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 필사 38회 (M3권 3차시 M76)
1. 범위
제8장 유행승 품
M76 산다까 경 Sandaka suttaṃ
2. 필사
1) M76.1. 그때 산다까 유행승은 많은 유행승의 회중과 함께 앉아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높고 큰 목소리로 여러 가지 쓸 데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즉 왕 이야기, 도둑 이야기…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산다까 유행승은 아난다 존자가 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 자신의 회중을 조용히 하도록 했다. “존자들은 조용히 하시오. 존자들은 소리를 내지 마시오. 사문 고따마의 제자인 사문 아난다가 오고 있소. 사문 고따마의 제자들이 꼬삼비에 머물고 있는데 이 자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사문 아난다입니다. 저 존자들은 조용함을 좋아하고 조용함으로 길들여져 있고 조용함을 칭송합니다. 이제 우리 회중이 조용한 것을 알면 그가 우리게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그 회중은 침묵하였다.
2) M76.07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보시도 없고 공물도 없고 제사(헌공)도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도 없고 과보도 없다. 이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화생하는 중생도 없고 이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선언하는, 덕스럽고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없다. 이 인간이란 것은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임종하면 땅은 땅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74) 물은 물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불은 불은 불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감각기능들은 허공으로 들어간다.75) 상여를 다섯 번째로 한[네]사람이 시체를 나른다.76) 묘지에 도착할 때까지 추도가77)를 읊는다. 뼈다귀는 잿빛으로 변한다. 공물은 재로서 끝날뿐이다. 보시란 어리석은 자의 교설일 뿐이다.78) 누구든 [보시 등이] 있다고 설하는 자들의 교설79)은 공허하고 쓸데없는 거짓말일 뿐이다. 어리석은 자도 현자도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면할 뿐이라서 사후란 없다.’80)라고.”
74) “’들어가고 돌아 간다.(anupeti anupagacchati).‘는 것은 안의(ajjhattikā) 땅의 요소가 밖의 (bāhira) 땅의 요소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들어가고 돌아 간다는 것은 동의어(vevacana)이다.”(MA.iii.226)
75) “마음을 여섯 번째로 한 감각기능들(manacchaṭṭhāni indriyāni)은 허공으로 돌아간다.”(MA.iii.227)
76) “상여를 다섯 번쨰로 한 네사람이 시체를 나른다.(āsandi-pañcamā purisā mataṁ ādāya gacchanti).‘는 것은 네 사람과 상여(mañca)가 다섯 번째가 되어, 이 다섯이 시체를 실어 나른다는 말이다.” (MA.iii.227)
77) “’추도가(padāni)’란 이사람은 이러한 계행을 실천 했고, 이러한 나쁜 계행을 실천 했다는 방법으로 공덕을 기리는 노래(guna-padāni)이다. 혹은 이 단어는 여기서 오직 몸(sarìra)을 말한 것으로 묘지에 도착 할때까지 몸을 나른다는 말이다.”(MA.iii.227)
78) “즉 아리석고(bāla) 현명하지 못한 사람(abuddhi)들이 이런 보시를 주장하지 현명한 사람들(paņditā)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어리석은 사람은 주고, 현명한 사람은 받는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MA.iii.227)
79) “’있다고 설하는 자들의 교설(atthika-vāda)’이란 보시도 있고, 보시의 과보도 있다.(atti dinnaṁ dinnaphalaṁ).‘ 고 주장하는 자들의 교설이다.”(MA.iii.227)
3) M76.21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모든 것을 아는 자요[一切智者] 모든 것을 보는 자는[一切見者]라면서 ‘나는 걸어갈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깰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지와 견이 확립되어 있다.’라고 완전한 지와 견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는 빈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음식을 얻지 못하기도 하고 개에게 물리기도 하고 사나운 코끼리를 만나기도 하고 사나운 말을 만나기도 하고 사나운 황소를 만나기도 합니다. 여자나 남자의 이름이나 성을 묻기도 하고 마을이나 성읍의 이름과 길을 묻기도 합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111) ‘내가 빈집에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에 들어갔다. 나는 음식을 얻지 못해야만 했기 때문에 얻지 못했다. 개에게 물려야만 했기 때문에 물렸다. 사나운 코끼기를 만나야만 했기 때문에 만났다. 사나운 말을 만나야만 했기 때문에 만났다. 사나운 개를 만나야 했기 때문에 만났다. 여자나 남자의 이름이나 성을 물어야만 했기 때문에 물었다. 마을이나 성읍의 이름과 길을 물어야만 했기 때문에 물었다.’라고 말합니다.”
