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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쇄원 앞 주차장은 원래 소쇄원 공간이었고 황금정이란 정자가 있었던 곳이다.
한국 최고의 민간 정원, 즉 원림(園林)인 소쇄원은 일제의 마수(魔手)를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일제는 지금의 소쇄원 주차장 앞 도로를 ‘신작로’라는 명분으로 뚫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주차장은? 바로 황금정(黃金亭)이 있던 소쇄원 터였지요. 황금정 자리는 논으로 변해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황금정의 터가 보입니다. 주차장도 일제가 만든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주차장은 담양군청이 만든 것입니다. 일제가 소쇄원의 맥을 끊었다면 회복시켜야 마땅하건만 아예 소쇄원을 축소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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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쇄원의 입구는 대나무 숲이다. 대나무는 꼿꼿한 선비의 기개를 상징한다.
소쇄원이 축소된 것을 어떻게 입증할까요. 조선 영조 31년, 즉 1755년에 제작된 소쇄원 목판 도라는 게 있습니다. 소쇄원에 보관된 것을 누군가 훔쳐간 뒤 아직도 종적을 찾지 못하고 있지요. 불행 중 다행으로 목판본 탁본(拓本) 한 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탁본상 소쇄원은 전체 규모가 3만㎡로 지금보다 9배 이상 컸습니다. 정자도 지금 세 채가 남아있는데 원래 10개가 넘었지요. 그렇게 줄어든 소쇄원이 1992년 세계정원박람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는데 개최지가 하필 훼손에 앞장선 일본 오사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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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쇄원 입구의 대나무숲은 한낮에도 햇빛을 가릴만큼 울창하다.
여러분을 소쇄원으로 안내해볼까요. 주차장에서 도로를 건너면 매표소가 나오고 곧바로 양편에 울창한 대숲이 이어집니다. 원래 이 대숲 길은 호젓했는데 관광객을 위한답시고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아 오히려 풍광을 해치고 말았으니 이런 무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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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쇄원에 놓인 다리는 원래 홍교였다.그런데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로 변했다.
대숲이 끝나는 곳에 소쇄원이 펼쳐집니다. 맨 먼저 좌측에 소쇄원으로 가는 다리가 나옵니다. 이것도 원래 홍교, 즉 무지개다리였던 것을 누군가 시멘트로 발라놓고 말았습니다. 다리 위에 서서 바라보면 좌측 언덕으로 광풍각(光風閣)이 보입니다.
잠깐 홍교에 대해 더 알아보고 갑니다. 우리가 보는 홍교는 주로 사찰에 많이 있지만 불교적인 유산은 아닙니다. 무지개처럼 생긴 홍교는 속세(俗世)와 선계(仙界)를 가르는 경계를 뜻합니다.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다리가 시멘트 덩어리가 됐으니 안타깝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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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봉대는 손님, 즉 봉황처럼 귀한 객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뒤에 있는 나무는 오동나무다. 봉황이 오동나무에만 앉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던 길을 재촉하면 대봉대(待鳳臺)가 나옵니다. 뜻을 풀면 봉황을 기다리는 정자라는 뜻입니다. 봉황은 귀한 손님을 말하지요. 전설 속의 동물인 봉황은 벽오동이 아니면 내려앉지 않는다고 하는데 대봉대 뒤에 벽오동 한 그루가 심어져 있습니다.
대봉대에서 몇 걸음을 옮기면 오방색 담장에 애양단(愛陽壇)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습니다. 애양이란 말은 ‘효경’에 나오며 효(孝)를 의미합니다. 효를 상징하는 나무는 동백인데 과연 애양단이란 글자 근처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꼿꼿이 서 있는걸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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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쇄원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오곡문. 밑이 터져있어 계곡물이 들어올 수 있다.
애양단이란 글자를 끼고 왼쪽으로 돌면 오방색 담장이 계속 이어지는데 오곡문(五曲門)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지요. 오곡은 담장 밑으로 물이 다섯 번 굽이친다는 뜻인데 묘하게도 오곡문의 담장은 산에서 흐르는 개울을 막지 않고 아래쪽이 뚫려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식 정원의 백미지요. 오곡문 담장 바로 뒤에는 작은 우물 같은 게 있는데 이것은 이슬을 받아 마시는 곳입니다. 살펴보면 주변에 대나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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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 숲을 지나면 왼쪽 계곡에 광풍각이 보인다. 우리나라 정자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오곡문과 개울 사이로 외나무다리가 있는데 바로 옆에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살구나무는 무병장수를 의미하니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警告)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왼쪽, 즉 아래쪽으로 광풍각(光風閣), 오른쪽 즉 약간 비탈진 위쪽으로 제월당(霽月堂)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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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풍각은 정확히 한평쯤된다. 이 정도 규모가 공부할 때 가장 집중력이 생긴다고 한다.
