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 백과사전에 나오는 유명한 한국인들 | 펌글 | 2004/11/10 1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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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자가 만드는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 영문판의 "유명한 한국인들" 항목에 현재 올라와 있는 사람들입니다.(1) (1) 이 글을 쓴 목적은 이곳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 역사상의 인물이거나 현존하는 사람들을 평가하자는 게 아닙니다. 영어로 되어 있는 사이트에 나열된 "유명한 한국인들" 의 내용을 보고 외국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호기심이 동기였음을 밝힙니다. (2) 몇몇 분들의 지적에 따라 본문을 좀 수정했습니다. 지적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위키의 강홍립 부분 전문은 아래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명나라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광해군은 1619년 강홍립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명을 도와 만주족과 싸우도록 보냈다. 그러나 이미 명나라 군대는 패한 뒤였다. 리우팅(유정)의 지휘를 받던 조선 군대도 3분의 2를 잃고 누르하치에게 항복하였다. 조선의 공식 기록을 보면 광해군은 누르하치를 배반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광해군을 내쫓은 서인(西人)들의 모함이 아닌가 의심된다. 1620년에 거의 모든 포로가 조선으로 석방되었으나 만주어에 능통했던 강홍립은 계속 억류되었다. 1624년 광해군 축출 뒤 만족할만한 대우를 받지 못해 불만이던 이괄은 인조에 항거해 난을 일으켰다. 그는 한때 한성을 점령했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킨 한명연은 이때 함께 죽었으나, 그의 아들인 한윤은 만주로 탈출하였다. 강홍립은 한윤의 계략에 속아, 그의 가족이 모두 조정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 조선에 대해 복수를 하기 위해 그는 만주인들에게 조선을 치자고 주장하였다. 1627년 강홍립은 아민이 이끄는 만주 군대를 유도하여 한성에 입성하였다. 그는 만주의 대리인 자격으로 조선과의 휴전 협상에 참여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이 가족이 모두 죽은 것으로 잘못 알았음을 깨달았으며,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그는 배신자로 낙인찍혔으며, 관직을 박탈당했다. 죽은 뒤 복권되었다. 한편 엠파스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조선 중기 무신.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 본관은 진주(晉州). 1589년(선조 22) 진사(進士)가 되고, 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설서(說書)·검열(檢閱)을 거쳐 1605년(선조 38)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보덕(輔德)·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순검사(巡檢使)를 역임하고, 18년 진녕군(晉寧君)에 봉해졌다. 그해에 명나라가 요동(遼東)을 침범한 후금(後金)을 토벌할 때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원병(援兵)을 보내게 되자,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000여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다. 19년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휘하에 들어가 부차(富車)에서 패하자 휘하 전군을 이끌고 후금 군대에 항복했다. 다음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김경서 등 10여 명과 함께 계속 억류당하다가, 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후금군의 선도(先導)로서 입국하여 강화(江華)에서의 화의(和議)를 주선하고 국내에 머물게 되었으나 역신(逆臣)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사후에 복관(復官)되었다. 이곳 사이트도 참고할 만합니다. (3) sarah님 지적에 따라 보완합니다. 기황후는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순제의 황후라고 합니다. 고려말에 원과 고려가 거의 병합된 상황에서 원나라에 가서 궁녀를 지내다가 황자를 낳고 황후가 된 모양입니다. 참고 사이트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기황후(奇皇后) 생몰년 미상.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본관은 행주(幸州). 자오(子敖)의 딸로, 고려말의 권신 철(轍)의 누이동생이며 북원(北元) 소종(昭宗)의 생모이기도 하다. 1333년(충숙왕 2)에 원나라의 휘정원(徽政院)에 있던 고려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순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정후인 다나시리(答納失里)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1335년에 다나시리의 일족이 축출되자 황후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바엔(伯顔)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1339년 황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낳았으며, 이듬해 2월에 바엔세력이 물러나게 되자 4월에 드디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된 뒤 곧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이름을 바꾸어 이를 배경으로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와같이, 원나라에서의 세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고려에서도 일족인 기씨의 세력이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365년에는 전례를 깨뜨리고 정후가 되었으나,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
첫댓글 문선명씨에 대한 더 자세한 부분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문선명씨는 기독교 목사가 아니라, 기독교 이단인 통일교의 교주이지요. 통일교는 기독교 이단 세력중에서 가장 세력이 크죠. 매스컴도 탔었을 정도였죠. 근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어요. 그리고, 종교 지도자감도 못되는 사람이예요.
문선명씨는 종교인이라기 보단 사업가로 보이오-_- 헌데 문선명씨의 영향력이 울나라 사람들이 상상하는것 이상이라오. 문선명씨가 외국에서 젤 유명한 한국인 종교인이라는것도 맞소-_-
맞죠. 사업가지요. 종교를 빙자한 사업가..-_- 우쨌든간 그리 호감가지는 인물은 아니오. 비호감에 더 가깝달까..-_-
저도 여기서 종교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으나, 진정한 종교 지도자라면 사업보다는 종교일에 더 매진해야 옳은 일이랍니다. 사업은 사업가가 하는거지, 종교인이 하는건 아니니까요. 암튼, 종교얘기는 민감한 사안이니..그만 얘기하는게 좋을듯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