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暴力 : ① 난폭한 힘 ② 사람이 불법 부당한 방법으로 물리적인 강제력을
행하는 일.’
그녀는 이미 수십 번도 더 읽어서 눈을 감고도 그 내용은 물론이고 남편의 독특
한 필체, 획의 삐침까지도 그려 낼 수 있는 그것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한 자씩
또박또박 읽었다. 엽서 크기의 두꺼운 종이에 폭력이란 하나의 낱말과 풀이를 적
어 넣은 낱말 카드였다.
그녀는 며칠 전, 그 일이 있던 날 밤에 남편의 서재에서 그것을 챙겼다. 남편의
서재에는 그것 말고도 낱말 카드가 1천 개나 2천 개쯤 있었다. 어쩌면 셈에 밝지
못한 그녀의 생각보다 열 배쯤 많은지도 몰랐다.
그 중에는 사랑 꿈 희망 믿음 미래와 같은 가슴 설레게 하는 말들도 있었고 죽음
이별 절망 갇힘 고독과 같은 쓸쓸한 말들도 있었다.
지난여름 남편이 떠난 뒤, 텅 빈 집에서 그녀가 즐긴 놀이가 있다면 카드 뽑기뿐
이었다. 그녀는 직장에서 퇴근하여 돌아오면 거의 모든 시간을 카드 뽑기 놀이에
몰두했다. 그것은 화투나 트럼프로 그날의 운을 점쳐 보는 놀이와도 달랐고, 어
떤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게임도 아니었다. 그냥 많은 낱말 카드 속에서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한 장 뽑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거기에 적힌 낱말과 풀이를 읽어 본
다음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는 것으로 끝나는 싱거운 놀이였다.
그 단조롭고 싱거운 놀이를 그녀는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반복하곤 했다. 그녀로
서는 어떤 종류의 낱말이 뽑혀 나와도 좋았다. 가슴 설레는 낱말은 가슴 설레는
낱말대로, 쓸쓸한 낱말은 쓸쓸한 낱말대로, 그것을 적어 넣을 때의 남편의 마음
과 표정을 그려 보는 것만으로 그녀는 그 놀이가 세상의 어떤 놀이보다도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녀는 놀이를 끝내고 남편의 서재를 나설 때면 그날 뽑았던 카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골라 가슴에 품고 나왔다.
그것은 다음날 남편의 서재에 들어설 때까지 남편을 대신하여 그녀를 지켜 줄 마
스코트였다. 그녀는 매일 바꿔 지녀도 좋을 만큼 끝없이 많은 보석함을 지닌 솔로
몬 왕비처럼 행복한 얼굴로 남편의 서재를 나서곤 했다.
그녀의 그 카드 뽑기 놀이가 오늘까지 닷새째 중단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폭력
은 닷새씩이나 그녀의 마스코트가 되고 있었다. 그것은 여러 날씩 바꾸지 않아도
좋을 만큼 특별히 더 좋은 보석이 아니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오래 지니
고 있어도 좋을 다른 것을 얼마든지 골라 낼 수 있었다.
그녀는 모서리가 닳아 보푸라기가 일어난 그것을 핸드백에 넣으면서 입 밖으로 소
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가야 해.
그녀는 고개를 힘차게 오른쪽으로 젖혀 올리면서 일어섰다. 그녀의 매몰찬 고갯
짓 때문에 이마 위로 흘러내려와 있던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오른쪽 귀 옆으로 가
지런하게 올라붙었다.
그녀는 화장실의 거울 앞으로 가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거울속의 그녀는 요 며
칠 사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녀는 야윈 얼굴 때문에 더 커 보이는 눈
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가야 해.
그녀는 마치 눈앞에 그 비위 좋고 능글맞은 젊은 한의사가 서 있기라도 한 것처
럼 눈을 부릅떠 노려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뺨으
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수건과 콤팩트를 꺼내 들고 천천히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학교 선배언니의 권유로 알레르기성 감기 전문의로 소문난 한의원에서 치
료받고 있는 중이었다.
