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행 6:1-7절 제목 : 문제와 해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애증의 대상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교회로 인한 상처(정확히 말하면 목회자로 인한 상처)로 그런 애증을 경험하신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안나갈 수도 없고 좋은 교회를 찾기도 어렵고, 또 좋은 교회인줄 알고 찾았는데 보면 거기도 문제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초대 교회를 공부하기 원했습니다. 왜요?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즐거운 교회를 이루게 하는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교회를 이루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사도행전 공부가 스물 일곱 번째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초대 교회가 어떻게 태동되고 성장했는지를 공부해 왔습니다. 120명의 창립 멤버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하면서 소외와 핍박을 견디면서 커다란 대형교회로 급성장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 가운데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복음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전해졌고, 교회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유대인들의 계속되는 핍박을 견뎌야 했습니다. 뒷날에는 이 핍박이 더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로마의 10대 박해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박해가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요사이는 사탄이 박해라는 전략을 포기하고 다원주의라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특히 이 시대에는 다원주의가 종교 다원주의로 이어지면서 아주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6:1절을 주목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때란 분명히 사도들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피를 뿌리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그때를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막 감옥에서 나와서 전하고 있을 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말입니다. 교회는 박해를 당하면서 오히려 제자의 수가 더욱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는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더욱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장하는 교회, 성령 충만한 교회 유무 상통하는 교회라는 온갖 찬사를 받을 만한 교회였지만 이 교회는 아직 어린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처음으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교회였습니다. 이 말은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날마다 제자의 수가 더해지는 것은 분명히 아름다운 일이며 축복 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몸이 비대해 지면 그에 걸맞는 근력이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몸만 비대해지고 그에 걸맞는 근력을 키우지 못하면 식물인간처럼 살아야 합니다. 몸집은 비대해 졌는데 그것을 지탱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자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성장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습니다. 교회에 다양한 구성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서 다양한 기대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구제를 비롯한 다양한 일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행정적인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초대 교회에 생겨난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은 긍정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성장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문제가 없는 것이며 늘 화평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악 중에 출생한 인간들이 모여서 이룬 교회는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통해서 성장하고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초대 교회가 봉착한 문제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가를 관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문제가 없는 교회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는 지상 교회에는 없습니다. 다만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비록 초대교회는 아직 어린 교회였지만 또한 최초의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오고 오는 교회들에 대한 영원한 고전이 바로 초대 교회인 것입니다. 이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고 은혜를 받는 소중한 시간이기를 원합니다.
1. 원망과 불평 그 이면(1절)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날마다 구제에서 빠지므로 원망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원망했다는 말은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망을 나타내는 단어와 같은 어근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모세를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억하시지요. 조금만 어려우면 애굽이 좋았다고 했던 사람들 말입니다. 이 말은 지금 본문에 등장하는 헬라파 과부들이 하는 원망이 모세에게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흡사한 양상이라는 점을 알게 합니다. 본문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각 지체들이 가져오는 구제헌금을 받았습니다. 유무상통하는 교회는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그 소유를 판 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는 일에도 이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정하게 나누어주려고 했는데 행정적인 실수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구제 명단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왜 우리를 차별대우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타향살이 서러운데 왜 우리 과부들은 구제 명단에서 빠졌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과부가 교회의 돌봄을 받는 것이 권리입니까? 사실 이것은 권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성도들에게 부과된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가난한 자들과 짐을 함께 져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려운 사람이 나는 마땅히 돌봄을 받아야할 사람이다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더구나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교회 안에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이질 그룹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초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우선 교회 내에 헬라파, 히브리파 하는 구분이 있었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뒷날 예루살렘 교회에 아주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으며, 수요일에 공부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에서도 유대인과 이방인은 물과 기름 같은 관계여서 그들의 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셨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면 헬라파 유대인( JEllhnistw'n)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이 사람들은 그리이스나 로마 등지에 흩어져 살면서 헬라어를 익혀 사용하던 유대인들로서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에 왔다가 개종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이 말은 이들이 헬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분은 의외로 깊은 골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 JEbraivou")이란 팔레스타인 출생으로 아람어를 사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말 할 것도 없이 히브리 문화에 깊이 젖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다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언어란 그들이 살아온 환경과 세계상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가짐으로 배타적 선민사상이 의식 속에 남아있는 자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셈족의 언어였습니다. 