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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스크랩 제국의 건설 - 러시아
오분순타 추천 0 조회 70 13.06.02 06: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5시간대에 뻗어있는 광활한 영토.

지구 육지 1/6을 삼켜버린 거대한 제국이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으로는 거대한 영토를 들 수 있죠."                                                                

                                                                     - 신시아 하일라 휘태커, 바루크 대학

 

400여 년의 혼란을 뒤로 하고

그 영토만큼이나 거대한 야먕을 지닌 위대한 황제들에 의해

러시아는 점차 대제국의 면모를 갖춰 갔습니다.

 

"그녀는 '건축 사업을 멈출 수가 없다 술처럼 중독성이 있다'라고 고백했죠."

                                                                                                           - 신시아 하일라 휘태커, 바루크 대학

 

러시아의 황제들은 영토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는데 외국의 선진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제국의 영광을 향한 그들의 끝없는 욕망은 결국 대중의 분노를 야기했습니다.

 

1480년 모스크바.

러시아의 한 수완 좋은 통치자가 전례없는 세력을 형성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반 3세(대제, 1440~1505)였죠.

  

 

수세기 동안 러시아는 유라시아에서 가장 포악한 정복자인 몽골계 타타르족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반 3세는 마침내 그들의 예속에서 벗어날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타타르족과의 강화 조약을 즉각 폐지하고 러시아가 자신의 영토임을 선언합니다.

러시아의 운명은 이반 3세에 달려 있었죠.

 

패하면 당연히 목숨을 잃겠지만

승리하면 그는 러시아의 황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피터 웰러입니다.

과거 러시아는 여러 공국의 연합체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러시아는

9세기 키예프 루시라는 지배층을 위시한 다양한 민족이 연합하기 사작하면서 형성되었죠.

 

키예프 루시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을 했지만

여러 강과 호수로 둘러싸인 이곳으로 이주해

새로운 도시를 뜻하는 소규모의 무역 도시, 노보고로트를 세웠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 정치적 혼란과 붕괴에 시달리다 못한 노보고로트 사람들은

바이킹의 전설 유리크를 초정해 정의로운 정부를 세워 달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키예프 루시의 노보고로트는 번영을 이어갑니다.

인접한 비잔틴 제국에서 종교와 건축 기술을 전수받아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문화를 전수해갔습니다.

당시 건설된 도시 중 하나가 모스크바였죠.

 

"모스크바의 공식적인 창설 년도는 1147년입니다.

모스크바 강 유역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였죠."

                                                                 - 윌리엄 브룸필드, 툴레인  대학교

 

도시들이 발전해가면서 키예프 루시는 러시아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통일된 군주나 방어 시스템이 부재한 러시아의 도시들은

여전히 당시 가장 호전적인 타타르족에게 시달려야 했죠.

 

1237년 타타르족의 12만 기병대가 홀강을 건너 러시아를 침공합니다.

러시아는 고도로 훈련된 타타르족에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약 24개월 동안 타타르족은 러시아의 영토를 초토화 시켰습니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지배자들은 이 기회에

정복자들의 힘을 빌려 모스크바를 전보다 더 발전된 도시로 재건하려고 했죠.

 

"14세기 모스크바 대공들은 매우 간교하고 광폭한 정치인들이었죠.

그들은 정복자인 타타르족과 화평을 유지하며 그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다른 공국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 윌리엄 브룸필드, 툴레인  대학교

 

타타르족의 보호 아래 모스크바는 주변의 형제 도시들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결국 주변 공국들을 합병하면서 러시아의 단일 공국으로 변모시켰습니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통치자들은 여전히 타타르족의 지배자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죠.

 1462년 이반 3세가 대공이 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그는 타타르의 굴욕적인 지배를 종식하겠다고 결심하죠.

대러시아 대공의 지위를 획득한 이반 3세는 타타르족 타도 계획을 구체화 하기 시작합니다. 

 

"이반은 훌륭한 황제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춘 것 같습니다.

야망 있고 기회를 이용할 줄 알고 포악하며 영리했으니까요."

                                                         - 신시아 하일라 휘태커, 바루크 대학

 

이반은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깁니다.

먼저 러시아에 건축 기술을 전해준 비잔틴의 황실과 혼인 관계를 형성했죠.

 

동맹을 강화하는 의미에서

이반은 비잔틴을 상징인 쌍두독수리를 문장으로 채택하고

러시아를 '제3의 로마'로 공표합니다.

 

1472년 그는 대대적인 건설 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러시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반은 새로운 성당을 건설할 계획을 세웁니다.

 

 

1470년대 초반부터 거대한 성당 건축이 진행됩니다.

