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바람(風), 구름(雲), 눈물(淚)
뜨락에서 야릇한 향기가 흘러든다.
그 향기는 서향(瑞香)이었다. 서향이란 침정화(沈丁花)의 향기를 말한다.
과거 여산(廬山)의 승려가 침정화의 향기에 취하여 잠에 빠져들었다는 전
설이 있기에, 침정화는 수향(垂香)이라고도 불리운다.
또한 천리향(千里香)이라고도 불리우는 바, 그 향기가 꽤 먼 곳까지 퍼져
나가기 때문이다.
백무영은 눈길을 창 쪽으로 고정시킨 채 우두커니 서서 산호부인을 바라
보고 있었다.
산호부인은 술 내음을 풀풀 흘리며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야윈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지존은 후계자께서 돌아오실 경우, 그분이 연환마교 모든 무사의 생사여
탈권을 쥔다고 하셨소이다."
관욱량은 시립한 채 말했다.
백무영은 얼굴을 석고처럼 굳힌 채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뜨락에서 흘러드는 침정화의 향기가 그의 혼백을 취하게 만든 것인지.
"부디… 속하들을 거두어 주십시오."
관욱량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침전은 새카맣게 포위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말소리가 격앙되었기에, 뜨락을 지키고 있는 무사들이 침입자
에 대해 알아차리고 침전을 포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귀를 찢을 듯한 호각 소리, 휘파람 소리, 그리고 무사들의 옷자락이 바람
을 가르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 온다.
백무영은 팔짱을 낀 채 산호부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산호부인은 혼수혈이 찍혀 잠에 취한 상태에서 들릴 듯 말 듯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강호인은 악마야. 흐흑… 세상은 악마에게 정복된 거
야."
가냘픈 목덜미에 푸른 상흔(傷痕)이 엿보였다.
상처를 자세히 본다면, 그 상처가 가죽 채찍에 얻어맞아서 생긴 상처라는
걸 알 수 있다.
'사륵, 그 자는 산호부인의 심기가 흐트러진 걸 교묘히 이용했다. 그리고
나서 산호부인을 무자비하게 학대한 것이다.'
백무영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질 때.
와장창-!
소리와 함께 사방의 창이 부서지며 이십여 명의 흑의무사가 포검(抱劍)한
채 난입해 들었다.
"쳐랏!"
"동심육합검(同心六合劍)!"
"하앗! 모두 베어 버려라!"
이십칠 인의 무사는 허공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독이 발리어진 장검
을 어지럽게 휘둘러 댔다.
치리릿- 칫-!
방 안 가득 검화가 나부낀다.
검기가 흐르며 즙기가 베어져 나뒹굴기 시작한다.
관욱량은 기겁을 하며 녹슨 철검을 뽑아 들어 백무영 앞을 가로막고자
했다.
그의 발검(拔劍), 운검(運劍)은 역전의 노검사답게 노련하기 짝이 없으나
이미 늦은 후일 뿐이다.
백무영은 어느 틈엔가 일곱 자루 검이 이룩하는 검권(劍圈)에 휘어 감기
고 있었다.
눈을 현란히 자극하는 흰 빛줄기가 백무영의 몸을 포박하는 찰나, 관욱량
의 등줄기는 땀에 후줄근히 젖었다.
'늦, 늦었다.'
그의 마음 속으로 탄식의 언어가 형성되는 찰나, 백무영은 허공에 하나의
원을 긋고 있었다.
"덤비는 자는… 사양하지 않아!"
원이 그려진다.
원이 반 정도 그려지는 찰나, 일곱 자루 검이 그의 몸 가까이 다가서는데
… 그 순간, 백무영이 이룩하는 원형의 검에서부터 기이한 선천반탄강기
(先天返彈强氣)가 이룩되었다.
우우웅……!
수만 마리 벌 떼가 날아오르듯, 은은한 뇌성이 울려 퍼지며 문득 금빛이
방 안을 휘어 감았다.
관욱량은 무수한 혈편(血片)이 우박 떨어지듯 떨어지며, 일곱 명의 무사
가 허공에 뜬 채 가루로 바수어지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저건… 악마의 검이다!"
관욱량은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입을 딱 벌리고 말았으며, 그가 잠을 잘
때에도 풀어 놓지 않았던 철검이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땅바닥으로 굴
러 떨어졌다.
