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장 천년고목(千年古木) 大尾
-1
①
눈이 내렸다.
천지를 온통 은백색으로 물들이며 눈은 하남(河南)에도, 하북(河
北)에도, 그리고 광동(廣東)에도 내렸다.
하란산(賀蘭山).
북방의 대영산(大靈山).
하란산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 점의 변함도 없었다. 흰 눈을 인 채
고요히 머물고 있는 하란산의 웅자는 어찌 보면 입정(入定)한 노
승같기도 했다.
하후성은 마침내 하란산에 왔다.
왼손에 흰색의 목검을 들고 눈을 맞으며 하란산으로 온 그는 온통
백설천지인 하란산 기슭을 밟으며 서서히 걸음을 옮기고 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언덕의 천년고목이 서 있던 자리.
그러나 지금은 그 거대한 천년고목은 사라지고 없었다. 벼락에 의
해 어느 날 갑자기 불타 버리고 만 것이었다.
다만 타고 남은 잔재 위에 흰 눈이 가득 덮여 있을 뿐이었다.
하후성의 눈이 부러진 고목 둥치에 딱 멈추더니 그만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고... 고목(古木)이... 고목이... 부러지다니.......'
그의 몸 역시 눈에 띌 정도로 경련을 일으켰다.
'황.... 결국 너와 나는 이 고목의 운명처럼... 이렇게 끝나야만
하는가?'
그는 우뚝 멈추어 선 후 목검을 든 채 마치 굳어버린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오직 하후
성 자신 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점(點). 그것은 하나의 검은 점이었다.
하란산 밑의 설야에 검은 점이 나타나더니 점차 커지며 한 인영의
모습으로 화했다.
전신에 흑의를 입고 머리에는 검은 건(巾)을, 왼손에는 검은 색의
목검을 쥔 창백한 청년, 그는 독고황이었다.
독고황은 천천히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과거 천
년고목이 우뚝 서 있었던 곳에 당도해 걸음을 멈추었다.
"......!"
독고황의 눈썹 끝이 부르르 진동했다. 그 역시 부러지고 검게 불
타 버려 둥치만 남아 있는 고목나무를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
은 모습이었다.
독고황은 하후성과 마주 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점차로 가라앉
더니 종내에는 아주 무심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후성도 마찬가
지였다.
천고의 두 기재(奇才). 운명이 갈라놓은 정사양도의 최절정에 올
라있는 두 청년은 불타버린 고목나무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눈이 계속 내렸다.
하후성의 머리 위에도, 독고황의 머리 위에도, 눈은 차츰 쌓였고
부러진 천년고목도 흰 눈에 덮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흰 눈을 사이로 한 채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상대를
서로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사이의 시간은 우주도 숨을 멎은 듯
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하후성이었다.
"황. 네가 이곳으로 올 줄 알았다."
"나 역시 네가 이곳에 올 줄 알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다시 침묵. 그 사이 눈은
함박눈으로 화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독고황이
입을 열었다.
"소성.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하후성은 나직히 웃었다.
"나도 모른다. 후후후.... 어쩌면 얄궂은 운명의 장난 때문인지도
모르지."
다시 침묵이 흘렀고 한참 후에 하후성이 또 입을 열었다.
"황. 중원신군(中原神君)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 아느냐?"
독고황은 언뜻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후성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바로 나의 외증조부님이시다."
독고황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이어지는 하후성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약간 떨리고 있었다.
"마라천황이 멸망시킨 중원무성 안에는 나의 모친도 계셨다. 그
분도 역시 돌아가셨다."
"그랬... 던가......."
독고황은 얼굴에 한 가닥 고통스런 표정을 짓더니 수중의 흑검(黑
劍)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소성. 나의 사부님은 물론 사모님과 오대마성 역시 모두 죽었
다."
독고황의 눈썹 끝이 올라가더니 하후성의 눈빛과 정면으로 대치했
다.
"철저히... 아주 철저히 짓밟혔다."
문득 독고황의 미간이 와락 접혀졌다.
"소성, 더 이상 말해 보아야 구차할 뿐이다. 검(劍)을 들어라."
그는 이렇게 외치며 마침내 검을 치켜들었고, 그를 바라 보던 하
후성의 눈자위는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하후성 또한 백검
(白劍)을 서서히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자신들의 옷색깔과 똑같은 검을 준비했다. 마치 약속
이나 한 듯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 목검을 치켜든 채 우뚝 섰다.
휘... 이... 잉!
바람이 거세게 불어 두 사람의 흑의와 백의가 눈보라와 함께 어지
럽게 휘날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독고황의 흑검은 좌상단의 건삼결
(乾三結)을, 반면 하후성의 백검은 중상단의 이사결(離四結)을 짚
고 있었다.
하후성은 바로 소림 최고의 검학(劍學)인 불영구검(佛影九劍)의
마지막 초식인 만불광휘(萬佛光輝)의 기수식을 취한 것이었다.
