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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와 제자도 세미나 2 (2021.07.09)
이 교훈은 너무나 중요하다. 저는 아무래도 교회와 교단, 선교사, 목사, 이런 다양한 이야기들을 같이 비교하면서 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면이라면, 굳이 몰라도 되는 면을 알아야하니까, 오염될 수 있는 위험이 있지만, 오염의 위험은 또한 면역의 기회가 된다. 균에 오염되는 찬스는, 면역력이 증가되는 것이다. 점점 강해지는 사람에게는, 오염의 기회가 강해지는 기회가 된다. 똥을 만져도 감염에 안 걸린다. 그만큼 내성이 생기고, 면역력이 생겨서 강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순수하지만 또한 강해져야 한다.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뱀처럼 교활해져야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제자도의 그 영역이다.
제자도는 하자크 하자크, 강해지는 것이다. 여호수아를 사모하는 것이다. 강해지는 것이 어느날 갑자기 되는게 아니다. 저는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좋아하는데, 제가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그 이름을 좋아하고, 군대 스피릿을 좋아한다. 제가 군생활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도 군대 이야기를 해서, 전방에서 1년을 장교로 근무하고, 39개월의 군생활을 했기에, 병역 문제로 시비걸릴 염려가 전혀 없다. 저는 군대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좀 가정적인 분위기와는 덜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토라는 결국 마토트 마쎄이라는 것은 군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군인이 된 사람들은 토라의 완성, 출애굽을 이야기하고, 입-가나안을 이야기한다. 그 준비가 신명기에서 끝나는데, 마토트 마쎄이에서 이미 요단 동편을 정복하는 전쟁이 시작했고, 이들은 이미 정복자로 변했다. 마토트란, 마테는 지팡이면서, 권위, 이런 뜻을 가지는데, 그 권위를 바브, 타브로 완전함에 도달하게하는 권위의 사람들이 되기 때문에, 마토트 기간에 이스라엘 군대가 이전과는 다른 군대적 강함을 보이는 때가 온 것이다.
지난번에 Standing order,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가르친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이런 Great commision에서 C가 빠지기 때문에 Omission이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 단어 하나하나는 굉장히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이기에, 우리가 계속 묵상을 해야하는 것이다. 저는 그 단어에 방점을 찍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제자도 주간에 단어들 하나하나들이 빛을 발하는 단어로 다가올 것이다. 이 제자도의 비전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특별히 선교사로 헌신한다는 사람들은, 마28:19-20절을 하나님의 레마의 말씀으로 받고, 난리를 치고, 훈련을 받는 것이다.
토라의 지향점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라는 것인데, 제자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앞의 과정을 무시한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외면에서 내면으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한다.
제자도의 시작은 생명의 탄생, 성장이다. 오늘 제가 커버할 영역이, 여러분들은 이미 알기 때문에, 초보자들이 들어야하면 5-6시간의 강의를 호로록 커버하는 것이다.
< @@ 생명의 탄생 + 성장 >
제자삼으라 = 제자 창조 = 창조 명령 (무->유)
우리가 지난 주에 이야기한 것은, Standing order는 제자 삼으라는 제자 창조 명령이다. 없는 것을 있게하는 것,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이가 없었는데, 순열이와 정아의 결혼을 통해서 아이가 생겨났다. 무에서 유가 나타난다.
우리는 영적 생명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를 중요하게 커버할 것인데, 거듭남의 영역이 상당히 예민한 주제이다. 몇년 전에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끝나고나서 혼동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던 기억이 있다. 오늘은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것이다. 그때만해도 현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기에, 본질적인 이야기가 많이 빠져있는 것을 알았다. 생명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제자도에서 토라로 들어간 사람들은 외면에서 내면으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가기 때문에, 성숙에서 성장으로 가는 것과 조금 다른 면이 있다. 토라로 가면 안에서부터 성숙함을 일궈서, 결과는 마찬가지지만, 내면과 외면이 다 채워지는 것이지만, 접근 방법이 이방인들은 외면에서 내면으로 들어가기에 조금 다른 접근 방식이기에, 그 사이에 갭이 있다. 교회에 더해지는 사람들도 이방인들로서 내면의 채워짐이 전혀 없는 사람이 이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다면 휑해질 것이다. 내면의 이해력과 언어의 컨셉이 없는 사람들이, 당장 단독자라는 말 자체가 뭔지 모를 것이다.
1. 거듭남의 실제 (-> 생명을 줌)
그래서 우리는 이제 거듭남의 실제, 거듭남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거듭남이 사실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본질 자체가 영의 이야기이기에, 그럼에도 영의 생명이라는 말을 안 붙이면, 육신 안에 있기 때문에, Physical한 것과 혼동해서 붙일 수 밖에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spiritual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Physical과 혼동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붙이는 것이다
살리는 것,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라고 지난 시간에 배웠다. 생명은 영이다. 이것이 어떻게 실제로 나타나느냐? 성경 안의 이야기를 좀 보겠다.
