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여소교와 천산 마귀할멈의 죽음
매초풍이 방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여씨 문중의 천금 같은 따님께선 그간 안녕하셨겠지?"
매초풍은 여소교를 향해 가시가 박힌 말을 던졌다. 여소교도 뒤질세라 입꼬리를 묘하게 뒤
틀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하루 세 끼 산해진미에 멋진 사내들만 끼고 놀았으니 언니께 감사를 드려야겠어
요."
"내게 고마워할 게 뭐 있어. 난 그저 악처후가 흉물스러운 사내인 줄 알면서도 너를 그 놈
의 소요관에 맡긴 죄밖에는 없지. 아마 악처후란 놈은 너의 살맛을 실컷 보았을 거야. 사실
소녀공을 익히자면 더럽고 흉측한 사내들에게 욕을 보게 마련인데, 네게 사내들의 양기를
받아들이는 요령을 거꾸로 알려 주었거든. 그러니 너는 못난 사내 놈들의 노리갯감이 되었
을 뿐이지, 그 사내 놈들의 양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 거야."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며 여소교가 매초풍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네 년의 악독한 심보를 난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벌떡 일어서더니 매초풍에게 한 장을 날렸다. 휙 하고 돌풍이 한차례 일었다. 매초풍
은 뜻밖이라 황급히 손바닥을 펴 여소교의 장을 막았다. 여소교의 장으로부터 음유지력(陰
柔之力)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매초풍도 급히 기를 운행시켜 여소교와 맞섰다.
여소교는 입가에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점점 힘을 가했다. 매초풍의 전신으로 그녀의 음유
지력이 파고들었다.
'이 년이 이토록 무섭게 음유지력을 운행시키는 것을 보니 아마 그동안 대단한 스승을 모셨
던 모양이군. 괜히 건드렸다가 애를 먹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매초풍도 전력을 다해 기를 내보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장력을 시험하듯 오랫동안 맞섰다. 매초풍의 귀밑머리가 서서히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마에는 뜨거운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여소교는 매초풍의 변화에 신이 나서 음유지력을 계속 운행시켰다. 그녀는 찬 기운이 매초
풍의 뼛속까지 파고들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가 있었다.
여소교가 야멸스런 웃음을 날렸다.
"호호호, 매초풍. 네 년이 우리 집안을 망쳤으니 오늘 내가 너를 요절내 주마!"
예전의 여소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매초풍은 이만 빠드득 갈아댈 뿐 아무 소리도 하
지 못했다.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쓰며 독살스런 눈초리로 여소교를 노려보았다.
여소교가 다시 입꼬리를 옆으로 찢으며 말했다.
"나를 죽이고 싶겠지. 하지만 너도 알아야 해. 오늘의 여소교는 닭모가지 하나 비틀지 못하
던 그 여소교가 아니란 말씀이야!"
여소교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지. 천하에 이름난 여걸 철시가 이처럼 내 손에 잡혀 옴쭉달싹을
못하게 될 줄이야. 내가 괜히 신경을 썼었어. 철시 매초풍이라……, 이젠 허울좋은 이름뿐이
라구!"
어느덧 매초풍의 눈썹에도 새하얗게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백발로 변한 그녀의
두 눈에는 애처로운 빛까지 어렸다.
여소교가 그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고 웃었다.
"이젠 용서를 해달라는 건가? 아쉽군 그래. 여소교는 불쌍한 사람을 동정할 줄 모르기 때문
이지. 남이 불구덩이에 빠지든 늑대에게 물려가든 내겐 상관이 없어. 하지만 함께 지냈던 일
들을 생각해서 단번에 죽이지 않고 더 추운 맛을 보여주겠어!"
여소교는 매초풍의 얼굴을 음미하듯 찬찬히 뜯어보며 말을 이었다.
"진현풍도 알아보지 못할걸. 얼어죽은 늙은 귀신라고 외면하며 지나쳐 버릴 테니까."
여소교가 진현풍까지 들먹이며 비꼬자 매초풍의 가슴은 칼로 도려 내는 것만 같았다. 사실
매초풍은 진현풍 때문에 함께 도화도에서 도망쳐 나왔고, 서로 의지하며 평생을 살자고 다
짐했던 터였다. 사실 매초풍의 가슴에는 진현풍밖에는 없었다. 그렇지만 진현풍은 여소교를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매초풍이 살기 어린 눈으로 여소교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당장 여소교를 죽여 버리지 못하
는 것이 한스러웠다.
여소교는 득의 양양한 기색으로 웃어대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진현풍이 나를 좋아해도 난 그를 좋아하지 않아. 난 네 년에게 복수하기 위해 진현풍을 유
혹했을 뿐인데 네 년은 그 술수에 걸려 들었지. 네 년이 진현풍을 떠나자 즉시 나도 그를
따돌려 버렸지. 솔직히 말해 난 진현풍이란 자의 내공이 필요했을 뿐이야. 그 외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사내라구. 난 그 화상을 보기만 하면 구역질이 나거든. 매초풍, 너의 사제 육승
풍이란 사람은 얼마나 영준하고 사내답게 생겼어. 넌 왜 그를 좋아하지 않고 하필이면 진현
풍 같은 못난이에게 마음을 빼앗겼냔 말이야. 내가 도리어 수치스럽게 여겨진다구."
매초풍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혔던 땀방울도 어느덧 하얗게 얼어붙었다. 매초풍은 천 길이
되는 빙하 계곡으로 떨어진 사람처럼 온몸이 얼어붙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온몸에서는 허
연 김이 피어 올랐다. 그녀는 졸음이 몰려와 도무지 두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잠들었다가는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졸음을 짜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가다듬으려니 온몸을 천만 개의 바늘이 마구 찔러대는
듯한 아픔이 전해졌다. 매초풍은 더는 지탱할 수 없어 스스로 눈을 감고 말았다.
여소교가 속삭이듯 말했다.
"매초풍, 잘 자거라. 깊은 잠에 들어야 아픔을 잊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매초풍은 천 근이나 되는 눈을 주체하려고 몸부림을 쳤다.
'눈을 감으면 안 된다. 난 여소교보다 훨씬 무공이 뛰어난 여인이 아니던가. 나는 기어이 여
소교를 눌러 놓고 더 무서운 고통을 안겨 줘야 한다.'
그녀는 속으로 굳게 다짐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의식은 희미해져 갔다. 몸은 구름
위에 떠있는 것만 같았다.
여소교는 더욱 집요하게 음유지력을 가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불현듯 창 밖으로부터 웬 검은 물체가 빠르게 날아 들었다. 여소교가 놀라 허리를
재빨리 숙였다. 돌아보니 봉당에 떨어진 물체는 헌 신발이었다. 헌 신발이 여소교를 향해 느
닷없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여소교가 기의 진행을 다소 늦추었다.
그 순간 여소교에게 눌리고 있던 매초풍의 진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여소교는 매초풍의
손바닥으로부터 밀려오는 드센 열기를 느끼고는 황급히 다시 기를 운행시켰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매초풍은 양기를 체내에 많이 비축하고 있었기에 원래 여소교보다 내력이 강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매초풍의 진기가 무섭게 여소교의 체내로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여소교의 손바닥은 불덩어리로 달구어지는 것 같았다. 오장육부가 뒤집어지고 온
몸에 경련이 일었다. 여소교는 급히 손바닥을 떼려고 했으나 음과 양이 대립된 상태라 그럴
수가 없었다. 매초풍의 짓눌렸던 진기는 마치 터진 봇물처럼 밀려나와 여소교의 음유지력을
밀어냈다.
여소교의 전신은 불덩어리가 되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옷깃을 잡아뜯었다. 온몸은 벌써 불
에 달궈진 쇠처럼 벌갰다. 그녀의 두 눈이 팽창되더니 곧 의식을 잃고 말았다.
매초풍이 정신을 수습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누가 자신을 구해 주었는지 매우
궁금했다. 매초풍의 시야로 웬 물체가 들어왔다. 유심히 살펴보니 웬 여인이 거의 알몸인 상
태로 가로로 누워 있는 것이었다. 바로 여소교였다. 매초풍이 거의 인사불성 상태에서 벌어
졌던 일이라 그녀는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매초풍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도대체 누가 나를 구해 주었을까……? 그리고 이 년은 왜 여기에 자빠져 있는 거지?'
