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시간
조승래 시간을 잘라 그 악보에 가두어 두고 악보 위의 모든 음표들에게 그가 이른다 내게 선택받은 너희들, 각자에게 고유의 길이로 시간이 주어져 있고 모양에 따라서 그 시간의 길이가 다르게 부여되었다 온 박자를 기준으로 반으로 나눈 것도 있고 그 반의 반, 다시 반으로도 정확히 나누어져 있고 모두에게 주어진 그 시간이 짧은 것일 수도 긴 것일 수도 있으나 모양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 같은 모양에게는 똑같은 시간이 주어졌지, 그러니 생긴 모습대로만 살라 오선지 악보에 오르면 그 위치에 따라 저음이냐 고음이냐 역할이 주어지네, 경우에 따라서 소리를 강하게 할 것인가, 약하게 할 것인가 임무가 주어지네, 그러나 그건 너희들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네, 인간들이 할 일이지, 인간들은 색게에 음계에 사는 너희들을 읽으려 할 것이니 읽으려 한다면 제대로 보여 주어라 너희들은 그저 태어난 그 몸새로 악단들이 연주를 하게 하면 된다. 지휘자라는 사람 악기를 든 악사라는 사람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이 있고, 그들은 모두 악보 위의 너희들을 유심히 바라볼 것이네, 그 건너편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너희들이 어떻게 읽히고 있는지를 지켜볼 것이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하품도 하고 토막잠을 자는 사람들도 간혹 있을 것이네만 전반적으로는 감동으로 술렁일 것이네 원하면 온몸을 다 보여주어라 연주자들이 제각기 다른 악기를 들고 오더라도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되네 각자 정해진 위치는 절대 벗어날 수가 없네 그 누군가가 내가 만든 악보를 보고서 너희들 몇을 옮기려 하다가 악보를 던지고 말았다는 소리도 들었어. 적재적소에 잘 자리매김해 준 너희들을 임의대로 옮기어 보았으나 불협화음만 나오더라는 것, 내가 피로 혼으로 정해준 그 위치를 그 누가 옮길 수 있겠느냐, 이 노래, 이 악보, 바로 이 세상에 모인 너희들은 여기가 삶의 터전이고 종착지이다. 내가 만든 울타리 안에서만 살라, 영생을 얻으리라. 아바타를 만들어 재생될 수는 있으리라, 음색이 달라도 되지만 뼈대를 건드릴 수는 없지, 그건 더 이상 너희들이 아니지, 복제된 아바타 악보로도 이어지는 재생성, 전염성, 영생 들⸺ 음악의 골수를 모아 남긴 것이라 그 향기 오래 가지 않겠는가 시인들도 더러 기웃거리겠지 악보 찢어 버리듯 파지도 쌓이겠지 피눈물 나겠지 나에 대한 시를 쓴다는 것도 말릴 수 없는 일, 내 악보에 맞춰 노래하는 것도 막을 수 없는 일, 제 곡조 못 잡아 우는 시인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벽에 붙여둔 악보가 춤을 추네 피가로가 또 결혼하네 모차르트 없이 잘도 ⸺월간 《현대시》 2019년 7월호 ------------ 조승래 / 1959년 경남 함안 출생, 2010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 『몽고조랑말』『내생의 워낭소리』『타지 않는 점』『하오의 숲』『칭다오 잔교 위』『뼈가 눕다』 등.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김도언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네가 떠나고 있다고 분수대 옆에 누워 있던 아름다운 농담과 함께 주정뱅이와 함께 종소리와 함께 병원을 지나서 꽃집을 지나서 네가 떠나고 있다고 무장한 군인들이 동요를 부르며 쫓아가도 붙잡을 수 없는 타인이 되어서 정육점을 지나서 문구점을 지나서 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네가 떠나고 있다고 길가에 도열해 있던 노인들은 손뼉을 치고 경찰들은 햇빛 좋은 곳에서 방망이를 깎는데 목격자들은 언제나 중요한 것만 기억하지 못해 봄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꽃집 진열대의 화분 하나가 땅으로 떨어졌지 그리고 몇 명의 소녀가 늦게까지 귀가하지 않을 때 소녀의 부모들은 술을 마시네 그래도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네가 떠나고 있다고 농담과 종소리는 따라가는데 주정뱅이는 조금 뒤처졌다고 ⸺계간 《불교와문학》 2019년 여름호 ------------ 김도언 / 1972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단편소설, 2012년 《시인세계》로 시 등단. 소설집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풍경』『악취미들』『랑의 사태』, 장편소설『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등. 지그소(jigsaw)
이민하 나무가 된 엄마를 반으로 나누었다 상반신은 거울 속에 하반신은 꿈속에 두었다 꿈속에서 엄마는 아기를 낳았다 거울 속에서 엄마는 내 몸을 열고 아기를 넣었다 나는 급히 돈 벌러 나갔다 꿈속에서 엄마는 시를 지었다 거울 속에서 엄마는 밥을 지었다 나는 뚱뚱해져서 잠만 잤다 꿈을 깨고 싶지 않아서 엄마를 잘게 쪼갰다 폰 옆에도 두고 세탁실에도 두고 신발 속에도 엄마를 넣었다 대화에도 넣고 눈물에도 넣고 유원지에서도 엄마를 흘렸다 나는 너무 뚱뚱해져서 아기를 꺼냈다 빈자리가 시려서 엄마를 다시 합쳐 내 몸에 넣었다 아이는 급히 자라 화단을 가꾸었다 나는 아직 덜 자랐는데 아이는 나를 썰기 시작했다 손에는 햇빛을 들고 있었다 붉은 꽃이 방울방울 스며 나오고 따뜻함이 등골에 박혀 하마터면 잠들 뻔했다 나는 허둥지둥 그늘 쪽으로 뿔뿔이 달아났다 어둠 끝까지 달아나 아이의 꿈속에 팔다리가 갇혔다 나머지 토막들은 아이가 상자 안에 주워 담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이는 집 안 가득 나를 쏟았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빈틈없는 내가 완성되고 나면 우리는 웃었다 웃음이 마르지 않았다 ⸺월간 《현대시》 2019년 6월호 ------------ 이민하 / 1967년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음악처럼 스캔들처럼』『모조 숲』『세상의 모든 비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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