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홍 영 의*
머리말
1. 회화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2.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맺음말
머리말
우리가 옛부터 ‘송도(松都)’, ‘송경(松京)’이라 부르고 있는 오늘날 개성
의 수 많은 마을 이름과 개성 인근의 산 이름들은 당시에는 어떻게 불리워
졌던 것일까? 연복사(演福寺) 종은 언제부터 남대문에 걸려 있었으며, 현화
사(玄化寺)와 영통사(靈通寺)는 어떻게 폐허로 변해 버렸던 것일까? 민가보
다 많았다던 개경의 사찰과1) 수 많은 왕릉들은 언제부터 제 모습을 잃어
* 숙명여대 다문화통합연구소 책임연구원
대표논저 : 2010 「고려시기 개경의 궁궐 조영과 운영」 한국중세사연구 28 ;
2010 「고려시대 魚梁川澤의 존재와 수취구조」 한국학논총 34
1) 1399년 權近이 演福寺塔重創記를 지을 당시만 해도 “사원과 사묘의 건설이 우뚝
우뚝 높이 솟아 서로 바라다 보이는 것이 천하에 가득하다. 우리나라는 신라 말부
터 부처를 섬김이 정성스러웠다. 성안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 중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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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던 것일까? 그리고 고려·조선을 거쳐 오는 동안 사라졌거나 현재 남아
있는 개성의 유적과 경관의 옛 모습은 어떠 했을까? 이 글은 고려 수도 개
경이 고려적인 분위기를 잃고 조선시대 어떻게 면모되었으며, 여기에 있던
수 많은 유물 유적들은 언제 멸실되고, 흔적 조차 사라져 버린 것일까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개성에는 고려와 조선에 걸쳐 궁궐, 성곽과 불교와 유교, 민간신앙과 관
련된 시설이 산재해 있다. 또한 고려와 조선의 역대 왕들의 능과 관리의
무덤들이 많이 남아 있다. 몇 차례의 외침과 내부 갈등 속에서도 개성 사
람들은 자신이 살던 집과 땅을 지켜내며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고려 멸망
후 고려의 수도로서의 위치를 상실한 뒤 1백년을 지나지 않아 고려의 모습
은 폐허로 변하였다. 궁궐과 사원은 대부분 사라졌고, 왕릉 역시 피장자가
누구인지 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렇지만 고려의 유재(遺在)가 남은 개성의
여러 유적과 경관에 대해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직접 가서 보거나 느낀 점
을 유람기와 그림으로 남겼다. 이들은 명승지를 답사하며 시를 짓기도 했
으며, 황폐화된 유적을 찾아 감회에 젖기도 했다.2)
근대 이전의 개성의 옛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는 유람기(遊覽
記) 등 각종 문헌자료이지만,3) 조선후기 개성 관련 각종 지도와 회화 자료,
일제 때 조선고적 조사사업을 통해 촬영된 유리건판, 근대 사진엽서, 그리
고 각종 개인 사진자료에서도 찾을 수 있다.4)
전각이 크고 웅장하면서 높고 특출한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
아있으니 그 당시의 숭봉함이 지극하였음을 잘 알겠다”라고 하여 당시 개성의 사
찰의 번성을 알 수 있다(陽村先生文集 권12, 演福寺塔重創記). 1393년 태조의
왕명에 따라 팔만대장경을 인쇄할 때 연복사 5층탑에 보관하기도 했다.
2) 개성에 대한 유람기 번역작업은 현재 한국역사연구회 개경사연구반에서 2010년 7
월부터 진행중에 있다.
3) 현재 숙명여대에서 진행중인 ‘한국사상 개경(개성) 관련 기초자료 정리와 경관연
구’의 DB화를 위한 분류체계와 구축 중인 자료가 완성되면 보다 상세할 것이다.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39
현재 파악된 개성 관련 회화는 12(29)종, 지도는 12종, 사진엽서는 131
장이다. 그리고 일제의 조선고적 조사사업 과정에서 촬영한 유리건판이 국
립중앙박물관에 591점이 소장되어 있으며,5) 이를 이용하여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는6) 다양한 유적 사진들이 남아
있다.7) 또한 개성과 관련된 사진 엽서들은 대한제국 시절 외국인에 의해서
4) 그동안 이러한 일제시대 자료를 이용하여 여러 지자체와 박물관에서는 각종 전시
나 도록으로 발간하였다. 특히 부산 근대역사관(2003 사진엽서로 떠나는 근대기
행)과 서울시립대 박물관(2003 엽서로 보는 근대 이야기), 서울대 박물관(2004 그들의 시선으로 본 근대) 등에서 도록으로 출판했으며, 개인연구자에 의해서
도 출판하기도 했다(권혁희, 2005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민음사; 이경민, 2010 제국의 렌즈, 산책자). 그리고 남북한 화해 분위기에 힘입어 2004년에는 북한문
화재 세계유산 등재지원 사업으로 북한 문화유산관련 자료집으로 開城(이코모
스 한국위원회, 2004 開城‒개성역사지구 북한 문화유산관련 자료집 1)을 엮기
도 했다. 여기에도 근대 개성의 사진을 이용했다.
5) 국립중앙박물관은 1977년부터 유리원판목록집 1~5를 발간하였다.
6) 조선총독부의 후원 아래 1915∼1935년 사이에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시·다니
이 사이이치·구리야마 슈이치 등이 1915∼1935년의 20년간에 걸쳐 낙랑시대로
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고적을 주로 하고, 각종 유물들의 도판을 모아 조선총독부
가 간행한 것이다. 15책으로 된 이 책의 구성은 1권 낙랑·대방군 시대, 고구려시
대(1), 2권 고구려시대(2), 3권 마한, 백제, 임나, 요조시대, 고신라시대, 4권 신라
통일시대(1) ‒불교유적, 5권 신라통일시대(2) ‒왕릉, 불상, 탑내발견품, 6권 고려
시대 ‒성지, 궁지, 석탑, 묘탑, 기타 석조물, 7권 고려시대(2) ‒석탑, 불상, 능묘,
석관, 묘지, 탑지, 8권 고려시대(3) ‒도자기, 9권 고려시대(4) ‒분묘내 발견 공예
품, 10권 조선시대(1) 궁전건축, 11권 조선시대(2) ‒성곽, 학교, 문묘, 객사, 사고,
서원 등 건조물, 12권 조선시대(3) ‒불사건축1, 고구려시대 불사건축 보충, 13권
조선시대(4) ‒불사건축2, 탑파, 석비, 교량, 14권 조선시대(5) ‒회화, 15권 조선시
대(6) ‒도자기 순이다.
7) 이외에도 몇몇 기관에 적은 수지만 개성 관련 유리 건판이 남아 있다. 국사편찬위
원회는 1988 사진, 유리원판 목록과 2001 사진, 유리필름 화집을 발간하였
다. 여기에 개성 관련 사진으로 묘각사 ‘다라니당’으로 선죽교 부재로 쓴 것이 1
140 역사와 현실 79
만들어진 사진 엽서와 일제시대 강본서점(岡本書店)·평야서점(平野書
店)·호전사진관(戶田寫眞館)·개성보승회(開城保勝會) 등에서 발행한 것
들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조선후기 회화·지도 자료 가운데 개성의 유적과 경
관에 대한 정보를 담은 것들을 소개하고, 그 각각에 담긴 정보가 어떤 것
들인지 살펴보려 한다.8) 이는 사라진 개성의 옛 모습의 복원과 아카이브의
DB화를 위한 준비 작업이라 할 수 있다
1. 회화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개성 지역을 그린 회화로는 고려 인종 때 이녕(李寧)이 그린 「예성강도
(禮成江圖)」와9)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10) 「박연폭포도(朴淵瀑布
장 있다.
8) 20세기초부터 제작된 ‘개성’ 관련 사진엽서와 유리건판을 함께 비교 검토하는 작
업을 병행했지만, 지면상 근대 이후 부분은 별도로 발표할 것이다. 특히 사진 아
카이브의 축적과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궁궐, 사찰, 관아와 경관 등의 변화를 회화,
지도, 사진 자료 등을 이용하여 정리할 것이다.
9) 고려 때 화가 李寧이 수도인 개성을 가로지르는 예성강의 경관을 그린 실경산수화
로, 1124년(인종 2) 추밀사 李資德을 따라 수행화원으로 북송에 갔다가 徽宗의 요
청에 의해 그렸던 것으로 문헌상의 기록으로 전할 뿐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서화
실기와 감식에 뛰어났던 휘종이 이 그림을 보고 크게 칭찬했던 것으로 미루어 매우
높은 수준의 명품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高麗史 권122, 열전35 方技 李寧).
10)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開城府上 驛院 天壽院조. 破閑集 중권 천수사조에 의
하면 天壽寺는 松都의 동쪽 都內 밖 100步 거리에 있던 사찰로서 숲이 우거지고
노래와 피리 소리가 끊이지 않는 지극히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명소
를 그린 것이 <천수사남문도>이다. 조선시대 세종대 이후 天壽院으로 바뀌었으며,
1476년 개성유수 李芮가 院에 정자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中京誌 권4, 宮殿[附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41
圖)」, 「양화루도(陽和樓圖)」11) 등이 있었다고 전하나 이 그림들은 전해져
오지 않는다.12) 이렇게 일찍부터 개성지역을 그린 회화들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존하는 그림들은 대부분 조선후기 이후의 것들이다.13)
현재 파악된 개성 관련의 조선후기 회화는 시기상 가장 이른 것은 1612
년 작으로 추정되는 작자미상의 사장원송도동료계회도(四壯元松都同僚契
會圖)이며, 그 다음은 겸재 정선의 「박연폭(朴淵瀑)」·「박생연(朴生淵)」,
표암 강세황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단원 김홍도의 「기로세련도(耆
老世聯稧圖)」와 모당평생도팔폭병(慕堂平生圖八曲屛)의 「송도유수도임
시(松都留守到任時)」, 작자미상의 송도사장원계회도병(松都四壯元契會圖
屛)·「송도용두회도(松都龍頭會圖)」와 학산 윤재홍의 학산묵희첩(鶴山
墨戱帖)의 「박연폭포(朴淵瀑布)」, 임득명의 서행일천리장권(西行一千里
樓亭院閣]).
11) 新增東國輿地勝覽 권5, 開城府下 古跡조에 따르면, 양화루는 長源亭 곁에 있었
다. 이곳에서 의종은 8년 정월과 3월에 知門下省事 崔允儀·樞密院使 任克忠·金
存中 등 6인을 불러 밤 늦게까지 잔치를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高麗史節要 권
11, 毅宗 8년 춘정월 및 3월). 예종이 이곳에 놀러 왔다가 郭輿와 화답한 시 두 수
가 남아 있다. 그러나 고려 회화사에서 언급하는 예종대에 궁궐 내 陽和樓의 경관
을 화원을 시켜 두어 폭 비단에 그리게 하였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다.
12) 홍선표, 1989 「東國輿地勝覽 繪畫關係記錄」 강좌미술사 2 : 안휘준, 1979 「高麗
및 朝鮮王朝 初期의 對中 繪畵交涉」 亞細亞學報 13 : 진현준, 2010 「조선 초
기·중기의 실경산수화 ‒실제 작품과 그 현장을 중심으로」 미술사학 24
13) 개성 관련 조선후기 회화 연구로는 다음의 것이 참고가 된다. 이홍렬, 1973 「宣祖
朝 文科出身의 一生態‒松都龍頭會帖 管見‒」 史叢 17·18合 ; 삼성문화재단,
1995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기념 특별전 ; 유옥경, 2000 「국립중앙박물관 소
장 송도사장원계회도병 연구」 미술자료 64 ; 2002 「송도의 진경」 우리 땅, 우
리 진경, 국립춘천박물관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2003 豹菴 姜世晃의 詩
書畵評(한국서예사특별전) ; 金健利, 2003 「豹菴 姜世晃의 ≪松都紀行帖≫ 硏究‒
제작경위와 화첩의 순서를 중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37·238 ; 2005 「개성 지
역의 산수를 담은 옛그림」 옛 그림 속의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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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송도사장원계회도병(松都四壯元契會圖屛)
長卷) 「박연범사정도(朴淵泛槎亭)」·「화장추색(華臧秋色)」, 작가미상의
「박연폭포도(朴淵瀑布圖)」 등의 순으로 12종이 있다.
