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추 감사 주일 강설
성도의 진정한 감사
시편 118:27-29
오늘 우리 교회는 맥추감사절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 절기는 옛 언약 시대인 구약시대 성도들이 지키는 것과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옛 언약 시대의 성도들이 지킨 맥추감사절이나 추수감사절 절기는 율법의 내용입니다. 율법은 맥추감사절이나 추수감사절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고 그 이유와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옛 언약 백성에게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옛 언약 시대 성도들은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 절기를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새 언약 시대의 성도인 오늘 우리는 옛 언약 시대의 성도들과 같은 방법으로 감사절 절기를 지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에 율법이 전혀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여전히 새 언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삶의 규범으로 서 있습니다.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
우리는 모든 율법의 근간(根幹)이 되고 도덕법인 언약의 열 가지 말씀, 즉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행하는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인 십계명을 통하여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고, 우리의 시선을 우리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처럼 새 언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절이나 추수감사절 절기를 지킬 때 옛 언약 백성들처럼 농사지어서 얻은 소출을 가지고 열매를 얻을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지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농사를 짓는 분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구약의 성도들처럼 보리농사를 비롯하여 여러 작물의 씨를 뿌리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수확할 수 있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맥추감사절 절기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맥추감사절 절기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의 식탁에 올라 있는 모든 음식은 누군가가 농사를 지었고, 우리는 그것을 돈을 주고 사서 조리해 놓은 것입니다. 지금 1년이 넘도록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세계의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여서 곡물들이 수출되지 못하니까 세계 곡물 시장에서 거래되는 곡물값이 치솟고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음식의 비용도 치솟고 있습니다. 이처럼 농사와 소비는 연동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직접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그것을 내가 돈을 주고 사 먹는 것이니까 내가 농사짓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식탁을 대할 때마다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하고, 날마다 육신의 양식과 영의 영식을 풍성하게 내려 주시기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금 년 한 해를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것도 필요합니다. 율법에서 말하는 맥추감사절 절기는 오늘날 삶의 규범으로서 이렇게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는 지난 6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풍성하였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고난 속에서 힘든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삶에 불만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경험한 성도들은 이 맥추감사절을 통하여 지난 6개월 동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자는 말이 실감이 날 것이고, 여전히 고난 속에서 힘든 삶을 사시는 분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맥추감사절이 하나의 절기로만 다가와서 형식적으로 지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복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을 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는 복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왔기 때문에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시인은 고난 속에서고 감사의 노래를 하고 있다
오늘 우리의 설교 본문인 시편 118편을 지은 시인은 고난 속에서도 구원에 대한 감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날마다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감사를 외적인 조건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이고, 연약한 신앙을 대변해주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라는 말씀과 이어서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이 말씀을 공감하고 이해를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산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의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성숙한 신자입니까? 자기의 구원에 대해 확신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성숙한 신자입니다. 자기 삶의 원천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성숙한 신자입니다. 자기 삶의 원천이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자기 삶을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성숙한 신자입니다.
이와 같은 성숙한 신자는 감사의 조건들을 자기 안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온갖 죄악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찾지 않습니다. 성숙한 신자는 감사를 창조와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에게 감사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고난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해서 감사할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감사할 것이 많이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해 있어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시선을 자기에게서 하나님께 향하게 되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이 모든 것들이 다, 심지어는 이 땅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게 될 때 비로소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손경민씨의 “감사”라는 찬송의 가사입니다. “오늘 숨을 쉬는 것 감사, 나를 구원하신 것 감사, 내 뜻대로 안 돼도 주가 인도하신 것, 모든 것 감사, 내게 주신 모든 것 감사, 때론 가져가심도 감사, 내게 고난 주셔서 주 뜻 알게 하신 것, 모든 것 감사, 주님 감사해요(×2),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은혜입니다. 주님 감사해요(×2), 나를 사랑하신 주사랑 감사합니다. 항상 주 안에 있음 감사, 참된 소망 주심도 감사, 나 같은 사람도 자녀 삼아주신 것, 모든 것 감사, 주님 감사해요(×2),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은혜입니다. 주님 감사해요(×2), 나를 사랑하신 주사랑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고 우리가 늘 부르는 찬송입니다.