순간 백무영은 몸의 방향을 비스듬히 틀며 또 하나의 원형을 허공에 그
어 나갔다.
심극혜검(心極慧劍).
일컬어 만월(滿月)의 검이다.
허공에 화려하지도 찬란하지도 않은 은은한 금빛의 동심원이 무수히 떠
올랐으며, 금으로 만든 고리가 도처로 퉁기어 나가는 듯한 환상이 일어났
다.
수천 개의 금환(金環)이 어지럽게 떨치어지는 찰나, 방 안은 단말마의 비
명 소리에 휘감겼다.
처절한 비명 소리는 한순간 울려 퍼지는 것으로 끝났으며, 혈화가 허공
가득 피어 올랐다가 융단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너덜너덜하게 쪼개어진 인육(人肉)이 우박 떨어지듯 떨어져 내리
며 묘한 침묵이 형성되었다.
관욱량은 미친 사람처럼 눈의 초점이 흐려진 채 백무영을 보며 볼을 실
룩이고 있었다.
백무영은 천천히 손을 내리고 있는데, 그의 희고 매끄러운 손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거의 찰나적으로 이십칠 인의 일급무사를 베어 버린 것이다.
"……!"
그는 묵묵히 손을 내렸으며, 그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표정에 떠오르기 마
련인 오만한 빛이 아니라 우울과 고독의 빛이 엷게 흐르고 있었다.
'창궁법사,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 아수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백무영은 살기를 억제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만월의 검을 시전할 때마다 무수한 살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메마른 표정을 지으며 신형을 틀었다.
관욱량은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백무영을 상전으로 예우하고 있는 것이다.
백무영은 느릿느릿 걸어 관욱량 곁으로 다가섰다.
"물을 게 있소!"
"무, 무엇이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관욱량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기울어져 가는 연환마교가 백무영으로 인해 되살아나리라 믿어 의
심치 않고 있는 것이다.
백무영은 산 속의 심연처럼 그 빛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눈빛을 허공
에 응결시킨 채 물었다.
"사륵은 어디에 있소?"
"그는 천하정복을 하기 위해 자신의 휘하세력과 변황 마도세력을 하나로
규합하고 있습니다."
"……."
"그가 이룩한 계획은 혈우일통계(血雨一統計). 그는 일단 마도를 평정하
고 나서 백도를 쳐부수고자 하며, 현재 그는 오만 명의 정예무사를 이끌
고 곤륜(崑崙)의 축융곡(祝融谷)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실내의 공기는 냉각되기 시작했다.
"백도의 상부세력이 양분되어 서로 싸우기 시작하였으며, 축융곡에서 결
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륵은 백도가 내분 가운데 지리멸렬하기를 기다
렸다가 수하들로 하여금 백도인을 모조리 죽이고, 연환마교에 이어 관산
검맹마저 장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현재 그가 좌지우지 못하는 세력은
삼대세력뿐으로, 관산검맹과 대소림사(大少林寺)……."
"소림사, 죽은 종이 호랑이! 대(大) 자를 붙일 필요가 없어진 곳이지."
백무영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무공은 대부분 소림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나, 소림사는 오래 전에 잠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소림사가 강호정세의 일선에서 활동했더라면, 천하정세가 이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신몽고왕부!"
"으음, 고월! 나만큼이나 비정(非情)한 승부사."
"사륵이나 고월이 강호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도는 누가 이기든 처
참히 붕괴되겠지요. 백도는 머리가 없는 뱀(無頭蛇)과 마찬가지이니까!"
관욱량이 더듬거리며 말한 후에 백무영은 산호부인을 천천히 들쳐업었다.
이어 그는 죽립을 기우뚱 내렸으며, 왼손 손가락만 놀려 죽립 끝을 느슨
하나마 옭아매었다.
"이 곳 일은 관대교두에게 맡기겠소."
"아, 제게!"
"후후… 대교두는 일방(一幇)을 맡을 만한 사람이 아니겠소?"
"하오나, 지존의 하명에 따라 공자께서 마교의 후계자로 정해지셨거늘…
어이해, 노복이……."
"아마도… 그가 착오를 했을 것이오."
"으음……."
"후훗… 난 그의 후계자가 아니오. 나는 그의 적(敵)일 뿐이지."