개성의 명승지와 경관을 살필 수 있는 이 그림들 가운데 작자미상의 송
도사장원계회도병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남산품 1841)으로, 1612년(광
해군 4) 송도의 사관(四官) 동료들이 모두 장원 급제했다는 사실을 기념해
제작한 사장원동료계(四壯元同僚契) 병풍(그림 7)이 손실된 뒤 160년이 지
난 1772년에 당시 참석자였던 개성유수 홍이상(洪履祥, 1549~1615)14)의 7
세손인 홍명한(洪名漢, 1724~1774)이 1772년 당시 개성부 유수로 있으면서
중수 발의된 6폭 병풍이다.15)
14) 洪履祥은 본관이 豊山으로, 자는 元禮, 호는 慕堂이다. 초명은 인상(麟祥)으로,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장원하고, 예조와 호조의 좌랑과 正言을 거쳐 이조참
의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예조참의로 왕을 西京까지 호종하여 병조참의가 되었으
며, 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大司成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당시 鄭仁弘
의 사주를 받은 嶺南의 유생 文景虎가 상소하여 배척하는 成渾을 변호하다가 안동
부사로 파천되고, 이어 청주목사가 되었다. 광해군 초에 대사간에 召命되고, 都
憲·부제학을 거쳐 개성유수에 올랐다.
15)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洪名漢의 同僚契屛重修序에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에
적었던 시는 문집에 나와 있으나, 병풍은 변하고 파손되어 전하지 않는다고 하며
당시 車雲輅의 후손에게 찾아가 병풍의 存亡을 물었으나 없다고 해서 畵工에게 그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43
1612년 당시 참여한 이들은 기유년(1579) 식년문과(式年文科)에서 장원
한 개성부 유수 홍이상, 경자년(1600)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장원한 경력
(經歷) 이시정(李時楨, 1568~?), 무자년(1588)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한
도사(都事) 윤영현(尹英賢, 1557~?), 계미년(1583) 알성문과(謁聖文科)에서
장원한 교수(敎授) 차운로(車雲輅, 1559~?)이다.16)
이는 1612년 작으로 추정되는 작자미상의 송도사장원계회도(松都四壯元
契會圖)·송도용두회도(松都龍頭會圖)와 1781년 김홍도가 그렸다고 하는
모당평생도팔곡병(慕堂平生圖八曲屛) 중 5폭의 송도유수도임시(松都留守
到任時) 장면이 있어 이 모임의 역사적 사실을 더욱 뚜렷하게 해 준다.17)
송도사장원계회도병(松都四壯元契會圖屛)은 개성 일대 주변의 이름난
명승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1폭에는 1612년의 송도사장원계회
장면을 재현한 「태평관(太平館)」이18) 있으며(그림 2), 그 아래로 홍명한의
대로 模寫토록 하고 시를 써서 새로 두 벌을 제작하여 한 벌은 그의 집에 한 벌은
車雲輅의 후손인 車錫五의 집에 두었다고 했다.
16) 淵泉先生文集 권42, 豐山洪奭周成伯著 家言[上], “文敬公留守松京 李雲麓時禎 爲
經歷 車滄洲雲輅 爲敎授 皆甞魁文科 都事尹晩村英賢 魁進士 遂設四壯元稧會 圖其
事屛風 大提學西坰柳公根 爲之序 柳公亦大魁 時稱松京龍頭會 雲麓賦詩 有龍首山
爲龍首會壯元郞對壯元郞之句”
17) 유옥경, 200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송도사장원계회도병 연구」 미술자료 64, 29
쪽 참조.
18) 태평관은 고려시대의 征東行省을 고쳐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정동성은 서소문 밖
의 佛恩寺 남쪽에 있었으나, 1393년 명의 사신들이 묶을 객관이 필요하여 태평관
으로 고치고(太祖實錄 권3, 태조 2년 정월), 임란 때 화재로 중건하지 못하다가
개성부의 정청으로 옮겼고, 지금의 자리에 계속 남아 있게 되었다(松京廣攷 권7 舘驛). 개성을 유람한 南孝溫은, 大平館을 지나 동쪽으로 八小洞을 가다보면 조선
개국공신인 南在(호 龜亭)의 故宅 터가 있는데, 지금은 마을 사람들의 경작지가 되
었다고 했다(臥遊錄 권3, 松京錄). 현재 지명상의 태평동은 옮기기 이전의 지명
이며, 이전의 태평관은 佛恩寺 인근에 있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開城府上
佛宇). 일제시대 人蔘專賣局(전매국인삼개성출장소)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144 역사와 현실 79
<그림 2> 태평관
동료계병중수서(同僚契屛重修序)
가 있다.19)
그 다음 폭부터는 각 폭마다 「화
곡심방(花谷尋芳)」, 「박연관폭(朴
淵觀瀑)」, 「만월회고(滿月懷古)」,
「지족문종(知足聞鐘)」 등 개성 일
대의 사계절 풍경을 그려 넣고,
그림 아래에 참석자 네 명이 각기
쓴 4언율시와 그림 상단에 각 폭
마다 서경(西坰) 유근(柳根, 1549
~1627)의 표제가 기록되어 있다.
제6폭에는 홍이상의 부탁을 받아
1614년에 송도 사장원계의 취지
를 기술한 유근의 동료계병서와20) 1772년 개성부 경력(經歷)이었던 노성중
그림에 보이는 태평관은 임란 이후의 태평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개성
관련 유리원판 591점 가운데 태평관 관련 필름이 2점과 朝鮮古蹟圖譜에 4점이
남아 있어 이 시기의 태평관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19) 松京廣攷 권7, 舘驛, “… [洪名漢撰]昔在萬歷壬子 我先祖慕堂先生 居留西京 先生
曾居魁科 而其時經歷與都事·敎授 皆大小魁元 麗朝重龍頭會 而故都四僚之一時聚
魁星 事非偶然 於是置四壯元稧 設宴於太平舘以樂之 又各占六幅屛以識之 第一幅圖
晏會 其下各畫花谷·朴淵·滿月·知足四時勝景 四公各以四律繼之 西坰柳公又題一
絶於其上 第六幅則柳公序其事而鋪張之 盖以柳亦魁元人也 詩則在先祖遺集 而屛則渝破無傳焉 後一百六十年 不肖後孫名漢 繼先生之躅 而忝叨居留 訪其時敎授車滄
洲之後裔 問屛存亡 則亦無有矣 遂新製二屛 命工倣畵之 又書詩若文 使百餘年前勝
事 今復爛然如昨日 嗚呼 摸其畵而誦其詩 可以想像其裘帶風流之一段 顧余不肖 固
無以彷彿其萬一 而世級之升降 人才之盛衰 尤足以俯仰而感慨矣”
20) 慕堂集附錄, 松都四壯元契會圖序[柳根], “松都留守洪公再寄書 走一力背一屛 徵余
文曰今世文衡非不多 必求諸左右者 實有其意云 盖以余忝壬申春別試文科壯元故也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45
(盧聖中 1724~?)이 계회 병풍을 중수할 때 홍명한의 부탁을 받아 쓴 발문
으로 구성되어 있다.
2~5폭에 묘사된 개성 일대 주변의 이름난 명승지의 특징을 충분히 감안
한 구성을 토대로 그려져, 실경에서 느낀 감흥을 회화적인 감동으로 나타
내고 있다. 18세기 화단에서 유행한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풍을 완전히
소화한 절정기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21)
「화곡심방」은22) 화곡(花谷) 주위의 뛰어난 경관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
다. 화곡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 살던 곳으로, 이곳에 그를 기린
화곡서원(花谷書院)이23) 있었다. 중경지에는 화곡서원 일대의 경관을 자
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림에 보이는 곳은 오관산 금세동(錦細洞) 골짜기이
다. 이곳에 차일암(遮日巖)이 있는데, 군왕소(君王所)·선인소(仙人所)라고
부른다. 봉우리가 새 둥지를 닮았으며, 바위가 크고 넓어서 옛날 군신들이
余按圖而推求焉 第一幅畵太平舘設龍會于其中 北壁坐者留守公 己卯式年文科壯元
列坐于東者凡三 其一經歷李公也 庚子別試文科壯元 其二都事尹公也 戊子司馬壯元
其三敎授車公也 癸未謁聖文科壯元 宜合而篆之曰四壯元松都同僚契會之圖 其下四幅
寫名區四時之景…何處無春色 花潭不可忘 千紅與萬紫 長得帶芬芳 右花潭尋芳 丙子
曾遊地 今垂四十霜 飛流畵難似 誰識倒銀潢 右朴淵觀瀑 再逐天仙過 分明指顧間 當
時花盡落 今日對秋山 右滿月懷古 知足聞名久 朝來見雪峰 吾衰自發省 不必待鳴鐘
右知足聞鐘 萬曆甲寅秋八月五日 輔國崇祿大夫戶曹判書晉原府院君西坰柳根謹序”
21) 유옥경, 2002 「송도의 진경」 우리 땅, 우리 진경, 국립춘천박물관, 279~280쪽
참조.
22) 慕堂集附錄, “花谷尋芳[洪履祥] 松都形勝五冠南 翠壁紅粧倒玉潭 數子恩榮俱第一
老夫僥倖亦同參 僚筵邂逅眞奇遇 好事流傳作美談 最是賢祠遺躅在 滿庭芳草綠毶毶
右西湖洪履祥元禮留守”
23) 화곡서원은 1609년(광해군 1)에 창건되었고, 徐敬德·朴淳·閔純·許曄의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함께 사액서원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령으로 없어졌다. 서경덕의 묘는 서원 뒤편에 있으며, 1585년(선조 18) 韓濩 (1543
~1605)가 쓴 신도비가 현재 전하고 있다(松都誌 권2, 學校 및 松京廣攷 권7,
補遺조 참조).
146 역사와 현실 79
<그림 3> 화곡심방 <그림 4> 박연관폭
이곳을 찾아 천막을 치고 연회를 열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 골짜기에
바위가 움푹 패여 이루어진 연못 화담이 있는데, 서경덕이 풍류를 즐긴 곳
으로 경치가 뛰어나 그의 호 역시 이곳을 그대로 차용하였다고 한다.24)
그림에는 화담 위에는 서사정(逝斯亭)이 보인다. 서사정은 화담 위쪽에
있는 정자로 1679년(숙종 5)에 개성유수 윤심(尹深)이 세운 것으로,25) 화담
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었다. 연못 우측으로는 취벽(翠壁)이 깍은 듯이 우
뚝 솟아 있고 마치 병풍 그림을 늘어놓은 것 같다. 또 연못 위에는 큰 반석
(盤石)이 있는데 수십 인이 앉을 수 있으며 화담이 낚시를 즐기던 곳이
다.26) 봄철의 서원 주위로는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서원의 뒤쪽 산봉
24) 中京誌 권3, 산천조 遮日巖[在綿紬洞口] 및 花巖[一名花潭在湧巖山南] 참조.
25) 增補文獻備考 권39, 여지고 27 외방 궁실 경기도 개성부조에 따르면, 1679년(숙
종 5)에 開城留守 尹深이 세웠다(松京廣攷 권6, 樓亭조 참조).
26) 中京誌 권2, 逝斯亭[在花潭上徐先生遊息之地也潭右翠壁如列屛障潭上盤石可坐數
十人卽先生釣㙜而有小窠臼俗傳先生張傘處]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47
<그림 5> 만월회고
우리 아래에는 화담 부모의 묘비(墓碑)가 아주 작게 보인다.27) 강세황의 화
담에는 화곡서원은 보이지 않고 서사정만 보인다(그림 3).
「박연관폭」은28) 여름철 박연폭포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폭포 주변
에는 대흥산성 북문과 폭포 아래로 고모담과 못가의 범사정(泛斯亭)이 보
인다.29) 주위에는 여름철 기운이 서
린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녹음이 짙
은 나무를 묘사하고 있다(그림 4).
「만월회고」는30) 가을 만월대 주
변의 풍광을 묘사한 것이다. 송악산
을 배경으로 한 이 그림에는 만월
대 뒤편에는 발어참성(勃禦塹城)과
성 아래로 송악산 성황당봉수(城隍
堂烽燧)가31) 있다. 그 밑으로 황량
한 옛 궁궐터가 있으며, 그 주변에
는 여러 채의 민가들이 보인다. 땔
감을 지고 서로 대화하고 있거나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인물 등의
27) 유옥경, 2000 앞의 논문, 35쪽 참조.
28) 慕堂集附錄, “朴淵觀瀑[車雲輅] 懸流千尺倒空靑 上下龍宮隱石屛 雲錦機頭濯氷雪
玉河津畔闘雷霆 從知夏瀑兼春瀑 誰見魁星對酒星 四箇官僚皆第一 奇逢吾欲問山靈
右滄洲車雲輅萬里敎授”
29) 이에 대한 설명은 뒤의 박연 관련 회화에서 설명되어 있음.
30) 慕堂集附錄, “滿月懷古[李時楨] 一片荒臺古道傍 薄雲秋色帶斜陽 麗朝往事今何問
幕府來參亦不量 龍首山爲龍首會 壯元公對壯元郞 寮筵且盡奇逢樂 莫用登臨更斷膓
右雲麓李時楨衛中經歷”
31) 성황당 봉수는 남쪽으로 德積山, 서쪽으로 首鴨山을 연결하는 봉수이다(中京誌
권2, 봉수조 참조).