주111)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까? 당신은 모든 것을 아는 자(sabbaññu)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운명론(niyati-vāda)을 보완하면서 ‘빈집에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에 들어갔다(suññaṃ me agāraṃ pavisitabbaṃ ahosi tena pāvisiṃ).’라는 등으로 말한다.”(MA.iii.233)
4) M76.30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우둔하고 어리석습니다.115) 그는 우둔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521]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것은 이렇다고 하지 않고, 그렇다고도 하지 않고, 다르다고도 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도 하지 않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는다.’116)라고 하면서 말이 혼란스럽고 뱀장어처럼 빠져나갑니다.”117)
주115) 이것은 『디가 니까야』 제1권 「사문과경」(D2) §§31∽33에 나타나는 산자야 벨라티뿟따(Sañjayena Belaṭṭhiputta)의 이론이다. 그의 이론은 애매모호함(vikkhepa)으로 잘 알려졌으며 역시 「범망경」(D1) §2.27에 나타나는 네 번째 아마라위케삐까(Amarāvikkhepika, 애매모호함을 설하는 자, 문자적으로는 뱀장어처럼 빠져나가는 자)에 해당한다. 그는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의 옛 스승이었음이 분명하다.(Vin.i.39) 두 사람이 산자야를 떠나자 그는 뜨거운 피를 토했다고 한다.(Vin.i.42) 비록 본경과 「범망경」(D1) §2.27에서 아마라위케삐까들은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언급되었지만 정형구에서 보듯이 산자야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회피했으며 다른 외도들과는 달리 존재론적인 실재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가 형이상학적인 존재론 보다는 연기연멸(緣起緣滅)을 바탕한 고(苦)의 완전한 소멸을 통한 해탈·열반을 힘주어 강조하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즉시에 이해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주116) 본경에 나타나는 이 구절은 「사문과경」(D2) §32와 「범망경」(D1) §2.27에는 “① 만일 당신이 ‘저 세상이 있소?’라고 내게 묻고 내가 ‘저 세상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저 세상은 있다.’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다고 하지 않고, 그렇다고도 하지 않고,, 다르다고도 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도 하지 않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라는 방식으로 모두 16가지로 상세하게 나타내고 있다.
주117) ‘뱀장어처럼 빠져나가는’은 amarā-vikkhepa를 옮긴 것이다. 이 용어는 『디가 니까야』 제1권 「범망경」(D1) §2.23~28 등에도 아마라위케삐까(Amarāvikkhepika, 뱀장어처럼 빠져나가는 자)로 나타나고 있다. 범망경에서는 ‘애매모호함을 설하는 자’로 의역을 하였다. amarā-vikkhepa는 amarā와 vikkhepa의 합성어인데 「범망경」(D1) §2.23dp 해당하는 주석서는 이것을 다음의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역자가 ‘뱀장어처럼 빠져나가는’으로 옮긴 것은 두 번째 설명에 따른 것이다. “① 죽지 않는다(na marati)고 해서 죽지 않음(amarā, 즉 정해진 끝이나 결론이 없음)이다. ‘이것은 이렇다.’라고도 하지 않는 등의 방식으로 사견을 가진 자(diṭṭhi-gatika)의 결말이 없는(pariyanta-rahitā) 견해(diṭṭhi)와 주장(vācā)이다. 여러 곳으로 던짐(퍄퍄왜 khepo)이 이리저리 던짐(vikkhepa)이다. 결말이 없는 견해와 주장으로 이리저리 던진다고 해서 아마리위케빠(애매모호하게 늘어놓음)이다. ② 다른 설명은 이렇다. ‘아마라는 어떤 종류의 물고기(maccha-jāti, 즉 뱀장어)이다. 이것은 물속에서 [매끄럽게]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며 달아나기(sandhāvati) 때문에 잡을 수가 없다. 그와 같이 이런 주장(vāda)도 이리저리로 달아나기 때문에 결론에 도달할 수가 없다.’라고 해서 아마라위케빠(뱀장어처럼 빠져나감)라 한다.”(DA.i.115)
5) M76.51. "아난다 존자시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어도 감각적 욕망을 즐깁니까?" "산다까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다섯 가지 경우들을 범할 수 없습니다. 번뇌가 멸한 비구는 고의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일 수 없습니다. 번뇌가 멸한 비구는 도둑질이라 불리는 주지 않는 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번뇌가 멸한 비구는 성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번뇌가 멸한 비구는 고의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쌓아두고 감각적 욕망들을 즐길 수 없습니다. 산다까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그는 이런 다섯 가지 경우들을 범할 수 없습니다."
6) M76. 52. 주석 120) ‘산다까여, 예를 들면’부터 여기까지는 역자가 저본으로 삼은 Ee(PTS본)의 문맥에 따라 옮긴 것이다. 그러나 Be(6차 결집본)를 따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산다까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팔과 다리가 끊어졌다고 합시다. 그는 걸어갈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깰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알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반조할 때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알겠습니까? 아난다 존자시여, 그 사람은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가 반조할 때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압니다. 산다까여, 그와 같이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어도 걸어가거나 서 있거나 잠자거나 깰 때에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번뇌는 멸했다.'라는 지와 견이 현전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반조할 때 '나의 번뇌는 멸했다.'라고 압니다.”나나몰리 스님은 BBS본을 따라 영역했다고 주해에서 밝혔는데 이 Be와 같다. (나나몰리 스님/보디 스님, 627~62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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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송한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나와 똑같이 고르게 나누어 가지기를. sādhu sādhu sādhu!
*독경 참가 신청은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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