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仁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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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 |
조선 국왕 | |
재위 | 1623년-1649년 |
전임자 | 광해군 |
후임자 | 효종 |
섭정 | 왕숙 흥안군 이제 (1624년 3월 26일 ~ 1624년 4월 1일) |
재상 | |
이름 | |
휘 | 이종 (李倧) |
별호 | 자 천윤(天胤), 화백(和伯), 호 |
묘호 | 열조 (烈祖) → 인조 (仁祖) |
존호 | 개천조운정기선덕 (開天肇運正紀宣德) |
시호 | 장목 헌문열무명숙순효 대왕 (莊穆 憲文烈武明肅純孝 大王) |
능호 | 장릉 (長陵)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95년 12월 7일(1595-12-07) |
출생지 | 조선 황해도 해주군 |
사망일 | 1649년 6월 17일 (53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
매장지 |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
왕조 | 조선 왕조 |
가문 | 전주 이씨 |
부친 | 원종 |
모친 | 인헌왕후 |
배우자 | 인렬왕후 장렬왕후 |
자녀 |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효명옹주, 숭선군, 낙선군 |
종교 | 유교 성리학 |
인조(仁祖, 1595년 음력 11월 7일 ~ 1649년 음력 5월 8일)는 조선의 제16대 임금(재위: 1623년 ~ 1649년
휘는 종(倧), 본관은 전주, 자는 천윤(天胤), 화백(和伯), 호
시호는 인조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인조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仁祖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이다. 1649년(효종 즉위년) 음력 5월 15일에 열조(烈祖)의 묘호를 받았으나, 8일 뒤 인조(仁祖)로 개정되었다.
인조 이후로 명나라처럼 청나라에서도 장목왕(莊穆王)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나 청나라와의 외교문서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능양군은 선조
구성(具宬)의 문인이었으며 신경희의 옥사로 동생 능창군이 사사당하고 아버지 정원군마저 홧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복수를 다짐, 반정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623년 3월부터 1649년 5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623년 3월부터 1647년 4월까지 친정하였고 한때 1624년 2월 이복 숙부 흥안군 이제가 실권 탈취를 기도한 바 있으며 1647년 4월부터 1649년 5월 승하할 때까지 차남 봉림대군 이호(훗날 효종)가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
인조는 1595년 12월 7일(음력 11월 7일) 임진왜란 중에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과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구사맹(具思孟)의 딸 군부인 구씨(인헌왕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조선 황해도 해주부임진왜란
이름은 이종(李倧)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천윤(天胤), 화백(和伯)이라 하였으며 호는 송창(松窓)이었다. 그의 자(字, 본이름 대신 부르던 이름) 중 천윤(天胤)이라는 자는 당시 국왕이었던 그의 할아버지 선조광해군선조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으나 그 중 정원군선조
능양군은 태어나면서 모습이 범상하지 않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많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할아버지 선조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이것은 한 고조선조의 이와 같은 말은 곧 누설되었고,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는 등의 소문과 함께 퍼지면서 훗날 그의 친동생 능창군
2, 3세가 지나서는 사저에서 자라지 않고 할아버지 선조의 배려로 곧 궁중에서 자랐는데, 의인왕후선조선조는 그의 외삼촌이기도 한 능해군 구성[1]
1601년(선조 34년) 능양수(綾陽守)에 첫 책봉되었으며 1604년(선조 37년) 임진왜란 당시 관료와 의병장, 장수들을 포상할 때 그를 특별히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넣어 책록되었고[2],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이몽학의 난 진압에 참여한 관원들을 청난공신(淸難功臣)에 녹훈할 때는 청난원종공신한국학중앙연구원
1607년(선조 40년)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가 이어 능양군에 봉해졌다. 할아버지 선조가 별세하면서 정원군 일가는 경희궁으로 나와 살았고, 부모를 따라 경희궁
1610년(광해군 2)에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으로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청주 한씨 한준겸인렬왕후선조1612년1613년(광해군 5) 임해군의 옥사 직후 익사원종공신
1615년(광해군 7)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둘째 아우인 능창군인빈 김씨 소생 왕자들 중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 물망에 올랐던 신성군이 일찍 죽자 정원군에 의해 그의 양자로 들어갔었는데, 당시 17살이던 능창군은 수안군수 신경희신경희의 옥사
능창군이 사사되자 아버지 정원군은 화병을 얻어 몸져누웠고, 술도 좋아했던 정원군은 1619년능양군
1620년(광해군 12) 무인 이서, 신경진, 김류와 그의 외척인 구굉, 구인후 등이 반정을 모의하고 능양군능양군은 이들과 비밀리에 만나며 정변을 모의하였고 서인과 남인1622년 가을 정변 계획이 누설되어, 평산부사 이귀이귀·김자점
1623년 4월 11일(광해군 15년 음력 3월 12일) 서인의 김류·이귀·이괄·최명길 등이 일으킨 정변을 준비하고 그해 4월 12일(음력 3월 13일
반정의 명분인 광해군인조 반정의 주요 명분 중의 하나는 광해군의 인목왕후인목왕후
즉위 직후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 임해군을 죽인 것과 후금이이첨·정인홍이들은 사형당하고도 도로 살려내 사형해야 마땅하다.[중립 필요]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당했던 서인·남인의 사림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 서인계의 정엽·오윤겸·이정구·김상헌 등과 남인계의 이원익·정경세·이수광
즉위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유몽인 등 북인계 인사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 하옥하였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을 추대, 그는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괄의 난장만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피난가던 인조는 전영의정 기자헌, 유몽인 등 옥에 갇힌 북인
인조는 이러한 반왕권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제어함으로써 비정통적인 방법에 의해 승계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세워 신료를 장악하거나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 남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행사를 제약했다.