매초풍은 여소교의 손목을 잡고 맥을 살폈다. 맥이 몹시 어지럽게 뛰고 있는 것을 보아 내
상을 심하게 입은 게 분명했다. 매초풍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신차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한참 후 겨우 눈을 뜬 여소교가 매초풍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온
몸으로 엄습하는 통증 때문에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매초풍, 오늘 네 년은 운이 좋았어."
여소교가 이를 갈며 흘겨보았다. 매초풍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난 언제나 운이 좋은 편이야. 하지만 이번엔 어떤 연유로 살아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대
관절 누가 날 구해 주었는지 넌 알고 있느냐?"
그러자 여소교가 구석에 처박혀 있는 헌 신발을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저 빌어먹을 신짝이 난데없이 날아오는 통에 놀라 정신을 팔지 않았던들 이 지경까지 되지
는 않았을 거야. 놀라 손을 늦추는 바람에 내가 도리어 내상을 입고 말았단 말이야!"
"호호호, 그거 정말 다행이었군. 신발이 날아온 덕분에 내 목숨이 살아났다니……. 헌 신짝
도 때에 따라서는 대감의 감투보다 더 소중하군!"
매초풍이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돌연 번개같이 장을 날려 여소교의 손에 있는
태음경맥을 끊어 놓았다. 다시 한 장을 더 내리쳐 그녀의 발에 있는 소음경맥마저 끊어 버
렸다.
매초풍이 냉랭한 눈길로 여소교를 쏘아보았다.
"반년 사이에 이처럼 사악한 무공을 익힌 것을 보면 언젠가 또 나를 해칠지도 모르지. 앞으
로 네 년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일찌감치 병신을 만들어 줘야겠다!"
매초풍이 구음백골조를 사용해 여소교의 한쪽 어깨뼈를 뜯어냈다.
"아악!"
여소교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곧추세웠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에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
왔다.
"매초풍 이 년, 이 마귀 같은 년아 어서 날 죽여 다오!"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지르는 여소교를 매초풍은 태연하게 바라 보았다. 매초풍이 고개를 내
저었다.
"너를 죽이진 않겠어. 너를 병신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기생집에 팔아 영영 강호에는 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여소교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매초풍, 천하에 너보다 더 악독한 년이 또 어디 있겠느냐?"
여소교의 눈빛이 강하게 흔들렸다. 순간 그녀는 벽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여소교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꾸역꾸역 뿜어졌다. 그녀의 몸 위로 피가 얼룩졌다.
"으음……."
그녀는 곧 절명하고 말았다.
매초풍은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여소교의 몸을 힘껏 찼다. 그것도
모자라 배 위로 올라가 마구 짓밟았다.
"안 돼. 너무 쉽게 죽어서는 안 돼!"
객줏집을 나온 매초풍은 거리로 나섰다.
벌써 자정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목탁 소리만이 외롭게 들려올 뿐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때 정면에서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말도 검고 마차를 모는 사내의 옷 역시 검은 색이었
다. 또한 마차의 지붕마저도 검은 색 일색이었다. 어둠 속에서 보니 마치 지옥에서나 나다닐
법한 마차 같았다. 그리고 마차를 모는 사내 역시 지옥의 사자를 떠올리게 했다.
매초풍은 귀신도 무서워하지 않는 대담한 여인이었지만 괴상한 마차 앞에서는 긴장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길 옆으로 비켜섰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마차를 모는 사
람은 사내가 아니었다. 처음엔 어두워서 분간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몇 살
정도 먹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바른 자세로 채찍을 휘두르는 힘이 남다른 것으로 보아
무공을 익힌 여인 같았다.
"그대가 매초풍?"
마차를 몰던 여인이 불쑥 매초풍을 향해 소리쳤다. 마치 죽은 사람이 내는 목소리처럼 음산
하고 쓸쓸했다.
"그런데요……?"
매초풍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서 올라타라!"
마차가 매초풍 앞에 섰다. 정신을 차린 매초풍이 급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왜 당신의 마차에 타야 한다는 게요?"
"그건 그대가 바로 매초풍이기 때문이지."
불현 마차 위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손은 두 자 정도 되는 자색의 막대기로 변했다. 그
것은 별빛을 받아 차디찬 빛을 반사했다.
막대기를 본 매초풍은 흠칫했다.
"자정신침!"
매초풍이 다음 순간 설핏 미소를 보이며 얼른 마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휘장이 둘러 쳐
진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매우 어두웠다.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은 쏜살같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혹 천산 마귀할멈이란 분이 아니신가요?"
매초풍이 물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냉소 어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천산의 마귀할멈을 빼놓고 또 누가 자정신침을 쓰겠나? 매초풍, 그댄 과연 총명해. 엽청청
을 데리고 다녀 끝내는 나를 움직이게 했으니 말이야."
"이 제자가 그날 엽 소저는 찾았지만 사부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 계책을 부렸던 겁니
다."
"청청은 지금 어디에 있나? 어서 내게로 데려와라."
"청청이는…… 철선선생 하종이란 자에게 잡혀갔습니다."
그녀는 그 일을 천산 마귀할멈에게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한참 후에 천산 마귀할멈이 무겁
게 입을 열었다.
"여혈의의 말을 들어 보면 그 하종이란 자는 청청이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모양이야. 청청
이가 하종의 손에 있다니 일단 마음은 놓이는군. 허나 자네를 제자로 받는 조건이 청청이를
데려오는 것이기에 자넨 아직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처지야. 그러니 어서 마차에서 내리게."
"이 제자는 진심으로 천산 마귀할멈을 스승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좋아요, 당장 엽 소저를
찾아 데려오겠습니다."
"청청이는 거렁뱅이 무리 속에 있고 게다가 탁운백 같은 고수들이 좌우에서 지키고 있어.
너의 무공으로 청청을 데려오다니 지나가던 소가 다 웃겠다."
매초풍은 두 눈을 꿈벅이더니 입을 열었다.
"전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엽 소저를 구해 오고야 말 겁니다."
매초풍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천산 마귀할멈이 괴상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
다.
"흐흐, 앙큼한 계집이로군. 아무튼 네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듣기 좋으니 괜찮다. 청청이를
데려오기 전에는 절대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으니 알아서 해라."
"아닙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시겠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마차에서 내리지 않을 겁니다."
"흥,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이군. 내가 그렇게 못하겠다는데 웬 고집이냐?"
천산 마귀할멈이 매초풍을 떠밀었다. 매초풍이 마차에서 떨어졌다. 마차는 그대로 앞으로 달
려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매초풍이 경공을 써 마차를 따라잡으려고 했다.
"제발 제자로 받아주세요!"
그러나 천산 마귀할멈은 묵묵부답이었다.
매초풍이 훌쩍 몸을 날려 마차 위로 다시 올랐다. 하지만 거센 힘에 밀려 그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몇 번이고 다시 시도를 했지만 그럴 때마다 천산 마귀할멈이 장을 날
려 그녀를 마차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마차는 쏜살같이 달리기만 했다.
"매초풍, 네가 끝까지 쫓아와도 소용없다!"
매초풍은 포기하지 않고 마차를 쫓았다. 마차는 어느새 건강성을 두어 바퀴째 돌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성문이 열리자 검은 색의 마차는 성안으로 들어갔다. 매초풍은 마차를 놓칠까 봐 열
심히 뒤쫓았다. 매초풍은 몹시 지쳐 있었다. 마차를 끄는 말 역시 지쳤는지 더운 김을 뿜어
내고 있었다. 말의 온몸이 땀에 젖어 털에서 윤기가 흐르는 듯했다.
말을 몰던 여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러다간 우리 오룡말도 탈이 나겠네."
그 말을 천산 마귀할멈이 들은 모양이었다.
"알았다."
천산 마귀할멈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매초풍 앞에 섰다.
"철시야, 네가 나를 잡으면 제자로 받아주겠다."
앞을 향해 손을 내젓던 천산 마귀할멈은 마치 연기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자신
의 경공이 천산 마귀할멈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간힘을 다해 그녀를 쫓았다.
겨우 매초풍이 따라가면 천산 마귀할멈은 다시 기기묘묘한 경공을 써 멀리 달아났다.
두 사람은 산을 넘으며 꽤 먼 곳까지 날아왔다. 매초붕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나도 이젠 지쳤어. 조금만 더 힘을 쓰면 나를 잡을 수 있을거야."
약이 바싹 오른 매초풍이 몸을 날렸다. 천산 마귀할멈은 산길을 지나 큰길이 보이는 곳까지
날아갔다. 그녀는 매초풍을 한번 돌아보고는 그 검은 색 마차 위에 올라타더니 달아났다.