148 역사와 현실 79
표현에서는 간결한 필치가 돋보인다.32) 만월대는 2단으로 높게 처리하고
있는데, 정면의 세 계단과 동쪽에 계단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의 모습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또 만월대 서쪽에 위치한 첨성대(瞻星臺)의 축대 모습
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거친 궁터 곳곳에 단풍이 보인다(그림 5).
「지족문종」은33) 천마산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지족암(知
足庵)을34) 주제로 한 것이다. 지족암의 뒤에는 석벽이 천척(千尺)으로 천마
산에서 제일 빼어난 곳이다. 뒤편에 있는 산등성이 사면으로는 바위 봉우
리가 겹쳐 있어 벌려놓은 그림 병풍 같다. 남쪽으로는 창해가 보이고, 눈으
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막힘이 없다. 전해오기로는 중국인이 항상 이 산
형을 묘사하고 떠났다고 한다.35) 지족암은 「송경폭원도(松京幅圓圖)」(지도
12 참조)에 태안창 뒤쪽 지족사(知足寺)라 표기되어 있다.
지족암의 겨울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이 그림에는 화면의 중앙에 대웅
전을 비롯한 요사채를 갖춘 암자와 그 앞으로 종고루(鐘鼓樓)를 배치하고
있다. 그 아래로는 다리를 건너고 있는 스님이 보이는데, 얼굴은 살색으로
선염하여 세밀함을 보이고 있다. 절을 둘러싸고 있는 암벽은 산세가 험하
32) 유옥경, 2000 앞의 논문, 39쪽 참조.
33) 慕堂集附錄, “知足聞鐘[尹英賢] 四魁僚席會 蛇龍盛事如今幸到儂 暇日風流酬暮景
有時雲卧聽晨鐘 須將吾道留深省 且向禪家起放慵 一夜玄威增氣象 朝來海上玉千峯
右晩村尹英賢彦聖都事”
34) 지족암은 신라 때 창건된 절로 조선 중기에 폐사되었다가 1786년(정조 10) 法城과
道演이 중건하였다. 지족암은 李穡의 문집(牧隱詩藁 권29, 詩 奉題絶澗所寓天磨
知足菴)에서 처음 보이며, 「松京幅圓圖」에는 羅月峯과 鷹峯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松都誌 권4, 고적 지족암). 寂照寺터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황진
이 때문에 파계한 知足(萬錫)禪師의 수행처로 알려져 있다. 김육의 天聖日錄에
따르면, 개성에서 靈通寺까지는 20리, 영통사에서 지족암까지 15리이고, 大興寺·
觀音窟·朴淵·雲居寺·遮日巖·北聖居山·圓通寺·玄化寺·華藏寺까지의 거리가
자세히 나와 있다.
35) 中京誌 권5, 寺刹 知足庵조.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49
<그림 6> 지족문종
고 비탈면의 경사가 급하여 매우
웅장해 보인다(그림 6).
이와 함께 홍이상과 관련된 것
으로는 사장원송도동료계회도
(四壯元松都同僚契會圖) 가운데
태평관에서의 계회 장면만 그려
진 것이 남아 있다. 1612년 작으
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1축(軸)의
형태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
어 있다.36) 작품의 상태는 박락과
균열이 심한 편으로 그림의 격조
는 뛰어나지 않으나, 주변의 경관
보다 모임의 광경을 더 강조했던
조선 중기 계회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37)
이 그림의 상단에는 ‘사장원송도동료계회도(四壯元松都同僚契會圖)’라는
모임의 명칭이 각기 다른 전서(篆書)로 되어 있으며, 중단에는 관아내에서
열리고 있는 계회 장면과 계원들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북쪽으로 앉
아 있는 사람이 유수 홍이상이며, 동쪽의 첫 번째는 경력 이시정, 두 번째
36) 송도사장원계회도는 麻本彩色(132.4×63.5㎝), 중앙박물관 본관품 4996번으로
1917년 10월 京城의 李性爀으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유옥경, 2000 앞
의 논문, 27쪽 참조).
37) 화면 바깥부분 우측 하단에 ‘四壯元設宴于松都慕堂洪履祥盡此以記勝遊’와 좌측 하
단에 ‘洪履祥字元禮號慕堂司直修子洪厓侃八世孫宣祖朝魁科選湖堂歷舍人直學官止
大司憲諡文敬配享高陽文峰院’, ‘車雲輅字萬理號滄洲五山天輅弟이 齋軾子宣祖朝魁
科官止校書校理以文章名世有文集’ 등의 묵서가 되어 있으며, 그 밑으로 홍이상의
5대손인 洪命輔(1678~1738)의 호인 ‘心齋’와 朱文方印 1顆가 찍혀 있다(유옥경,
2000 앞의 논문, 28쪽 참조).
150 역사와 현실 79
<그림 7> 지족문종 <그림 8> 송도용두회도
에 도사 윤영현, 세 번째에 교수 차운로이다. 그 좌측으로는 육방관속(六房
官屬)이 보인다. 계회 주변에는 피리, 장고, 북 등을 연주하고 있는 악대와
큰 동이에 담겨진 술을 준비하고 함께 마시는 인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
다. 화면 중앙에 팔작 지붕의 태평관을 배치하고, 그 전후에 부속 건물과
후정(後庭)을 배치하였다. 하단의 좌목 좌우에는 대나무와 매화를 그려 넣
었다(그림 7).38)
또한 송도용두회도(松都龍頭會圖)(고려대박물관 소장. 紙本彩色 23.5
×31.1cm) 역시 1612년(광해군 4) 개성 지방의 동료 네 명이 모두 장원급
38) 유옥경, 2000 앞의 논문, 29~30쪽 참조. 유옥경은 1612년의 것에서는 건물 묘사가
의궤형식으로 도식화한 것으로, 1772년의 것은 궁궐도나 궁중 행사도에서 사용된
界畵法을 사용하고 있으며, 건물 내부의 인물 배치는 1612년의 것은 관계의 서열
에 따라 연장자가 북쪽에 앉아 있어 기록과 일치하는 반면, 1772년의 것은 연장자
가 서쪽으로 앉아 있어 변화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였다.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51
<그림 9> 홍이상 송도유수도임시
제자였던 사실을 특별히 여겨 모
임을 열고 그 광경을 그린 것으
로, 앞서 살펴본 송도사장원계회
도의 병풍을 중수한 이후에 다시
화첩으로 이모(移摹)된 것으로 보
인다(그림 8).
이 역시 유근과 홍명한의 글을
수록하였으며, 후반부에는 한명상
(韓命相), 김성행(金聖行), 김종수
(金宗洙), 홍신규(洪信圭), 이양호
(李養浩), 홍진용(洪震龍), 허인
(許寅), 이환용(李煥龍), 이장오
(李章五), 마지광(馬之光), 김광국
(金匡國), 차석오(車錫五) 등 12명의 시를 실었다.39) 이 시들은 홍명한이
계회 병풍을 중수하면서 후손 및 지인(知人)들에게 청해서 받은 것이다.
마지막의 차석오는 차운로의 후손으로 홍명한이 중수한 두 벌의 계병 중
하나를 소장하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화면에 ‘용두회(龍頭會)’,40) ‘태평관(太平館)’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서
태평관에서 열린 용두, 즉 장원급제자들의 모임을 주제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태평관 안에는 붉은색 공복(公服)을 입은 홍이상과 나머지 세 명이
품계에 따라 자리를 달리하여 앉아 있다. 문 밖에는 이들이 타고 온 호피
39) 이홍렬, 1973 「宣祖朝 文科出身의 一生態 ‒松都龍頭會帖 管見‒」 史叢 17·18合
40) 龍頭會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유습으로, 역대 科擧의 壯元이 讌會를 베푸는 것을
‘龍頭會’(牧隱詩稿 권25, 詩)라 하여 당시 사람들의 부러워할 정도로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大東野乘 「遣閑雜錄」). 이에 대한 연구는 채웅석, 2006 「목은시
고(牧隱詩藁)를 통해서 본 이색의 인간관계망 ‒우왕 3년(1377)~우왕 9년(1383)을
중심으로 ‒」 역사와 현실 62가 참고된다.
152 역사와 현실 79
깔린 여(輿)와 가마와 세 필의 말이 보인다. 개울과 판교(板橋), 원산(遠山)
뒤에 돌출한 흑색 바위가 장소의 현실감을 더해준다. 이는 앞서 설명한
송도사장원계회도 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림으로 다른 구도로 이루어졌
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김홍도가 1781년, 37세 때 그린 모당평생도팔폭병풍은 홍이상
의 일생을 후손이 그의 일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린 평생도로 추정한다.
8폭으로 된 이 작품은 제1폭 「돌잔치」, 제2폭 「혼인식」, 제3폭 「삼일유가
(三日遊街:應榜式)」, 제4폭 「한림겸 수찬시(翰林兼 修撰時)」, 제5폭 「송도
유수도임시(松都留守到任時)」, 제7폭 「좌의정시(左議政時)」, 제8폭 「회혼
식(回婚式)」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제5폭 「송도유수도임시」는 송
도(개성) 유수 임명을 받고 앞뒤에 맨 쌍교(雙轎)를 타고 고갯길을 넘어가
는 모습이다(그림 8).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동원품 2191)으로,
정조때 미술계를 주도한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 1713~1991)의 작품이
다.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이 1757년 7월 당시 개성유수였던 오수채(吳遂
采, 1692~1759)의 초청으로 개성을 여행하면서 아름답고 웅장한 경치에서
받은 감흥과 인상을 현실감있게 그려낸 것이다.41) 이 화첩은 총 16점의 화
폭속에 개성 북쪽의 천마산, 성거산과 대흥산성 일대, 오관산의 명승지를
41) 松都紀行帖의 원래 이름은 豹庵先生遺蹟이다. 1971년 사업가이면서 문화재
수집에 평생 열정을 쏟았던 東垣 李弘根 선생(1900~1980)의 소장품을 조사하던
당시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 화첩을 松都紀行帖이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소개하고, 1973년 한국미술이천년전을 통해 처음 일반에 공개했다. 이 화첩은
강세황이 개성유수 오수채의 초청으로 1757년 송도를 유람할 때 선물로 그려주어
해주 오씨 집안에서 전해져왔다. 표암의 제자인 許佖(1709~1768)의 <妙吉祥> 題
跋에 의하면, 당시는 <無暑帖·더위를 없애는 화첩>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송도
기행첩은 강세황이 부인 유씨가 타계한 다음해인 1757년 그의 나이 45세 때 개
성을 유람하고, 이때 <無暑帖> 2권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53
실경으로 담고 있는 기행시화첩이다.42)
송도기행첩에 실린 14점은 「송도전경(松都全景)」, 「화담(花潭)」,43) 「백
석담(白石潭)」,44) 「백화담(白花潭)」,45) 「청심담(淸心潭)」,46) 「대흥사(大興
寺)」47), 「영통동구(靈通洞口)」,48) 「산성남초(山城南譙)」, 「대승당(大乘堂)」,49)
「마담(馬潭)」,50) 「태종대(太宗臺)」,51) 「박연(朴淵)」,52) 「태안창(泰安倉)」,53)
42) 金健利, 2003 「豹菴 姜世晃의 ≪松都紀行帖≫ 硏究‒제작경위와 화첩의 순서를 중
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37·238
43) 그의 시제에 따르면, 연못을 ‘花潭’이라 이름한 것에 대해 어떤 이는 연못 곁에 예
부터 산의 꽃이 빼어났기 때문이라 한다며, 이곳은 徐敬德 선생의 遺虛地인데 땅
은 그곳과 인연을 맺은 유명한 사람 때문에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지 다만 경치가
빼어나서 전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낚시하는 대가 있는데, 선생께서 낚시하
며 노닐던 곳으로, 後人이 ‘逝斯亭’을 세웠다고 한다. 松都誌 권2, 山川조에 따
르면, 화담은 ‘花巖’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湧巖山 남쪽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44) 백석담은 영통동으로 가는 길 옆에 있는데, 돌이 눈처럼 희고 바둑판처럼 네모났
다고 했다. 松都誌 권2, 山川 및 中京誌 권3, 山川 및 松京廣攷 권3, 山川조
참조.
45) 백화담 바위 위에는 구멍이 나 있는데, 세간에서는 신선이 놀던 곳이라 전해 온다
고 했다. 바위는 희고 샘물은 치달려 경기도 장단 지역이 되며, 지금은 대흥산성에
속한다고 하였다. 백화담은 오관산 綿紬洞口의 花谷書院 남쪽 아래에 있는 암석으
로 ‘遮日巖’으로 불리다가 어느때 백화담으로 불리운 것 같다. 松都誌 권2, 山川
및 松都誌 권2, 學校; 中京誌 권3, 山川; 中京誌 권5, 學校조 참조.
