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공부하는 데 두 가지의 병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오늘은 하안거 결제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법문한다고 이렇게 와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좀 전에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인사를 드렸죠? 그런데 우리가 생각을 여의고 법문을 들으면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할 때 이미 법문을 다 설했다고 할 수 있고, 여러분들은 법문을 다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악산 백담사 무산(오현)스님께서 2017년 하안거 해제법문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주 간단했습니다. 1분도 채 안되었습니다. 그 해제 법문을 그대로 들려드리겠습니다.
“나는 대중 여러분 한 번 바라보고 대중 여러분은 나 한 번 바라보면, 나는 내가 할 말을 다 했고, 여러분은 오늘 들을 말을 다 들은 겁니다. 날씨도 덥고 하니 서로 한 번 마주 보고 그랬으면, 할 말 다 하고 들을 말은 다 들은 겁니다. 오늘 법문은 이제 끝입니다.”
하시고 자리에서 내려 가셨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스님께서는 이렇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스님께서는 볼 줄 알고, 말할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날씨가 덥다고 하니 더운 줄 아는 자기 부처로 깨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때 여러분들이 어떤 생각, 해석, 분석, 분별 등을 갖다 붙이면 전부 어긋나서 안된다고 보시면 되거든요.
스님께서는 이렇게 간결하게 본래부처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러한 작용을 통해서 본래부처로 깨어나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본래 깨달음은 본래부처는 누구에게나 본래 갖춰져 있다고 하죠. 아니 더 나아가면 우리 자체가 본래부처이고 한시도 이 본래부처를 여읜 적이 없이 지금 여기에 늘 현존하고 있는 바로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여러분들 중에는 도대체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여러분들 잘 들으십시오. 모르겠다는 것은 생각이지요.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모른다.’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른다.’는 생각이 없으면 ‘모른다.’가 사라집니다. 생각이 없으면 사라져요. ‘안다’ ‘모른다’가 없어진다 이말이에요. ‘모른다.’가 사라지면 ‘모른다.’가 의지하고 있는 ‘안다’도 같이 사라집니다.
혹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이 법문을 하니까 나는 알아듣겠네 나는 알았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알았다 하는 것도 잘 한 번 보세요. 뭡니까? 생각입니다. 생각! ‘안다’는 생각을 하니까 ‘안다’는 것이 있는 거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잘 살펴 보셔야 되요. ‘안다’는 생각이 없으면 ‘안다’가 사라져버려요. ‘안다’가 사라지면 ‘안다’가 의지하고 있는 ‘모른다.’도 사라집니다.
연기게송에 이런게 있죠?
此有故彼有(차유고피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無故彼無(차무고피무)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此生故彼生(차생고피생)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此滅故彼滅(차멸고피멸)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없어진다.
아셨죠?
‘안다’ ‘모른다’가 다 떨어진 자리가 뭡니까 본래의 자리에요. 마음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일체 분별이 다 사라진다는 말이에요. 일체 분별이 사라진 그 자리가 바로 이것(손가락을 세우며) 하나밖에 없다는 거에요. 구지 선사가 손가락을 들어보이는 거고 선사들이 주장자를 내리치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 분별을 여읜 불이중도이고 깨달음의 세계이고 본래부처인 것입니다.
이 말에 뭔가 와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우리에게 이 선공부가 참으로 어렵고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무슨 병이 있어서 우리가 본래 부처로 깨어나는 것이 어렵고 힘이 들까? 이번 결제에는 이 부분을 잘 살펴보고 공부에 큰 진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법연 문하에 3불이라는 유명한 선사들이 계셨어요. 불과 극근(佛果 克勤) 불감 혜근(佛鑑 慧勤) 불안 청원(佛眼 淸遠) 스님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 중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에 나오는 청원 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앓고 있는 선병에 대해서 살펴볼테니 잘 듣고, 잘 듣고,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청원(淸遠)스님이 말했다.
“선을 배우는 데에는 다만 두 가지 병이 있다. 첫째는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는 것이요,
이 이야기도 많이 들어보셨죠?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 이게 우리가 공부하는데 가지고 있는 가장 첫 번째 병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이 부분이 여러분들 가슴에 사무치도록 와닿아야 됩니다. 이 말에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생각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걸 자각하고서 확 바뀌는 변화가 있으면 공부에 큰 진전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나귀를 타고서 내리지 않는 것이다. 깨닫고 나서 깨달음을 부여잡고 있는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귀를 타고서 다시 나귀를 찾는 것이 참으로 큰 병이다. 산승(山僧)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찾지 마라! 깨달음을 찾지 마라, 부처를 찾지 마라는 이야기에요. 영리한 사람은 당장 알아듣고서 찾는 병을 없애서 미친 마음을 마침내 쉴 것이다. 큰 깨달음을 찾으려고 몇 처(處), 몇 안거(安居)를 나면서까지 애쓰며 찾는 그 병을 없애라는 말입니다. 찾는 병을 없애 미친 마음을 쉬라는 말입니다. 영리한 사람은 빨리 그렇게 한답니다. 어리석어 내 생각이 바뀌지 않고 내 생각을 부여잡고 있으면 세월이 끝이 없죠.
