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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신학]
들머리
한국인은 행복한가?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행복지수 최저, 의료보험제도 최저, 국가경쟁력 최저, 출산률 최저, 주택보급률 최저, 자살률 최고, 이혼률 최고, 고령화 사회진입속도 최고로 나타나있다. 이 정도라면 도무지 행복감을 체감할 수 없으며 장래에 대하여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전체 국민 중에 기독교인의 수는 870만으로 집계 되었다 한다. 1984년 8월 15일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 대회가 초교파적으로 참여, 여의도에서 개최됐다. 기독교 100주년기념대회에서 4천만 국민 중에 25%인 1천만 명이 기독교인이라고 감격스러운 한국교회의 부흥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10년 뒤에는 한국 전체국민 중 1/3 이상이 기독교인이 될 것으로 전망했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오히려 한국교회의 교인 수는 수치상으로 130만 명이 줄었다. 물론 그 동안 많은 수의 교인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중앙일보 5월 26일자에는 천주교 신자 폭발적 증가 눈길을 끈다는 제하의 보도가 나왔다. 지난 10년간 국내 천주교 신자만 219만5000명이 늘었단다. 종교가 없던 사람이 천주교 신자가 되고, 다른 종교를 가졌던 사람이 천주교로 개종한 것 등을 모두 포함한 수치다. 이 기간에 전체 종교 인구가 237만3000명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천주교 신자의 증가세는 폭발적이다. 불교 신자는 지난 10년간 40만5000명 느는데 그쳤고, 개신교 신자는 14만4000명 줄었다. 원불교를 믿는 사람은 4만3000명 늘었다.
기독교인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그만큼 행복하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지난 10년 동안은 한국의 가치관이 통째로 변한 시대이며 IMF와 두 명의 친북성향을 가진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사상의 경계점이 흐릿해지고 가치관의 변동으로 체감되는 행복감은 최저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정치와 경제의 추락은 국민의 행복감을 여지없이 추락시켰으나 이에 대하여 정신적인 빈 공간을 채워줄 기독교는 오히려 내부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며 힘을 잃고 있다. 교회개혁실천연대라는 단체는 기독교의 내부 문제를 외부로 노출시켜 사회적인 문제로 만들어냈다. 교회개혁실천연대는 새벽이슬이라는 청년들과 함께 하루가 멀다않고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의 윤리문제를 들춰내며 피켓시위 등 운동권에서 했던 내용대로 공격했다. 당하는 교회와 담임목회자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인지라 황망할 수밖에 없고 어찌 대응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당했다. 교회개혁실천연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각 교단의 총회에 공문을 보내고 총회 장소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 등의 영웅적인 행위로 국민일보를 포함한 교계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일련의 비판적인 기독교비판단체들의 행위는 이단들에게 빌미를 제공하였고 인터넷을 통해 반기독교 단체인 반기련 등의 안티기독교의 심각한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기독교와 교회의 권위는 추락하고 목회자들에 대한 존경심은 무너졌다. 이 여파는 그대로 개척교회 위에 쓰나미 현상으로 덮쳐 왔으며 개척교회들은 나가떨어지게 되었다.
문제가 어디에 있을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으나 먼저는 기독교가 한국사회의 사상과 정신을 이끄는 주체가 되지 못하였다는 데에서 근본적인 원인이 찾아진다. 이 말은, 그 동안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던 교회와 직장생활의 박리현상과 맞물린다. 다음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누룩이다. WCC의 지속적인 운동의 효과는 KNCC의 지속적인 운동과 연결선상에 놓여 있고 KNCC의 지속적인 운동은 사회저변에 기독교의 순수한 정신을 왜곡 전달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이라크 파병반대와 강철민 이병의 사건이다. 당시 프레시안의 보도에 따르면, 강철민 이병에 대한 재판은 광주 육군 31사단 보통군사법원에서 열렸다. 보통군사법원은 26일 사단 법무참모부에서 열린 강 이병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군무이탈죄를 적용받아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의 판결문 요지는, "피고인이 주장하는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더라도 특정한 정치 사안을 이유로 한 '선택적 병역 거부 행위'는 양심의 자유 보호 영역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를 인정할 경우 자신의 견해에 따라 병역의무를 각자가 결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유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강 이병이 이라크 파병이 철회되지 않는 한 절대 부대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병사가 부대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기 어렵다고 판단, 실형을 선고한다"고 강조했다.