46) 청심담은 대흥사 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松都續誌 권3 古蹟조 참조.
47) 大興寺의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병지호란 이후 불탔다가 정조대에 대흥산
성 서문 밖에 있던 淨慈寺의 재목을 가져다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松都誌 권3,
佛宇).
48) 영통동 입구에는 커다란 돌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는데 크기가 집채만 하고 푸른
이끼가 덮여 있어 얼핏 보면 눈을 놀라게 한다고 했다. 속설에 용이 못 밑에서 나
왔다고 전하지만 믿을 만한 것은 못된다고 하였으며, 진귀하고 웅장한 구경거리
는 보기 드문 것이라 하였다.
49) 대승당은 大興山城 내에 위치하고 있다(中京誌 권6, 關防 및 松京廣攷 권7,
關防조 참조).
154 역사와 현실 79
「낙월봉(落月峯)」,54) 「태안석벽(泰安石壁)」,55) 「만경대(萬景臺)」,56) 발문(跋
文) 순으로 되어 있다(그림 10~23).
50) 마담은 개성부에서 62리 가량 떨어져 있으며, 대흥동의 대흥사 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開城府上 山川조 참조).
51) 玄洲集 권6, 七言律詩에는 趙纘韓이 견여를 타고 太宗臺를 오르는 모습이 있다.
그의 시 ‘박연폭’ 다음에 있으며, 農巖集 권6, 詩 ‘태종대’에도 金昌協이 관음굴
과 영통사로 들어가는 사이에 편제되어 있으므로, 박연폭에서 가까운 천마산 인근
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松京廣攷 권8, 佛宇2에서도 觀音窟 위에 있는 바위로
1백명이 앉을 수 있는 데 이름을 태종대로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松京廣攷
권3, 山川 扈輦臺조에는 金峴의 동쪽에 있으며, 太宗이 潛邸시에 鍊武한 장소로써
俗稱 太宗㙜로 알려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 高裕燮의 松都의 古蹟에는
三峴 인근의 東大門址(保定門)에서 太宗臺(扈輦臺)를 거쳐 穆淸殿 뒤 고개를 넘어
가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명승지로서의 태종대는 扈輦臺와 다른 위치에
있게 된다. 해동지도의 송도와 개성전도에도 ‘扈輦臺’로 표기되어 있다.
52) 박연은 挹翠軒 朴誾(1479~1504)의 시 ‘大興詩’를 인용하였으나, 박은의 문집인 挹翠軒遺稿 권2, 七言古詩에는 <관음굴에서 묵으며(宿觀音窟)>라는 제목 아래
에 실려 있다.
53) 태안창은 비스듬히 부아봉과 마주하고 있다고 하였다. 원래 태안은 고려 태조의
胎室이 있던 곳이다. 태안창은 대흥산성 小西門 밖의 大安寺의 舊址에 세워져 있
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開城府上 山川 및 松都誌 권3, 官舍; 高麗古都徵
권7, 寺院 大安寺; 松京廣攷 권6, 倉庫조 참조).
54) 낙월봉은 태안창에서 바라보는 봉우리로 형새가 높고 험준하여 구름속으로 들어가
있는 듯 하여 정신아 아찔하고, 산 밑에는 물가로 20~30호가 사는 마을이 있다고
했다.
55) 태안석벽은 태안창 왼편으로 산성을 바라보면 만경대가 있는데, 봉우리가 매우 뾰
족하여 구름 밖으로 우뚝 솟아 있다고 했다.
56) 만경대는 태안동문 들어가면 왼편에 석벽이 있고, 기이한 것이 많다고 했다. 천마
산 청량봉 서쪽에 있는 석벽이다. 만경대 서쪽으로 文殊庵이 있었다(松都續誌
권3, 古蹟 및 松京廣攷 권8, 佛宇2조 참조).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55
<그림 13> 백화담
<그림 10> 송도전경 <그림 11> 화담
<그림 14> 청심담 <그림 15> 대흥사
<그림 16> 영통동구 <그림 17> 산성남초
<그림 12> 백석담
156 역사와 현실 79
<그림 18> 대승당
<그림 20> 태종대
<그림 19> 마담
<그림 23> 태안석벽(만경대)
<그림 21> 박연
<그림 22> 태안창
개성 일대를 유람 순으로 그려나간 이 화첩은 「송도전경」이 맨 앞에 나
온다. 남문 누각에서 조망한 송악산과 시가지를 한눈에 잡아냈다. 대로가
점점 좁아지는 초점 투시법을 구사해 더욱 현장감이 느껴진다. 원래 이 곳
은 고려시대 남대가(南大街)로 가는 십자가(十字街)였다.57) 7면의 「영통동
57) 개경의 모든 도로는 皇城을 향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황성의 정문인 廣化門에서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57
구」는 오관산(五冠山)의 영통동(靈通洞) 계곡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을 압
도하는 장관을 서양화풍의 명암법을 활용해 그린 것이다. 개성에서 8㎞ 정
도 떨어진 이 곳은 개성 명승지로 손 꼽히는 곳이었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주석한 영통사(靈通寺)가58) 있어서 더욱 유명한 곳이 되었다.
표암은 당시의 놀라운 감동을 “영통동 입구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바위들
은 크고 웅장해 크기가 집채만 하고 푸른 이끼가 덮여 있어 보자마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고 까지 생생하게 써놓았다. 화첩은 성거산의 「박연폭
포」를 지나 천마산의 「태안창」 일대에서 끝난다.59)
송도기행첩은 회화사적으로 강세황이 유람하는 도중에 실제로 감상한
산수로부터 환기된 산수미를 당대 최신의 화풍인 서양화풍이 가미된 수작
이며, 동시에 조선후기 문인들의 산수유람과 작화태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60)
시작되는 간선로가 있었다. 개경의 자연지형상 국왕의 본궐을 둘러싼 宮城과 황성
은 북서쪽에 치우쳐 있으며, 광화문 밖 관청거리와 시전거리는 개경의 가장 큰 번
화가였다. 관청거리에서 시작된 개경의 간선로는 白川이라 불리는 조그마한 하천
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남대가로 연결되었으며, 이 남대가는 나성 내부 도로의
중심축이 되었다. 반면 나성 서쪽의 宣義門에서 동쪽의 崇仁門을 연결하는 대로는
나성의 내부를 남북으로 갈라놓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 도로와 남대가가 만나는
지점을 십자가라 불렀다( 고려 500년의 서울 개경의 생활사, 55~56쪽 참조).
58) 영통사는 1207년(현종 18)에 창건된 사찰로, 16세기경에 화재로 인해 없어진 것으
로 전해진다. 고려 태조의 조상이 살았다는 五冠山 아래 자리잡은 이 절은 일찍이
고려 왕실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어서 인종을 비롯한 여러 왕들이 자주 참배하
였던 대찰이었다. 왕실이 주관하는 齋나 忌晨道場을 많이 봉행했고, 당시에는 인
연이 있는 왕들의 진영을 모시는 眞影閣도 있었다고 한다. 대각국사 義天은 이곳
에서 출가하여 敎觀을 배우고 천태종을 열었으며, 입적한 후에는 그의 비가 이곳
에 건립되었다. 1998년 북한과 일본 학자들이 3년여에 걸쳐 발굴사업을 벌였고,
그후 북한이 건축복원 설계를 완성하고, 2002년 11월부터 천태종단의 지원으로 복
원 사업이 추진되면서 2005년 10월 31일 복원 낙성식을 개최하였다.
59) 金健利, 2003 앞의 논문, 237~238쪽 참조.
158 역사와 현실 79
<그림 24> 기로세련계도
강세황의 제자인 김홍도(金弘道
1745~미상)의 「기로세련계도(耆老世
聯契圖)」는61) 1804년 9월 개성의 노
인들이 약 200년 전에 있었던 조상들
의 옛 일을 좇아 송악산 기슭의 만월
대에서 가졌던 계회 장면이다. 「기로
세련계도」의 화면 위쪽 여백에는 장
문의 발문이 적혀 있는데, 이 글은
쓴 이는 당대의 문신 홍의영(洪儀泳,
1750~1815)이다. 그 아래 ‘기로세련
계도’라는 그림의 제목을 쓴 사람은
전서와 예서를 잘 써서 당대에 이름
이 높았던 유한지(兪漢之)이다. 그림
의 아래쪽에는 기로회(耆老會)에 참
석한 64인의 성명과 관직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그림 24).
발문의 내용은 “송도는 예로부터
이름난 고을로 산수와 인물이 출중한
데, 만력 정미 년간(1607)에 송도의
장로들이 낙사(洛社) 기영회(耆英會)
와 서경(西京) 구로회(九老會)의 고
사를 본받아 계를 조직하고 신의와
화목을 도모한 일을 어른들로부터 자
60) 송도기행첩에 대한 설명은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2003 앞의 책 참고.
61) <耆老世聯稧圖>(견본채색, 137×53.3㎝, 개인소장)는 김홍도가 59세경인 1804년
에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59
주 들어 왔는데, 이번에 또 계원 중의 후손 집에서 그 유도(遺圖)를 보게
되어 그 때의 즐거움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그 계가 결
성되었으니 갑자년(1804) 늦은 가을이었으며, 계가 끝난 다음 김홍도로 하
여금 그림을 그리도록 부탁하였다. 채색빛이 휘황하고 온갖 사물이 짙푸른
중에 그 숲과 산자락이 파르슴하니 윤기 나는 빚깔로 물방울이 떨어질 듯
한 것은 송악산이고, 시든 풀 거친 궁터는 여기저기 단풍과 국화가 울긋불
긋한 것은 만월대이며, 구름같은 장막에 안개같은 병풍을 두르고 만월대가
가득하게 모인 사람이 64명이었는데, 그 계원 중 한 후예인 장모군(張某君)
이 서(序)를 부탁하여 적었다”고 하였다.
「기로세련계도」의 화면 위쪽에 보이는 산이 개성의 송악산이고, 그 앞쪽
에 크고 높직하게 차양을 덮어 친 곳이 만월대이다. 대(臺) 중앙에 주칠(朱
漆)한 큰 잔치상에 놓인 꽃병이 화면의 중심이 되고, 이를 중심으로 계원들
이 사각형 모양으로 둘러앉아 있다. 발문(跋文)에서는 계 모임에 참석한
계원의 수가 64인이라고 했지만 그림에는 66인이 그려져 있다.
「기로세련계도」에서 보이는 참석자는 물론 구경나온 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에 통일감을 부여한다. 또 여백으로 처리된 송악산 기슭과 연
회장 중간에 마련된 탁트인 공간은 작품의 기록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예
술의 경지로 끌어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작품은 이 작품
은 산수와 풍속 양면에서 김홍도가 이룩한 성과를 모두 보여주는 최대 걸
작의 하나로 파악하였다.62)
「기로세련계도」는 당시 폐허가 된 만월대(滿月臺)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 그림에서 주목되는 것은 만월대의 기단 석
축이다. 지금의 모습보다 기단의 석축과 계단이 온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
다. 그림에서는 2개의 계단만 보이지만 실제로 3개의 계단이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그림 25) 이 외에 만월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림은 작자미상
62) 삼성문화재단, 1995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기념 특별전, 256쪽 참조.
160 역사와 현실 79
<그림 25> 기로세련계도의 만월대 부분
확대
의 송도사장원계회도의 <만
월회고(滿月懷古)>에서도 찾
을 수 있다(그림 5 참조).
한편, 화담(花潭) 서경덕
(徐敬德)·황진이(黃眞伊)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알려진 박연폭포를 소재로
한 그림은 겸재 정선의 「박
연폭」·「박연생」, 표암 강세
황의 송도기행첩의 「박연」,
작자미상의 송도사장원계회
도병의 「박연관폭」과 학산
윤재홍의 학산묵희첩의 「박
연폭포」, 임득명의 서행일
천리장권의 「박연범사정도」,
작가미상의 「박연폭포도」 등
7점이 된다. 12종(29)의 개성 관련 회화 자료의 비중을 볼 때 단일 주제로
는 가장 많은 편이다.