이미 나귀를 알았지만 타고서 내리지 않으니, 이 병이 고치기 가장 어렵다. 나귀를 알았는데(깨달았는데) 깨달음을 부여잡고 있으니까, 즉, 깨달음에 집착하니까 고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산승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타지 마라! 너희가 바로 그 나귀이고, 온 세상이 바로 그 나귀이니, 너희가 어떻게 나귀를 타겠느냐?
여러분이 그대로 부처라는 말이에요. 너희가 바로 나귀인데 더 탈게 없다. 너희가 바로 나귀이고 온 세상이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다, 산천초목이 다 부처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온 세상이 바로 나귀인데 너희가 어떻게 나귀를 타겠느냐.
너희가 만약 탄다면 절대로 병을 없앨 수 없다. 만약 타지 않는다면 시방세계가 확 트여 걸림이 없을 것이다.
깨달음 자체에도 머물러 있지 않아야 된다. 깨달음까지도 결국은 다 놓아버려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붙잡으면 안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에요. 이게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아주 큰 선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두 가지 병이 일시에 사라지면 마음속에 아무 일이 없어 도인(道人)이라 이름하나니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옛날 수덕사 만공 스님께서 선공부하는 납자(衲子)들에게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깨닫기 이전이나 깨달은 이후나 한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한다.”
깨닫기 전에도 나귀를 찾는 어리석음을 앓듯이 깨닫고 나서도 깨달음에 집착하는 엄청난 병을 앓는다는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병을 다 한 번씩 겪는다는 말씀이에요.
깨닫기 이전의 고비, 병은 깨달음을 따로 두고 찾고 구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잘 한 번 살펴보세요. 이 법문이 지금 이 자리에서 열리는 법문이 되어져야 해요. 청운 선사 시절의 이야기라고 여기지 마시고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법문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깨어있는 법문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깨달음을 ‘찾고 구하지 마라’는 말이 여러분 가슴에 확 와닿고 이 말씀이 정말이구나 진짜구나 이런 생각이 깊이 사무치면 이 공부를 좀 더 빨리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이미 본래 깨달아 있는 본래부처인데 착각하고서 밖을 향해 찾아 구하는 것이 병입니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는 말이나, 물속의 물고기가 물을 찾는다는 말이나, 남대문에서 서울 가는 길을 묻는다는 말이 모두 이러한 병을 지적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이 알지 못하고 얻지 못한 깨달음이 자기 밖에 따로 있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이 병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셔야 합니다.
벗어나야 여러분들이 늘 깨달음속에서 날이면 날마다 행복한 삶,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인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선지식들께서 안타까운 마음에서 찾지 마라, 구하지 마라, 망상하지 마라, 분별하지 마라, 공부하지 마라, 눈앞을 떠나지 마라, 이런 말씀들을 하시지만,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는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정말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말들입니다. 밖을 향해 찾아 구하는 마음이 쉬어지게 되면, 이미 있었던 것, 있었지만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본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 깨달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망상분별이 쉬어지니까 본래 부처성품이 그냥 드러나는 것일 뿐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경지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찾고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얻어서, 구해서 오는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됩니다.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평상심이 그대로 도여서 어떻게 보면 도란 너무나 평범하고 자연스럽고 당연히 누구나 다 갖추고 있는 것인데도 우리의 생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도란, 깨달음이란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란 생각에 속아, 이미 나귀를 타고 있으면서도 나귀를 타고 있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에 자기가 속아 자기를 괴롭히는 어리석은 삶, 무명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분별하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에 속지 않으면 도는 늘 눈앞에 있습니다.
지공 화상은 대승찬에서 대도상재목전(大道常在目前)이라 하여 ‘대도는 늘 눈앞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도는 마음이고 마음은 눈앞에 있습니다. 눈앞이라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눈앞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대도라는 것은, 마음이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로 둔다는 것은 하나의 경계가 생기고 상이 생기고 모양이 생기기 때문에 둘로 분리가 되니 그렇게 하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내가 지금 깨어있는, 내 존재가 있는 이 자리입니다. 그러니 도가 곧 내 존재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 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를 멀리서 찾을 게 없다 이말이에요. 내 존재가 있는 자리가 도라면 깨달음이라면 우리는 늘 도속에서 깨달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너무나 쉬운 것이고, 싱거운 것이고, 간단한 것이고, 내가 늘 쓰고 있었던 것이고,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구나 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 쉽고 이걸 이야기하는 거였나 이런 생각이 들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를 따로 두고 깨달음을 따로 두고 자꾸 찾고 구하고 있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지공 화상이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수재목전난도(雖在目前難道) ‘비록 눈앞에 있지만 도를 보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모습을 따라가기 때문에 변함없는 도를 놓치게 됩니다. 변화하는 모습은 보여요.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보이죠. 모양이 있는 것도 보이죠. 상이 있는 것도 보이잖아요. 근데 이 도(道)라는 것은 모양도 상도 다 떠나라고 했으니까 유도 무도 다 떠나고, 옳다 그르다도 떠나 볼래야 볼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다 변하고 귀에 들리는 소리가 다 변하죠? 여러분들 소리가 다 바뀌잖아요. 이 소리가 들렸다 저 소리가 들렸다 하죠? 눈에 보이는 것도 이것 보였다 저것 보였다 다 바뀌잖아요. 다 바뀌는데 늘 안바뀌는게 있거든. 그것이다 이말이에요. 코의 냄새, 입의 맛, 몸의 촉감 이런 것들은 다 변하는 것인데, 이 변하는 모습들을 따라가면 변화하지 않는 도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니 대상경계를 따라가면 늘 놓치는 거에요. 우리가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간다고 생각해봅시다. 차창에 앉아서 창밖을 쳐다보면 풍경들이 다 지나가죠. 그 풍경들이 지나가면서 변해가잖아요. 변해가는데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는 변하지 않지요. 그런데 변해가는 대상에 늘 쫓아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이걸 놓치잖아요. 지금 보고 있는 여기에 깨어나라는 말이거든요.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게 있잖아요.