1) 성경 안의 Story
a) 니고데모 : 거듭남에 대한 Teaching
제일 유명한 것이 니고데모 이야기이다. 오늘 세 스토리를 리뷰할텐데,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거듭남의 필요에 대한 가르침이다. 즉, 거듭남에 대한 티칭이다. 티칭을 받고 알아내는데, 그것이 카프를 통해서 적용되고 실제화되지 않으면 티칭 가운데 머무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실제 육신의 삶 가운데 사는 동안에 아무런 유익을 발휘하지 못한다. 티칭이 필요하지만, 티칭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시작이다. 의학을 배우는 것은 시작이고, 수술로 생명을 살려내야 그것이 유익이 있는 것이다. 도를 배우고, 토라를 배우는 것은 다 생명을 낳기 위한 실제적인 카프의 열매들을 위해서 시작하는 과정이다. 그 유명한 말씀이다.
니고데모 -> 평생 종교인
니고데모의 스토리는 거듭남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니고데모가 누구인지 잘 안다. 평생 종교인이다.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성경에서는 종교인을 중심으로 되어있는데, 사실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다. 이방인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정말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도 아니었다. 토라를 알고, 토라 안의 규칙의 삶을 일정 기간 대대로, 3-4대 크리스천이었다고 할지라도 100-200년이지, 6000년 동안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가고 살아온 민족과 비교가 되겠는가? 아무리 토라를 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스라엘을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봤자 이방인이다.
우리는 그 평생 종교인으로 하나님과 관계한 그 사람에게, 거듭남, 네가 거듭나야한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토라적인 어법은 항상 이렇다. ~하지 아니하면의 부정의 부정으로, 분명한 관점을 가져다준다. 그렇게하지 아니하면 절대로, 라는 어법을 많이 쓴다. 내가 많이 하고 있는 것을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니까, 부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있는 나를 보게하는 것이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 그랬을 때 이 사람의 대답을 잘 알 것이다.
요3: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영 vs 육
영과 육의 대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어법에서 사람이.. 라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다 육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 늙으면? 이 사람은 평생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육 안에 갇힌 상태이다. Shut in the flesh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쭉 진행되어서, 주님은 육에 갇힌 상태가 어떻게 영으로 거듭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식, 가르침, 티칭을 주셨다. 그런데 결과를 아실텐데, 티칭을 받았다고 다 되는게 아니다. 니고데모를 티칭을 받고, 나중에 예수님에 대해 유대인들이 나쁜 말을 할 때, 예수님을 defend하는 발언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는가? 그것은 다 종교의 본질이다. 티칭만 받은 사람과, 그것을 성취한 사람의 차이는 Defender냐, Offender냐이다. 티칭을 받아서 내가 안다고 수비적인 태도로 대처하지만, 성취한 사람은 굉장히 Offensive하다. 오늘 쿠웨이트 교회에서 데이빗 형제가 엄청난 도전을 하는데, 그것은 그 형제가 자기가 그 순종을 했기 때문에, Offending한 말들을 성도들에게 마구 뱉어내는 것이다. 예쉬뿌라 사역을 하러 갈 때, 제가 지독하게 형제들을 도전하기 때문에, 일주일 내내 사역을 하고, 인도 형제들은 일주일 휴가 받는게 전체 휴가인데, 그것을 다 내놓으라고 하고 사역을 했는데, 7일째 밤에 풀어줬다. 오늘 가서 엄마한테 인사하고 내일 가자. 이 형제는 그것을 기꺼이 Sacrifice하면서, 그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기적을 나누더라. 8시에 풀려났는데, 빨리가는 자전거를 타서 마침 버스가 딜레이되서 출발해서 얻어 타서 가까스로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육신의 부모를 떠나 너의 Priority가 뭐냐는 주제로 설교하는 것을 제가 들으면서 은근히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순간들을 이 형제가 겪어냈기에 강해졌고, 강한 도전을 하니까 사람들이 강한 사역을 할 수 있게 강해지는 것이다. 이런 강한 이야기를 하면 좀 그렇긴 하지만, 8주년이니까 이제 좀 강해져야 한다. 우리는 정말 생명을 낳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
이 니고데모는 그렇게해서 좋은 티칭, 좋은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듭남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제자도를 하는 생명을 낳는 목적에 관한한, 좋은 티칭을 받았지만, 거듭나지 못했다. 최고의 티칭을 받았다. 요3장의 멋진 말씀 한절한절이 엄청난 내용이지만, 평생 토라를 공부하고, 산헤드린 지도자인 그 사람이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듭남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분이 이스라엘의 지도자 중 토라의 많은 것들을 암송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Defend 했더라도 결국 거듭나지는 못했다. 그러면 우리는 뭔가?
