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운 이원우 선생(1891-1958)
●머리글(翠雲自敍)
우매한 나는 이 하늘과 땅 사이에 버려진 하나의 좀 벌래 이다.
일찍이 가정교훈(家庭敎訓)을 익힐 기회를 잃어 이미 배운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과 마주 앉아 문자(文字)를 변론 할때, 스스로 부끄럽고 위축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객지에서 십년 세월을 낭비하고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오니 거처할 주택이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그 터에 집을 지어 안체(內寢)를 삼고 곁에 있는 가옥(家屋)을 매입(買入)하여 방안을 넓이 개조해 손님을 영접하고 자손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다.
공사가 끝나자 글씨 잘 쓴 명필(名筆)을 초청해 취운 두 글자를 썼으니 취운은 나의 이름이 아니고 실은 제(齊)의 이름이다. 취운의 의미가 특별한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호수(湖水)위 옛 마을이기 때문이다.
남쪽에는 월출산이 있고 북쪽에는 덕진(德津)이 있으며 대나무(竹田)와 천 그루 소나무가 있어 항상 취운이 서려있는 덧 하니, 궁벽한 그 가운데 자신의 거처가 매우 편안 하다.
봄에는 비구름이 끼어 있기 때문에 그 계절에는 호수에 구름밭을 갈아 뽕나무와 삼씨를 심고, 가을 달이 떠오르는 밤에는 구름 낀 밭에 나가 벼를 심는다.
이곳에 거처한 것은 나와 구름이며 나는 구름과 더불어 이미 마음 깊이 약속을 하였으니 구름이 어찌 나를 저버리며 나 또한 구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구름밖에 바람소리와 조수 소리를 실컷 들으면서 사립문을 닫고 자라처럼 목을 쭈그리고 있으니 세상을 은둔한 것이 아니며 나의 성격이 옹졸하기 때문이다.
취운이라는 운(雲)을 감히 진(晉)나라 도연명의 운 무심(雲 無心)이라는 운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저 위야(魏野)의 한조각 구름에 비교하면 아마 부끄럼은 없을 것이다.
나의 거주지를 지나 간자 나의 운산(雲山)과 운수(雲水)를 관찰하면 충분히 짐작이 될 것이니 반드시 취운 두 글자로써 나의 이름위에 기록하지 않을 것이다.
이어 다음과 같은 시를 읊노라.
호수와 산 푸름이 쌓여 숲을 이루었으니,
그 가운데 띠 집 있어 지경이 깊숙하다. 들 형세는 연기 읊어 처마 밖에 넓고 샘물소리 비를 비지 느라 베개 머리에서 읊누 나 손자 데리고 마을길에서 걸음마를 익혔고 손님 맞아 잣나무 그늘에서 책을 보았지 쉬는 날 없이 오가는 것을 누구 가 알손가
주인(主人)의 마음을 구름은 응당 알거야
취운(翠雲) 이원우(李元雨)
제 1 장 나의 이력서
●자신의 화상을 그려 봄
하늘과 땅 사이에 정교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한 물건이 빽빽이 살고 있으면서 지혜로운 물건과 우매한 물건이 함께 양육되고 있으니 어떤 물건이 용납되지 않을 것인가.
비록 털과 깃과 비늘과 껍질이 있는 미물(微物)들까지도 각각 자기의 성품을 부여 받았다. 올빼미는 자기의 작은 몸을 싫어하지 않고 지렁이는 자기의 더러운 삶을 한탄하지 않으며 눈에 놀이는 자기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사람들 역시 이와 같은데 어찌 반드시 기린과 봉황새처럼 무리에서 뛰어난 뒤에 언급될 것인가. 우매한자 거칠 거칠 한자 역시 같은 종류이다.
때문에 자우(子羽-姓은 複 또는 姬)같은 모습도 공자 성인(聖人)께서 취택하셨고, 배도(裵度-당나라 聞喜사람)가 추물이지만 자신의 화상을 자신이 설명하며 찬미하였으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의 인간됨을 설명하자면 돌에 비유한다면 옥과 비슷한 무부(珷玞)돌이요 나무에 비유한다면 가죽나무와 상수리나무와 같고 곡식에 비유한다면 돌피와 같다.
더구나 3세에 고아가 되었으므로 어버이를 모시고 문답할 기회가 없었기에 학문이 없어 지식이 없다. 마음은 편협하고 행동은 흩어진 털과 같으며 신장(身長-키)은 오척(五尺)이 못되고 안면(顔面-얼굴)은 접시 크기에 불과한가 하면 재주는 남과 같지 않고 인격도 남과 같지 않으며 변론도 남과 같지 못하고 명성도 남과 같지 않으며 예의도 남과 같지 않다.
