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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사상
1.실학의 뜻
: 현실에 쓸모있는 학문을 연구하며 사물에 대한 연구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것.
2. 실학연구의 출발
1890년대의 애국계몽운동가, 개화사상가들에 의해 주목되기 시작함.
정약용의 사상에 연구 집중→1929년 정인보(학문적, 사상적 연구)→조선후기 신학풍→실학.
본격적인 실학 연구: 1934년 민족문화의 건설 '조선학운동' , '조선문화 부흥운동'.
3. 실학연구의 본격화
① 8.15 광복전 : 청나라 문화, 서구문화의 영향에 중점.
② 8.15 광복후 : 실학파들이 주장한 내용의 본질파악.
③ 천관우 : 실학의 발전과정 : 준비기, 맹아기, 전성기.
실학의 성격 : 자유성, 현실성, 과학성.
4. 실학의 발생배경
① 내재적 배경: 정권에서 소외될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사회현상에 대한 농민의 어려움을 대변하는 사상을 내세워 경제 변화에 대처하는 발전적 개혁방안을 제시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사회상황을 해결하여 전통 질서의 붕괴를 막고 국가체제를 강화 하려는 정진적 개혁.
② 외부적인 요인: 17세기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외부의 새로운 사상과 기술 문명을 접함으로써 18세기 지식인들의 개혁이념과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5. 실학의 흐름
태동기 :
정주학적 세계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며 새로운 자아각성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시기.
성숙기 :
사상적 측면보다는 자유롭고 다양한 현실적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지리. 사상. 어문 등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업적 이룩.
전성기 :
영. 정조의 탕평책과 문운흥기책으로 실학은 크게 고무받아 국가사업에 반영 되던 시기, 구체적 내용을 담은 이용 후생론을 추구함.
쇠퇴기 :
실학이 쇠퇴의 기미를 보이며 세력도 크게 약화되면서 이용후생학파는 문체반정의 탄압을 당하고 경세 치용파는 천주교 교란에 휘말린 뒤 실학은 더이상 적극적 개혁의지를 나타내지 않게 됨. 실학 사상의 경향
① 경세치용학파 : 17세기 전반∼18세기 전반의 시기로 반계에서 이익까지 포괄함. 이익에 의해 주도되어서 '성호학파' 라고도 함. 여러가지 국가적 수탈이 계속된 때와 화폐유통과 더불어 도시의 상업 고리대 자본이 농촌에 침입해서 농민을 토지로부터 이탈시켜 농촌은 파탄에 빠지게 된 것을 기존학설인 예학.성리학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면서 비생산적이며 관념론적 학문에 반발하여 당시의 학문을 정치.경제적 현실관계로 방향을 돌리게 했다.
② 이용후생의 학파: 이용후생이란 말은 서경에서 유래된 것.
이용 : 기구를 만들고 재화를 잘 유통시켜 백성들의 쓰임을 이롭게 한다는 뜻.
후생 : 백성이 비단옷 입고 고기 먹으며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도록 하라는 뜻.
주장한 점 :
선진제국의 발전된 새 지식과 기술을 도입할 것과 당시 대명 의리의 분위기를 무
릅쓰고 청나라의 발전한 문물제도와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수용하자는 북학 사상을
주창했다.
북학파 :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이용후생의 학파를 말한다. 이들 북학파는 직접 중
국을 여행하여 견골을 넓히고 상공업 및 모든 산업의 진흥을 위한 제도개선과
기술혁신을 이룩하여 경국제민을 하자고 주장했다.
③ 실사구시 학파 : 반계에서 시작하는 후기 신학풍의 총칭으로서의 실학인데 축소된 협의의 개념으로는 19세기 전반의 고증학파로 한정된다. 이전 실학자들이 연구방법을 계승하면서 학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엄격한 객관적 태도를 확립하고 순수한 학문적 차원에서 실학을 발전시키자는 모습으로 전환했다.
