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 2패
(연패)
이연희
그녀가 살그머니 나의(내) 팔짱을 꼈다. 온몸으로 따스함이 전해온다. 조금 걷다 딸의 손을 잡듯이 그녀의 손을 슬쩍 잡았다. 그녀(도)가 다시 내 손을 힘주어 꼭 잡았(는)다. (이심전심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눈치 못 채게 (겸연쩍어할까 봐) 한 손으로 (몰래) 눈물을 찍어냈다. 계속 눈물이 (자꾸) 날까 봐 (그녀가 눈치챌까 싶어) 눈을 껌벅이며 참느라 애를 썼다. 사돈아가씨(그녀)의 손은 따스하긴 하지만 의외로 손이 거칠다. 애도 없는데 손을 쓰는 취미생활(활동)을 많이 하나 보다.
안사돈의 장례를 치른 지 20여 일 지났다. 사위가 캐나다서 못 나오니 (나올 형편이 못 되니) 모든 뒤 처리를 사돈아가씨가 한다. 서류가 뭐 그리 복잡한지, 은행 관련 일을 처리하려니 캐나다 영사관 위임장까지 필요하단다. 국내의 여러 가지 일 처리를 위해 사돈아가씨를(그녀에게) 만나 사위의 인감 도장을 전해 주기로 했다. (한 만남이다.) 물론 (같은) 대구에 사니(거주하니) 퀵서비스나 택배로 전할 수도 있지만 만나서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길을 나서며 절대 울지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건만) 지하철역 출구에서 사돈아가씨(그녀) 얼굴을 보니(자) 눈이 슴벅거려 참느라고 혼이 났다. 주위의 시선도 신경 쓰이지만 내가 울면 사돈아가씨도 (그녀도 따라) 울 터이니 내가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찻집에서 주문하고 계산대에서 찻값을 서로 내겠다고 밀 거니 당기거니 했다. 사돈아가씨(그렇지만 그녀)가 휴대폰을 먼저 내밀어서 내가 졌다. 아무래도 휴대폰 케이스에서 카드를 꺼내는 내가 늦을 수밖에 (없다). 차라리 사돈아가씨(그녀)가 내도록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듯해서 양보했다. (도 하다.) 자리에 앉으니 (차를 몇 모금 음미하던 중 그녀가) 집에서 만든 수제 레몬청이라며 예쁘게 포장한 것을 내민다. 예쁜 얼굴만큼 마음도 예뻐라. 여러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저번) 겨울에 보고 온 손녀 유나의 얘기를 생생하게 전하니 아가씨가 좋아한다. 본인이 애가 없으니 오빠의 딸인 유나한테 온갖 정성을 쏟는다. 철 따라 예쁜 옷과 책까지 사서 항공택배로 수시로 부친다. (부치곤 한다.)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이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는 것도 실례다 싶어 한 시간쯤 후에 일어섰다. (서둘러 찻집을 나서자) 아가씨는 바쁜 일 없으니 쇼핑할 게 있으면 같이 하자고 한다. 지하상가에 가니(엔) 가을 모자가 눈에 많이 띈다. 모자를 좋아하는 나는 가을 모자를 하나 사고 싶었다. 사돈아가씨(그녀)가 멋쟁이 인지라 모자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돌아가신 안사돈도 모자를 좋아했다며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을 끌어당긴다. 모자만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에 들어서며 미리 휴대폰 케이스에서 신용카드를 끄집어내서 바바리 주머니에 넣었다. 행여 사돈아가씨가 딴생각할까 (이번에도 선수 칠까) 내 딴에는 준비를 단단히 (‘단디’) 했다.
가게 여주인과 사돈아가씨(그녀)가 권하는 모자를 대여섯 개(를) 조심스럽게 (골고루) 써 봤다. 사돈아가씨와 가게 주인과 나, 세 사람이 (이구동성) 의견 일치를 본 모자로(가) 낙찰이 되었다. 도톰하니, 따스하게(해) 보인다. 카드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아뿔싸!) 어느새 아가씨(그녀)가 휴대폰을 쓱 내밀고 결제한다. (해 버린다.)
내 딴에 대비를 단단히(야무지게) 했는데 또 지고 말았다. 세대 차이가 피부로 느껴졌다. 나도 휴대폰에 앱을 깔아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뤘더니 오늘 단단히 낭패를 봤다. 카페에 이어 두 번째로 사돈아가씨한테 져버렸다. 오늘 2전 2패 했으니 완전히 녹다운되었다.(된 것이다.) 서로 실랑이 하는 모습을 보던 주인이 웃음(미소) 띤 얼굴로 묻는다.
"며느리 라예?"
"아니라예 사돈아가씨라예."
"세상에 사돈아가씨랑 이렇게 다정한 분은 처음 봤어요."
아가씨(그녀)가 더 좋은 모자 못 사드려 아쉽다며 팔짱을 낀다.
골절을 특히 조심하라며 (지하철) 승강장까지 손을 꼭 잡고 내려왔다. 그녀와 나는 같은 지하철 2호선을 타는데 방향이 다르다. 뜬금없이 옛날 가수가 부르던 유행가 가사가 생각이 났다.
“나는 상행선 나(너)는 하행선 ♬ 갈 길이 따로 있구나.”