천둥이 울고 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매초풍은 더 이상 그녀를 쫓을 수가 없었다. 마차는 아까보다 천천히 달리고 있었지만 도무
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비까지 내리는 탓에 매초풍은 온몸이 무거웠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으로 천산 마귀할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쳤으면 이젠 쫓아올 생각을 말라구!"
매초풍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손으로 훔치며 소리쳤다.
"끝까지 쫓아갈 거예요!"
악에 받쳐 소리는 질렀으나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또한 빗소리에 묻혀 그녀의 목소리
는 천산 마귀할멈에게까지 들리지 않았다.
입을 앙다문 매초풍은 힘겹게 걸어갔다. 한걸음 뗄 때마다 온 몸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검은 색 마차는 다시 건강성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는 작은 누각 앞에 멈춰 섰다.
강남에 내리는 비는 변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느새 비가 멎었고 구름이 흩어지면서 하늘
이 호수처럼 맑게 개었다.
잠시 후 뒤쫓아온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이 마차에서 내려 누각 안으로 들어가고 마차는
누각 뒤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매초풍은 얼른 누각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혀 버렸다.
매초풍은 화가 나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 질렀다.
"어서 문을 열어요. 난 포기하지 않고 쫓아왔어요!"
이층 창문이 열리더니 천산 마귀할멈이 고개를 내밀었다.
"난 여기 있다. 네가 여기까지 뛰어오른다면 날 잡은 셈 치겠다!"
매초풍은 그만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몇 번이고 경공을 부려 뛰어오
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매초풍, 너의 경공이 그 정도였느냐?"
천산 마귀할멈이 놀려댔다. 천산 마귀할멈이 보란듯이 이층에서 몸을 날려 사뿐히 매초풍
정수리 위로 내려앉았다가 그녀의 정수리를 발끝으로 가볍게 차고는 다시 이층으로 올라갔
다. 놀라운 경공이었다.
"난 언제까지나 사부님을 기다릴 겁니다!"
매초풍이 이젠 인내력으로 승부를 걸려고 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피곤하다며 하품을 해대고
는 사라졌다. 매초풍 역시 피곤하여 벽에 기댄 채 졸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물벼락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매초풍이 이층을 올려다보았다. 웬 사내 차림을 한 계집애가
깔깔 웃으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이 일을 어쩌나. 아래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미안해요."
매초풍이 눈을 흘기며 막 시선을 돌리려는데 다시 물벼락이 쏟아졌다. 매초풍은 겨우 말라
가던 옷과 몸을 또 적시게 되자 화가 났다.
이때 이층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아래에 손님이 있는데 왜 자꾸 실수를 하는 거야?"
다른 계집애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물을 뿌린 계집애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마귀할멈이 급히 목욕물을 바꾸라고 해서 서두르는 바람에 그만……."
그 계집애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매초풍에게 한껏 능청을 떨어댔다.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마귀할멈의 목욕물엔 꽃가루를 넣었기에 향기로울 거예요."
두 계집애가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매초풍은 그때서야 자기 몸에서 향긋한 꽃냄새가 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럴수록 부아가 더 치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참을성을 발휘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자신을 떠보려는 것이라 믿고는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정말 향기롭고 시원한 물이구나. 있으면 좀더 뿌려 다오!"
그러자 두 계집애들은 당황하여 고개를 내저었다.
"더는 없어요. 내일 다시 온다면 그때 뿌려 줄게요."
그들이 사라지자 천산 마귀할멈이 창가로 나타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목욕을 했더니 피로가 확 풀리는군. 아, 좋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셔야 해요. 저는 죽어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작정이니까요."
매초풍이 소리치자 천산 마귀할멈이 웃었다.
"그래? 넌 그런데 지치지도 않느냐? 하기야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난 진수성찬을 받고
목욕까지 했으니 이제 한숨 자야겠다."
그 말에 매초풍은 몹시 시장기를 느꼈다. 그러나 시치미를 떼고는 말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어서 쉬세요."
"정말 마음씨 하나는 곱구나. 허나 참 안됐다. 난 푹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는데 넌 선잠을
자야 하다니 참……."
천산 마귀할멈은 혀를 차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매초풍은 이제 창문가로 얼씬거리는 사람이 없자 마음놓고 잠을 청했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고 땅거미가 기어들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긴장이 풀려 달
게 잠을 자고 있었다 이때 이층 창문이 살짝 열리더니 시녀가 매초풍을 향해 다시 물을 끼
얹었다.
"이게 뭐야!"
이번에는 지린내가 물씬 풍겨 매초풍은 죽을 맛이었다.
"어머, 미안해요. 언니들이 미운 강아지가 마당에서 어슬렁거린다고 오줌을 모아 두었다가
끼얹으라고 해서 그만……."
한 시녀가 변명을 했다. 오줌 벼락을 맞은 매초풍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모
습을 내려다보던 시녀가 이기죽거렸다.
"오해하지 마시고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매초풍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번죽 좋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정말 마음씨가 곱군요. 우리가 잘못했어요. 제가 혼이 나더라도 내려가 문을 열게
할 테니 올라와 목욕도 좀 하시고 쉬세요."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두 시녀가 모습을 보였다. 매초풍에게 두 시녀가 예를 갖추었다.
"아가씨, 어서 드시지요."
매초풍은 매우 기뻤다. 천산 마귀할멈이 자기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믿은 그녀는 날아갈 듯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거문고와 바둑판 그리고 고서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져 있어 명문 대가의
서재를 연상하게 했다. '설매'라고 부르는 시녀가 매초풍을 한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
에는 목욕물을 받아 놓은 통이 세 개가 있었다. 두 개에는 찬물과 더운물이 담겨져 있었고
한 커다란 통에는 적당하게 데워진 물이 반쯤 차 있었다.
"아가씨, 어서 목욕을 하시지요."
설매가 권하자 매초풍이 새삼 낮을 붉혔다. 자신의 옷이 너무 더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얼른 더러운 옷을 벗고는 통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설매가 매초풍이 벗어 놓은 옷을
들고 나갔다.
매초풍은 기분좋게 목욕을 즐겼다. 그런데 갑자기 등쪽에 있던 벽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목욕통이 밖으로 끌려 나갔다. 깜짝 놀란 매초풍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욕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저잣거리로 나와 있었다.
알몸을 감추려고 애를 쓰는 매초풍을 사람들이 구경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
작했다. 매초풍은 어쩔 줄을 몰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더욱 낭패스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목욕통에 구멍이 나서 그곳으로 점점 물이 빠
지고 있었다. 곧 알몸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이때 목욕통이 와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
각이 나버렸다. 졸지에 매초풍은 알몸으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게 되었다.
"미인인걸!"
"조심하라구. 어쩌면 미친 계집인지도 모르니까."
"그렇겠지. 그러니 알몸으로 거리 한복판에서 목욕을 하지."
눈치를 보던 매초풍이 알몸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뒤쫓
았다. 매초풍은 허둥지둥 누각 앞까지 와 이층 창문으로 뛰어올랐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사
색이 되어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 입니까요? 설해와 설죽이 아가씨를 욕실로 안내하지 않았던가요?"
오줌 벼락을 뿌렸던 시녀가 짐짓 놀라며 말했다.
"바로 그 계집년들이 꾸민 수작이야. 이런 망신을 당했으니 내 그 년들을 찢어 죽이겠어!"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지만 노여움을 푸세요. 그 애들이 언니처럼 믿고 장난을 했겠지요.
여기도 목욕통이 있으니 마음놓고 목욕을 마저 하세요. 그 애들이 더는 장난을 치지 못하도
록 제가 단속을 할 테니 걱정 마시고요."
매초풍은 다시 그녀를 따라 이층에 있는 욕실로 갔다.
"네 이름은 뭐냐?"
매초풍이 물었다.
"저는 설란이라고 해요. 마귀할멈은 원래 몸종을 넷을 두었는데 설매, 설죽, 설란, 설국이라
고 하죠. 그중에서 설국이 가장 총애를 받고 있는데 지금은 마귀할멈의 머리를 벗어 드리고
있어요."
설란이 물에 새하얀 가루를 풀었다.
"이건 화정(花精)이랍니다. 백 가지 꽃에서 수집한 화분으로 정성들여 만든 것인데 목욕을
하면 기분도 좋고 살결도 고와진대요. 어서 통 안으로 드시지요."
