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5~51)
45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슈아니라
빌립은 곧 바로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여러 대언자들이 성경에 기록한 그이/ 메시야를 우리가 만났다고 소개하였다.
그가 전한 멧세지는 비록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빌립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 안에서 메시야를 기쁘게 선포했다. 빌립은 예슈아 주님을 선포하면서 우리가 만난 사람은“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슈아”라고 하였다.
예슈아 주님은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나셨으나 육신적으로는 사람 아버지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예슈아 주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다. 육신적으로 요셉의 양아들로는 인정할 수 있으나 예슈아 주님은“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마1:18~23).
누가는 예슈아 주님이 인성을 취하신 예슈아의 족보를 말하면서“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했다(눅3:23), 이 말은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사람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46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사렛”은 헬라어로“나자라”인데“팔레스틴의 북부지역 갈릴리의 작은 마을이다. 이 지역들은 주변 열국들의 침입으로 항상 시달림을 받아왔으며, 이방 민족들과 접경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하여 팔레스틴의 다른 지역들보다도 이방적 색채가 더 짙었다. 게다가 앗수르 군대의 빈번한 침략으로 이 근방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하였다. 이런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요인들 때문에 갈릴리 지역은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아 왔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나사렛을 그들과는 상종하기를 거리끼는 멸시받는 이방 땅으로 여겼으며, 유대인들은 그들과 동떨어져 있어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해서 무식하고 어리석은 촌사람들이라고 깔보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비천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들을“나사렛 사람”이라고 멸시하고, 경멸했다(요1:46, 7:41,52, 행2:7).
그런 나사렛은 예슈아 주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며, 예슈아께서도 이곳에서 자라나셨다(눅4:16)
이유야 어찌 되었던 빌립의 전도는 효과를 가져왔고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그 말에 의구심을 가졌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나, 선한 선지자들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요1:46)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유대 땅 베들레헴 다윗의 씨에서 나온다고 성경을 분별하여 생각했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낳은 예슈아 주님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로 취급했다(요7:41~42, 45~52),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성전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나사렛 이단이라고 정죄하였다(행24:5). 그러나 하나님은 예슈아 주님을“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함을 받을 것을 미리 말씀하고 있다(마2:23).
그러므로 나다나엘은 메시야가 그 같이 천한 곳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살고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빌립은 그와 변론하기를 피하고 그에게 이르되 그러면 와서 직접 만나 보라고 설득하였다. 우리가 거듭나면 초신자로서 예슈아 주님에 대하여 자세하게 잘 설명 할 수 없을 지라도 이와 같이 전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고 곧 바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교훈을 충분히 받을만하다.
47절. 예슈아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슈아 주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그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써 그 마음속에 간사함이 없다고 칭찬하셨다. 야곱은 간사하고 교묘히 속이는사람이었다(창27:36),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가 자기 형에서를 만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교묘한 생각에 잠겼을 때에 갑자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밤이 새도록 그와 씨름하고 이기지 못하자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고 떠나려 하자 보내주지 아니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물었다“네 이름이 무엇이냐”하니 그가대답하기를 나는 야곱이라 하였다.
그 말은 자신이 속이는 자라고 간사함이 없이 진실로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은 것이다. 그러자 그 사자가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만유의 통치자 하나님과 견주며 사람들과 견줄 능력이 있어 이겼음이라하셨다(창32:24~28). 이렇게 해서 야곱은 속이는 간사한 자가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이스라엘로서 하나님과 민족을 통치할 자격을 얻는 이기는 자가 되었다. 나다나엘은 야곱의 자손이지만 야곱(굽은)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다.
48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슈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은 주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자 매우 놀라고 당황했을 것이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그러자 예슈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동선 행실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주 하나님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49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섬직하고 두렵다. 누군가 내가 하는 일을 은밀히 보고 있다면 두려운 것이 아닌가.“나는 네가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라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떨까? 어떤 사람이 나에게 나는 네가 행하는 선악간의 모든 일을 알고 있으며 보고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의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 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고 했다(대하6:30).
