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8.18 (월) 걷기 4일차.
08:40분 문자 소리에 잠에서 깼다. 잘 도착했다는 아내의 문자. 이런, 새벽 기차로 대전에 다녀오려는 아내를 배웅하려했건만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안 깨운 아내의 배려보다 그냥 보낸 자괴감이 더 크다.
빗소리가 요란해 한참을 숙소에서 뭉그적거렸다. 매일 아침 출발이 늦어지는 이유가 늦잠의 마왕인 아내때문인 줄 알았는데...
비가 소강상태에 든 순간 거리로 나섰다. 원래 여정이라면 오늘은 장성까지를 생각하고 있으니 더 지체할 수는 없다. 그런데 다시 폭우.
정면돌파할까 하다가 잠시 PC방으로 대피.
언제 그랬나 싶게 날이 개인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주 시내를 돌아볼 차례.
모든 길은 나주로 통한다 했던가. 과거의 나주목은 목포까지 아우르는 남도 제일의 고을이었다. 근대화 이후 광주에 그 역할을 넘겨주기 전까지는. 때문에 시내 곳곳에 볼거리가 많다.
남고문.
나주읍성의 남문이다. 삼남대로를 타고 올라온 나그네는 나주로 들어가며 이 남문을 제일 먼저 만나게 된다. 사진의 남고문은 근자에 복원된 것이다. 1913년 무렵의 신문에 일제의 성문 해체결정 운운의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시기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본다.
비록 이미테이션이지만 100년 전 나그네 심정이 되어 저 성문을 밀고 들어가고 싶다.
예전에도 옛 자취와의 조우는 예사롭지 않은 즐거움을 주었지만 이렇게 걸어서 찾아왔을 때의 느낌은 사뭇다르다.
금성관.
나주의 과거모습은 시청2청사 주변에 다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심에 나주목의 객사터인 금성관이 있다.
객사의 모습.
이건 정비하기 이전 금성관과 객사의 사진. 결국 돌아갈 것이라면 한 번 더 생각을 하고 움직였으면 좋았을 것을. 어디 객사 뿐이랴 청계천을 돌아보지 않더라도 이 땅에 섣불리 손 대놓고 나중에 뻘짓하는 예가 어디 한 둘일까.
영산포하면 홍어, 나주하면 배? 음식으로서는 당연 곰탕이다.
나주곰탕집으로 유명세를 말하자면 의당 객사 앞의 '하얀집'과 정수루 앞의 '남평식당'을 든다. 둘 사이의 거리는 채 60m도 안 되고 곳곳에 나주곰탕 전문 식당들이 포진해있다.
그러나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한 달에 하루 쉬는 집에 오늘이 딱 그날이다.
객사터 바로 옆의 정수루.
관아의 정문이다.
지금 둘러보는 요 일대가 과거 읍성의 다운타운인 셈이다.
정수루 옆엔 한창 공사 중인 나주목 내아가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군수 관사.
재래시장에 있는 곰탕의 명가 남평 식당.
정수루와 나주목 내아 맞은 편엔 60년대 같은 시장 풍경이 있다.
들어서면 메뉴를 묻지 않고 사람 수만 센다. 당연하지 메뉴라곤 오로지 곰탕 하나니까.
어디 식당 가서 줄서서 기다리는 일을 죽기만큼이나 싫어하니 평소 유명 식당이라는 데를 딛는 때가 없는데 오전 11시라는 애매한 시간대라서인지 손님이 뜸해 다행이다.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국물을 푹 떠 건더기 띄우고 쟁반에 깍두기, 배추김치와 함게 올려 식탁까지 운반하는 시간 약 55초. 누가 감히 곰탕 앞에서 패스트 푸드를 말하는가. 원래 곰탕이라는 게 5일 장의 서민들을 위한 국밥인 만큼 퍼내기 편해야 하는 것은 필수.
그러나 빨리 나왔다고 맛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보통 하얀국물이 우러나는 소머리곰탕과는 다르게 국물이 맑고 더욱 시원하다. 밥과 고기가 반반 비례로 들어 있어 야속하지 않다. (그래서 값이 싼 편은 아니다. 6000원)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란 속담을 확인하려면 먹는 내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나면 삶에 자신감이 생긴다. 인생 뭐 있나, 먹다 가는 거지.
