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인연 지난 설날, 고향에 갔을 때 뜻밖에 집안 형님이 중풍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형님은 70대 중반의 연세로 고향 동네 노인회장을 맡고 계셨는데, 평소 넉넉찮은 형편에서도 후덕하게 베풀고 따뜻하게 이웃들을 대하며 살아온 덕에 마을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 계셨다. 척박해져 가는 농촌의 현실에 그런 분이라도 계셔서 그나마 고향의 인정이 살아있다 싶어 평소 고맙게 마음에 담아온 형님이다. 중풍으로 쓰러졌다면 병원에 있어봤자 수년간 병치레에 본인과 가족들이 고생하다가 재산 날리고 결국 돌아가실 것이 뻔하게 보이는 일인데, 이렇게 좋은 형님을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도리가 아닐 뿐더러 마을 전체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싶으니, 형님을 꼭 빨리 완치시켜 드려야겠다는 의지가 결연하게 일어났다. 막바로 형님댁을 찾았다. 마산 근교 한?양방 협진병원에 몇 달 입원해 있다가 설날이라고 시골집에 잠시 와 계셨다. 발병 경위와 병원에서의 치료 상황, 현재의 상태, 본인과 가족들의 투병 자세 등을 물어보고 나름대로의 치료방향을 마음속으로 잡았다. 병원에 몇 달 입원하여 약간 좋아지는 기미가 보이고 있으나, 좌반신이 마비되어 걷지 못하는 것이 제일 큰 병증이었다.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배칠근 선생이다. 병원, 한의원에서 포기한 중한 환자들의 절박한 구호 요청을 받을 때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의자(醫者)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배선생이다. 그것은 그의 뛰어난 의술에 더하여, 무엇보다도 환자를 대하는 지극한 자세와 정성이 누구보다도 안심을 주기 때문이다. 필자는 배선생에게 형님의 병환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고, 형님은 필자의 의견을 따라 설을 쇠고 며칠 후 병원에서 퇴원하여 자식들이 살고 있는 울산으로 와서 배선생에게 벌침을 맞게 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한달 남짓, 형님은 지팡이를 짚고 스스로 걸어다니고 식사도 스스로 할 수 있게 호전되었다. 폐결핵으로 죽었다 살아난 삶 배칠근 선생은 현직 공무원이다. 1955년 생이니 올해 52세이다. 사무관 승진을 코앞에 둔 이 중견 공무원이 어쩌다 의사?환의사가 포기한 환자들을 귀신같이 살려내는 명의가 되었을까? 필자는 민중의술의 명의들을 확인할 때마다 명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의하여 태어난다는 것을 거듭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명의로 성장하기 전에 먼저 하늘은 그에게 온갖 병의 고통을 주어 단련시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배선생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벌을 붙잡아 자신의 몸을 쏘게 하여 기적적으로 회생한 사람이다. 그 체험이 그를 벌침의 전문가로 만들었다. 18년간 만 명을 훨씬 넘게 치료하였고, 가르쳐 길러낸 벌침 제자만 2천여 명에 이른다. 그것을 현상적으로 보면 기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과정을 보면 역시 하늘의 뜻이요 배려였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 다른 치료 사례를 들 것도 없이 그 자신이 치유된 과정이 벌침의 치료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참으로 극적인 사건이므로 먼저 이를 자세히 소개한다. 배선생은 경주시 산내면 시골 벽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개성중학교로 진학했으나 1학년을 마치고 돈이 없어 시골로 돌아와 산내중학교를 졸업한다. 부모들은 졸업을 하면 배를 탈 수 있는 부산 해양고등학교로 진학시켰으나 그는 1979년 공무원이 된다. 폐결핵이 발견된 것은 1987년. 88올림픽이 임박하여 그 준비작업으로 항상 과로하면서 몸이 피곤하였는데, 어느 날 아침 기침을 하면서 코피가 터졌다. 세숫대로 받을 정도였다. 숨을 내쉴 수만 있고 들이 쉴 수가 없었다.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의사는 참으로 운 좋게 살았다고 하였다. 