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무림에서 가장 고독한 여인
채소밭 둘레에는 황국(黃菊)이 가득 피어 있었다.
달빛 아래 반짝거리는 노오란 잎사귀는 금전(金錢)을 뿌린 듯이 휘황한
빛을 뿌려 대고 있다.
憔悴窓前菊經霜一朶花
淸香空歲暮貞趣獨天涯
창 앞에 여윈 국화가 서리를 겪은 한 송이로다.
맑은 향기는 부질없이 해가 저물었고, 곧은 지취는 홀로 하늘가로다.
국화의 오연한 자태를 노래한 시다.
어디 그뿐이랴? 도연명(陶淵明)은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
然見南山)이라는 시구로써 천 년의 문맥에 우뚝 서지 않았던가?
국화는 장수를 상징하는 꽃이다.
국화 말린 것을 베개 속에 넣으면 두통에 좋고, 이불솜에 넣으면 그윽한
향기를 즐길 수 있으며, 국화주(菊花酒)의 맛과 풍취를 누가 모르겠는가?
구구(九九) 중양(重陽)에 국화술을 마시고 수유(茱萸)를 머리에 꽂고 산
상에 오르는 등고(登高)의 의식은 자고로 유명하다.
국화는 주대(周代)부터 배양이 되어 사군자(四君子) 가운데 하나로 꼽히
게 되었다.
뜨락 가, 호젓한 그림자가 머물러 있었다.
야윈 체격을 가진 여인이다. 귀밑머리가 희어진 중년의 나이.
그녀는 빛 바랜 베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베수건으로 이마를 질끈 동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호미가 있으며, 호미는 국화밭 아래의 흙을 고르는 데 쓰
이고 있었다.
"착한 아이였는데, 어디로 잡혀 갔는지……."
마의부인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초라한 신색이되, 달빛에 빛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타오르는 듯 아름다운 붉은 장미의 찬란함보다 오만한 중년의 완숙미가
뜨락 가의 국화와 같다.
"대체 어디로 갔는지……."
그녀가 중얼거릴 때, 헌칠한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등 뒤로 다가섰다.
그의 그림자가 달빛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져서 여인의 몸을 덮었다.
중년여인은 흠칫 놀라며 몸을 틀었다.
"누가……?"
한순간, 그녀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달빛을 밟으며 다가서는 청년은 용안봉목(龍顔鳳目)의 절세기린아(絶世麒
麟兒)였다.
그는 몹시 격정적인 표정을 지으며 다가섰으며, 마의부인은 마른침을 꿀
꺽 삼켰다.
"비, 비룡(飛龍)!"
그녀는 과거 한때를 기억했다.
아주 옛날 한 청년이 그녀 앞에 나타났었고, 그 때 그의 머리 위에도 달
이 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과거의 환상 속에 사로잡혔다.
곤륜산 능선에 초옥을 짓고 살던 시절, 그 시절이야말로 그녀의 일생을
통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문득 몽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청년이 가깝게 다가설 때, 그녀
는 나타난 사람이 과거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가 아니라는 걸 확
실히 알 수 있었다.
"아니로군. 하긴… 하긴……."
여인의 눈에 습막이 번졌다.
"그가 돌아올 리 없지. 그는 죽었으니까……."
그녀가 슬피 말할 때.
"그분은 죽었지만, 여기 제가 있습니다."
청년은 백무영이었다.
"아, 이 목소리는?"
멍한 눈빛을 던지는 마의부인은 바로 소수미랑(素手美娘)이었다.
그녀는 백무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으며,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때 그 청년이로군. 으음, 입가가 조금 달라져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
"절 기억하십니까?"
백무영은 목이 메어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다.
소수미랑은 자신이 그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이다.
"기억하고 말고. 그러고 보면 그 때 내가 꽤 미안했네."
"미안하기는요."
"아, 소문에 듣자니… 죽었다던데……."
"하나뿐인 목숨, 소중히 아껴야죠."
"호호호… 대범하게 말하는 투가 과거 그분과 비슷하네."
백치부인은 오랜만에 웃음을 되찾았다.
백무영은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눈이다.
'광기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다 나은 것은 아니다!'
백무영은 자신이 누구라는 걸 말하려다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면, 백치부인은 마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발작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함백의 당부로 왔나?"
"아닙니다."
"그럼……?"
"뵙고 싶어 왔습니다."
"호호, 다 늙은 날 보러 왔다고? 혹, 월방을 찾아온 게 아닌가?"
"아닙니다."
"흐음, 하여간 잘 왔네. 그렇잖아도 월방 일로 인하여 누군가 부탁할 사
람이 있으면 좋겠다 여기던 참이었어. 자, 안으로 들어가세. 내가 차라도
한 잔 대접하겠네. 산사의 생활이 초라하기는 하나, 갖출 건 다 갖추고
있네. 지난밤 악마들이 덮쳐 들긴 했지만, 여나찰 하나가 악마들을 모조
리 쳐죽였는지라… 세간살이가 부서지는 사단은 피할 수 있었지."