나주읍성의 동점문으로 향하는데 또 퍼붓는 비. 우비를 꺼내입고 길을 재촉하다가 아무래도 그칠 비 같아 잠시 다리쉼을 한다.
오늘 날씨 참으로 요망하다.
복원된 지 몇 년 안 된 따끈따끈한 동점문. 읍성의 동문으로 남문으로 들어온 과객은 방향에 따라 북문이나 동문으로 빠진다. 늦잠과 비와 볼 것 많은 나주 시내에서의 시간 소요로 이미 시간은 1시가 넘어버렸기에 오늘 장성까지의 길은 어렵게 되었다. 숙소를 고려한다면 결국 광주 송정리까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동문 그늘에서 잠시 걸어야할 길을 점검하고.
누가 답글에 결코 쉽지 않을 40대 중반의 나이에 어려운 일을 한다고 응원해줬다. 부려 10살이나 높여 잡아 내심 서운(?)했었는데 내가 내 사진을 봐도 40대 중반 이하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떨 땐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아내를 부녀지간으로 오해하는 때도 있으니...
하긴 이게 어제 오늘 일이랴. 20대에도 40대로 보였으니 내가 믿는 한 가지 희망은 50대에도 40대처럼 보이리라는 것.
나주 동문 근처엔 절터에서나 봄직한 석당간이 높게 서있다. 원래 크막한 돌기둥 5칸이 높게 세워져 있던 석당간은 지금 해체보수 중이다.
서울 동대문을 높이 싼 것과 상통하는 이치로 나주 풍수기맥을 보완하려는 의도였다는 의견도 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처음 고을을 세울 때 이 석장을 세워 행주(行舟)의 형세를 표시하였다 하였고 동문 안에도 목장이 있다 하였으니 나주의 지형이 배가 나가는 모습이어서 안정을 꾀하기 위해 성 동쪽에 돛대로서 세웠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인근의 촌로께 여쭈어도 후자의 답변을 해주신다. 동문 안쪽의 목당간을 처음엔 전신주로 착각했다가 그 분이 말씀해 주셔서야 알았다.
나주를 빠져나오다가 발견한 '부름택시'
남도만의 특징인지 '콜 택시'라 하지 않고 '부름택시'라 말하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참으로 고무적인 현상이다. 모국어의 훼절을 막는 일은 이런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동신대학교쪽으로 831번 도로에 오르자마자 노안면 소재지로 가는 샛길(이 길이 과거 삼남대로의 여정이다)로 노정을 잡는다. 나주 배로 유명한 곳 답게 구릉지대가 배밭으로 펼쳐진 정감있는 길이다.
길을 걷다보면 수많은 사체들과 만나게 된다. 곤충부터 파충류 좀 더 큰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그저 내가 길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포유류의 사체가 아니 되기를 바랄 뿐(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이지 갓길 좁은 곳에서 차들과 스쳐지날 때면 하루에도 수백 번 이 생각이 든다)
비가 퍼붓다가 흩날리다가 다시 볕이 좋아졌다가 심술을 부리는 가운데 드러난 상쾌한 길.
오늘은 그림자가 하나. 그런 길을 혼자 걸어야 한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길이 아니라 이런 한적한 시골길을 아내는 걷고 싶어했는데...
혼자이다 보니 사진 찍어줄 사람도 없고 그저 셀카질이나...^^
혼자놀기의 진수를 만끽하며 걷는 가운데 노안면 소재를 지나 광주광역시 평동으로 넘어가는 길로 접어든다.
사유재산권의 침해인가 인류생존의 최후 열쇠인가. 깊은 논의가 있어야 할 문제이지만 '개발'을 '제한'한다는 단어부터가 가슴에 안도로 와 닿는다. '지속가능'한 '개발'이란 없다. 생태의 입장에서 보자면 '보존'이냐 '파괴'냐가 있을 뿐이다.
난 환경주의자가 아니다. 자동차를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이며 물을 물쓰듯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인가? 최소한의 보호장치에 더 연연하게 된다.
