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
황제는 성 아래를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성 아래 막사에 진을 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내려 보았다.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낸 아들놈은 조 장군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드님께서 조 장군을 현혹시키려 하는 모양이옵니다."
유이리는 살며시 황제의 심기를 자극했고, 이는 큰 효과를 나타냈다.
물론 조춘수 장군이 이영신의 말에 넘어갈 위인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반역의 무리로 찍힌 이영신을 바라보는 황제에게 분노를 추가시키기 위하 요건으로는 차고도 넘쳤다.
"네 이놈. 감히 아비를 해하려한 후안무치한 놈. 네놈이 그러고도 살아남기를 바랐더냐?"
황제의 목소리가 새벽바람을 타고 산을 쩌렁쩌렁 울리자 8황자군은 혼란에 휩싸였다. 자신들은 황제를 시해한 역적의 무리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격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반역의 무리는 기본으로 9족이 멸한다. 아무리 평 병사라 하더라도 3족이 씨를 말린다. 순식간에 반역도의 무리로 몰리게 된 병사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때 다시 선양요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병사들을 비롯한 8황자군을 혼란에서 건저 주었다.
"황제폐하께서는 이 모든 일이 이영신의 주도하에 일어났음을 알고 계신다. 또한 이에 가담한 모든 이들이 역도 이영신의 꾀임에 넘어간 것도 이해를 하셨다. 때문에 단순 가담한 병사들은 순순히 항복을 할 경우 죄를 묻지 않는다 하셨다. 항복하고자 하는 자들은 무기와 투구를 버리고 항복하라."
선양요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8황자에 가담했던 병사들에게 선택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결정을 내려놓은 선택에 불과했다.
10일간의 공성전으로 지칠 대로 지친 있어, 조춘수 장군의 이만 기병을 상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사형선고가 내려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이대로 대항했다가는 역적의 무리로 몰리게 된다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병사들은 투구를 벗고 창칼을 버렸다.
그러한 병사들의 모습을 보는 이영신의 눈에는 불꽃이 일었다.
거의 손에 들어온 옥좌가 허무하게 사라져 갔다.
조춘수 장군은 창을 들어 이영신을 겨누었다.
"쓸 대 없는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시오."
최후의 자존심을 흔드는 조 장군의 말. 이영신은 고개를 들어 슬쩍 선양의 성벽을 바라보다가 조 장군을 노려보았다.
"유감이군. 이 힘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순간 이영신의 곁에 있던 묵갑의 거한들이 번개같이 움직이며 조춘수 장군에게 달려들었다.
"끄악!"
조 장군의 옆을 호위하던 부장이 조 장군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묵감 거한의 일격에 허무하게 쓰러졌다.
주변에 부하들은 많았지만, 조 장군을 호위할 병사는 적었다. 조장군의 생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
이를 확인한 이영신은 옷소매에 손을 넣었다. 옷소매에 들어갔다 나온 손에는 수많은 병들이 들려 있었다.
이영신은 그 병들을 사방으로 뿌렸다.
바닥에 떨어진 병들은 산산히 깨어져 나갔다. 깨어진 병에서는 이상한 액체가 나와 대지로 스며들었고, 일부는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액체가 스며든 대지에서는 사람의 형상을 했으나 사람이 아닌 것들이 대지를 뚫고 올라왔으며, 병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기묘한 형상을 그리며 뭉쳐나갔다.
"으악!"
"컥!"
그리고 그 괴물들에 의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성 아래서 벌어지는 일은 성벽 위에서도 모두 목격이 가능했다. 기괴한 사술에 의한 학살. 성에 있는 모든 이들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특히나 유이리의 분노는 더욱 컸다.
유이리는 성문 위로 향하며 오른손을 휘저었다.
<끼에엑!>
그러자 황제를 향해 돌진해 오던 검은 그림자가 기괴한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천천히 성문위로 향하며 신성력을 갈무리 하던 유이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천천히 처리를 한다면 저 정도의 언데드는 이들의 힘으로도 처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피해자가 속출할 것이다. 특히나 저들은 저러한 언데드의 처리법을 알지 못하는 고로, 피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 자명했다.