백무영이 걷기 시작하자, 관욱량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냥 떠나지 마십시오. 이십팔금비노호법(二十八金臂老護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천여 살수들이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관욱량이 하소연하듯 말할 때, 백무영은 소매를 슬쩍 흔들었으며관욱량은
부드러운 강기가 밀려듬을 느꼈다.
대반야능력(大般若能力), 대곤륜의 절학이다.
그것은 유연(柔軟)하면서도 웅휘한 힘을 발휘하는 도가의 절학이다.
관욱량은 애써 천근추(千斤錐)의 내공으로 몸을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나
허사였다.
그는 수레바퀴에 밀려 버리는 잡초 마냥 주르륵 미끄러져서 등을 벽에
부딪친 후에야 겨우 몸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가 겨우 신형을 안정시킬 때, 백무영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방 안에는 산호부인이 마시던 술잔만 쓸쓸히 뒹굴고 있었으며, 융단 위로
금빛이 어른거릴 뿐이었다.
깨어진 창을 통해 달빛이 흘러든다. 그리고 먼 곳에서 용의 포효 소리가
들려 온다.
"우우……!"
지축을 뒤흔드는 천룡신후(天龍神吼).
그 소리는 어풍비행(御風飛行)으로 치달려가며 소리치는 백무영의 장한
(長恨)이 서린 부르짖음이었다.
우르르르릉- 쾅- 우르르릉-!
연환마교의 모든 건물이 뿌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하며, 사방에서 기절초풍
놀라움에 가득 찬 호통 소리가 들려 온다.
침묵에 빠져 있던 연환마교는 백무영의 천룡신후로 인해 경천동지할 요
동에 빠져드는 것이다.
"한 마리 용이 나타났다. 아아, 누구도 삼공자가 살아온다는 걸 믿지 못
하였는데… 단 한 분, 태상교주만이 삼공자의 생환을 믿었다. 그분이 판
단착오를 했다 여겼는데, 그분의 안목은 정확했다. 태상교주님이나 삼공
자나 두 분 다 거인 중의 거인이다."
관욱량은 철검을 주워 들고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는 이제 지하에 은닉해 있는 금비이십팔숙을 찾아가야 한다.
이젠 기다릴 필요가 없다. 사륵과 더불어 반검(叛劍)했던 자들에게 더 이
상 아량을 베풀어 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가을이 깊어 가는 옥천산, 어쩌면 정녕 단풍보다는 피가 붉으리라.
이틀 후, 악양루(岳陽樓).
그 위에 오르면 과거 오(吳)와 초(楚)를 나누었던 거대한 호수(湖水)를
볼 수 있다. 그 호수는 천하제일호(天下第一湖)로 불리우는 동정대호(洞
庭大湖)!
舊聞洞庭湖 今上岳陽樓
吳楚東南折 乾坤日夜浮
親朋無一字 老病存孤舟
戎馬關山北 憑軒涕泗流
예로부터 이름을 들어 왔던 동정호, 나 이제 악양루에 올랐노라.
오나라 땅과 초나라 땅이 호수의 동쪽과 남쪽으로 갈라졌으며, 천지만물
이 그 물 속에 비추어 있노라.
친한 친구에게서 편지 한 장 없고, 늙고 병든 몸이 의지할 것은 한 척의
배뿐.
관문 북쪽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난간에 기대어 서니 눈물만
쏟아진다.
누가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등악양루(登岳陽樓)라는 시를 모르겠는가?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호방한 기재로 세상을 조롱하며 낭만적인 시를
썼을 때, 두보는 병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천하를 주유하며 나라와 형제
가족을 걱정하는 시를 썼던 것이다.
한 척의 배가 악양루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포구(浦口)로 접어든
다.
배는 일엽편주,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와 호수가 거칠어진다면 금방 뒤
집어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배가 나아가는 속도는 지극히 빨랐기에, 배 꼬리에서는 흰 포말이
백룡(白龍)이 꿈틀거리는 듯 일어나고 있었다.
"넌 악마야! 언제고 널 죽일 테야!"
배 위에서 악에 받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작은 선실 안, 산발한 여인 하나가 쪼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노로 배를 젓고 있는 흑삼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건 그의 얼굴 아래쪽에 불과했다.
지극히 단아한 인상이다. 특히 한 일자로 꽉 다물려진 입술은 그의 기개
를 엿보이게 한다.
흠을 구태여 꼬집어 낸다면, 얼굴의 전체적인 인상이 너무나도 차갑다는
것.