사돈아가씨(그녀)가 탈 지하철이 먼저 왔지만, 아가씨가 깍지 낀 손을 풀지 않는다. 기어이 나를 먼저 보내고 가겠단다. 내가 탈 열차가 와서 (를) 타면서 뒤돌아보니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다. 그 모습이 왜 그리 쓸쓸해 보이는지.(,) 갑자기 딸을 혼자 객지에 두고 떠나는 것 같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열차 안에서, 열차 밖에서 (차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손을 흔들고 자리에 앉아 눈물을 훔쳤다. 사돈 간에 몇 시간 동안 모녀가 되어 즐겁게 데이트했다. 사돈아가씨(그녀)는 엄마를 만난 듯, 나는 캐나다에 있는 딸을 만난 듯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이건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건가?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이는) 정 주고받기 나름이다. 어렵다는 사돈 간에도 따스한 마음의 강물은 흐른다.
○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잘 그려졌지만,
○ 사돈아가씨를 보면 눈물 나는 당위성이 부족합니다.
↳ 그녀가 처한 상황 살짝 언급
시장 구경
(시장과 사람들)
이지연
어둠을 가르고(며) 달성공원 새벽시장으로 차를 몰았다. 남편 친구가 편하게 착용할만한 옷과 신발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남편 친구의) 귀띔을 하여(에) 남편이 혹해서였다.
근처에 도착하니 (들어서니) 이미 많은 차들이 주차장인양 (차들이) 양쪽 도로에 즐비했다. 먼저 도착한 남편 친구 일행은 식당 노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어묵과 떡볶이로 요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비집고 앉아 간식거리를 (한 젓가락씩) 거들었다. 한여름 여명의 (어둑)새벽 공기는 (쫀득한 간식거리와 함께) 기분 좋게 시원했(하였)다.
처음 와 본 달성공원 새벽시장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예상외로) 훨씬 컸고, 품목도 다양했다. 달성공원 정문 앞 세 갈래(림)길 모두 난전이 빼곡히 대로변까지 이어졌다. 옷과 신발은 물론이고 주방기구, 소독제 (등등),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를 다양한 기구와 부품도 (진열되어) 있었다. 과일과 야채, 생선, 견과류, 반찬 등 종류가 엄청났다. 가격표를 보니 동네 마트보다 저렴한 게 분명했다. 난전의 긴 행렬은 일일이 구경도 못√할 (큰) 규모였다.
남편 친구 부부는 새벽시장을 알게 된 게 2년쯤 된다며, 옷과 신발 판매상 몇 명(사람)과는 친분이 있었다. 덕택에 남편이 고른 옷도 단골의 친구라는 명목으로 (안면 터놓은 친구 덕에 헐하게 샀다.) 주인의 자발적인 에누리가 있었다. 친구 아내는 원하는 구두 디자인을 알려주고, 입고되면 연락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옷걸이에 여성복 전을 펴는 난전이 눈에 띄었다. 관심을 갖고(있어) 살피(다가)던 중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다. 일단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고,(좋았고,) 시원하면서도 구김이 잘 가지 않는데√다가 가격까지 저렴했다. 시중에서 사려면 만 원짜리 몇 장은 필요함√직한데 (제법 비쌀텐데) 겨우 한 장 (돈 만 원)으로 취할 수 있었다. (너끈하였다.) 횡재한 기분이었다. 일행들도 잘 골랐다며 야단이었다.
야채와 과일도 얼마나 푸짐하던지. (일)이천 원이면 넉넉히 담을 수 있었다. 오이와 마늘쫑, 꽈리고추, 양파와 양배추를 사고 보니 손이 무거웠다. 내가 좋아하는 명태껍질 튀김,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께 드릴) 쑥떡과 남편이 좋아하는 (상에 올릴) 고등어도(까지) 사고 나니 남편 어깨(그이)와 내 어깨가 기울어(묵직해)졌다. 힘겹게 차로 향하며 다음에는 손수레를 싣고 와야겠다는 다짐을 주고받았다.
나는 시장 구경을 (유난히) 즐긴다. 우리 집 인근에는 5(오)일장이 서는데 장날이면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시장에 들린다. 시장 골목을 들어서기도 전에 정겨운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그려져 엔도르핀이 솟는다.) 얼마 전부터는 반찬 가게가 많이 생겼다. 찬을 구입하는 행렬을 구경하며 나도 그들의 대열이 끼어 몇 가지 찬을 사기도 한다.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때로는 (한두 가지 사기도 하고, 진열된 반찬들에서 저녁 반찬 힌트를 얻을 때도 있다. (힌트를 얻어 찬거리를 살 때도 있다.)
시장에는 찬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간식거리도 많다. 떡볶이와 순대가 있고, 호떡, 어묵, 옥수수, 군밤도 있다. 호떡√가게는 장사가 잘 되어 가족이 총출동하여 손님맞이를 한다. (가게가 북적이는 정경에 내 마음도 덩달아 푸근하다.) (이러니)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면(도) 어떤 때는 찬거리는 없고 간식만 몇 봉지 들려있기도 한(하)다.
새벽시장이든 5(오)일장이든 손님맞이를 위해 저(상인)들은 꼭두새벽에 난전을 준비했을 것이다. 비싼 물건이 아니라 저마다 푼돈을 내고(으로) 물건을 받아 가지만 (사고팔지만) 상인들 얼굴에는 생기가 넘친다. 사람 사는 맛이 (‘지대로’) 나는 그 시장이 참 좋다. (있어 살맛이 난다.)
아버지와 우시장
권자이
코로나를 피해√가질 못했다.