3) 사울 : 3번 반복
우리가 봐야하는 케이스는 사울이라는 사람이다. 사울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구약의 사울 말고, 신약에서 사도바울로 변화된 사울이라는 사람이다. 가장 극적인 이야기이고, 사도행전에 최소한 세 차례 스토리가 있고, 본인의 두번 이야기까지, 사도행전에서 세번 반복이 된다. 그만큼 중요하다, 최고의 패턴이라는 것이다. 사울의 스토리는 거듭남에 관한한 The best pattern이다. 가장 위대한 모범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넘어감의 사건은 이와 같으면 최고의 것이다. 나 같으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 저는 이와 같지는 않더라도, 유사한 경험을 해서 거듭났다. 어떤 실수를 범하냐면, 그것은 사도바울이라는 위대한 사도를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건이지, 나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생각으로 지레 겁을 먹고, 사도바울과 자기의 선을 그어버린다는 것이다. 토라를 읽을 때 그런 식으로 보면, 그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서 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영 안에선 하나님의 패턴 자체는 모두 우리가 사모하고, 고대할 수 있는 최고의 점수를 주었다는 것이다. 하늘이가 최고의 admirable score를 만들었으니까, 또 그 패턴을 따라 가는 것이다. 처음에 누가 어떻게 가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사도바울의 이 스토리가 너무 중요하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동떨어진 이야기로 여기지 마시기 바라고, 정말 내가 저런 과정을 거쳤으면. 하는 질투하는 마음으로 생각해보자.
행22: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 사람도 평생 종교인이었다. 자기 열정에 갇혀있었다. 자기 열정에 가득 찬 사람이다. 이건 말도 안돼. 어떻게 우리가 몇천년 동안 배우고, 지켜온 것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내가 어떻게 이것을 배웠는데, 이상한 자가 나타나서, 저런식으로? 저건 안돼. 저건 이상한 사람이야. 열정으로 믿는 이 토라주의자가 저 이상한 사람을 무엇으로 봤겠는가? 괴뢰, 괴수, 이단이라고 했다. 왜 이단 괴수라고 했는가? 초자연적인 이상한 신비주의적인 일들을 하는 것이다. 귀신이 나가고 말이다. 신비주의이다. 그래서 저건 이단이다. 라고 해서, 옥에 넘기고, 이에 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이걸 한국어로 하면 유대 신비주의라고 하고, 사전으로 찾아보면 카발리즘이라고 한다. 여러분들은 이런 영역들에 대한 비교지식이 별로 없기에 놀라지 않겠지만, 굉장히 위험한 단어들을 제가 쓰고 있는 것을 아시는가? 유대 신비주의, 카발리스트, 이단, 이런 말을 쓰는데, 그래서 안된다고 해서 공문을 받아서 이단들은 없애버려야 한다고 가고 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가는 중에 이런 일이 있는 것이다.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하늘의 큰 빛 -> 소리(대화) : 신비주의 <-> 은사주의
하늘의 큰 빛, 그 뒤의 이야기는 알겠지만, 소리, 대화, 전부 신비주의적인 것이다. 제가 이것을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는, 토라를 배우면서 신비주의와 여러분들이 혼동할만한 어떤 것, 이것은 거듭남과 굉장히 관계가 많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데, 소위 은사주의, 카리스마틱과 혼동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토라를 배우다보면 은사주의로 시작했던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과거에 자신이 느꼈던 은사주의적인 것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자칫 신비주의적인 소망 자체도 버린다는 것이다. 인카운터를 하면 신비적인 경험들을 하신다. 빛도 보고 말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큰 빛을 본적이 있는가? 소리를 개인적으로 들으신 기억이 있는가? 들으면 좀 이상해지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정말 당황했다. 물리적으로 빛을 경험하고, 자기가 Understandable, physical한 귀로 들리는 언어를 듣는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신비주의적인 경험이다. 제가 쿠웨이트에서 사역을 하는데, 중국 자매님이 너무 믿음이 없었던 사람인데, 자기 이름 부르는 소리를 실제로 듣고, 자기 남편이 부르는 줄 알고, 목사님도 부르는 줄 알고, 세번째 되어서야 하나님의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나서야 그 사람의 삶이 완전히 급진적으로 변화된다. 이런 거듭남의 영역에 관한한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경험을 결코 멀리하지 마시라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기를 사모하라는 것이다.
거듭남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것들을 많이 느꼈다. 술주정뱅이에서 갑자기 경건주의자로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바뀐 이유는, 이런 신비주의적인 경험을 통해서 급진적인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거듭남의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땅에 엎드린다. 결론은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는 다른 것이다. 은사주의는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만, 신비주의는 사모해야 하는 것이 결론이다. 거듭남을 경험할 때, 이런 신비주의적인 경험들이 Un-forgottable,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겨 줄 것이다. 이것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물론 우리는 토라를 배워야하고, 훈련을 받아야 하고, 여러가지 계속되어지는 진리의 세계를 배워야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한 것이 이와 같은 신비주의적인 경험이다. 이것은 이단도, 괴수도 아니고, 이렇게 여정적으로 주님을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을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는 강한 능력을 가진 Breakthrough experience이다. 이런 돌파하는 경험을 해버리게되면, 그 다음부터 말씀에 대한 태도 자체, 목사님에 대한 태도 자체가 완전히 변화된다. 그래서 Struggle, 의심하지도 않고, 대놓고 반대하지도 않는다. 혹 경험해보신분 있는가?