강 이병의 변호를 맡은 이상갑 변호사는 항소할 뜻을 밝히면서 항소심 이후의 일정에 관해서는 "가장 중요한 당사자와 상의해 일정을 조율할 것"이라며 "사회적으로 다시 한 번 파병 문제에 관해 환기를 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한편 선고 공판 결과에 관해 '강철민 파병 반대 농성 지원단'을 총괄하고 있는 정진우 목사는 "생각보다 중형을 선고 받아 마음이 무겁다"며 "정부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올곧은 한 젊은이의 외침과 옳은 소리에 귀 기울여 파병 정책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진우 목사는 이어 "이라크 파병을 하겠다는 정권은 분명히 침략전쟁을 거부하고 있는 헌법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며 "이미 침략전쟁으로 인정되고 있는 이라크전쟁에 파병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제 kncc 인사들은 그 동안 강 이병의 귀대를 권면하고 있었다는 말로 강 이병을 써 먹은 책임에서 벗어나고 있다. 강 이병과 강 이병의 가정, 그리고 강 이병에 소속되어 있던 군부대의 지휘관들의 평생에 미칠 운명을 틀어쥐고 있던 자들이 겨우 내어 놓은 소리이다. 결국 강 이병이 제풀에 개혁자가 되었고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온 국민을 향하여 마이크를 쥐고 일장 연설을 하도록 해 주었으니 다음은 강 이병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지 자신들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이 무책임한 행위와 언어 앞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어떤 판단을 가지게 되던지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한 바가 없다는 말이다.
과연 이 태도가 기독교인의 태도이며 기독교단체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자들이 행할 수 있는 태도인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강철민 이병과 kncc의 코드 맞춤 이중주는 해프닝으로 끝이 나고 말았는가? 아니면 역사 앞에서 고민해 보아야 할 책임은 없는 것일까? 우리가 지겹도록 보아 온 일이 있다면, 내 것에 집착하는 정신병자들의 추악한 비린내이다. 내가 하는 것은 사랑이요 남이 하는 것은 불륜이라는 시쳇말이 시대의 언어가 되어버린 이면에는 기독교인들의 아집과 독선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는 것이 본인의 시각이다.
내 교회, 내 가정, 내 하는 일, 내 운동, 내 철학 등으로 똘똘 뭉쳐 있는 구조에서는 결코 합력된 선이 나올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우리는 너무도 분명하게 합력된 선을 위하여 부름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내 것을 내어 주지 않고 어찌 합력된 선을 이루겠나. 내 일을 타인의 일이 되도록 내 료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어찌 합력된 선을 이루겠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료를 포기한다 하였고, 동역자인 베드로가 부부동반하며 전도에 임하며 받는 료에 대하여는 마땅한 바라고 하였다.
이기주의와 아집과 독선으로 가득 차 있는 기독교라는 항변과 기독교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는 대중들의 이유 있는 항변에 대하여 과연 답할 말이 있는가. 강 이병과 kncc의 이중주를 바라보면서 이제는 다음 말도 궁색해진다. 합력된 선을 추구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합력된 선을 이끌어 내지 않는 기독단체는 기독단체가 아니다. 한 번 행동화된 기독교의 사회운동은 그 결과에 따라 기독교 전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kncc와 강철민 이병의 경우는 드러난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기독교가 사회를 이용하고 국가가 기독교를 이용하는 현재의 양태에서는 종교인과 사회인의 박리현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기독교 단체는 사회의 불건전 요소와 붙어 있고, 교회는 사회와 저 멀리 떨어져 있다. 한 국가 안에서 그것도 한 기독교내에서 교회의 문화와 기독교문화의 괴리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기독교단체를 표방하는 일부에 의하여 전체 기독교가 싸잡혀 욕을 먹고 있으며 고차원적인 기독교 문화가 저급한 훼방에 유린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문제이다. 도무지 답은 내어놓지도 못하면서 문제만 들춰내어 쑤시고 다니는 저급한 기독단체들이 어디 한 둘이던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창궐은 이데올로기의 변화와 함께 종교인과 사회인의 박리현상을 재촉했으며 한국 지성인들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실로 보면 한국은 지구상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그것도 남과 북이 휴전선을 놓고 서로 실탄을 장전한 채로 대치상태에 있다. 