과연 향긋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매초풍은 물 속에 잠겨 기분을 풀었다. 매초풍아 목
욕을 하고 나자 비로소 입을 옷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러워진 옷들을 설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설란아!"
매초풍이 소리쳤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또
천산 마귀할멈의 속임수에 걸려든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이때 누군가 욕실 문을 두드렸다.
"설란, 미안하지만 입을 만한 옷 좀 갖다 줘요."
매초풍은 설란인 줄 알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면서 들어선 것은 표범같이 우락부
락한 사내였다. 그 뒤로 흉칙하게 생긴 사내들이 더 들어왔다. 매초풍이 앞가슴을 가린 채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누구세요!"
사내들은 징그럽게 웃으며 매초풍의 알몸을 감상했다.
"우리와 함께 재미를 보는 게 어때?"
사내가 수작을 걸어 왔다.
"닥쳐라!"
매초풍이 눈초리를 사납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내는 히죽 웃으며 매초풍의 얼굴을 만지려고
손을 뻗었다.
"무례한 놈!"
매초풍이 사내의 손을 내리쳤다. 그러자 다른 사내가 불쑥 매초풍의 손을 잡으며 낄낄 웃었
다.
"부드럽구나. 어디 젖통도 좀 만져 보자."
사내가 덥석 매초풍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매초풍은 분하고 억울해서 고함을 질렀다.
"설란, 네 년이 나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런 장난을 치느냐?"
그러자 앞장을 서서 들어왔던 사내가 말을 받았다.
"설란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괴짜지. 아까 물에 화정을 넣은 게 아니라 간지러움을 타는
약을 넣었거든……."
매초풍은 문득 온몸이 간지러움을 느꼈다. 그것을 의식하자 점점 더 간지럽기 시작했다. 매
초풍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온몸으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착각에 시달렸다. 내력을 부릴
만한 경황이 없었다.
이때를 이용해 사내들이 달려들어 매초풍을 마음껏 희롱했다. 사내들은 매초풍의 전신을 입
으로 빨아대고 손으로 주물러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매초풍은 눈을 꼭 감고 눈물을 참았다. 사내들은 급기야 발정난 수캐처럼 씩씩거리며 욕정
을 발산하려고 했다. 매초풍은 포기한 채 사내들에게 몸을 내맡겼다. 한 사내가 막 매초풍의
다리를 벌리려고 할 때였다.
문이 열리면서 설란이 들어왔다.
"어서 물러나지 못할까!"
설란이 크게 꾸짖자 사내들이 쩔쩔매며 물러갔다. 설란이 매초풍을 토닥여 주었다.
"됐으니 그만 울어요. 여인이라면 누구나 다 한 번씩 겪는 일이 아니겠어요!"
설란이 얼른 완두 알만한 빨간색의 환약을 매초풍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매초풍은 간
지러움을 씻은 듯이 벗어 던지고 예전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매초풍이 기다렸다는 듯이 설란의 뒷덜미에 있는 대추혈을 잡아 쥐었다. 그리고 무섭게 그
녀를 노려보았다.
"죽일 년, 네 년마저 나를 희롱할 셈이더냐?"
그러나 설란은 태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종알거렸다.
"놓지 못해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래요?"
순간 천산 마귀할멈이 떠올랐다. 매초풍은 할 수 없이 설란을 풀어 주었다.
설란은 매초풍을 데리고 외진 방으로 갔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여인들의 옷가지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매초풍은 자색 저고리와 붉은
색 치마를 골라 입고 설란의 뒤를 따라 넓은 내실로 갔다.
천산 마귀할멈은 검은 색 옷을 걸치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얼굴은 여전히 검은 천으로 가
려진 상태였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새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잠들어 있었다.
매초풍이 절을 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잠든 고양이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매초풍, 내가 왜 자네를 희롱했는지 알겠는가?"
"가르쳐 주십시오."
"중원 땅에 돌아온 후부터 내 무공을 모두 전수받을 만한 제자를 물색해 왔었네. 허나 아직
내 마음에 드는 자를 만나지 못했지."
"여혈의가 스승님의 제자가 아닌가요? 그리고 또 탈명한추 변청교의 친동생인 변홍의 역시
스승님의 제자가 되기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 여혈의란 놈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목적은 여혈의를 이용
해 묘상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거든. 이미 여혈의는 쫓겨났어.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혈의를
도와 자네를 죽여 버렸을지도 모르지."
매초풍은 소름이 돋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천산 마귀할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변흥의란 놈을 놓고 말하자면 그 놈이 나와 여혈의가 가깝게 지내는 것을 보았으니
으레 죽여 입을 막아야겠지만 탈명한추 변청교의 친동생이라고 하기에 생각을 달리했지. 앞
으로 그 놈을 인질로 삼아 변청교를 다스릴 생각이야."
그녀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볼멘소리를 냈다.
"헌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글쎄 변홍의란 놈이 사라졌단 말이야. 사람을 시켜 수소문해
보았지만 전혀 행방을 알아낼 수가 없어."
매초풍은 변홍의가 무엇 때문에 천산 마귀할멈에게 소용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녀가 이미 그를 죽였으니 어쨌든 낭패였다. 매초풍은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계속 고시랑거렸다.
"매초풍, 넌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천하의 사내란 다 믿을 게 못 된다구. 결국엔 후회를 하
게 되는 게 사내들과의 인연이지."
"전 일찍부터 천하의 사내들을 짐승으로 보아 왔으며 원수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이 묘상이란 사내의 배신 때문에 천하의 모든 사내들을 미워하고 있
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사내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또 입을
열었다.
"내 슬하에 있는 계집들 모두가 사내들에게 피해를 보았지. 하지만 내 밑으로 온 후로는 자
기 손으로 그 사내들을 잡아죽일 수가 있게 되었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모두가 약골이라
큰 그릇이 될 수 없다는 거지. 말하자면 내 제자가 될 만한 계집이 없다는 거야."
그 말에 매초풍이 다시 절을 올렸다.
"제자가 사부님의 믿음을 받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행운이 아닌가 하옵니다."
"아니다. 행운이 아니라 자네의 뛰어난 체력과 총명한 머리 때문이지. 솔직히 말해 사실 난
자네를 제자로 맞이하려고 했으면서도 다른 한 계집을 마음속에 넣어 두고 있었지. 나중에
자네를 선택하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 계집이 누구이온지요?"
"바로 여소교지."
매초풍은 매우 놀랐다. 여소교가 그동안 어디서 그 엄청난 무공을 익혔는가 의문이었는데
이제 그 실마리가 풀리는 듯싶었다.
"허나 제가 벌써 여소교를……."
매초풍은 자기도 모르게 실토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천산 마귀할멈이 정색하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지난 밤에 자네가 그 애를 죽였지. 사실 두 사람은 성품도 비슷하고 무공
도 막상 막하지. 그래서 난 누구를 제자로 받아들여야 할지 마음속으로 고심을 많이 했어.
그런데 자네들은 또 서로가 앙숙이라 결국 이기는 쪽을 선택하기로 결정을 했었다네."
매초풍은 지난 밤의 일을 문득 돌이켜 보며 수치감에 시달렸다. 헌 신발만 아니었다면 자신
은 분명 얼어죽고 말았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말했다.
"죽기 살기로 나를 쫓게 했던 것은 너의 인내심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오늘 여
러 번 너를 희롱한 것은 사내들에 대한 증오심을 강하게 심어 주기 위함이었어."
"사부님의 뜻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좋다, 그럼 이제 일어서라. 하루빨리 자네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고 싶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건강성엔 무공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과 괜히 마찰을 일으키지 말고 호젓한
곳으로 가 무공을 닦자."
"헌데 엽 소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은 하종과 함께 있다니 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그러나 청청이는 고생을 좀 해야 돼.
그래야 내 진심을 알게 될걸세. 사내 놈들의 허위와 악랄함을 깨달은 다음에 데리고 올 생
각이야."
천산 마귀할멈의 일행은 마차 네 대에 나눠 타고 길을 떠났다. 천산 마귀할멈은 천산 마궁
으로 돌아가 수련을 하려고 했으나 여인들의 마음이란 죽 끓듯 해서 남행하기로 결정했다.
매초풍은 신이 났다. 그녀는 충심으로 천산 마귀할멈을 따랐다. 천산 마귀할멈 역시 내심 흡
족하여 미소를 연발했다. 천산 마귀할멈은 마차 안에서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무학의 요
결심법(要訣心法)을 구술로 전수하고 매초풍에게 암송하도록 했다.