닷새 전, 그녀는 그 한의원을 세 번째 찾아갔다. 그녀는 이미 그곳에서 한 재 반
의 첩약을 지어먹고 있었다.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이미 살림살이에 틀이 꽉
잡힌 선배언니의 소개는 적중하는 듯싶었다. 지난여름부터 개인의원으로, 종합병
원으로 동동거리는 동안 악화일로로만 치닫던 그녀의 증세는 그 정도의 투약만으
로도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남은 보름 남짓의 치료기간을 꼽아보며 한의원의 출입문을 밀었다. 약값
은 회사에서 가불받아 아슬아슬 메워 넣는 형편이었지만, 병의 증세가 잡혀 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기분은 진찰실에 들어설 때까지만 지속될 수 있었다. 그녀가
진찰용으로 만들어진 높고 좁고 딱딱한 침대에 눕는 순간, 그녀의 활짝 갠 마음
의 하늘가에 불안한 먹구름장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장의 강렬한 백열등 불빛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고 양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그녀는 젊은 한의사의 눈 아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자신의 몸매
에 몹시 신경이 쓰였다. 굳이 눈으로 볼 것도 없이 빨강 앙고라 털실로 짠 원피스
는 피부에 착 달라붙어 몸의 굴곡을 있는 대로 다 드러내 보이고 있을 게 분명했
다. 빨강 색깔의 파장은 그녀의 몸을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 지나친 포장효과를 빚
어낼 수도 있었다.
그녀의 이런 생각들은 한갓 기우일 수도 있었다. 환자는 의사에게 생명을 맡기게
마련이라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그녀의 이런 상상은 신경과민일 수도 있었다. 바
로 그러한 신경과민이야말로 병의 증세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많은
의사들의 임상소견을 그녀가 잊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상황에 따
라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는, 고삐를 늦추거나 당기거나 하는 일에 서툴렀다.
알레르기성 감기는 대기 중의 온도 습도 먼지 가스 꽃가루 따위와 관계하여 발병
하는 것이지만, 신경과민 또한 주된 원인의 하나일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은 그녀
의 경우에도 딱 들어맞았다. 지난여름 남편이 곁을 떠나간 뒤 그녀는 눈을 감고서
도 주변 사물들의 미세한 움직임은 물론 말하지 않는 상대방의 생각까지도 환히
들여다보이는 이상스러운 환각증세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의
알레르기성 감기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의사가 그녀의 왼손을 감싸듯 포개 쥔 다음 다른 한 손으로 손목의 맥을 짚었다.
환자의 손바닥에 의사의 손바닥을 밀착시키고 진맥하는 방법은 그녀가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그 생소한 진맥법이 그녀를 긴장시켰다. 차도를 보이는 첩약의 효
과만 아니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의사에게 맞잡힌 그녀의 손바닥에서 땀이 솟았다. 그녀는 의사의 손에서도 땀이
솟는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고 실내에 정체되어 있는 듯, 그
녀의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 왔다. 그녀는 의사가 물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할
딱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의사가 몸을 부르르 떨
며 손바닥에 힘을 넣어 왔다.
의사의 손바닥에서 맹렬하게 땀이 솟았다. 의사의 손바닥에서 솟아난 땀과 그녀
의 손바닥에서 솟아난 땀이 고이고 넘쳐 깊은 곳 어디론가 자꾸만 흘러가고 있었
다. 한순간, 후끈한 바람의 덩어리가 의사의 손바닥에서 그녀의 손바닥으로 건너
왔다. 의사의 심장 고동소리가 특급열차처럼 굉음을 내며 그녀에게로 달려들었
다. 의사가 긴 숨을 토하며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다.
