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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8월31일 영도대교 마지막 드는모습
1934년 일제강점기 군수물자를 보다 쉽게 운반하고 조선의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영도대교 . 1890년대 영도 사람들이 뭍으로 나가려면
나룻배를 이용했다. 1914년 통통배라 부르는 동력선이 등장했고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배편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1934년 완공됐다.”
[
2013.11월 영도대교 개통 매일 낮 12시에 도개행사
ㅡ영도다리와 롯데백화점의 비하인드 스토리ㅡ
영도다리는 재난위험 등급 판정을 받아 철거 논란을 빚다가 2009년 ‘교량
해체 후 복원’ 결정이 내려지면서 2010년 신격호(92세) 회장의 롯데그룹이
공사비 1100억원을 부담해 복원공사가 진행됐다
기업의 사회환원이었을까 ?
그러고보니 왜 하필이면 지금의 광복동 롯데백화점을
영도다리 옆에다 세웠을까 ? 우연이었을까 ?
그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1922년 울산 가난한 농가에서 10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난 신격호회장은
울산 농업통고등학교를 나와 20세때 가난에서 탈출하겠다고 고향을 떠나
도착한 곳이 부산이다 영도 가까이에 있는 도립종축장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며 부산항을 오가는 배를 보며 일본으로 건너가 가난을 벗어 나고자
밀항을 하게된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 살이었다.
신회장이 첫 결혼을 한 것은 1939년. 당시 같은 마을의 노순화씨와 백년가약
을 맺고 1년여의 결혼생활을 했으나 1941년 도일하는 바람에 결혼생활은
단기로 끝났으며 신회장이 귀국하기 1년전 1959년에 노씨는 타계했다.
신회장과 노순화씨 사이에 태어난 자녀가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신회장은 고향 친구의 자취방에 머물며 와세다대학
화학과 야간에 다니며 낮에는 우유배달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돈이 모여지면 헌 책방으로 달려가 문학 작가가 되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고학으로 와세다대학 졸업후에 껌사업에 관심.갖게 되는데 대학에서 배운
화학 지식으로 치클과 설탕을 이용해 최초의 츄잉껌을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츄잉껌의 이름을 문학청년으로 뜻을
펼치지는 못하였으나 독일 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샤롯데’의 이름을 따서 기업의 상호를 지었다
그것이 롯데그룹의 효시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12E0E4F52C7D32A04)
영도다리 도개 관람을 위해 모여든 인파들
이러한 와중에 신 회장은 지금의 두번째 부인 시게미츠
하쯔코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두번째 부인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중국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윤봉길의사의 도시락 폭탄을 맞아 오른쪽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은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였던 것이다
요코하마에 정박 중인 미주리 전함 위에서 2차세계대전의 완전한
종식을 뜻하는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되었다.
그때 한쪽 다리를 절며 지팡이를 집고 일본측 대표로 나와서
사인을 한 사람이 일본외무상 '시게미츠 마모루' 전권대사이다
신 회장이 일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이러한 ‘숨겨진 혼맥’이 크게 한몫 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신회장은 이중국적으로 한국이름은 '신격호'지만 일본이름은 '시게미쓰 다오'를
사용하고 있다
일본외무상 '시게미츠 마모루' ㅡ그 딸이자 신격호회장 두번째 부인
시게미츠 마모루ㅡ사위 시게미츠 타케오( 신격호) 로 이루어진다
홀수 달에는 한국에서, 짝수 달에는 일본에 머물며 지낸다는 신회장
그가 영도다리에 애착을 갖는건 가난한 청년 신격호가 대사업가로
성공할수 있었던 출발점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또 그곳에 백화점의 지은 두번째 이유는
풍수지리적으로 용두산이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면 일제강점기 구시청
자리이자 지금의 롯데백화점이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용미산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아는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리라
또한 일제 강점기 임진왜란 선봉장군 가등청정을 모신 일본 신사 자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리라
![](https://t1.daumcdn.net/cfile/blog/2629A84652C7D2CA21)
영도다리 초입에서 다리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면 점집이 보인다.
과거 영도다리 아래에는 유난히 점집들이 즐비했다
이 비좁은 골목길에 75개의 점집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두 곳 뿐이다.
1951년 1.4후퇴때 이북 주민들은 사랑하는 가족,연인들과 뿔뿔이 흩어져
무조건 남으로 향했다.이들이 알 만한 한강 이남의 만남의 장소는
영도다리 뿐이었다, 그래서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혼란의 와중에 재회란 그리 쉽지 않았다.
당시 기다림에 지쳐 투신한 사람들의 보따리가 다리 위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또 영도다리에는 잃어버린 가족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찾는 종이쪽지 벽보로 도배되기도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602374752C7D35C09)
일제강점기 ㅡ해방 ㅡ6.25를 겪으면서 가난하고 힘들었던 서민들이 고통을
견디다 못해 영도 다리애 올라가 목숨을 끊는 자살의 명소가 되자. 경찰관
한 명이 다리 근처에서 보트를 타고 대기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47B574752C7D3630B)
우리나라 1호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하며 이산가족들에겐 하염없는 기다림의
장소이기도 했다. 가족들의 생사를 알고 싶어 역술인을 찾는 사람이
많다 보니 다리 밑에는 점집이 줄지어 들어서기도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6391F4652C7D2C21B)
영화 '친구'에서 가방을 메고 달리기 시합을 하던 곳으로 유명한 건어물 골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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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어물 시장 안에는 지금도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적산 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422424652C7D2A623)
일제 강점기의 유적들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인천, 군산, 목포.부산 등 식민지 수탈의 근거지가 됐던
항구 도시들이다. 낡고 허름한 골목에서 마주치는 일본인 지주들의 적산가옥, 그리고 수탈에 앞장섰던 관공서의
르네상스 양식 건물들에서는 식민지시대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77CB74652C7D2AD2E)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