성문위에 올라선 유이리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모든 싸움의 인도자여, 그대 승리를 향한 빛이여.
부정한 모든 것을 배재하시고, 성스러운 영광을 내리소서.
그대 위대한 힘으로 모든 마를 물리치소서.
성벽위에서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 소리.
은쟁반 위에 옥구슬이 굴러간다는 표현에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모든 이들의 시선은 유이리에게로 향했다. 물론 이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많았다. 전쟁터. 그것도 한참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서 유이리가 한 행동은 칭찬받을 수 있는 행동과는 거리가 먼 것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유이리를 향한 질책을 내뱉지 못했다.
"꾸에엑!"
<끼에에에엑!>
펑!
팍!!
선양요새를 향해 다가오고, 8황자의 진형에서 학살을 일으키던 강시들과 괴 그림자들이 괴성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기 시작했다.
이 놀라운 광경에 병사들은 물론이요, 무림인들 역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미타불. 이…이런 굉장한 음공(音功)이라니……. 과연 천하제일가의 며느리답습니다."
유이리의 노래를 타고 퍼져 나가는 성스러운 기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소림의 무승 원무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원무는 몸을 돌려 다른 소림제자들에게 뭐라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능력까지 보여준 이상 유이리의 말을 부정할 명분이 없었다.
유이리의 노래에 언데드들이 소멸해 나가자 경악한 사람은 또 있었다. 8황자 이영신. 그는 마지막 모든 것을 동원해 만들어낸 연강시와 사령시(邪靈屍). 그것들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사리 무너져 내렸다.
쿵! 꽈당!!
또 다른 쪽 역시 이영신의 인상을 구겨지게 만들었다. 조 장군에게 달려들던 철갑강시 두기가 바닥에 내 팽개쳐진 것이다. 군부에서 철갑강시를 막아낼 무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이영신의 놀라움은 컸다. 그러나 철갑강시를 막아낸 자들의 정체를 알게 된 이영신은 인상을 찌푸렸다.
각각 검과 도를 든 두 늙은이. 검황과 도왕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무림 최고수가 철갑강시로부터 조춘수 장군을 지키고 있었다.
"빌어먹을. 언제부터 무림인들이 황실의 일에 개입을 했는가? 관과 무림의 상호 불가침은 말뿐인 것이었나?"
이영신은 검황과 도왕을 노려보며 절규하듯 외쳤다. 그러나 두 노인은 안면가득 미소를 띄며 이영신을 바라보았다.
"노부는 황실의 일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아끼던 손주의 복수를 하는 것일 뿐."
"그리고 무림의 평화를 망가트린 놈들에 대한 응징이기도 하지."
검황의 시선은 이영신의 뒤에서 분전을 하고 있는 암각대와 적사궁대에게로 향했다. 그제서야 이영신은 자신이 벌집을 건드렸음을 알았다.
"자. 그럼 이 노부가 네놈의 목을 쳐야 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이해할 리가 없다. 그리고 설사 이해했다 치더라도 순순히 목을 내줄 수는 없는 일.
철갑강시가 검황과 도왕에게 달려듬과 동시에 이영신은 흑운 백운과 함께 몸을 날렸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오. 본관이야말로 구원이 많이 늦었소."
이영신이 도주를 한 후, 대부분의 8황자군은 항복을 했다.
선양요새의 입구에서 조춘수 장군과 선양요새의 수비대장이 서로의 공적을 치하했다.
"그건 그렇고, 황제폐하의 상세는 어떠하신가?"
"그것이……."
조 장군의 말에 선양의 수비대장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한 그의 위기를 유이리가 구해주었다.
"그리 좋지는 못합니다. 제가 힘을 써보았지만, 상세의 진행을 늦춘 것에 불과합니다."
"언니 그럼 할아버님은?"
조춘수 장군의 옆에서 자인공주 수린이 나서며 유이리에게 물었다.
유이리는 이수린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나라 해도 무리야. 앞으로 길어야 반년. 짧으면 한 달 정도."
