
‘가족애’는 미움과 사랑 때문에 울어 볼 때 싹을 틔웁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모두 어른인 것은 아니지요.
고통의 옷을 입어야 어른이 됩니다.
남을 위해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이라야 어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몸은 어른인데 생각은 ‘어린애’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어려움’을 피해 다녔기 때문입니다.
고뇌가 없으면 성숙도 없고 발전도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어린이의 신앙’으로 남게 됩니다.
작은 고통에도 휘청거리고 기도와 성사 생활에서는 불평을 내세웁니다.
힘들다고 보채고, 주지 않는다고 투정 부리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해야 변화를 만납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성심 성월’을 제정했습니다.
주님이신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모욕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무죄하신 분께서 그토록 황당한 일을 당하셨습니다.
억울함의 극치입니다.
그런데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참아 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불평하고 외면하려 들면 더욱 모르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깊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분을 기억하며 ‘나의 십자가’를 끌어안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