하지만 자연 재해가 그들을 가로막았죠.

 

1474년 소규모의 지진이 모스크바를 흔들었고

2년째 건설 중인 거대한 성당은 파괴되어 거대한 파편더미로 변했습니다.

 

기초도 제대로 다지지 않은 채 육중한 돌덩어리를 쌓아 만든 건물이 무너진 것은 이미 예고되었던 사고였죠.

하지만 이반은 위기를 기회로 변화시켰습니다.

 

"이런 경우, 모든 영리한 통치자들이 그랬듯 이반 3세도 당대 최고의 건축가를 물색했고

그들은 모두 이탈리아에 몰려 있었죠."

                                                                           - 윌리엄 브룸필드, 툴레인  대학교

 

이반이 선택한 아리스토텔레스 피오라반티

능력있는 수석 건축가로 이탈리아 전역에서 유명한 인물이었죠.

 

하지만 모스크바의 대성당을 재건축 하기 전에 그는 기존의 건축을 모두 제거해야 했습니다.

피오라반티는 전쟁에서 쓰는 공성용 무기를 이용한 파괴용 대형 망치를 고안해 남아 있던 건물을 무너뜨렸습니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죠.

그들이 2년 동안 지은 건물이 단 3주 만에 깨끗하게 제거됐으니까요."

                                                                                                  - 윌리엄 브룸필드, 툴레인  대학교

 

피오라반티는 성당 건설을 재개했습니다.

이렇게 지어진 성당이 바로 성모승천 대성당이었죠.

 

 

 

피오라반티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석회암 성당을 모델로 삼는 동시에  

서구의 건축 기술을 접목시켰습니다.

그 결과 독특한 러시아 건축 양식이 탄생했지요.

 

 

"그는 먼저 지하에 돌덩이를 채워 토대를 만드는 동시에 중세 러시아 양식 대신

커다란 통나무들을 세워 건물을 든든하게 받치도록 했습니다.

이는 건물의 변형이나 나아가 붕괴를 막기 위한 조치였죠."

                                                                                     - 윌리엄 브룸필드, 툴레인  대학교

 

피오라반티의 건축적 혁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죠.

 

 

제단은 석회석을 회반죽으로 엉성하게 쌓는 대신  

석재를 서로 맞물리게 쌓는 방식으로 안정성을 높였습니다.

 

벽 쌓는 작업을 마무리 한 후

이번엔 가장 까다롭고 위험한 천장쌓기를 시작했습니다.

 

 

"둥근 지붕은 그 무게가 벽으로 전달 되는 게 큰 문제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철 막대를 사용했습니다.

 

즉, 지붕 아래쪽에 강철막대를 접합해 연결함으로써

구조물을 전체적으로 얽어매는 지지대의 역할을 했습니다."

                                                                                   - 윌리엄 브룸필드, 툴레인  대학교

 

마지막으로 거대한 석재 드럼 위에 거대한 돔 지붕을 올리는 대신

피오라반티는 더욱 가볍고 견고한 벽돌 지붕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에게 벽돌 제작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맞물려 쌓은 벽

강철 지지대 지붕에 이르기까지

성당은 피오라반티가 소개한 신기술로 만들어졌습니다.

 

모두 이탈리아에서 익힌 기술이지만

여기에 러시아적 특색이 가미됐죠."

                                                       - 윌리엄 브룸필드, 툴레인  대학교

 

성당의 높이는 45미터를 육박했습니다.

실로 거대하고 웅장한 대건축물이었죠.

 

권력의 상징이 완성되자 이반은 본격적으로 타타르족 타도에 나섭니다.

 

타타르족의 반응은 신속했죠.

그들은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침공합니다.

 

이반도 병력을 이끌고 진군해 양군은 모스크바 서쪽으로 480킬로 떨어진 우브라 강에서 대결합니다. 

몇 달간의 전투 끝에 마침내 러시아군은 타타르족을 물리칩니다.

 

이반은 마침내 300년간이나 러시아를 짓눌렸던 타타르족의 압제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지속하면서 이반 3세는 대제의 칭호를 얻게 됩니다.

 

1505년 그가 사망할 당시 러시아는 독립적인 주권을 유지했지만 아직 제국으로 발전하지는 못한 상태였지요.

제국의 창설은 절대적인 권력과 비인간적인 난폭함으로 '뇌제(雷帝)'라는 별명을 얻게 된 또 다른 이반의 책임으로 남겨집니다.

 

1505년 사망한 이반 3세는 재위 기간 동안

러시아를 타타르족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영토를 3배로 팽창시켰습니다.

 

"영토가 3만 9천 제곱미터에서 11만 7천 킬로미터로 불어났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대제'라 불릴 자격이 있죠."