매초풍은 요결심법을 음미했다. 강호의 무공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유독 기를 운행시키
는 법문만은 소녀공과 흡사했다. 단지 천산 마귀할멈의 심법에서는 건장한 사내들을 빌려
무공을 수련한다고 떠드는 대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매초풍은 어느 정도 무공으로 단련된 몸이어서 천산 마귀할멈의 무공을 며칠 사이에 대략
전수받을 수가 있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그런 매초풍을 보고 다시 한 번 만족해 했다.
매초풍이 물었다.
"한 가지 터득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가르쳐 주십시오. 심법에서는 건장한 사내의 양기로
공력을 돕는다고 했는데 대관절 어떻게 해야 사내들의 양기를 얻을 수 있죠?"
"자네와 여소교가 짧은 기간 동안 소녀공을 익힌 것은 대단한 일이야. 허나 더럽고 추잡한
사내들에게 한껏 조롱을 당하고 자기 몸을 더럽히면서 익혔으니 애석하지. 자넨 진현풍에게
버림을 받고 사내들을 저주해 온 여인이 아닌가? 헌데 왜 그 따위 너절한 방법으로 무공을
익으려 드느냔 말이다. 정말 수치야!"
"죄송합니다. 어서 고명한 무공을 몸에 익힐 생각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만약
일찍 사부님을 만났더라면 그런 수치는 당하지 않았을텐데……."
그러면서 매초풍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마귀할멈이 묘상이란 사내와 한동안 함께 살았다고 하지만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남녀간의
달콤한 맛을 진정으로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젊고 영준한 사내들만 골라서 동
침을 했거든. 내 음기도 보하고 사내의 맛도 보았으니 그 짜릿한 쾌감을 어찌 할멈이 알 수
있으랴?'
천산 마귀할멈이 제 흥에 겨워 중얼거렸다.
"진작 자네와 같은 제자를 만났더라면 얼빠진 사내들을 더 많이 혼내 줄 수 있었을 텐데 정
말 아쉬워. 아무튼 사내가 눈에 띄면 가차없이 죽여 버릴 것이다!"
그 말에 매초풍은 울상이 되었다. 이러다가 사내 맛을 더는 볼 수 없게 되는 게 아닌가 하
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산 마귀할멈의 뜻을 거역할 수 없기에 그녀는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지요. 앞으로 사내들이 저를 건드리면 아니 쳐다보기만 해도 당장 요절을 내놓고 말
것입니다."
"장하다. 그래야지!"
천산 마귀할멈이 좋아서 낄낄 웃자 매초풍이 눈치를 살피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직도 알려 주시지 않으셨어요. 대관절 사내들을 빌려 어떻게 무공을 닦는다는 말
씀입니까?"
마차는 밀보리밭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문발을 헤치고 밖을 내다보았
다. 농부들이 밀보리밭에서 부지런히 김을 매고 있었다.
"설란!"
그러자 설란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마차에서 훌쩍 몸을 날리더니 이쪽으로 날아왔다.
"무슨 분부가 있으신지요?"
"쓸 만한 놈으로 하나 잡아오도록 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설란이 묘하게 웃었다.
"어디 한두 번 해온 일입니까요."
"내가 너무 설란을 얕잡아 보았군. 정말 부러운 경공술을 갖고 있군요."
매초풍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러자 천산 마귀할멈이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내 수하에는 무능한 자란 없어.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는 일도 별로 없지. 몇 년 전 천산
기슭에서 무림의 고수들이 한패가 되어 나를 공격했던 일이 있었지. 그때도 설란과 설매 그
리고 설죽, 설국이 나섰지. 또한 아련이란 아이가 크게 활약을 해 쉽게 물리친 일이 있었
어."
아련이란 여인은 바로 취붕객점에서 탈명한추 변청교와 싸웠던 여인이라는 것을 매초풍은
알고 있었다.
"설란의 말을 들으니 사부님은 설국을 가장 총애한다고 하던데 그녀가 말하는 걸 보지를 못
했어요. 꽤나 과묵한 여인인가 보죠?"
"그 앤 벙어리야."
뜻밖의 사실이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말을 계속했다.
"그 앤 날 때부터 그런 게 아니라 도중에 일을 당했지. 원래 그 앤 천산 기슭에 있는 왕부
에 시녀로 있었는데 어느 날 손님에게 차를 따르다가 손님의 옷을 더럽혔어. 그 벌로 왕예
나으리가 시뻘겋게 달군 인두를 그 아이 목에 넣고……."
"지독하군……."
소름이 확 돋았다.
"설국은 왕부에서 쫓겨났다가 마침 내 눈에 띄었지. 그 애가 겪은 고초를 이웃들에게 들은
난 이가 갈리더군. 난 그 애를 데리고 왕부로 쳐들어가 열여섯 명의 시종들을 모두 죽여 버
리고 그 놈을 잡아 설국에게 똑같이 하라고 시켰지."
천산 마귀할멈의 입가에는 설핏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오히려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즐거
워하는 것 같았다.
이때 밀보리밭이 있는 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났다. 설란이 농부 하나를 옆구리에 차고
경공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몇몇 농부들이 호미를 치켜들고 쫓아왔다. 그러나 농부
들은 점점 뒤처졌다.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설란은 자기보다 덩치가 큰 농부를 옆구리에 끼고는 달려와
마차에 뛰어올랐다. 농부를 내려놓으며 설란이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대단한 장사였어요. 혈도를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낭패를 볼 뻔했어요."
농부는 두 눈만 멀뚱히 뜬 채 누워 있었는데 손과 발이 투박한 것이 힘깨나 쓸 것 같았다.
"좋아, 젊고 소처럼 튼튼한 놈이로군. 아무튼 설란인 사람을 볼 줄 알거든."
천산 마귀할멈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설란이 우쭐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농부를 잡
아 일으켜 가부좌를 틀고 앉게 했다. 농부는 눈이 퉁방울만해져 세 여인을 번길아 보며 와
들와들 떨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괴춤에서 대나무로 만든 대롱을 꺼내며 매초풍을 의미심장
한 눈빛으로 건너다보았다.
"그럼 우리 가문의 심법을 보여주지. 진기가 독맥(督脈)에 모여지기를 기다려 그걸 왼팔에
운행시키면서 손바닥에 있는 노궁혈을 통해서 사내의 독맥 명문혈에 불어넣어야 하네."
천산 마귀할멈은 자세히 설명을 하면서 왼쪽 손바닥을 농부의 뒤허리에 있는 명문혈에 갖다
댔다. 순간 농부의 두 눈이 토끼눈처럼 새빨갛게 충혈되고 얼굴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천산
마귀할멈의 진기가 사내의 체내에 깊이 들어간 것이었다.
"이젠 대롱을 놈의 머리에 있는 백회혈에 꽂아야 해."
천산 마귀할멈이 대롱을 번쩍 들더니 농부의 정수리에 쿡 박아 넣었다. 대롱을 통해 시뻘건
뇌수가 솟구쳤다.
매초풍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귀할멈의 심법이란 게 내 구음백골조와 별반 차이가 없구나. 손가락만 살짝 튕겨도 될
걸 가지고 대나무 대롱으로 힘을 들일 건 뭐람!'
천산 마귀할멈의 얼굴을 가렸던 복면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그녀는 복면을 조
금 들고 빨대를 입에 물고는 힘껏 빨기 시작했다. 순간 농부가 전신을 마구 떨며 사지를 버
둥거렸다. 매초풍은 그 광경이 놀랍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토할 것만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농부의 뇌수를 마음껏 빨아먹고 나서 복면을 다시 내리고는 앉은 자세로
두 눈을 감고 수양을 하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이 농부의 뇌수를 빨아먹던 모습을 생각하며 새삼 구역감에 시달렸
다. 그녀는 사람의 뇌수를 먹는 사람을 사부로 모셨으니 자신도 그렇게 해야만 될 것 같아
진저리를 쳤다.
잠시 후 천산 마귀할멈이 조용히 눈을 떴다. 힘이 새롭게 되살아난 듯했다.
"뇌수를 먹은 뒤엔 즉시 손을 써서 사내의 성기까지 복용해야 진정으로 보신이 되는 거다!"
천산 따귀할멈이 설란을 불렀다.
"어서!"
