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승자는 없다
서 진 웅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선거에서 떨어진 정치인은 인간도 아니다” 일본 정계에서 흔히 회자된다는 말이다. 어디 한국에선들 다르랴. 선거 패배 후 절망적 무력감이 뼛속까지 스며들고 처지가 적막강산으로 급전직하했다. 꾸역꾸역 시작한 건달생활 벌써 한 달여. 외출 수요가 사라져 어차피 '방콕'해야 하는 꼴에, 월드컵 축구 TV시청의 가멸찬 눈호강이라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한국은 조별리그 3차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2:0으로 제압하며 세계를 경악케 했다. FIFA 랭킹 1위를 상대로 거둔 승리여서 더 극적이며 짜릿했고, 울림 또한 컷다. 비록 16강 문턱을 넘지는 못했지만 태극전사들은 온 국민이 그 아쉬움을 달랠 반전의 대 드라마를 쓴 것이다.
16강행이 목표였던 한국은 스웨덴, 멕시코에 연거푸 패하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축구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에 대한 하늘의 보우하심이었을까. 칠흑의 어둠속에 기사회생할 수 있는 한 줄기 빛이 내려왔으니, 그건 이랬다. 같은 시간에 벌어질 <한국 대 독일> 그리고 <멕시코와 스웨덴>의 경기에서 (한국 2골차 승+멕시코 1골차 승) 또는 (한국 1골차 승+멕시코 2골차 승). 물론 점수 차가 그 이상, 예컨대 (한국 2골차 승+맥시코 2골차 승)일 때도 당연히 한국이 16강에 진출한다. 전문가들은 1 %의 확률이라고 내다봤다. 글쎄,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갈 가능성보다는 크다 할 수 있을까.
드디어 결전의 날, 시계는 H-아워를 가리켰다. 수만 관중이 운집한 스타디움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휘슬이 길게 울렸다. 코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게르만 상륙작전의 기습을 감행했다. 탐색전을 조심스레 끝낸 태극전사들은 1진1퇴의 공방을 벌이며 세계 최강의 독일에 당당히 맞섰다. 파부침주(波釜沈舟)의 신세라 그들에겐 숨돌일 한순간의 여유마저 없었다. 앞의 졸전 탓에 빗발친 고국 팬들의 비난이 억울하여 만회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들은 있는 힘, 없는 힘을 쥐어짜며 쉴 새 없이 적의 심장을 두드렸다.
'공은 둥글다'
승부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축구경기 때 널리 통용되는 명구(名句)다. 둥글기에 어느 방향으로 구를지 모른다는 공의 속성을 빗댄 표현이다.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다는 뜻이므로 실력을 알 수 없는 팀들 간의 결과 예측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공은 둥그’니까 해봐야 안다"라고 대꾸하면 근사한 답이 될 수 있겠다. 흡사 1998년 외환위기 때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전에 경험하지 못한 웬만한 사회적 변화·현상을 두고 "IMF 때문"이라고 하면 그럴듯한 '분석‘으로 통했던 것과 같다고나 할까.
경기를 앞두고 한국의 대 독일 전 승리의 기대는 과욕이라는 게 나의 솔직한 진단이었다. 큰 점수 차로만 지지 않아도 다행이다는 유약한 생각도 했다. 어쭙잖은 애국심이었을 게다. "공은 둥글다" 는 속설을 떠올리며 한가닥 희망마저 완전히 내려놓지 않았던 건. 경기는 90분의 시간이 끝나고 추가 시간에 돌입했다. 무승부이면 선전한 거라고 예단을 하고나자 긴장이 풀리고 나도 몰래 눈이 스르르 감겨왔다. 순간, 창 밖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졌다. 반사적으로 내 눈은 TV를 향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적진 깊숙이 침투한 김영권 선수의 한방이 천하 무적 독일의 전차군단을 격침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선취 득점의 감격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손흥민 선수가 무섭게 질주를 시작하는 게 아닌가. 아프리카의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가 따로 없었다. 숨도 쉬지 않은 채 50미터를 미끄러지듯 달려간 그는 독일의 하얀 골네트를 여지없이 흔들어버렸다. 지구촌 10억의 축구팬들의 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휘둥그래졌고 광화문의 붉은 광장은 또한번 열광의 도가니로 끓어올랐다. 태극전사들이 마지막 한 방울 땀까지 잔디에 적시자 종료 휘슬이 울렸다. 축구사에 영원할 한국의 완벽한 승리였다.
승리가 확인되자 내 뇌리에는 '독일'이 번뜩 스쳐 흘렀다. 열렬한 축구팬이라는 메르켈 총리의 표정이 불현듯 궁금했다. 그는 이 경기를 직접 관전했거나 적어도 나처럼 TV로 지켜는 보았을 터다. 짓궂은 생각인가. 손조차 써볼 수 없었던 손흥민 선수가 골을 성공 시킨 바로 그 순간, 안타까워하며 송충이 씹은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0:2 수모의 그림은 단언컨대 상상력 풍부하다는 그의 머릿속에도 없었을 게 틀림없다. 다른 하나. 한국 축구의 레전드 차범근 선수가 70년대 중반 서독에서 선수활동을 할 때였다. 언젠가 그의 소속팀이 초청을 받아 한국에 와서 경기를 한 적이 있다.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동료가 차 선수에게 묻더란다. “너희 나라에 가도 맥주 마실 수 있니?”
“공은 둥글다”에 하나 덧붙이고 싶다. 승부의 세계에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고.
이번 대회에서 내게 오래 기억될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시상식 때의 광경이다. 한 금발의 미녀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시상대 위의 자국 선수들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고 있었다. 키타로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이었다.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지만 그래도 프랑스에 우승을 내어준 선수들이 못내 아쉬워하자, '잘싸웠다, 수고했다' 고 말하다 그만 감정이 북받쳤을 것이다. 돌풍을 일으키며 연전연승한 크로아티아를 응원하다 어느새 팬이 된 나의 가슴마저 촉촉히 젹셔준 감동의 피날레였다.
맥시코가 패하는 바람에 붉은악마들의 '혹시나'는 물거품으로 끝났다. 하지만 4년 후에 월드컵은 또 열린다. 경우의 수를 따지지 않고, 자력으로16강, 8강은 물론 다시 4강에도 오를 기회는 온다. 문제는 기량이다. 투지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 이젠 삼척동자도 다 안다. 껑충 도약한 한국축구가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 무대에서 화려한 기량을 뽐내는 행복한 꿈을 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