이런 경험들은 마태복음에도 예수님이 이런 신비주의적인 경험을 일부러 제자들에게 시켜주신다. 변화산 상의 사건이 이런 것들이다.이것들이또 뭘 가져다주냐면, 그건 유대 신비주의라고 말한다면, 맞아요, 하지만 은사주의는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누가 그걸 반대하면, 예수님은 유대 신비주의자였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린 그런 세계를 통해서 거듭남을 경험하는 그런 사람들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런 변화를 앙망하는, 고대하고 사모하는 이런 사람들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신실하게 남아야있어야 하고, 매일 배워야하지만, 동시에, 이 질긴 육신의 끈이 안 끊어져서, 한탄할 때가 있다. 이런 경험 한번 하면, 질긴 육신이 어딨는가? 육신의 어떤 것들이 내면에서 완전히 끊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주님은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셨지만, 우리 중 누구에게라도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c ) 우물가의 여인 : 이방인취급 = Jesus Encounter pattern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인카운터하는 경험을 통해서 거듭나는 경험을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인카운터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아버지, 죄, 치유,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인카운터를 하는 이유는,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 인카운터를 통해서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영의 거듭남을 경험하기 위하여 인카운터를 하는 것이다. 토라, 영의 지식을 많이 배우지만, 사실 진정한 거듭남의 경험을 못한 사람들은 이것들이 계속 지식에만 남아있던지, 변화가 더디던지, 갈등만 하고 있던지, 끊임없이 도돌이표만 하고 있지, 강해지고, 성장하는 것들이 약하다는 것이다. 변화가 적고, 성장하지 않고, 강해지지 않다고 하는 것은, 거듭남의 분명한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 여인은 굉장히 급진적 변화를 경험한다.
요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네가 내 정체성을 알았다면, 하나님의 선물과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 예수님 정체성 : 아니 후
하나님의 선물은 생명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 내가 누구? 아니 후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이 유명한 대화를 아실 것이다.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는 것은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김멜이다. 로쉬 피스가에서 피스가는, 숨겨져있는 그 사람의 김멜을 싸멕해주는 것이다. 도대체 이 여인이 뭘 원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주님이 피스가, 측정해서 말해준 것이다. 네 남편을 불러와라. 간단하게 네 남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남편이라고 하는 영역에 이 여인의 모든 비밀이 다 담겨있다. 이 여인의 김멜은 남편의 영역이었는데, 그것을 페 해준 것이다. 이 다이나믹을 이해하시는가? 그러니 이 사람이 꼼짝 못한다.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이게 다 예수님의 정체성 이해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지식으로 아는 것인지, 경험으로 아는 것인지 말이다. 당신이 진짜 아버집니다. 이런거 경험하셨는가? 이게 정체성을 아는 것이다. 그분이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해서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진짜 아버지니까 아버지라 부른 것이다. 완전히 다르다. 정체성을 안다는게 그런 이야기이다. 완전히 변화된다.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김멜의 가장 깊은 층까지 도달하다보니까, 모든 사람의 김멜의 가장 깊은 곳에 창조주를 만나고자하는 소망, 그 김멜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들은 지식을 가지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인카운터를 할 때 이 영역을 건드리니까, 거기서 예수님이 누구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나의 죄와 연결이 딱 되면서, 정처없이, 하염없이, 시간 제한없이 울고불고, 데굴데굴 구른 경험을 한 것이 바로 이런 경험이다. 그분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이해, 연결, 적용, 경험이 그때 되는 것이다. 그런 경험들을 다른 교회에서 해본 분들은 꽤 있을 것이다. 보통 중고등학교 때 수련회 때, 이유도 모르는데, 목사님이 치니 울며 구르다가 오늘 이때까지 와 있는 사람 말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주님이 정체성에 대한 직접적인 계시를 한 것이다. 아니 후. 내가 그다. 이건 이미 다 들으신 것이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야기한 아니 후 말이다. 이런 계시를 받으셨는가? 어쨌건 이것은 다 초자연적 계시이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만난 것 자체가 초자연적인 것인데, 그 여인에게는 자연적인 것이지만, 동일한 원리를 따라서 우리 안의 깊이 내재된 김멜의 영역이 깊이 터치될 때, 거기서 예슈아란 사람이 누구인가, 그분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극적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게 거듭남의 본질이고, 생명을 주는 본질이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각적인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의 급진적인 변화, Immediate change and radical transformation이다.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이 급진적인 변화를 한 사람의 패턴이다. 거듭남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갑자기 물 속에 있던 애가 태어나면 왕 하고 울면서 생명의 태어남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는 것처럼, 거듭남은 이런 급진적 변화는 종종, 아니 원래는 항상 보이도록 되어있는데, 과연 그런 스토리가 여러분에게 있는가? 있다면, 또 만들어낼 것 아닌가? Repeat and reproduction이기 때문에,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또 그런 경험을 하는 제자를 만들어내게 되어있다. 세 이야기는 성경에 거듭남을 정리하게 해준다.