방 안은 꽤 초라했다.
백무영은 무릎을 꿇고 앉았고, 백치부인은 침모에게 차를 끓여 오라고 한
다음에 자수판 바로 곁에 앉았다.
"심심하기도 하고 습관이기도 하여, 늘 수(繡)를 놓고 있지."
"여전하십니다."
"예전에는 솜씨가 좋았다는 말을 들었었지만, 지금은 별것도 아니야."
백치부인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수틀을 매만지고 있는데, 완성된 자수가 놓여 있었다.
백룡(白龍) 한 마리가 허공으로 승천(昇天)한다.
백룡의 무수한 비늘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입에 물린 붉은 여의주
(如意珠)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비웃지 말게. 누군가를 위해 수를 놓지 않는다면, 마음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네."
"비웃기는요."
"호호… 자넨 위험한 사람이라 들었는데, 꽤 순수하네. 역시 함백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전 함백 쪽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전… 머지않아 그를 죽일 겁니다."
"흐음, 그는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야. 비록 사륵에게 꺾였다고는 하나,
진정으로 그를 꺾을 사람은 없어. 자네는 쓸데없는 야망을 버리게."
"오랫동안 그를 제거할 기회를 기다려 왔습니다."
"결심을 바꾸게.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철같이 굳어졌습니다."
"쯧쯧, 남자들이란……."
백치부인이 혀를 끌끌 찰 때, 마음 좋게 생긴 침모가 차를 끓여 내 왔다.
백무영은 묵묵히 한 잔의 차를 마셨다.
그 사이, 백치부인은 자수 뜬 천을 흑색장포의 가슴에 붙이는 일을 마무
리지었다.
백룡은 백가의 문장(紋章)이다. 백치부인은 불귀객이 되어 버린 백비룡을
위해 옷을 지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젖먹이 때 헤어진 아들을 위하여…….
말없는 가운데 한 시진이 흘렀다.
백치부인은 묵포(墨袍) 한 벌을 완성한 다음에 백무영을 바라봤다.
"이제까지 자네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
"무영(無影)입니다."
"무영, 고독한 이름이야."
"약간은 그런 셈입니다."
"성은 무엇인가?"
"백씨입니다."
"백씨라고?"
백치부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는 이마에 땀방울을 매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희고 가냘픈 손
매가 격렬히 떨리기 시작했다.
백무영은 그녀의 표정 변화를 모르는 척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전 여섯 명의 사부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들은 절 강하게 길렀습니다.
하지만 전 그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들은 절 살인마로 키웠지요. 전 그들
의 명에 따라 함백을 죽이려 했던 것이지요."
"으으… 으으……!"
백치부인의 숨결이 가빠진다.
백무영은 하던 말을 멈추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푹 쉬십시오. 피곤해 보이십니다. 내일 새벽에 다시 문안 인사드리러 오
겠습니다."
그가 절을 하고 일어서려 할 때.
"가, 가지 말아 다오… 부디……."
"아……!"
백무영은 문가에 멈추어 섰다.
백치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낯익다 여겼었지……."
"……."
백무영의 숨소리는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
"그리고… 혹, 네가 그 아이가 아닌가 생각해 봤다. 함백도 그런 눈치를
챈 듯하여 두려웠었지. 으으, 그래서 난 내심 함백이 널 죽였다 여기고
있었다."
"……."
"만에 하나, 네 등에 칠성(七星)의 점이 찍혔다면… 넌 나의 아들이다!"
그녀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푹 쉬십시오. 지금은… 지치셨습니다."
백무영은 신형을 틀지 않았다.
"무, 무정하기는… 네 아버지와 같구나."
백치부인은 이제 백무영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백
무영은 더 이상 감격을 참을 수 없기에, 신형을 급박히 틀며 옷자락을 힘
껏 찢어 냈다.
옷자락이 찢어지며 건장한 어깨가 드러난다.
그의 어깨에는 북두칠성 모양으로 점 일곱 개가 찍히어 있었다.
백치부인과 백비룡이 백무영의 부모라는 건, 그것으로 완전히 증명이 된
것이다.
"어, 어머니……!"
"녀석, 네 아비를 쏙 닮았구나. 키도 얼굴도, 심지어 목소리까지… 눈물
흘릴 줄 모르는 매정함마저……."
백치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백무영을 와락 안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따사로운 건 어머니의 품이다.
천하를 정복할 힘을 지닌 백무영이었지만, 어머니의 품에 안기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달빛이 교교하다. 모자(母子)는 달빛이 흐려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치부인이 하는 이야기는 주로 백비룡에 대한 이야기였다.
새벽이 뜨락 가에 다가설 때.
"네 아버지의 묘조차 세우지 못했으니… 아아, 시신이라도 찾았더라면…
…."