폐결핵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이 시작되었다. 병원에서 주는 알약을 매일 오전 한웅큼씩 먹는데, 그것을 먹고 나면 하루 종일 온 세상이 노랬다. 1년 정도 복용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체중은 당초의 67,8kg에서 45kg까지 줄었다. 반은 누워서 지내고 반만 출근했다. 1988년 4,5월경 서울대학교병원과 연세의료원 등을 다녀 보았으나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약이 없다는 판정만 받았다. 합병증이 와서 주사 한 대, 링겔 한 대 맞을 형편이 안 되었다. 극심한 두통과 허리 통증, 불면증에다 소변을 거의 보지 못했고, 위장 장애가 말도 못하게 심하여 물도 못 마실 정도였다. 병원에서는 방법이 없으니 좋은 공기나 쐬고 하라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병가를 내고 죽을 날만 기다렸다. 체중은 40kg까지 떨어졌다. 방에 누워만 있고 일어나질 못했다. 머리도 못 들 정도였는데,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불면증으로 1주일 동안 한 숨도 못 자기도 하였다. 누워있으면 밤인지 낮인지 칠흑같은 어둠 속에 섬광 같은 환상만 번득였다. 죽음을 예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깨었는데 TV에서 잠깐 벌침에 대한 대담을 하는 것이 들렸다. 허리디스크 환자에게 벌침을 놓으니 났더라는 내용이었다. 약도 물도 못 먹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벌침을 맞으면 나을까.’ 마침 배선생의 집 앞 30m쯤 떨어진 곳에 양봉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내가 출근하고 나서 오전 9시나 10시쯤 되었을까. 정신을 추슬러 벽을 짚고 일어나 땅 짚고 담 짚고 하면서 거의 기다시피 해서 벌통 앞에 갔다. 기어 나오는 벌을 잡아 무작정 허리에 5마리를 쏘였다. 그러고는 그대로 벌통 앞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깨어보니 오후 3시였다. 볼에는 콩알만한 돌들이 박혀 있고 머리 위로는 벌들이 날아다녔다. 어떻게 왔는지 집으로 기어들어 와 누었다. 저녁에 귀가한 아내가 와서 보니 무릎과 팔꿈치가 피투성이였고 전신에 핏자국이었으며 이불과 방에도 핏자국 천지였는데, 본인은 전혀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아내가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날 밤 자다가 일어나 소변을 보았다. 어떻게 일어났는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소변이 얼마나 시원하게 나오는지, 1시간 정도 소변을 본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잠도 잘 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이 되었는데 허리가 안 아팠다. 아내가 출근한 후 다시 벌통으로 갔다. 이번에는 살살 기고 조금 걷기도 했다. 어제 벌을 맞아 부은 자리에 또 다섯 마리의 벌을 잡아 쏘였다. 어지럽고 구토증이 올라왔다. 한 참 앉아 있다가 12시쯤 집으로 돌아와 누었다. 그 전까지 식사라고는 미음을 조금 먹는 정도였는데, 맥주 컵에 반 컵도 못 먹었고, 물도 못 마셨다. 그런데 그 날은 아내가 써 놓은 미음을 찾아내서 스스로 끓여 먹고 숭늉도 끓여 반 컵 넘게 마셨다. 식욕이 동했고, 먹고 나니 속이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것이 벌침 때문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는데, 저녁에 아내가 귀가할 때까지 숙면하였다. 깨고 나니 몸이 얼마나 개운한지! 허리는 안 아프고 두통도 많이 줄었다. 저녁에 미음을 한 컵 먹었다. 그 전에는 음식을 먹으면 그대로 토하고, 거기다 노랗고 쓰디쓴 똥물까지 올라왔는데, 그 날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매일 허리에만 5,6마리의 벌침을 놓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하고 나니 죽을 하루 3끼 다 찾아먹을 수 있게 되었고, 변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토끼똥처럼 새까맣고 똘똘 뭉친 게 나왔다. 일어나 앉고 밖에 나가 바람도 쐴 정도가 되었다. 의술공부 울산 중구 도서관에 전화를 하여 벌과 관계되는 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이 7,8권의 책을 자전거에 싣고 왔다. 