이는 언제라도 전쟁이 유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남한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 사상이며 북한의 정체성은 공산주의의 이단인 주체사상이다. 6.25 동란 이후 현재까지 남과 북은 한반도를 분단시킨 채 각각의 국가를 형성하고, 한반도를 자신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 구조적 모순과 갈등이 상존하며 서로의 정체성 안으로 끌어들이는 통일전법을 동시에 구사하고 있는 중이다. 휴전선 이남은 자유민주주의를 북한에 선전하며 휴전선 이북은 주체사상을 선전한다. 현재 남과 북의 지성은 서로가 각각의 사상을 고집하며 대치된 채로 총성이 없는 사상 전쟁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북한은 선군주의로 무장하여 대남정책과 대미정책 그리고 대일정책에 대한 전선을 다시 짰다. 남한은 김대중 씨의 6.15 선언으로 기존의 대북관을 버리고 친북정책으로 돌아섰다. 여기에 친북성향의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으로 다수의 근본 보수주의 국민들과 대통령을 중심한 소수의 친북성향자들과의 사상전쟁으로 내외우환을 겪고 있다. 국론은 좌파와 우파로 갈려 있으며 좌파대통령이 나왔으니 보수주의 국민들은 라이트운동으로 맞섰다. 현재 한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의 근간마저 뒤흔들리고 있는 친북세력들과의 혼전으로 사회는 혼돈과 불안의 시대를 통과 중에 있다. 소위 친북세력과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진보세력의 행보는 친북을 향한 진군을 계속하고 있으며, 국가보안법 철폐와 미군철수 문제 그리고 북한의 지도자 찬양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보수주의 국민은 라이트 운동 등으로 발목을 잡고 늘어지고 있으나,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쥐고 있는 친북주의자들 앞에 딱히 이렇다 할 힘도 못 쓰고, 차기 대선의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다.
혼돈이다. 친북대통령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는 사상의 둑을 허물고 거침없이 밀어닥치고 있으며 보수주의는 이에 맞서 무너진 사상의 둑을 막기 위해 정신이 없다. 사상의 싸움에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에, 국민경제는 여기저기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 무너진 국민경제로부터 비롯된 각종 사회문제의 발생으로 사회의 기강마저 허물어지고 있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여호와증인으로부터 비롯된 대체복무에 대하여 허용하는 방향으로 국방부는 입장을 정돈했다. 그리고 2010년부터 모병제 제도를 추진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각종 병역혜택의 병폐와 관련되어 있는 비리가 쏟아져 나오면서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구호는 경색되었다. 군입대자는 돈 없고 빽이 없는 남자가 끌려가는 청춘의 쓰레기장, 여호와 증인에 의하면 인간도살장의 도축인으로 인식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사회는 성매매방지법과 같은 전통에 반하는 새로운 법이 입법되어 법을 통해 사회 근간을 통제하고 있다. 사회저변에 영향을 끼치는 법을 앞세운 세금 징수 등 각종 통제는 심각할 지경이 되었다. 인권위에서 제정한 인권법에 의하면 최저임금제와 이를 준행하지 않는 사업주가 법적인 제재를 받게 되어 있다. 결국 사업가에게 사업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강제성을 띤 법령은 결국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억압이며 통제이다. 인권을 앞세운 법적 논리는 기존 사형제에 대한 공방도 야기했다. 사형폐지론자들의 어이없는 사랑타령은 범죄자의 인권과 생명보호라는 미명하에 인면수심의 살인자들에게도 사형을 피해갈 수 있는 법적인 면죄부를 주었다. 현재 인면수심의 살인자의 경우에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선고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마당이다.
서슬 퍼런 칼날같이 날카로운 경계점을 가지고 있어야 할 법이 해석의 과정에서 진보성향의 법관들에 의하여 법의 경계점마저 벗어난 판결을 내리고 있다면 이미 그 사회는 통제 불능의 사회가 되었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법이 존중하고 있는 가치는 선이며 원칙이며 정통(전통의 바른 기준)에 있다. 법이 경계점에서 이탈하여 범죄자의 인권과 타협한다면 법을 준용하고 있는 기존 대다수의 인권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 곧 가치관의 변질이다.
