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민족은 예맥족이 아니다. (4)
李成桂가 現 黃河 以北까지 차지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Asia from Brookes R.지도다. 밑에서 자세히 검토하겠지만,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및 동녕부(東寧府)가 現 黃河 以北과 발해만(渤海灣)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Asia from Brookes R.은 朱元璋이 李成桂 등과 분할할 영토를 기준으로 날조사에 근거해 그린 지도를 보고 그렸다. 비록 사본이긴 해도 서양인의 말과 李氏朝鮮의 책과는 달리, 中國이 스스로 그린 날조 지도다.
8600 년의 한(桓)제국은 어이없게 식민종족들에 의해 역사와 영토가 해체되어 揚子江 以南은 朱元璋이, 揚子江 以北은 熟女眞이, 黃河 以北과 東北亞는 李成桂가 나눠가졌다. 그러나 약점을 가진 李成桂와 그 후손들을 국경을 맞대고 있는 淸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李氏朝鮮의 영토를 야금야금 갈취한 것이다. 원래 협박범은 얻을 게 남아 있는 한, 계속해서 협박한다. 淸도 그랬다. 지리적 조건으로도 揚子江 以南의 朱元璋은 李氏朝鮮을 공격할 수도 없지만, 역시 약점을 잡힌 터라 壬辰倭亂에 파병까지 해야 했다.(壬辰倭亂은 明과 倭의 전쟁이다)
明은 베트남 북부의 교지국(交趾國 : 番朝鮮의 마지막 왕이었던 箕準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후술한다)에게도 시달리던 형편없는 약체국이다. 그런 明이 北厓가 揆園史話를 쓸 당시 까지도 멀쩡했던 건, 淸이 明과 전쟁을 해보지 않아서 明이 강한 걸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北厓 역시 淸과 生女眞, 倭까지 끌어들여 明에 맞서야 한다고 역설하지 않았던가. 세계 전쟁사를 살펴보면, 강대국으로 알았던 나라가 전쟁에서 여지없이 무너진 경우가 더러 있다. 獨蘇戰, 露日戰爭이 그 대표적인 예다.
淸은 朱元璋의 후손에게도 협박을 했겠지만, 통하지 않았다. 揚子江 以南의 한족(漢族)은 여전히 그 땅에서 天子國의 백성 한족(桓族)으로 살고 있으니까, 진실이 폭로돼도 朱元璋의 후손들은 李成桂의 후손들 만큼 타격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李成桂와 그 후손은 자신들의 책임을 우리나라 王朝(특히 高麗)에 전가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은 자들이라, 땅을 상실할 때마다 우리나라 역사도 계속해서 축소되어 갔다. 高麗가 韓國史를 말살(抹殺)했다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어떻게 高麗가 李氏朝鮮史를 축소할 수 있는가.
高麗가 韓國史를 말살했다면 李氏朝鮮은 한단사(桓檀史)를 수거하고 焚書할 이유가 없다. 통치자가 바뀌었으므로 약점도 사라지고, 더 이상 中國도 공갈, 협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李氏朝鮮이 亡했기 때문에 中國이 大韓民國을 협박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朱元璋이 먼 미래를 바라보고 未開 中國에 번듯한 역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역사교환을 한 것은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天子 행세를 하려면 필히 번듯한 역사를 가진 종족으로 둔갑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나라 영토를 차지한다고 해도 未開 중국의 우두머리라는 지위로는 韓民族의 반발로 明은 단명할 수밖에 없다. 明은 전쟁에 승리하여 우리나라 영토를 차지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나라 역사 위에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明은 中土의 지명을 중국 대륙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全 시대에 걸쳐 지도를 날조했다. Asia 1808 (“Asia” from The General Gazetteer; or Compendious Geographical Dictionary by R. Brookes. Eighth Edition. Dublin, 1808.)은 원래 蒙古干涉期의 지도를 明이 날조한 것을 보고 그린 지도다.