2) 성경의 거듭남
a ) 개인적 사건 : 항상 사모, 자체가 구원은 아님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거듭남이란 Individual experience, 개인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절대로 바드로 살아선 안되는데, 놀랍게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듭남은 Individualize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체로 거듭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람 한 사람 거듭났다. 다메섹 도상에서는 사울과 같이 가던 일행이 다 있었지만, 사울 한 사람만 거듭났다. 거듭남보다 하나가 되는 것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거듭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순서를 잘 알아둬야하는 것이다. 하나가 되게 하려면, 그 육을 꺽어야하고, 별별 사건을 다 경험해야 하지만, 거듭남의 사건은 항상 사모해야 한다. 전체에 붙지 않아도 언제나 사모해야 할 것이다. 아기는 하나씩 탄생하지, 여럿이 단체로 탄생하지 않는다. 한 사람씩이다. 물론 거듭나는 것 자체가 구원은 아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사용하라는 것이다. 거듭남 한 사건이 구원 자체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건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는 생명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받으시기 바라고, 그렇게 때문에 거듭남이라는 사건 자체가 너무너무 분명한 Individualized된 사건으로 우리 삶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삶에 분명히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점진적이던지, 급진적이던지, 이 사건이 명백하게 매듭지어져서 여러분 안에 있어야 한다. 다 바울이나 우물가의 여인같이 되진 않는다. 다음번에 현실에서 어떻게 되는지 측정할 수 있는 지혜를 이야기 해주겠지만 말이다.
b) 거듭난 사람 -> 에하드가 된다
그래서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이 에하드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가다가 에하드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면, 결국 이 확실한 한 번의 사건이 분명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그 사람이 신학교를 졸업했던, 선교사를 평생 했던, 많은 사역을 했던 다 상관없다. 이 에하드의 관점을 이해하고, 하나됨의 사건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이 거듭난, 분명한 사건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누구도 마찬가지이다. 에하드가 되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바드로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이 차이를 분명히 이해하셔야 한다.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결국 5-10년 가다가도 떠나는 것이다. 저는 가슴아픈 많은 경험이 있기에, 눈물로 아버지, 스승, 선생, 목사, 별별 호칭을 다 받았지만, 그분들이 다 훌륭한 목사님과 선교사님들이었다.
여러분들이 목사님, 선교사 타이틀 없어도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Un-imaginable miracle이다. 여러분들은 이 은혜의 분량이 뭔지 모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위대한 선교사들이 거듭나지 않은채 바드로 평생 고생만하고 인생을 끝마치는지 말이다. 거기에 비하면 불행한 한 삶을 50세 이전에 마친 한 여자가 완벽한 죽음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정말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굳이 일반 교회를 가실 일도 없겠지만, 다 그렇다. 그래서 개인적 사건이고 거듭난 사람들만이 에하드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c )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기적 : 계시, 빛, 예수와의 만남
Un-explainable, 설명 불가능한 기적이다. 계시, 빛, 이런 것들을 포함한다. 이 포함하는 것 자체가 거듭남의 사인, 타브를 찍어준다는 것이다. 사울, 바울, 이 사람은 이것 가지고 로마의 죄수로 끌려갈 때, 아그립바 왕에게 또 간증한다. 저는 제가 경험한 89년 2월의 사건을 끊임없이 간증하고, 책에도 쓰고, 또 이야기하고, 버스 안에서 회개했던 그 사건을 필요하면 계속 이야기한다. 수백번 이야기했지만, 다 안다 하더라도, 아는 것도, 그 시점에 이것이 그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카프로 이야기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기에, 그랬는데 이제 알겠네요, 이제 그것을 경험해서, 자기에게 카프해서 적용해서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런 신비주의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의 사건들을 절대 무시하거나 미루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사모하시고, 그러는 것들을 좀 주세요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토라는 공부하는 것이다. 토라 공부와 대체할 순 없다. 은사주의의 능력을 가지고 진리의 분량을 절대 대처할 순 없다. 단, 진리의 분량을 아는 것만 가지고,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3층천까지 올라간 이야기를 하고 있고, 요한은 마지막까지 그 많은 비전과 초자연적 사건들, 물론 그것들은 레위기, 토라와 그대로 연결되어있지만, 그 현상 자체는 신비주의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였다는 것을 상기시켜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와의 만남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시면 어떻게 반응하실 것인가?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만났던 사건을 떠오르면 감격, 경험과 이런 느낌, 그런 것들 때문에 가슴이 저려오고, 이런 것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느낌이지만, 말로 설명이 안되는 어떤 것들이다. 그래서 참 성경에도 사도바울의 사건이 있지만, 엄청난 양의 초자연적인 것들을 현상만 써놨기 때문에, 우리가 그때 사도바울이 경험했을만한, 그 내면의 우주가 흔들릴만한 어떤 것들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제가 89년 2월에 내 인생 전체가 쉐이킹당해서 와르르 무너졌다는 것을 책에 쓴적이 있었던 것 같다.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다 부숴버렸다.
