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등을 한 번 해보고 망한 사람입니다. 초등학생 때 일등이 하고 싶어 용을 썼습니다. 일등을 하면 분명히 부모님이 좋아하실 테고 칭찬도 받을 테니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 반에 항상 일등을 놓치지 않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운동도 만능이었습니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려 편을 갈라 놀이를 할 때면 언제나 그 친구의 편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집은 가난하여 학교를 마치면 우리 학교 앞에 좌판을 깔고 삶은 고구마를 팔았습니다. 나 같으면 가난도 부끄러웠을 것이고 더욱이 우리 학교 앞에서 고구마를 판다니, 어린 마음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 친구는 공부만 일등이 아니라 삶에서도 이미 나보다 조숙했습니다. 나는 그가 목표였습니다. 그를 능가해서 일등을 해 보려고 인간힘을 썼습니다. 정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안 되었습니다. 가정 형편으로만 봐도 내가 친구보다 훨씬 우세한 여건이었습니다. 친구가 고구마를 파는 동안에 나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나는 나름의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일등이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이 정해준 사람만이 할 수 있구나.’ 그렇게 나는 하늘이 정해준 친구로 마음속에서 정리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마음이 좀 편해졌습니다. 일등에 대한 집념을 버리니 이제 나에게 석차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다만 재미있는 과목과 재미없는 과목으로 나누어 학업에 임하다 보니 과목별로 성적이 들쑥날쑥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는 과목이 있어 그만큼은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1학년 첫 학기를 마칠 때 성적표를 받아 보니 내가 반에서 1등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상 밑으로 다시 펼쳐 본 성적표에는 확실히 1/60이라고 석차가 뚜렷이 적혀 있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눈물을 흘리다 못해 훌쩍거렸습니다.
‘이미 나는 하늘이 내린 존재가 아니라며 담담히 정리를 했는데 어찌 된 일일까?’
울음을 참으려던 나를 본 담임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면 일등을 할 수 있어.”
나는 감정이 북받쳐 더 울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내내 무거운 짐을 안고 공부해야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모의고사에서 일등을 한 번 했지만 진짜 시험이 아니라 더 쓰라렸습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일들을 지켜내지 못한 나로서는 공부가 즐겁지 않았습니다. 일등은 고사하고 중학교 3학년 때는 성적이 바닥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사춘기까지 겹쳐 가슴앓이도 몹시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일등에 대한 마음의 정리를 겨우 해두었는데, 막상 일등을 한 경험이 나머지 학창 시절을 내내 혼돈으로 몰았습니다.
대학에 진학했고 또다시 즐겁지 않은 공부가 계속되었습니다. 의과대학 6년을 공부하면서 느낀 내 체감 성적은 늘 낙제를 겨우 면한 수준이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진급하며 가슴을 졸였으니 공부가 재미있다고 느낄 겨를이 없었습니다.
시간에 쫓겨 시험을 치고 나면 또 시험이 닥쳤고, 성적이 나빠 재시험을 치고 나면 어느새 해가 바뀌어 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봄이 와도 봄인 줄 몰랐습니다. 의학을 공부한다기보다는 늘 시험 준비만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나 스스로 느끼기에 공부다운 공부는 교수가 되면서 새롭게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후학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니 가르칠 만큼 내가 먼저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죠. 초중고 경험했던 공부와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누구와 경쟁하는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능력을 배양시키고 진화시키는 공부였습니다. 그제야 공부의 묘미를 터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조금씩 공부가 즐거워졌습니다.
그런 경험 때문에 좀 특이하게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며칠 후 다시 똑같은 시험을 치게 했죠. 앞의 시험은 성적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고, 뒤의 시험은 벼락치기 공부 없이 학생 스스로 내용을 복기하면서 자신의 온전한 실력을 다시 평가해보라는 취지였습니다. 학생들이 좀 별나다고 느끼긴 했겠지만 나름대로 얻고 깨우친 것이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사실 제대로 공부를 하고자 하는 학생이라면 시험이 끝난 후에도 못 본 부분을 마저 공부하겠죠. 성적이 아닌 익히는 것이 목표일 테니까요.
또 한 번은 아예 시험 감독을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는 이 시험을 양심껏 쳤습니다’라는 문장에 오엑스 체크를 하게 했습니다. 일주일 지나 과대표가 와서 시험을 다시 보겠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시험 감독을 해달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심적으로 힘들어한다고요. 나 나름대로 학생들이 시험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하는 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했던 시도였습니다.
정년퇴임을 하면서 나는 퇴임사를 통해 제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여러분들의 스승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퇴임하면 그때부터는 여러분들이 나의 스승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에 인색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현역에 있을 때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새 이론이나 지식을 먼저 알고 전수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앞서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퇴임하고 나면 새로운 지식에 직면해 습득할 기회가 훨씬 줄어듭니다. 그러니 내가 그들에게 헌신했듯이 이젠 퇴임한 나에게 그들이 최신의 지견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논리였죠. 제자들이 아무리 이 말을 겸손하게 받아들였다 해도 나는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딱 한 번 받아본 일등의 경험이 나에게 미친 영향이 꽤 컸습니다. 어렸을 때의 강렬한 기억이 공부에 대한 재미를 앗아 갔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버렸던 일등에 대한 집착, 그것이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마음 편히 공부를 즐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늦게도 깨달았습니다. 공부란 수단이 아닌 것을,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것을. 초등학교 때 일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 친구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애초에 등수에는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친구는 내가 지금 느끼는 공부의 즐거움을 이미 그때 만끽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공부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일등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어느 분야든 어떤 일이든, 진짜 승자는 즐기는 사람입니다. <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입니다, 인생의 사계절을 보내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근후, 샘터, 2017)’에서 옮겨 적음. (2020.04.16.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