어느덧 나주시 노안면과 광주광역시 광산구 연산동의 접경.
해남군에서 시작한 여정이 네 번째 타시군에 들어서고 있다.
갓길이 없어 아쉽지만 나름대로 아늑한 숲길이 계속된다.
평동 나들목 공사로 주민들과 마찰이 있다는 공사현장.
또 다시 부딪치는 문제. 환경파괴는 인간의 원죄다.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 환경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더 많이 입고 쓰고 먹고 누려야 할 테니까. 무조건적인 환경보호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차라리 인간의 개체수를 인위적으로 조정하라 하자.
그래도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 지금의 파괴는 필요악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현존하는 건설업체의 유지를 위해서 자전거의 패달을 돌리듯 관성대로 새로운 사업들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냐.
해바라기.
아내가 그토록 집착해 마지않는....
왜 아내는 해바라기를 좋아할까? 꽃이 커서? 해를 바라봐서? 해를 바라보지 않는 꽃이 어디 있을까.....
실크로드를 횡단할 때 저놈의 해바라기 사진을 찍어달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었는데 그 소원 하나를 못 들어주고.....
다시 해바라기를 보니 아내의 빈자리가 더 크다.
광주시 광산구 금연마을의 한 가게에서 휴식.
들에서 일하시던 분들이 잠깐 들러 약주를 하시고는 금새 자리를 뜨신다.
시골길 중간에 나타나는 이런 가게들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구호가 하늘에서 하늘거디다 끝나게 되지 않기를.
드디어 광주 광산구 평동의 산업단지. 한양을 오가던 옛 삼남대로는 이제 산업단지 내 외곽도로로 변해있다.
산업단지인 만큼 화물차 위주의 길이고 사람을 위한 길은 거의 방치되어 있다. 이나마도 조금 지나면 인도가 좁아지고 풀이 허리까지 자라 차도로 내려서 걸어야 한다.
긴 바지가 없는 터에 저기서 4000원 짜리 옷이나 주워볼까 하다가 어깨의 짐이 늘어나는 게 두려워 그냥 지나친 옷가게.
이제 산업단지를 벗어나 평동교를 넘는다.
과거에 영산강 지류인 황룡강을 배로 건너면 선암의 장터가 번성했었다. 지금은 지도에 '구장터'라는 지명만이 찍혀있을 뿐 어지간한 주민들은 장터의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바로 옆의 송정리가 호남선과 경전선이 분기하는 현대의 교통 요지가 되면서 모든 상권과 생활권을 넘겨줫을 것이다.
평동교에서 바라본 황룡강.
고려시대 선암사가 있어서 선암동이라는 이름을 얻게된 선암마을에 접어든다. 과거 삼남대로의 역촌이 있었던 마을이다.
옛 선암사의 탑을 보기 위해 물어물어 찾았는데 이런 외진 곳에 있고 안내 표지 하나 없어 애를 먹었다.
마을 어귀 밭 가시던 할머님이 쭈욱 들어가서 이층집 나오거든 거기서 물으라기에 염치 불구하고 댁까지 들어가 탑을 물었더니 할아버님이 소상히 일러주시고 설명까지 해주신다.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하며 40여년 전 석탑을 송정공원으로 옮긴 일이 있는데 그러고나서 두 달이 되지 않아 동네 아이들이 이름 모를 병에 걸리고 그 중 넷이 죽었단다. 이것이 다 석탑을 옮겨서 그렇다면 마을 노인들이 주축이 되어 진정을 내 석탑을 되찾아 소달구지에 석탑을 싣고 돌아왔다는데 이미 공원에 옮겨진 석탑의 옥개석과 탑신 등 몇 덩어리가 유실된 상태였기에 개울의 돌로 대강을 메움해 놓은 상태여 옛 석탑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
사정이 이렇다보니 군에서도, 어디에서도 어떤 대책을 내놓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서 350년 대를 이어 살았다는 할아버지는 석탑에 대한 애정이 깊고 마을 이것 저것에 대한 내력을 소상히 알고 계셨다.
선암마을 전반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신 박금철 옹(71세)
건물앞 차가 서있던 자리가 조선시대 선암역이 있던 자리란다. 변형되었으나마 역관으로 쓰이던 건물이 농가로 사용되며 존재했었다는데 지금은 철거된 상태.