유이리의 입에서 나온 선고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선양의 수비병들은 모르지만, 다른 이들은 의선과 버금간다는 유이리의 실력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선언은 곧 황제의 죽음선언과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군을 동원하실 수 있으셨습니까?"
가라앉은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곽명신이 나섰다. 이영신 역시 증원이 있는 것을 두려워해 사방에 간자를 풀어놨을 것이 분명했다. 그 간자의 눈을 피해, 이만이나 되는 기병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놀랍다는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조 장군은 곽명신의 물음에 미소를 띄었다.
"한 소저의 도움이 컸소이다."
조 장군은 옆으로 물러나며 한 소녀를 앞으로 내세웠다. 순간 유이리는 놀라 말문을 잇지 못했다.
"연? 연이니?"
"언니…."
"연이 너 목소리가……."
"언니……."
유이리는 연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조 장군은 재회의 정을 나누는 두 자매를 바라보며 설명을 했다.
"적의 간자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병력을 나누고 접근을 하던 도중에 저 소저가 나타나 도움을 주더이다. 저 소저의 도움으로 적들의 간자를 모두 제거하고, 쉽사리 길을 뚫을 수 있었소이다. 만인 저 소저의 도움이 없었다면, 적들에게 움직임이 발각당하거나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것이외다."
조장군의 설명에 무림인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어디서 뭘 했어? 언니에게 연락한번 줄 여유도 없었니? 너마저 잃은 줄 알고 언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리 언니에게 가 있었어요. 연락을 드리지 못한 것은 죄송해요. 하지만, 상민 오라버니의 원수를 갚는 길은 이것밖에 없었어요."
"괜찮아. 언니야 말로 미안해. 나 때문에 고생했지?"
"아니요. 어차피 제가 가야 할 길이었던 걸요. 괜찮아요. 하지만 그보다 어서 원수를 쫒아야지요."
"그래."
유이리는 끌어안았던 연을 놓아주며 상욱을 돌아보았다.
유이리의 시선을 받은 상욱은 조 장군을 바라보며 포권을 쥐었다.
"지금부터 8황자 이영신, 아니 역적 이영신은 무림공적으로 선포되며, 무림의 규정에 의해 처단하겠습니다."
조 장군 입장에서는 입맛이 쓴 일이지만, 빚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울 수만도 없었다. 거기에 이미 황태자에게서부터 지시를 받은 이상 그 명에 따라야 했다.
"알았소. 다만, 소장과 이수린 공주님이 동행을 하겠소."
조춘수 장군의 말은 예정에 없던 것이기에 상욱의 인상이 구겨졌다.
"우리가 대협들의 복수를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오. 다만 작은 숙부. 아니 역적이 확실히 척살되는지에 대한 공증인이며, 대협들의 복수 후 역적의 목을 베어가기만 할 것이니 걱정은 하지 마시오."
이수린 공주는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상욱에게 설명했다.
이수린 공주의 납득할 수 있는 설명에 상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이 되었으면 서두릅시다. 각 문파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천라지망이라고는 하지만, 확실히 막아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니까."
"그렇군. 그 빌어먹을 놈의 목을 베는 일이 아직 남아 있었어."
상욱 역시 곽명신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크윽! 이게 어찌된 일이지?"
8황자 이영신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경악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도주하는 것을 방치에 가깝게 바라보고 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주변에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으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측했다. 그리고 그 방심이야 말로 자신이 몸을 피할 수 있는 최후의 희망으로 생각했다.
주변 어디서든 끌어낼 수 있는 불사의 전사들만 있다면 천라지망을 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확신이었다. 비록 불에는 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거야 공성전 때의 이야기고, 숲에서는 불을 사용할 수 없다. 결국 난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충분히 자신의 위력을 백분 발휘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천라지망을 펼치는 무림인들은 활시와 연강시, 백골병을 향해 이상한 액체를 던졌고, 그 액에 닿은 불사의 전사들은 불사(不死)라는 말이 무색하게 시리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녹아내렸다.