                                                                        - 신시아 하일라 휘태커, 바루커 대학

 

하지만 타타르족이 완전히 물러난 건 아니었죠.

비록 모스크바에선 철수했지만 그들의 수도 카잔은 팽창하는 러시아의 수도 동쪽에 있었습니다.

 

권좌에 오른 이반 3세의 손자는 러시아에서 타타르족을 완전히 몰아내고 제국을 창설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가 바로 뇌제(雷帝)라 불리는 이반 4세(1530~1584)입니다.

 

 

"이반 4세 치세에 영토 확장이 가장 활발했습니다.

러시아는 볼가 강과 유럽 그리고 시베리아까지 확장됐죠."

                                                                                    - 윌러드 선더랜드, 신시내티 대학교

 

이반 4세의 유년 시절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죠.

 

어릴 때 아버지를 여윈 이반 4세는

고문, 암살, 사형 등으로 둘러싼 잔혹한 정치적 음모를 목격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반은 당시의 기억을 평생 떨쳐내지 못했죠.

 

"이반이 어렸을 때 받았던 정신적인 충격은 그의 잔인한 성품에 큰 영향을 주었죠.

그는 어렸을 때도 동물을 고문하는 잔안하고 가학적인 성격이었죠."

                                                                                                 - 신시아 하일라 휘태커, 바루커 대학

 

1547년 권좌에 오른 이반 4세

자신이 신탁에 의해 러시아의 통치자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는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차르'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차르는 '황제'를 뜻하는 '카이사르'의 러시아어입니다."

                                                                             - 세이모어 베커, 루트거스 대학교

 

차르로서 이반은 당시 러시아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카잔 원정으로

자신의 잔인하고 광폭한 성정을 표출할 돌파구를 마련합니다.

 

그는 우선 유럽에서 최신식 공성 기술을 익힌 공병을 포함한 약 15만 명의 병력을 확보했습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도입한 기술을 러시아의 실정에 맞게 변형시켰습니다.

 

그 중 하나가 유라시아의 개방된 평원 위에서 러시아군을 방어하기 위해 고안된 이동식 요새였습니다. 

러시아어로 이것을 '굴라이 고로트'라고 부르죠.

 

 

 

"굴라이 고로트는 목재 칸막이로 제작된 이동식 요새입니다."

                                                                                 - 미하일 크롬, 유러피언 대학교, 상트페테르부르크

 

이동식 요새는 근위대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스트렐치'를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크기로 제작되었습니다

 

 

 

"러시아 보병들은 이동식 요새의 안쪽이나 뒤에서 적진의 기병대를 향해 총과 대포를 발사했습니다.

또한 카잔처럼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공격하는 데에도 사용됐죠."

                                                                            - 미하일 크롬, 유러피언 대학교, 상트페테르부르크

 

1552년 8월 23일. 이반은 전열을 가다듬어 군대를 이끌고 카잔으로 진군합니다.

 

"러시아군의 전략은 뛰어났죠.

카잔의 성벽 주변에 이동식 요새를 빠른 속도로 설치했습니다.

도시 전체를 요새로 포위한 셈이었죠."

                                                                                         - 윌리엄 브롬필드

 

 

도시 바깥에 진영을 구축한 후 이반의 군사들은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합니다. 

9미터 높이의 이동식 요새를 옮겨가며 카잔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집중 포화를 퍼부었습니다.

 

"이동식 요새를 이용해 수많은 적군을 무찔렀습니다."

                                                                             - 윌리엄 브롬필드

 

하지만 성벽은 건재했습니다.

이반의 장군들은 공병에 성벽 파괴를 명령합니다.

그들은 성벽 아래쪽에 굴을 뚫고 지뢰를 폭파시켜 통로를 만드는 과감한 전략을 세웁니다.

 

9월 30일. 카잔의 비참한 운명을 결정해줄 도화선에 불이 붙습니다.

거대한 폭발음은 양 진영의 전투를 일시에 중단시켰죠.

 

"그 폭발음은 러시아군에게 모두 요새로 진격하라는 공격 명령 신호와 같은 의미였습니다."

                                                                                                     - 윌리엄 브롬필드

8일간의 교전 끝에 카잔함락됩니다.

이반의 카잔 점령후 러시아제국으로 변모합니다.

 

 

 

"러시아 역사의 중요한 사건이죠.

한때 그들을 지배했던 타타르의 수도 카잔이 이제는 러시아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카잔 점령은 러시아가 제국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열어줍니다.

이후 러시아는 남쪽의 카스피 해와 흑해, 동쪽의 시베리아까지 진출하죠."