"역시 동정호는 넓어, 이틀 내내 배를 저어서야 겨우 가로지를 수 있었으
니……."
그는 여인의 말에는 무심한 반응이었다.
"악마! 넌 저주를 받아 죽을 것이다. 네게 농락당한 모든 사람이 널 증오
하리라."
여인의 눈에서는 새파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쉬지 않고 저주의 말을 퍼부어 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끔 그녀의 눈빛이 습해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애써 눈물을 감추고 있으되, 청년의 얼굴을 가끔 훔쳐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후후… 군산(君山)은 둘레가 칠 리(七里), 일명 상산(湘山)이라고도 하지.
군산에는 상군(湘君)의 전설이 있지. 상군이란 전설상의 성황 순(舜)의 이
비(二妃)를 말하며, 군산이 군산이라 불리는 이유는 산에 상군(湘君)의 묘
소가 있기 때문이라던가?"
유유자적 말하는 청년의 키는 꽤나 헌칠했다.
그는 낡은 옷을 걸치고 있었으나, 헌헌한 기표를 지니고 있었다.
"냉혈살흔, 날 죽이지 않는다면 복수당하리라. 나의 고행 운남(雲南)에는
아직도 나의 아버지가 이룩한 세력이 건재하다. 내가 그들을 부르기만 하
면, 넌 그들에게 능지처참 당한다. 차라리 날 죽여라!"
발작적으로 말하는 여인은 산호부인이었다.
그렇다면 배를 젓는 청년은 냉혈살흔 백무영!
'병세가 많이 혼전되었다. 이제는 술중독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백무영은 내심 안도해 하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있다면, 추궁과혈술을 매일 시전하여 골수 속으로 저미
어 든 독기를 제거할 텐데! 그러나 문제는 본인의 마음 속 한(恨)이다.'
산호부인은 이 세상 모든 걸 저주하고 있었다.
그녀와 백무영 사이는 미묘하기 이를 데 없는 사이이다.
산호부인에게 있어 백무영은 첫 남자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이 함백으로 인해 맺어진 것이기는 하되, 만리장성을 쌓은
사이가 아니던가?
"날 죽여 다오!"
산호부인의 눈에서는 처연한 빛이 흐를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백무영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다만 자신의 몸이 사륵에게 더럽혀졌기에, 백무영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정반대되는 말을 지껄이는 것일지도…….
그게 바로 여심(女心)이리라.
"시끄러워!"
백무영은 꽤 냉정했다.
"야수 같은 자!"
산호부인의 뺨을 타고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더 이상 잔소리를 해 대면 아혈(啞穴)을 찍어 버릴 테다."
"흐흑……!"
"울 것 없어. 어차피 우리 두 사람 모두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 못할 특이
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마음이 모질지 못하다는 건, 스스로의 책
임이야."
백무영은 나직이 말하며 포구에 배를 댔다.
그는 산호부인과 나란히 배에서 내렸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유인(遊人)의 부부가 악양으로 접어든다 여길
것이다.
백무영이 악양에 들린 이유는, 산호부인을 위해 깨끗한 옷을 한 벌 사 주
기 위함이었다.
사실, 그녀의 옷차림은 너무나도 지저분했다.
옷자락이 찢어져 속살이 환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연환마교주의 제이부인이었던 여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다.
그녀가 산호부인이라는 건 전혀 추측도 되지 않을 정도로…….
산호부인은 반강제로 옷가게로 끌려들어가, 하얗게 물이 든 베옷 한 벌을
사 입게 되었다.
그녀가 늘 입던 비단옷과는 달리, 꺼칠꺼칠한 촉감은 주는 마의(麻衣)이
다.
"잘 어울리는군."
백무영은 흰 옷을 걸친 산호부인을 보며 히죽 웃었다.
"흥! 너 같은 색마가 하는 말은 귀에 들리지 않아."
산호부인은 내내 토라진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뺨에는 엷게나마 홍조를 떠올랐다.
두 사람은 양춘면을 파는 가게로 들어가 허기를 메웠다.
산호부인은 어찌 된 속셈인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더 이상 앙탈을
부리지 않았다.
다시 포구로 돌아왔을 때에는 하늘 가득히 황혼이 날개를 접어 내리고
있었다.
백무영이 노를 쥘 때, 포구의 인파 가운데 그를 째려보는 자가 있었다.