☜백신을 맞지 않았기에 엄청 걱정을 했었다. 열이 나고 오한이 들고 팔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주사 맞고 지어온 약 한 첩을 복용했더니 증세가 사라졌다. 처음 시작은 경미해서 (몸이 가뿐하길래) ‘걱정 한 것에 비하면 이거 아무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싶었다.)
(웬걸,) 이틀쯤(이) 지날 무렵부터 기침이√심해지고(졌다.) 따라서 인후 통이 오고 음식 맛이 가시며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 졌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격리에서는 자유로우(는 풀렸으)나 몸이 자유롭지 못했다. 워낙 먹지를 못했으니까 털고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한 열흘이 지나고 나니까 (그러자니) 반세기도 이전에 아버지를 따라 우시장을 다니면서 먹었던 음식을 (한번) 먹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났다.
처음 아버지를 따라 우시장을 갔을 때는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이전이었다. 그때는 소를 사료로 키운 것이 아니라, (키우지 않았다.) 볏짚이나 건초를 삶아서(로) 죽을 끓여서 주었(먹였)기에 지금처럼 여러 마리를 기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이른 봄이면 중소 크기의 농사일을 할 수 있는 (감당할 만한 덩치의 중치 암)소를 사서 (이웃에게) 대여했다. 2년 후쯤에 그 소가 새끼를 낳고(아) 젓을 떼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송아지는 길러준 사람에게 주고, 큰 소는 (되)받아와서 팔았다. 그때는 소가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으니, (없을 때였으니) 여러 집들에 이렇게 소를 대여 했다. (이렇듯 상부상조하는 방식이 성행하였다.)
그러니 아버지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한기가 되면 우시장 가는 날이 잦았다. (처음 아버지를 따라 우시장을 갔을 때는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이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홀아비도 아닌데 어린아이를 데리고 우시장을 오는 남정네는 아버지뿐이었다. 처음 우시장 갔던 날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에 있다. 일곱 (예닐곱) 살 초겨울이었으니 지금쯤이었던 것 같다. 뭘 팔고 사는지도 모르고 아버지를 따라가기만 하면 맛난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일념 하나였다. 소 울음소리에(와) 웅성거리는 사람√소리(,) 시끌벅적한 장터엔 여기저기서 김이 피어오르고 코끝을 자극하는 맛난 음식√냄새가 어린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생전 처음 보는 구경거리에(가) 조금은 낮(낯)설면서도 신이 났다. 아버지가 (“)뭘 사줄까.(?”) 하고 물었을 (했을) 때, 생전 처음 보는 먹을거리에 종류도 가지가지라서 선택하기에 혼란스러웠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한참을 망설이고 고민한 끝에 고른 것이 찐빵과 꽈배기였다. 얼마나 맛있든(던)지, 두 개의 종이봉투에 담아주던 것을 개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던 것이다.
그 후로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겨울방학만 되면 아버지가 우시장을 간다고 나서기만하면 내가 먼저 앞장을 섰다. 엄마는 못 가게 막아서고, 아버지는 우는 나를 딱 한√번만 더 데리고 가는 조건으로 손가락 걸고 약속을 했다. 어떻게든지 따라가는 것이 목적이라 (약속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약속해도 다음에도 울면 아버지는 또 데리고 갈 것이다.’(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손가락 걸고 한 약속 따위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가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아버지는 그 전처럼 돼지 국밥에(,) 바로 튀겨낸 통닭,(과) 뻥튀기, 수제√과자를 한 아름 안겨 주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아주 추웠던 것 같았다. 아버지는 소 가격이 안 맞았는지 (소를) 팔지를 않았다. 소는 동네에 소 팔로 온 아저씨께 맡기고, (동네 아저씨가 대신 몰고, 아버지는) 나를 업고 아버지가 입고 갔던 (업더니 아버지가 입고 있던) 코트를 씌웠다. 주전부리(는) 로 산 물건은 아이 업은 (내 엉덩이를 받친 깍지 낀) 손에 들고,(었다.) 나는 널찍하고 따뜻한 아버지 등에서 잠이 들었다. 춥기도 하고 배도 부르니 얼마나 잘 잤겠는가. 집에 와서 깨어보니 주머니에 아버지 지인들이 준 십√원짜리는 여러 개가 있었고(짤랑거렸고) 백√원짜리 지폐도 있었다. 그때 당시 아이에게는 큰돈이었다. 아버지 지인들이 과자 사√먹으라면서 주었으니 어린√마음에 이보다 더한 기쁨이며 소득이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또 따라 갈 것이라 다짐했다.
그 후로는 한 번 더 우시장을 (따라) 가고는 못 갔다. 소를 팔고 산을 몇 개를 넘어 집으로 가던 젊은 아저씨(가) 한√분이 몇 명의 강도에게 돈을 털리고 목숨까지 잃은 사건이 있었다. 그 일이 동네를 들썩들썩 하게 한 후로 무서움에 더 이상 우시장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렇게 먹지 못해 힘든 적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을 못 먹고 배가 좀 고프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상(희한)하게도 반세기도 이전에 먹었던 그 맛이 떠올랐다. 마침 집에서 내려다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는 (엎어지면 코 닿을) 오일장에를 나갔다. 수 십 년이 흘러도 꽈배기, 수제√과자, 찐빵이 다 있다. (선뜻 눈에 들어왔다.)
