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떡 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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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ON포’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KH포’가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왕정치―나가시마가 일본시리즈 9연패의 신화를 이뤄냈듯이 한국의 김성한―한대화도 해태의 한국시리즈 4연패를
이끌었다.
이 두 선배가 없었다면 ‘선동열의 빛’도 많이 사그라졌을 것이다.
두 선배가 내등뒤에 버티고 있었기에 힘들이지 않고 공을 던질 수 있었고 화려한 프로생활을 펼칠 수 있었다.
특히 한대화선배와 나는 묘한 인연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찰떡궁합’이라고 불렀다.
대화 형과의 인연은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화형은 동국대 4학년이었고 나는 고려대 2학년이었다. 내가 국가대표 초년병이었듯이 한대화선배도 별로 각광을 받지 못하던 처지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최종전에서 터진 결승 3점홈런이 역사를 바꿔 놓았다.
내가 최우수선수상을 받기는 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대화형이 차지했어야 옳았다. 그 3점홈런이 없었다면 ‘오늘의 선동열’도 ‘오늘의 한대화’도 없었을 것이다.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난 뒤에는 대화형과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나는 여전히 대학을 다니며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대화형은 그해에 졸업, OB에 입단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1986년 해태에서였다. 대화형은 프로적응이
쉽지 않았던지 OB에서 그저 평범한 선수로 지냈다. 그러던 차에 구단과 불화가 빚어졌고 결국 해태로 트레이드됐다.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1986년 봄. 그러니까 세계선수권대회를 끝으로
헤어진 지 3년여만의 재회였다.
대화형은 해태에 옮겨오자마자 펄펄 날기 시작했다. 언젠가 대화형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동열아, 우리는 궁합이 맞나보다 그지?”
진짜 그랬다. 내가 마운드에 서는 날이면 대화형의 방망이는 더욱 날카롭게 돌아갔다.
내가 프로데뷔 첫 완투승을 거둔 것도 대화형 덕이었다. 1986년4월9일 빙그레(현 한화)전이었다. 2회 선제 2타점 적시2루타를 때려 내 어깨를 가볍게 해줬고 그 덕에 나는 차분하게 게임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나흘 뒤에 선발로 나섰을 때도 1―1 동점을 이룬 5회 결승2점홈런을 터뜨려 연속 완투승을 따내게 해줬다.
대화형은 내가 마운드에 서 있는 날 유독 홈런을 많이 터뜨렸다. 기록을 들춰보니 무려 38개나 됐다. 특히 세계선수권대회 때의 3점홈런이
인연이 된 것인지 프로에 들어와서도 내가 마운드에 섰을 때 3점아치를 10개나 그려냈다. 자연히 ‘3점홈런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뒤따랐다.
대화형이 홈런을 친 날에는 진 기억이 거의 없다. 38번중 딱 두번을
졌다. 처음으로 패한 것은 1989년5월9일로 내가 빙그레 유승안에게
난생 처음 만루홈런을 맞던 날이다. 내가 3회말 유승안에게 만루홈런을 맞는 등 무려 6점을 뺏기자 대화형이 4회초 2점홈런으로 위로를
해줬다. 그러나 나는 허리상태가 시원치 않아 교체되고 난 뒤였다.
또 한번은 이듬해인 1990시즌 개막전이었다. 둘이서 ‘북치고 장구쳤던’ 기억이 난다. 선발로 등판한 내가 3회 2점을 뺏겨 2―1로 역전당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해 있었는데 대화형이 3회말 공격에서 역전만루홈런을 쳐냈다. 아이구 고마워라.
그런데 그날따라 대화형의 몸놀림이 심상치 않았다. 이미 2회에도 송일섭의 타구를 한차례 놓쳐 무사1, 2루의 위기를 자초했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5회 대화형이 또다시 에러를 저질렀다. 1사2루에서
황대연의 정면타구를 더듬어 1, 2루를 만들어놓았다. 나 역시 컨트롤이 잡히지 않아 애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돼 4점이나 내주고 순식간에 또다시 7―5로 뒤집히고 말았다.
저녁때 둘이 만났다.
“형, 도대체 오늘 왜 그랬수?”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너는 또 왜 그 모양이었냐?”
“나도 모르겄소.”
그리고는 시즌벽두를 망친 액땜을 하자며 둘이서 코가 삐뚜러지게 술을 마셨다.
대화형과는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친했다. 부부동반으로 식사도 자주
했고 주위사람들과도 가끔 어울렸다.
나는 공개석상에서도 한국 최고의 타자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한대화 선배”라고 대답하곤 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대화형은 정말 찬스에 강한 전형적인 타자였다. “아, 지금쯤 한방 쳐야 하는데....”하고 기대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안타나 홈런을 쳐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매스컴에서도 ‘해결사’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대화형이 해태에 온 이후 우리는 힘을 합쳐 6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따냈다. 그리고 6번이나 사이좋게 골든글러브를 차지하는 등 투타에 걸쳐 각종 상을 휩쓸었다.
대화형에게도 자주 하던 얘기지만 그와 한 팀에 몸담고 있었다는 게
나에겐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적으로 돌아서게 됐다. 1993년말 대화형이 LG로 트레이드됐던 것이다. 매스컴에서도 “드디어 선동열과
한대화가 맞붙게 됐다”며 떠들썩했다.
결과는 나의 완승이었다. 1994년 첫해 4타수 무안타로 눌렀고 1995년에도 역시 4타수 무안타로 제압했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이미 대화형이 전성기를 넘어선 나이였던데다 무릎이 성치 않은 등 몸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게다가 LG전이 있을 때면 내가 선수를 치곤 했다.
“형, 오랜만인데 술이나 한잔 합시다.”
마음이 여린 대화형은 그런 제의를 거절하지 못했다. 만성간염에 걸려있는 상태라 술자리에 자주 끼어들면서도 주량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무량대주인 나와 대작하느라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나가시마 왕정치가 일본 최고의 지도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듯 김성한, 한대화선배 역시 앞으로 명장으로서 또다시 한국야구를 이끌어갈
것이다.
두 선배를 생각하면 “역시 나는 인복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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