여기서 절골을 너머 장성으로 나아가야하는데 시간이 늦어 멈추어야 한다. 옛날 같으면 선암역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겠으나 지금은 여관조차 없는 촌. 마침 아내도 기차로 내려온다 하니 송정리 역 근처에서 자기로 했다.
GPS에 오늘의 좌표를 입력해 놓고 마을에서 나오는 차를 얻어타고 송정리로 향한다.
현대판 교통취락 송정리역.
송정리는 떡갈비와 뼈다귀해장국이 유명하다.
아내 없는 빈 상에 떡갈비를 시켜놓고 포식.
먹거리 좋아하는 아내가 나주 곰탕에 이어 송정리 떡갈비까지 다 놓쳤다. 안타까움에 목이 메이면서도 꾸역꾸역 맛나게 싹싹 비우는 이 속은 또 무어냐.
오늘은 고작 22Km 걸었다. 이제까지의 거리 119km(GPS에 누적된 거리로만)
내일은 장성까지, 혹은 장성군 입암면까지 갈 예정.
첫댓글 대단하심니다..... 부디 건강한 여행 되시길.....
나주... 추억에 잠겨봅니다 처음 청운에 뜻을 품고 도시로 입성할때 가장먼저 접하게 되는곳이 나주였습니다 서울행 완행열차를 탈수있는 나주에서 완행열차에 몸을 맞기고 서울에 입성했던 나주 인데 아직도 나주는 지난날의 모습에서 크게 변함이 없는듯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도시의 모양에서 조금은 빗겨가는듯한 도시 나주를 꼼꼼히도 체크하셧군요... 긴 여정의 도보길이 흙길이였으면 하는 바램이 크지만 어찌 흙길을 하염없이 걸을수 있기를 바랄수없는 요즈음의 시대적 변화를 절감하게 합니다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살아숨쉬는 흙을 모두 덮고 아스팔트 시멘트길로 뒤범벅이니 땅의 정기를 받고 살아야 하는 삶에 무한한 걸림
돌이 되는 개발이 때로는 가슴아프기도 합니다 한적한 시골길을 찾아가봐도 요즈음은 오솔길조차도 시맨트로 포장이 되어있으니 ..ㅠㅠ 그렇지만 그곳에 생활하시는분들은 삶의 편리함때문에 포장을 하지않을수도 없겠지요?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오지마을을 찾아보기가 점점 힘들어져가느듯 합니다 어디를 가도 번듯한 신식건물에 조금외진곳이라고 찾아가보면 최신형 펜션들이 가득하고.. 어디를 가야 옛 추억을 고스란히 느낄수있는 정취를 맛볼수 있을까 가끔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내심 돌쇠님의 긴 여행길에 가끔은 6~70년대 정취를 구경할수 있으려나 기대했는데 무리한 기대였던가 봅니다..^^ 그래도 긴여정이시니 언제인가는 아~ 하는 탄
성을 부를수 있는 마음이 고향을 한곳정도는 지나가시지 않으려나 하는 기대를 하면서 오늘도 돌쇠님께 화이팅을 보냅니다 홀로 걷는길이 비록 조금은 허허롭고 외롭더라도 더 좋은 추억을 담을수 있어 결코 외롭지 않는 여정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화이팅 하십시오~~
끝까지 화이팅 하세요.... ㅎㅎㅎ
오늘도 돌쇠대감 걷기여행 이바구를 읽어며 잠시 여행의 대리 만족감에 빠져 본다...
돌쇠님 !! 힘내세요
힘든 여정중에도 이렇게 멋진 후기를 올려주어 잘 보고 있습니다.
ㅎㅎ돌쇠님 드디어 시작하셧군요^^ 우선 안전이 최곱니다^^ 무리하지 마세용^^
조심히 돌아 오세요^^
돌쇠님의 생생 여행기가 나주의 속 살까지 편안히 앉아서 감상하게 하는 무례를 범하게 만드는군요 ㅎㅎ 감사합니다
여행기 색달라 좋습니다 만 물집은 ..... 마음의 짐은 없으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