손경민씨의 또 다른 찬송인 “은혜”라는 찬송가 가사입니다. “1절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2) 후렴: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의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였소. 2절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지내 온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보존 가운데 살아온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눈에서 벗어나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삶을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또 우리 하나님은 능력에서도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와 긍휼하심과 능력의 무한하심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영원한 죄의 구렁텅이인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구원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하셔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간혹 이 땅의 부모들 가운데는 자기 자식을 버리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언약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언약의 자녀인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설령 우리가 죄를 범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죄를 이미 당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양어깨에 메어서 지게 하여 주심으로 우리에게서 더는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서 이르게 하시고 영원히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나서 일어나는 아무것도 없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난 우리의 삶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저는 앞에서 사실 오늘 우리에게 감사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원래 감사할 것이 많이 있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해 있어서 감사할 것들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감사할 것을 찾아본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그 자체부터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 자신을 뒤돌아보시고 그다음에 눈을 들어서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눈을 뜨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까?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멀리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예배하러 이곳에 오기 전 몇 시간 전의 여러분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까? 잠시만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고 추한 사람인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얼마나 수많은 죄로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크고 위대하시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복 받는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여기에 나올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고 터럭만큼도 없음에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아서 하나님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어디 그것뿐입니까?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소유하였다는 것을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으로 지금 실증(實證)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가 우리의 감사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은혜를 풍성히 깨닫고 사는 사람은 손경민씨의 두 찬송의 가사처럼 모든 것을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였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하신 말씀이 절절히 가슴에 와닿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의 감사 내용
시편 118편의 저자는 오늘 우리 설교 본문인 27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라고 고백하고 28절에서는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먼저 27절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라는 말씀은 ‘여호와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외에는 참 신(神)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의미는 여호와는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고, 이 세상에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역사를 당신의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역사가 진행되어 가면서 당신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를 시간과 공간으로 점철된 이 역사 속에서 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죄로 인하여 형벌을 받아서 죽어야 하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서 구원을 얻고,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를 이 땅에, 이 역사 가운데 두시고 살게 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런 경험을 한 모세는 “…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1-2)라고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오늘 우리 설교 본문 28절에서는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오늘 우리 설교 본문 27절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라고 하였고, 이어서 28절에서는 27절에서 말한 “여호와”는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심으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하나님이신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시인이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신 그 자체에 감사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신 것만으로도 감사의 조건이 충분하고도 넘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인처럼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신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것에 감격하고 계십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며 사는 것보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내 생명을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는 그 무엇도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나님이신 것만으로 고통 가운데도 너무도 감사하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잠시 말씀을 드렸듯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 위대하시고 절대로 의로우셔서 죄인인 우리가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죄와 사탄과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가 가져다주는 몸의 죽음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곧 영원한 형벌인 지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셔서 영원한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회복된 우주 만물을 영원히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고, 온갖 죄악으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우리를 살리시고 씻기시는 구원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빛나게 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 회복하여 주심으로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지금 나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설령 이 땅에 내 생명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원히 찬송하며 살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이뿐만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代贖)의 피를 흘리신 그 피를 통하여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바 아버지, 즉 우리의 아빠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었고 그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새 언약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자체가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 자체가 우리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이 세상에 이보다 크고 기쁘고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런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그 자체가 복음(福音)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이 놀라운 일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 주시는 것이 없어도 주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 우리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잠시 이 세상을 떠나서 살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 되시기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탕자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1-39에서 하나님과 자녀인 우리는 관계는 언약에 기초한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고 그 어떤 것도 끊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것들, 곧 썩어지고 없어질 것들에만 관심을 두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 감사절에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언약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십니다(마 7:7-12). 따라서 오늘 내가 바라는 것이 아직 나에게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셔서,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것들로 채워주려고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현재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아무나 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인은 오늘 본문 28절에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하나님은 저의 하나님이시고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양무리 가운데서 인도하시는 것이 분명하지만, 양무리에 속해 있는 양 하나하나의 이름을 다 아시고, 양의 이름을 부르면서 인도하시고, 양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양우리에 넣으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여 주십니다.
자, 여러분, 이제 우리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정직한 눈으로 우리의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시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것들을 헤아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시는 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시고 나를 구원하여 주셔서 죄로부터 나를 깨끗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기는커녕 뒤돌아서기만 하면 죄를 범하고 살았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여러분을 감사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죄의 삯이 죽음인데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도 주셨고, 일하여 먹고 살 수 있는 직장과 사업장도 허락해 주셨음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인생의 짐이었던 문제를 해결해 주셨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과 물질의 어려움과 기타 여러 가지로 어려움 가운데 놓였었지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지난 6개월 동안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만을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이루기를 원하시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려움으로 인하여 고통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는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또 다른 일을 이루려고 하시는 또 하나의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이제 손경민씨의 두 편의 찬송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다음에는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면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 그만큼 자란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하나의 매개체 혹은 수단에 불과한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정말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아주 작은 것을 보면서 그 뒤에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늘에 계신 위대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오늘 내 삶 속에서 어떤 분이신가가 경험되어지고, 하나님이 나와 언약 안에서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래서 내가 언제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수 있어서 내 마음의 고민과 막막한 내 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나를 이해해 주시기를 간구할 수 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함께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을 주신 그 자체가 참으로 크고 놀라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런 사실을 아는 시인들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하며 고난 가운데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시 103편, 106편). 그리고 시인은 시편 73:25-26에서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라고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2023년을 맞이하였고 6개월 동안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6개월 동안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지 못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고백했을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을 돌이켜 보고, 내가 지은 죄를 돌이켜 보면, 지옥에 떨어져도 수백 번 수천 번 떨어질 수 있는 삶을 살았음을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은 오늘 여기에서 이렇게 숨을 쉬고 살아있고, 전능하시고 엄위로우시고 절대로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 있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고, 영원한 천국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자체가 벌써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우리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피로 언약의 증거로 삼으셔서 우리를 언약 안에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자체가 벌써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가 비록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믿음이 있었음에도 꺾이지 않는 연약한 신앙을 가지고 살았어도 이 세상의 파도에 완전히 휩쓸려 가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주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계속 유지하게 된 그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은혜이며, 이 은혜는 우리의 감사를 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은 이 세상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나 이 세상 사람들은 돈 버는 재미도 알고 이 세상의 즐거움을 맛보아서 기쁜 것은 다 알지만, 하나님 자신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 때문에 어려운 삶 가운데서도 만족을 누리는 이 기쁨은 세상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공개된 비밀입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감사하는 절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린 사람답게 금 년 남은 6개월 동안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복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도무지 주지 못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빌 4:4-7). 이것은 우리만이 아는 공개된 비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면 주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 살아갈 때 지금 견디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 놓여 있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아무리 힘든 일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포기하고 싶은 일을 만나더라도, 주님 밖에서 형통하는 삶보다 주님 안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잘 견디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의 은혜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 진실한 믿음은 고통 속에서 더 빛이 납니다. 진정한 성도는 사도 바울과 같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라고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고백이고 감사를 아는 성도의 삶입니다. 아멘.
(2023. 7. 9 주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