※ 추사(秋史, 김정희)에 의해 발전된 고증학에서는 한대의 훈고학에 기초한 연구에 몰입해야 경전의 뜻을 제대로 밝힐 수 있다는 것을 말함
결과 : 근대적.실증적 과학연구태도를 확립하는데 공헌.
6.실학사상의 의의
① 의의: 실학은 실용에 대한 관심, 현실비판정신, 실증적 방법론, 개방적 태도, 주체적 입장을 가진 학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민족의식과 근대지향 의식을 가진 것이라고 규정지은다.
② 성격: 봉건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한 회의와 반항의 성격 유교를 근거로 한 봉건사회의 규범 안에서 형성됨. 실천에 있어서도 보수적인 태도가 보인다.
③ 의미: 정체된 봉건사회를 극복하고 근대정신을 잉태하는 태반의 역할을 담당한 것.
④ 결론: 실학은 민족과 민족문화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전제로 한 조선 후기의 근대지향적 과도기 사상이다
정약용(丁若鏞 : 1792 ∼ 1836)
조선 영조 38년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진주 목사 정 재원의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다산(茶山), 여유당(與猶當) 등이다. 그가 4세가 될 때 벼슬을 그만둔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6세 때는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배웠다.
1776년에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사도)세자를 두둔하다가 밀려났던 아버지가 호조 좌랑에 임명되면서 15세 된 그도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이듬해, 그는 실학자 이 가환 및 매형인 이 승훈(李承薰)을 통해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소개받았으며, 특히 실학자 이 익이 남긴 '성호사설' 등의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것은 뒷날 그의 학문과 벼슬길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783년 22세 때, 회시(會試)에 급제한 그는 경의(經義) 진사가 되어 임금앞에서 '중용'을 강의했으며, 이듬해 이 벽에게서 서양학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89년 식년 문과의 갑과에 급제하고 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서학(西學)을 좋아하고 천주교인이라 하여 해미로 귀양갔다.
그러나 10일 만에 풀려 지평에 임명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원법을 건의하여 수원성을 쌓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794년에는 경기 암행 어사로 나갔다.
이듬해 병조 참의로 있을때, 중국인 신부 주 문모의 사건에 둘째형 약정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 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2월에 규장각 부사직이 되어 여러 서적의 잘못을 교정했다.
이어 1797년에 승지로 승진된 그는 계속 서학의 무리로 몰리므로 ' 자명소'을 지어 올려 사직할 뜻을 아뢰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곡산 부사로 좌천되어 가서 어진 정치를 하였다.
1799년에 다시 병조와 형조 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천주교인이라는 지탄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살았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정조가 승하하고 1801년에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드디어 천주교도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 때 형 약전과 매형 이 승훈, 이 가환은 옥에 갇히고, 그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다시 황 사영의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간 그는, 그 곳 다산(다산) 기슭에서 18년간 귀양살이하면서 오로지 학문에 몰구하였다.
그리하여, 정치·경제·사회에 관한 새로운 학설을 논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명저와 그 밖에도 유확과 문학에 관한 명저를 지음으로써 우리 나라의 실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로 평가받게 되었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 난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실학을 연구하고 실천하기에 힘쓰다가, 1836년 2월에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1.정약용(丁若鏞)의 생애 (1762-1836. 영조38-헌종2)
조선시대의 학자. 문신. 자는 미용. 송보. 초자 귀농. 호는 다산. 삼미. 여유당. 사암. 자하도인. 탁옹. 태수. 문암일인. 철마산초. 시호 문도. 카톨릭교 본명은 요안. 본관 나주. 경기도 광주 출신.
정조가 즉위하고 남인시파들이 등용될 때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1776년(정조 즉위)상경, 이듬해 이가환및 매부 이승훈을 통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깊이 감동하였다. 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어 정조와 만나 중용을 어전에서 강의하고, 84년 이벽에게서 서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89년 식년문과에 갑과에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의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만에 풀려나와 곧 지평으로 등용되고 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당시 축조중인 수원성 수축에 크게 기여, 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 사건에 둘째형 약전과 연루되어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이 되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계속 모함을 받아 자명소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계속 모함을 받아 사직, 이듬해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순조1)신유교난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강진에 이배, 그 곳 유배지의 다산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우리 나라의 정치.경제.사회의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 균점과 노농력에 의한 수확의 공정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등을 내세웠다.