그 중에서 농업기술자협회 성은찬 회장이 쓴 「벌침 108요법」(1972년 간)이라는 책을 보니 벌침이 만병통치약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 책을 일곱 번 통독했다. 벌침을 놓기 시작한지 50일쯤 되었을 때 밥을 하루 3끼씩 반공기 넘게 먹게 되었다. 이제 누워 있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8월경에 힘을 완전히 차렸다. 9월경에 성은찬 회장을 찾으러 서울로 갔다. 출판사로 수소문해서 어렵게 주소를 알았으나 5번을 가도 찾지 못하고 6번째에 비로소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찾아온 경위를 설명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일곱 번을 거절당하고 8번째 방문하여 공무원증을 제시하고 승낙을 받았다. 3개월을 배웠다. 위암, 유방암 환자들이 낫는 것을 보았다. 미국 LA에서 온 교포도 배웠는데, 몇 달 후 그 교포를 다시 만났을 때 그 교포가 가운을 입고 벌침을 놓는데 환자들이 줄을 선 모습이 반면(半面)에 보도된 뉴욕타임즈 신문을 보여주었다. 대부분 허리디스크 환자인데, 벌침의 효과가 대단하다고 쓰여있었다. 그렇게 벌침을 배우면서 자신의 몸에도 계속 맞았다. 4년간 벌침을 맞았다. 당초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 본 결과로는 오른쪽 폐가 균이 다 갉아먹어 거의 없는 상태였는데, 4년 후 찍어보니 갉아먹은 자리가 복구되어 많이 좋아져 있었다. 그러면서 아파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벌침을 놓아주었다. 많이도 놓아주었다. 소문이 나면서 나중에는 감당 못할 정도로 많이 찾아왔다. 그렇게 하면서 나름대로 체질학을 공부했다. 사상체질, 팔상체질, 오행요법 등을 배우고 음식요법도 공부했다. 마침내 ‘아~ 인체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터득하게 되었다. 체질에 따라 벌침 놓는 법을 달리하다 보니 병 낫는 속도가 두 배로 빨라졌다. ‘체질벌침’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아마도 체질을 몰랐다면 벌침도 큰 진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벌침과 함께 프로폴리스, 꿀, 로얄제리, 꽃가루 등을 함께 활용하는 법도 알았다. 배선생이 설파하는 의론(醫論)은, 첫째, 비위(脾胃)는 자동차의 엔진과 같으니 반드시 이를 먼저 돋우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환자의 체질 등 여러 사정을 감안해서 벌침을 놓아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 환자의 얼굴, 코, 눈, 입, 혓바닥 등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등이다. 세 번째 것은 소위 진단에 있어서 관형찰색(觀形察色)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진단법은 책을 보며 나름대로 연구하고 임상의 경험으로 터득한 것인데, 그렇게 해보니 다른 데서 못 고치던 환자가 고쳐지더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 수천 명의 환자를 치료해 오다보니 이제는 환자를 보면 걸음걸이만 보아도 느낌이 오고 대화를 하면서 음성의 높낮이만 들어도 판단이 오는데 거의 백발백중이란다. 그렇게 해서 그가 고친 사례들을 좀 살펴보자. 물론 수많은 사례들 중 극히 일부분만 적을 수밖에 없다. 암을 고친 사례들 췌장암 말기로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73세의 김철강 씨는 그 중에서 두달을 또 넘기고 마지막 한달을 남긴 처절한 상황에서 벌침을 만났다. 키 175cm에 체중은 45~8kg, 물과 음식을 조금 섭취하는 정도였는데, 머리카락은 모두 빠지고 얼굴은 병색이 완연하였으며 거동이 대단히 불편한 상태였다. 벌침이 좋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배선생을 찾아왔으나, 정작 벌침에 대하여 설명하니 퉁명스런 표정으로 ‘현대의학에서도 두 손을 들었는데 어떻게 치료가 가능하냐’고 하면서 거부반응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가족과 주위의 강력한 권유에 못이겨 억지로 벌침을 배우고 맞게 되었다(물론 체질에 따른 음식 섭취와 프로폴리스, 꽃가루 등의 섭취를 병행했다). 민중의술살리기 부산울산경남연합 사무국에서 무료로 벌침강의를 듣고 1주일에 3회씩 꾸준히 한달을 맞았더니 그렇게 아프던 위장의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거동에 불편이 없어져 가벼운 산책을 하게 되었다. 