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金玉均, 일본 망명 당시 岩田秋作, 1851-1894)
본관은 신 안동 김씨, 자(字) 백온(伯溫), 호(號) 고균(古筠), 별호 고우(古愚) 시호 충달(忠達)이다.
저서로는, 기화근사 (箕和近事), 치도약론 (治道略論), 갑신일록 (甲申日錄) 등이 있다.
1872년 문과 알성시(謁聖試) 장원, 1874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1882년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1883년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 1883년 이조 참의(吏曹參議), 1883년 호조 참판(戶曹參判), 판서(判書)서리(署理) 등을 역임했다.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출생으로 안동 김씨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포부가 대단했던지 달을 보고 "月雖小照天下(저 달은 비록 작으나 온 천하를 비추는구나.)"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문과 알성시인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한 이후 개화 선구자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역관 오경석, 의원 유홍기, 승려 이동인 등을 만나 개화 사상을 배우게 되고 고종의 매제 박영효, 서재필과도 친구가 된다.
서재필의 회고에서 김옥균은,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 조선은 적어도 동방의 불란서가 되어야 한다."
라고 피력했다고 한다.
임오군란 이후 3차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계몽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고 17만원의 차관을 받아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이후 일본을 배워 급진적인 프랑스식 개혁을 주장했는데 일본으로 직접 건너간 김옥균은 청불전쟁으로의 동향을 미리 살펴보는 일본 정부한테 300만원의 차관을 받아 주일 프랑스 공사관을 통해 용병을 교섭하려 했지만 차관 교섭 자체에 실패했다. 차관 교섭 실패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급진 개화파는 동력을 상실하고 민씨 정권의 탄압을 받았으며, 이를 타개하고자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1884녀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켜,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민가에 불을 내고 어수선한 틈을 타 온건 개화파 정적들을 제거하고, 고종과 명성왕후를 창덕궁에서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셔간 후, 일본군 150명의 호위를 받도록 하였고, 다음날, 경우궁으로 찾아온 민씨가문의 수구파를 다시 제거함으로써 쿠데타는 성공한 듯 보였다. 이후 이재원(李載元)을 영의정, 홍영식(洪英植)을 우의정, 재정권은 호조참판을 맡은 김옥균이, 군사권은 전후양영사 및 좌포도대장을 맡은 박영효(朴泳孝)와 병조참판 겸 정령관을 맡은 서재필(徐載弼)이, 외교권은 좌우 양영사 겸 우포도대장, 서리 외무 독판을 맡은 서광범(徐光範)이, 국왕의 비서책임은 승정원 도승지를 맡은 박영교(朴泳敎)가 장악해,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다음날 오전 9시에 국왕의 전교 형식을 빌어 혁신정강 14개조를 공포하였다가, 이후 고종의 추인하에 오후 3시에는 국왕이 천명하는 조서의 형태로 공포되었다.
①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權)을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들의 곤란을 구하며 겸하여 국가 재정을 유족하게 할 것.
④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그 중에서 재능 있는 자가 있으면 등용할 것.
⑤ 그 동안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중에서 심한 자는 처벌할 것.
⑥ 각 도의 환자제도(還上制度)는 영구히 폐지할 것.
⑦ 규장각(奎章閣)을 폐지할 것.
⑧ 순사제도(巡査制度)를 시급히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그 동안 유배(流配), 금고(禁錮)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⑪ 4영(四營)을 합하여 1영(一營)을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近衛隊)를 시급히 설치할 것.
⑫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戶曹)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일체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합문(閤門) 안의 의정소(議政所)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뒤에 왕에게 품한 다음, 정령(政令)을 공포해서 정사를 집행할 것.
⑭ 정부는 육조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하게 할 것.
하지만 이후 왕후는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원했고, 이에 창덕궁으로 환궁하던 중 왕후는 청에 원병을 몰래 청했다. 12월 6일, 창덕궁에 원세개의 청나라군 1,500여 명이 들이닥치자, 열세였던 일본군과 개화파들은 일본공사관으로 패퇴할 수 밖에 없었고,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인천으로 빠져나간 일본 공사 일행을 따라 급히 몸을 피해 12월 10일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에 올라 일본으로 도주했고 김옥균은 개명 후 망명 생활을 한다. 이때 정변에 적극 가담한 김옥균의 형제들은 물론 가족들까지 모두 떼죽음을 당했다. 양아버지 김병기도 연좌제로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고 사약을 받을 뻔했지만 김옥균을 파양해 연을 끊는 형식으로 유배형과 사약은 면했으나 감옥에 수감되어 옥사한다. 개화파에 몸담았던 각 문중도 화를 피할 수 없었는데, 김옥균(안동 김씨)의 均자 항렬은 규(圭)로, 홍영식(남양 홍씨)의 植자 항렬은 표(杓)로, 박영효(반남 박씨)의 泳자 항렬은 승(勝)으로, 서광범(달성 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으로, 서재필(달성 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어야 했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秋作)'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며 일본인으로 지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김옥균을 가만두지 않고 죽이려 했고 일본에 2번이나 송환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역관인 지운영을 몰래 일본으로 보내 김옥균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고 지운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추방된다. 청일 양국은 김옥균의 신변 문제로 계속 부딪혔으며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신변 보호를 이유로 오가사와라 섬, 홋카이도 옆 낙도 등에 보냈다가 풀어준다. 이 시기의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던 김옥균을 본 동지이자 절친한 후배 박영효가 김옥균을 보고 사람이 변했다며 저런 인간을 믿었던 내가 멍청했다고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1894년 당시 주일 청국 공사 이경방(이홍장의 양자)의 설득에 넘어가 청나라로 건너갔다. 한중일 세 나라가 힘을 합해 서양의 침략에 맞서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이홍장에게 설파하자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회동 약속 하루 전인 3월 28일 상하이 동화양행 호텔에서 오후 2시에 낮잠을 자던 김옥균은 수구당 민영소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김옥균은 프랑스 유학파이며 갑신정변 때 죽은 동지 홍영식의 친척인 홍종우를 의심하지 않고 곁에 두었었다. 암살 당시 김옥균은 호텔 방에 짐을 풀고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으며 홍종우가 꺼내 쏜 권총에 3발을 맞고 절명했다고 전해진다. 홍종우는 암살 직후 도주하다가 출동한 청국 경찰에 일단 체포되지만 조선과 청 정부 간에 협의로 방부제 대용의 페인트를 덕지덕지 칠한 김옥균의 시신과 함께 국내 송환되었고 조정에서 포상과 함께 공직에 등용된다.
