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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교회 / 20181223 주일오전예배 / 정광수목사님 | |
분류 | 주일오전예배 |
제목 | 세상 살리는 제자 |
성경 | 마태복음 5:13-16 |
정리 | 참좋은교회 청년부 |
성경말씀(마태복음 5:13-16)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녹취자료 |
짐 엘리엇이라는 목사가 4명의 친구들과 함께 선교를 떠나게 됩니다. 20대 중반정도 되는 나이입니다.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이들이 어디로 선교를 간 것인가? 남미에 에콰도르에 있는 식인종 부족입니다. 아우카 부족이라고도 하고 와다니 부족이라고도 하는 그 부족이 미전도 지역이기 때문에 여기에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을 하고 1956년에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선교센터를 만들고 경비행기를 띄워서 그들에게 많은 구호품을 보내고 5명이 그곳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무전기를 다 착용하고 교신을 하면서 들어갔는데 하루만에 두 사람이 교신이 끊어지고 이튿날 또 끊어지고 삼일이 되는 다섯명 모두가 교신이 끊어졌어요. 이 다섯명이 무참히 창에 찔려서 살인을 당하고 전리품으로 그 고기를 다 그들이 나눠먹었어요. 예수 믿으라는 단어 한마디도 전해보지 못하고 다섯명이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바로 그 짐 엘리엇의 부인과 다른 선교사의 부인들, 네이트라는 선교사의 5살 된 아들까지 그 지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종족들은 남자들은 적으로 생각하고 죽이는데 여자들은 안 죽여요. 그래서 이들이 들어가서 그들에게 아이들을 양육하고 위생과 환경을 개선시켜주면서 그들을 섬기는 일들을 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추장이 이들을 불렀어요. 도대체 당신들은 누군데 여기에 와서 이렇게 열심히 헌신하고 수고하는 것인가? 그때 짐 엘리엇의 부인이 그 추장에게 물었습니다. 그 7-8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느냐고. 그런데 이 추장이 입맛을 다시면서 하얀 고기 맛있게 잘 먹었다고... 바로 당신이 먹은 그 사람이 내 남편이요, 이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추장이 완전 놀란 겁니다. 아니, 우리는 원수를 대대로 죽여야 하는데 어떻게 당신은 당신 남편을 죽인 부족에 와서 이렇게 헌신할 수 있는 것인가? 그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이분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 떠나서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건져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바로 그분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열어주셨다고..
성령이 강하게 역사를 했어요. 이 추장이, 그런 하나님이 계시냐! 그렇다면 나도 그 하나님을 믿어야겠다고. 이러고서 그날 추장이 예수 영접하고서 부족을 다 불러 모았어요. 우리는 그동안에 전쟁하며 원수는 죽여야 했는데 정말 나는 오늘부터 사랑의 하나님을 믿기로 했다고 부족원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그랬더니 부족원들이, 추장님이 예수 믿는데 우리도 같이 예수를 믿겠다고. 이렇게 해서 그들이 함께 다 예수 믿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창으로 찔러 죽였던 민카야니라는 사람은 스티브의 아들을 자기의 양자로 삼고 신학공부를 해서 목사가 됩니다. 1965년 세계선교대회때 바로 이 와다니족 추장이 자기 부족을 대표하여 선교대회에 참석함으로 인하여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던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말씀하기 않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 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무를 태우든 기름은 태우든 뭘 태워야 빛이 나게 됩니다. 바로 희생의 바탕위에서 복음이 증거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된 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오셔서 자기 자신을 소금같이, 또 불에 태워져서 그 희생의 바탕위에 우리를 건져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바로 소금이 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희생과 헌신이 나와야만 소금과 빛으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겁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은 성도만이 할 수 있는, 복음가진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사명인 겁니다. 우리는 맛을 잃은 이 세상에 재앙 속에 빠진 이 세상 가운데 우리는 이 맛을 회복시켜주어야 합니다. 흑암이 덮인 세상에 우리는 생명의 빛으로 창조의 빛을 이들에게 비춰야 되는 겁니다. 성시낭독하면서 이사야 60:1-2을 낭독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빛은 뭐와 같은 것인가? 등대와 같은 겁니다. 사고가 나지 않게 배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죠.