이걸 알아야 한다. 서양인들은 東아시아를 탐험해서 地圖를 작성한 게 아니라, 기존의 만들어진 지도를 보고 그냥 베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原地圖가 날조되어 있으면, 서양인이 베낀 지도 역시 날조된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Asia 1808 은 중국의 날조지도를 보고 베낀 연도가 1808 년이었던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servlet%2FDownLoad%2FAsia_1808_Pegu%5B1%5D.jpg%3FattachmentId%3D122398) ▲Asia 1808 지도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 조선교구 제정이라는 부제가 붙은 지도는 李氏朝鮮의 지도를 보고 베꼈다. 1824 년이라 써 있지만, 李氏朝鮮에 교구(敎區)가 세워진 것은 1830 년대, 서울·元山 敎區 등으로 나뉜 것은 1900 년대고, 위도와 경도가 표시된 李氏朝鮮 지도는 1910 년대에 나왔다.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의 주해에는 괄호 안에 1924 년이라 써 있다.(주간조선 2003. 07. 29.)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ini-files.thinkpool.com%2Ffiles%2Fmini%2F2005%2F04%2F03%2F%EA%B7%B8%EB%A0%88%EA%B3%A0%EB%A6%AC%EC%98%A4_16%EC%84%B8_%EC%A1%B0%EC%84%A0%EA%B5%90%EA%B5%AC_%EC%A0%9C%EC%A0%95_.jpg)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 (오른쪽 지도는 현재의 지도로 비교한 것임)
이미 1909 년에 日本이 일명 ‘간도협정(間島協定)’을 맺어 韓半島 以北을 淸에 넘겼다. 그러나 韓半島 以北에도 朝鮮人들이 많이 살았다. 淸이 李氏朝鮮의 땅을 단계적으로 빼앗는 바람에 淸의 영토가 되고 나서도 朝鮮人이 그 땅에 계속 살았다. 시간이 좀더 지나면 그 땅의 사람들도 인식이 변해 ‘이제는 나도 中國人’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는 아직 자신을 朝鮮人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린 지도다.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는 1924 년, 원본지도는 1824 년에 제작했던 것이다.
Asia 1808 을 보자. 회수(淮水) 中流 以南에 Cayson 開城이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를 보고, 開城이 黃河 下流에 위치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黃河는 산동반도(山東半島) 위로 흘러나간다.] 북위 32°쯤 된다. 오늘날의 합비(合肥)다. 淮水는 예성강(禮成江)이 아니라, 임진강(臨津江)이다. 왜냐하면 高麗의 수도 開京은 長安인데, 李成桂는 開城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禮成江은 위수(渭水)다.
李成桂는 開京이 開城이라 날조했다. 王建이 자신의 고향을 수도로 삼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날조 역사 속에서 나마 묘청(妙淸)이 開京의 地德이 다한 반면 西京은 왕성하기 때문에 그곳을 수도로 정해야 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妙淸의 亂은 순수창작이 아니라, 그 당시의 사실에 근거해 날조했다. 저 날조기사에서 開京은 高麗 以前부터 우리나라 歷代 王朝가 도읍으로 정한 땅임을 알 수 있다.
高麗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우리나라 도읍이었던 적이 없는 開城이 開京이라면, 神人王儉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고 5京, 3京의 하나였던 西京에 비해 地德이 다할 수 있는가. 역사날조 하면서 무심코 實史를 노출시킨 것이다. 이게 역사날조의 어려움이다. 거짓말은 쌓이고 쌓이면 거짓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거짓말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합의한 西鴨綠江은 어딘가. 中國 지도에는 이 당시의 遼水가 남아 있지 않다. 淸이 지도를 날조해 明의 遼水를 난하(灤河)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李氏朝鮮이 黃河 以北을 차지했기 때문에 西鴨綠江(西鴨綠江=遼水라는 건 나중에 자세히 설명한다)이 될 수 있는 강은 정해져 있다.
우리나라가 中土를 침입 하려고 해도 西鴨綠江을 건너야 했고, 中奴가 우리나라를 침입해도 西鴨綠江을 건너야 했다. 黃河 下流에 보면, 태행산맥(太行山脈) 以西는 동북아에서 부터 줄곧 산악지대고, 山嶽地帶 以西는 사막(沙莫)이 펼쳐져 있다. 설령 太行山脈 以西로 진격했다고 해도 진령산맥(秦嶺山脈), 복우산맥(伏牛山脈) 등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太行山脈 以東으로 공격로를 잡아야 하는데, 이 경우 오늘날의 상건하(桑乾河)[下流는 영정하(永定河), 천진(天津). 下流는 해하(海河)라고 부른다. 이하 桑乾河로 기술]를 꼭 건너야 한다. 桑乾河가 李成桂와 朱元璋이 합의한 遼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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