한 아름 (사)들고 집에 와서 이것저것 다 먹어봐도 밀가루 냄새만 풀풀 풍길 뿐이다. 그 맛이 아니다. 음식은 세월에 밀려있는데, 왜 곁에 안 계시는 아버지의 따스하던 체온은 지금도 그대로 느껴지는 것일까?
(우시장 옛 맛은 어딜 간 것일까. 아파서 떨어보니 아버지의 따스하던 체온이 눈물겹게 그립다.)
악몽
엄영희
자가발전기가 멈추었다. 어느 소설가의 말을 빌리면 한 아이가 태어나는 것만큼 아름다운 혁명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150여 명 아름다운(청춘들의) 혁명이 (이태원 골목에서 속절없이) 스러졌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늦은 밤 TV 자막으로 흘러가는 이태원 핼러윈 사고 소식을 보았다. 한 방송사에서 시작되던 속보가 차츰 여러 방송사로 퍼져나갔다. 도로에 누운 사상자에게 단체로 심폐소생술을 하는 광경이 심각한 것 같은데 공식 브리핑에서 사망자는 2명이라고 한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이라곤 오지 않았다. 심폐소생술 받던 그 많은 사람이 다 소생했다는 얘기인가? 사고시간을 따지면 골든 타임 4분도 훌쩍 넘기지 않았는가. 멎었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다시 TV를 켰다. 그새 희생자는 더 늘어나 사망자가 50여 명이란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접근하기 어려워 걸어서 현장 주변에 왔다는 기자는 상황을 잘 알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구급차 지나가는 영상만 반복해 보여주었다. 한 시간 후에 공식 브리핑하겠다는 소방 대장의 마이크 쥔 손이 달달 떨렸다. 새벽 세 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급박한 상황을 확인하기는 인스타그램이 더 빨랐다. 현장에서 찍은 영상이 여러 편 떴다. 심폐소생술 실시하는 의료인들의 손길이 부산한 가운데 방치된 사망자도 보였다. 핼러윈 옷을 입은 창백한 얼굴이 마네킹 같다. 들떠서 화장하고 핼러윈 분장으로 꾸몄을 청춘들 모습이 겹친다. 꿈인가? 어느 때 본 장면이더라?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보는 것과 동시에 그의 가슴 안을 떠올리던 때가 있었다. 가슴 안에서 열심히 뛰고 있을 심장을 방사선 촬영하듯 찍어보는 것이다. 간호사로 첫 근무를 수술실에서 시작했다. 스크럽 간호사(Scrub Nurse), 수술 현장에서 의사를 조력하여 (도와) 수술에 참여하는 일이다. 무균을 철저히 지키는 수술실에서 ‘솔로 문질러 씻는다.’는 의미가 스크럽이다. 무균장갑을 끼기 전 손톱 밑부터 시작하여 팔꿈치까지 솔로 문지르고 소독수로 씻는 것이 스크럽 간호사의 기본이다. 한두 시간부터 길게는 열 시간 넘도록 촌각을 다투는 일을 하다 보니 마취과를 포함한 수술팀 전체와 특별한 연대감이 생겼다. 무영등 아래 서 있는 시간이 삶을 지배하던 때였다.
흉부를 절개하고 폐 수술을 하는 경우 심장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주먹만 한 심장이 쉼 없이 팔딱이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때의 경이로움이란…. 그 모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슬로비디오의 한 장면으로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생명의 발원지, 자가 발전의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심장이 스스로 그렇게 뛴다는 것은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의학적으로 심장 박동의 중추는 동방결절이다. 자가발전기의 배터리인 셈이다. 무엇보다 심장이 잘 뛰기 위해서는 호흡에 의한 산소공급이 필수이며 여러 조직의 유기적인 협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눈앞에서 팔딱이던 심장의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도 그 사람의 가슴 안에서 뛰고 있는 심장 형태가 (함께) 그려지곤 하였다.
쉼 없이 뛰어주던 심장이 눈앞에서 흐물거리며 힘을 잃어가는 경우 수술팀과 마취과는 초비상 상태에 돌입한다. 혈압이 떨어지고, (짐과 동시에) 환자 상태도 급격히 나빠진다. 직접 손으로 심장을 마사지하기도 하고 ‘에피네프린’을 사용하여 심장 박동을 촉진한다. 아무리 약물을 투여하고 마사지해도 고장 난 엔진이 멎어가듯 스르르 박동을 멈추어 가던 심장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절, 견디기 힘들었던 악몽은 무균 수술포를 덮지 않고 수술하거나 수술대 위에서 심장이 멎어가는 환자를 붙들고 애를 쓰던 모습이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태원) 광경은 꿈에서 만났던 장면들이다. 한때 여러 번 맞닥뜨렸던 나만의 악몽이다. 단체로 심폐소생술을 하던 이태원 현장을 보고 소환한 기억이다. 그 악몽이 현실이 되었다.
단풍잎이 맥없이 떨어지는 가을날, 이루지 못한 꿈을 안고 스러져간 청춘들 생각에 마음 한편이 아리고 먹먹하다. 가족은 물론이고 현장에 있었거나 목격한 이들, TV로 소식을 접했던 모든 사람의 마음이 다르지 않을 (이 한결같을) 것이다. 이태원 핼러윈 사고 사상자 대부분이 이삼십 대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하고 민감한 나이의 청년들이 겪어야 할 고통과 두려움을 생각하면 나이 먹은 내가 부끄러워진다.