또한 요한은 2:25~26절에서“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하였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이 예슈아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았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라고 고백했다. 본문을 흠정역은“랍비여 선생님은(당신)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선생님(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다.
여기서 당신은 헬라어로“쉬su”을 번역한 것으로 영어로는“you"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그 말이”주님과 하나님“을 가리킬 때는“당신”이라고 번역하지 않고“주,또는 하나님 아버지”로 번역하였다. 또 바리새인이나 무리들이 주님에게 경칭을 사용할 때는“당신”이라고 하지 않고“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왜냐 하면 당신은 [2인칭 대명사]로 자기보다 아래거나 같은 또래 일대 상대방을 높이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50절. 예슈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증명할 충분한 두 가지 사건을 제시 하셨는데 그중 하나는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에 아무도 보지 않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심으로 그분의“전지하심”을 말씀하셨다.
당시는 무화과 수확철이 아니고 잎 그늘이 있는곳에서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 나라(그분 메시야)의 오실 날을 고대하고 기도 하였음을 무화과나무 아래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주께서 불러주신 이유이다.
51절. 또 이르시되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것이다. 아마 나다나엘은 야곱(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 나셔서 보여준 창세기28:12절을 묵상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에 보면 야곱이 꿈을 꾸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나서 야곱에게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 주셨는데“여호와께서 그 위에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자손)에게 주리라 하셨다.(창
28:13).바로 여기에 야곱의 씨(야곱나무의 뿌리, 참 조상)가 예슈아 그리스도이심을 보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하늘과 온 땅을 통치하실“왕”이신 것을 말씀하셨다.천사가 오르고 내리는 사닥다리는"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신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그림이다.
하나님의 천사가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천사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써 하나님의 임무를 띠고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하여 하늘과 땅을 오르고 내리며 바쁘게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는 대문이 열리는 것처럼 문자적으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열린 문은 가림
막이 없이 모든 것이 들어나 보이는 것을 말한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을 진동하기를”(사64:1),말씀의 반영(反映)으로 보이는 이 말은“하늘이 열리며”(마3:16, 눅3:21, 요1:51, 행7:56, 10:11, 계19:11), 또는“하늘이 갈라지고”(막1:10)라는 표현은“주님의 강림”(사64:1),“하나님의 계시”(겔1:1),“성령강림”(마3:16, 막1:10, 눅3:16, 요1:51)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는 시혜(施惠)”(시78:23, 24),“신비한 영적 체험”(행7:56) 등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한 마디로,“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이며”하나님의 결정적 개입을 의미하는 것이다.즉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환영하고 받아 주시며, 하늘에 속한 은밀한 모든 것을 하나도 숨김없이 보여 주시고 교제하시고 소통하는 것을 상징한다.(계3:8, 4:1) 또 열린 문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늘 문이 열렸다”
①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곧 예슈아 그리스도를 통해서 숨겨졌던 하나님의 모든 신비들을 드러내셨다는 뜻이다.(개방하다)
② 하나님이 성도들의 영적 눈을 밝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초월적 사실을 특별히 보게 하셨다는 의미이다(펼쳐 보이다)
③ 하늘 문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환영하고 받아 주시며, 하늘에 속한 은밀한 모든 것을 하나도 숨김없이 보여 주시고 소통하고 교제하시는 것을 상징한다.
“진실로 진실로”
“진실로”로 히브리어“아멘amen"에서 유래하였다.“굳건한”믿을 수 있는 것을 말하며“그렇게 되소서”라는 뜻이다. 진실로 진실로는 문자적으로 “아멘, 아멘”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거짓됨이 없이 참 중요한 진리라는 경각심을 갖게 한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만 25회 기록되어 있다.
“인자(人子)”the Son of man은 헬라어“아들을 뜻하는 휘오스huios”와“인간, 사람을 뜻하는 안드로포스anthropos”의 합성어다. 흠정역에는“사람의 아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과 대비되는 용어이며, 예슈아 주님의 인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말 스스로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 '인자' 이름은 주께서 친히 사용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