그는 거지였는 바, 백무영과 우연히 눈길이 마주치자 재빨리 신형을 돌리
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날 아는 자 같군.'
백무영은 거지를 뒤쫓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한시빨리 군산에 가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노를 저어 배를 달리게 할 때, 산호부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로 가는 거지?"
"군산(君山)."
"군산?"
"훗훗… 과거 나에게 살인청부한 사람이 있지. 그를 찾아가는 거야."
"으으, 그럼 백치부인이 군산에 있단 말이냐?"
"후후……!"
백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산호부인의 입가가 일그러졌
다.
"음월방이 백치부인을 데리고 간 곳이 군산이었군. 으음, 그러기에 여섯
인조(忍組)가 그 곳으로 갔던 것이군?"
"여섯 인조?"
"혈월(血月), 잔풍(殘風), 지주(蜘蛛), 냉독(冷獨), 귀마(鬼魔), 음수(陰手)의
여섯 인자조(忍者組)를 일컬어 신풍육살조(神風六殺組)라 한다. 얼마 전,
신풍육살조가 군산으로 떠나갔다."
산호부인은 쾌재연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백무영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까르르 웃었다.
"군산에서 뭘 바라는지 모르나, 아무것도 이룩하지 못할 거야. 호호! 모두
죽었을 것이다. 호호! 사륵은 무서운 자야. 함백 따위는 무참히 쳐죽일
수 있는 자이지. 호호! 과거 날 비웃었던 자들은 혈전 가운데 모두 죽으
리라. 호호호호……!"
산호부인이 광기에 가득 찬 웃음소리를 낼 때, 배가 갑자기 뱃머리를 쳐
들었다.
백무영의 옷자락이 팽팽히 부풀었으며, 두 손에서 뿌연 기류가 뿜어져 나
왔다.
과르르르르릉-!
소리와 함께 배는 이제까지의 속도보다 십 배 빠른 속도로 호상을 가로
지르기 시작했다.
"사륵, 그 놈이 그분의 옷자락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동영인은 하나도
살지 못하고, 내게 찢기어져 죽는다!"
백무영의 눈에서는 금빛과 백기가 섞인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산호부인은 배가 나는 듯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뒤쪽으로 나뒹굴었으며
나무 기둥을 붙잡으며 겨우 몸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넌 백치부인과 어떤 사이지?"
백무영은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바람이 옷자락을 찢어발길 듯 펄럭거리게 할 때, 그의 꽉 다물어졌던 입
술이 떼어졌다.
"아들!"
"흐윽……!"
산호부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조각처럼 굳어진
다.
'아들이라고? 오오, 냉혈살흔이 백치부인의 아들이라고? 그, 그렇다면…
….'
산호부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
다. 한데, 백무영의 한 마디 말로 인해 그녀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
다.
백무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망망대호의 수평선에 눈길을 던지며 내공의 힘만으로 배를 조종해
나갈 뿐이었다.
산호부인은 더 이상 욕을 하지도, 저주에 가득 찬 폭언을 토하지도 않았
다.
반시진 정도,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산호부인의 독기에 가득 찬 표정이 이상하게도 온화하게 풀어졌
다.
그녀는 백무영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으며,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는 다시 우는 것이다. 지금 흘리는 눈물은 그녀의
신세를 한탄하며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그녀는 백무영을 위해 우는 것이다.
"그대가 바로… 납치된 아기였군요. 곤륜산에서 태어난 백도의 마지막 용
자(龍子)!"
전에 비할 수 없이 고요한 목소리이다.
"아아, 이제 알겠어요.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그대를 잔혹한 살인마라 여
겼는데, 내가 바보였어요. 그대가 바로 백가의 후손이었을 줄이야……."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렸다.
백무영은 그녀가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날 동정할 것 없소. 난 동정받기 싫어하는 녀석이고, 받을 가치도 없이
타락한 놈이니까."
"아니예요. 당신은 고결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에요. 당세무림에서 그대보
다 존귀한 혈통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야 그대를 진심으로 이해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대를 원망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우리
두 사람 모두 피비린내 나는 무림계의 희생자들이니까."
"산호부인은… 사랑스러운 여인이오."
"으음……."
"난 부인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오."
백무영의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그는 배를 더욱 빨리 나아가게 하며 말
을 이었다.
"난 어머님께 말씀드릴 예정이오. 고영롱(古玲瓏)이라는 여인을 나의 부
인으로 거두어도 되는가를!"