모든 민족들이 사단에 속고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멸망상태 속에 빠졌어요. 왜 망하는 지도 몰라요. 사단에게 속아서 더더욱 어둠의 종노릇하도록 틀린 해답과 망할 해답, 다른 해답으로 이들을 실패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교회가 바른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그저 대충 복음을 전하거나 섞어서 전하게 하고, 이용하는 복음을 전했어요. ‘예수 믿으면 병이 낫는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예수 믿으면 자식이 잘 된다’ 등 말도 안 되는 것을 전하는 이와 같은 세대 속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그리고는 마귀 말에 속아서 여섯 가지 운명의 저주 속에 빠져서 망해가는 이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무엇을 부르셨나요? 소금과 빛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복음 가진 우리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임했습니다. 이 일은 누구만 할 수 있는 것인가? 복음 가진 우리만 할 수 있는 천명입니다.
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할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짠 맛을 내는 것은 소금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어요. 소금만이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성도만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 왕이 왕자비를 뽑는데 세 명의 처녀가 최종으로 뽑혔어요. 임금이 이 세 명에게 질문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한 처녀가 대답하기를 금이 가장 귀하다고 말했어요. 또 권세자의 딸로 뽑힌 처녀는 권세가 최고입니다. 권세 안에 다 있더이다 라고 말했어요. 가난한 선비의 딸로 뽑힌 마지막 처녀는 소금이 가장 귀하다고 말했어요. 금도 좋고, 권세도 필요하지만 소금이 없으면 맛을 낼 수가 없어서 서민들이 살수 없다고 했어요. 자, 누가 왕자비가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소금으로 부르셨어요. 소금의 첫 번째 역할은 맛을 내는 것입니다. 음식 중에도 짜야 제 맛이 나는 것이 있죠. 특별히 매운탕은 짜야 맛이 나고, 라면도 소금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짜야 맛이 나죠. 저염식이 건강에 좋다고 하지만 그래도 소금이 없으면 안 되죠. 단 것은 설탕이 아니라도 대체할 다른 음식이 많아요. 당분은 꿀도 있고, 조청도 있고, 여러 가지 감미료가 있어서 대체할 수 있지만, 소금은 소금 이외에는 짠맛을 내는 것이 없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잃어버리고 행복이 없어서 방황하고 있어요. 왜 술, 마약, 도박, 그리고 게임중독 속으로 빠져드는가? 어디에도 참 행복이 없기 때문이에요. 왜 우울증에, 자살하는 것인가? 세상은 왜 재앙가운데 빠지는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어떤 무엇으로도 행복을 얻을 수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무엇이 행복인가 물으니 죽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실존주의자들은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이 땅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고 행복이라고까지 말해요. 그런데 이미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하나요? 맛을 잃어버린 세상에 우리는 소름으로써 맛있는 세상으로 만들어가야 해요. 무엇이 참된 맛을 갖도록 만들까요? 정말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은 인생자체에 변화가 일어나요.
