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거나 놓아버리는 것에 대하여.
아이디어가 늘 분수처럼 샘솟는 사람,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천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생각이나 시상은 누구에게나 떠오른다. 그건 누구에게나 주민등록번호가 있고 누구에게나 투표권이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당신이 부러워하는 아이디어맨과 아이디어맨을 부러워하는 당신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연필과 종이라는 차이가 있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순간에 그것을 내 것으로 꽉 붙잡는 사람, 이 사람은 메모를 해두는 사람이다. 어렵게 떠오른 생각을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놓아버리는 사람, 이 사람은 아이큐 200 근처에도 못 가면서 머리에 담아두려는 사람이다. 아무 근거 없이 자신의 머리를 과신하는 사람이다. 붙잡느냐 놓아버리느냐,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만큼.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배꼽 잡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야기는 최근 들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재미있다. 혼자 웃고 끝내기엔 너무 아까워 다른 데서 꼭 써먹어야지> 하고 그 이야기를 머릿속에 넣어 둔다. 그런 후 다음 주쯤 친구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 이야기는 머리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괜히 탁자 위에 아이큐 200이 안되는 머리를 쾅쾅 부딪쳐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메모 한 줄만 해 두었어도 친구들의 배꼽을 괴롭혔겠지.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적을 필요도 없다. 단어 한두 개만 적어두면 쉽게 연상해 낼 수 있는 것, 그런데 재미있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인생을 바뀌게 할 한 줄이라고 생각해 보자. 약간의 부지런을 떨지 않은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가!
요즘은 옛날처럼 낑낑거리며 수첩과 연필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휴대전화에 메모 기능이 있으니 그곳에 한두 마디 저장해 두면 된다. 버스를 타고 가다 흘러나오는 방송에서 새겨두고 싶은 이야기가 나오면 휴대전화만 쓱 꺼내면 된다. 차창 밖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아까운 기발한 간판이 보이면 찰칵 사진만 찍어두면 된다. 메모 한 줄 사진 한 장이 몇 달 뒤 아니면 몇 년 뒤에 어떤 아이디어로 발전되고 완성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무조건 붙잡아두라는 것이다. 무작정 부지런 떨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중부고속도로 만남의 관장을 이용한다. 그곳에서 친구들을 만나 차 한 대로 서울을 벗어난다. 어느 날 그곳에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차 밖으로 나와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심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관찰했다.
핫도그 두 개를 들고 누구를 찾는지 두리번거리는 사람,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서 배운 국민체조를 어설프게 흉내 내며 장시간 운전을 준비하는 사람, 스마트폰으로 어제 보지 못한 드라마를 보며 주인공이 불쌍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 여자 화장실 앞에서 그녀의 핸드백을 들고 연신 손목시계를 바라보는 사람, 사람이 뜸한 구석에 걸터앉아 멍하니 먼산을 쳐다보는 사람.... 사람들은 하나같이 잠시 후에 있을 누군가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에 찬 얼굴 또는 조급한 얼굴, 또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때 내 머리를 탁 치고 가는 재미있는 생각 하나.
어? 여기는 만남의 광장인데 틀림없이 만남의 관장인데 만나는 사람은 많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만 잔뜩 있잖아!
나는 이 따끈따끈한 생각이 식기 전에 휴대전화 속으로 집어 넣었다. 만약 메모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친구들을 만나 악수하며 손을 흔드는 순간 이 위대한 발견도 머리 밖으로 조용히 나가버렸을 것이다.
만남의 광장
만남의 광장엔 만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만나는 사람보다 기다리는 사람이 더 많다.
두 사람이 똑같은 시간에 도착할 수는 없으니까.
’기다리다‘를 견디지 못하면 ’만나다‘도 없다
만남의 광장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의 광장이다.
만남의 관장에서 건진 생각은 일주일 후쯤 이렇게 짧은 글로 완성되었다.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면 만남도 없다는 메시지. 인생을 대하는 자세를 나는 만남의 광장에서 만났고 그것을 놓아버리지 않았다.
아래는 필사하기 좋은 시들입니다.
짧고 메시지 강한 작품들로 올렸으니 필사 하시고 사유도 넓혀가시도록 안내합니다.
지금 여기가 맨 앞 / 이문재 (1959~ )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가을 밤 / 조용미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깜빡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이 변했겠다
마늘에 연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 유리병에 둘러싸여 마늘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 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 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을.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
가시 / 정호승
지은 죄가 많아
흠뻑 비를 맞고 봉은사에 갔더니
내 몸에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손등에는 채송화가
무릎에는 제비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야윈 내 젖가슴에는 장미가 피어나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토록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고
장미는 꽃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가시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서
가장 멀리 가는 향기가 난다고
장미는 시들지도 않고 자꾸자꾸 피어나
나는 봉은사 대웅전 처마 밑에 앉아
평생토록 내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가시를 힘껏 뽑아내려고 하다가
슬며시 그만두었다
네모를 향하여 / 최승호
은행 계단 앞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땡볕에 지쳐 축 늘어져 있다
이 여름 도시에선 모두들
얼마나 피곤하게 살아오고 또 죽어가는지
빌딩 입구의 늙은 수위는
의무를 다하느라 침을 흘리며
눈을 뜬채로 자면서도 빌딩을 지키고 있다
자라나는 빌딩들의
네모난 유리 속에 갇혀
네모나는 인간의 네모난 사고방식, 그들은
네모난 관 속에 누워서야 비로소
네모를 이해하리라
- 우리들은 네모 속에 던져지는 주사위였지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두메, 빈 집에 들어서니 / 문인수
싸릿대 삽짝 풀썩 허물어진다 누구요
오두막 헛간채의 삭은 디딜방아가 쿵더쿵 쿵덕 오래 쌓인 먼지를 찧고 있다 누구요
봉당에 매달린 솔비 짚소쿠리 함지박서껀 쿵덕쿵 쿵덕 한꺼번에 흔들린다 누구요
쪽마루 밑 삽살개 소리도 자지러지게 굴러 나와서
앞마당 수북이 강아지풀 개밥풀들이 바람 밑으로 뒷곁으로 달아난다 누구요
방문 정지문이 쿵덕쿵 쿵덕 여닫히며 허물어지며 누구요
누구요 누구요 누구요
비스듬히 /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