"저… 저를?"
산호부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고영롱은 그녀의 본명이다.
시집온 후 잊었던 이름, 고영롱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불러 주었던 사람
은 죽은 환영대제(幻影大宰) 고검풍(古劍風)뿐이다.
"절 거두시겠다고요?"
"그렇소. 사실 부인을 거두고자 했기에, 동행하는 것이오."
"고, 고마우신 말씀이나… 안 돼요."
"왜?"
"전… 더럽혀졌어요."
산호부인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희고 갸날픈 목덜미에 난 상처가 유독 눈에 뜨인다.
사륵이 채찍으로 후려친 상처, 그녀의 전신에는 상처 자국이 가득하다.
사륵은 함백을 제거한 그 날 밤, 산호부인을 안았다.
그 날 그는 산호부인이 처녀가 아니라는 걸 알고 그녀를 저주하였으며,
그녀에게 백여 번의 채찍을 가했다.
이후 산호부인은 사륵의 수하에게 하사품으로 전해졌고, 그녀는 칠 주야
내내 가혹한 시달림을 받았다.
그녀는 무수한 살인자들의 정액받이 그릇을 하는 가운데, 반 미쳐 버리고
만 것이다.
"절 동정해선 안 돼요."
"동정이 아니오."
"아니예요. 절 동정하는 겁니다. 전… 처음부터 상공의 아내가 되지 못할
여인입니다. 야망의 화신이었던 저의 선부(先父)께서 죄를 지으셨기에, 제
가 인과응보로서 벌을 받고 있을 뿐이지요."
산호부인은 더 이상 광기를 나타내지 않았다.
호수가 붉게 물든다. 그리고 반짝거리는 보석알이 검은 하늘 도처에서 나
타나기 시작했다.
이 밤, 너무나도 평화로운 밤이다.
산호부인은 일생을 통해 지금처럼 적요하고 평화로운 밤의 분위기를 느
끼지 못했을 것이다.
"날 위해 번뇌하지 마세요. 모두 운명이니까. 버릴 건 버려야 해요. 세상
사는 경험도 조금은 있지요."
산호부인은 오랜만에 웃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어떤 처녀의 웃음보다 신선했다.
"당분간은 피차 과거를 말하지 맙시다. 어차피 흘러갈 것은 강물처럼 흘
러가야 하니까."
백무영도 따라 웃었다. 그의 웃음은 나이 어린 소년의 웃음처럼 천진스러
웠다.
그가 웃는 가운데, 수평선 위로 군산의 웅장한 모습이 부유하듯 나타나고
있었다.
등룡사(登龍寺)는 상비묘(湘妃廟)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호수 쪽의 능선에는 갈대가 자라고 있는데, 갈대밭이 어찌나 무성한지 흰
갈대꽃이 달빛 아래 흔들리는 모습이 수천 마리 백마(白馬)가 광야를 질
주하는 듯하다.
백무영은 나는 듯 움직여 갔다. 아마도 그의 인생 가운데 이처럼 조급해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 쓰러지시면 안 됩니다.'
그의 혀끝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그의 등에 업히어 있는 산호부인의 말에 의하면, 열흘 전 육십 명의 제일
급 살수들이 군산을 향해 떠나갔다는 것이다.
그 일은 관욱량도 몰랐던 일로, 사륵의 특별 지시에 따라 이룩된 일이다.
'신풍육살조(神風六殺組)… 그들은 과거 아버님을 모함했던 자들이다. 가
장 빠르고 잔혹한 자. 명령만 떨어지면 어떠한 일이든 서슴지 않는…….'
신풍육살조는 강호계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비밀세력이다.
그들은 막부(幕府)의 암살, 정탐, 교란의 임무를 담당하던 자들로… 주군
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며 임무 가운데 잡히게 된다면 지체없이 자살하
여 침묵을 유지한다.
그러하기에, 신풍도의 우두머리들은 가장 중요한 임무를 처리할 때 신풍
육살조를 파견하는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대상은 음월방이다.'
백무영은 음월방에 대해 악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마도의 여나찰이기는 하되, 꽤나 정의로운 여인이 아니었던가?
'사륵은 그녀의 육체를 탐하고 있다. 과거 냉약빙의 육체를 탐했듯이.'
음월방이 없었더라면, 백치부인은 옥천산에서 차가운 시체로 화했을 것이
다.
