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87] 성주읍기(하) | ||||
성주읍기(邑基)는 산과 강, 그리고 들(野)이 조화로운 삶터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읍기풍수설은 읍기 뒤쪽을 지켜 주는 주.진산(主.鎭山)과 관련된 지네형 내맥설(來脈說)과 와우형 명당설 이 고작이다. 읍기 앞쪽으로 바라보이는 조.안산(朝.案山)들이 주.진산보 다 훨씬 높아 환경지각적으로 적잖은 영향을 받았을텐데도 그에 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전해 오지 않는다. 더구나 성주읍기 터의 본색은 결코 그런 형국론적 지세에 있지도 않다. 그러고 보면 그 어느 곳보다도 합리적 이면서도 논리적인 새로운 풍수 해석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 바로 성주읍 기인 것이다.
성주읍에 가면 우선 두가지 특징있는 풍수 경관(景觀)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주.진산보다 훨씬 높은 조.안산의 자연 지세적 경관이요, 또다른 하나는 예로부터 와우형 지세의 명형국지로 전해 오는 경산리(京山里) 일 대에 과밀하게 집중 개발돼 있는 인문적 도시경관이다. 성주읍기의 풍수 역사는 곧 그 두 가지의 풍수 특징이 맞물려 돌아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주읍기는 고을의 진산(鎭山)격인 인현산(해발 185m)과 주산(主 山)격인 대금산(해발 70m.주산을 봉두산으로 상정해도 같은 높이임)의 높 이가 조.안산격인 성산(해발 389m)과 대황산(해발 425m), 그리고 칠봉산( 해발 516m) 등에 비해 훨씬 낮다.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다. 게다 가 인현산에서 읍기쪽으로 뻗어내린 지맥들마저 좌우로 굴곡하는 용틀임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용세(龍勢)가 매우 약하다. 사신사(四神砂)적 형세설 로 보자면 한마디로 부족함이 많은 게 바로 성주읍기인 셈이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만들어졌던 읍기풍수설이 바로 지네형 내맥설과 와우형 명당 판 국설이었을 성싶다. 이를테면 진산의 됨됨이 대신에 읍기 후록까지 나지막 한 구릉으로 연결돼 있는 연맥의 흐름을 오공형(蜈蚣形) 내맥으로 상정하 고, 또 그 지맥 끝이 이천(伊川)변에 멈추면서 일궈놓은 기묘한 지세를 와 우형 판국으로 상정하면서 그 나름대로 영남의 웅도로서 손색이 없는 풍수 설을 갖추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진산인 인현산 자체가 조.안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하고, 또한 거 기에서 읍기쪽 봉두산과 교촌산으로 뻗어내린 좌우의 지맥이 좀 더 높고 힘차게 내려왔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러나 나지막한 구릉성 지맥이 두른 곳도 알고 보면 그 나름대로의 장점은 있다. 풍수에서는 한 치의 높은 땅도 모두 용(龍)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기맥이 통하는 것으로 보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곳에서는 하늘 빛이 막히지 아니하고, 또한 수기(水氣)가 멀리 통하기 때문에 오히려 인재가 많이 나고 사람들의 질병도 적다는 것이다. 폐일언하고 옛 성산가야인들의 중요한 생활무대였 던 저 성산리(星山里)의 산막(산막터 혹은 살망태) 터나 혹은 고려 건국초 에 옛 경산부(京山府)가 자리잡았던 저 대황리(大皇里)의 구등골(堅洞 혹 은 仇等邑) 터와 지금의 읍기 중심터를 한번 비교해보자. 이천 남쪽의 그 두 산곡(山谷) 마을은 비록 방어와 방풍에 유리한 사신사적 지세를 갖추고 있지만, 사람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양명(陽明)함으로 보자면 현재의 읍 기 터에 훨씬 못미친다. 그런 이점이 있는 곳인데다 남쪽으로는 이천(伊川 ) 줄기가 읍기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또한 그 주변에는 넓은 들이 가로놓 여 있으니 어찌 그 터의 됨됨이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쏜가. 그러고 보면 전래의 형국론에 상관없이 이천변 북쪽의 읍기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명당 판국으로 여겨도 별 무리는 없을 듯하다. 예로부터 와우형 지세의 우복(牛腹) 부분으로 알려져 왔고, 현재 성주읍 의 중심가를 이루고 있는 경산리 터도 풍수적인 오해를 받고 있기는 매한 가지다. 그곳은 남쪽으로 내리뻗은 인현산 주맥이 이천을 만나면서 그 흐 름을 멈춘 지점이며, 지세상으로는 오른쪽 지맥이 크게 발달한 이른바 백 호장(白虎藏) 판국의 명형국지다. 