어떤 사람이 삶의 소망을 잃고 자살하기 위해서 기차철로에 누웠어요. 그런데 바람이 불면서 종이 하나가 날아와서 이 사람의 뺨에 붙었어요. 전도지였는데 보니까 마태복음 11:28절이 쓰여 있었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분이 그 것을 읽는 순간 성령의 역사를 통해 눈이 뜨이게 되었어요. 아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이 말씀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화가 일어났어요. 그 분이 바로 인도북부지역의 히말라야 산맥을 두루 다니면서 선교했던 썬다씽이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에요. 살 맛 없는 인생이 정말 그리스도를 만나면 이렇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송명희라는 시인을 아시나요? 뇌성마비로 온몸이 굳어서 일어서지도 못해요. 뒹굴어야해요 그냥. 그 몸 가지고서 글을 쓰는데 글씨가 안써져요. 개발 새발 쓰는 거예요. 말도 안나와요. 그런데 그분이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우리가 볼수 있죠. 나, 남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하였지만 나는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다고. 오히려 내성마비로 자기가 고통당하는 것을 감사하고 찬양 드리는 사람으로 그 사람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바로 복음의 능력들인 것입니다. 삶의 소망을 잃어버린 이 세상에 무엇을 전해 줘야 하는 것입니까? 이 복음을 전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자살을 하나요? 소망이 없으니까요. 맛이 없으니까요. 이게 우리가 해야 할 소금의 사명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만나면 살맛나는 인생으로 만들어주는 소금의 역할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데도 쓸모가 없어요. 맛 잃은 소금은 이건 거름도 못해요. 맛 잃은 소금은 길바닥에 버려서 밟히는 것밖에 없어요.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고 체험하고 누려야 되나요? 우리가 정말 맛있는 소금으로 우리가 변화를 받아서 나를 만나는 자들이 내가 있는 가정과 내가 있는 직장과 내가 있는 모든 현장이 맛없어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이 복음을 그들에게 맛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소금의 사명을 감당치 못한다면 쓸모없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의 두 번째 역할은 방부제 역할입니다. 과거에는 냉동이나 진공포장기술이 없어서 소금으로 염장을 해서 식품을 보존시켰죠. 그 소금의 짠맛이 유해한 곰팡이나 미생물의 번식을 막고 오히려 좋은 균을 활성화 시켜서 맛있는 된장도 만들고, 김치도 만들고, 새우젓도 만들고 다 하는 것이거든요. 그게 소금이 하는 역할들이죠. 복음이란 것은 이와 같이 유해 세균입니다. 바로 마귀의 번식을 막고 흑암세력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죠. 바로 복음만이 마귀를 결박시키고 마귀를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 무슨 역할인 것인가? 바로 복음의 역할들입니다. 이 땅에 왜 재앙이 넘치고 왜 이 땅에 세균처럼 이것이 마귀가 번성하도록 퍼지고 있는 것인가? 누구 탓일까요? 바로 내 탓이요. 내가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서 맛 잃은 세상을 맛있는 세상으로 만들고 마귀의 궤계 속에서 유해세균처럼 이 세상을 어두움으로 장악하고 있는 그들을 우리가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복음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을 지금 누가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해야 할 이 사명을 감당치 못해서 세상이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온 땅에 지금 동성애나 퇴폐문화가, 온갖 사회 문제들이 가득 차 있어요.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다 내 탓이로구나 여러분 가정의 문제가 누구의 탓일까요? 내 탓입니다. 여러분 직장의 문제가 누구 탓일까요? 내 탓입니다. 여러분 지역의 문제가 누구 탓일까요? 바로 내 탓입니다.
복음이 들어간 나라들마다 흑암문화가 바뀌어 지고 흑암경제가 설 곳이 없도록 이 사명을 감당했어요. 사무엘이 미스바 운동을 통하여서 블래셋 나라의 속국에서 그들이 해방되어지고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엘리사의 도단성 운동이나 바울의 두란노 운동을 통하여서 그 땅의 모든 우상 흑암 문화가 무너진 것입니다. 이것 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진짜 복음을 누리면 나의 가정과 나의 가문과 직장과 현장의 모든 흑암이 결박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게 되었을때에 흑암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2.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빛이 비추어지면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어두움은 절대로 빛을 못 이깁니다. 제가 어느 날 태양한테 질문을 했어요. ‘태양아 태양아 너 어두운 것을 보았니?‘ 태양이 ’아니 나는 어두움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어두움을 보고 싶은데 어두움을 볼 수가 없었다‘고 그러면서 태양이 ‘야야 내가 어느 날 어두움을 보고 싶어서 막 달려갔더니 어두움은 나보다 더 먼저 도망쳐버려서 어두움을 못 봤다’고 빛이 있으면 뭐한다고요? 어두움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복음의 빛으로 이 세상을 밝히도록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이 빛은 어떤 빛일까요? 창세기 1:3에 나오는 창조의 빛입니다. 요한복음 1:4에 나오는 생명의 빛입니다. 이사야 60:1에 나오는 것처럼 여호와의 영광의 빛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소금은 소극적으로 마귀를 결박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빛은 적극적으로 어두움을 물리치는 역할들을 합니다. 여러분 공사를 하다보면 바닥에 박힌 돌들을 우리가 들추기도 합니다. 돈을 들추면 그 돌 밑에서는 수많은 곤충들이 버글버글 있다가 햇빛이 비추면 막 도망쳐서 어두운곳을 다 가게 되죠. 어두움의 세력은 빛이 비추어지게 되면 흑암이 이렇게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세력은 우리와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정말 내가 복음을 비추게 되면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빛에는 밝기가 다 달라요. 반디불도 빛이고 성냥불도 빛입니다. 그러나 그 빛 가지고는 약하죠. 전등이나 달빛이나 태양빛과는 차원이 다른 빛이 되는 것입니다. 밝은 빛 만큼 흑암은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나의 빛은 어떤 빛을 비추고 있는 것인가? 나의 주변에 아직 어두움이 있다면 내 빛이 어떠한 것입니까? 내 빛이 약한 것입니다. 혹시나 여러분들이 등을 들고 있는데, 불 꺼진 등을 들고 있지는 않나요? 소경이 밤길을 가면서 등을 들고 걸어갑니다. 왜 등을 들고서 걸어가는 것인가? 남이 자기를 보고서 부딪치지 말아 달라고 등을 들고 가는데, 가다가 덩치 큰 사람에게 부딪혀서 소경이 넘어졌어요. 소경이 화를 벌컥 내면서, 아니 내가 등도 못 봤냐고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부딪혔냐고... 그때 그 사람이 뭐라고 대답하는 것인가 하면, 당신 등에 불이 꺼졌어. 혹시 여러분들, 불 꺼진 등을 들고서 사는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가요?