의사가 휴지로 땀에 젖은 그녀의 손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의사는 여러 번 되풀이
하여 손바닥을 문지른 다음, 손가락 하나하나를 닦아내고 손가락 사이사이를 아
주 정성스럽게 닦아내면서 입을 열었다.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뻗쳐있습니다. 모든 촉수가 빳빳이 일어서 있습니다. 그
게 병의 치료를 더디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녀는 의사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리
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밀실이기도 한 그곳에서 의사가 환자인 자신을 암컷
으로 본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그녀는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에 흥건히 고인 땀
을 닦아내는 의사의 손에서 정액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진찰을 받고 있는 환자가 도리어 의사의 상태를 진단한
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그녀는 가능하다면 자신의 모든 촉수를 잘라 내
고 싶었다. 아아,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돌이나 나무껍질 같은 것으로 변할 수 있
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의사는 그녀의 손을 내려놓고 돌아서면서 짐짓 가라앉힌 탁한 목소리로 명령했
다. 증세를 다시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그녀는 의사가 스스로의 흔들리는 감정
을 은폐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말을 시키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환자가 의사의 주문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녀는 이미 세 번씩
이나 되풀이했던 증세 설명을 시작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코피가 나오는 것처럼 콧속이 간질간질 매워지면서 재채기가 터
져 나와요. 그리고 콧물이 흐르기 시작하지요. 재채기가 계속 터지고… 그러다 보
면 몸에 열이 오르고, 눈에 충혈이 되고, 눈물이 콧물과 함께 줄줄 쏟아지면서 온
몸의 힘이 모두 빠져 나가요.
의사는 다시 침대로 다가서며 그녀의 말끝에 덧붙였다. 역시 요즘 들어 부쩍 유행
하는 알레르기성 감기입니다. 하루도 빤한 날 없이 이어지는 학생들의 소요 때문
에 공기는 더욱 혼탁하고, 그러다보니 악화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의사는 그녀의 병이 악화되는 이유의 모두가 학생들 탓이라도 된다는 투로 말하면
서 다시금 그녀의 한 손을 감싸 쥐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꾹꾹 눌렀
다. 여기 아픕니까. 아뇨. 여기 아픕니까. 아뇨. 여기… 아, 아파요. 왼쪽 아랫배
의 맨 아래쪽에 의사의 손가락이 놓이는 순간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의사는 자신에 넘치는 교활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여기에 염증이 생겼습니
다. 의사들끼리는 이런 걸 종양이라고 부릅니다. 네? 그녀는 의사의 입에서 종양
이란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의사는 당연히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
일 줄 알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누적된 스
트레스가 감기로 인한 재채기와 함께 맺힌 겁니다. 기침을 하게 되면 가슴이 울리
게 되지만, 재채기를 하게 되면 아랫배가 힘을 받게 됩니다. 그 때문에 재채기가
어혈로 맺히는 겁니다. 이건 양성이라서 감기와 함께 치료하면 없어집니다. 그러
나 오래 방치해 두면 음성 종양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의사의 손은 계속 그녀의 아랫배를 맴돌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원피스 속으로 들어와 그 부위를 누르며 움직였다. 그녀는 맹렬하
게 끓어오르는 수치감과 분노를 삭이느라고 숨을 씨근덕거렸다. 그때, 그녀는 모
든 문제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되짚어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 속
어딘가에 잠복하고 있는 부도덕한 피가, 끊임없이 의사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내
고 있어 의사를 곤경에 몰아넣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스스로에게 의심을 돌렸
다. 일단 그렇게 생각을 바꾸자 분노가 가라앉는 대신에 자신이 저주스럽도록 슬
퍼졌다.
의사의 손은 그녀의 얇은 러닝셔츠 한 장과 팬티 한 겹을 사이한 곳을 간질간질
넘나들고 있었다. 그녀는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하여 오른쪽으로 고개
를 돌려 의사를 외면했다. 그녀는 눈물을 안으로 삼키면서 언젠가 책에서 읽은 히
포크라테스의 말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녀가 그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의사
의 손이 그녀의 염려 밖으로 빗겨나가 주기를 기원하는 심정으로.
의사는 어떠한 환자가 찾아올지라도 단지 병자에게 이익을 주어야하며 모든 제멋
대로의 장난이나 타락한 행위를 피한다. 여자와 남자, 자유인과 노예의 차별을 생
각하지 않는다. 병에 관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타인의 생활에 대한 비밀을….