인간 혹은 국민의 바른 가치관을 보존하고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는 법이다. 만약에 법의 정신이 변질되고 있다면 변한 만큼 가치관도 변질되게 되어 있다. 일부 전통에서 벗어난 판결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법관은 진보 혹은 개혁성향의 법관이라는 이름으로 여론과 세인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가히 진보가 대세인 듯 보인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서도 전통적인 가치관과 사회질서를 고수하고 있는 판결이 다수의 판결이다. 사법부의 판결은 전통을 지키고 고수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이유와 논리가 있다면 법을 바꿔야 한다. 시대가 변한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변하여 가치관에 대하여 수정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법은 잣대를 가지고 오차의 범위 안에서 허용의 범위를 측정해 주어야 한다. 만약 오차의 범위를 지나쳤다면 그 법 자체를 개정해야만 한다. 그래야 법도 살고 국민의 가치관도 산다.
법이 정신을 따지지 않고 물질적인 결과에 집착하는 동안에 국민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오만가지의 일을 다 겪었다. 그래서 개혁피로증후군이라는 말이 회자될 무렵 다시 등장한 말이 진보이다. 개혁대신에 혁신이라는 말을 빌려 왔으나 혁명이라는 말보다 약하고 개혁이라는 말보다 뒤로 쳐지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개혁이 되었던 혁신이 되었던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통치자의 입맛에 맞는 사회 구현인지 아니면 정통문화권에 대한 뒤집기인지 사회구조에 대한 혁명이든 간에 결국은 가치관에 손을 대게 되어 있다. 전통적인 가치관은 함부로 손댈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가치관에는 바른 정의라는 사고의 틀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의 양식을 좀 더 크고 넓게 변하게 하려는 목적이라면 개혁을 말 할 것이 아니며 더욱 더 진보라는 용어를 차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과거의 흔적은 그대로 역사로 남기게 되어 있고 그 역사는 현재의 가치관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증거물로 존재한다.
사상이 변하면 가치관도 변한다. 사상의 논거인 이념에 대한 논쟁이 심각해지면 심각해질수록 사회가 겪어야 하는 갈등의 폭은 커지게 되어 있다. 사상의 기반은 생각의 틀로 말해지기도 하는데 생각의 틀이란 연령대에 따라서 변화를 겪게 되어 있다. 2,30대는 자신의 논리와 성향에 따라 제도에 대한 반항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진보 쪽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40대에 들어가면 자식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느덧 진보의 성향은 사라지고 보수주의로 회귀하게 되어 있다.
문제는 진보가 문제가 아니라 공산주의 이념에 빠진 친북자가 문제이다. 친북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지지할 조직을 만들어내야 살 수 있다. 따라서 생존차원에서의 공산주의 설파와 주체사상에 대한 전파에 목숨을 걸게 되어 있다. 목숨을 걸고 전파하는 주체사상은 마치 사교집단의 전도와 같이 궤변적인 논리로 감정에 호소하는 비열한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논리의 정당성을 위하여 상대의 약점과 실수를 지적하여 반대급부를 노리는 비열한 논리구조는 이단의 논리구조와 맥을 같이 한다. 저급한 혁명논리는 이성적인 판단 보다 감정적인 행동을 먼저 유발함으로 이성적인 판단으로의 회귀를 차단한다. 저들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행동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개체는 적으로 간주한다. 공산주의의 위험성은 이성의 판단을 몰수당한 행동대장들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의 뜻에 따라 결과에 상관없이 무조건 일을 저지르고 본다.
가치관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종교이다. 종교는 인간의 내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며 종교의 문화권에서 성숙되어 있는 가치관과 생각의 틀을 전달해 준다. 앞에서 지적한 여호와증인의 경우 최고의 가치관을 낙원에 두고 있으며 그 낙원은 현세에서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정의한다. 곧 여호와의 증인은 그 어떤 국가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낙원에 소속되어 있다. 여호와증인의 문화권은 전쟁을 금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를 각오하고 감옥에 간다. 국가에 대한 세금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씀의 명령 때문에 국가에 대한 세금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을 뿐이다. 곧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대한국민의 국민이 아닌 정체가 여호와 증인이다. 결국 잘 못된 종교의 가르침은 잘 못 된 가치관을 낳고 그 가치관은 다시 점진적으로 근접해 있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결국은 국가의 인적 경제적 손실을 야기한다.