이태원 트라우마로 정신과가 예약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붐빈다고 한다. 그들이 받았을 충격과 아픔은 슬로비디오로 저장되어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꿈속에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청춘들을 더 아프게 할지 모른다. 동년배들이 겪을 상처를 생각하면 할 말이 없다.
뒤돌아보니 가슴앓이가 심했을 때 악몽을 자주 꾸었다. 그래도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현실이 악몽이었으면 좋겠다. 꿈 깨고 나면 기분만 좀 나쁜 그런.(13.1매)
(세월이 약이란 노래가 있다. 어디까지나 꿈일 뿐 현실이 아니다. 요즘 내가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얘기 곁들여...)
○ 해피 엔딩 → 가능하면 희망을 노래
시장,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다
(내 마음의 영선시장)
이광조
서로를 알아본 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보자기 위에 채소 몇 가지를 펼쳐놓고 팔고 있던) 그 애(아이)가 당황한 듯 바로 눈을 내리깔자 나도 먼(산을 보며) 데 바라보며 빨리 (서둘러) 그 애 앞을 지나쳤다. 다시 볼 수 없어 그토록 서운했던 그 아이를 시장 모퉁이에서 만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이야.) 보자기 위에 채소 몇가지를 펼쳐놓고 팔고 있었다.
수현이는 4학년이 되면서 서울에서 전학 온 아이였다. 얼굴이 뽀얗고 입은 옷도 도회풍이었다. 더욱 나를 설레게 한 건 그 애가 쓰는 서울말이었다. 조그만 입에서 예쁜 서울말이 또르르 흘러나올 때마다 여자 아나운서를 대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 애(아이)는 우리 반 여자아이들의(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점심시간이면 계집애들은 수현이 자리 주변에 모여서 재잘거렸고, 사내아이들은 무심한 척 딴전을 피우면서도 힐긋힐긋 그 애(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 시절 사내아이들과 계집애들은 같이 어울리지 않았고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 세련되고 예쁜 아이에게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하고 안타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1년을 같은 반에서 보낸 그 애(아이)가 다시 어디론가 전학 한다고 했다. 소문이 떠돌더니 다음날 바로 교실 앞에 나가서 작별 인사를 했다.(하는 게 아닌가.)
이제 다시는 못 본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철렁하는데, 몇 마디 인사를 마친 그 애(아이)도 곧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교실을 나갔다. 그 애(아이)가 없는 교실은 공허하기만 했다. 주소라도 달라고 할 걸 하는 후회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그랬던 그 아이를 영선시장 입구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흠칫 놀라더니 바로 정색을 하며 모르는 척했다. 금지옥엽의 서울아이(내기)라고 생각했던 애(아이)가 남의 점포 앞에 자리를 펴고 앉아서 채소를 팔고 있다니, 너무 놀라와(워)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눈을 피하며 서둘러 지나쳤지만 7, 80미터 지나가자 (먼발치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 애(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그 아이가 채소 파는 골목을 지나가지 않았다. 시장 초입에서 오른쪽으로 다른 통로를 이용하여 그 골목을 우회하면 시장의 번화가(중심)에 이를 수 있었다. 그 골목으로 다니지는 않았지만 멀찍이서 그 애를 확인하곤 (멀찌감치 서서 살피곤) 했는데, 두어 달 뒤 어느 날(부터) 그 애(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접근해서 주변을 두루 살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시장에 갈 때마다 그 애(아이)가 앉아 있던 자리를 확인하면서, 전학 보내고(이후) 허전했던 그 기분을 다시 떠올리곤 했다.
감히 말을 붙여 볼 수도 없었던 서울 공주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수줍고 숫기가 없어서 말 한마디 해보지 못했고, 두 번째는 실망과 연민이 뒤섞인 혼란스러움으로 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애써 그 골목을 피해 다닌 건 그 아이에 대한 배려라기보다 한껏 아름다웠던 나의 환상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영선시장 근처에서 1년 반쯤 살다가 학교와 가까운 대신동으로 이사를 했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거쳐서 다시 더 작은 골목에 있는 집 문간방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골목 끝에 있는 구멍가게에 가서 두부나 콩나물을 사 와서 국을 끓여 먹었지만 좀 많은 찬거리를 살 때는 서문시장에 다녔다. 큰 장이라고 불리던 별칭처럼 넓고 큰 시장이었는데 나는 주로 지하에 있던 채소나 생선가게에 들리곤 했다.
어느 날 김치를 담으려고 부추 한 단을 산 다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젓갈 가게에 들렸(렀을 때)는데 젓갈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물었다.
“학생, 이거 뭐할라고 사노?”
“김치 담을라고요.”
“그래? 김치 담을 줄 아나?”
“예”
“아이구 야꾸나. 어린 학생이 김치 담을 줄 안단다.”
아주머니는 신기하다는 듯이 이웃 가게 주인들을 건너다보면서 떠들었다. 그러자 손님이 없어서 한가하던 다른(이웃) 가게 주인들이 일제히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몇 살이며 고향이 어딘지 물었고, 김치 담는 법을 얘기해보라고 하기도 했다.
“부추를 씻은 다음 소금을 뿌려서 한참 뒀다가 숨이 죽으면 물기를 꼭 짜요. 마늘을 도마에 놓고 잘게 다진 다음 고춧가루와 섞어서 부추에 붇고요. 거기에다 젓갈을 냄비에 달여서 뼈를 건져낸 후 그√물을 부어요. 그 담에는 양념과 부추를 골고루 섞어 가며 버무리면 돼요. 미원을 좀 넣기도 하고요.”