그녀가 생각에 몰두해 있는 동안에 의사의 손놀림이 어색하게 굳어 갔다. 그녀는
의사가 뱉어낸 거친 숨소리가 진찰실을 가득 메워 놓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
았다. 그녀의 아랫배에 머물러 있던 의사의 손가락이 팬티 끈 밑으로 스며들어 재
빠르게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오른쪽으로 몸을 홱 틀었다. 갑자기 의사의 모든 얘기들
이 공허하게 귓전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폭력」하
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발음했다.
그것은 그녀로서도 뜻밖이었다. 그 순간에 그녀가 의사의 행위를 폭력으로 파악했
기 때문인지, 아니면 남편에 대한 어떤 잠재의식이 위기상황에 맞닥뜨리자 낱말
카드를 집어 들도록 만들었는데 우연히 그 카드에 폭력이란 낱말이 적혀 있었던
것인지 확연히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그날, 그녀는 남편의 서재에서 폭력을 찾아내어 가슴에 지녔다. 지난 닷새 동안
그녀는 오직 약을 받기 위해 한의원을 다시 찾아야 할 것인지 만을 생각하며 보냈
다. 결국 다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지만, 자꾸만 뒷걸음질치려는 자
신을 부추기기 위하여 그녀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중얼거리곤 했다. 그래도 나
는 가야해.
화장실에서 돌아온 그녀는 핸드백을 집어 들고 동료들의 뒤를 돌아 부장 앞에 섰
다. 부장은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 미안해하는 투로 ‘아, 오늘이 김형 면회 가
는 날이죠. 웬만하면 저도 함께 가 보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어서 다녀오도록 하
세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병원에도 좀’ 하고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고 목례를 보낸 뒤 바삐 사무
실을 빠져 나왔다. 그녀는 매번 함께 가보고 싶다고 말하는 부장의 의례적인 빈
인사가 고마웠다. 그녀는 남편의 학창시절 둘도 없는 운동권 친구였던 부장을 믿
었다. 그녀를 회사에 두고 돌봐 주는 건 어디까지나, 부장 자신이 떠맡아야 할 친
구의 옥바라지를 대신 시키려는 속셈일 뿐이라고 수군대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그
녀는 진심으로 부장을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첫 추위를 몰고 온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이마에 부딪쳤다. 그
녀는 회사 빌딩 앞 계단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한의원과 남편, 어느 쪽으로 먼
저 가야 할까 순서가 잡히지 않았다. 오늘따라 가야 할 곳 두 곳 모두가 그녀의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한의원보다는 남편이 있는 구치소가 훨씬 가까웠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면회 금지
처분이 내려져 있었다. 그녀는 벌써 몇 주째 헛걸음인 줄 알면서도 그곳을 찾곤
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면회신청서를 접수시킨 다음 ‘면회가 안
됩니다’ 하는 통고를 받을 때까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다가 돌아왔
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는 철저하게 차단당하고 있는 남편의 고독을 나누고 싶
었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남편이 왜 그곳에 가 있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
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의 행위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남편은 누구를 해친다거나 남의 것을 탐낸다거나 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가슴에 훈장처럼 딱지를 달고 있었다. 복학생이란
딱지와 문제학생이라는 딱지였다. 그러나 그녀의 판단기준으로 볼 때 남편에게 붙
어있는 그 딱지들은 딱히 부끄러워할 것도 없어 보였다. 군에서 제대하여 다시 복
학했기 때문에 복학생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역사
를 연구하는 서클을 주도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붙게 된 문제학생 딱지는 억울하
기 짝이 없어 보였다. 다만 남편의 견해가, 그 중에서도 한국 근대사와 현대사를
해석하는 견해가 남편을 문제학생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과 달랐을 뿐이었다.