2. 거듭남의 측정
성경의 거듭남의 사건들이 이런 것들을 포함한다고 하면, 우리는 거듭남을 측정하고, 이것들을 잘 체계적으로 정리해놀 필요가 있다. 사역을 할 때도 거듭남의 측정의 원리는 항상 알고 있어야 한다. 오늘 이것을 가지고 조금 더 심화된 지식으로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예수님의 정체성 -> 이해/믿음/적용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 믿음, 적용의 경험이 있는가?
행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무리들을 죽이려고 쫓아간 그가 그들이 하는 복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그것을 적용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그 여자로 물동이를 버려두고,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거듭난 첫 번째 증거이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경험으로, 믿음과 인식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이 뭔지, 아들이 뭔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마음으로 믿음으로 그것을 말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다. 어떤 집사님이 공부하시고 결론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어요! 그 책 좋은 책이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해주는 많은 책들이 있다.
2) ילד 얄라드 : 배움에 종속 = 3T
요드는 하나님의 인식 에너지를 이야기하는데, 정말 이 사람이 인식 에너지로 인하여 배움에 종속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배우려 하느냐이다. 말씀을 배우려 하시는가? 하나님의 지식 에너지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배우는데 종속되는가? 거듭난 사람은 틀림없이 배우는데 종속되어있다. 또 배우려고 한다. 그래서 여기에 3T를 넣었다.
a ) Teachable
Unteachable한 사람이 굉장히 많다. 누가 가르치려고 하면, 다 안다고 한다. 배우려고 하질 않는다. 그런데 거듭난 사람은 Teachable하다. 배우려는 태도를 유지하시기 바란다. 물론 우리는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배우기 전에는 가르칠 수가 없다.
b ) Trainable
그리고 훈련받으려고 해야한다.
c ) Tamable
길들여져야 한다. 야생마가 아무리 좋아도 길들여 지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을 뒷발로 차서 죽일 뿐이다. 종자가 좋은 개들이 집에 와서 비싸게 데려왔더니, 너무 좋은 사냥개가 되어서 집에 있는 애기 목을 물어서 죽인다는 것이다. ת
teachabe, trainable, tamable, 거듭난 사람의 얄라드란 3T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르칠 수 있고, 훈련시킬 수 있고, 길들여져야 한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다. 끊임없이 Rebellious할 것이다. 그것을 홍당무, 채찍으로 훈련시키는 사람이 아버지이다.
3) response change, 반응 변화 : 빛
상황에 대한 반응 변화이다. 성품 변화인데, 반응 변화인다. How to response가 변화되는 것이다.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 다른 방법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Animal respond했으면, human response하는 것이다. 자기도 모를 때 동물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아는가? 먹을 때 치우면, 소리지르고, 깨물고 한다. 동물이다. 밥 먹어야 하는데, 안 주면, 뒤집어 엎고, 반찬이 이게 뭐냐고, 동물이다. 사람이라면 생각을 한다. 하나님을 인지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즉각적인 동물에서 사람으로 변화된 반응의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즉각적이지 아니하며, 육신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에서 영적이고 사고적인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이게 사람이다. 생각을 한다. 오늘 반찬이 없는데, 아내가 바빴구나, 내가 돈을 안 벌어다줬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이게 반찬이 뭐야? 차는 것은 짐승이다. 이런 반응의 변화가 빛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당신 변했네, 이런 사람이었어? 이런 것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몸 안에서 타오르는 촛불과 같은 따끈함, 기쁨, 그런게 있다. 맨날 티격태격, 동물같이, 개와 닭과 고양이와 싸우듯이 으르렁거리던 사람이 변화된 태도를 통해서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다. 사람의 분위기가 바뀌고, 그 가정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 특징이다. 아직 성장하지 않았어도 말이다.
