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나님과 하나 되기
요한복음 17:20-26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세상의 것에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배고픔을 진리가 채워줄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하나님께 더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관심을 두는 하나님도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사랑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일 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해서 일하신다고 말하면, 그것보다는 육신으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면 ‘예수가 밥먹여 주냐?’ 교회 가면 떡이 나오냐 ? 밥이 나오냐 ? " 라는 말로 무시해 버립니다. 이 말은 모든 가치 평가를 밥이 되어지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하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분명 쓸데없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상 가운데에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세상 한쪽에 울타리를 쳐 놓고 믿는 사람을 따로 분리해 놓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비록 섞여 살고는 있지만, 그 생각만큼은 절대로 섞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성도로서의 생각과 가치관과 특별한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는 예수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은 성도가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의 사람들은 삶의 모든 목적을 자기 육신에 두고 있지만, 성도들만은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목적 삼고 살아가는 삶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일 때 세상에 대해 여유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남들이 가지는 것 나에게 없다고 해도 상관없고, 남들이 사는 것처럼 못산다고 해서 한탄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 ) - 송명희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십자가의 주님을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 주님의 음성을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주님의 사랑은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 놀라운 천국의 비밀을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송명희 작사 최덕신 작곡 원 제목은 “나”입니다.
뇌성마비 시인인 송명희의 고백이 비 장애인인 우리를 참 부끄럽게 하며 회개를 불러 일으킨 곡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왜 나에게…”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지만 송명희 시인이 말하는 그대로 하나님이 공평하다고 고백한다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겁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리가 그 마음 속 에 있는 모습이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20절에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누구를 위해서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당시 제자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믿음이 있게 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즉 오늘 저와 여러분을 위한 기도도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이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기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지금 이 시간도 세상을 향하기보다는 하늘을 소망하고 예수님께 내 마음을 두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곧 주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할 때 자기 신앙에 대해 교만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죄인으로 태어난 자가 세상이 아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 아닙니까? 기적 입니다. 그것이 곧 새롭게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되어지지 않은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은혜며 축 복입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쪽에서 하나님을 믿어주고 섬기는 것을 가리켜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된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힘을 두고 신앙, 즉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 되게’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됨, 성도와 예수님과의 하나됨, 성도와 성도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 됨에 대해 말할 때, 성도끼리의 하나 됨은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육신으로 존재하고, 교제할 수 있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만 맞으면 하나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맞았다고 해서 하나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의 마음이 신앙이 아닌 것에서 하나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악한 속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악한 속성은 서로 통하여 얼마든지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통한다고 해서 하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인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하나 됨은 먼저 그리스도와 하나됨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면 자연히 성도는 서로 하나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하나 됨을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23절에 보면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성도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이 나에게도 주어졌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무조건 잘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시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고 참된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세상을 보호해주고 잘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람이 굶어 죽고, 고통과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완벽하고 온전한 사랑을 베푸셨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성도로 하여금 아들이 받은 그 사랑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 된다는 것은 성도의 육신을 위해서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 됨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세상으로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은 무엇입니까?
이 역시 세상이 말하는 사랑의 시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세상이 생각하는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편안한 것도 아니었고, 세상의 것을 마음껏 누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세상의 반대를 받고 죽으셨습니다. 뭐가 아버지의 사랑입니까?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 즉 하늘의 영생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아버지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하늘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편안함은 없지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 것을 구한다면, 세상의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실망하고 한탄하며 산다면 과연 무엇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 것으로 확인되어진다면 사랑을 보이는 것은 부자들, 성공한 사람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는 압니다. 성경을 통해서 배웠다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자연히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세상의 좋은 것을 입혀주는 것이 아니라 사망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보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여러분은 서로 하나된 관계로 살아갈 것입니다. 세상 것을 보지 않고 하늘의 영생만을 소망하며 사는 관계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십니까?(24-26)
세상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세상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마다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한 것뿐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아이가 저에게 하나님은 누가 만드셨는가를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밝힌 대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말 외에 달리 할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그러한 말씀조차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로 일관되어 있고, 신약에는 예수님의 행적과 사도들이 복음에 대해 가르친 내용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개입한 역사입니다. 즉 그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하셨는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 역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일하는 분이 아니라는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고, 사도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편안함과 성공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답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사도들의 모습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도구로써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하나님은 우상일 뿐입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 상상된 우상, 즉 인간의 탐욕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이라 이름하는 우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이 문제를 말씀하시고 기도를 마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17장 전체의 예수님의 기도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의 마지막이 아버지를 아는 문제를 언급하고 마쳐지고 있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25-26절을 보면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는 기도를 하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택한 자들에게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는 오직 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는 분으로 세상에 오신 아들로 인해서만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은 아버지를 모른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하나님을 모른 것으로 여겨진다면 반대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안다는 결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세상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 일컬음 받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수준의 앎은 아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유대인만 보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민족으로 자처했습니다. 자신들만큼 하나님을 아는 민족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모른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를 아는 상태는 결코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을 두고 말씀한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법을 잘 지키기를 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담겨 있는 십일조나 제사, 안식일, 이런 것을 지키는데 힘을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셨다면 하나님이 십일조를 행하고 제사하고 안식일 지키는 것으로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은 그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자신들을 위해서 메시아를 보내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힘이 있는 용사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메시아를 보낼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앎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긴 하셨으나 약자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약자의 모습으로 메시아를 보내셨는가?’를 알아야 진심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하나님을 알았다면 아는 것으로 끝납니까? 26절의 말씀을 보면 제자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제자들 안에 있고, 그 사랑으로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함께 하시는 것을 위해 아버지를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버지를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아는 것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많이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 말은 추상적인 것으로 그친다는 것을 아십니까? 보이지 않는 분이 함께 함을 아는 것, 바로 이것을 위해서 아버지를 아는 문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 사랑은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해서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사랑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야 할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아버지의 사랑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것을 기준으로 해서 사랑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잊지 마십시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을 살리셔서 영원한 나라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을 제자들 안에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제자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미움을 받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사랑은 세상에서 편한 인생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25절에 보면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음을 잊지 마시고 여기에 우리가 원하는 다른 것을 첨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 것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고, 세상 것이 풍족하게 주어지면 하나님이 함께 하고 사랑하신다고 여기고,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시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이 아버지를 아는 수준인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는 세상 에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택한 백성을 사망 가운데서 건지시고,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아들을 보내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심으로써 그 사랑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십자가로 증거된 아버지의 사랑을 안다면,
세상에서 어떤 형편과 상황에 처하든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음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되기를 결단하고, 힘쓰시길 바랍니다
성도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를 때는 세상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알게 되면 세상을 전부로 여기고 살았던 것에 대해 애통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분께 하늘의 생명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붙들린다면 여러분의 삶은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됨으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한없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