남편은 그때 시를 쓰기도 했는데 학교신문에 발표한 ‘검정고무신’ 이란 제목의
시는 남편에게 붙여진 문제학생이라는 딱지에 권위를 얹어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웃을 때도 있기는 하지
하도 기가 막혀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시가
피식 새는 웃음 흘리며 외면을 하지
유치장에 갇혀서 화장실 오가면서 낡은
검정 고무신
눈치코치도 없이 검기만 하지
아버지는 민주주의자
이기는 편에 붙어 자유당 했지
흰 고무신 한 켤레 받고
투표를 했지
아들은 민주주의자
지는 편에 서 감옥에 갔지
아버지가 찍은 표가 무효라고 외치고
아버지가 세금 낸 검정 고무신 신었지
아버지 고무신은 흰 고무신
투표하러 햇빛 받고 가지
아들 고무신은 검정 고무신
재판받으러 비 맞고 가지
따지고 보면 웃을 일도 아니지
막걸리 값에 표를 팔고
아들 변호사 값에 소를 팔고
흰 고무신 신고 서울구경 왔지
어느 날 고무신끼리 만났지
닭장을 사이에 두고 하도 반가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시가
마땅찮은 눈짓 주고받았지
검정 고무신이 먼저 돌아섰지
어느 쪽이 죄인이냐고
검정 고무신은 환히 알지
깜깜한 데서 봐야 진짜로 보이는 것
철망 바깥에 갇힌 자들의
슬픈 빛깔 흰 빛깔을
웃을 수밖에 없을 때가 있지
독한 말들이 우르르 엎질러져
손발을 더럽힌 시가
하늘땅에 흙칠을 할 때가 있지.
남편에게는 그녀와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또 있었다. 그녀는 지식인은 적당히 말
하는 사람이 아니라 꼭 해야 할 말도 때로는 참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이라
고 믿는 편이었으며, 지식인과 지성인이란 말을 굳이 구분하여 쓰지 않는 데 반하
여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그 점에 이끌렸고 바로 그 점 때문에 항
상 마음을 졸였다.
남편은 자신의 시 속의 ‘검정 고무신’을 자주 애용했고 불경스럽게도 시골에 계
신 늙은 부친을 불러 올려 ‘닭장’을 사이에 두고 만나면서 남은 학창시절을 마
감했다. 남편은 졸업과 함께 그 두 개의 딱지를 떼고 새로운 딱지를 바꿔 달았
다. 남편의 구속은 남편이 자신의 견해와 의견을 바꾸지 않는 한 되풀이될 수밖
에 없다는 변호사의 말은, 그러나 남편의 귀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
러뜨리지 못했다. 몇 주 전 그녀가 남편을 면회할 수 있었을 때까지도 남편은 자
신의 태도를 바꿀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더부룩하게 웃자란 머리카락은 여전히 남편의 막힌 귀를 방공호의 잔디처럼 철저
하게 은폐시켜 놓고 있었다. 타협이 안 되거든 침묵이라도 하세요라고 완곡하게
청하려던 그녀의 입은, 남편의 태평스러움과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두꺼운 벽에
부닥쳐 열릴 엄두도 내 보지 못하고 말았다. 걱정하지 마. 여긴 아주 편안한 곳이
야. 나는 고치속의 번데기처럼 편해. 남편은 천연스럽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녀
는 남편의 검정 고무신에 눈길을 준 채 망연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남편이 세상에 태어나서 꼭 일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남편은 학
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이력서를 써들고 여기저기 꾸준히 기웃거리는 눈치였지만,
출근하라는 통보를 보내오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보다 못한 남편의 은사가
나서서 주선한 직장에 첫 출근하던 날, 남편은 뛸 듯이 기뻐했다.
남편은 새삼스럽게 그녀에게 떠맡겨 두었던 살림을 쭉 둘러본 다음, 꼭 일 년만
더 참아 달라고 당부했다. 일 년만 더 참아 주면 그녀를 직장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겠노라고 스스로 자청하여 약속을 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 약속을
꼭 지켜 줄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간 기쁜 것이 아니었다. 그
녀의 집으로부터 축복받지 못한 결혼이었고 남편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녀가 직장
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
그날의 첫 출근에서 돌아온 남편은 그녀에게 자신의 직장을 이렇게 소개했다. 서
구문화사라고, 국내 굴지의 출판사야. 당신도 알지. 국어사전 영어사전 불어사전
일어사전 독어사전 백과사전, 사전이란 사전은 모두 만들어내는 회사 말이야. 세
상에 존재하는 말이란 말은 몽땅 끌어 모아다가 팔아먹는, 말장사로 재미 보는 회
사지.