                                                                                                  - 신시아 하일라 휘태커, 바루커 대학

 

1555년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이반은 장차 러시아를 상징할 위대한 건축물을 건설합니다.

바로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이죠.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으로 알려진 대도(代禱)교회

이탈리아에서 전파된 기술을 응용해 만든 벽돌 건물입니다."

                                                                                      - 윌리엄 브룸필드, 툴레인  대학교

 

거의 전체가 벽돌로 건축한 교회 건물은 여덟 개의 건물을 한 데 합쳐 놓은 형태입니다.

중앙에 타워를 둘러싸고 있는 기하학적 패턴의 여덟 개의 교회는 카잔을 포위했던 8일간을 상징하죠.

 

1580년대에 들어 성당의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이 추가됩니다.

 

 

"양파 모양의 돔은 원래 횃불의 모양을 본뜬 것입니다.

원통형의 드럼 위에 돔 지붕을 올린 것인데

횃불처럼 위로 갈수록 뾰족해져 '양파 돔'이라는 별칭이 생긴 거죠."

                                                                       - 윌리엄 브룸필드, 툴레인  대학교

 

성 바실리우스의 양파 돔은 매우 독특한 형태죠.

여덟 개의 지붕에 각각 다른 질감의 금속 외장을 덮고 손으로 직접 색칠해 제작되었습니다.

 

"금속 외장을 벗겨내면 마치 짓눌린 새장처럼 보일 겁니다."

 

러시아에서도 선보인 적이 없는 신기하고 놀라운 형태의 지붕이었죠.

1553년 이반 4세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하며 권력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편집증세와

대중에 대한 철권 정치로 제국은 점차 숨통이 막혀가고 있었죠.

 

그는 일 년에 소모적인 전쟁에 많은 재정을 낭비하고

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을 가차없이 제거했습니다.

 

이반의 광적인 횡포에 백성들의 고통은 커져 갔지요.

심지어 그의 가족까지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뇌제(雷帝)'라 불리는 또 하나의 계기로는 통치 말년에 아들을 살해한 사건이 있죠.

그는 임신한 아내를 폭행하는 이반을 막으려다 숨지고 말았습니다."

                                                                                                                 - 신시아

 

이반은 그녀를 심하게 폭행해 결국 유산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들이 이를 항의하자 이번엔 아들에게 폭발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그 자리에서 죽이고 말았죠.

 

일시적인 광분으로 이반은 스스로 후계자를 없애고 만 것입니다.

1584년 이반이 사망한 당시 제국은 휘청이고 말았죠.

 

"이반 사후 러시아는 10여 년간의 '혼란 시대'를 겪게 됩니다.

외국의 침입뿐 아니라 내전이 끊이지 않으면서

러시아는 독립국의 주권을 거의 상실할 뻔 했죠."

                                                                                   - 세이모어 베커, 루트거스 대학교

 

독립을 쟁취한 지 100년만에 러시아는 다시금 파멸의 위기에 처합니다.

하지만 곧 세계를 놀라게 할 통치자가 나타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곳에 거대 도시를 건설합니다.

 

1696년.

새롭게 권좌에 오른 차르는 이반 4세가 초래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정체되었던 러시아를 근대적인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집중합니다.

그의 이름은 표트르 대제(大帝, 1672~1725)입니다.

 

 

 

"표트르 대제는 무척 독특한 인물입니다.

2미터에 가까운 거구만큼이나 배포도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관습이나 전통을 개의치 않았고 항상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가졌죠."

                                                                                   - 세이모어 베커, 루트거스 대학교

 

표트르는 거구에 알맞은 거대한 포부를 지녔습니다.

 

"그는 언제나 활력이 넘쳐흘렀습니다.

열 명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 신시아

 

표트르는 어린 시절 모스크바에서 지내는 동안

외국인촌의 예술가들과 군인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전술과 기술을 익혔습니다.

 

"표트르는 외국의 기술에 매료되었습니다.

또한 유럽에 비해 러시아의 후진성과 약점을 깨닫게 되었죠.

그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고 했습니다."

                                                                                       - 세이모어 베커, 루트거스 대학교

 

 

표트르는 신분을 숨긴 채 유럽으로 가

당시 최고의 조선술을 지닌 네델란드에서 배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또한 영국 해군으로부터는 항해술을 익혔고

여러 유럽의 제국들이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번영하는 것을 보며

러시아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이용할 방법을 구상했죠.

 

하지만 표트르는 계획의 구체적인 실현을 원했고

유럽 열강의 대열에 끼여 들기 위해선 중세의 비합리적인 후진성을 탈피해

서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새로운 상업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러시아로 돌아온 표트르는 유럽 제국과의 무역 활성화는 물론

군사적인 경쟁을 위해서 대대적인 해군력 강화 계획을 단행하게 됩니다.