함백은 연환마교의 대권을 사륵에게 전하는 대신, 백치부인과 음월방이
안전히 피신하는 조건을 얻어 냈었다.
사륵은 음월방을 눈의 가시로 여기고 수만 명의 무사를 강호에 파견해
종적을 추적하였는 바, 얼마 전 그녀가 군산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알아 내
고 신풍육살조를 급파한 것이다.
'내가 악마가 되지 않기를…….'
그는 어머니의 초상을 기억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불렸던 여인,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저주스러울 정도였기에 일생을 불행하게 살아야만 했던 어머니.
다른 사람에게 그녀는 저주스러운 미모의 소유자에 불과할 것이되, 백무
영에게 그녀는 영원한 어머니인 것이다.
'제가 갑니다.'
백무영의 피가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만에 하나 백치부인이 죽었다면, 신풍도 출신 무사는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고 살해될 것이다.
'절 기다리셔야 합니다.'
백무영은 속으로 절규하며 갈대의 능선을 넘었다.
등룡사는 달빛에 유혹되고 있었다.
본시 등룡사는 여승들이 머무는 사찰이다. 등룡사의 본채는 다 쓰러져 가
는 나무 건물이었으며, 본채 뒤쪽에는 꽤 너른 규모의 채소밭이 펼쳐져
있었다.
채소밭에는 무와 배추를 비롯한 채소류가 자라고 있는 바, 채소밭 뒤쪽으
로는 노오란 국화가 가득 피어난 뜨락이 펼쳐져 있었다.
국화밭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산사에 사는 여승들은 수도하는 가운데에
도 꽃을 가꿔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데엥- 데엥-!
은은한 범종 소리가 달빛을 깨뜨린다.
'범상치 않은 종소리이다.'
백무영은 먼 곳에서 종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그는 법륭사에서 생활한 적이 있기에, 산사의 규칙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죽음을 애도하는 조종(早種)이다.'
산사에 메아리치는 조종 소리.
대체 누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종소리이기에, 이경(二更)에도 쉬지 않는
것인지?
관(棺)이다. 도처에 관이 널리어 있다.
수백 개의 관이 대응전 앞에 가득하고, 한 귀퉁이에서는 불이 치솟아 오
르고 있었다.
여승들이 승무(僧舞)를 추고 있으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외치는 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친다.
지장보살은 유계(幽界)를 관장하는 부처가 아니던가?
그러하기에, 지장보살은 불가에서 죽음과 가장 밀접한 부처로 알려져 있
다.
바라를 너울너울 흔들어 대며 춤을 추는 여승들의 자태는 환상적이다. 그
아름다움은 교태로운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스러운 아름다움이었다.
'다비(茶毘).'
백무영은 노송 가지를 밟고 섰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그의 내공은 심해처럼 깊어 아무리 내력을 소모해도 지치지 않되, 군산
등룡사에 급히 오느라 십이 성 내공으로 어풍비행을 쉬지 않고 발휘하였
는지라 땀방울이 이마에 맺힌 것이다.
'저 많은 관에 누가 누웠을까? 설마, 어머니의 육신이 저 안에 눕지는…
….'
그의 살색이 밀랍처럼 희어졌다.
데엥- 데엥- 데엥-!
종소리는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종을 치는 사람은 등룡사의 주지인 목련사태(木蓮師太)였다.
그녀의 법명은 인근에서 유명하며, 과거에는 황도(皇都)에서 보시를 한
바 있는 노사태이다.
목련사태는 사미니 하나와 더불어 타종을 거듭했다.
그러는 가운데, 관이 하나씩 열리어진다.
관 속에서 나오는 것은 회색 옷을 걸친 무사의 시신이었다.
시신이 걸치고 있는 옷은 우직(羽織), 그것은 신풍도 무사들이 즐겨 입는
복장이다.
관의 숫자는 정확히 삼백이십사 개였다.
관에서 꺼내어진 시신은 다비의 절차에 따라서 화장이 되었다.
백무영은 두 시진에 걸쳐 진행이 되는 다비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지켜봤다.
관에서 나온 여인의 시체는 없다. 그렇다면 백치부인은 무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승방(僧房).
잿빛 가사를 걸친 노비구니가 소매섶으로 땀을 훔치며 승방으로 접어들
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언제나 사바세계에서는 피와 죽음의 윤회가 끊어질는
지……."