그녀는 남편의 말에서 말장사라는 낱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모르는 척 넘겼다. 남
편의 첫 출근 날 여자가 그런 사소한 말꼬투리를 잡아 불안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도 같았고, 자칫 아이를 갖고 싶다는 소망이 엷어질까 두렵기도 했다.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남편은 또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서 내가 부여받은 임무
는 낱말 카드를 작성하는 일이야. 그것은 이 세상 어떤 직업보다도 위대하고 숭고
한 작업이지. 세상의 모든 곳에 떠돌고 있는 말들을 하나씩 체포하여 그 크기와
비중에 따라 분류하고 취조 신문하여 그 본질을 밝혀 낸 다음 한 장의 카드에 가
두는 일이거든. 내가 모를 건 회사 선배들의 그 시큰둥한 작업태도란 말이야….
그녀는 또 남편이 낱말을 카드에 적어 넣는다고 말하지 않고 가두어 둔다고 표현
했다는 사실이 명치에 걸렸지만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입을 다물었다.
남편의 서재에는 하루가 다르게 낱말 카드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회사에
서 필요로 하는 것과는 별도로, 자신의 몫으로 카드를 더 만들어서 모았다. 그녀
는 남편의 작업을 재미있게 지켜봤다. 밤낮 회사의 이익에 관계되는 서류만을 보
아 온 그녀의 눈에 남편의 작업은 경이롭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녀는 가끔 남편
이 작성한 낱말 카드 가운데 사랑 꿈 희망 미래와 같은 말들을 손가락 끝으로 조
심스레 만져보기도 했다.
남편의 서재에 그녀가 헤아리기에 벅찰 만큼 많은 낱말 카드들이 쌓였을 무렵의
어느 날, 남편은 취해서 돌아왔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남편의 음주는 그녀를
놀라게 했다. 남편은 웃옷을 받아 거는 그녀에게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
했다.
회사에서 내게 급여를 제공하면서 맡긴 일이라는 게 바로 세상의 모든 말들에 대
한 체포 구금 취조 신문 판결의 전권을 행사하도록 허가해준 것이라고. 기분대로
라면, 이런 일은 월급을 받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쪽에서 돈을 지불하고 해
도 좋을 만큼 값어치가 있는 일이지. 말하자면 나는 신(神)보다 더 위대한 존재
가 된 거라고. 생각해 봐. 하나님도, 부처님도, 귀신까지도 모두 내 눈에 포착되
는 순간부터 꼼짝 못하고 결박당한 채 끌려 와 단지 하나의 낱말로 변해버리고 마
는 게 아니냐 이거야. 내 기분에 따라서 그들을 거물로 만들어 줄 수도 있고, 그
렇지 않으면 단 한 줄, 아니 단 한 마디로 끝내 버릴 수도 있어. 어디 그뿐인가.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없애 버릴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
의 생사여탈권까지도 갖고 있는 셈이지. 거 뭐라더라. 그래 ‘태초에 말씀이 있었
다’는 성서 속의 ‘말씀’까지도 잡아 가둘 수 있는 권한이 바로 내게 있는 거
야. 절대자는 항상 외롭고 고독하지. 그래서 내가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이거
야.
남편은 수다스러워져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돌연한 수다와 궤변에서 슬픈 냄새
를 맡았다. 남편의 말은 어찌 보면 이치에 합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논리가
정연한 만큼 허세가 두드러지게 돌출되었고 허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
다.
세상에 그 누가 돈과 권력과 명예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다한들, 어떻게 사랑 믿
음 평화 소망 행복을 한꺼번에 가질 수 있으며, 남편처럼 두 손으로 확실하게 만
져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내세워 입 밖으로 말하는 남편의 어깨는 또 얼
마나 추울 것인가.