"아마도 당가에서 개발한 신독(新毒)인 듯 합니다."
여타 무림인들이 시선을 끌면 측면이나 배후에서 당가의 무림인들이 나타나 연강시들의 몸에 액체를 뿌리고 사라지는 것을 반복했다. 시체를 녹여버리는 독. 물론 화골산(化骨散)등 시체의 부패를 촉진시키는 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천당가의 고수로 보이는 이들이 사용하는 것은 그런 것들과는 달랐다.
"망할 놈들."
하지만 천리지망을 형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무림인들은 묘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움직이며, 움직임을 제약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이영신은 주변을 신변보호를 위해 연강시와 활시들을 일으켜 세웠고, 지리한 공방을 삼일 밤낮동안 반복하면서 이영신은 점차 지쳐갔다.
"어떻게든 뚫어야 한다. 이곳을 벗어나면,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영신은 스스로를 달랬다.
비록 대업을 일으킬 기회와 힘을 놓쳤지만, 자신의 근원적인 힘과 충실한 흑운과 백운은 건재했다. 이 힘만 있다면 얼마든지 재기를 노릴 수 있었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당신의 운명은 여기서 끝. 마제린의 뜻에 따라 당신을 처단하겠습니다."
짖은 어둠을 가르며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영신의 귀를 자극했다.
이영신은 시선을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장삼을 입은 미인이 여러 무림인들과 함께 산맥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외에도 사방에서 백 수십의 무림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영신은 신음을 삼켰다. 그간 무림인들의 움직임은 이들을 기다리기 위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크윽! 나의 명에 따를라 연강시여."
이영신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강시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유이리가 이를 방관하질 않았다.
"전능하신 마제린의 이름으로 명한다. 사자에게 편안한 안식을(Turn Undead)."
대지를 뚫고 일어서려던 언데드들은 유이리의 터닝에 의해 다시 방해받지 않는 안식을 위해 잠들었다.
이영신을 포위한 일행들 중 세 명의 무림인이 산기슭을 타고 내려왔다.
"비록 무림 공적이지만, 적어도 싸우다 죽을 수 있게 해주지."
이현진은 검을 뽑아들고 백운을 향해 겨눴다.
"아마도 나와는 안면이 있을 거다. 네놈의 음모로 인해 죽은 처남을 대신해서 너를 처단한다."
흑운의 앞에 선 곽명신의 청랑도가 예기를 발했다.
흑운과 백운은 각각의 상대를 노려보며 천천히 이영신으로부터 멀어졌다.
만만치 않은 상대. 잘못했다가는 이영신을 지키기는커녕, 위험에 빠지게 할 우려가 높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흑운과 백운이 곽명신과 이현진과 전투에 들어가자 남궁상욱은 천천히 이영신에게 다가갔다.
"긴말은 필요 없겠지. 동생의 혈채를 받아내겠다."
상욱의 검집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검이 뽑혀져 나왔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상욱을 지켜보던 이영신의 안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혈채를 받아내겠다? 지금 내게서 혈채를 받아내겠다? 나야말로 빚을 받아내야겠군. 감히 짐의 대업을 방해한 죄를 말이야. 짐을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나본데, 그것이 크나큰 착각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말을 마친 이영신은 허리춤에서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구슬을 꺼냈다.
유이리가 예측한 그대로의 움직임. 상욱은 그러한 이영신의 움직임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영신은 들어올린 구슬을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내리쳤다.
구슬이 깨어지면서 솟아 오른 검은 기운은 이영신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면서 이영신의 몸에 큰 변화가 생겼다.
검붉게 변한 근육은 터져나갈 듯 부풀어 올랐고, 덩치는 더욱 커져,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이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처럼 보일 지경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온몸에서 뿜어져 검은 살기는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일백의 무림인들을 위축시켰다.
그러나 상욱은 묵묵히 그 검은 살기를 받아 넘겼다.
유이리가 몸에 걸어준 힘의 영향으로 이영신이 뿜어내는 힘은 아무런 효력을 발위하지 못했다.