광풍각은 한 평 공간으로 소쇄원의 백미입니다. 광풍각 앞으로 물결이 굽이쳐 내려옵니다. 그 물결은 봉황(鳳凰) 같은 물보라를 일으킵니다. 저녁이 돼 주변이 조용해지면 광풍각에 머문 이는 마치 일엽편주를 타고 바다를 주유하는듯한 착각에 빠지지요. 그야말로 신선이 따로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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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월당은 거주 공간이다. 맞배지붕이 하늘로 날아갈듯 날렵하다.
광풍각이 책을 읽는 연구 공간이라면 제월당은 이곳의 주인들이 거처하는 공간입니다. 광풍과 제월은 그냥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누군가 성리학자 주돈이를 가리켜 지은 시에서 나온 것인데 원문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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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소쇄처사 양공지려라고 씌여져있다. 아마 이렇게 멋진 문패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인품이 심히 고명하여 마음결의 깨끗함이 맑은 날의 바람(광풍)과 비 갠 날의 달(제월)과 같다.” 광풍각- 제월당쪽으로 가면 글씨가 보입니다.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양씨가 사는 집이라는 문패인데 세상에서 가장 멋진 문패지요. 광풍각 주변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어놓았습니다. 공부하는 곳에 잡기(雜氣)가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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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풍각 뒤로 작은 문이 나있다.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어진 것은 선비의 예절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뒤편으로 석류나무꽃이 피어있다.
그런가 하면 광풍각에서 제월당으로 가는 길목에 작은 문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이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리도록 일부러 만든 것입니다. 한마디로 공부하는 선비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예(禮)를 지키라는 묵언의 경고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뜯어볼수록 소쇄원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고와 의미와 상징들이 들어 있으니 소설가 댄 브라운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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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곡문 옆에는 동백이 심어져있다. 소쇄원의 모든 배치는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가 감탄하는 소쇄원은 조광조라는 500년 전의 개혁정치가의 좌절이 낳은 부산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광조가 전라도 땅에 남긴 것은 화려한 원림(園林)과 정자뿐일까요? 소쇄원 전문가 이동호씨는 그런 단정을 부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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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쇄원의 계류를 따라 꽃잎이 흘러가고있다.
“기묘사화를 계기로 많은 학자 선비들이 낙향(落鄕)하여 광주-장성-창평-화순-나주 등 요소요소에 정자류를 건립하고 은거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요 경세가인 정암 조광조의 유배 및 사약에 의한 죽음은 국가적-개인적으론 큰 불행이었으나 정암 조광조의 법통을 호남-창평이 이을 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씨는 “정암 선생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순수함은 백설(白雪) 그 자체였고 뜻한 바를 이루고자 하는 열정은 치열함의 극치였다”고 했습니다. 제가 “경상도는 서원이 많고 전라도는 정자가 많은 게 예향(藝鄕)이기 때문이냐”고 묻자 표정이 호랑이처럼 바뀌지요.
“누가 그런 무식한 소리를…. 그렇다면 경상도는 공부하고 전라도는 노는 곳이란 뜻인데, 앞으로 그런 말 하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마십시오. 예향은 예향(藝鄕)이 아니라 예향(禮鄕)이라는 뜻입니다. 무식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의 일갈과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 문득 조광조 선생이 삶을 마친 능주의 유허(遺墟)가 떠올랐습니다. 별로 찾는 이도 없는 유허에는 칠십대로 보이는 노신사가 안내를 해줬는데 알고 보니 광주에서 유명한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정년퇴직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조광조 선생에게 관심을 보이자 “잠깐 기다리라”더니 공책 같은 것을 들고 왔습니다. 본인이 조광조를 비롯한 화순의 자랑스러운 인물들을 정리해놓은 책자로, 요긴한 정보가 됐습니다. 이런 분들이 우리나라 곳곳에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졌지요.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