남편은 너무 빨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즈음 남편이 혼잣말로 ‘슬프다, 슬
프다’하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그럴 때 남편은 시선을 허공에
박고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방안을 맴돌곤 했다. 그것은 마치 ‘슬프다’
는 말을 빨리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면 체내에 슬픔이 가득 괴어 마침내 자신을
침몰시키기라도 할까봐 쉴 새 없이 반복하는 펌프질처럼 고통스러워 보였다. 남편
이 아끼던 후배들이 무더기로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말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남편의 침묵과 맞닥뜨렸
다. 그녀는 남편의 침묵 뒤에 웅크리고 있는 어떤 종말을 예감했다. 그것은 아이
를 갖고 싶다는 그녀의 꿈을 단숨에 부숴버릴 준비를 갖춘 채 출발신호를 기다리
면서 그녀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자신이 말의 지배자라고, 네로 같은 폭군이
기나 한 듯 큰소리치던 남편의 그런 변화는 그녀의 작은 희망의 나뭇가지를 사납
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남편이 어느 날의 저녁상 앞에서 무겁게 입을 떼었다. 참, 이상한 일이야. 나는
요즘 기왕에 만들어 놓은 낱말 카드를, 꼭 필요한 말만 남기고 축소하는 일을 시
작했어. 제한된 공간 안에 모든 말들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각개 낱말들의 체중
감량이 불가피해진 거지. 결국 그 낱말들에 대한 설명을 될 수 있으면 짧게, 한
줄로, 가능하다면 단 한 마디로 끝내버리는 작업이지. 정말 이상한 일이야. 그 일
을 하면서 보니까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 틀렸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세상
에 떠도는 말들을 채집하여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손으로 채집하여 가두
어 둔 그 말들에 거꾸로 내가 갇혀 가고 있는 것 같다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 거
야.
남편은 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몸을 작게 웅크렸다. 그녀는 그때 남편이 작은 소리
로 중얼거리는 걸 놓치지 않고 들었다. 나는 왜 남들처럼 적응하면서 살지 못하
는 걸까.
남편은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다가 말을 이었다. 가령 내게 슬픈 일이 생겼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진정한 마음으로 그걸 슬퍼하는 게 아니라, 내 손으로 잡아다
가 카드에 가두어놓은 ‘슬픔’이라는 낱말만큼만 슬퍼하는 거야. 이를테면 ‘슬
픔 : 슬픈 느낌. 또는 그 정도. ↔ 기쁨」이니까, 기쁨과 반대되는 슬픈 느낌이
다, 하는 정도로 생각해 버리고 마는 거지. 내게 기쁜 일이 생겨도 ’기쁨 : ①
마음이 즐거움 ② 반가움‘이라고 카드에 적힌 단 두 마디로 기뻐하는 버릇이 나
도 모르는 사이에 붙어버렸어.
그녀는 남편의 웅크린 어깨에서 한기를 느꼈다. 남편이 더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남편은 어느 날 문득 삶이란 ‘사는 일. 살아 있는 현상. 생(生).
↔ 죽음’이고, 죽음이란 ‘죽는 일.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 사(死). ↔
삶’일 뿐이며, 그러니까 인생이란 ‘①사람의 목숨 ② 생명을 가진 사람 ③ 사람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불과하므로, 산다는 것이 별게 아니구나 하고 도통
해버릴 것이었다.
어떤 일이든 일단 시작하면 바닥이 만져질 때까지 집요하게 파 내려가는 남편의
성품으로 볼 때, 남편의 그런 생각들이 몰고 올 결과는 불을 보듯 분명했다. 남편
은 그날 이후 입에 빗장을 지른 듯 입을 열지 않았다. 단 두 식구의 살림살이에
별로 할 말도 없었지만, 그녀는 남편이 꼭 해야 할 말까지도 건너뛴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무렵에 남편이 첫 출근하던 날 스스로 약속했던
그 일년이 거의 다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녀는 남편을 향한 불
안감을 그 약속을 자주 떠올림으로써 잊으려고 애썼다.
그 일 년이 꽉 차는 날, 그녀는 남편을 위하여 성찬을 준비했다. 그녀는 남편이
좋아하는 편육과 인절미를 만들었으며, 따로 샴페인도 한 병 사 왔다. 그녀도 그
날만은 생전 처음 그걸 남편과 함께 마셔볼 참이었다.
그날 밤, 남편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을 기다리며 그녀는 자꾸만 식어
가는 찌개와 국을 데우고 또 데웠다. 남편은 그녀가 그 일에 지쳐 싸늘하게 식어
버린 저녁상을 한 쪽으로 밀어 놓고 옷을 입은 채 누워버린 다음에야 대문을 두드
렸다.