이영신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상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매우 평범하기 그지없는 공격. 그러나 그 힘과 속도는 결코 경시할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일격에 상욱의 몸을 동강내어버리려는 듯 위력적인 공격이 상욱을 향해 날아 들었다. 그러나 상욱은 왼발을 뒤로 한발 빼는 것으로 이영신의 공격을 흘렸다.
상욱의 몸을 스치듯 흘러 내려간 공격은 대지를 가격했고, 검은 땅속으로 깊이 쑤셔 박혔다.
순간적으로 드러난 허점. 상욱의 검과 각이 이영신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깡! 팍!
그러나 상욱의 검은 이영신의 몸에 아무런 해를 가하지 못했다.
아무리 마신의 숙주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일단은 마신의 힘을 얻은 자. 그런 그에게 비록 미스릴제에 한껏 축성을 받은 검이라고는 하지만, 마법검도 아닌 평범한 검에 몸이 상할 리는 만무했다.
"크하하하. 봤느냐?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천하에 아무도 없다."
이영신을 포위하고 있던 무림인들은 상상이상으로 강한 힘과, 도검불침의 위용을 보이는 이영신의 무위에 신음을 삼켰다.
그러나 정작 이영신을 상대하는 상욱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마신 드제프."
"예?"
"하지만 역시 단순한 숙주가 되었을 뿐이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유이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휴렌대륙에서 악명을 떨쳤던 마신 드제프. 그가 왜 이런 곳에 봉인되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분명 마신 드제프의 기운이 분명했다.
완벽하지 않은 봉인. 모든 것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봉인의 해제는 정상적인 힘의 십분지 일, 아니 그 이하의 힘만을 사용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유이리가 알아본 바로는 예상한대로 각 문파의 보물 중에 마신의 봉인이 있었다.
다섯 개의 봉인 중에 이영신의 손에 들어간 것은 단지 하나. 남은 봉인은 유이리의 결계아래 안전하게 보관되었다.
완전하지 않은 봉인의 해제는 양날의 검. 때문에 유이리는 상욱에게 말해 이영신이 봉인을 해제하려 할 경우 그냥 방관하도록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다.
이영신이 봉인을 해제한 것은 힘을 얻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유이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것은 일시적인 결과에 불과했다. 아니 오히려 이영신의 발목을 잡는 거대한 족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설사 완벽하게 봉인이 해제되어 완벽한 마신의 힘을 얻는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았다. 오히려 완벽하게 마신화가 되면 될 수록 상대하기가 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설픈 마신의 숙주가 되어버린 까닭에 남편인 상욱이 쓸 대 없는 수고를 하게 되어 버렸다.
'뭐. 전자의 경우라면 상공께서 납득을 하지 못하셨을 가능성이 높지.'
유이리는 빙아를 돌아보았다.
"빙아야 각 위치에 신호를 보내."
"예."
빙아가 신호를 보내는 것을 확인한 유이리는 대지에 창을 꽂고 신성력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이영신을 포위하고 있던 포위망에서 다섯 개의 빛줄기가 솟아올랐다.
소림, 무당, 아미, 곤륜 그리고 천마신교. 유이리를 시작으로 한 6개의 빛줄기는 서로를 연결하며 육망성의 결계를 형성했다.
"컥! 이… 이게 뭐냐?"
완벽한 마제린의 힘. 모른 마(魔)를 쓰러트리는 전쟁의 여신의 힘은 강한 결계가 되어 마신의 숙주가 되어버린 이영신의 몸을 휘어 감았다.
상욱과 검을 주고받던 이영신은 온몸을 휘감던 기운이 모두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마치 내공을 모두 잃어버린 듯 공허함에 휩싸였다.
순간 상욱의 검이 이영신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도검불침의 몸. 그대로 검을 허용해도 문제될 것이 없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 이영신은 팔을 들어 상욱의 검을 막았다.
서걱! 치이익!
"끄악!"
이영신은 상욱의 검을 막은 팔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이영신은 경악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팔에는 선명한 검상과 그 주변으로 짖은 화상자국이 남아 있었다.