환자와 가족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대중 앞에서 여러번 체험사레 발표도 했다. 벌침을 두달 정도 맞고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깜짝 놀랐다. 시한부 3개월 선고를 하면서 더 이상 약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 좋은 공기나 마시고 계시라고 했는데 살아 있는 것이 우선 이상했고 피검사를 하니 너무 맑아져 있었던 것이다. 무슨 치료를 했느냐고 묻길래 벌침을 맞았다고 했더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3개월이 지났을 무렵 부인, 아들, 딸, 며느리, 손자를 데리고 배선생을 찾아와 “선생님 이제 병이 다 나은 것 같습니다”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복부를 누르면 약간의 통증은 있으나 기운이 넘친다고 했다. 54세의 김임순씨. 폐암으로 오른쪽 폐 절제 수술을 했으나 온 몸으로 전이되었다. 그 후유증으로 밥도 못 먹고 사경을 헤맸다. 힘이 없고 통증이 심하여 거의 누워서 지냈다. 딸은 약사이고 사위는 의학박사이나 속수무책이었다. 목소리도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벌침을 한달 맞고는 걷고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달이 되자 완전히 걷고 목소리도 정상이 되었다. 6개월 후 울산 현대병원에서 검진 결과, 많이 좋아졌고 암 걱정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지금은 완전 정상이다. 암의 전이도 없고 일상생활에 아무 불편이 없다. 위암과 폐암을 같이 앓은 김운호 씨는 3개월 치료만에 전이 없이 건강해졌다. 폐암 말기에 오줌, 똥 받아내던 이정부 씨는 6개월 벌침 맞고 완치되었다. 김성은씨. 말기 유방암을 수술했는데 온 몸으로 전이되었다. 벌침치료를 약 2년 한 현재 건강하다. 김수자 씨도 유방암 수술을 했는데 전이가 되어 심각한 상황이었으나 벌침치료 8개월만에 진단 결과 전이가 멈추고 아주 좋다. 위암 3기의 박덕식 씨는 4개월 치료로 호전되었고, 위암을 수술하고 전이가 된 강우수 씨는 8개월 치료 끝에 완치되어 아주 건강하다. 역시 위암 수술 후 전이된, 정양지 씨의 아버지도 1년간 벌침을 맞고 전이 없이 아주 건강해졌다. 위암 수술 후 전이되고 발목 복숭뼈에 물이 고이는 병을 앓은, 하미령 씨의 남편도 벌침으로 완치되었다. 위암 말기로 3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어느 주부는 6개월 치료 끝에 건강을 되찾아 현재 4년 정도 살아있다. 위암 절제 수술에 난소종양과 복수에 시달리던 이미정 씨는 벌침을 약 3개월 시술 받고 건강진단 결과 아주 좋아졌다는 판정을 받았다. 위암 3기 상태에서 수술 후 전이된 김홍률 씨는 불과 1개월 벌침 치료로 건강해졌다. 위암이 대장으로 전이되어 3주 시한부 선고받은 말기 환자는 벌침을 맞으며 7-8개월간 살아 있다가 통증 없이 저 세상으로 갔다. 자궁암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양준모 씨의 아내는 6개월간의 벌침 치료로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게 되었다. 전립선암 3기의 최진석 씨, 3개월간의 벌침 치료로 아주 좋아졌다. 필자가 소개한 대장암 중기의 어느 환자도 벌침으로 많이 좋아지고 있다. 그 밖의 치료 사례들 가장 난치병인 암을 이렇게 잘 고치니 다른 병은 굳이 볼 필요도 없을 터이지만 특수한 몇 가지를 더 보자면 죽은 큰어머니를 살려낸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배선생의 큰어머니는 70세 때 밭둑에서 굴러 떨어져 뇌혈관이 파열되면서 마비가 되었다. 울산 현대병원에서 수술에 실패하고 치료를 포기했다. 가족들은 장례를 준비하고 묘자리를 정해서 파기 시작했다. 배선생이 벌침을 놓아보자고 하자 사촌 형제들이 반대했다. 죽은 사람에게 뭐하려 벌침을 놓느냐는 것이었다. 배선생은 사촌들이 보지 않을 때 숨어서 몰래 큰어머니에게 벌침을 놓았다. 10마리씩 6,7회 놓았다. 그 길로 큰어머니는 살아났고, 78세까지 살다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35세의 여자가 치과에서 치료를 하고는 부작용으로 입이 마비되어 벌어지지 않는 바람에 음식을 먹지 못하고 국물도 흘러내리는 심각한 상태로 몇 달째 고통을 받고 있었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료를 해봤으나 효과가 없어 병원과 싸우다가 지쳐 법정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벌침을 5회 맞고는 거짓말같이 마비가 풀려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비부위는 피부가 냉하고 근육이 뭉쳐있었는데 따뜻해지고 풀린 것이다. 