박연폭포는 개성시 북쪽 16km 지점에 있는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
居山) 사이에 있다. 높이 37m의 박연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알려져 있다. 박연(朴淵)은 폭포 위
쪽에 있는 직경 8m 정도의 못이며, 이 박연에 담겼다가 떨어지는 것이 바
로 박연폭포이다. 박연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천마산 가까이 살며 퉁소 잘
불기로 소문난 박진사(朴進士)가 늙으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
데, 이 폭포에 놀러 왔다가 못 속에 사는 용녀에게 홀려 혼인하여 살고 있
었는데, 진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폭포에 떨어져 죽었다고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61
생각하고 비탄에 빠져 자신도 떨어져 죽었다는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때부터 그 못을 고모담이라 했으며 박씨 성을 따서 박연폭포라 불렀다고
한다.63)
박연은 고려 때 기청제(祈請祭)를 올리는 다섯 곳의 하나이며,64) 이제현
(李齊賢)이 송도팔경(松都八景)의 하나로 꼽았던 곳이다.65) 폭포수가 떨어
지는 바로 밑에는 고모담(姑母潭)이라는 큰 못이 있고 서쪽에는 용바위라
고 하는 둥근 바위가 못 속에서 윗부분만 드러내고 있는데,66) 이 용바위에
는 황진이가 폭포의 절경에 감탄해 머리채를 붓삼아 써내려갔다고 알려진
시가 새겨져 있다.67) 고모담 동쪽 언덕에는 폭포의 절경을 감상하기 좋은
범사정(泛斯亭)이 있다.68)
63) 東國李相國全集 권14, 古律詩 題朴淵, “昔有朴進士者 吹笛於淵上 龍女感之 殺其
夫 引之爲壻 故號朴淵]龍娘感笛嫁先生 百載同歡便適情 猶勝臨邛新寡婦 失身都爲
聽琴聲” 및 中京誌 권3, 명승 朴淵조 참조.
64) 高麗史 권54, 지8 五行2 木 숙종 4년 8월 丙子
65) 益齋亂稿 권10, 長短句 松都八景 朴淵瀑布 朴淵瀑布, “日照群峯秀 雲蒸一洞深
人言玉輦昔登臨 盤石在潭心 白練飛千尺 靑銅徹萬尋 月明笙鶴下遙岑 吹送水龍吟”
66) 용바위 전설은 문종이 이곳에 놀러 왔다가 바위 위에 올라 서자 갑자기 바람이 일
고 비가 쏟아져서 바위가 진동하였는데, 왕이 놀래고 겁을 내어 李靈幹이 왕을 모
시고 있다가 용의 죄상을 지적하는 글을 써서 못에 던졌더니 용이 즉시 그 등을
물 위에 드러내므로 곧 이를 곤장으로 두들겨서 물이 온통 빨개졌다고 한다( 高
麗史 권56, 志10 地理1 王京開城府 牛峯郡). 이로부터 용바위란 이름이 나온 것
으로 이해된다.
67) 황진이가 고모담 왼편 기슭 용바위에 남겼다는 “나는듯 흘러 곧게 떨어진 물이
3,000척이나 되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지 의심스럽구나(飛流直下三千尺
疑視銀河洛九天)’라는 초서체 글귀는 당나라 사람인 李白이 지은 ‘望廬山瀑布’이
다.
68) 增補文獻備考 권39, 여지고 27 외방 궁실 경기도 개성부조에 따르면, 범사정은
1700년에 개성 유수 金昌集이 세우고, 記文을 지었으며, 1755년 유수 尹汲이 중수
하면서 돌기둥[石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한국전쟁 이후 복원한
162 역사와 현실 79
<그림 26> 박연폭 <그림 27> 박생연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박연폭도(朴淵瀑圖)」(개인소장
119.4×51.9㎝)는 폭포 아래에는 연못인 고모담이 있고 그 기슭에 범사정
이 그려져 있다. 박연폭포 절벽 위에는 대흥산성의 북문에 해당하는 문루
(門樓)가 있고 그 성문으로 이르는 가파른 길이 나 있다. 폭포수는 화면을
압도하는 암벽 사이를 수직으로 가르며 쏟아져 내리고 이를 좌우에서 옹립
하듯 감싸고 있는 거대한 암벽의 위압적인 모습이 웅장함을 더욱 고조시킨
다. 폭포 소리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려는 겸재의 의도가 완벽하게 구현된
말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그림 26, 27).69) 이 외에도 학산(鶴
것이다.
69) 겸재의 박연폭포 그림으로는 현재 대작 1점과 소품 한 점이 전한다. 대작 중 한
점은 ‘朴生淵’이라는 제목이 붙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이고, 소품은 ‘朴淵瀑’이라고
씌어진 개인 소장품이다. 두 대작의 차이점은 가로 52cm 세로 119.5cm 크기의 지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63
<그림 28> 박연폭포 <그림 29> 박연도
山) 윤제홍(尹濟弘, 1764~1840)의 학산묵희첩(鶴山墨戱帖)에도 <박연폭
포>(26.2×20.7㎝, 호암박물관 소장)가 있다. 이 작품은 박연폭과 범사정을
대상으로 두 남자가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구경하고 있다. 또한 작가 미
상의 「박연도」(견본수묵, (29.6×26.5㎝, 개인소장)가 있는데, 박연폭포와
범사정을 배경으로 뒤에 성거산과 천마산을 원경으로 표현하였다(그림 28,
29).
임득명(林得明, 1767~?)의70) 서행일천리장권(西行一千里長卷)(61×28
㎝, 개인 소장)은 1813년(순조 13) 그의 나이 46살 때 늦가을 한양을 출발
본에 수묵으로 그린 ‘박연폭도’가 夏景인 반면 이보다 약간 작은 ‘박생연’은 秋景이
라는 것이다. 또 ‘박생연’은 ‘박연폭도’보다 먼 거리에서 실경을 포착한 구도다. 게
다가 ‘박연폭도’의 폭포 길이가 ‘박생연’보다 훨씬 길고 암벽도 장대하다. 이런 점
으로 미뤄 겸재는 ‘박생연’을 먼저 그린 후 이를 훨씬 단순화해 나중에 ‘박연폭도’
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두 작품 모두 제작 연도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박생연’
에는 60대 후반의 화풍이 엿보인다. 이에 반해 ‘박연폭도’는 암벽을 강렬하게 구사
한 濃墨의 ‘積墨法’이 1751년작으로 추정되는 ‘인왕제색도’와 비슷하다.
70) 임득명은 본관은 會津, 자는 子道, 호는 松月軒으로, 시·서·화 三絶로 일컬어졌
다. 崔北·林熙之 등과 함께 松石園詩社의 한 구성원이었던 것으로 보아 중인신분
의 文士였던 것 같다. 글씨는 篆書를 잘 썼고, 그림은 鄭歚의 진경산수화법을 배
웠다고 전한다. 유작으로는 <松月軒畵帖> 등이 있다.
164 역사와 현실 79
<그림 30> 박연범사정
<그림 31> 화장추색
하여 평안도 용천(龍川, 의주)에 이르는 여정 가운데 명승을 담은 7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행일천리장권에는 「파주도중(坡州途中)」, 「화장추색
(華臧秋色)」, 「박연범사정(朴淵泛槎亭)」, 「평양(平壤)」, 「순안도중(順安途
中)」, 「백상루(百祥樓)」, 「용천도중(龍川途中)」과 평양의 초연대(超然臺)에
관한 글을 예서와 전서로 쓴 것 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그림 30, 31).
이 그림 가운데 「화장추색」은 가을의 화장사(華藏寺)의 전경을 그린 것
이다. 화장사는 개성과 장단 경계인 보봉산(寶鳳山) 중턱에 있는 절로, 화
장사는 ‘계조굴(繼祖窟)’ 또는 ‘계조암(繼祖庵)’으로 불렸다가 공민왕 때 중
건된 것으로 전해진다.71) 김창협(金昌協)의 「유송경기(遊松京記)」에 따르
71)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2, 京畿 長湍都護府 佛宇조. 화장사는 인도 출신의 승려
指空과 관계가 깊다.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은 약 3년 동안 이곳에 머
물렀고, 1361년에 원나라에서 지공이 사망했을 때 유골을 제자 네 명이 나누어 가
졌다고 한다. 이 절에 지공이 가져 온 「西竺貝葉經」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곳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65
면,72) 언제가 불탄 것을 복구한 절로 대웅전 왼쪽 작은 방에는 공민왕의 영
정과 1천 나한상을 모신 나한전(羅漢殿), 지공의 소상을 모신 적묵당(寂黙
堂)과 조사전(祖師殿)을 설명하고 있다.73)
또한 「박연범사정」은 겸재나 학산처럼 폭포에 초점을 맞춘 구도와는 달
리 좌우의 성거·천마산의 협곡을 중심으로 범사정과 좌우 암산(巖山)을
드러내려 했다. 폭포의 위용을 찾을 수 없지만, 전체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담으려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74)
박연폭을 그린 작가들은 그 제작 연도나 화풍을 달리하지만, 경물(景物)
구성과 유사한 포치를 보여주고 있다. 즉 대부분의 작품은 하담(下潭)인
고모담(姑母潭) 쪽에서 상담(上潭)인 박연을 올려다 보는 시점을 보여주며,
폭포 오른쪽으로 대흥산성 북문으로 향하는 가파른 길과 그 끝의 대흥산성
북문의 문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한 고모담 옆에는 범사정과 그 주변
으로 내리 쏟아지는 폭포를 감상하고 있는 사람들이 표현되어 있다.75) 그
러나 박연폭포의 그림 속 범사정은 형태가 약간 다르게 나타난다. 정선의
작품에는 1755년 중수 이전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강세황과 임득명,
필자미상의 작품들에는 범사정의 석주(石柱)가 다르게 되어 있어 중수된
에는 공민왕의 영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中宗實錄, 권94 중종 35년 10월 갑
술일).
72) 農巖集 권23, 遊松京記
73) 현재 화장사터에 남아 있는 유물로는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과 명부전 동쪽 언
덕에 指空의 화장사 부도가 있다. 지공의 부도는 ‘화장사지공선사탑(북한 국보 제
134호)’으로 고려 시대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재이다. 이 탑은 지
공의 제자 나옹이 세웠다는 설이 있으며, 여주군 신륵사에 있는 나옹의 부도와 비
슷한 양식이다.
74) 이태호, 1987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발달과 퇴조」 진경산수화, 국립광주박물
관
75) 김건리, 2005 「개성 지역의 산수를 담은 옛그림」 옛 그림 속의 경기도, 경기문
화재단, 129쪽 참조.
166 역사와 현실 79
이후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이상의 개성 관련 12종 29점의 그림들은 대개 계회도(契會圖) 형식(5점)
과 개성의 대표적인 명승지인 박연폭포(7점)를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강
세황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과 작자미상의 송도사장원계회도병(松
都四壯元契會圖屛)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단일 주제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 그림들에서 보이는 개성의 유적과 경관은 대체로 천마산, 성거산, 오
관산일대의 자연 경관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박연폭포가 단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외에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稧
圖)」나 「만월회고(滿月懷古)」는 페허로 변한 고려 궁궐의 자취를 엿볼 수
있고, 「지족문종(知足聞鐘)」, 「화곡심방(花谷尋訪)」, 「화장추색(華臧秋色)」
등에서는 당시 사찰과 서원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송도기
행첩의 14점은 개성 인근의 대부분의 명승지를 담고 있는 개성 경관의 풍
부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2.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고지도에는 해당 지역의 자연환경과 인문 환경에 대한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어 해당 도시의 옛 모습과 역사, 문화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알 수
있다.76) 현재 개성과 관련된 지도는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송도(松
都)」, 여지도(輿地圖)의 「송도」, 광여도(廣輿圖)의 「개성부」, 1872년
지방지도의 하나인 「개성전도(開城全圖)」, 조선지도(朝鮮地圖)의 「개성」,
개성박물관 소장 「개성고지도」와 목판본인 「송경폭원도(松京幅圓圖)」, 송
경광고(松京廣攷)에 있는 「송경성내도(松京城內圖)」와 3편의 「송경폭원도
76) 개성 관련 지도에 대한 일반적 정보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
(http:// e-kyujanggak.snu.ac.kr/sub_index.jsp?ID=GZD)를 참고하였다.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67
<지도 1> 해동지도 송도 <지도 2> 해동지도 송도 만월대
확대
(松京幅圓圖)」, 중경지(中京誌)의 「중경폭원도(中京幅員圖)」·「중경성내
도(中京城內圖)」, 묘도(墓圖)인 「문숙공묘도(文肅公墓圖)」 등 모두 12종이
전하고 있다. 이 지도 가운데 해동지도의77) 「송도」와 같은 몇 종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기도 하다.
해동지도의 「송도」는 채색사본(彩色寫本)으로, 1750년대(영조)에 제
작된 군현지도로, 개성관련 지도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지도 1, 2). 개성 관련 지도 가운데 가장 상세한 지도로 평가되는 이 지도
는 군현지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을 취해, 축척을 무시하고 개성의
77) 海東地圖(규 古大4709-41. 8책, 47.0×30.5cm). 1750년대 초에 국가차원에서 제
작된 회화식 군현지도집이다. 이 지도집에는 조선전도, 도별도, 군현지도 뿐만 아
니라 세계지도, 외국지도, 관방지도 등이 망라되어 있다. 제8책의 「팔도총도」와
제4책의 「서북피아양계전도」는 회화식 대형 전도이며, 나머지 대부분의 지도들은
도지도, 도별 군현지도, 도내 군사적 요충지의 지도 순으로 편집되어있다.