"네… 네놈. 무슨 사술을 부린 것이냐?"
있을 수 없는 일. 절대로 상처를 받을 수 없는 자신의 몸에 깊은 상처를 입힌 것으로도 모자라, 그 주변이 타들어 가는 작금의 사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욱은 그러한 이영신의 매도에도 얼굴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스스로가 사술을 부리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모든 것이 사술로 보이는 모양이군. 적어도 고통을 당하는 것 같으니 다행이야. 아주 잘되었어."
상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영신을 노려보았다.
인간의 연약한 몸으로는 마신의 마력을 감당하지 못한다. 때문에 마신의 숙주가 되면서 이영신의 몸은 급격하게 언데드화가 되었다. 마치 리치(Lich)나 데스나이트(Death Knight)와 같은 살아 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몸. 하지만 리치나 데스나이트와 같은 언데드와는 다르게 마신의 마력으로 감싸인 이영신의 몸은 비록 언데드지만, 신(神)에 가까운 육체가 되었던 것이다.
유이리의 결계에 의해 마신의 힘이 사라져 버리자, 단순이 언데드화가 된 육체만이 남은 상황. 비록 언데드의 육체가 인간에 비해 강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도 상대에 따라 다른 법.
만일 상욱이 들고 있는 검이 미스릴의 검이 아니라면, 마제린의 고위 사제인 유이리의 축성을 받은 검이 아니라면 이영신은 그저 가벼운 검상 정도만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욱의 검은 유이리의 창과 함께 대(對) 언데드용 최강의 무기였던 것이다.
쉭! 치이이익!
"끄아악!"
또다시 일격을 허용하고서야 사태가 파악이 된 이영신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상욱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영신은 또다시 상욱의 일검을 허용하며 바닥을 굴렀다.
"크윽!"
이영신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도주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사람, 또는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 그러나 그 어디에도 빈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흑운과 백운은 각각 곽명신과 이현진에게 붙잡힌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고, 사방에 펼쳐진 포위망은 일말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사 빈틈을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눈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남궁상욱이 과연 그 빈틈을 파고들만한 여유를 줄지도 의문이었다.
탁! 치지직!!
"끄악!"
상욱의 검을 피해 몸을 날리던 이영신은 허공에 몸이 걸리는 순간 상욱의 검에 당했던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며 바닥을 굴렀다.
"이게 대체……."
몸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걸리는 듯한 느낌. 너무도 황당한 상황에 이영신은 어이가 없었지만, 오래 생각할 여유를 상욱은 주지 않았다.
휙!
챙! 채챙! 챙!
힘도 속도도, 처음과는 너무도 떨어졌다. 평상시와 비교를 하면 나름대로 강해진 것임에는 분명했지만, 처음 힘을 얻었을 때와 비교를 하면 매우 형편없을 정도.
자연 상욱의 속도와 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고, 그에 비례해서 몸의 상처와 고통은 점점 늘어갔다.
상욱은 일격에 이영신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었다. 이영신의 현재 기량이라면 그의 목을 날리는데 까지는 한 호흡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하지 않았다. 그에게 처절한 고통과 절망을 주고 싶었다.
이러한 상욱의 여유가 이영신에게는 틈을 만들어 주었다.
이영신은 상욱과 검을 나누며 자신의 몸의 변화를 거슬러 올라갔다.
힘이 생기고, 그 힘이 사라지는 순간. 그리고 답을 찾아냈다. 검은 장삼의 계집이 어떤 짓을 벌이고 난 후로 힘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영신은 힐끔 유이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의 위기를 타파할 방법을 찾았다.
"여유가 있나보군. 다른 곳을 살필 여유도 있고."
상욱은 유이리를 힐끔 살피는 이영신에게 검상을 하나 늘려주며 압박했다.
"네놈의 마누라냐?"
이영신은 계책을 사용하기 위한 여유를 벌기 위해 상욱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상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네놈에게는 과분해 보이기는 하지만, 내 인심을 써주지. 적어도 네놈과 같은 시간에 지옥에 떨어트려주는 인심을 말이야."