현직 부장검사 한 분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어깨, 척추, 하반신 통증을 앓으면서 사직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을 6개월간 간헐적인 치료를 해서 회복시켜 주기도 했다. 일반적인 병은 병원에서 불치병으로 분류해 놓은 것(갑상선질환 등)이라도 어렵지 않게 고치고, 희귀한 질병들도 많이 고쳤다. 안구 신경이 마르는 병, 전신의 수분이 마르는 병인 유사 쇼그랜증후군(8개월, 완치), 매일 생리를 하는 병(6개월, 완치) 등이 그러하다. 그것들을 일일이 적을 수 없어 대표적인 것들의 몇몇 병명만 나열해본다(괄호 안은 치료 회수나 기간). 수술 대기 중이던 심한 축농증(8회, 완치). 갑상선 항진증과 자궁물혹( 18회, 완치). 다리마비와 통풍. 심한 자궁근종. 자궁근종과 자궁암이 같이 있는 경우. 약 10년된 만성두통. 심장병과 신경쇠약 및 거동불편에 위 무력증이 같이 있는 환자(8회, 완치). 위장병과 심장쇠약에 원인 모를 병이 겹친 환자. 교통사고로 인한 하지마비로 하지가 어름장처럼 차가운 환자(6개월, 완치). 허리를 다쳐 3개월간 입원하고 치료불가 판정을 받은 환자(7회, 완치). 치료불가 판정을 받은 심한 신장염. 와사풍. 양 손목과 발목의 동상으로 병원에서 절단할 수밖에 없다고 한 환자(3개월, 완치). 아주 심한 당뇨(6개월, 호전). C형 간염. 고혈압(벌침과 말벌술 요법으로 호전). 수술해야 한다는 목 디스크(8회, 아주 호전). 뼈속 종양으로 다리 절단해야 한다고 진단 받은 환자. 대장이 썩어들어 가고 고름이 흐르는 대장농양(5개월, 아주 건강). 위무력증. 치료 불가하다는 풍치와 방광염 및 자궁염을 함께 가진 환자. 다리 골절상. 위장병이 심하고 심장질환이 있는 환자. 항문 절제수술의 후유증으로 대변 못 가리는 증세(조금 뛰면 변이 흐름. 약 3개월 시술로 괄약근 조절되어 완치). 병원 치료 안되는 만성위통과 소화불량. 전국 병원에서 치료불가 판정 받은 엄지발가락 신경염. 완전 하지마비에 몸 뒤틀리는 병(5회, 완치). 역시 전국 병원에서 치료 불가 판정 받은 원인 모를 무력증. 심한 변비에 소화불량과 위장병. 치료불가의 전신 관절염(3개월, 완치). 교통사고로 인한 하지마비(1년 이상, 아주 좋음). 위무력증에 아주 심한 위통으로 병원에서 치료 불가 판정을 받은 환자(3개월, 완치). 얼굴 봉합수술의 후유증으로 수술자국이 선명하여 성형을 해야한다고 진단 받은 환자(3주, 9회 봉합자국에 직접 벌침 놓아 성형수술 않고 완치). 머리와 어깨 저리고 떨림 심한 환자(3회, 완치). 치아를 빼야한다고 진단 받은 치조농루(8회). 결혼 2년차 무 임신(7회, 임신). 결혼 6년차 무 임신(10회, 임신). 뇌세포축소 부종과 의식불명(3개월, 아주 호전). 통풍(6회). 전립선 비대(7회). 오래되고 심한 비염(5회, 완치). 복부까스, 복통, 소화불량, 만성피로(벌침 지도 받고 자가치료로 완치). 중풍으로 사지마비(1년, 완치). 고혈압과 심장통증(3개월, 아주 호전). 탈항(5회). 종아리 염증. 전신 류마치스(3개월). 절단해야 한다고 진단 받은 다리발목 동상(2개월, 완치). 7년된 중이염(2개월). 12cm의 자궁물혹(1개월 20일). 측농증(1개월). 허리디스크(8회). 중증 우측마비. 심한 우울증. 다리 부정맥. 수년된 어깨통증(10회 미만, 완치). 우측마비 5년차(3개월, 완치). 3주 시한부 선고받은 뇌종양 말기(9개월 살다가 통증 없이 사망). 죽은 검버즘. 코 냄새 못 맞는 병(2개월). 거동 못하는 C형 간염(1개월). 본태성 고혈압(1개월). 고혈압과 당뇨 같이 있는 환자(2개월, 호전). 요실금(5회, 완치). 전립선(5회, 완치). 얼굴 종양수술 후유증 환자(1개월, 완치). 저혈압과 만성두통과 위장병 같이 있는 환자(2개월, 완치). 항문 수술후 괄약근 조절기는 상실증(8회, 완치). 머리종양과 비듬과 열성종기(8회, 완치). 고혈압과 심장병에 심통(10회, 건강). 본태성 고혈압에 심통과 협심증(1개월, 건강). 만성두통과 위장장애(8회, 완치). 사람뿐 아니라 강아지를 고친 사례도 있다. 