(약간 더듬거렸지만 바른 순서로 얘기하자) 세 아주머니가(들이) 웃고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내가 김치 담을 줄 아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묻는 대로 답은 했지만 부끄럽고 조금 어색하기도 해서(했다.) 젓갈을 받아서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데 젓갈 가게 옆 (가게)에서 반찬을 팔던 아주머니가 나를 불렀다.
“학생, 정구지 하고 젓갈 여기 내려놓고 내가 담아놓은 이거 가지고 가거라.”
“왜요?”
팔려고 진열해 놓은 부추김치를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담는 그녀(아주머니)를 의아해하며 쳐다보았다.
☜그러자 잔잔한 미소를 보이며 그냥 그러고 싶다고 했다. 젓갈 가게 주인도 거들고 나섰다.
“고맙다 카고 받아 가라. 야야. 아들 같아서 주고 싶은 모양이네.”
젓갈 가게 주인의 말을 듣자 그제야 아주머니의 의도를 알 듯했다. 부추를 내려놓고 부추김치를 가지고 가라는 소릴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속셈이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을 했던 게 사실이다. 놀랍고 황송해서 거듭 머리를 조아려 고맙다고 하자, 손사레(래)를 치시며 공부 많이 해서 큰 사람 되라고 주는 거라고 하셨다.
시장에서 돌아와 둥근 알루미늄 상에 얻어온 부추김치를 올려놓고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내가 담은 것 하고는 (거와는) 비교가 안 되는 매콤했던 (맛깔스러운) 부추김치와(였다.) 아들처럼 챙겨주시던 인정 때문에 어린 자취생의 코끝이 찡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시장, 본전도 안 된다고 엄살을 부리고, 비싸서 못 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치열한 수 싸움과 눈치가 오가는 곳이 (시장이)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상술과 낯 두꺼운 에누리로 배짱을 겨루기도 하는 곳이다. 그렇게 속을 내보이지 않고 한 푼을 가지고 다투는 적나라한 생활의 현장에서, 허전한 가슴을 남몰래 달래며 나는 첫사랑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어린 자취생을 연민하여 팔려고 준비해둔(던) 반찬을 손에 들려(쥐어)주시던 중년의 천사(아주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시장은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닌 모양이다. (아니었다.)
(나는 그녀들을 두 천사로 기억하고 있다.) 모든 게 어색하고 수줍던 사춘기에 내가 시장에서 만났던 두 천사는(들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무엇을(얼) 하고 있을까. 우수수 나뭇잎이 떨어 (낙엽) 지고 하늘이 더 휑해지는 (가슴 시린 겨울날에) 입동에 문득(불현듯) 떠오르는 오래된 인연들이다. (그립다.)
○ 가슴 시린 영선시장입니다.
○ 애 → 아이로 통일
해몽
살구나무
썸√타던 남자와 우연히 차 한잔 마시게 되었다. 가을이었고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온 거리를 뒤덮고 있을 때였다. 관심은 있었지만,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쉽게 드러낼 수 없어 애가 타던 시절이었다. 그의 행동도 늘 아리송해서 보편적인 호의일까 아닐까를 알아맞히기도(가) 힘들었다. 무거운 물건 들고 가기라도 하면 얼른 쫓아와 들어주고 내 말을 언제든지 지지해 주는 행동은 나에 대한 특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일로 서로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 있는 법이다. 눈빛이나 말투, 행동에서 풍기는 뉘앙스를 찾아 나에 대한 관심을 짐작해 보는 것은 은밀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날은 분위기가 좋았다. 툭 터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내게 있었던 일들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 상황을 자세히 그려내면서 관심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걸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한 가지 께름칙했던 건 걸을 때 자꾸 거리를 둔다는 것이었다. 이전에 했던 (친밀한) 행동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귀는 연인 사이는 아니라지만 그렇게까지 둘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려 하다니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헤어질 때 그 썸남은 복권 두 장을 샀다. 그중 한 장을 내게 주더니 대뜸 복권 두 장 중에서 한 장(누구 것)이라도 1등에 당첨되면 결혼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려니 했지만 나는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정식으로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없어도) 이런 말까지 한다는 것은 내게 관심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해서)다. 나는 기분이 들떠서 복권 한 장을 고이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갔(왔)다.
잠자리에 누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을 때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복권 1등에 당첨되면' 이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 `결혼합시다.' 란(한) 말에만 꽂혀 마음이 설레는 바람에 그 말의 뉘앙스를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확률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서 머리를 한 대 (오지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은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고 하지 않는가. 그가 헤어지며 복권을 사서 (으로) 내게 주려 했던 메시지는 우리가 결혼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거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핸드백에서 복권을 꺼내 보았다. 복권에서는 헛물켜지 말라는 뉘앙스가 풍겼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에 미치자)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걸을 때 나란히 걷지 않고 쭈뼛쭈뼛하며 간격을 유지하려 하던 그의 소심한 태도가 자꾸 떠올랐다.
나는 내 나름대로 (헛물켠 것으로) 결론을 지어버렸다. 앞으로 그에게 관심 두지 말자며 단단히 마음먹었다. 복권은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 남자도 지워버렸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를 멀리했다. 될 수 있으면 둘만 한 공간에 있(머무)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썼으며 혼자 다니지 않고 늘 누군가와 동행했다. 내 태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도 그럴 결심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더 이상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듯 보였다.