"웃기는군. 지옥에 떨어질 것은 내가 아니라 네놈이다. 걱정하지 말도록, 유언장은 대필을 해줄 테니까."
상욱은 이영신 농담을 받아줄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글쎄. 과연 어떻게 될지. 하늘은 둘이 아니니까 말이야."
이영신은 힘겹게 상욱의 검을 막으며 외쳤다.
상욱은 이영신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마지막 외침은 자신이 들으라 하는 말은 아닌 듯 했다.
"꺄악!"
그때 상욱의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유이리의 등 뒤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자인공주 이수린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유이리의 등에 꽂은 것이다.
"유매!"
"언니!"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고, 모두들 싸움에 집중해 있던 터라 그 누구도 이수린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다.
"이 계집이!"
"빙아야 멈춰! 쿨럭!"
빙아는 빙도를 뽑아들고 이수린의 목을 베려 했다. 하지만 유이리는 각혈을 하면서까지 이를 제지했다.
이지를 상실한 눈. 유이리는 이수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파악이 되었다.
"전능하신 마제린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당신의 사악한 기운에 사로잡혀 있는 어린양을 어둠의 기운으로부터 구원하소서. 저주의 해제(Remove Curse)."
유이리의 몸에서 흘러나온 밝은 기운은 바로 이수린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고, 이수린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유매, 괜찮아?"
상욱은 유이리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상욱을 방해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상욱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휘두르는 이영신. 그의 움직임은 초기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큭큭큭. 역시나 모든 일의 원흉은 저 계집 이였군. 원래는 황태자를 죽이기 위한 포석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큭! 비켜라!"
상욱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영신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미 심계가 흐트러진 상욱의 검은 아무런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
이영신이 노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비록 완벽하게 힘이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심계가 흐트러진 상대라면 충분히 상대해 볼만 했다.
"왜 그러나? 나를 쓰러트리지 못하면 계집에게 갈수가 없다고. 큭큭큭!"
이영신은 계속해서 상욱의 심계를 자극하는 말을 했고, 초조함이 극에 달한 상욱은 자신의 검을 발휘하지 못했다.
상욱과 좀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며 이영신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포위망 위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무림인들은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비… 빙아야. 상공은?"
등에 입은 검상을 치료받던 유이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빙아에게 전황을 물었다.
"언니!"
빙아와 연은 그런 유이리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검을 맞은 자리가 좋지 않았을 뿐더러, 치료라고는 해도, 조잡하기 그지없는 치료에 불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생명이 위독한 상황. 빙아와 연이 기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유이리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창이 꽂혀있는 곳으로 향했다.
결계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유이리 자신. 비록 다른 이들에 의해 결계가 유지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위력에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유이리는 빙아와 연의 말류를 무릅쓰고 창에 손을 가져갔다.
"상공. 열 호흡입니다. 열 호흡 안에 도련님의 원수를 갚으세요."
유이리는 힘겹게 외쳤다.
상욱에게 들렸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 하지만 상욱은 유이리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지도 익히 짐작이 되었다.
만류를 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럴만한 여유도 힘도 없었다.
후회가 되었다. 자신이 상대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일격에 쓰러트렸다면 이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었다.
상욱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심계를 다스렸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눈앞의 적을 쓰러트리는 것만이 유이리의 부담을 줄여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일 검 입니다. 오라버니. 그 이상 걸리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등 뒤에서 부담감을 증폭시키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상욱은 괘념치 않았다. 어차피 자신 역시 그리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을 주관하는 마제린이여. 마를 쓰러트리는 싸움. 사악한 마신을 쓰러트리는 싸움에 당신의 위대한 권능을 보이소서."
유이리는 은색의 창을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최후의 힘을 쏟아 부었다.
유이리는 남궁상욱과 보낸 지난 이년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자 눈물을 머금었다.
"상공!"
유이리는 최후의 힘을 짜내어 상욱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 반응을 하듯 상욱의 몸이 무기력하게 굳어진 이영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우오오오!"
상욱의 기합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졌다.
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