집에서 아이들이 애지중지 기르던 강아지가 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에 눈 위쪽 머리를 맞아 분쇄골절이 되었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강아지는 스스로 나무토막을 입에 물고 고랑에 처박혀 신음하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물고 있었던지 도저히 놓지 않아 톱으로 나무토막의 양쪽을 쓸어내고 동물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강아지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수의사는 가망이 없다면서 포기하고 내다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강아지를 기르던 아이들이 울어서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다친 부위에 벌침을 매일 20마리씩 놓았다. 계속 놓았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면서 강아지는 거의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위대한 봉사정신 배선생이 공직에 있는 바쁜 와중에서도 돈 한푼 받지 않고 몸 사리지 않으면서 18년간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료봉사를 하게 된 정신적 또는 영적인 뿌리는 무엇일까? 배선생은 페결핵으로 병상에 누워지낼 때 마음속으로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저를 살려주시면 이 사회를 위해서 많은 공헌을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기도가 아니라도 그는 천상 타고난 사랑덩어리이다. 그가 환자를 대하고 치료하는 것을 보면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참으로 자상하고 사려깊다. 언제나 무한히 겸손하고 헌신적이다. 환자를 보살피는 자세가 얼마나 성실한지 가슴이 뭉클하다. 항상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자신의 수고로움은 아끼지 않는다. 때로는 옆에서 보고 있으면 ‘나쁜 마음 쓰다가 스스로 병을 얻은 환자에게 그렇게 까지 해줄 게 뭐있나’ 하고 생각될 정도이다. 이것은 천성일 터이고, 그 천성을 그의 혹독한 투병과 완치 체험이 더욱 닦아서 빛이 나게 한 탓일 것이다. 배선생의 이러한 자세가 사회적으로 확대된 것은 1999년경이다. 여기에는 필자도 본의 아니게 한몫 거든 셈이 되는데, 이 대목에서는 인연의 묘한 배려가 감지된다. 필자는 1999년 7월에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처음으로 의료제도를 신랄히 비판하는 대중강연을 했는데, 그 내용 중 일부가 양봉협회지에 실린 것을 배선생이 읽었던 모양이다. 그 때 그는 ‘현직판사가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는 뭔가가 있다. 벌침을 이렇게 썩혀서는 안된다. 하늘이 준 일이니 사명감을 갖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울산봉침회’를 결성하고 150명에게 벌침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여러분께서는 이 좋은 일 하는데 큰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무작정 대학을 찾아다니며 벌침강좌 개설 요청을 한다. 그렇게 해서 지금 부산대학교, 경북대학교 등 전국의 11개 대학에서 벌침을 개강하고 있다. 조만간 15개 대학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벌침을 하는 사람들도 따라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치유근거와 효율성 벌침이 왜 질병 치료에 탁효인가? 이는 학자들이 학술적으로 밝힐 일이어서 필자가 이 난에서 굳이 상론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통상 알려진 학리만 적거니와, 우선은 벌침이 경혈을 찌르고 들어갈 때의 자극효과가 침술과 같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벌침과 봉료(로얄제리, 프로폴리스, 꽃가루 등)에 함유된 특유의 성분이 갖는 약리작용 때문이라고 평가된다. 벌침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해도 40여종의 특유한 약리작용을 하는데, 대표적으로 분류하면 피를 맑혀 주는 청혈작용, 온열작용, 살균작용, 소염작용, 진정(진통)작용, 조혈작용, 용혈작용, 항암작용, 면역작용, 불량세포 궤멸작용, 신경세포 부활작용 등이다. 벌침의 청혈작용은 고질병 환자들에게 벌침을 3,4주 놓고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를 하게 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만병의 근원은 피가 탁해지는 것이요, 따라서 치료의 기본원리도 피를 맑게 하는 것이라는 자연치유의 근본 이치에 비추어보면, 벌침으로 병이 잘 낫는다는 것은 당연히 벌침이 피를 맑게 해주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증거이다. 