 

표트르는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640킬로 떨어진 발트 해 근처에 네바 강변을 주목했습니다.

그는 이곳에 도시를 세워 러시아가 유럽 열강의 대열에 오를 발판을 삼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곳이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입니다.

 

 

 

"도시는 바다를 통해 바로 유럽으로 갈 수 있는 위치였죠."

                                                                                   - 세이모어 베커, 루트거스 대학교

 

하지만 문제는 네바 강의 주인이 스웨덴이라는 것이었죠.

표트르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1700년. 그는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해 결국 무력으로 영토를 차지하죠.

1703년. 드디어 새로운 도시 건설이 시작됩니다.

 

 

 

 

 

 

"표트르가 구상한 새 수도는 요새의 형태였습니다.

육군과 해군의 중심지이며

서부 유럽의 현대적인 사상이 러시아로 유입되는 통로였습니다."

                                                                                                  - 신시아 하일라 휘태커, 바루커 대학

 

유혈 학살과 전쟁의 힘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됩니다.

하지만 차르의 끝없는 야망은 러시아 대중에겐 칼의 양날과 같았습니다.

새 수도가 발트에 가깝다는 것은 동시에 큰 댓가를 치뤄야만 했죠.

 

1년에 5개월 동안이나 하구의 삼각주나 늪지가 얼어붙었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 얼음이 녹으면서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곳에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대단한 도전이었습니다.

 

표트르는 러시아에서만 가능한 탄탄한 천연자원,

순수한 노동력만으로 돌파구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야말로 러시아 노동자들의 맨손으로 지어진 도시였습니다.

주변이 온통 늪지로 뒤덮혀 있어 활용 가능한 자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죠.

 

하구에 지어질 요새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은 맨손으로 수천 킬로의 흙을 퍼내어 외투와 웃도리에 담아 날라야 했습니다.

 

모든 자재는 외부에서 들여왔죠.

도시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목재는 상류에서 잘라내 물에 띄워 내려보냈습니다.

 

"단단한 바닥이 없었기 때문에 말뚝을 박아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 윌리엄 브룸필드, 툴레인  대학교

 

 

 

이 작업을 위해 기술자들은 도르래 시스템을 고안해 거대한 통나무들을 땅에 박았습니다.

 

"활차로 헤드를 들어올린 후 나무에 떨어뜨려 땅에 박았죠.

이러한 작업이 수천 번이나 반복됐습니다."

                                                                 - 윌리엄 브룸필드, 툴레인  대학교

 

5개월 동안 수만 명의 노동자들은 뒤에 보이는 요새의 육각형 벽을 세우고 통나무 성채를 세웠습니다.

밤이면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막사로 돌아왔지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투입되는 동시에

많은 노동자들이 질병과 홍수, 피로누적으로 죽어갔던 것입니다.

 

1708년까지 약 2만 5천 명의 노동자가 도시를 건설하다 목숨을 잃어

이곳은 '해골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했죠.

 

도시가 완공될 당시 희생된 노동자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가 없어 알 수는 없지만

19세기 한 역사가는 지금까지 일어난 세계의 모든 단일 전투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수보다도

많은 노동자들이 상트페트로부르크 건설 현장에서 죽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표트르에게 백성들의 희생은 목적 달성을 위한 통과 의례일 뿐이었죠.

17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해군조선소에서 첫 번째 전함이 축조됩니다. 

 

그것은 도시의 첫 번째 산업단지였죠.

단지 내에는 조선기술자와 돛과 밧줄 제작자들의 숙소와 대장간, 대포주조소들이 들어섰습니다.  

 

해군을 강화한 차르는 도시를 변화시킬 전면적인 변화를 주도했습니다.

 

1712년 표트르 대제는 그 변화들 중에서도 가장 큰 계획을 세웁니다.

간단하면서도 놀라운 한 마디의 선언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수도로 정한 것이죠.

 

300년간 러시아를 이끌어온 수도 모스크바의 시대는 한순간에 끝나버렸습니다.

모스크바의 시민들은 충격에 빠졌죠.

 

"많은 러시아인들은 표트르를 마치 외계인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표트르의 급진적인 사고와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죠.

표트르는 전임 황제들에게서 이어받은 전제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 윌리엄 브룸필드, 툴레인  대학교

 

"그는 평생 러시아를 개혁하겠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어떤 상황도 그의 의지를 꺽을 수 없었죠."

                                                                              - 신시아

 

 

표트르는 새 수도를 건설하는데 비용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유럽의 중심으로 성장하기까지 아직 할 일이 많았지만

1714년경 오랜 동안의 과중한 업무로 표트르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습니다.