한 국가 안에서 종교와 사상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지고 국가관이 달라진다면 국가는 국가의 잠재력을 종교와 사상에게 도둑맞고 있다는 말이 된다. 올바른 가치관과 올바른 사상의 가치관은 바른 국가관을 세워준다. 공산주의의 반대는 자유민주주의이며 자유민주주의는 곧 기독교가치관이다. 바른 기독교의 가르침은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고 헌신의 결과로 나타나는 선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다. 따라서 바른 기독교의 사상을 확립해 준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국가 그리고 국민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며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1541년부터 23년 동안 문란하고 방탕했던 제네바시를 평화의 도시로 만들어낸 사람이 있다. 제네바 의회의 의장으로서 신정통치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려고 했던 종교개혁가 죤. 칼빈이다. 부인 외에 세 명까지의 첩을 둘 수 있도록 제정되어 있던 기존의 전통을 뒤집고 일부일처제를 주창했다. 결국 첩은 하나까지만 허용하자는 제네바 평의회의원 전원의 요청과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일부일처제를 통과시켰다. 성경에서 강제하고 있는 선민법(율법)을 도입하여 법을 세웠고 범죄인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죄에 대하여 처벌했다. 칼빈과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악평을 가했던 Servetus는 1553년 체포되어 제네바에서 공개화형을 당했다. 칼빈은 23년의 생애를 바쳐 제네바를 평화의 도시로 세울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나는 경계신학을 말하려 한다. 과거 정통신학에 도전하는 이단의 이단사설에 맞서 유능한 신학자 들은 확실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었다. 50년대의 사도바울과 400년대의 어거스틴 1500년대의 죤 칼빈의 사상을 확실히 이어나가는 현대 칼빈주의자들이다.
신학은 모든 학문과 구별되는 경계점을 가지고 있다. 신학이란 이미 철학 등의 학문과 경계 되어 있다는 것인데 현실에서는 무분별하게 아무나 사용하고 있어 신학을 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경계점부터 그어 주어야 할 입장에 처하여 있다.
상황윤리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점. 나는 이 경계를 말하려고 한다. 윤리주의자들은 설교를 통하여 윤리를 천명하게 되어 있고 사회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공동체주의를 천명한다. 각각의 축이 되어 굴러가고 있는 동력은 어디인가? 나는 그 동력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각 국가와 민족은 크랭크축이며 한 개인은 바퀴라고 생각한다. 사상의 동력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았다면 똑같은 사상이 나와져야 한다. 개인의 한계와 능력에 따라서 각각의 모멘트로 굴러가고 있는 이 땅의 길은 단 하나의 길이 되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이며 그 길은 마땅히 죤. 번연이 말한 대로 천국까지 이어져 있는 순례의 길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천상병 시인은 이 세상을 구경 길로 묘사했다. 그는 이 세상에 마실을 나온 구경꾼이며 이제야 소풍의 길을 마치고 귀천한다 했다. 필자는 우리들 인생의 가치는 그보다 높으며 각 개개인에게는 천명을 띄고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신의 사역자이며 그 분의 일꾼이라고 믿는다.
대한민국은 정치와 경제의 거간꾼들이 막아 놓은 제방에 의하여 교회와 복음의 물결마저 통제를 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복음이 흘러가는 물결을 제어할 수는 없다. 정권이 막아서면 그 정권은 붕괴가 되어 질 것이며 사상이 막아서면 그 사상은 돌 하나 첩할 수 없을 정도로 훼파 당하고 만다.
디제이가 북한의 공작금을 받아먹으며 정치생활을 했다 한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되어 밀린 빚을 수만 배의 이자를 쳐서 거하게 갚아 주었다 한다. 그야말로 북한의 정치는 성공을 거두었고 남한의 정치는 서슬이 파란 날을 세운 중정과 안기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쥐같은 사상의 경계인 하나 식별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날개를 달아 주었다. 역사는 심판의 칼날을 디제이와 그를 추종하던 세력들의 목에 경계를 그어 주었다. 이제 남은 일은 이들에게 누가 주홍글씨를 새겨 넣어 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숙제로 남아 있다.