북쪽으로 나지막한 봉두산이 가로 막고 있어 그래도 북풍의 영향을 조금이나마 덜 받는 곳이어서 그랬든지, 아니 면 소의 배 부분이 발복처이기 때문에 그랬든지, 그 터에는 경산부가 들어 서기 이전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군거(群居)해왔던 것으로 전해온다. 하지만 일견 내맥이나 형국론상으로 전혀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그 터도 봉두산에 올라 내려다 보면 뭔가 께름칙한 구석이 있음이 느껴진다. 이천 너머로 흘립해 있는 높은 조.안산들이 너무 가까이 위치해 아무래도 그 터 가 어느 정도까지는 임압(臨壓)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 이다. 그런 갑갑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와우형 지세의 산기슭은 물론 산 능선까지도 온통 건물들로 꽉 들어차 있다. 우복 부분이 이미 과 도하게 개발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갈 곳이 없어 산 능선 위에 집을 지었다 면 몰라도, 만약에 조.안산의 높이에 맞추어 좀 더 나은 조망권을 확보하 기 위해 의도적으로 높은 곳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그 터의 본색이 결코 와우형 지세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경관물이라고 봐야 옳지 않겠는가. 물론 봉두산 정상부 바로 밑에 자리잡고 있는 봉산재(鳳山 齋: 성주이씨 朧西郡公 李長庚의 옛 집터)와 소 머리 지형 동편 언덕에 자 리잡고 있는 성산재(星山齋: 성산이씨 시조 李能一의 옛 집터)가 이미 그 터의 본색을 잘 반증해 주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성주읍기에서 산과 관련되어 주목을 해야 하는 것은 주.진 산 쪽이 아니라 오히려 조.안산 쪽인 게 틀림없다. 아닌게 아니라 수구(水 口)쪽을 바라보니 성산의 지맥인 집우산이 인현산에서 뻗어내린 삼봉산과 만나 이중, 삼중으로 견고하게 수구를 닫아놓았다. "수구가 관쇄되면 내기 (內氣)가 융취(融聚)되는 것이므로 지맥(龍)의 나아가고 멈춤을 논할 때는 반드시 수구에서 대정(大情)을 얻어야 한다"는 풍수 금언(金言)이 있다. 성주읍기의 수구산인 삼봉산과 집우산(혹은 복호산) 사이를 빠져나가는 이천의 물줄기가 꼭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못해 두 산이 일궈놓 은 여러 지맥 사이를 굽이쳐 빠져나가면서도 그저 읍기를 돌아보며 언제까 지나 머무르고자 하는 모습이다. 더구나 그 물이 수구를 벗어나자마자 마 포천(馬鋪川 혹은 白川)과 합류하고, 또 그 너머로는 우뚝 솟은 영취산이 두 수구산 사이의 공결함을 메워주고 있으니 어찌 성주읍기의 넓은 들이 더욱 빛나보이지 않을쏜가. 그러나 성주읍기가 지닌 최고의 풍수 압권은 누가 뭐라해도 역시 읍기 터를 향해 모여든 조.안산 지맥의 흐름이라 할 것이다. 읍기 동남쪽에서 서남쪽으로 연이어 흘립해 있는 성산, 대황산, 칠봉산 줄기는 언뜻 봐서는 물론 고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 명산에 서 뻗어내린 집우산, 개무산, 백덕산, 우두봉, 대흥리 뒷산 등이 하나같이 읍기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모여들었다. 산수가 서로 껴안은 지세에서 그처럼 뭇 산이 모여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것도 하나같이 읍기를 향 해 공읍(拱揖)하는 듯한 유정(有情)한 봉우리들임에랴. 그런 안대(案對)의 유정함과 읍기 판국의 광대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교촌산 기 슭의 향교터다. 그 터는 성주읍기의 본색을 표상하는 터나 다름없다. 그 옛날 어떤 이는 읍기 서남쪽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가야산에다 전혀 보이지 않는 팔공산과 금오산까지 끌어들여 성주읍기를 이른바 삼산(三山)의 위호 를 받는 명기로 관념 설정하기도 했다지만 어찌 그런 추상적이면서도 형이 상학적인 풍수 관념을 향교터에서 느껴지는 구체적이면서도 실용적인 그 어떤 풍수 감각과 비교할 수 있으리오. 성주읍기는 풍수적으로 볼 때 현재진행형인 삶터다. 수구산의 양쪽 산 허리를 자르면서까지 읍내 순환도로를 만들고 있기도 한 반면 봉두산 정상 에는 푯돌과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고, 와우형 지맥과 그 주변으로는 각종 고층 건물들이 무분별하게 들어서면서 서로 상극(相剋)되는 경관상을 연출하고 있는 반면 유림(儒林)의 보호를 받고 있는 교촌산의 향교터는 한 없이 고즈넉하기만 하다. 그러고 보면 명기를 찾아내는 것도 사람이고, 명 기성을 훼손하는 것도 사람이며, 명기성을 지키는 것도 사람인 게다. 잘 닦여진 성주읍기 외곽순환도로를 빠져나오면서도 자동차를 급히 몰 수 없 었던 것은 바로 대자연에 대한 그같은 인간의 마음 자세가 새삼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풍수학자.지리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