 

변혁을 위한 표트르의 모든 노력은 점차 빛을 잃어갔고

러시아는 다시한번 혼란을 맞이합니다.

 

 

표트르 대제는 수십 년 동안 러시아를 대제국으로 변모시키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새 수도로 건설하는 두 가지 과업을 진행했죠.

 

하지만 그 기간에도 그는 친구들과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셔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활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을 격파하고

러시아의 영토를 발트 해와 태평 연안으로까지 확장했죠.

 

또한 유럽 스타일의 새 수도와

해군을 창설하고

기술 및 과학 학교를 짓고

러시아의 무역량을 7배 증가시켰습니다.

 

군사적, 정치적으로 러시아는 이미 제국이 되었지만

대제국이 되기 위한 러시아가 부족했던 한 가지 요소는 바로 위엄이죠.

 

1714년 표트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4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거대한 궁전 건설을 계획합니다.

궁전의 이름은 페테르호프였죠.

 

2.4평방킬로미터가 넘는 부지에

거대한 정원과 황금으로 도금한 분수들이 둘러싸고 있는 화려한 궁전이었습니다.

 

거대한 궁전의 건설은 1716년 시작되었죠.

 

"수많은 군사들이 궁전 건설에 투입됐습니다.

그들은 분수에 물을 대기 위한 수로관을 건설했습니다."

                                                                               - 윌리엄 브롬필드

 

1719년 러시아 최초의 수력공학자들은 대규모 수도관 건설에 착수합니다.

 

"궁전은 높은 언덕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힘을 이용해 분수를 가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 윌리엄 브롬필드

 

 

 

 

 

 

 

 

 

노동자들은 인근의 샘물이 천연적으로 경사진 지형을 따라 흐르도록 설계된 

20여 킬로의 거대한 수도관을 건설했습니다.

 

흘려든 물은 상부의 수조에 저장된 후 목재파이프를 통해 15미터 아래의 분수 중앙에 모입니다.

요속에 의해 발생한 엄청난 수압으로 물길은 20미터까지 치솟았습니다.

놀라운 기술의 승리였습니다.

 

아름다운 분수의 명성 덕분에 궁전은 '러시아의 베르사이유'로 칭송받았습니다.

하지만 표트르는 자신이 이룩한 걸작을 즐길 시간이 많지 않았죠.

 

1725년 표트르 대제는 물에 빠진 사공을 구하러

얼음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병을 얻어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표트르 대제는 고립되고 후진적인 러시아를 개혁해 현대식 제국으로 변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죠.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화려한 도시로 변모시킨 후계자는

표트르 대제의 손자의 독일인 아내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입니다.

 

 

 

"예카테리나는 단 6개월간 재위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몰아내고

1762년 권좌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아주 손쉽게 남편을 제거할 수 있었죠."

                                                                                      - 신시아 하일라 휘태커

 

권력을 공고히 한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대제가 완수하지 못한

러시아를 대제국으로 변모시키려는 과업을 이어갑니다.

 

"유럽인으로서 예카테리나는 18세기 초반 표트르 대제가 시작한 러시아의 유럽화 과업을 완성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자신을 표트르의 정당한 후계자로 생각했죠."

                                                                                                                           - 세이모어 베커

 

"18세기 성공적인 군주의 조건은 영토확장이었고, 

그녀는 그 조건을 갖췄죠."

                                                                            - 신시아

 

 

 

예카테리나는 51만 8천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병합해

엄청난 재원을 확보하는 한편, 러시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통치했습니다.

 

"또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해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 신시아

 

여제는 새롭게 확보한 부를 도시 근대화 개혁에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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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위생과 서비스 시설을 강화해

러시아 군주로서는 드물게 빈민들의 열악한 생활을 개선하는데 힘을기울였죠.

 

"예카테리나 재위 당시 새로운 도시 건설에 대한 규정이 있었죠.

그녀는 자그마치 216개의 도시를 건설했는데

건물의 배치와 중앙 광장이 들어설 자리, 건물 외관의 형태와 건축 자재 등이 모두 미리 정해져 있었습니다."

                                                                                                                                            - 신시아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만한 건물은 재건축된 겨울궁전으로

러시아 왕실의 사치스럽고 방종한 면모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겨울궁전은 3층 건물 높이에 약 200미터 길이의 건물입니다.

건물의 외장은 200개 이상의 기둥과 150개 이상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죠.

 

내부에는 500개 이상의 방이 있습니다.

백악관의 방보다 네 배나 많은 숫자죠.