성경에는 아람어의 표기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예로 "달리다굼"이나 "마라나타" 또는 "에바다"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표기들입니다. 또 헬라어를 쓰고 있는 유대인들이라면 그들은 그리이스나 로마 등지에서 살았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이방적인 사고방식이나 철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구제하는 일들을 처리함에 있어서 서로 다른 시각으로 인한 원망과 시비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무엇입니까?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그룹들이 교회 안에 함께 있었고 이들이 온전하게 하나 되지 못함으로 인해서 단순한 행정적인 착오를 뭘로 비화합니까? 왜 우리는 차별대우하느냐는 생각으로 비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이 생겼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 모진 박해를 이기고 날마다 성장하던 교회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때는 교회의 순결을 위협하는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잘 이겨나갔던 교회입니다. 그러자 사탄은 이제 교회 안에 이렇게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해체시키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문제에 대한 분석과 대처(2-4절) 1) 진단 그런데 이 사건을 보는 사도들의 시각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의 처리하는 사도들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이 문제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원망의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사태를 정확하게 진단한 것입니다. 당황해서 상황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법 역시 탁월합니다. 그냥 자기들끼리 모여서 어떻게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아마 우리로 말하면 임시 제직회가 모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진단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들이 사람들이 많아짐으로 인해서 상당히 많은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해야 했음을 발견합니다. 인원이 많아지면 그만큼 행정적인 일들도 많아집니다. 본문은 특히 구제 사업에 대한 일들이 많아졌음을 시사 합니다. 본문의 “공궤를 일삼는 것”이라는 말은 '먼지가 일어날 만큼 분주히 움직이다', '열심히 일하다', '봉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식사나 기타의 일 등에서 섬기는 것'(요12:26)을 나타낼 때와 '집사로서 봉사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딤전3:10, 13). 영어의 집사에 해당하는 단어 deacon은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리고 1절의 '구제'(디아코니아)라는 말도 본 단어와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되어 집사들이 교회 안에서 주로 맡은 일들이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말씀을 준비하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하나님과 은밀한 기도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행정적인 일들과 구제 사업들로 먼지가 일어날 만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서로 불공평하다는 원망까지 생겨 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일을 제쳐놓고 급한 일에 매달린 꼴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둘 다 엉망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이 사태를 보는 눈입니다.
생각할 문제 : 그러면 여기서 생각하고 지나갈 것이 있습니다. 사도들의 진단은 공궤가 말씀보다 저급한 일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사도들이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하였다고 해서 '공궤'가 기도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보다 저급(低級)한 일이라고 단정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1절과 4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헬라어 단어를 살펴보면 잘 드러납니다. 1절의 구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아코니아(diakoniva)가 사용 되었습니다.그리고 4절의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할 때, 전하는 것도 디아코니아(diakoniva)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말씀 전하는 일이나 구제 사업을 펼치는 행정적인 일은 둘 다 섬기는 일입니다. 우열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은사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열 두 사도에게 있어 '공궤' 하는 일은 그들이 주께로부터 부름 받은 일(마28:19, 20)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사도들이 할 일의 우선순위는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는 일이요,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영적 고갈이 있게 되고 건강하고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 사역을 하다보면 제 자신이 은혜로 충만하고 말씀의 깊은 세계를 경험할 때 좋은 설교가 나갑니다. 제 자신이 은혜의 깊은 세계가운데 머물지 못하게 될 때, 정상적인 말씀이 아니라 감정이 섞인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 안의 각 구성원은 저마다 주께로부터 특별히 부름 받은 재능, 혹은 2차적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들을 불평과 불만 없이 잘 처리해 나갈 때 몸이 균형 잡힌 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발의 역할을 누군가는 손의 역할을 누군가는 머리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이 해야 할 정작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까 형평성을 잃어서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원리는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의 직업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일들이 있습니다. 사회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근본적으로 고급과 저급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는 새벽마다 거리를 쓰시는 분들을 보면서 그 분들의 수고로 거리가 깨끗한 것에 늘 감사합니다. 환경 미화원들의 섬김으로 냄새나지 않는 도시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 또한 이 사회의 한 단면을 섬기시는 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차등과 경쟁의 개념은 정리되어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2) 처방 그래서 사도들은 돕는 사람들을 세울 것을 제안합니다.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라는 말씀을 통해서 집사를 선출하는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을 듣는 사람들을 일꾼으로 세움으로 원망과 시비가 불식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역할 분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사도들의 현명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모든 일을 자신들이 처리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은 적절하게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저는 사도들의 이런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만능인이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이것도 저것도 다 원만하게 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사람들에게 역할을 맡기려고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충분조건이 필요합니다. 우선은 준비된 사람, 재능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맡겨진 일을 책임감 있게 감당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재능이 많아도 맡겨진 일에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니 재능이 좀 부족하고 준비가 좀 부족하더라도 끝까지 맡겨진 일을 책임감 있게 감당하는 자세가 더욱 귀하다고 하겠습니다.