인조 반정 공신 세력이 정국을 장악하면서 공신 세력의 과도한 세력강화에 위협을 느낀 그는 공신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독재 김집과 송준길, 송시열
인조 반정서인 공신 세력의 이같은 행위에 분노하면서도 힘을 쓸 수 없었던 그는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의 산림 학자들과 김육 등 비공신 계열 서인 세력을 기용하여 서인남인계 정승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기용한 것을 비롯, 남인
서인들은 이괄의 난이 진압되면서부터 계속하여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성균관 문묘남인계 성균관유생들은 이이가 입산하여 불교승려가 되었다는 것과 성혼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가마를 보고도 호종하지 않았다며 비난하는 소를 올렸고, 서인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이이와 성혼
인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 정원군은 대원군으로 추존하여 정원대원군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고,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인조 반정의 반정공신들 또한 선조정원군
그러나 서인계 성리학 예학자인 김장생, 김집과 송시열과 남인계 허목이귀, 이정구 등을 중심으로 정원군의 추존 작업을 추진하였고, 중론을 듣는 것처럼 여론을 각색한 후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원종
그러나 성리학자들의 반발은 계속되어 정원군의 추존에 반대하여 김장생, 김집 등은 사퇴, 낙향하였고, 허목
친명친금의 정책을 실행한 인조는 "명과 사대를 다하고 만주에도 관계를 구축하라."라는 식으로 명한테는 대국으로 받들어 지고 후금역시 외교를 다했다. 인조는 광해군의 펼치지도 않은 중립외교 정책을 불사르고 새로운 외교책을 펼쳤다.
실제 1624년 가도의 모문룡이 자신들이 후금을 칠 것이라며 조선인 길잡이를 요구 했으나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비변사의 지침은 다음과 같았다
" 조선인들이 산세와 지세를 몰라 길잡이가 될수 없다고 말하라. 그럼에도 명 장수의 고집을 이길수 없다면 그들에게 명나라 병사의 갑옷을 입혀 보내라. " 라고 말하며 후금과의 대립을 최대한 피했다.
출처 : 한명기, 광해군 -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군주
인조 정권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와는 다르게 친명정책을 펼쳐 청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때에 1623년 인조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킨 한명윤의 아들, 한윤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누르하치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이괄의 잔당 중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
1627년 1월 14일 인조 5년에 후금 홍타이지는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 3만 명은 1월 16일 의주를 돌파하고[3]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1월 21일에는 능한산성을 함락시켰으며, 1월 24일에는 평양1월 25일[4] 안주성에서 남이흥,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을 전사시키고 평양을 거쳐 1월 25일에는 황주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가고, 인조 이하 조정의 신하들은 강화도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
1628년 네덜란드선박이 난파되어 제주도에 네덜란드 사람 얀 얀스 벨테브레이벨테브레이를 통해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박연벨테브레이벨테브레이의 조선 표류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고려시대 벽란도와 예성강을 오간 아랍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는데 청나라는 조선을 완전히 박살내고 복속시키기 위해 병자호란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고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을 강화도로, 인조 본인은 남한산성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납서를 보내 근왕군을 불러모았다. 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대를 조선의 군사들이 역포위하면 해볼만 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근왕병은 오지 않았다. 납서는 작게 쓴 글시를 밀로 뭉쳐 몰래 전하는 비밀편지다.[5]
충청도 원병이 헌릉[6] 당황한 충청도 병력은 청나라강원도
원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접한 경상감사 심연은 8000명으로 근왕군을 편성했다. 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에게 군사를 주어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라 명했다. 그러나 선봉부대는 남한산성 동남쪽 40리 지점 쌍령에 이르렀을 때 불당리에 매복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고 말았다.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진을 치고 있던 심연은 선봉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6] 그 후 강원감사 조정호, 함경감사 민성휘, 전라감사 이시방이 군대를 출정시켰지만 그것은 임금을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문책을 면하기 위해 오는 척하였던 것이었다. 이후 근왕군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은 없었다.[6]
조선팔도에는 괴소문이 퍼졌다. 청나라 군사는 바람같이 나타나 귀신같이 사라진다는 소문이었다. 옹성 전술을 구사하는 조선군들에게 만주벌판을 달리며 단련된 팔기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6]
그러나 인조는 괴소문은 헛소문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소문을 확대하는 자들에게는 처벌을 공언하였다. 조선인 병사들의 후퇴에 당황해한 인조는 청나라 군사를 피해 후퇴하는 조선인 병사 몇 명을 처벌하였으나 조선인 병사들의 공포감과 무력감을 없애지는 못했다.