온열기능은 벌침 1방 당 쑥뜸 350장의 효과가 있을 정도라 하고, 살균기능은 페니실린의 1,000배가 넘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한다. 진통기능은 가장 심한 통증으로 고통받는 암환자의 경우에도 운명 직전까지 대부분 통증없이 편안히 가게 할 정도이다. 말기암의 단말마적 통증이 가져다주는 환자 본인과 가족들의 극심한 고통을 생각하면, 벌침이 설사 병을 고쳐주지 못할 경우라 해도 그러한 통증의 제거만으로도 얼마나 좋은 기능을 하는가! 면역기능은 벌침을 맞은 후 백혈구가 급증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어떤 환자든 간에 기력이 없을 때 벌침을 맞고 봉료를 복용하면 즉시 효과가 나타난다. 특히 항암치료로 기력을 잃은 환자의 경우, 15일에서 한달 정도면 대부분 기운을 차리는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 그래서 양방으로 항암치료를 하는 환자가 벌침치료를 같이하면 기력이 떨어지지 않고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양방이든 한방이든 벌침치료와 병행해도 무방하단다. 이러한 벌침의 탁월한 효과에 비해 치료비용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저렴하다. 벌침치료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를 구비하고 벌만 구입하면 된다. 기본도구는 특수핀? 1개(15,000원), 휴대용 벌통 1개(5,000원), 사혈침 1개(5,000원)가 전부이고, 벌은 양봉장에서 구입해 쓰는데 보름치 1통에 5,000원 정도이다. (참고로, 요즘은 양봉이 많아서 양봉벌을 쓰고 또 그 벌침은 한꺼번에 맞이 놓기도 하나, 벌침의 원형은 우리 토종벌이고 토종벌은 한번에 3대를 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토종의 우수성을 모든 면에서 새삼 되돌아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처음에는 전문가에게 시술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조금 맞다보면 스스로 할 수 있다. 배워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민중의술(자연의술)의 자랑 중 하나인데(병원이나 한의원에서 하는 제도의술은 백날 다녀도 환자 스스로 할 수 없다), 벌침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하다보면 이치가 터득되고 지혜가 생긴다. 다만, 배선생의 경험으로는 체질과 병증에 따라 벌침의 효과가 미미한 환자도 가끔 있더라고 한다. 암환자의 경우, 병이 너무 깊어진 경우가 우선 그렇다(그렇지만 필자가 알기로 배선생만큼 말기암 환자를 잘 고쳐내는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배선생은 언젠가 필자에게 ‘제 발로 100m를 걸어갈 체력만 남아 있다면 어떤 환자도 고칠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는데, 평소 겸손하기 짝이 없는 그의 감추어둔 자심감이 우연히 표출된 것이 아닌가 싶다). 신부전증도 벌침으로는 잘 안 되는 것 같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신부전증 환자를 몇 명 시술해 보았는데, 몇 번 맞고는 안 오는 것으로 보아 효과가 별로 없었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추측에서 나온 말이다. 체질과 관련한 여담이지만, 배선생에게는 한가지 한이 있어 보인다. 그의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병을 낫게 해 드린다고 케일즙을 많이 드시게 했다고 한다. 케일에는 우유의 40배 영양가가 있고 그것을 마시고 암도 고쳤다는 강의를 듣고 집에서 케일을 재배하여 매일 드시게 했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설사를 했는데, 그 때는 몸 속의 좋지 않은 것이 배설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배선생이 체질 공부를 하고 나서 보니 아버지는 소음인 이어서 케일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회로 얼마나 목이 메였는지 모른단다. 아버지를 모시고 전국을 다니며 좋은 약이라고 지어드렸는데,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니 남은 약이 비료포대에 3포나 되었다. 