3. 공동체의 결정(5절) 그런데 사도들의 이러한 결정은 사도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듯이 보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공동체가 원망과 시비를 불식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서 하나 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주목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날들이 길어져서는 공동체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아름답게 지어갈 수 있을까를 함께 의논하는 가운데 진취적인 합일점에 이르는 것이 공동체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앞에 함께 문제를 상의하고 아름다운 합일점에 이르는 과정들은 마땅히 칭송되어야할 부분인 것입니다.
4. 말씀이 왕성해진 교회(7절) 1) 말씀이 심히 왕성해졌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왕성해 졌다는 것은 미완료 시상입니다. 아직도 계속해서 왕성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왕성하여라는 말은 '자라게 하다', '증가하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 교회를 질적으로 계속 자라게 하시며 또 양적으로도 믿는 자의 수를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하셨다 것입니다. 이 말은 사도들이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고 말씀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교회 됨에 핵심적인 일은 말씀이 아닙니까? 말씀이 등한히 되고 나면 다른 어떤 프로그램으로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들은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전무한 결과 교회는 다시 말씀에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본문은 말씀합니까? 2)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시비가 해결되고, 말씀이 왕성한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성령 충만한 일꾼들이 있는 교회, 지혜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집사들, 즉 섬기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에 제자들의 수는 나날이 증가하기만 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 자체가 매력적인 모습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칭송 받는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신뢰와 사랑이 있고,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진 건강한 교회에 성장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말씀이 흥왕하고 행정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교회에 제자의 수가 많아지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3) 심지어는 유대교의 제사장들도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내에서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으며 유대교 내에서는 치욕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요아킴 예레미야스(Jeremias)에 따르면 예수 당시의 유대인 일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모두 18,000명 가량이었고 이중 8,000명 정도가 제사장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제사장들 이 제의(祭儀) 기능을 수행했던 기간은 3대 명절의 순례축제 기간과 연 2주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연10-11개월 동안은 고정된 수입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생계의 어려움 너무나 심했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직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과 대제사장들 사이의 사회적인 신분격차는 대단히 컸습니다. 대제사장들은 항상 제사장들의 소득에서조차 십분의 일을 떼곤 했습니다. 이로 인해 별다른 소득이 없는 제사장들은 굶어죽는 사례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 제사장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어려운 생활과 또한 유대교 자체의 부패상으로 인해서 많은 회의(懷疑)를 갖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생명력 있는 기독교 신앙이 많은 호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고 바로 그들이 주님을 따랐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좋은 교회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정말 좋은 교회는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잘 해결하는 교회입니다. 그것을 잘 감당할 만한 일꾼이 있는 교회입니다. 오히려 문제가 없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왕성하게 성장하던 초대 교회가 구제 문제로 원망과 불평에 휘말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원망과 불평은 성령 충만하고 지혜 충만하며 칭찬 듣는 일꾼인 일곱 집사가 세워짐으로 불식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딛고 더욱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효과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는 원리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점차적으로 일꾼들이 늘어갔을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도들의 정확한 문제 인식 능력, 분석 능력, 대처 능력, 그리고 사람을 세워서 일하게 하는 능력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지도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도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만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숙한 공동체는 문제를 뛰어 넘을 줄 압니다. 문제에 굴복해서 마음이 찢기고 사분 오열되지 않습니다. 성숙한 공동체는 정확한 진단을 할 줄 압니다. 그리고 그에 적절한 처방을 내릴 줄 압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감당할 줄 압니다. 이런 성실한 사람들이 없이는 역할 분담도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공동체의 성장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번 따라서 하십시다. 문제없는 교회를 꿈꾸지 말고, 문제를 성숙하게 극복하는 교회를 이루자!!!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어울림 교회가 이런 저력을 가진 교회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성숙함을 가진 교회라고 믿고 있습니다. 좋은 일꾼들을 가진 교회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어울림 교회는 예배 처소를 옮기는 일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꾼들을 임명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노력의 결론은 말씀이 심히 왕성해지고, 제자의 수가 더해지며 제대로 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에 있습니다. 함께 이 역사에 동참하셔서 초대 교회처럼 문제를 성장과 성숙의 기회로 바꾸어 나가는 기쁨을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