휘... 잉... 잉......!
눈보라가 석상처럼 굳어있는 그들을 연신 휩쓸었다. 시간은 그 사
이에도 쉬임없이 흘렀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조금도 움직이지 않
았다.
'소성(少星). 왜 먼저 공격하지 않느냐?'
독고황은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황(皇). 먼저 공격해라. 어서.......'
휘... 이... 이... 잉!
눈보라가 어느 순간 한 차례 격하게 몰아치자 독고황의 검 끝이
약간 이동했고, 따라서 하후성의 검도 움직였다.
돌풍이 또다시 일었다. 이번에는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외에 다른 물체들을 쓸어갔다.
휘... 이... 이잉!
고목나무의 둥치에 쌓여 있던 눈이 바람에 쓸려가자 무엇인가가
두 사람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벼락을 맞아 불타다 남
은 한 조각의 나무껍질이었다.
<하후성(夏候星).
독고황(獨孤皇).
- 다시 만날 그 날까지 변치 않을 우정(友情)을 위하여.>
운명(運命)이여!
드디어 독고황의 몸이 날았다. 그는 신검합일(身劍合一)이 되어
마침내 하후성과 부딪친 것이었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섬전(閃電)을 다시 수천분지 일로 가른 찰나
에 그들의 검과 검은 서로의 몸을 찌르고 있었다.
"으윽!"
"윽!"
짧은 비명과 함께 그들은 꼭 한 치의 간격을 두고 땅에 떨어져내
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무섭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후성의 안색은 격동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황.... 너는... 충분히 나의 가슴을 찌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왜... 검을 갑자기 틀었느냐?"
독고황의 흑검은 단지 하후성의 옆구리에 깊은 상흔을 남겼을 뿐
이었다.
피(血). 붉은 피가 하후성의 백삼을 적시고 다시 점점이 뿌려져
백설을 붉게 물들였다. 이번에는 독고황이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
로 말했다.
"소성.... 너의 검도 나의 단전(丹田)을 분명히 찔렀다. 그런
데... 왜 갑자기 오 푼이 빗나갔느냐?"
두 사람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된 채 서로의 눈을 집요하게 주시하
고 있었다.
휘... 이... 이... 잉!
눈보라가 한 데 얽힌 그들을 휘몰아쳤고 하후성의 약간 갈라지는
듯한 음성이 바람을 타고 날렸다.
"황, 너는... 애초부터... 나를 공격할 마음이 없었다!"
독고황의 침중한 음성도 바람에 흩날렸다.
"그것은... 소성, 너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너에게는 대의(大
義)라는 것이 있어 모든 감정을 죽이고 나를 찔렀지."
"황......."
"소성, 수년이 흘렀으나... 너는 아직도 독하지가 못하구나. 너
는... 반드시 나를 찔러야만 했다."
위... 이... 이... 잉!
하후성과 독고황은 똑같이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불길처럼 뜨거운 그 무엇이 동시에 두 사람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북받쳐 올랐다.
"소성!"
"황!"
그들은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그리고 독고황의 눈에도 하후성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으며 뜨거운 눈물과 함께 웃음이 천천히 그들
의 얼굴에서 피어올랐다.
"소성, 좋은 녀석......."
그러나 갑자기 독고황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의 백납같은 안
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의 단전 부근에 엉켜 있던 본신
의 진기가 무섭게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내 쓰러질 듯 휘청했다.
"황!"
하후성은 크게 부르짖으며 다급히 그를 부축했다. 독고황은 그의
품에 안긴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성. 그 옛날...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도 지금처럼 눈이 많
이 내렸지......."
"황!"
독고황은 희미하게 웃으며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녀석, 슬퍼하지 마라. 나는 죽지 않는다. 아니, 죽을 수가 없다.
내가 죽는다면 너 또한 살지 않을 것임을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
기 때문이다."
독고황의 미소를 대하는 하후성의 얼굴에도 곧 그와 동류(同類)의
미소가 떠올랐다.
우정(友情). 그들의 우정은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순
간 그들의 가슴 속에서 더욱 찬연히 피어나고 있었다. 쏟아지는
눈송이의 축복을 받으며 두 사나이의 우정은 더욱 찬란하게 설화
(雪花)처럼 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하후성과 독고황은 서로 끌어 안은 채 천천히 자리에 주저 앉았
다.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는 그들의 몸과 백설을 다 함께
단심(丹心)처럼 붉게 물들였다.
이때였다. 문득 하란산 언덕 밑으로부터 한 줄기 인영이 쾌속한
속도로 날아왔다.
그는 바로 허름한 마의도포를 입은 천하제일도(天下第一道) 적봉
우사였다. 또한 그의 품에는 한 가냘픈 여인이 안겨져 있었다.