그러자 설란이 농부를 눕히더니 바지를 벗겼다. 사내의 성기가 드러났다. 설란이 단검으로
사내의 성기를 도려 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것을 받아쥔 천산 마귀할멈이 말했다.
"양기를 돕는 데는 천하 최고지!"
천산 마귀할멈이 사내의 성기를 어적어적 씹어먹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
로 치를 떨었다.
'이건 생사람을 잡아먹는 꼴이 아닌가. 그래서 강호에서 이 여인을 마귀할멈이라 부르는 모
양이군. 실로 나보단 훨씬 지독한 여인이야!'
입 주변을 훔치며 천산 마귀할멈이 매초풍에게 말했다.
"왜 낯색이 그 모양이지? 나 역시 어머니가 이 무공을 닦는 걸 처음 보았을 땐 혼비백산하
여 도망을 쳤었지……."
설란이 한마디 거들었다.
"설국인 혼절까지 했었죠. 그 앤 사람을 죽이면 죽였지, 차마 그런 장면은 볼 수 없다며 발
버둥을 쳤었어요. 하지만 매 소저는 약간 얼굴만 찌푸렸을 뿐이니 정말 담이 큰 여인이에
요."
매초풍이 어색하게 웃었다.
"뭘요……?"
순간 매초풍은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울컥 토하고 말았다. 천산 마귀할멈이 배꼽을 싸쥐고
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매초풍은 담은 크지만 속은 좋지 않은가 보지?"
매초풍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사람의 뇌수를 빨아마시고 성기까지 먹어야 하는 무공이라면
당장 집어치우고 싶었다.
네 대의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산속에 위치한 절 하나가 보였다. 일행은 그 절 앞에서 마차를 세웠다. 이들을 지켜보던 비
구니 하나가 빠꼼히 내다보더니 절 안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조금 후 세 명의 중이 나왔다.
이번엔 사내 중들이었다. 그들은 아리따운 여인들이 온 것을 보고는 실눈을 만들었다.
눈웃음을 치는 중들을 보자 천산 마귀할멈은 심히 불쾌했다. 그녀는 모든 중들을 잡아 묶으
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십여 명의 시녀와 여종들이 절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절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돼버렸다.
스물여섯 명이나 되는 중들이 결박을 당한 채 모두 뜨락에 모였다. 네 명의 늙은 중을 제외
하고는 한결같이 피둥피둥 살이 찐 놈들이라 이상하게 여겨졌다. 신문을 해보니 늙은 중들
을 제외하고는 모두 밥이나 얻어먹고 계집질이나 일삼는 자들이었다.
"명색이 부처님을 모시는 중이란 놈들이 계집질이나 하고 중생들의 등이나 처먹어. 내 오늘
너희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다!"
그러자 목숨만 살려 달라고 모두 빌기 시작했다. 설매가 다가와 천산 마귀할멈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천산 마귀할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늙은 중 넷을 시켜 밥을 짓게 하고 나머
지는 모두 한곳에 가두어 버렸다.
천산 마귀할멈은 절 하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절에는 재물과 양초 그리고 양식이 풍부했
다. 일행이 반년을 먹고도 남을 만한 양이었다.
선방에 들어가 좌정하자 매초풍이 말했다.
"사부님, 저 구린내 나는 중놈들을 어서 죽여 버립시다."
천산 마귀할멈은 그저 웃기만 했다.
저녁을 먹은 후 천산 마귀할멈이 매초풍을 데리고 뜨락으로 나갔다.
"지금부터 자네에게 우리 가문의 무공을 가르쳐 주지. 우리 가문의 무공을 익히자면 우선
내공부터 닦아야 해, 자넨 내공을 어느 정도 익혔으니 조금만 더 공력을 들이면 열흘 안에
우리 가문의 내공법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을 걸세."
매초풍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친자식처럼 대해 주시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우리 가문의 내공을 익히는 데 중요한 것은 역시 사내들의 힘을 빌려 오는 거지."
천산 마귀할멈이 손뼉을 치자 설죽이 뚱뚱한 중 하나를 끌고 왔다. 매초풍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저더러 저 놈의 뇌수를 마시고 성기까지……."
매초풍이 더듬거리자 천산 마귀할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게는 저 놈이 한 마리의 돼지로 보이고 있다. 그러니 너도 맛있게 저 놈을 먹
어야 해!"
중이 발악을 해댔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년들아! 이 어르신을 건드리기만 해봐라!"
설죽의 손이 원을 그렸다. 순간 중은 혈도를 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사
나운 눈길로 매초풍을 쏘아보았다.
"똑똑히 봤지. 내게 감히 대드는 놈을 어디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느냐?"
"알겠어요. 이 중놈은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의 돼지예요. 당장 이 놈을 잡아먹겠어요."
큰소리를 친 매초풍이 중 앞으로 다가갔다.
'이왕 마귀할멈의 제자로 들어온 이상 사람의 고기를 먹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를 가만두
지 않을 게 분명하다. 내키지는 않지만 무공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매초풍이 정신을 가다듬고는 진기를 중의 독맥에 불어넣고는 대나무 대롱을 중의 정수리에
꽂았다. 그리고 뇌수를 빨아마셨다. 당장 토할 것 같은 역겨운 냄새와 맛이 그녀를 괴롭혔
다.
설죽이 어느새 중의 성기를 잘라 매초풍에게 건네주었다. 매초풍은 심호흡을 하고 나서 두
눈을 딱 감고 그것을 씹어 삼켰다. 그 다음 천산 마귀할멈이 가르쳐 준 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식경이 지나 두 눈을 떠보니 과연 전신에 진기가 뻗치고 정신이 명징해졌다. 매초풍은 스
스로 대견스러운 생각이 들어 천산 마귀할멈에게 절을 했다.
"참으로 신비스런 수련이었습니다. 앞으로 사부님의 가르침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따르겠습
니다."
천산 마귀할멈은 아주 흐뭇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 고기맛을 보면 절에 빈대가 남지 않는다고 이 년이 사람 고기 맛을 보았으니 앞으로
기를 쓰고 찾을 것이다!'
그 후 열흘 동안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의 가르침을 받으며 부지런히 마공을 연마했다. 밥
을 짓는 늙은 중 넷을 제외한 나머지 중들은 모두 매초풍에게 뇌수와 성기를 빼앗겨야 했
다.
열흘 사이에 매초풍의 무공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이젠 천산 마귀할멈과도 겨룰 만한
실력이 되었던 것이다. 열흘 후 천산 마귀할멈은 매초풍에게 몇 가지 특이한 초수를 전수해
주었다.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매초풍은 감히 사내들과 재미를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마공을 어지간히 익히고 보니 자연 음탕한 생각이 몸 안에서 꿈틀거렸다. 원래 그녀는 소녀
공을 익힌 몸이라 보통의 여인들보다 음욕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초풍은 끝내 음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슬그머니 절을 벗어났다.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한 촌락이 있었다.
매초풍은 아낙으로 가장한 채 그곳으로 들어가 세 명의 시골 사내들과 한껏 정을 통했다.
그녀는 온종일 세 사내와 번갈아 살을 섞으며 욕정을 불태웠다. 그런 다음 그들을 모두 죽
여 버렸다.
매초풍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절로 돌아왔다.
천산 마귀할멈이 쌀쌀한 눈길로 매초풍을 노려보았다. 설매, 설란, 설죽, 설국도 뒤에 서서
매초풍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주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매초풍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이윽고 천산 마귀할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년, 어찌하여 사내들과 살을 섞었느냐?"
순간 매초풍은 깜짝 놀랐다.
"제가 어찌……."
"뭣이,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천산 마귀할멈이 고함을 치자 아련이 걸어 나왔다. 허리에는 검은 색 넓은 띠를 두르고 있
었다. 그 띠는 천산 마귀할멈의 수하를 뜻하는 집법사자의 표시였다. 매초풍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왜냐하면 아련이 끌고 나오는 시체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맞아죽은 바로 그 사내들이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물었다.
"너의 최심장에 죽었는지 확인하려면 놈들의 뱃가죽을 살펴봐야 하겠지?"
매초풍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 그만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최심장을 사용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자 천산 마귀할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련아, 우리 가문의 가법에 따르면 어찌해야 하느냐?"
아련이 또렷한 어조로 대답했다.
"가법 제삼조에 의하면, 사사로이 외간 사내와 간통한 여인은 가차없이 죽여야 합니다."