168 역사와 현실 79
자연과 시설물을 표시하고 있다.
이 지도는 개성을 중심으로 동쪽을 위로 하여 작성되었다. 방어시설인
성곽으로 내성(內城), 외성(外城)과 천마산(天磨山)의 대흥산성(大興山城)
을 기준으로 그려져 있으며, 중심지는 송악산(松岳山) 아래 성안이 된다.
성곽에는 성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성안에는 만월대(滿月臺)와 관아가
보이며(지도 2), 관아건물과 성균관(成均館), 관덕정(觀德亭), 여러 서원(書
院)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교통로는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연결되는
성문(城門)들과 고개(峴)의 이름이 자세히 나와 있으며, 특히 하천을 중심
으로 선죽교(善竹橋), 취적교(吹笛橋), 대교(大橋) 등의 교량을 상세히 도로
에 표시하였다. 서울과는 대로(大路)로 연결되었으며 이 길은 평양(平壤)을
거쳐 의주(義州)까지 통하였다. 송악산에 ‘수로연대(水路烟臺)’, ‘육로연대
(陸路烟臺)’로 기록되어 있어 육로와 수로를 통해 봉수가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악산의 국사당봉수는 육로를 통해 온 것이며 성황당봉수는 수
로를 통해 온 것이다.
북쪽의 대흥산성에는 장대(將臺), 중영(中營) 등의 군사시설과 개성의 대
표적 명승인 박연(朴淵), 태안창(泰安倉), 무기고(武器庫)와 같은 창고(倉
庫), 성문의 이름, 여러 사찰들이 그려져 있다. 서쪽에는 여현진(礪峴鎭)이
표시되어 있으며 그 옆에 조운(漕運)이 통하였음을 기록해 두었다. 또한
나무를 그리고 “종수처(種樹處)”라고 표시해 두었다. 송악의 서쪽에는 무
역항이었던 벽란도(碧瀾渡)와 고려말 유신이 숨었다는 두문동(杜門洞), 고
려의 태조현릉(太祖顯陵)이 표기되어 있다. 송악의 동쪽에는 화담서원(花
潭書院)이 보인다.
해동지도의 「송도」 지도에서는 일반 군현지도에서 인접 군현과의 경
계를 자세히 표시하고 있지 않는 것과는 달리 “청색장단지(靑色長湍地)”,
“적색풍덕지(赤色豊德地)”, “황색금천지(黃色金川地)” 등으로 색(色)을 달
리하여 주변지역과의 경계를 표시해주고 있다.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69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과 인근의 성거산(聖居山), 천마산(天磨山)은 임진
북예성남정맥의 경로에 포함되며 이 산들에서 시작되는 이 지도의 모든 하
천은 결국 서해로 들어가게 된다. 지도에는 사천(沙川)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 판문점(板門店) 근처의 판문교(板門橋)가 표시되어 있다.
「송도」 지도에는 202개 항목이나 될 정도로 개성의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지도에는 산·봉우리와 관련된 남산(男山)·미흘산(未訖山)·북
성거(北聖居)·석적산(石積山)·수룡산(秀龍山)·야미산(夜味山)·적덕산
(積德山)·천아산(天鵝山)78)·천수봉(天壽峰)·개성봉(開聖峯)·계봉(鷄
峰)·극락봉(極落峯)·낙월봉(落月峯)·미륵봉(彌勒峰)·백련봉(白蓮峰)·
소청량봉(小淸凉峯)·원효봉(元效峰)·의상봉(儀尙峰)·인달봉(仁達峯)·
일출봉(日出峰)·정광봉(錠光峰)·천마봉(天磨峰)·청원봉(淸原峰)·취적
봉(吹笛峰) 등과 문암(門岩)·조암(槽岩), 고개와 관련한 상항현(上項峴)·
색현(塞峴)·여현(礪峴)·인현(鱗峴)·타현(駞峴) 등 다양한 산과 봉우리
이름이 보인다는 점에서 다른 지도와는 달리 그 상세함을 알 수 있다.
지명으로는 강리(江里)·광정리(光井里)·개성리(開城里)·길상리(吉祥
里)·대조족리(大鳥足里)·발송리(鉢松里)·북정리(北井里)·수우리(修隅
里)·연하동리(烟霞洞里)·옥산리(玉山里)·우석두(隅石豆)·율동리(栗洞
里)·전포리(錢浦里)·조제리(照濟里)·조족리(鳥足里)·태조능리(太祖陵
里)·현화리(玄化里)·금강대동(金剛臺洞)·소약동(所約洞)·왕동(王洞)·
정동촌(井洞村)·현학동(玄鶴洞) 등과 관아 시설인 봉상시(奉常寺)·북창
(北倉)·현화창(玄化倉)·여단(厲壇)과 상아(上衙)·군기(軍器) 등이 보인
다. 또한 사찰인 복령사(福靈寺)·은선암(隱仙菴)과 이외에 고개성현기(古
開城縣基), 인유대(咽唯臺), 나복교(羅伏橋), 포은비(圃隱碑), 창릉(昌陵),
대율당(大栗堂) 등이 이 지도에서만 보인다. 성문과 관련해서는 동대문(東
大門)·소서문(小西門)·수항문(受降門)·태성(胎城) 등과 관방시설인 봉수
78) 海東地圖에 天摩山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誤記로 보인다.
170 역사와 현실 79
관련은 덕적산연대(德積山烟臺)·도라산연대(道羅山烟臺)·수로연대(水路
烟臺)·육로연대(陸路烟臺)·돈대(墩臺) 등이, 포구와 관련한 유천포(柳川
浦)·접주포(接舟浦) 등과 정주해(貞州海) 등은 다른 지도에서 표기되지
않은 정보들이다.
여지도(輿地圖)의 「송도」와79) 광여도(廣輿圖)의 「개성부」는80) 이름
만 다를 뿐 지명이 일치하여 같은 것으로 보이나, 몇 군데에서 약간의 차
이를 보이고 있다. 즉 지도의 제목이 여지도의 경우 ‘송도(松都)’라고 되
어 있는데, 광여도에서는 ‘개성부(開城府)’라고 적혀 있다. 또한 여지도
에는 주기가 있는데, 광여도에는 주기가 없다. 또한 여지도는 광여
도와 달리 지도의 오른쪽 여백에는 도성에서 송도까지 오는데 걸리는 날
짜가 적혀 있으며, 위쪽 여백에는 송도에 대한 여러 이칭(異稱)이 적혀 있
다. 개성부 성곽 안의 만월대(滿月臺)가 축대 형식의 그림으로 그려져 있
는데, 광여도에는 터로만 표시되어 있다. 반면에 위쪽의 대흥산성(大興
山城)의 장대(將臺)가 터의 형태로 표시되어 있지만 광여도에는 이름만
적혀 있다.81)
79) 輿地圖(古4709-68. 26.5cm×19.1cm)는 총 6책으로 구성된 전국 군현지도책으
로, 지도는 364장, 주기는 341장으로 총 70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거의 모든 지도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와
전체적인 구도가 거의 동일하다. 제작 연대도 1730년대 안팎으로 알려져 있는 해
동지도 보다 더 늦은 것으로 추정된다.
80) 廣輿圖(규 古4790-58. 19세기 전반. 36.8×28.6cm). 전체의 구성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81) 일반적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개성부의 읍성과 대흥
산성 등이 다른 지역보다 대축척으로 그려져 있다. 읍성 안에 있는 만월대도 실제
의 지형보다는 풍수적 명당 형국으로 그렸다. 아래쪽에 祖江이라 적혀 있는 한강
과 왼쪽의 예성강이 두 줄의 실선으로 그려진 반면 나머지는 한 줄의 실선으로 그
려져 있다. 예컨대 오른쪽의 洛河와 臨津은 현재의 임진강으로 예성강보다 더 큰
하천임에도 불구하고 한 줄의 실선으로 그려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임진강과 그 왼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71
<지도 3> 여지도 송도 <지도 4> 광여도 개성부
이밖에도 적조사(寂照寺)와 적조암(寂照庵), 감로사(甘露寺)와 감로정(甘
露亭) 등의 명칭과 만월대와 청교역(靑郊驛)의 표시에서 약간이 차이를 보
인다(지도 3·4).
한편, 광여도에서만 보이는 지명과 시설은 다음과 같다. 즉 도라산(道
羅山)·수농산(秀濃山)·영취산(灵鷲山)·체봉산(遞鳳山)·홍현산(洪賢
山)·금산현(金山峴)·작령(鵲嶺, 鵠嶺의 오기)·차일암(遮日岩)·입암(立
岩)·장단천(長湍川)·대천(大川)·하사천(下沙川) 등과 지명인 길수리(吉
水里)·내소릉(內昭陵)·적전리(籍田里)·홍리(弘里)·낙성(落星)·월로동
(月老洞)·마답촌(馬踏村) 등이 보인다. 이외에 연경궁(延慶宮)·괘궁당(掛
弓堂)·대교(大橋)·범사정(泛槎亭)·금강성(金剛城)·국령사(國靈寺)·개
쪽의 下沙川 사이는 대부분 長湍의 땅이었다. 지도에도 읍성 동쪽에 ‘長湍界’와
‘此則長湍’이라 표시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적어두었다. 靑郊驛 아래쪽에는 豊德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1823년(순조 23)에 개성에 합쳐진 고을이다. 그러나 이 시기
경기도 지도에는 풍덕이 독자적인 고을로 표시되어 있다. 장단처럼 개성의 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풍덕의 땅까지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172 역사와 현실 79
<지도 5> 조선지도 개성
성암(開城菴)·일출암(日出菴)·고임거정소거(古林巨井所據)·강감찬고묘
(姜邯贊古墓)·안균(安均古墓)·목은고묘(牧隱古墓)·작제건고묘(作帝建古
墓) 등과 숭양원(崧陽院)·화담서원(花潭書院)·강음진(江陰津)·반남원(潘
南院)·천수원(天壽院)·발소(撥所)·청교역(靑郊驛) 등 시설물의 명칭이
이 지도에서만 보이고 있다.
「조선지도(朝鮮地圖)」는82) 개성읍치를 붉은 색으로 표시하고, 송악산을
중심으로 내성의 일부가 그려져 있다. 성곽을 중심으로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의 궁궐터인 만월대가 표시되어 있다. 성곽 바깥쪽으로는
중요한 산천명이 주로 표시되어 있으며, 서쪽으로 이시포(利示浦), 전포(錢
浦)가 있으며, 전포 아래쪽에 고려 때 가장 번창한 항구였던 벽란도 등의
포구가 표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어조천(語早川), 독현
(禿峴), 이시포(利示浦)란 지
명과 덕물산(德勿山)이 이 지
도에서 처음 보이는데, 덕적
산(德積山)의 다른 이름이다.
형식은 「송경폭원도」와 비슷
하나, 세밀함에 있어서 중
경지나 송경광고의 지도
와는 차이를 보인다(지도 5).
「개성전도」는83) 내성과 나
82) 「朝鮮地圖」 (규 16030, 49.8×38.5cm)는 전라도 56개 고을을 제외한 함경도(23
장)·평안도(42장)·강원도(27장)·황해도(23장)·경기도(33장)·충청도(54장)·
경상도(71장)의 고을이 순서대로 1책에서 7책으로 묶여있는 지도책이다. 이 지도
의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지도책에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1750년에서 1768년 사이
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83) 「開城全圖」(규 10358, 35.8×25.4cm)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시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73
<지도 6> 개성전도
성을 중심으로 도로는 빨간색으로,
물길은 파란색으로 표시하였으며,
만월대는 높게 그려 놓았다. 산과
봉우리는 음산(蔭山)·두석산(豆錫
山)·천태산(天台山)·내원봉(內圓
峰)·무연봉(無蓮峯)·보현봉(普賢
峰) ·동유현(桐踰峴) ·회암(檜
岩)·백석담(白石潭)·백화담(白化
潭)·청석관문(靑石關門)이 새로이
보이고 있으며, 지명과 시설물 가
운데 묵지동리(墨只洞里)·백운동
(白雲洞)·부산동(扶山洞)·강남면
(江南面)·북동면(北東面)·소남면
(小南面) 등과 과 내동대문(內東大門)·빙고(氷庫)·양현고(養賢庫)·현화
창기(玄化倉基)·봉수대(烽燧臺)·대흥진(大興鎭)·배교(盃橋)·당포(唐
浦)·장재(張齋)·김부왕래항처(金簿王來降處)·청향각(淸香閣)84)·만수정
(萬壽亭)·둔광암(鈍光菴)·서적전(西籍田) 등의 명칭이 이 지도에서 처음
보인다(지도 6).
