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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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생애를 중심으로 4대 명절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음, 4월8일), 출가(出家)일(음, 2월8일), 성도(成道)일(음, 12월8일), 열반(涅槃)일(음, 2월15일)입니다. 올해 2024년은 불기(佛紀)로 2568년입니다. 불기는 서기(西紀)와는 다르게 성인(聖人)의 탄생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부처님의 열반이 기준이 됩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모든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열반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지요. 만약 그렇게 본다면 불교의 가장 큰 명절은 열반일, 아니면 깨달음의 성취가 이루어진 성도일이 되어야 할 텐데요. 정작 불교, 불자들의 최대 축하 일은 부처님의 탄생일입니다. 탄생일 전후로 전국 사찰에서는 봉축 법회가 열리고 각 지역에서는 제등행렬, 봉축 점등식의 연등회(燃燈會) 등이 국가적, 지역적 축제 행사로 열리고 있습니다.
경전에서 전하는 부처님 탄생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대목은 태어난 아기가 동서남북으로 일곱 발자국을 걷고, 한 손은 하늘을, 또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쳤던 부분일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오래전부터 부처님의 탄생 이야기 속에 불교의 궁극적 이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우선,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우리 중생들의 삶의 모습을 조금 분석해보면, 사람들은 늘 무엇인가에 의지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물, 권력 같은 물질과 남에게 의지하는 생각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돈이 많으면 잘 사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살핌, 나를 알아주는 이해를 갈구합니다. 중생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 의지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은 모든 의지하는 마음을 벗어난 존재입니다. 나의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두 발로 우뚝 서 있는 존재입니다. 부처님의 동서남북의 일곱 걸음은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걸으셨다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원하는 바를 이루면 만족감과 성취감으로 행복합니다. 반대로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늘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이루었다가 혹은 이루어지지 않다가를 반복합니다. 실제로는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행복과 불행을 되풀이합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윤회한다고 합니다. 만족감과 성취감이 충족되면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천상을 느끼고, 불만족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에 휩싸이면 지옥 같다고 합니다. 이 천상과 지옥 사이를 여섯으로 나누면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인 ‘육도윤회가 생깁니다. 그런데 모든 중생의 마음에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바랄 것입니다. 항상 행복한 상태로 살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항상 행복과 불행이 되풀이됩니다. 이 되풀이 되는 윤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가는 대자유의 길이 ‘깨달음’입니다. 부처님께서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의미는 이 육도의 6가지 삶의 모습을 벗어나 해탈했다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윤회를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 탄생 장면의 하이라이트는 ‘탄생게(誕生偈)’라는 선언입니다.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천상은 신들의 세상을 말하고 천하는 인간의 세상을 말합니다. 고대 인도에서 신들의 지위는 절대적이며 세상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불교는 신의 영역,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세상, 즉 생각을 일으켜서 만들어 놓은 관념의 세계로 이해합니다. 반면에 인간의 세상은 돈, 건강, 쾌락과 같은 물질적인 세상입니다. 더 이상 천상과 천하 세계의 관념이나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벗어나겠다는 선언이 유아독존인데, 유아독존의 의미가 종종 잘못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글자의 해석에 머물면 그렇게 되는데요. 가령 ‘부처님만이 존귀하다’, 혹은 ‘부처님만이 최고다’라고 해석되는 경우입니다.
언젠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코살라국 프라세나짓트 왕의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나 자신이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어떻습니까? 가끔 어떤 분들은 주인공임에도 조연으로 살아가기도 하는데 이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중국의 ‘서암사언(瑞巖師彦)’이라는 스님은 매일 눈을 뜨면 자신을 향해 ‘주인공아!’라고 부르고 스스로 ‘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또 중국 고대 성군으로 불리는 탕왕은 세수를 하면서 세수 그릇에 ‘날마다 새로워진다’라는 의미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써서 세수도 하고 마음도 씻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나의 행복이 누군가에게서 온다든지, 나의 행복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라고 생각하면서 현재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지는 않습니까? 누구 때문에 못 살겠다, 누구 때문에 괴롭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고,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는 자세입니다.
탄생게는 계속 이어집니다. ‘삼계개고 아당안지’ 세상 모든 중생이 괴로움에 빠져있으니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삼계’는 이 세상과 그곳에 살아가는 중생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삶을 보니 모두 괴로움에 있음을 보십니다. 중생구제의 서원이 불교의 목표이니, 마땅히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불교는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불교의 궁극적 이상이 이 탄생게에 두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삶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온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괴로움이 있다면 스스로 수행과 정진으로 벗어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자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의미이자 대승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한다는 상구보리의 의미입니다. 수행을 통해 자유롭고, 괴로움이 없는 그런 존재가 되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괴로움을 없애고 나서는 무엇을 할까요? 아직도 괴로움에 빠져있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길이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번뇌와 망상에서 미욱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 존재를 보듬어 안고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리는 전법의 길입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행복한 세상, 불국토, 이상세계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만의 세상이 아니라 불법(佛法)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세상이기도 합니다. 진리를 모르거나 접하지 않은 분들에게 자비심을 일으켜 함께 하고, 그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세상을 만들어 모두가 행복한 삶을 함께 만들어가는 일이 불국정토(佛國淨土) 건설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길을 가셨고, 성도 이후에는 ‘삼계개고 아당안지’의 길을 가셨습니다. 깨달음을 얻으시고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셨지만, 그 기쁨을 당신 혼자 누리지 않고 괴로움에 허덕이는 일체중생을 위해서 45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진리의 가르침에서 가피(加被)를 입었습니다. 어떤 곳이든 중생의 괴로움이 있는 곳이라면 함께 하셨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려고 하는 곳에 가서는 전쟁이 얼마나 괴롭고 무익(無益)한가를 깨우쳐 전쟁을 멈추게 하셨고,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왕과 군인들에게는 전쟁이 얼마나 나쁜 결과를 가져올지 알게 하시어 생각을 바꾸게 하셨습니다. 또 계급제도로 인간이 차별받고 남녀가 차별받는 세상에서 누구나 태어나면서 계급이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행위에서 비롯되었음을 깨우치게 하여 계급의 차별, 남녀 차별을 버리도록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승가(僧伽)안에서 차별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대의 상황으로 볼 때 혁명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잘못되고 불의(不義)한 것을 바로 잡아 진리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불자들의 최대 봉축일(奉祝日)인 부처님오신날, 우리가 경전에 쓰여 있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를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이해가 바탕이 되어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수행하고 정진해야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워보기를 바랍니다. 또 귀하고 소중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 이웃에게 더 많이 전합시다. 나와 일체 인연들의 행복을 가꾸는 발원을 하고, 내가 사는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동참합시다. 환경을 위해 나의 소비를 줄이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눔하고, 우리 사회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나부터 고집을 내려놓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 모든 생명 있는 존재가 행복해지는 부처님오신날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오심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입니다. 뭇 생명이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조금 더 역할을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