매초풍은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사부님, 저는 사부님의 뒤를 이를 제자가 아니옵니까? 이 제자가 멋모르고 죄를 범한 것이
니 부디 이 한 번만……."
매초풍이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을 했다. 그러나 천산 마귀할멈이 코방귀를 날렸다.
"닥쳐라. 난 사내들과 어울리는 계집이 가장 밉다. 아련아, 어서 가법대로 저 년을 처단해
라!"
아련이 잠시 망설이는 기색으로 주춤거리더니 천산 마귀할멈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매초풍은 수제자입니다. 만약 저 년을 죽여 버린다면 사부님의 신묘한 무공을 이를 사람이
없어집니다."
설란도 한마디했다.
"처음으로 저지른 죄이니……."
그러나 천산 마귀할멈은 완고했다.
"무슨 소리! 저 년과 여소교는 소녀공을 배웠기 때문에 이미 악마의 길에 들어섰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붙는 음욕을 누를 길이 없는 년들이야. 그러니 가차없이 벌을 내려 그 음욕
을 아예 제거해야 한다!"
매초풍은 용기를 내어 다시 빌었다.
"사부님, 앞으론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어허, 나를 우습게 아는구나. 네 년의 맹세는 믿을 게 못 된다. 네 년은 일찍이 동사 황약
사를 배반하고 묘상 앞에서도 충성을 다졌던 년이 아니더냐!"
천산 마귀할멈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녀가 손을 휙 내저었다. 아련이 얼른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는 두 자 남짓한 시퍼런 단검을 들고는 매초풍 앞으로 나왔다.
매초풍은 이제 틀렸구나 싶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척했다. 그리곤 두 팔에 한껏 내력을 운
행시켰다. 매초풍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자신은 무림의 고수가 되고자 굽신거렸을 뿐이라며
이렇게 된 이상 가만있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산 마귀할멈이 강적이라
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음백골조와 최심장 역시 무적이라고 믿었다.
아련이 조금씩 다가왔다. 매초풍은 아련이 단검을 쳐들기만 하면 번개같이 일어나 최심장으
로 그녀를 죽일 생각이었다. 뒤를 이어 구음백골조로 설매와 설죽 그리고 설란과 설국을 차
례대로 뜯어놓을 계산을 했다. 그러면 걸림돌 없이 천산 마귀할멈과 맞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매초풍의 이런 계략을 천산 마귀할멈은 벌써 눈치채고 있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시
녀들에게 분부했다.
"저 년이 달아나지 못하게 에워싸라!"
네 명의 시녀와 아련이 매초풍을 둘러쌌다. 매초풍은 날개가 있어도 이젠 달아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때 시녀 하나가 소리쳤다.
"저기 변청교가 옵니다!"
매초풍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변청교를 만나면 입이라도 맞추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천산
마귀할멈이 놀라 한쪽으로 정신을 파는 사이 매초풍이 경공을 쓰며 달아났다.
아련이 쫓아가려고 했지만 천산 마귀할멈이 제지했다.
"변청교부터 물리친 다음에 그 년을 잡아 처단하기로 하자!"
곧 변청교가 나타났다. 변청교가 천산 마귀할멈을 보고는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이게 뉘시오?"
변청교는 이 근처를 지나다가 절의 중들이 못된 짓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응징을 하러 들렸
던 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산 마귀할멈과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천산 마귀할맘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오늘도 귀찮게 굴 셈이더냐?"
변청교는 시녀들은 물론 천산 마귀할멈 역시 못된 중놈들과 한통속으로 속단했다.
"그 수하의 못된 중놈들만 내놓으면 순순히 말씀을 따르겠소!"
그러자 아련이 나섰다.
"여기 있던 중들은 우리가 모두 죽여 버렸어요. 그들과 벗이라도 되나요?"
비로소 오해가 풀린 변청교가 크게 웃었다.
"음……, 하하하……! 그랬으면 다행이오. 어쨌든 이렇게 만났으니 마귀할멈과 한판 겨루어
보고 싶소!"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헌데 난 그대의 아우 변홍의를 죽인 일이 없다!"
"흥, 그럼 철시가 당신의 제자가 아니란 말씀이오?"
"어제까지는 제자였지만 오늘부터 아니다."
"아무튼 제자였다는 걸 부인하지 못하는 게 아니오. 철시가 내 아우를 죽였고 당신은 그녀
의 사부라는 건 엄연한 사실이오. 그러니 당신을 죽인다면 원수의 절반은 갚은 셈이 아니겠
소?"
"매초풍이 변홍의를 죽였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오혈궁 무리들이 거렁뱅이 패와 무림의 협객들의 손에 절단이 난 일을 알고 있소? 사후에
난 아우의 시체를 찾으러 갔었소. 내 아우가 그들의 손에 죽었다면 할말이 없겠지요. 하지만
오혈궁에 가서 겨우 잡초 속에 처박힌 아우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정수리에 구멍이 다섯 개
가 나 있었소."
"그렇다면 구음백골조가 남긴 흔적이란 말인가?"
"물론이오.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구음백골조를 쓰는 자는 철시와 동시 뿐이오. 그러나 동
시는 벌써 <구음진경>을 갖고 산속에 숨어 수련하고 있으니 철시의 소행이라는 건 명백하
오이다."
천산 마귀할멈이 이를 갈아댔다.
"매초풍, 그 년이 말썽이군!"
원래 천산 마귀할멈은 변홍의를 잡아 인질로 삼고는 변청교를 칠 계산이었다. 그런데 매초
풍이 중간에 변홍의를 죽였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변청교가 한걸음 나서며 으름장을 놓았다.
"마귀할멈, 내가 있는 이상 당신은 더는 무고한 백성들을 해칠 수가 없소!"
아련은 천산 마귀할멈이 천마해체대법을 쓴 뒤로 제대로 공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았다. 오늘만은 변청교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슬그
머니 잔꾀를 부려 호통을 쳤다.
"사부님, 저 놈이 무례하게 구는군요.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저 무례한 놈의 버릇을 고쳐 줍
시다."
그러자 나머지 시녀들도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저 놈의 버릇을 잡아 줍시다!"
변청교는 천산 마귀할멈의 기를 꺾을 생각이었다.
"네 년들이 한꺼번에 덤벼도 두렵지 않다!"
변청교는 천산 마귀할멈이 자신의 몸에 해를 주면서까지 더는 천마해체대법을 쓰리라 생각
하지 않았다. 천산 마귀할멈이 시녀들을 물리치고는 앞으로 나섰다.
"변청교, 그대가 제 발로 찾아와 도전을 한 이상 나를 무정하다고 생각지 말게."
아련이 소리쳤다.
"설매, 설죽, 설란, 설국! 우리가 먼저 저자와 맞서 보자구."
아련이 검을 뽑아 들고 나서자 네 시녀들도 합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산 마귀할멈은
속으로 흐뭇했다. 변청교가 내력을 소모한 다음 공격한다면 쉽게 그를 칠 수 있을 거란 생
각 때문이었다.
변청교도 자신이 시녀들과 싸우면 힘이 빠질 거란 계산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입장
이었다. 변청교는 달려드는 다섯 명의 여인들에게 살기 어린 눈빛을 쏘아댔다. 그리곤 오른
손을 들었다. 달려들던 여인들이 주춤 멈추는 순간 변청교는 등뒤에 숨겨 두었던 왼손을 앞
으로 뻗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다섯 개의 차가운 빛이 날아갔다.
"위험해!"
천산 마귀할멈이 소리쳤으나 벌써 늦은 후였다. 다섯 개의 탈명한추가 여인들을 각각 명중
시켰다.
"아악!"
여인들은 순식간에 모두 쓰러졌다. 모두들 이마에 있는 인당혈에 탈명한추를 맞고 죽고 말
았다.
기가 막힌 천산 마귀할멈이 목청을 높였다.
"오늘은 꼭 네 놈을 죽이고 말테다!"
천산 마귀할멈이 몸을 날리며 변청교에게로 날아갔다. 자정신침이 춤을 추듯 자색의 빛이
변청교를 향해 쏟아졌다. 변청교는 그녀의 비범한 내력과 변화무쌍한 무공을 맛본 적이 있
기에 그녀를 향해 수십 개나 되는 탈명한추를 뿌렸다. 삽시에 뜨락에는 자색의 연기가 자욱
했다. 수십 개의 차가운 탈명한추가 날아가다 천산 마귀할멈의 자색 섬광에 부딪쳐 사방으
로 흩어지곤 했다.