합동교단의 총회장이 성경에 있는 대로 여성의 생리문제를 빗대어 "기저귀를 차고 강단에 오를 수는 없다"라는 설교를 총신대 체플 시간에 했다고 해서 여성단체 등에서 이슈를 삼았다 한다. 성경은 여성과 남성의 경계점을 정확히 명시해 주고 있다. 아무리 탁월한 자라고 해도 성경 이상이 될 수는 없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는 여성에게 강도권을 허락한 적이 없다.
평신도와 목회자의 경계, 여성과 남성의 경계, 철학과 신학의 경계, 교회와 정치의 경계. 이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 한, 앞에서 말한 대로 상황윤리와 포스트모더니즘 사고로 굳어져 버린 이 시대에서 복음을 말 할 수는 없다. 상황윤리와 포스트모더니즘식의 사고는 이미 도식화 되어 있는 반면, 현실의 개혁주의 신학의 사상은 그 경계점조차 밝혀주지 못하는 정도의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경계점이 흐릿하니 우후죽순처럼 이단이 일어서고 있는 것을 두고 보고 관찰해 보아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나는 그 경계를 선명하게 그어주고 싶다. 과거 6.25 동란 시에 전장에서 부상당해 죽어가는 국군을 보며 나이에 불문하고 목사들이 군복을 입고 전장에 뛰어들어 저들의 임종을 지켜 주었다. 포탄과 총알의 세례를 받으며 부상당한 군인의 피 흘리는 몸뚱이를 붙잡고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눈물로 탄원하였고, 죽어가는 생명에는 손을 얹고 불쌍한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는 축복으로 떠나보냈다. 이에 장병들은 큰 위로와 힘을 얻었고 자신의 목숨을 신께서 맡아 주실 줄로 알고 생명을 바쳤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군목제도가 생겼다. 그리고 그 시절을 기억하는 군 지휘관은 젊은 군목 앞에서 스스로 모자를 벗어 예를 표했다. 군목제도를 비롯한 기독교 문화권은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선한 기독교인의 헌신으로 인해 역사가 감응한 결과가 빛으로 나타난 문화권이다.
모든 문화권은 영웅의 발자취 혹은 영웅에 대한 모방으로 문화권이 만들어진 반면 기독교 문화권은 빛이 비췸으로 문화권이 만들어졌고 소금의 맛으로 기독교 문화권이 유지되고 발전되어 왔다. 기독교는 빛을 먹고 소금이라는 젖을 내어 주었다. 세상은 소금이라는 젖을 먹고 빛을 증거 해 주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문화는 빛과 소금의 영성이라는 매체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어져 있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령이기도 하다. 본서의 핵심도 빛과 소금의 영성에 맞추어져 있으며 타 주제들은 실상 빛과 소금의 영성의 색깔을 확실히 분리해주기 위한 프리즘의 역할로 보조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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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러말 필요없이 나라와 민족의 선생은 목사가 되어야 한다 한경직 목사님처럼 본을 보여서 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생길때 교회도 부흥하고 목사도 존경받고 성도들도 자부심이 생기고 행복한 싱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은 너무 욕심을 부리고 무식한사람들이 많아서 존경심이 생기질 않으니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다 나도 목사지만 그동안 교단이나 교회에서 보고 당한것을 생각하면 벌써 교회를 떠났을 것이지만 목사라서 사명감 때문에 견디고 있다 모든것은 우리 목사들 책임이 크다
간 만에 긴 내용을 진지하게 읽어봤습니다. 무엇을 말씀 하시려는지 충분히 이해는 했습니다. 몇 해전부터 공공신학이란 것이 이슈가 되더니 이제는 경계신학? 세상에 영원한 것 없고 새로운 것 없으니 오직 예수님께서 달리시니 십자가의 도만 자랑하고 전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세상을 변화시켜보려는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내놓은 모든 신학문이 십자가의 도를 기반하고 있으니 더욱 열심히 십자가를 생각하고 연구해야겠네요. 그리고 우리나라도 벌써 몇몇 공공기관들이 "살찐 고양이법"을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한국 교계나 교회에도 이 법을 적용해요. 탐욕을 멀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자정할 수 없는 일부 목회자의 탐욕으로 인해 이런 법까지 적용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만 어쩔 수 없을 거 같네요. 해야할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