변해가는 풍경에 끌려가지 말고 한결같이 변치 않고 있는 이 자리, 나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지금 여기, 여기에 깨어나시면 도인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청안 스님께서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을 다시 살펴본다면
나귀를 타고서 나귀에 내리지 않는 것이 아주 큰 병이다 이렇게 하셨죠? 여기에 조금 더 말씀 드리자면.
밖으로 찾아 구하는 마음을 쉬고 이미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거기에 머물려고 하거나 깨달음을 소유하려고 하는 순간 다시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도 잘 살펴보셔야 되는 문제입니다. 병입니다. 우리가 법을 깨달았다고 해도 깨닫기 이전의 바깥 경계에 집착하던 습관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러다보면 속는 거에요. 그러기에 자신이 깨달은 깨달음에 집착하거나 자신이 깨달았다는 생각이 붙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분별하던 습관, 대상 경계에 끌려가던 습관들이 남아서 깨달았다고 해도 부지불식간에 깨달았다는 상이 생기거나 생각이 붙는다는 말이에요. 이런 병이 생긴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옛날에 선지식들은 깨닫고 나서도 계속 닦는 거에요. 계속 닦아서 철두철미하게 그 어떤 미세망령도 다 떨어져 끌려가지 않을 때까지 수행하셔야 합니다.
이와 같이 깨달음의 초기에는 마음이니 도니 깨달음이니 하는 망상이 미세하게나마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법에 대한 집착(法執), 또는 깨달았다는 견해(覺見), 법신의 가장자리의 일(法身邊事)이라 합니다.
깨닫지 못했을 때는 깨닫지 못했구나 하고 망상을 하고, 깨달은 뒤에는 깨달았구나 하고 또 다른 망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했을 때 깨닫지 못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깨닫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없으면 깨닫지 못했다는 것도 없습니다.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없으면 깨닫지 못했다는 것에 의지하는 깨달았다는 것도 없어집니다.)
생각이 사라지는 거에요. 아시겠죠? 그래서 분별망상, 생각 다 쉬고 버려야 되는 거에요. 놓아야 되는 거에요. 생각에 끌려가면 늘 둘로 분리되는 삶을 못벗어나는 거에요. 깨달음 속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의 생활을 못하는 거에요. 그 부분을 잘 보셔야 됩니다.
본래 소[牛]는 없었습니다. 편의를 위해 이름 붙여 힌트 삼아 깨달음의 길로 가라고 일러준 것이지 도니 깨달음이니 말하니까 이걸 견해로 짓게 되면 또 하나의 견해가 생겨서 못쓰는 거에요. 본래 마음이니 도, 진리, 깨달음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일체가 망상이었습니다. 미세한 망상, 미세한 알음알이, 일체 견해 등 이러한 것들이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말로 표현하자면, 아무 모양도 없고(無相), 아무 생각할 것도 없고(無念) 어디에도 집착하여 머물 데가 없습니다(無住).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고(無所得),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습니다(無所有). 아무 맛도 없습니다(沒滋味). 나도 비었고 법도 비었습니다(我空法空). 둘이 아니지만(不二) 하나 역시 아닙니다.(非一) 하나의 마음(一心)일 뿐이므로 따로 마음이 없습니다(無心). 평소의 마음(平常心)으로 날마다 쓰는 일(日用事)일 뿐입니다.
이렇게 법을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우셔야 합니다.
정리를 하자면 공부하는 우리들에게 누구나 다 쉽게 가질 수 있는 병 2가지. 첫째, 내가 본래 부처인데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병, 둘째, 깨달았지만 깨달음에 집착하고 안주하는 병입니다.
병인줄 아시고 미세한 알음알이나 견해나 알음알이를 다 떨쳐내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어떤 괴로움이나 고통이 오더라도 경계를 잘 벗어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법문 잘 살펴서 하안거 한철 정진 잘 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此有故彼有(차유고피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無故彼無(차무고피무)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此生故彼生(차생고피생)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此滅故彼滅(차멸고피멸)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