남편은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취해 있었다. 비틀걸음으로 대문을 넘어선 남편
은, 하수구 앞에 쪼그리고 앉아 뱃속의 모든 것들을 토해냈다. 남편은 그녀의 부
축을 받고 일어서며 말했다.
당신, 내가 벙어리가 될까봐 겁났지. 나는 말이 무서워졌어. 말의 기본적인 참뜻
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버린 거야. 낱말 카드 속에 갇혀 있는 말들은 모두가 죽어
버린 말의 시체들에 불과해. 살인마에 전쟁광인 히틀러도 평화를 위해 전쟁을 했
고, 유엔도 평화를 위하여 전쟁에 참가해. 필리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하여 마르코
스는 계속 집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 쪽에선 필리핀의 안정과 발전을 위
하여 마르코스는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낱말 카드 속의 낱말들은 완전히
죽었어. 내가 ‘자유’ 하고 발음한다 해도,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뜻으로 풀이하는 거야. 말로써 의사를 전달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야. 나
는 그게 무서웠어. 말이 무서워졌단 말이야.
남편은 무너지듯 스르르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여보, 용서해줘. 그렇지만 여
보, 나는 어쩔 수가 없었어. 난 잘 해보려고 했었단 말이야.
그녀는 남편에게 무언가 한 마디쯤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지난 일 년
동안 모아 놓은 모든 말들이 죽어버린 시체뿐이라면, 이제부터 살아 있는 말을 찾
아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훗날 태어날 그 아
이가 죽어버린 말의 시체더미 속에서 허우적대며 신음하도록 버려 둘 수는 없지
않으냐고. 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납을 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워 노력을 해도 열리
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꼭 일 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으
로 자신의 꿈을 잊어야 했다.
그녀는 회사 빌딩 앞 계단을 천천히 내려섰다. 그녀는 아직도 한의원과 남편, 어
느 쪽으로 먼저 가야 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문제를 일단 차에 오
른 다음에 풀기로 했다.
그 순간, 그녀는 이상한 조짐을 느끼고 급히 핸드백을 열어 손수건을 꺼냈다. 미
처 손수건을 입으로 가져가기도 저에 에에취, 그녀는 재채기를 터뜨렸다. 그녀가
그곳에서 머뭇거리고 서 있는 동안 쌀쌀한 바람결에 실려 도시게릴라처럼 침투해
오는 매운 냄새를, 그녀가 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탓이었다. 그녀는 계속 터져 나
오는 재채기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녀의 손수건이 금세 흥건하게 젖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흘러나오는 눈물 때문에 실눈을 뜨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살폈다. 더러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기도 했지만, 아무도 그녀처럼 심한 반응을 보이지
는 않았다. 그네들의 코는 잘 길들여져 바람결에 실려 오는 이쯤의 냄새에는 끄떡
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잇따라 터져 나오는 재채기를 가라앉히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입 밖
으로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왜 남들처럼 적응하며 살지 못하는 걸까.
그녀는 멎지 않는 재채기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일어섰다.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는 한의원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그녀의 곁으로 돌아
올 때까지 견뎌야 했다. 남편의 아이를 갖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눈물과 수치심
과 적개심으로 뭉쳐진 것이라 하더라도 첩약을 먹고 기다려야 했다. 재채기 때문
에 그녀의 몸이 비틀, 쓰러질 듯 기우뚱했다. 그녀는 남편에게로 가야 한다고 생
각했다. 살아 있는 낱말을 찾아내는 일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두
어야 했다. 그녀는 부어오른 눈을 거의 감은 채 차도에 붙어 서서 손을 흔들어 택
시를 세웠다. 그녀가 차에 올라 몸을 가누기도 전에 택시가 출발했기 때문에 그녀
의 몸은 의자 등받이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그녀는 이 시대의 모든 것들이
사람들에게 몸의 중심을 가눌 여유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폭력’ 하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성난 강물처럼 소용돌이치는 도시의 흐름 속에 자신이 떠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