오래 세월이 흘러 그의 얼굴도 기억에 가물가물할 때쯤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그 남자가 날 슬쩍 안아보고는 얼른 가 버리는 얼토당토않은 꿈이었다. (하도 생생해서 생시 같았다.) 나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한참 동안 어안이 (어리)벙벙한 채로 앉아 있었다. 까마득히 잊혀 가고 있던 남자가 꿈속에 나타나 나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다니 (황당하였다.) 꿈이란 게 황당하다(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이)었다. 하도 생생해서 생시 같았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잊었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돌발적인 행동에 내 마음은 혼란스러워졌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가 나타난 것이라 하지 않은가.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 건지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남녀가 썸을 타다가 사귀게 될 때는 둘 중 누구 하나는 용기를 내야 한다. 우리는 둘 다 소심했고 솔직하지 못했다.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조차 내 마음을 속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해몽이 궁금해 해몽 사전을 찾아봤다. 연인이 꿈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면 꿈꾼 사람의 열망이 투영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꿈속에서 성추행 같은 행위를 한다면 그 사람이 나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라 한다. 그는 연인도 아니고 이젠 썸남도 아닌 사이다. 그렇다면 그가 날 짝사랑하고 있다는 말인가? 설마 아니겠지. 같은 일을 (에 종사) 하지 않아 못본지도 오래되었고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가 `복권 2장을 사서 나에게 나눠준 것'의 뉘앙스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을까? 한 번 더 그의 마음을 떠보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나 혼자 결론짓고 그를 멀리 한 탓에 그도 자존심이 상해 멀어져 갔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찢어버렸던 건 복권이 아니라 그의 소심한 고백이 아니었을까?
그 수수께끼 같은 복권은 1등에 당첨된 지도 모르고 (되어) 당첨금 찾아가지 않은 자의 대열에 끼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급하게 결론짓는 바람에 자존심과 함께 찢어진 복권은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미궁 속으로 흘러가 버렸다.
고추 먹고 맴맴
(쌍팔년도 그 골목)
이형국
봉산동 긴 골목 중간쯤의 집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다. 예닐곱이었던(즈음 이태) 2년 정도였다. 봉산동으로 이사 오기 전은(엔) 경주서 살았는데 경주역 앞 큰 길가였다.(에서 살았다.) 그 이전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그 후 이사를 했던 집도 골목에 있었다.
조그마한 나에(내)게 있어 봉산동 집은 넓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집이 실제로 넓었는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1950년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시기(1950년대)여서인지 직접 전화戰禍를 입지 않은 지역이었음에도 거리풍경은(는) 채 정비되지 않았었다는 느낌이 든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도심 주변에 위치해서인지 적산가옥들이 많았다. 기와지붕이나 함석지붕 외에 너와집처럼 얇은 목재로 덮인 지붕이 주류를 이뤘다. 담장은 몇 집만 벽돌담장이나 돌담이었고 대부분은 나무판자를 엇댄 그야말로 판잣집이었다.(였다.) 골목 안 주택들도 그랬고, 거리를 면面한 집들도 똑같았다.
우리 집은 다다미가 깔린 널따란 거실이 작은 마당을 격隔하고 있었고(내려다보고) 거실의 정면을 제외하고(마당을 중심으로) 삼三면에 자그마한 방들이 달려 (디귿 형태로 딸려) 있었다. 나는 평소에 집에 있을 때는 거실 뒷방에 조그마한 아주머니와 함께 있었는데 부엌을 통하는 방이었다. 방에 있을 때가 아니면, 마당에서 작은 나뭇가지로 땅을 파거나 골을 내면서 놀았다는 조각난 기억들이 있다. (는데) ‘아마 글자(를) 연습을 했을 수도 있었겠구나.’라고 생각도 해본다. (하지 않았나 싶다.) 출입문이 두 개 있었는데,(로서) 하나는 앞 대문이었고,(과) 또 하나는 뒷문이었다. 기억을 빌리자면, 앞문이 크지는 않았지만, 지붕이 덮인 맵시 있는 문이었고 담은 두께가 두꺼운 나무가 가지런히 틈 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문으로 나가면 제법 긴 골목이었다. (나타났다.)
그 골목에서 많이 놀았는데, 동네 아이들하고 조그만 돌멩이를 주워서 던지기도(를) 하면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옆집은 판사 집이라 했다. 어머니는 몹시나 부러웠던 모양이다. 날 보고 “나중에 꼭 판사 돼라.”라고 귀가 아프도록 말씀하셨다. 판사 집은 벽돌 담장에(다) 규모는 작았으나 풀밭에(은 물론) 현관까지 작은 징검돌이 쭉 이어져 있었다. 좁은 마당엔 양옆으로 화원을 가꾸어 두어 가지 예쁜 꽃들이 피어있었다. 어린 내 눈에도 이(그)런 집에서 살고 싶었다. 그 집에 들어가는 키가 작은 한 어른을 본 적이 있었는데, 문 앞에 노는 나를 힐긋 쳐다보곤 들어가셨다. 힐긋 보는 눈이 무서워서 달아난 기억이 있다.