그의 이러한 학문 체계는 유형원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하고 있으며 박지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의 기술도입론을 과감히 받아 들인 것이며 그의 방대한 저서로 보아 실학을 집대성한 가장 위대한 학자로 평가된다.
어릴 때부터 시재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애국주의적 사상은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고 그의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1910년 규장각제학에 추증 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 묘전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가 있는데 그속에 목민심서, 경세유포, 흠흠신서, 마과회통, 모시강의, 매씨서평, 상서고훈, 상서지원록, 상례사전, 사례가식, 악서고존, 주역심전, 역학제언,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등이 있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생활
1801년 동짓달 어느날 강진읍 동문밖 한 주막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선비가 들었다. 주막이래야 개딱지만한 초가집에 주막표시가 없었다. 선비를 데리고 온 포졸들이 소리를 치자 방안에서 노파가 나왔다. 바로 "이 양반이네" 포졸은 선비를 가리키며 노파에게 말했다. 노파는 선비를 모시고 뒷방으로 안내했다. 포졸들은 선비더러 자기들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나다니지 말라고 큰 소리를 치고는 돌아갔다. 선비는 방에 들어 갈 생각도 않고 우두커니 서서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찬바람이 씽씽 불었다. 북산이 보이고 우두봉이 겨울 날씨에 황량하기만 했다. 불현듯 외로움과 서글픔에 목이 메었다.
노파가 술 한 사발을 떠다 주었다. 선비는 노파를 따라서 뒷방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답답한 방이었다. 봉창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선비는 개나리 봇짐을 풀었다. 짐이래야 책 뿐이었다. 그는 책을 베게 삼아 베고 누웠다. 누워 있자니 처량한 생각에 울고만 싶었다.
문득 정조 임금이 생각났다. 정조 임금만 살아 계셨어도 이렇게 한양에서 천리길인 전라도 강진땅에서 귀양살이를 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함께 귀양길을 나선 큰형님 약전형님과 영산포 율정주정에서 헤어졌는데 언제 다시 살아서 만날 수 있을런지 생각할 수록 가슴이 메어질 것만 같았다.
선비는 근 한달 가까이 집밖에는 나가지 않고 어둡고 썰렁한 방구석에만 틀어 박혀 있었다. 그렇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었다. 지난 봄 장기로 귀양을 갔을 때는 의학 서적을 열심히 읽었으며 촌병혹치라는 책도 썼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그는 이곳 강진에 온 뒤로 책도 읽지 않고 이따금 술만 마셨다.
주막 노파는 이 선비를 서울 양반하면서 극진히 대해 주었고 정성을 다해 대접했다. 노파에겐 과년한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선비의 밥상 심부름이며 빨래를 해 주었다. 선비는 노파로부터 북산 너머에는 절이 있다는 말을 들은 뒤 부터 은근히 절구경을 하고 싶어졌다.
보은산에는 고성사가 있고 만덕산에는 백년사가 있으며 해남엔 대흥사가 있다고 했다. 선비는 강진에 온지 한 달만에야 주막 노파가 가르쳐준대로 보은산 (북산)에 올랐다. 산길은 눈에 덮혀 미끄럽고 양지쪽은 질퍽거렸다. 절은 조그만 암자였다. 노스님이 혼자 있었다. 노스님이 차 한 잔을 대접했다. 다산 선생은 노스님과 금방 친해졌다. 선생은 거의 매일 고성암엘 오르내렸다.
그리고 일년이면 봄 가을 마다 고향에 있는 두 아들을 불러와 공부도 가르쳤다. 그리고 선생은 주막집 부근에 사는 마을 아이들을 불러다 글공부를 시켰다. 선생은 얼마후 군동면 석교로 옮겨 그곳에서도 제자를 가르켰다. 선생께서 강진에 오신지 6년이 지난후 선생은 거처를 도암면 만덕리 귤동 부락 뒷산으로 옮겼다.