변화의 피드백이다. 너 정말 변했구나하는 이야기 들으신적 있으신가? 이건 일부러 되는게 아니다. 거듭났기 때문에, responding form이 바뀌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알고나서, 그것을 Maintain하기 때문에, 그런 지속적인 자기의 선택을 하긴 하는데, 내가 이렇게 변했어? 하는 것이다. 제 이야기이다. 하도 못되게 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우즈벡에 선교사로 하는데, 어디서 알만한 어떤 분이 선교팀으로 왔다. 세브란스 의료선교팀인데, 어떤 늙지만한 간호감독 되시는 분이, 고 선생님 여기 계시네요. 세브란스 출신이라고 해서 제가 도망가려고 했다. 다 안다고 변화된 이야기를 막 하는 것이다. 안심했다. 누구나 수치스러운 과거가 있는 것이나, 더 중요한 것은 변화된 현재의 모습이고, 더 변화될 미래의 모습이다. 이것이 다 거듭남의 생명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소망이다. 거듭난 사람들은 이것들을 통해서 새로운 관계를 볼 수 있는 소망에 들어간다. 관계라고 하면, 토라를 알기 전, 비전에 들어오기 전, 관계라고 하면 좋은 느낌이 없었을 것이다. 온 세계는 관계를 싫어하고, 1인 가족으로, 바드로 가는데, 우리는 관계하는 것이다. 관계가 모든 불완전한 관계들이 안정하게 된다. 그런 경험을 하셨을 것이다. 프로포즈 때도 전에는 불안정했는데, 안정되어서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결혼해보라. 거듭난 생명이 있다면, 안정의 관계로 유지해야한다는 인식, 선택, 종속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배워나가는 그 사람이, 새로운 관계를 사모하는 것이다. 오늘 프로포즈에서 좋은 모습을 이미 본 것이다.
관계의 변화, 영대 육의 원리, 이 관계에서 기꺼이 육대 영으로 진다. 기꺼이 지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다. 육신에게 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육신으로 나오는 사람에게 육대육으로 대응하지 아니하고, 영으로 져버리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샬롬, 십자가 때문에, 거듭났고, 토라를 알기 때문에 말이다.
거듭나셨는가?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절반 했는데, 길게 이야기를 못했다. 거듭남에 대한 진리, 성경의 원리를 다시 한번 점검하시고, 정말 내가 거듭났을까? 이런 신비적인 것들을 사모하시기 바란다. 빛과 소리를 듣는, 그 원시적이고 해서는 안될 일을 한번 해보길 바란다. 성경을 폈는데,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저는 그런 형태로 받았던 위대한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스리랑카 형제 한명은 예레미야 말씀을 계시로 받아서 그대로 살아가는데,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살아있어, 좌우의 날선 검과 같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토라의 원리, 사상을 알고,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그 적용을 하는 법을 안다. 그 자체가 없으면,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사모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셨으면, 은사주의에서는 그것을 자기 혼자 직통으로 믿는 것이지만, 여러분에겐 관계 언어가 있고, 관계로 피드백하고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은사주의적인 실수를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주셨어요. 해석해주세요 하면서 가져가보기 바란다. 이건 너랑 상관없다고 하면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야기하신다고 하면 생각을 다르게 한다. 누가 무슨 말씀을 하면 나눠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삶의 모든 과거, 현재 가는 방향, 미래의 캐릭터,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진 아버지가 그것을 해석해서 적용하게 해줄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거듭난 생명으로 이 일을 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과 성숙부터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다.
-- Q & A --
사도행전 9장의 이야기를 경험하지만, 동시에 행16, 18장이라던지, 끊임없이 사역 가운데 사역을 해 나갈 수 있는데, 슈브의 길 모퉁이마다 그런 계시적이고 초자연적인 경험들을 하는 것이다. 거듭남에서 이런 신비적인 경험을 한다는 것은 신비적인 경험의 시작이지, 3천층에 간 것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서 신비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토라의 메세지 자체도 계시로 들어온다. 저 같은 경우에는 토라의 메세지인 알파벳을 해석하는 동안에 그것에 계시로 들어온다. 요한복음을 해석할 때, 토라 주간과 연결이 되면서, 해석이 들어와서 빛으로 나에게, 사람들에게 비춘다. 그것이 같이 작동한다.
큰 빛과 소리는 처음에 거듭날 때의 이야기에 관해서 이야기한 것인데, 거듭남의 과정 안에서 신비적인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고, 주님을 따라가는 동안에 계시적인 일들을 사모하면서 토라의 지식과 함께 가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토라를 얼마나 많이 알았겠는가? 에베소서에 결국 모든 비밀을 다 풀었는데, 자신의 계시와 토라의 언어들이 다 종합되어서 녹아나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처음 거듭날 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은사의 영역도 그런데, 자기가 스스로의 자기 안의 의도를 구분할 수가 없다. 내가 치유의 은사를 통해서 사람들을 섬기겠다는게, 동기는 선할지 모르지만, 사실 Receive to give이다. 나한테도 있었기 때문에, 토라를 배워나가는 동안, 그것을 나누어주면서 이 사람에게 주셨구나고 결과적으로 hind-sight로 보는 것이다. 그것이 토라의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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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은 종속이다. 배우고 훈련받고 다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한번 배워서 다 백점 맞으면 얼마나 좋은가? 30점, 60점, 100점 맞았다고 다음에 또 100점 맞는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Tame, teach, train받고, 완벽에 도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훈련하는 것이지, 끊임없이 "육"대"영"(6:0)으로 떨어진다.