집 뒷문 쪽에(으로)도 긴 골목으로(이) 구불구불 뻗어있었다. 뒷문은 부엌과 아주 근접해서 작은 내 발로 두 발 너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앞문과는 달리 그저 평범한 판자 문이었다. 담장도 판자 길이가 일률적이지 않은 (들쭉날쭉한) 낡은 진회색 나뭇조각들을 붙여놓은 듯했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앞문 쪽 골목길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뒷문에서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주위 집과는 비교가 안 될만한 큰 집이 있었다. 그 집은 적산가옥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담장도 높은 돌담이었지 싶다. 그곳엔 미국인이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군인은 아닌 것 같고 아마 군무원이었으리라. 하루는 뒷문으로 나가보았더니, 그 집 문 앞에 코쟁이 한 명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를 보더니 뭐라 소리치면서 손짓했다. 아마 “얘야, 이리 온.” 정도 아니겠는가. 나는 부리나케 집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어머니가 “미국 사람을 보면 무조건 도망가서 숨어라.” 했기 때문이었다. 얼굴 윤곽이나 몸집을 보면 서양인들의 모습이 괴물처럼 보였으리라.(다.) “코쟁이들은 아이를 보면 잡아먹는다.”라는 유언비어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삼덕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그 지역은 대구 교도소가 위치한 곳이었다. 붉은 벽돌이 성벽처럼 빙 두르고(둘러,) 높이 그리고 첩첩이 세상과 격리하고 있었다. 새로운 집은 뒷문 쪽은(으로) 교도소 오른편의 높디높은 담과 마주했다. 앞문은 길고 구불구불한 골목의 깊숙한 자리에 있었다. 이 집은 대학 졸업 때까지 나의 둥지였다. 그만큼이나 내 삶의 희로애락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했을 거였다.
초등학교 학년이 올라가면서 동네 동무들도 늘어갔다. 기다란 골목 집마다 한두 명의 동무들(이) 을 만들 수 있었다. (책가방을 벗어 던진 후부터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딱지치고 구슬치기, 사방놀이와 술래잡기 등 책가방을 벗어 던진 후엔 이슥해질 때까지 (를 하며) 놀고 또 놀았다. 그 긴 골목과 집들이 우리의 몸 숨길 곳이었고 놀이터였다.
우리 골목의 아이들과 길 건너편 골목의 아이들과는 전쟁놀이도 가끔 했다. 중고등학교형들이 우리 꼬마들에게 간 막대기를 나누어주곤 건너편 골목 아이들이 오면 두들겨 패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말이 되겠는가. 우리는 혹시나 맞을까 봐 도망갔다. 동무 집에 숨어있으면서 가끔 고개만 내밀어 적군이 있나 확인했다.
골목 끝엔 집이 없는 공터였지만, 낮은 벽돌√담장이 교도소 주변 비포장도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교도소를 오가는 일종의 샛길이었다. 동무들은 공터 앞 골목길 중앙에 조그만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공터에 잡초를 뽑아 구덩이에 넣었다. 구덩이를 파자고 했던 동무가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면서 “너거도 눠라.”라고 했다. 그다음에 다시 흙으로 덮었다. (어) 발로 눌러 보니까 물컹했다. 우리는 깔깔거리며 각기 집으로 달아났다. 아마도 몇 사람은 욕봤을 거였다.
삼덕동 골목길의 추억은 중학생이 된 나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교도소 쪽에 있는 뒷문으로 학교를 오갔다.(오갔기 때문이다.) 비록 비포장도로였지만 널찍했다. 교회와 대학교 (때)까지 그 길로 다니면서 앞문 쪽에 있던 골목길은 차츰 잊어갔다. 그리 알리기가 싫은 (별로 회상하고 싶지 않은) 칙칙하고 어두운 골목길이어서였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골목은 그대로 있다. 앞문 쪽의 교도소는 오래전에 사라지고 빌딩과 주택이 혼재된 채 동거하고 있지만,(다.) (다만) 뒷문 쪽 골목길은 맞닿은 도로까지, 그리고 건너편의 관음사라 불리는 절까지 예전 그대로이다.
사업√실패로 아버지와 헤어진 후 난 봉산동 골목을 두어 번 찾았다. 볼 수 없는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부모님과 함께 살던 그 골목을 찾았다. 하지만, 내가 살던 집은 없어져 버렸다. 옆집이었던 판사 집은 그대로였었지만, 많은 집이 없어져 버렸다. 골목 입구 집도 목재소로 바뀌어 있었다. 그 후 잊고 지내다가 재수할 때 그 앞을 지났는데, 그곳은 아예 기억 전체가 지워진 낯선 곳이 되어있었다.
산을 오르면 오솔길을 이용하듯 목적지로 가다 보면 골목길을 이용하는 때도 종종 있다. 오솔길도 그렇듯 (큰길만 길일까,) 골목길도 사람들이 밟아서 만든 길이다. 사람들이 있었던 곳이니, 당연히 이야기가 있다. 그중에서도 어렸을 때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아련하고 그리웁다.(그립다.)
재수 시절 첫사랑의 그 애는 봉산동 골목 집에 살았다. 통금 있던 시기, 우리는 방범대원과 숨바꼭질하듯 그 골목을 휘젓고 다녔다. 첫사랑이 아니 날까 봐 이별로 끝났지만, 그 골목은 아직도 그곳에 있다. 사대부속초 뒷 편에.
5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연분홍 기억이다. (2022.10) (17.1매 2493자)
○ 나에게 → 내게 또는 내게 → 나에게
↳ 읽을 때 혀가 잘 구르는 단어로 선택
첫댓글 헉!! 내 글이 말끔해지는 요술같은 이 현실^^
김상영 쌤, 감사합니다.^.^
밀고 당겨주는 수성 에세이 샘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고마운 말씀들입니다. ^^
멘토에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