알고 보니 모조리 체질을 모르고 한 어리석은 짓이었더란다. 촌평 벌침 자체의 기본적인 효능은 이렇게 뛰어나지만, 누가 놓든지 똑 같은 효과가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벌침을 놓기에 앞서 환자의 체질을 포함한 심신 상태를 통찰하여 진단하는 능력과 그에 맞추어 적절한 치료의 부위와 치료 강도를 선택하는 안목,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술자가 가진 마음자세와 거기서 우러나와 환자에게 전달되는 기운이 다르기 때문일 터이다. 환자의 마음을 다독거리는 지혜와 정성의 차이도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벌침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명의는 드물 터이다. 이는 어느 의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필자는 배칠근 선생을 서슴없이 명의로 추천한다. 그는 의자(醫者)가 갖추어야 할 이 모든 점에서 이미 어느 수준을 넘어 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환자는 매일 매일 시시각각 상태가 달라진다. 그것을 살피지 못하면 치료는 안된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시술을 맡겨도 답답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필자는 이미 민중의술살리기 운동을 제2의 광복운동으로 규정하고 다니는 사람이지만, 아직은 야만스러운 이 땅의 현실 앞에서 현직 공무원인 배선생의 신분을 이렇게 공개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바 있어 그의 의중을 물었더니 그는 오히려 「민중을 위해서 일하다 다치면 그것은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지요」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것은 결코 허세나 만용이 아니다. 그인들 어찌 이런 저런 안위에 대한 인간적인 걱정이 없겠는가. 그러나 진리를 확신하고 나면 진리보다 더 크게 용기를 주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방해도 그 용기를 꺾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처절한 투병체험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생명의 이치와 의술의 원리에 달통해 가면서 대자연과 인간에 내재된 진리를 이미 깨달아 확신에 이르렀고, 또한 생명을 살리는 것 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확인했기 때문에 어떤 부당한 제재도 물리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가지게 된 것일 터이다. 이렇게 해서 배선생 또한 이 땅의 자연의술, 민중의술이 생성되고 한 사람의 민중의술 명의가 탄생하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의과대학, 한의과대학을 다닌다고 터득될 수 있겠는가? 전 국민에게 거듭 묻노니, 이 의술과 명의를 단지 의사?한의사 면허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종전처럼 감방에 처넣어 짓밟아 죽일 것인가, 널리 펴도록 해서 병고에 신음하는 인류를 살리는데 활용토록 할 것인가? 살려야 된다면 이런 의자(醫者)와 인술(仁術)을 지켜주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이제 제발 미개와 야만의 의료제도로부터 벗어나자. 배칠근 선생을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늘에게, 그가 극단의 병고에 시달릴 때 지켜준 부인과 가족들에게 감사와 축복을 보내면서, 배선생의 인술이 세계에 빛날 날이 올 것을 확신한다. 민중의술 만세! ◀ 글 황종국 ▶
[출처] 봉침의 달인 배칠근(펌)|작성자 봉선생 |
첫댓글 어제도 뵙고왔는데 사부님의 뜻과 길을 펼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배칠근 선생님 뵐수있는 길을 안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흡연을해두 벌침효능 볼까요?
선생님좀 만났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배칠근 선생님 어디에 가면 뵐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