다시 일곱 개의 탈명한추가 꼬리를 물고 자정신침으로 이루어진 장막을 뚫고 곧바로 천산
마귀할멈에게로 날아갔다. 한 개만 맞아도 불구가 될 수 있는 것이라 천산 마귀할멈은 다시
천마해체대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갑자기 피를 뿜으며 몸을 팽이처럼 돌
렸다. 탈명한추가 가까이 날아왔다가 빙빙 돌아가는 거센 기류에 밀려 빗나갔다.
변청교는 연해 연방 탈명한추를 날려보내고 천산 마귀할멈은 천마해체대법으로 매번 그것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천산 마귀할멈의 피가 다 마르면 분명 변청교의 탈명한추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천산 마귀할멈은 위기를 느끼고는 연신 피를 뿌리며 달려들었다. 가깝게 접근한
그녀에게 탈명한추를 뿌릴 수 없는 변청교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순간 천산 마귀할멈이 장
을 내밀었다. 변청교가 급히 선공을 운행시켜 쌍장으로 맞받아쳤다.
펑!
두 사람은 동시에 한 장 남짓 뒤로 밀려났다. 시녀들이 달려와 비틀거리는 천산 마귀할멈을
부축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싸울 태세를 취했다. 눈에는 살기가 가득
했다. 변청교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독기 어린 눈으로 변청
교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승리감이 어려 있었다.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변청교의 입과 귀로 검붉은 피가 흘렀다. 변청교가 힘없는 소리로 말
했다.
"마귀할멈, 당신은 내 탈명한추가 결코 천하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증명하였소. 당
신은 나보다 세군. 내가 졌소."
천산 마귀할멈이 거만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변청교가 더욱 침통한 목소리를
던졌다.
"이젠 날 죽여 주시오. 당신은 얼마든지 날 죽일 수가 있지 않소."
그러나 천산 마귀할멈은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코웃음을 날렸다. 그것은 더욱 큰 수치였다.
변청교는 수치감에 시달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날 죽이는 일조차 시시하단 말이오?"
변청교가 가까이 다가와 읍을 했다.
"그럼 나를 살려 준 은공에 감사를 하겠소. 이제부턴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참견하지 않을
것이오."
변청교가 괴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찢어 버렸다. 순간 차디찬 빛이 허공
으로 가득 흩어졌다. 변청교가 그 아래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곧 공중으로 흩어졌던 탈명한
추들이 뜨락으로 어지럽게 떨어졌다.
천산 마귀할멈은 변청교가 멀리 사라진 뒤에야 한숨을 돌렸다. 그녀는 참았던 피를 왈칵 쏟
았다. 그리곤 힘없이 주저앉았다.
여러 시녀들이 달려와 그녀를 안았다.
"정신을 차리세요."
이때 요사스런 웃음 소리가 느닷없이 터졌다. 이윽고 매초풍이 한들거리는 걸음으로 천산
마귀할멈 앞으로 걸어왔다.
"축하해요. 결국엔 변청교를 물리쳤군요."
매초풍이 탈명한추를 하나 주워 들며 말을 이었다.
"변천교가 다시는 탈명한추를 들고 우쭐대지 못할 거예요."
천산 마귀할멈이 겨우 일어나 의자에 몸을 어렵게 의지했다.
"철시, 네 년은 우리 가문에서 쫓겨난 여인이니 당장 사라져라!"
그러자 계집종 하나가 매초풍을 밀쳤다.
"어서 꺼지란 말이야!"
매초풍이 다짜고짜 그녀를 향해 장을 날렸다. 계집종이 비명을 내지르며 피를 토한 채 죽었
다. 나머지 계집종들이 단검을 뽑아 들고는 매초풍에게로 달려들었다. 매초풍은 자신이 익힌
무공을 시험이라도 해보듯 종횡무진 몸을 날리며 계집종들과 맞섰다. 순식간에 사방에는 시
체들이 쌓였다.
천산 마귀할멈이 다시 피를 토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매초풍, 넌 정녕 천하에서 가장 사악한 년이로구나?"
매초풍이 방자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호, 그렇지 않다면 어찌 철시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겠어요?"
매초풍이 당당히 천산 마귀할멈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이 음탕한 나를 죽이고 싶나요?"
천산 마귀할멈에게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애석하게도 변청교는 물리쳤지만 자신의 원기를 크게 상실해 버렸단 말이지요. 그것을 모
르고 자신이 패한 줄 알고 탈명한추를 팽개치고 간 변청교. 호호호, 하지만 이 매초풍의 눈
은 속일 수가 없어요. 지금 당신은 닭모가지 하나 비틀 힘도 없어요!"
"나를 잘 알고 있으니 그런 것쯤이야……."
천산 마귀할멈이 쓸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얼굴을 보인 적이 없어요. 이 제자는 그 점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에요. 미인인지 아니면 추녀인지……."
매초풍이 손을 뻗어 복면을 벗기려고 했다.
"감히!"
천산 마귀할멈이 꾸짖자 매초풍이 다시 웃었다.
"호호호 싫은가요? 당신이 좋아했던 묘상이 늙은 고양이상을 했으니 당신 역시 비슷하겠지
요."
순간 매초풍이 재빨리 복면을 벗겼다. 매초풍의 표정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돌변
했다. 눈앞에 드러난 천산 마귀할멈의 얼굴은 천하 제일의 아름다움이었다. 수정처럼 맑고
그윽한 눈동자와 넓은 이마, 그리고 앵두같이 붉은 입술……. 살결 또한 고왔다. 강남의 이
팔청춘 미인을 연상하게 했다.
"이 여인이 정말로 천하가 벌벌 떠는 천산의 마귀할멈이란 말인가? 내가 보기엔 꽃띠 처녀
같은데……."
"매초풍, 어쨌든 자네는 소원을 풀었다."
"만약에 내가 사내였다 해도 당신에게 반했을 겁니다. 이제야 묘상이 미친 듯이 당신을 쫓
아다닌 이유를 알겠어요."
"그 사람은 내 미색보다는 오혈궁 궁주의 자리를 더 소중히 여겼던 인간이었어."
묘상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천산 마귀할멈이 불같이 화를 냈다.
매초풍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다시 한 번 자기 눈을 의심했다. 너무나 젊고 아름
다웠다. 그러나 천산 마취할멈의 눈가에는 알 수 없는 애수가 엿보였다.
천산 마귀할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른이 넘었지만 남들의 눈에는 이팔청춘으로 보이지. 그래서 무공은 뛰어났지만 뭇호걸들
에게 애숭이로 보일까 봐 복면을 하고 다녔던 게지."
매초풍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소녀로 보자 복면을 하고는 신비스럽게 나타났었던 거군요."
이때부터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을 본받아 머리를 길게 뒤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손톱을
길게 길렀다. 그녀는 싸움에 나설 때마다 매의 발톱 같은 두 손을 쳐들고 긴머리를 휘날렸
다. 그것은 상대에게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의 정수리를 겨누고 손을 높이 들었다.
"아름다운 사람……! 하지만 당신을 이 세상에 남겨 둘 수는 없어요!"
"잠깐, 더 할말이 있네."
"죽을 마당에 무슨 말? 허나 내게 이로운 거라면 들어주지요."
"너에게 이로운 것이다."
잠시 숨을 돌린 천산 마귀할멈이 말을 이었다.
"내 무공의 진수를 배우고 싶지 않나?"
"물론이죠."
"그럼 가르쳐 주지. 내 목숨을 살리는 일인데 마다할 수 없지."
"오호호호, 과연 총명한 여인이로군요. 하지만 당신의 꾀에는 넘어가지 않아요. 무공을 가르
쳐 주는 동안 내력을 회복해 나를 치려는 속셈이지. 여우 같은 계집!"
매초풍이 송곳 같은 손가락을 천산 마귀할멈의 정수리에 사정없이 박았다.
천산 마귀할멈이 아픔을 참으며 매초풍을 노려보았다.
"이것이 스승을 죽이는구나……!"
"입으로만 사부라 불렸지 마음속으론 한 번도 그렇게 여긴 적이 없다. 내 사부는 오직 한
분 황약사뿐이다. 그분은 네 년보다 더 명성이 높은 영웅이야!"
매초풍이 그녀의 두개골 속으로 더 깊이 손가락을 박았다.
천하를 뒤흔들던 여걸 천산 마귀할멈은 이렇게 매초풍의 구음백골조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