 

예카테리나는 재위 기간 동안 어떤 제국에서도 볼 수 없었던 건축 붐을 주도했습니다.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을 기반으로

여제는 상테페테르부르크를 문화와 부, 그리고 권력을 상징하는 도시로 완전히 변모시켰습니다.

 

"그녀는 '건축 사업을 멈출 수가 없다 술처럼 중독성이 있다'라고 고백했죠."

                                                                                                            - 신시아

 

여제의 중독은 끊임없는 건축 사업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겨울궁전에서 예카테리나는 많은 수의 젊은 정부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후원하는 것으로도 유명했죠.

 

 

"낮에는 열심히 일하는 군주지만 밤에는 사랑을 원했습니다.

그녀는 많은 수의 정부를 두고 그들을 후원했습니다.

그들은 여제에게 토지와 노예들을 제공받았죠."

                                                                                     - 신시아

 

예카테리나의 방탕한 사생활과 그녀가 행사하는 절대적인 권력은

러시아의 소수 지배 계층과 대중간에 존재하는 장벽을 더욱 높여주었습니다.

 

그녀도 대중을 동정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이룩한 업적의 대부분은 그녀의 절대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컸죠.

 

1796년 예카테리나 여제 치세 말기에 유럽의 초강국이 된 러시아는

새로운 영광과 적을 동시에 얻었습니다.

 

1812년 유럽에서 가장 큰 야망을 가진 나폴레옹이

로마 제국 이후 처음으로 유럽의 모든 제국들을 차례로 점령해갔습니다.

그의 다음 목표는 바로 러시아였죠.

 

1796년 예카테리나 여제가 사망할 당시

809 평방킬로미터의 영토가 새로이 러시아 제국에 추가로 편입되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국민은 4천만 명으로 늘어났죠.

 

1801년. 여제의 손자 알렉산드르 6세즉위할 당시 러시아는 이미 세계 열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죠.

러시아의 높아진 위상은 유럽의 가장 위험한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드를 자극합니다.

 

 

1812년.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6세

전 몽골의 침입 이후 겪어보지 못했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큰 위험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이미 대부분의 유럽을 손에 넣은 상태였죠."

                                                                     - 세이모어 베커

 

 

 

 

 

나폴레옹은 사상 유례가 없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을 개시합니다.

 

정면 공격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러시아군은 전략적으로 후퇴한 뒤

모스크바로 진군하는 나폴레옹 군대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주변 지역를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모스크바에 입성하고 나서야 나폴레옹은 러시아 차르의 단호한 저항을 실감하게 됩니다.         

 

"알렉산드르 6세가 순순히 항복할 것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그는 나폴레옹을 무시했고 나폴레옹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며

모스크바에 계속 있어봐야 얻을 게 없다는 걸 깨닫고 퇴각합니다."

                                                                                                - 세이모어 베커

 

 

황폐하게 얼어붙은 땅을 되돌아가면서

처음 원정길에 올랐던 나폴레옹의 대규모 병력 중 단 10%만이 살아남았습니다.

러시아의 혹독한 자연이 무적의 장군을 무너뜨렸습니다.

 

1883년. 알렉산드르의 후계자가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에 거대한 기념물 건설을 지시합니다.

알렉산드르 기둥은 러시아의 승리와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기념물이죠.

 

 

"알렉산드르 기둥은 한 덩어리의 화강암으로 제작된 석조물입니다."                        

                                                                                                 - 윌리엄 브룸필드

 

러시아 차르는 거대한 돌덩어리를 날으는데

다시한번 제국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동원했습니다.

 

수많은 러시아 노동자들은 바위산의 한 측면에서 기둥 모양의 돌덩어리를 깍아낸 뒤

그것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띄워 보냈습니다.

이 작업에만 수천 명의 노동력과 3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죠.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무게 7백톤, 길이 25미터의 돌기둥을 들어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캡스턴에 밧줄을 연결하고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신호에 맞춰 캡스턴의 도르래를 돌리면

기둥이 서서히 들리면서 준비해둔 받침 위에 올려졌습니다."

                                                                                                       - 윌리엄 브룸필드

 

오늘날 대좌 위에 올려진 기둥의 전체 높이는 47미터에 이릅니다.

 

"러시아의 완벽한 기술력을 상징하는 기념물이죠."

                                                                         - 윌리엄 브룸필드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세계 최대의 제국 러시아를 막을 세력은 아무도 없었죠.

 

19세가가 시작될 무렵 러시아의 영토는

서쪽으로 발트 해, 동쪽으로 태평양, 그리고 알래스카까지 9,600킬로미터를 뻗어 있었습니다.

