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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야구팬이 아니더라도 ‘하일성’ 하면 누군지 다 압니다. 하지만 어디에서 야구를 했는지는 야구인들도 잘 모르는 무명 선수 출신입니다. 그는 서울 성동고에서 선수를 했는데 2학년 때 무릎연골 부상을 당했습니다. 경희대에 진학했지만 성치 않은 무릎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야구는 전부였습니다. 3성 장군이었던 선고장(先考丈)이 초등학교 5년 때 이혼하고 어머니는 미국으로 떠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야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체육교수를 다음 목표로 정하고 야구부를 떠나기 위해 일반병으로 입대, 스스로 선수 생명을 끝냈습니다. 그는 서울 환일고에서 체육교사를 하다 교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체대 유학을 준비중이던 1979년 해설가가 됩니다. 대학 선배인 배구 해설자 오관영씨가 TBC에 소개했다고 합니다. 나중 TBC가 KBS로 통합됐고 1981년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그는 일약 KBS를 대표하는 ‘스타 해설가’가 됐습니다. 타고난 목청으로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그는 미리 예측하는 공격적 해설을 합니다. 고인이 된 김동엽씨가 “감독이 승부를 거는 타이밍이 있는데 이 점을 잘 파악해서 해설하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해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스타일 때문에 실수도 많이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원 아웃에 만루, 볼카운트 투-원 상황에서 “이런 경우는 절대 몸쪽 공을 주면 안 됩니다”고 아는 체 했는데 투수가 몸쪽 공을 던져 삼진까지 잡아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입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 시절 한국 중계방송 사상 가장 큰 사건을 저지른 것이 본인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1984년 일본에서 열린 한·일고교대회 중계 때의 일이랍니다. 당시 코치였던 이희수씨에게 “오늘도 우리가 선공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해 그렇게 알고 중계를 시작했는데 4회, 한국에서 국제전화가 와 “난리가 났다”고 하더랍니다. 양 팀을 바꿔 생중계가 나갔다는 것이죠. 두 팀 다 흰 유니폼에 중계석이 멀어 이 코치 말만 믿다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된 것이죠. 경기도 1-3으로 지고 있어 “한국에 가면 잘리겠구나”고 각오했는데, 군산상고 3년 조계현이 8회 1사 만루에서 주자일소 2루타를 쳐 5-3으로 역전승했습니다. 극적인 역전승이라 엄청난 방송사고도 그냥 넘어갔다고 합니다. 하일성씨는 한동안 조계현을 만나면 “너 때문에 살았다”고 큰절을 했답니다. 하일성씨는 “초년생 시절에는 실수를 하면 이를 덮으려 하다 또 실수를 하곤 했었는데 관록이 붙자 솔직히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말합니다. 하일성의 인생 교훈을 요즘 정치인들이 귀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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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랬었군요..투병에서 일어나셔서 활동하시는 모습도 좋았는데..머리 가발도 인상적이구요..![ㅎ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70.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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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