다산 선생은 손수 초당을 짖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바위 속에서 흐르는 석간수를 끌어 들여 연못도 만들어 두어 연못엔 잉어도 기르셨다. 야산에 자생하는 차나무 잎을 따다가 솔방울을 사루어 차를 손수 끊이시던 다조바위도 마당가에 두시고 적적할 때면 완당 김정희 선생과 초의선사를 불러내어 차의 맛을 보시곤 했다.
다산 선생께선 초당에서도 제자들을 불러 모아 학문을 강의하였다. 18명의 제자들도 다산 선생의 깊고 높으신 학문에 감명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다산 선생은 틈만 나면 해창으로 내려 와 제주가는 배랑 고깃배에서 형님의 귀양가신 흑산도 소식을 묻곤 눈물짓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은 결코 슬퍼하고만 있지 아니했다. 선생은 독서와 저술에 온 힘을 쏟았다. 유형원, 이익을 통해서 내려 온 실학사상을 혼자서 집대성하였다. 선생은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운한 사람이었으나 학문이나 사상의 체계와 정리는 이곳 강진에 와서 이루어졌으며 실로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 당시 백성들은 가난했으며 그나마 일부 몰지각한 벼슬아치 들에게 착취당하고 있었다.부정과 불의가 있었고 불합리한 것이 많았다. 선생은 백성을 사랑하고 모든 정치는 백성을 위주로 행해야 한다는 민본,애민사상과 실용주의적 사상을 체계화시켰다.
그리하여 지방관리의 횡포와 무능한 아전들의 농간과 농민의 억울하고 비참한 사정을 보고 들은 선생께서는 목민심서라는 책을 지으셨으며 죄를 짖고 형무소에 들어간 죄인들도 인간적인 대우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흠흠신서라는 책도 지으셨다. 또 국가제도 개혁안이라 할 수 있는 경세유표도 지었고 모시강의라는 책도 지었다.
선생께서 지은 책은 무려 509권이나 된다. 선생은 뒷산을 계단식으로 개간을 하시어 손수 차나무도 가꾸셨고 먼훗날을 생각하시고는 초당 뒷 커다란 바위벽에 정석(丁石)이란 두 글자를 새겨 두었다. 1818년 9월 14일 선생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18분의 제자와 황상,이학래등 많은 분들의 전송을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 갔다. 그 때가 57세때였다.
그리하여 강진엔 지금도 다산 정약용 선생을 기리는 많은 분들이 계시어 다산 동상도 세워졌으며 다산로, 다산다방도 있으며 다산초당도 1936년 없어졌던것을 다시 세워 두고 가꾸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선생이 살다 가신 이땅에서 선생의 높으신 학문과 사상을 배우고 익혀 나라와 민족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5.일화
1818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옛 친구인 김이교가 전라도 어사가 되어 초당을 찾아 왔다.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라 서로가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다. 어사가 다산더러 고향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그러자 다산은 말없이 어사가 가지고 있는 부채에다 시 한수를 써서 주었다. 그 시가 바로 유명한 선자시이다.
역두를 적시는 가을비/ 사람 보내기를 더디게 하네
이 두메 산골에 자네 떠나면 / 뉘 다시 나를 찾겠는가
반열에 다시 오르리라 어찌 가히 바랄 수 있으리
오얏골 언덕 한수에 돌아 갈길 모름지기 기약이 없네
유사에서 그쓰던 날 그날일랑 잊지마소
경년에 떨어진 칼 그 설움 말문이 막히네
푸른 대 두어 떨기 새어든 달 아래 고향을 돌아보니 눈물만 짓네.
어사 김이교가 서울로 돌아가 임금께 민정을 아뢰는 자리였다. 그는 다산 선생이 써준 시가 있는 부채를 들고 임금께 보였다. 임금이 웬 부채냐고 했다. 어사는 부채를 임금께 드렸다. 그제서야 임금은 다산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음을 깨닫고 귀양을 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