김옥균의 시신은 송환 직후 양화진 백사장에서 거열되어 찢겨진 후 목만 따로 효수돼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써갈겨진 천이 붙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잔혹한 처리에 대해 조선 국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컸으며 일본 내의 여론도 들끓어 조선은 희망이 없고 우리가 개화시켜야 할 정당성이 있다는 식의 여론몰이에 이용됐다.
나중에 김옥균의 머리는 그를 흠모하던 일본인, 가이 군지(甲斐軍治)가 수습해 도쿄 하쿠산역 인근에 위치한 신죠지(眞淨寺) 뒤뜰에 묻었으며 높이 3m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도쿄 아오야마(靑山) 외국인 묘지 4-5구역 사이에도 김옥균의 비가 있는데, 저명한 일본 정치가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1855-1932)와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1855-1944)의 도움으로 세워졌으며, 박영효 혹은 유길준이 썼다고 하는 김옥균의 묘비명은 위와 같았다.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아,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있는 무덤은 1914년 양자였던 아산군수 김영진이 양모였던 기계유씨가 사망하자 도쿄에 있는 김옥균 묘에서 의발을 일부 수습하여 가져와서 따로 묻은 것이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서광범과 김홍집의 상소로 복권되나 아관파천 후 다시 취소됐고 1910년 6월 경술국치로 인해 순종황제가 망국 후 이왕으로 격하되기 직전 다시 복권돼 정1품 대방보국 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됐다.
당시 조선 정국에 비추어 보면 선구적으로 시세를 파악한 인물이었지만, 일본을 과하게 신뢰했다는 점을 실패의 요인으로 평할 수 있다.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일본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나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독립협회에서 친일적인 인사가 나온 점, 백성의 지지가 없는 그들만의 개혁 때문에 여러가지로 한계를 가진 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한때 본인이 원수처럼 여겼던 청나라의 이홍장을 만나 복권을 꾀하자는 말에 낚인 것도 그를 평가절하하는 요소로 꼽고 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인사들 중 이상재, 남궁억처럼 독립운동가가 된 사례로 있는 만큼 일부 인사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고 독립협회와 개화파를 무조건 친일파로 규정하는건 부당하고 독립협회와 대립한 황국협회에서도 민영기 같은 친일파가 나왔기 때문에 마냥 평가절하하긴 어렵다.
일본에서는 혁명가적인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다. 제국주의적 사상만 빼면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2000년에 낸 <새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2탄에서 김옥균의 망명 동기에 대해 "후쿠자와의 진심을 알고도 망명을 한 건지, 후쿠자와가 근대 일본의 개혁가라서 존경해서 그랬는지 모르나 어찌 됐건 잘못된 선택이다"라는 식으로 딱 잘라 비판했다. 조선의 근대화를 빠르게 이뤄버리려던 그의 뜻은 갑신정변 이후, 당시에 잠시 존재했던 개혁의 흐름이 결과적으로는 실패와 동시에 오히려 몇 보 후퇴하게 만들었다. 온갖 사건들에 이리저리 휘둘렸던 고종, 급진 개화파에게 당한 수구파, 온건 개화파가 급진적인 개혁 움직임에 더욱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
흔히 개혁 동지인 박영효와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우로 오인되지만 사실은 정변 실패 이후 둘의 사이는 급격히 틀어졌고 김옥균이 일본 망명 생활 중 주색잡기로 소일하는 자세를 보는 박영효는 그를 무척 싫어했다. 김옥균이 홍종우와 함께 청나라로 건너갈 때 박영효가 "홍종우는 위험하다"면서 말리기도 했지만 김옥균은 박영효의 말을 듣지 않았다. 훗날 박영효는 김옥균에 대해 아래처럼 회고했다.
"김옥균의 장점은 사교적이다. 외교술뿐만 아니라 시서화 모두 능했다. 그러나 그의 단점이라면 덕이 없고 모략이 없다는 것이다."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내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인 일본인 할거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 쓰듯 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년에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때문이지.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렇게 된 거지. 그렇다고 옥균이가 진짜 리더인가? 나랑 홍영식이 다했지.."
--나무위키 등 인터넷에서 발췌 편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