왜 복음을 이해하고 체험하고 누리라고 강조하는 것인가? 왜 우리가 예배에 성공하고 말씀묵상 하라고 강조하는 것인가? 복음이 누려지는 만큼 강한 빛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흑암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명운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리면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리면 바로 생명이 살아나게 되는 창조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 빛이 비추는 바로 그 순간에 세 가지 저주가 무너지고 흑암이 끊어지게 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 28-29절에 보면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 생명이 그곳에 주어진다면 흑암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이 빛을 비추는 캠프입니다. 성도의 모든 삶이 캠프가 되어야 합니다. 장례식도 저는 장례캠프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 전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결혼식도 뭐가 되어야 할까요? 결혼캠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생활도 직장생활도 모든 만남도 모두 캠프가 되어야 합니다. 뭐 하라고요? 빛 비추라고요. 여러분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비추라고요? 빛 비추도록. 이 복음 증거하라고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러 주셨는데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을 합니다. 아름다운 덕입니다.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5절 말씀 보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다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친다고 말씀하시고 산 위에 있는 동네가 감춰지지 못한다고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자신들을 이미 산 위의 동네처럼 다 보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왜 말 조심하며, 왜 우리가 행동거지를 복음적으로 살라고 하는 것인가? 다 봐요. 예수쟁이라고 여러분들을 다 보고 있어요. 여러분들을 보면서 예수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여러분들이 사셔야 하는데... ‘아이고, 예수쟁이 꼬라지 좋다.. 너나 잘 믿어라.’ 이건 여러분들이 창피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산 위의 동네입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그래야 집 안을 비춰주잖아요. 이 빛을 비추도록 우리를 세우셨는데... 무슨 빛을 비추라고요?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을 합니다. 무엇이 아름다운 덕인가요?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는 이 덕을 우리가 선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 때문에 희생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 그가 흘렸던 피가 이 땅에 복음 운동이 일어나도록 만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참 그런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만약에 나 한 사람이 희생됨으로 인해서 파키스탄에 복음화가 일어나게 된다면, 무슬림권에 복음이 증거 된다면, 나 한 사람의 희생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왜? 무엇이 귀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값지고 귀한 전도 선교를 위해서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는, 희생할 수 있는. 이것이 여러분들이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3.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합니다. 우리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뭐 하시도록? 영광을 받으시게 만들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왜 창조하셨나요? 인간 창조의 목적을 대소요리 문답 제 1문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의 제 1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하는 우리 인생이 사단에 속고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하여서 다 놓쳐버렸어요. 세가지 저주 가운데 빠져서 운명과 팔자 속에서 망할 신분으로 우리가 다 전락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나요? 바로 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우리를 즐거워하는 삶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리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이 세가지 저주에서 6가지 인생의 문제에서 나를 완전히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자,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을 합니다. 무엇이 착한 행실인가요? 빌립보서 1장 6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내가 확신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착한 일이 무엇인가요? 바로 예수 믿고 구원받는 복음을 설명하는 겁니다. 바로 멸망 가운데 빠져 있는 영혼을 건져 구원하는 것이 착한 행실입니다. 나를 통하여서 구원 받은 성도들이 그 멸망 가운데 건져 구원함을 받아서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일이 바로 무엇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바로 전도와 선교로 우리에게 이 비밀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60장은 제가 2017년 송구영신예배 드리면서 드렸던 메시지의 내용들입니다. 일어나서 우리가 빛을 발하고 이 속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은 이사야 60장의 축복들을 우리에게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들입니다.