잘 생각해보면 그 빈도수가 점점 더 줄어드는 것을 느낄 것이다. 전에는 노상 인지도 못하고 동물로 살았는데, 이제 그게 동물이었구나 하는 것이다. 15, 20% 점점 더 반까지 떨어지고, 더 지나가면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그 모든 영역을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다. 이 멋있는 말이 바로 성장의 단어이다. 죄를 많이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죄의 영역을 더 많이 인지한다는 것이다. 죄는 인지 능력이지, 실제 죄가 아니다. 내면이 성숙하게 될수록 자기의 죄성의 영역들을 더 많이 보게 되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존재라. 제가 몰랐을 때는 사도바울은 정말 많이 죄를 지었구나 했는데, 그건 정말 무식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였다. 사도바울이 롬7장을 쓸 때는 죄에 대한 인지 능력이 많이 개발되고, 디모데서 쓸 때 쯤 더 많이 인지되어서, 죄에 대한 인지도가 극히 고양된 상태에서, 자기가 죄 밖에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차원까지 도달할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인지가 나를 구원하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죄가 어딨어? 하면 할 말이 없다. 죄에 대한 인지가 안되어있는 것이니까, 그냥 동물이다. 죽은 행실이라는 것이 육신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동물로 사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신적인 목적, 의도,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것이기에, 그 부분에 가까이 갈수록, 그 인지능력이 예민해지기 때문에 사실은 밖에서 볼 때는 죄에 대한 빈도수는 현저하게 떨어졌지만, 자기는 죄에 대해서 더 예민해진 것이다.
소원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벌써 변화된 것이다. 달렛을 본 것이다. 내가 어떻게 teach할 수 있는 달렛이 생긴 것이다. 새로운 관계와 어떤 접근을 하는 것인가? 거듭난 사람들은 자기의 관계 평가, 이 사람들과 그냥 어울리는가, 빛을 발하는가, 도대체 나는 그 사람들과 뭐지? 아무 영향력도 없고 그러고 사는 것인가? 그 관계를 인지하는 눈이 생긴다는 것이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정말 아버지를 닮고 싶은 생각 안에서 발버둥치기에, 내가 조금 더 배우고, 훈련을 받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아야겠구나, 책을 읽기도 하고, 이건 어떻게 할까, 디테일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한테 물어보면 어디까지 해보라고, 그건 아버지가 해주는 것이다. 아보트가 있으니까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한다.
* 기도
생명은 영이다. 우리가 영의 생명과 육의 생명을 더 잘 분별할 수 있게 하소서. 성경의 실제로, 거기서 증거할 수 있는 증례를 찾았습니다. 우리에게 두 개 이상의 증거를 발견하며, Born again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점검하게 하시고, 그 생명이 자라나서, 재생산하는 생명으로 강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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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은사주의의 끝판왕이 코라흐이고, 신비주의의 끝판왕은 엘리사이다. 곰에 물려 죽은 42명의 아이들이 엘리사를 코라흐라고 한다. 신비주의와 은사주의, 이게 그만큼 구별이 힘든 것이다. 구별은 딱 하나이다. 은사주의는 교회를 대적한다. 자기가 목적이기 때문에, 단독자가 신비한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자기를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교회를 대적한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 은사주의가 몰아닥친적이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그 신비한 일을 경험했다고 하면서 목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된다고 말이다. 은사주의는 자기를 드러내려하고, 다른 사람을 지적하고 끌어내려야 한다. 신비주의는 전체의 몸을 세우는데 사용한다. 어떤 영적인 것도 전체를 세우고, 몸을 세우는데 사용한다. 그래서 여러분들, 혹자들은 제가 굉장히 은사를 핍박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정말 은사를 잘 섬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고, 누구보다도 또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진짜 점치고 싶은 사람 한번 오시라. 괜히 점집 이런데 가지 말고, 저한테 오시라. 차이점은 그것밖에 없다. 그런데 이 몸과 전체와 Totality, 이런 것을 배우지 않고는, 이게 구별할 길이 없다. 그러니까, 그것을 단독자가 무엇인지를 토라에서 배우지 않고, 은사가 임해져버리면, 굉장히 혼이 파괴되어진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혼을 스스로 파괴시킨다. 이 신비한 일을 가지고, 이게 최고라고 하면서, 나는 그냥 영이다. 스스로 영이 되어버린다. 나는 영이다. 나는 하나님과 직통 계시를 받는다. 나는 다 음성 듣는다고 하면서, 스스로 영이 되어버리고, 스스로 거룩한 자가 되어버린다. 코라가 모세에게 와서, 너만 거룩하냐. 너만 음성 듣느냐. 나도 듣느냐. 한 것이다. 이게 은사주의의 끝판왕 코라이다. 이게 구별이 안되서, 모세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하나님이 직접 구별해주셨어야 했다.
이 제자도 세미나가 너무 귀한 것 같다. 우리에게 하나하나 다시 점검하면서 이 길을 가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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