 

15시간대에 걸쳐 지구 육지의 1/6을 차지하는 러시아는 새로 즉위한 차르와 더불어 팽창을 이어나갔습니다.

니콜라이 2세(1868~1918)입니다.

 

 

 

"니콜라이 2세는 황태자 시절 아시아를 방문했는데

즉위 후 아시아로의 세력 확장을 계획합니다."

                                                                        - 윌리드 선더랜드

 

하지만 끊임없이 확장되는 영토를 제대로 통치하지 못해

제국은 오히려 넓은 영토 때문에 오히려 위기에 처합니다.

 

러시아의 기술자들은 드넓은 영토를 한데 연결하는 방법을 모색했지요.

해결책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1890년대 당시 세계 최장의 철도 건설을 주도한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인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동쪽으로 수출 통로를 마련하고

정치적으로는 극동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죠."

                                                                                      - 윌리드 선더랜드

 

1891년 5월 31일.

러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9,200여 킬로미터를 이어갈 철도 건설이 시작됩니다.

 

미국 대륙을 두 번이나 횡단할 거리와 맞먹는 거리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엄청난 규모의 건설 프로젝트였습니다.

 

"철도가 건설된 과정을 알게 되면 너무 놀라 할말을 잃을 겁니다."

                                                                                                 - 윌리드 선더랜드

 

철도는 구역별로 나누어 건설하게 계획되었는데

각 구간마다 수천 명의 노동자와 기술자, 군인, 심지어 죄수들까지 동원되었죠.

 

 

"시베리아 남부의 삼림지역에선 선발대가 먼저 나무를 베어 철도를 건설할 수 있는 길을 만듭니다.

그리고 다음 조가 레일을 설치할 자리를 마련하고

모든 준비를 마치면 비로소 레일을 운반해와 설치하는 것이죠."

                                                                                                                - 윌리드 선더랜드

 

먼 지역까지 자재를 운반하는 것이 가장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특히 철로가 아직 설치되지 않은 지역에선 더욱 그랬죠.

 

 

노동자들은 일부 구간에 우선적으로 철도를 설치해

서부에서 들여오는 철강 자재들을 운반하는데 사용했고

구간을 따라 같은 작업이 반복되었습니다.

 

"건설 작업은 제정 러시아 말기까지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계속됐죠."

                                                                                                - 윌리드 선더랜드

 

수많은 노동자들이 고된 일정에 지쳐 갔습니다.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죠.

아무것도 없는 외딴 지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허술한 막사나 심지어 흙으로 지은 움집 같은 데서 살았죠.

그곳에서 열악한 상황을 견디며 몇 달이고 일해야 했습니다.

겨울에는 극심한 추위가 이들을 괴롭혔고

여름에는 찌는 듯한 대륙성 기후를 견뎌내야 했죠."

                                                                                                                              - 윌리드 선더랜드

 

1904년 주요 노선이 완공됩니다.

러시아는 이제 새로운 목표 아시아로 자유롭게 드나드는 통로를 확보했죠.

 

"일본은 아시아 정복을 꿈꾸는 러시아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죠.

일본의 정치, 경제적 목표도 러시아와 비슷했기 때문에

결국 양 세력 간에 러일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 윌리드 선더랜드

 

1905년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이 패배로 러시아 대중의 차르에 대한 분노는 거의 폭발 직전에 이르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르는 1914년 세계1차대전에 가담하면서

제국을 치명적인 상황으로 내몰게 되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수백 년 동안 차르의 러시아 대제국 건설에 동원되어 피와 땀을 흘린 대중들은 인내의 한계를 느낍니다.

 

 

1917년 3월 15일. 러시아 대중은 폭동을 일으킵니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약 500년 동안 이어진 차르의 러시아 지배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1917~1918년, 러시아 제국이 붕괴한 주요 원인은 차르의 통치가 막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제국을 통합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차르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죠."

                                                                                                        - 윌리드 선더랜드

 

차르가 건설한 거대한 성당과 새로운 도시,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 사치의 극을 보여주는 궁전들은

모두 러시아 대중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이 이룩한 위대한 과업은 동시에 큰 희생이 뒤따랐죠.

많은 부분에서 러시아 제국은 대중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 윌리드 선더랜드

 

1917년 말경, 핍박받는 민중을 해방시키겠다며 일어난 새로운 정권에 의해

러시아 제국의 평가는 다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제국이 성장할수록 부유한 계층을 위한 화려한 시설은 늘어만 갔지만

대다수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져만 갔죠.

 

20세기 초반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러시아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1차 대전으로 황폐해지고 급진주의자들에 자극받은 러시아 민중은

그들을 괴롭히는 부패하고 무능한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 세상을 만들겠다면서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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