남과 더불어 같은 것은 귀와 눈과 입과 코가 같아서 귀로는 능히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눈으로는 우(優)열(劣)을 볼 수 있으며 입으로는 음식물을 먹을 수 있고, 코로는 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내가 어찌 인간이라는 이름을 감당할 것인가.
약관(弱冠)의 나이에 어머니는 늙고 집안은 가난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치소(嗤笑-빈정거림 웃음)를 되돌아보지 않고 몸소 천한 일을 감당하여 말과 소를 양축하며 한결 가치 검소한 마음을 갖고 뜻을 한결 가치 확고히 하여 아주 작은 것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답(田畓)과 주택을 마련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니 어머니께서 건강히 편한 하게 살다가 여생을 마치셨으며, 오늘날 아내와 자식이 굶주림이 없으니 이는 다행스런 일이다.
가령 이야기를 하자면 나의 인상이 전설(傳說)과 같다면 은(殷)나라 고종임금이 당연히 화상을 그렸을 것이고 나의 인상이 자능(子陵)과 같은 점이 있었다면 광무(光武)가 당연히 방문하였을 것이다. 나 자신이 쓴 화상찬(畵像讚)이 필요하지 않은 것인데 내가 어찌 감히 나 자신의 화상찬(畵像讚)을 쓸 것인가.
그러나 괴상하게도 나의 5십년 사업이 나의 인상과 더불어 대략 서로 같지 않다면 어찌 외면(外面)으로써 마음의 높고 곧음을 가리려고 하겠는가.
이리하여 선우(善于)로 하여금 모사를 하여 나의 후손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요 진실로 남에게 과장하고 싶지는 않으며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나의 검소를 본받고 나의 옹졸함에 느낌을 주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화상찬(畵像讚)을 지어 가로되
“나의 삶으로써 너희들의 삶을 비교해 보면 너희는 나와 더불어 같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나의 집중력을 보아라 규모의 치밀함과 마음의 조용함과 남을 해치지도 않고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으며 재주도 우월하지도 않았다.”
●나의 지나간 일 (歷史)
우리 집안 선조는 동도(東都)인 신라 경주에서 출생하였고 신령한 뿌리가 깊이 내려 가지와 잎(자손)이 번성하여 수백 대 최고의 가문으로 내려왔다.
고려말기 이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집안 운수 막힘이 없었으니 문장과 도학(道學)에는 익재(益齋)선생이 태어나셨고, 청백하고 검소한 분으로는 청호공(淸湖公)이 있었으며, 기미를 잘 보는 분으로는 호암공(湖巖公)이 있었다.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국가에 몸을 바친 분으로는 월재공(月齋公)이 있었고, 문장과 덕행(德行)으로는 망호공(望湖公)이 있었으며, 부자로서 은혜를 베푼 분으로는 덕은공(德隱公)이 있었으니 이분은 나의 6대조 되는 분이다.
나의 할아버지 취벽공(醉碧公)께서는 진사시(進士試)에 올라 참봉(침랑-寢郞)이 되었고, 나의 아버지는 6형제 가운데 다섯 번째이니 마을 사람들은 이씨 6용(六龍)이라고 일컬었다.
그러한 가문이 어쩌다가 운수 쇠퇴하여 아버지께서 38세에 세상을 등졌으니 조선 고종(高宗)임금 계사(癸巳)1893년이다. 이때 나는 세 살 난 어린아이로 홀어머니 품안에서 자랐고 조금 성장하여서는 매양 큰형의 뒤를 따라 말을 배우면서부터 날마다 모든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일찍이 흐느끼며 눈물을 먹음 치 않을 때가 없었다.
더구나 전(傳)해 온 산업(産業)은 마치 큰물에 언덕이 무너져 정황이 없는 것 같은 가운데, 어머니의 명령을 받들어 7세에 글방에 들어갔으나 재주가 노둔하고 성격이 옹졸하여 기송(記誦-기억하여 외움)할 수가 없었다.
17세에 공부를 포기하고 이 해에 관례(冠禮)를 치르고 장가를 들었으나 거처할 집이 협소하여 중 숙모(仲 叔母)의 집에서 침식을 하였다.
한결 가치 제도를 따라 학교에 진학하고 2년 뒤에 졸업하였으며 광주 농업학교에 들 어 갔으니 전후 4년간 학비는 오로지 어머니의 근검 절약 가운데 얻어진 은혜를 입었다.
농업학교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본군(本郡)의 우체국에 취임하였는데 이때 실인(室人-자기의 아내를 일 커는 말)이 어머니를 봉양하며 집에서 살고 있었다.