남한산성강화도[6] 성안에 피신한 백성들은 물론 사대부들과 수종자들도 굶주렸고 기근으로 쓰러져 아사, 동사하는 일도 속출했다.
망월봉에서 천둥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커다란 포탄이 성안에 떨어졌다. 홍이포다. 행궁에 머물던 백관들은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가기 바빴고 군사들은 혼비백산했다.[6]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성벽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홍이포는 현대의 미사일 이상으로 공포의 무기였다.[7] 당황한 인조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치열했던 논쟁도 허무했다.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 어떻게 해야할 지를 물었으나 아무도 속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옛 제도를 고수하고 의리를 지키자던 김상헌과 대륙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으니 우리도 변해야 된다는 최명길[7]
1636년(인조 14) 인조는 청나라 군대를 되돌아가게 하고자 왕자를 청나라영양군 이거의 손자 풍해군심양청나라
결국 59일간을 버티던 인조는 항복을 결심했다. 그러나 인조는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아 스스로 하성(下城)이라 표현했다.[7] 이후 인조는 영을 내려 남한산성 하산을 항복이라 하지 않고 하성이라 쓰도록 명했다. 이후 공식 기록에는 정축하성[7]
성문을 나선 임금이 눈밖에 쌓인 비탈길을 내려와 수향단에 좌정한 홍타이지(숭덕제[8]
그들은 처음에는 반합[8]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꿇고 절하는 모습을 지켜본 백관들과 유신들은 충격을 받았다. 소중화를 자처하며 명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의 도를 계승하였으며, 여진족, 거란족, 왜인, 유구인, 월남인 등을 야만인으로 간주하던 조선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정온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소현세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 즉 홍익한·윤집·오달제
인조는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먼저 1623년 호위청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군을 창설했으며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호패법
1627년 정묘호란수어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군영광해군강원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
이와 함께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법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
또한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1637년 북관의 회령(會寧) 및 경원개시, 1647년 압록강의 중강개시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昭顯世子)는 그곳에서 선교사 아담 샬 등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청나라1644년 11월 석방된 소현세자는 1645년 2월 조선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용 조씨(후일의 귀인 조씨)와 김자점 일파는 소현세자를 공격했고, 1645년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가 세자를 독살하고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소문을 이유로 민회빈과 그녀의 친족들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제주도
경선군과 경완군이 제주도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옥사,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왕위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병자, 정묘호란 이후 원칙론을 내세운 산림세력은 북벌을 주장했고 지나친 북벌 여론을 그는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김자점(金自點)을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 김집·김장생·송시열 등의 산당(山黨), 김육
1635년(인조 13년)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후인 1638년(인조 16년) 왕비간택령을 내려, 그해 10월 당시 14세인 인천 부사 조창원의 딸 장렬왕후복상과 예송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孽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했다. 그러나 재정 조달은 확충되지 않았고, 산림 세력의 북벌론1644년(인조 22년)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결하자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뭇 신하를 거느리고 슬퍼하여 상복을 입고,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를 남명
사림의 계속된 북벌 요구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던 인조는 1646년 그는 친청파 인사인 김자점
이후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과 수어청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쪽 변방의 연해 방위를 위하여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1649년 (인조 27년) 손자 연(棩)(현종1649년 초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5월 8일 새벽에 적장자인 왕세자 효종 내외를 찾지않고 서녀 효명옹주와 서자 숭선군 낙선군효종 앞에서 효명옹주와 숭선군 낙선군을 벌하지 말고 죽는 순간까지 친형제 지간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많이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이날 유시(오후 5시~7시)에 창덕궁 대조전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인렬왕후1635년 12월 9일 산후병으로 42세의 나이로 인렬왕후가 승하하자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이듬해 1636년 4월 12일1649년 1월 30일
그러나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루어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등 이변이 계속되어 영조 7년 1731년 8월 30일
옛으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인조는 조선 최악의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만약 그가 세계정세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더라면 병자호란강홍립, 박난영
그리고 인조는 청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겠다고 타협책을 제시한 후 강홍립의 숙부인 강인
다른 일화도 있다. 병자호란 중에 청나라가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해 "임금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면 항복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병력을 물리겠다"고 제안하자 인조는 다른 사람을 보냈으나 용골대
할아버지는 선조, 아버지는 추존왕 원종(정원대원군), 어머니는 구사맹의 딸인 인헌왕후증 영의정 한준겸의 딸인 인렬왕후 한씨이며, 계비는 영돈녕부사 조창원의 딸인 장렬왕후
1645년초 석방되어 귀국한 소현세자소현세자[13] 이후 그가 소현세자
병자호란과 정축하성 이후 청나라이경석이 자처하여 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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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광해군 |
1623년 음력 3월 13일 ~ 1649년 음력 5월 8일 | 후 임 효종 |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자/황자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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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목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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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익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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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도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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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환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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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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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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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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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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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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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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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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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덕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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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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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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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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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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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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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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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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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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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원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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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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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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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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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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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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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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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진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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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장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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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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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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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문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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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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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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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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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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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민황태자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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