그녀는 바로 전신 삼백육십오혈이 제압된 채 가사 상태에서 수정
관에 안치되어 있던 천하제일지녀 종리유향이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지금 종리유향의 두 눈은 과
거와 달리 충만한 생기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
아름다운 옥음(玉音)이었다. 종리유향의 음성은 눈보라 속에서 지
극한 애정을 담은 채 맑게 울리고 있었다.
"저에요, 황!"
다시 한 차례 옥음이 눈보라 속에 짜랑하게 울리자 독고황은 꺼져
가던 의식이 소스라치듯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가. 이 음
성은? 이 음성은......?
죽었다 해도 그 음성을 들으면 벌떡 일어날 그였다.
"유... 유향(有香)!"
사랑(愛)의 힘은 기진했던 그를 실제로 급격히 일으켜 세웠고, 어
느 틈엔지 적봉우사의 품에서 벗어난 종리유향은 새처럼 앞으로
달려나가며 사랑하는 정인의 이름을 마구 불렀다.
"황, 황......!"
"유향......!"
마침내 두 남녀는 눈보라 속에서 서로를 힘껏 부둥켜 안았다. 그
들이 그렇게도 목메이게 갈구하던 그들 만의 우주(宇宙)가 기어코
완성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설사 세상의 종말이 닥친다 할지라도 이제 그들로서는
두려울 게 없었다. 두 사람은 눈보라 속에서 다시는 떨어지지 않
으려는 듯 굳게 굳게 끌어안고 있었다.
하후성도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잠시 독고황과 종리
유향이 한 덩어리가 된 모습을 바라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아! 노선배님......."
적봉우사의 초연한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허허허.... 오랫만이구나. 소형제."
"노선배님께서... 어찌?"
적봉우사는 독고황과 종리유향을 바라본 뒤 길게 탄식하며 말했
다.
"소형제. 자네는 모르겠지만 독고황은 이곳으로 올 때 이미 자신
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네."
"아!"
"그는 천형뢰에 갇혀 있던 사천 명의 정사고수들을 모두 풀어주고
마종지문도 해체시켰네."
하후성은 가슴이 거세게 격탕함을 느꼈다. 일섬의 전류와도 같은
격정이 정수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신을 관통하고
있었다.
적봉우사는 담담히 말했다.
"또한 이미 그는 소형제의 일검(一劍)으로 인해 전 내공이 모두
흩어져 다시는 무공을 쓸 수 없게 되었네."
적봉우사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말했다.
"그를... 용서해 줄 수 있겠나?"
그 말에 하후성은 문득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에 하얀 눈송이가
송이송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용서할 수 있느냐고요?"
"그렇네. 그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하네."
하후성은 미소를 지었다. 눈부시게 보이는 미소였다. 하후성은 담
담히 입을 열였다.
"노선배님. 저는 더 이상 용서할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이 운명의
장난이었거늘... 대체 누구를 용서하는 것입니까?"
"오! 소형제......"
"하하하...! 이 눈(雪)! 눈이 모든 것을 덮어 주고 있지 않습니
까? 그 동안의 피도, 음모도, 원한도, 한(恨)마저도 이 눈이 모두
덮어 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후성은 눈발을 향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후련해지도
록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의 밝고 시원한 웃음소리는
하란산의 언덕을 울리고 있었다.
휘... 이... 이 ...잉!
눈보라가 그를 휘몰아쳤다. 표표히 피로 물든 옷자락을 휘날리고
서 있는 하후성의 모습은 또 하나의 고목나무처럼 보였다.
한 시대(時代)에 태어난 천하제일의 두 기재(奇才).
정(正)과 사(邪) 양극(兩極)을 걷게 했던 운명의 장난도 그들의
뜨거운 우정을 훼방하진 못했다. 이제 모든 은원(恩怨)은 막을 내
리고 있었다. 두 천하기재의 영원한 우정의 힘이 운명의 사슬을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게 한 것이었다.
독고황(獨孤皇). 그는 비록 천하를 얻지 못했고 전 내공을 잃었으
나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랑하는 여인 종리유향
을 얻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최초이자 최후로 사랑한 여인을 얻음으로써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반면 하후성은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 하란
산의 고목나무 아래서 만났던 우정의 벗 독고황을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휘... 이... 잉.......
눈(雪)과 그리고 영원한 우정(友情)이 설원에서 찬란한 꽃을 피운
것이었다.
봄. 양춘가절(陽春佳節)의 따뜻한 햇살이 온누리를 밝게 비추었
다.
하란산의 한 언덕 위에는 예전에 지나던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던 천년고목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타버린 둥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훈훈한 봄바람이 불자 언덕 위의 풀잎들이 춤을 추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불타버린 고목의 둥지 끝에서 가늘
게 흔들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새싹.......
죽어버린 고목 둥치에서 연록색 잎으로 새 순(筍)이 트자 사람들
은 이 새 순을 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 이 어린 순(筍)은 언젠가는 크게 자라 다시 천년고목(千年古木)
이 될 것일세.
- 大尾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