목련사태(木蓮師太)는 꽤 지친 듯했다.
그녀가 승방 안으로 접어들 때, 청년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소, 소협은……?"
목련사태는 갑자기 출현한 백무영을 보고 기겁을 하였으되, 워낙 수양이
깊은 노사태였기에 재빨리 마음의 평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전 백무영이라 합니다. 저는 이 곳에 머물러 있는 두 여인을 찾아왔습니
다."
"나무관세음보살……!"
목련사태는 쉬지 않고 불호성만 외었다.
두 여인을 찾아왔다는 말이 그녀를 꽤나 놀라게 한 것 같았다.
목련사태는 백무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그리고 그가 업고 있는 산호부인의 얼굴도.
"천골(天骨)이로다. 다만 살심(殺心)이 광명(光明)을 가리는 것이 흠이라
면 흠이도다."
목련사태는 나직이 중얼거린 다음에, 백무영에게 앉기를 권했다.
백무영은 단아한 자세로 앉았으며, 목련사태는 염주알을 빙글빙글 굴리다
가 입술을 떼었다.
"시주는 동영인인가?"
"아닙니다. 중원인(中原人)입니다."
"흐음, 그럼… 이 곳에 몰려온 동영의 악귀들을 모조리 죽인 흑마녀(黑魔
女) 쪽 사람인가?"
"흑마녀라니요?"
"너무나도 무서운 여인이었네. 머리카락이 온통 핏빛이고, 두 눈 또한 핏
빛으로 불타올랐지. 그녀는 이 곳으로 몰려온 동영의 무사들 가운데로 날
아 내리며 손을 휘둘러 댔는 바, 동영인들은 손바람에 닿는 즉시 살이 썩
어 뭉그러졌네. 흑마녀는 반시진 만에 삼백여 무사를 죽이고 나서, 비조
(飛鳥)를 타고 날아 올라갔네."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등룡사에서는 지난밤에 엄청난 참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일 대 삼백육십의 싸움.
한데, 이긴 쪽은 한 명의 여인 쪽이었다.
핏빛 머리카락에 검은 옷자락…….
"그녀는… 꽃 한송이를 들고 있었지. 바로… 저 꽃이네!"
목련사태는 승방 가운데 공탁 위를 가리켰다.
공탁 위에 붉은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니, 누군가 꽃가지를 던져 공탁
속으로 파고들게 한 것이다.
짙붉은 꽃이다. 가히 피처럼 붉은 꽃.
그 꽃은 전설상의 우담화(優曇花)처럼 생겼는데, 묘하게도 아무런 향기도
흘리지 않고 있었다.
우담화는 전설의 꽃으로 삼천 년(三千年)에 한 번씩 꽃이 피어난다고 하
는데, 이 꽃이 피면 세상의 악을 평정하는 금륜명왕(金輪明王)이 나타난
다는 전설이 있다.
"생명화(生命花)라던가?"
"생명화라면… 바로… 흑살마녀(黑殺魔女)!"
백무영은 최근 강호를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리고 있는 한 여인을 기억했
다.
흑살마녀!
그녀는 정사도를 가리지 않고 쳐 죽이는 여인이며, 신몽고왕부 무사들 가
운데 선봉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등룡사를 다녀간 것이다.
신풍육살조에 소속된 일급인자들은 흑살마녀 하나로 인해 몰살당하고 만
것이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절의 창고에 누워 있는데, 상처가 너무 심하기
에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 했다.
"그녀는 한 여인을 데리고 떠났네!"
목련사태의 말이 백무영을 숨막히게 했다.
"누, 누구를……?"
"월방이라는 소녀였지. 곱고 착한……."
"음월방을 데리고 갔군요? 으음, 그럼… 그녀와 함께 온 중년여인은?"
백무영은 손바닥에 땀을 쥐고 있었다.
"나무관세음보살… 그녀는 국화밭에 있네. 대체 세속사에는 연연하지 않
는 분이지. 기품이 고고하고 온화하지, 가끔 실성하는 게 보기 괴로우나,
이 세상의 모든 여인 가운데 그분처럼 완숙한 여인이 있었는지……!"
그녀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한 줄기 바람이 불며 백무영의 모습이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다.
목련사태는 눈을 휘둥그래 뜨며 두 손을 합장했다.
"나무관세음보살… 또다시 등룡사가 피에 젖는 일이 없기를…."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