개성박물관 소장 「개성고지도」의 실물은 현재 개성의 고려박물관 내 성
균관 동재(東齋)에 전시되어 있으나, 전체가 소개된 적이 없기 때문에 현재
대 관찬지도 제작사업의 마지막 성과로 평가되는 1872년 지방지도(총 459매)의 하
나이다. 이 때 제작된 지도들은 군현지도뿐만 아니라 營·鎭堡·牧場·山城 등을
그린 지도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한 시기에 제작되어 收合된 지방지도로는 가장 많
은 양을 보유하고 있다. 이전 시기의 지도보다 큰 규격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지
도에 들어있는 정보량은 현재 남아 있는 다른 군현지도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풍부한 편이다.
84) 淸香閣은 都邑의 聽政之所이다(松都續誌 권3, 樓亭).
174 역사와 현실 79
<지도 7> 개성고지도 <지도 8> 개성고지도 시내부분 확대
로서는 분석하기가 어렵다. 다만 필자가 촬영한 것을 바탕으로 검토하면,
회화식 지도로서 개성 내의 가옥과 주요 지명과 시설물 들이 표시되어 있
으며, 제작시기는 19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전의 지도
에서 보이지 않았던 첨성대(瞻星臺)와 오현사(五賢祠) 등과 「개성전도」에
서만 보이는 천태산(天台山), 잠두(蚕頭) 등의 명칭들이 보이고 있어 「개
성전도」가 제작된 시기(1872)를 감안하면 19세기 전후의 것으로 파악된다
(지도 7·8).
한편, 필사본인 송경광고(松京廣攷)에는85) 「송경성내도(松京城內圖)」
85) 松京廣攷(규 古4790-14, 8책, 필사본, 22×18.5cm)는 林孝憲이 1830년대 편찬한
것이다. 1648년(인조 26)에 개성유수 金堉이 편찬한 松都誌, 1757년(영조 33)에
개성유수 吳遂采가 편찬한 松都續誌, 1782년(정조 6)에 개성유수 鄭昌順이 편찬
한 松都誌, 1802년(순조 2)에 金文淳이 개성의 府人과 함께 편찬한 松都續誌
(古 4790-15), 1824년(순조 24)에 金履載가 편찬한 中京誌 등을 참고하여 편찬
한 개성부의 읍지이다.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75
<지도 9> 송경광고 송경성내도 <지도 10> 송경광고 송경폭원도 원도
<지도 11> 송경광고 송경폭원도 병진년 <지도 12> 송경광고 송경폭원도
계미년
와 3편의 「송경폭원도(松京幅圓圖)」로 구성되었다. 「송경폭원도」는 원도
(原圖) 및 병진년(丙辰年, 1796, 정조 20)·계미년(癸未年, 1823, 순조 23)
이후의 개성의 경계 변화를 담은 것이다. 송경광고가 완성된 1830년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에 만들어진 지도로 1796년에는 금천(金川)과 장단
(長湍)의 일부가 개성부로 이속(移屬)되었고, 1832년에는 풍덕(豊德)이 합
속(合屬)된 것을 두 지도에 반영하고 있다. 「송경성내도」는 개성의 나성과
내성을 중심으로 산, 하천, 교량, 성문 등 관방 등에 관한 여러 시설물에
대한 위치를 알게 해 준다. 3편의 「송경폭원도」는 개성의 외곽의 주요 지
명과 물길을 표시했다(지도 9·10·11·12).
176 역사와 현실 79
<지도 13> 중경지 중경성내도 <지도 14> 중경지 중경폭원도
중경지(中京誌)86) 역시 「중경성내도(中京城內圖)」·「중경폭원도(中京
幅員圖)」가 있으며, 「중경성내도」는 송경광고의 「송경성내도」와 같고,
「중경폭원도」는 계미년에 제작된 「송경폭원도」와 동일한 형식으로 지명에
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지도 13·14>).
한편, 또다른 「송경폭원도」87) 역시 위의 그것과 동일한 형식이나 지명에
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강과 고개와 관련된 북성기(北聖岐)·화현(華
峴)·황계치(黃溪峙)·황강(黃江)과 가토미(加土尾)·옥연평(玉輦坪)·황교
평(黃橋坪)·중연(中連)·만가대(萬家垈)·박연리(朴淵里)·대천촌(大川
村)·병전참(餠廛站)·수문통(洙門通)·고풍덕(古豊德) 등과 같은 지명, 신
당포(新堂浦)·홍경포(弘京浦)·첩주포(貼舟浦)·해천포(海天浦) 등 포구,
86) 中京誌(규 古4790-3, 12권 6책, 活字本(木活字), 31.6×20.4 cm)는 金履載의 中
京誌 를 1855년(철종 6)에 趙秉夔가 증보한 것을 趙敬夏가 1881년(고종 18)에 편
찬한 것이다. 서두에는 金堉, 李墩, 嚴緝, 吳遂采, 鄭昌順, 徐有防, 尹塾, 金文淳,
金履載, 徐熹淳, 趙秉夔가 쓴 기존의 序跋을 모아서 수록하고 이어서 趙敬夏의 발
문을 덧붙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해제는 奎章閣韓國本圖書解題 史部 4, 264쪽
을 참고할 것.
87) 「松京幅圓圖」(1826년 이후. 37.0×43.0㎝)는 李燦 소장이었다가 2002년 서울역사
박물관으로 기증되었다.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77
<지도 15> 송경폭원도
강정(江亭)·해정(海亭)·식파정(息波亭)·용호정(龍虎亭) 등의 정자와 도
산원(道山院)·칠성암(七星庵)·해운암(海雲庵)·성등암(聖燈庵)·도선암
(道詵庵)·천황암(天皇庵)·선월사(詵月寺)·지족사(知足寺)·현군사(現君
寺) 등의 사찰 관련 시설물, 그리고 최영신당(崔瑩神堂)88) 등이 새로이 보
인다. 이외에도 토성(土城)이 표기되어 있다. 이 명칭들은 다른 지도에서
표기되지 않은 새로운 명칭들이다(지도 15).
또한 특수지도인 문숙공묘도(文肅公墓圖)는89) 문숙공(文肅公) 권상(權相)
의 묘도(墓圖)이다. 묘도의 목적은 후손들이 지도를 보고 찾아갈 수 있도
록 하고, 묘역의 지형을 잘 알아볼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즉 출발지인 개
성(開城)에서 묘지까지를 그림과 글로 표현하고 있다. 고지도에서 흔히 사
88) 서울대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가운데,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아키바 다카시(秋葉
隆)가 찍은 개성 덕물산 지역 69점의 사진 중 개성 덕물산 장군당과 굿각은 최영
사당으로 추정된다.
89) 「文肅公墓圖」(목판본, 19세기 후기, 24.0×17.0㎝). 李燦 소장이었다가 2002년 서
울역사박물관으로 기증되었다.
178 역사와 현실 79
<지도 16> 문숙공묘도
용되는 방법으로 축척이 다른
2개의 지도를 같은 지도 안에
그리고 있는데, 송경(松京)을
지도의 하단 우측에 작게, 그
리고 만월대(滿月臺)와 오정
문(午正門)을 그 안에 표시하
고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 수
표문으로 나가 서쪽으로 25
리 떨어진 곳에 탄점(灘店)이
있고, 점(店) 앞 왼쪽 소로(小
路)에서 서남쪽으로 5리쯤 되
는 곳에 형하동(炯霞洞) 또는
은행정(銀杏亭)이라고 부르는
곳에 문숙공묘가 위치하고 있
음을 지도 좌하단에 기록하고
있다(지도 16).90)
한편, 개성 관련 지도에서 가장 많은 색인어 항목을 가진 지도는 해동
지도의 「송도」로 202항목, 그 다음으로는 1872년에 제작된 「개성전도」
로 157항이다. 여지도의 「송도」는 129항, 광여도의 「개성부」는 126
항, 「송경폭원도」는 121항, 송도광고의 「송경폭원도(계미이후)」는 97항,
중경지의 「중경폭원도」와 송경광고의 「송경성내도」 68항, 송도광고
의 「송경폭원도(병진이후)」 65항, 「중경성내도」 65항, 송경광고의 「송
경폭원도」는 45항, 조선지도의 「개성」은 33개 항의 순이다. 이를 정리하
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90) 이찬, 1991 한국의 고지도, 범우사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79
<표 1> 조선후기 개성관련 지도에 보이는 지명 및 시설물 일람91)
대분류 중분류 명칭
자연
(164)
山(55)
高頭山·孤雲山·廣德山·君藏山·金山·蘿葍山·男山·
南聖居·大德山·大屯山·德勿山·德積山·道羅山·豆錫
山·馬群山·摩尼山·摩淵山·馬屹山·萬壽山·梅岳山·
文山·未訖山·盤龍山·白龍山·白馬山·寶鳳山·鳳鳴
山·扶蘇山·北聖居·石崇山·石積山·聖居山·松岳山·
秀濃山·秀龍山·首龍山·夜味山·御屛山·如尼山·灵
鷲山·蜈蚣山·五冠山·五鳳山·龍峀山·湧岩山·蔭山·
子男山·積德山·帝釋山·進鳳山·天摩山·天鵝山·天台
山·遞鳳山·洪賢山
峰(30)
開聖峯·鷄峰·國師峯·君子峯·極樂峰·落月峯·內圓
峰·露積峰·蘿月峯·無蓮峯·文殊峰·彌勒峰·白蓮峰·
白峙峯·普賢峰·負兒峯·小淸凉峯·五峯·鰲峰·元效
峰·鷹峯·儀尙峰·仁達峯·日出峰·錠光峰·主峰·甑
峯·天磨峰·天壽峰·淸原峰
嶽(2)·巖(10)
松嶽·松岳 : 鼓岩·門岩·屛巖·山臺巖·日出菴·立岩
·槽岩·遮日岩·蟹岩·檜岩
嶺(3)·峴(29)·踰
(2)·峙(3)·介(1)·
關(1)·岐(1)
鵠岺·鵲嶺·上頂嶺 : 加峴·掛冠峴·口井峴·國淸峴·
金山峴·金峴·蘿葍峴·大蛇峴·都察峴·秃峴·桐踰
峴·舞峴·不朝峴·上頂峴·塞峴·礪峴·梧桐峴·龍峴·
梨峴·鱗峴·長地峴·赤峴·朱雀峴·注波峴·七寶峴· 駞峴·塔峴·虎峴·華峴 : 內馬踰·外馬踰·馬踰峙·熊
峙·黃溪峙·耳古介·靑石關 : 北聖岐
江( 5 ) ·川( 9 ) ·溪
(1)·淵(1)·潭(2)·
井(2)
東江·西江·禮成江·祖江·黃江·長湍川·大川·白川·
分地川·沙川·語早川·烏川·熊川·下沙川 : 鶯溪 : 朴
淵 : 白石潭·白化潭 : 大井·龍井
坪(6)·灘(2)·海(1)
洙門通·加土尾·玉輦坪·黃橋坪·中連·萬家垈 : 擧
灘·猪灘 : 貞州海
행정구획
(71)
里(34)·洞(17)·村
(3)·面(10)·經界(7)
江里·光井里·軍隱里·今開城里·吉祥里·吉水里·內昭
陵·大鳥足里·墨只洞里·朴淵里·鉢松里·北井里·山龍
禿·修隅里·新里·深川里·烟霞洞里·玉山里·外昭陵·
隅石豆·栗洞里·梨浦里·者羅洞里·籍田里·錢浦里·照
濟里·鳥足里·紙洞里·昌陵里·太祖陵里·玄化里·弘京
里·弘里·扝石里·廣明洞·國子洞·金剛臺洞·落星·
180 역사와 현실 79
杜門洞·白冬音·白雲洞·扶山洞·所約洞·鴨潭洞·王
洞·龍仁洞·月老洞·紫霞洞·靑石洞·巴只洞·玄鶴洞 :
大川村·井洞村·馬踏村 : 江南面·南面·大南面·東面
·北東面·北西面·西面·小南面·中西面·淸郊面 : 臨
津·長湍界·白川界·通津界·豊德界·豊德邑·古豊德
시설
(186)
宮闕(6)·官廳(16)
滿月臺·壽昌宮(基)·慶德宮·本宮·延慶宮·穆淸殿·管
理營·訓鍊院·奉常寺·分奉常·上衙·衙·二衙·大平
館·軍器·北倉·氷庫·司倉·泰安倉·玄化倉(基)·社稷
壇·厲壇
家屋(4) 張齋·掛弓堂·大栗堂·淸香閣·
寺(14)·庵(11)
甘露寺·觀音寺·國靈寺·大興寺·福靈寺·詵月寺·靈通
寺·龍泉寺·雲興寺·圓通寺·寂照寺·知足寺·華莊寺·
現君寺 : 開城菴·道詵庵·鈍光菴·文殊菴·聖燈庵·幼
寂菴·隱仙菴·七星庵·逋銑菴·天皇庵·海雲庵
巫俗(4) 三聖堂·如尼堂·祭堂·崔瑩神堂
陵墓(8)
麗祖陵(麗太祖顯陵)·齊陵·昌陵·厚陵·姜邯贊古墓·安
均古墓·牧隱古墓·作帝建古墓
學校·書院(15)
成均館·道山·道山院·道山書院·崇陽·崇陽書院·崧陽
院·崇節·崇節祠·五冠書院·忠烈祠·寒泉祠·花谷院·
花潭書院·養賢庫
城(9)·城門(23)
古南大門·古南門·南大門·南門·內東大門·訥里門·東
大門·東門·保定門·北門·北城門·北小門·西門·西小
門·小西門·水口門·受降門·崇仁門·勝戰門·升贊門·
午正門·進言門·炭峴門
內城·金剛城·外城·大興山城·半月城·山城·永安城·
胎城·土城
關防(14)
德積山烟臺·道羅山烟臺·烽燧·烽燧臺·水路烟臺·陸路
烟臺·墩臺 : 敎場·將臺·制勝堂·中營 : 大興鎭·白峙
鎭·礪峴鎭
樓亭(10)
江亭·觀德亭·君子亭·萬壽亭·泛槎亭·明月亭·逝斯
亭·息波亭·龍虎亭·海亭
臺(4) 萬景臺·萬項臺·咽唯臺·扈輦臺
橋梁(18)
闕門橋·勞軍橋·堂上橋·大橋·羅伏橋·盃橋·兵部橋·
善竹橋·小十川橋·水陸橋·玉粧橋·猪橋·吹笛橋·槖
駞橋·太平橋·坂門橋·楓橋·皮井橋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81
驛院(5) 潘南院·撥所·天壽院(基)·靑郊驛·餠廛站
浦(12)·渡(3)·津(1)
光井浦·唐頭浦·唐浦·東方浦·領井浦·芒浦·昇天浦·
新堂浦·艾浦·魚淸浦·柳川浦·應浦·利示浦·梨浦·錢
浦·貼舟浦·接舟浦·祖江浦·曺頭浦·昌陵浦·海天浦·
弘京浦 : 洛河·碧瀾渡·祖江渡·江陰津
遺蹟(9)
古開城縣基·古林巨井所據·金簿王來降處(羅王所居)·種
樹處·西籍田
碑閣·泣碑·鎭安大君碑閣·圃隱碑
이 가운데 개성 고려박물관 소장 「개성고지도」를 제외한 11종의 지도에
서 개성 관련 지명을 비롯한 각종 시설물 가운데 동일한 명칭의 중복을 제
외하면 모두 421항목이다. 이 가운데, 자연(164)과 관련해서 산(山) 55,92)
봉(峯) 30, 암(巖) 12[송악 포함 2], 영(嶺)·현(峴) 40[踰(2)·峙(3)·介·
關·岐(1) 포함), 강(江)·천(川) 20(溪·淵·潭·井 포함], 평(坪) 6·탄
(灘) 2·해(海) 1개 등의 순이다.