송곳을 세울 땅이 없었으므로 오로지 근검절약하였으며 밤낮으로 질 삼을 하여 조금씩 보태어 증자를 하고 또한 우체국 봉급을 절약하여 조금씩 모아 전답(田畓) 약간을 매입하니 이것이 산업(産業)의 기초가 된 것이다.
마을 앞에 큰 진흙 밭이 있었으니 이 땅은 조수(潮水)가 드나든 곳이기에 해남 사는 백포(白浦) 윤중칠(尹仲七)씨와 협의하여 힘을 합해 언덕을 쌓아 개간(開墾)을 하니 300여 두락(斗落-논밭 넓이의 단위. 논은 150-300평, 밭은 100평 내외임)이 된다.
몇 백년 허래만 떠다니고 풀뿌리가 섞어 덥혀 있으니 그 해에 밭 가리를 하여 수확한 것이 문전옥토보다 십 배나 많았다.
직장은 우체국 근무 3년에 군청으로 전직하여 2년을 근무 한 뒤 사표를 제출하고 나왔다.
산업(産業)을 다스리기 위해 동쪽 서쪽과 남쪽 북쪽을 분주히 오가는데 마우(馬牛)에게 어치를 잎 히는 일을 스스로 감당하였으니 살갗이 트는 고통을 어찌 꺼려할 것인가.
몇 년이 지난 뒤 마을에서 빈궁한자와 일터를 잃고 오래 동안 밥을 짓지 못하여 솥 안에 물고기가 생길 정도로 곤란한 자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결과 이를 깊이 걱정한 결과 산업조합(産業組合)을 창설하였다.
가난한 모두를 함께 구제하려는 것이요. 사사로이 자기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고 의론한자가 있으면 내가 사업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돌려보내었다.
그러나 이들이 어찌 나의 본심을 알 것인가. 이 사업으로 인하여 누차 일본을 건너갔는데 먼저 지리를 살피고 다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관찰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그들의 경제 방식을 관찰하고 돌아와 매일 업무에 시험한 결과 효험이 없지 않았다.
군수와 도백(道伯-도지사를 예스럽게 일컫는 말)의 만집(挽執-만류. 붙들어 말림)으로 조합에서 10여 년간을 근무하면서 비록 특별한 조처는 없었으나 또한 큰 실수는 없었다.
갑술(甲戌)1934년에 어머니의 초상을 만나고 병자(丙子) 1936년에 상제(喪制)를 마쳤으며 묘지가 불리함으로서 마음으로 항상 송구스럽게 여기고 장흥군 율 치에 산을 매입하여 아버지 묘소를 옮기면서 어머니까지 함께 모셨다.
무인(戊寅)1938년에 돌에 글을 새겨 광중(壙中-구덩이 속)에 묻고 2년 뒤 신사(辛巳)1941년 봄에 비석을 모두 세웠는데 그 체백(體魄-죽은 사람. 송장)이 안녕하지 않는가 싶다.
자신을 되돌아 볼때 늦게 태어난 내가 가정교훈을 계승하지 못하고 글방에서 10년 세월만 헛되이 보냈으므로 성명도 올바르게 기록하지 못하면서 시 곳에 따라 학교를 들어갔으나 역시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풍속을 따라 직장에 드나 던지 수십 세월이 되어 세월은 어느 듯 49년이니 내년에는 위(衛)나라 백옥(伯玉)처럼 49년간 잘못을 알려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는 생활을 하는 데는 걱정이 없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것은 다만 이것 하나이며 기타 경력(經歷)은 후손에게 기대할 것이니 무슨 일인들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슬하에 세 자식이 있지만 가르친바가 없기 때문에 시문(詩文)과 예학(禮學)을 전혀 모르고 수년간 학교를 다녔기에 겨우 언어나 해석할 뿐이니 자식들은 보잘 것 없는 산계야목(山鷄野鶩-산꿩과 들오리란 뜻으로, 성미가 거칠고 사나워서 다 잡을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두 어린 손자는 바야흐로 문자를 배우고 있으니 성공하는 것이 어떠할지는 알 수 없다.
50년 동안 이력(履歷)은 속인(俗人)들과 얼 킨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어찌 족히 새겨둘만한 것이 있겠는가. 나의 몸은 근면하다면 근면했다고 할 것이며, 나의 마음은 견고 하였다면 견고했다고 하겠지만 별다른 지식은 없다. 깊이 생각하면 근면하였고 견고하였기에 오늘날 내가 있다고 할 것이다.
나의 일생에서 큰 것만 간추려 스스로 깨우칠 것을 준비하고 또 인간이 해야 할 24조목(제2장에 엮음)을 계속하여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