60장 4절을 보면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네게로 모여 오느니라.. 이 빛을 발할 때에 생명운동이 일어나게 되지고 교회 공동체가 복을 받게 되고, 교회가 부흥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뭐할 때에 내가?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 비로소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지, 내가 빛을 비추지 않는 상태 속에서는 전혀 이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이사야 60장 5~9절을 말씀 보면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의 재물들이 네게로 오느니라.. 여러분들이 정말 복 받기를 원합니까? 경제 회복이 언제 일어나는 것인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서 정말 여러분들이 전도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면은 하나님이 이 복음의 증인이 되게 만들기 위하여서 하나님이 뭐하시겠다고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의 재물들이 네게로 오도록 만들겠다고.. 성도의 기업을 축복하시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들이 물질 축복을 못 받나요? 전혀 하나님과 방향을 안 맞추니까..
이사야 60장 10-14절 말씀을 보면 레바논의 영광입니다. 소나무, 잣나무, 황양목이 함께 네게 이르러 네 거룩한 것을 아름답게 세울 것이라.. 하나님이 교회에 너무 많은 숫자가 오게 되니까, 교회를 뭐해야 되는 것이죠? 크게 짓고 세워야 되요. 이것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뭐하시겠다는 이야기입니까? 레바논의 영광이 네게 함께 하여서 거룩한 곳을 다시금 세우는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세워진 이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큰 성전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60장 15-21절 말씀을 보면 나 여화와는 네 구원자,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로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 보좌의 권세와 배경이 내 백그라운드(배경)가 되어져서 그분이 함께 하시는 귀중한 증거들이 내 인생 가운데 나타나도록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들과 항상 함께 하겠다고.. 누구한테 입니까? 전도자에게 주신 약속들인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오늘 이사야 60장 22절 말씀을 보면 그 작은 자가 천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가요? 바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왜 구원하셨나요? 이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회복시키는 것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겁니다.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에 모든 축복을 이미 다 담아 놓으시고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것들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복음을 들고서 살 맛을 잃은 세상에 우리가 맛을 주어야 되는 겁니다. 어두움이 덮힌 이 세상에 우리는 빛을 비추어야 되는 겁니다. 이 사명을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가정과 산업과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사야 60장의 축복을 주셔서 최고의 승리와 축복 속에 살아가도록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이 언약을 여러분들이 오늘 언약의 말씀으로 잡으시고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땅은 맛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이 땅은 마귀가 온 세상을 더럽고 부패시키는 어두움이 덮혀 있는 이 땅입니다. 캄캄하게 덮혀 있는 이와 같은 세대 속에 하나님은 이 시대를 변화시키도록 우리를 소금으로 빛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나는 혹시나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면은 어떻게 할까요? 내가 든 등에는 빛이 얼마나 비춰지고 있는 것인가요? 왜 내가 있는 현장과 내 가정과 내가 있는 모든 장소에 어두움이 덮혀 있나요? 바로 내 탓인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기로 결단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이사야 60장의 모든 축복들을 우리에게 이미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왜 우리가 이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그동안에 방황하며 살아왔나요? 다시 한번 우리가 연말을 보내면서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며 결단하며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기로 결단할 수 있는 시간으로 주님이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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