행정(71)과 관련해서는 리(34)·동(17)·촌(3)·면(10)·경계(7)이며, 시
설(186)과 관련해서는 궁궐(6)·관청(16), 가옥(4), 사(14)·암(11), 무속
(4), 릉묘(8), 학교·서원(15), 성(9)·성문(23), 관방 시설(14), 루정(10),
대(臺)(4), 교량(18),93) 역원(5), 포(浦)(12)·도(渡)(3)·진(津)(1), 유적(遺
蹟)(9) 등의 순이다.94)
91) 이 표는 현재 숙명여대에서 진행중인 ‘한국사상 개경(개성) 관련 기초자료 정리와
경관연구’의 DB화를 위한 분류체계를 따른 것이다.
92) 산 가운데 松嶽山·扶蘇山 龍峀山·南山·蜈山(蜈蚣山)과 鵠嶺·德巖 등은 이미
고려 때부터 존재한 것들이다(신안식, 2010 「고려시기 개경 都城의 범위와 이용」 한국중세사연구 28, <표 5·6> 송악산과 도내의 산, 270~271쪽 참조).
93) 다리 가운데 橐駝橋·善竹橋·十川橋·猪橋 등은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이름들이
다(신안식, 2010 앞 논문, 279쪽 참조).
94) 1911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朝鮮地誌資料의 개성 지역의 지리, 경제, 군사, 문화
관련 빈도수를 검토하면 표와 같다. 이 책에 기재된 항목이 모두 지도에 반영된
182 역사와 현실 79
이를 보면, 대체로 개성 관련 지도에는 자연 관련 항목들이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산(55)과 봉우리(30), 고개마루(40), 강을 포함한 하천이 많
은 점은 개성의 입지적 조건을 말해 준다. 이러한 점은 개성의 자연적 특
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95) 또한 행정과 관련해서 마을 이름이 54개 항
목이 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것이다. 시설에서는 다리(18), 포구(16), 사
찰(15) 등의 순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지도에 표기된 고려시대 유적은 송악산·부소산·용수산·남
산·오산(오공산)과 곡령·덕암과 궁터인 만월대·수창궁(기), 왕릉인 여조
릉(여태조현릉)·작제건(作帝建) 고묘(古墓), 그리고 개인 무덤인 강감찬
고묘96)·목은 고묘97)·안균 고묘 등이 보이며, 고려 때부터 계속 이름이 유
것은 아니지만, 개성 지역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다. 山과 谷, 嶺峙峴 野坪, 洞里
村의 이름이 가장 많이 파악되어 있다. 이 표에는 지리: 山(61)·谷(59)·嶺峙峴
(60)·野坪(55)·江川(15)·溪澗((12)·池沼(9)·洞里村(41) 경제:市場(1)·津(1)·
浦口(13)·驛院(1)·橋梁(0)·酒幕(12)·堤堰(3)·洑(13)·土産(24)·社(1) 군사:城
(5)·關防(0)·鎭(1) 문화:寺刹(4)·古蹟(32) 등 순이다(경기 땅이름의 참 모습‒
≪朝鮮地誌≫ 자료 경기도편, 경기문화재단, 583쪽). 그러나 교량과 관방시설이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는 점과 사찰이 4개만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다.
95) 근대 이전의 개성 유적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지도는, 開城① 특수지형도, 2만 5천
분의 1, 1918, 朝鮮總督府(경인문화사 영인) : 開城郡面誌(1927, 開城圖書館) 지도
7장 : 高裕燮, 1946 松都古蹟(1977 松都의 古蹟 悅話堂)내 송도의 유적 지도가
참고된다.
96) 현재 강감찬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조선시대에 失傳되었
다가 문중에서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 하던 끝에 ‘姜邯贊’이란 이름이 쓰여진
誌石을 발견하고,1964년 분묘를 만들고 1967년 비를 건립하였다.忠賢祠가 건립
되어 있다.
97) 현재 이색의 묘소는 서천군 시도기념물 제89호로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산
1-1에 위치해 있다. 1611년에 賜額을 받은 文獻書院이 있다. 河崙이 撰한 李穡神
道碑에는 驪江에서 避暑하다가 1396년(태조 5) 69세에 졸하여 10월에 아들 種善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83
지된 탁타교(橐駝橋)·선죽교(善竹橋)·십천교(十川橋)·저교(猪橋) 등도
남아 있다. 이외에 천수원(天壽院) 터 역시 지도에 보인다. 그러나 이는 매
우 적은 수이다. 이러한 점은 이미 조선후기에 고려의 유적은 거의 사라졌
거나,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맺음말
이 글은 조선후기 회화·지도 자료를 통해 개성의 유적과 경관에 대한
정보를 소개하고. 그 각각에 담긴 정보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 것
이다. 이는 사라진 개성의 옛 모습의 복원과 아카이브의 DB화를 위한 준
비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개성의 옛 모습은 각종 문헌자료를 통해 유추해
볼 수도 있지만, 조선후기 개성 관련 각종 지도와 회화 자료, 일제 때 조선
고적 조사사업을 통해 촬영된 유리건판, 근대 사진엽서, 그리고 각종 개인
사진자료에서도 찾을 수 있다.
현재 파악된 개성 관련 회화는 12(29)종, 지도는 12종이다. 개성 관련
12종 29점의 그림들은 대개 계회도(契會圖) 형식(5)이며, 개성 관련 회화
자료를 통해 보이는 경관은 대체로 천마산·성거산·오관산 일대의 자연
경관을 주 대상으로 하였다. 특히 개성의 대표적인 명승지인 박연폭포(7)
가 주 대상이 되었다. 작자미상의 송도사장원계회도병(松都四壯元契會圖
屛)과 강세황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김
홍도의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나 송도사장원계회도병(松都四壯元
契會圖屛) 의 <만월회고(滿月懷古)>는 페허로 변한 고려 궁궐의 석축 부
재의 변화 모습을 엿볼 수 있고, <지족문종(知足聞鐘)>, <화곡심방(花谷尋
등이 棺을 모시고 韓州(한산)로 돌아와 11월 갑인일에 加智原에 장사하였다.
184 역사와 현실 79
訪)>, <화장추색(華臧秋色)> 등에서는 당시 사찰과 서원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한편, 현재 개성과 관련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송도(松都)」 등 12
종 지도에는 시기를 달리하면서 나타나는 지명의 변천이나, 이미 사라진
유적의 터와 새로운 건축물들의 변화 모습을 읽어낼 수 있었다. 특히 해
동지도의 「송도」 지도에는 다양한 자연·행정 관련 항목들이 드러났다.
이러한 점은 개성의 자연지리적, 입지적 조건을 말해 준다.
또한 지도에 표기된 고려시대 유적은 송악산·부소산·용수산·남산·
오산(오공산)과 곡령·덕암과 궁터인 만월대·수창궁(기), 왕릉인 여조릉
(여태조현릉)·작제건(作帝建) 고묘(古墓), 그리고 개인 무덤인 강감찬 고
묘·목은 고묘·안균 고묘 등이 보이며, 고려 때부터 계속 이름이 유지된
탁타교(橐駝橋)·선죽교(善竹橋)·십천교(十川橋)·저교(猪橋) 등도 남아
있다. 이외에 천수원(天壽院) 터 역시 지도에 보인다. 그러나 이는 매우 적
은 수이다. 이러한 점은 이미 조선후기에 고려의 유적은 거의 사라졌거나,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개성의 수많은 아카이브를 어떻게 정리
활용할 것인가? 개성 관련 영상 자료의 아카이브는 이제 시작이다. 개성
관련 회화와 지도, 사진 자료의 분류 체계가 우선 선행되어야 하며, 검색을
위한 메타 데이터 항목을 풍부하게 해서 사용자들이 자기가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우선 필요한 일이다.
무너진 탑과 폐허로 변한 사찰,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수 많은 왕릉
들, 언제 변용했는지 모르는 원형을 잃은 건축물들, 지금 남아있는 사진속
에 고스란히 복원을 기다리는 개성의 유적은 사진 아카이브의 축적과 활용
에 달려 있다. 이산의 아픔을 가진 남개원 탑과 현화사 석등 처럼, 사라진
연복사 중창비가98)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하
98) 연복사 중창비는 개성의 연복사에 있던 것을 1900~1910년경에 용산철도 구락부로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85
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다.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
임(KRF-2008-322-A00012).
투고일자 : 2011. 2. 11 심사일자 : 2011. 2. 17 게재확정일자 : 2011. 3. 7
주 제 어 : 개경·개성·유적·경관·회화·지도
옮겨 놓았는데 현재는 소재불명이다(이 비에 대한 사항과 사진과 도판해설은 국립
문화재연구소, 1997 북한문화재해설집 I, 199~20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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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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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http://e-kyujanggak.snu.ac.kr/sub_index.jsp?
ID=GZD
조선후기 회화와 지도에 기록된 개성의 유적과 경관 187
<Abstract>
Historical Vestiges and the Overall Landscape of the Gae’seong
region, described and portrayed in pictures and maps, during
the latter half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Hong, Young-eui
This article examines how the historical vestiges and the overall landscape of
the Gae'seong region were described and portrayed in paintings and maps that
were produced during the latter half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The old
figures of Gae'seong can be extracted from recorded materials, yet a huge
collection of illustrations, portrayals, maps, as well as other more special items
such as photographic images from the Gelatin Dry-glass plates(that had been
crea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surveys of the Joseon historical
sites) or modern-style photo postcards and other personal photographs, can be
very helpful in extrapolating the general features of this region. There are
12(27) types of illustrations and 12 types of maps currently remaining. They are
all important data texts that could help us reconstruct the figures of the late
Gae'gyeong capital, and trace the changes that were imposed upon it. They
should all be digitalized and rendered into a specific form of database.
Keyword : Gae'gyeong(開京), Gae'seong(開城), remains, landscape, paintings,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