"아버님의 시신이 어디에 안치되어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함백이 준 밀지가 있습니다. 밀지에 의하면, 아버님의 시신은 소림사에
있다고 합니다."
"아아, 소림사… 네 아버지는 소림사의 고승들과 친하게 지냈었지. 소림
사 승려들이 강호대세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미워했었는데, 시신이 그 곳
에 있을 줄이야. 소림사는 엄청난 곳이지. 함백도 소림사만은 무서워하여
감히 치지 못하였지."
백치부인은 그렇게 말하다가 옷을 내밀었다.
그 옷은 그녀가 이십 년 간 지어 온 옷이다.
"네 옷이다."
백무영은 눈앞이 흐려져 어머니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지경이었
다.
"무영, 네게 몇 가지 당부가 있다. 이건 네 아버지 대신 하는 말이기도
하다."
"무슨 말씀이지요?"
"여섯 협사를 죽이지 마라."
"어, 어이해 그들을 죽이지 말라 하십니까? 그들은 저희 가문을 붕괴시킨
괴수들이거늘……."
"모든 혈사(血事)는 오해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까지 참회의
나날을 살아왔다. 널 이렇듯 장성하게 키운 것만 하더라도 그들은 빚을
갚은 것이다. 아마도 네 아버지도 네가 복수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네 아버지는 그들 여섯 사람을 아끼고 있었기에, 쓰러뜨리지 않았던 것이
다."
"하지만 전 그들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매정한 녀석. 어떤 말로 너의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을는지……."
백치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약할 대로 약해졌는지라 하룻밤도 꼬박 새지 못하는 것이다.
새벽이다.
백무영은 묵포로 몸을 휘어 감았다. 자로 잰 듯 몸에 맞는 옷이다. 그 옷
을 걸치자, 혈관 가득 용암이 흐르는 듯 힘이 복받쳐올랐다.
'한을 풀 때까지 이 옷을 벗지 않겠습니다, 어머니!'
백무영은 곤히 자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이어 그는 조심조
심 밖으로 나섰다.
백무영이 접어든 곳은 흑살마녀에게 당한 자들 가운데 겨우 목숨을 유지
하고 있는 자들이 머물러 살고 있는 창고였다.
창고 안에는 역겨운 악취가 짙게 배어 있었다.
신음 소리, 무거운 호흡 소리가 창고 안에 가득하고, 수십 명의 인자들이
피범벅이 되어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지독하군."
백무영은 콧등을 잔뜩 찌푸렸다.
어떠한 악취를 맡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백무영이었으되, 지금 콧속
으로 빨려드는 악취에는 구토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인자들은 똑같은 상처를 갖고 있었다.
살이 썩어 문드러졌으며, 칠공에서 검은 피고름이 흘러 나온다.
눈의 초점이 흐릿하며 머리카락은 가을 나뭇잎처럼 싯누렇게 말라 버렸
다.
백무영은 반듯이 누워 있는 중년인자(中年忍者)의 앞가슴에 장인(掌印)
하나가 새겨진 것을 볼 수 있었다.
흑색(黑色) 장인(掌印).
갈비뼈를 바수어 버리고, 살갖을 태워 버린 장인은 단 하나에 불과했다.
"단 일 장에 불과하다. 골수 속에서 흘러 나온 화염흑강(火焰黑强)으로
인해 살이 녹아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흑살마녀는 천마묵강(天魔墨强)
을 터득하고 있다."
백무영은 빙하신경 하편 빙경(氷經)의 한 구절을 기억할 수 있었다.
빙경에는 고래의 사마외도공(邪魔外道功)이 기록되어 있는 바, 그 중 최
고로 평가되었던 것은 천마사혼경(天魔死魂經)이라는 마경이었다.
천마묵강은 천마사혼경 안에 기록된 악마의 절학이다. 그것은 빙하신경
천지빙(天地氷) 삼편에 기록된 자도 절기에 비해 뒤지지 않는 절기이다.
'고월, 그가 세상에 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나 금단의 마공을 함부로
쓴다는 것은 무림계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다. 천마사혼경 안의 마공은
시전해서는 안 되는 마공이다!'
백무영은 고월을 기억했다.
그는 차갑고 강한 자, 그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 버리
는 자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 바로 음월방. 그러하기에,
흑살마녀를 보내 음월방을 데리고 간 것이다. 그러나 음월방은 그를 사랑
하지 않는다.'
백무영은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다가 누군가 안으로 접어드는 걸 느꼈다.
힐끗 돌아보자,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비구니 하나가 그를 보며 합장을
하고 있었다.
"아, 의심하시지는 마십시오. 저는……."
백무영은 여승이 놀랄까,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다가는 입을 다물었다.
"나무관세음보살……!"
비구니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산호, 어이해 그대가 삭발을?"
백무영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문가의 비구니는 바로 산호부인이었다.
그녀는 밤 사이, 삭발을 해 버린 것이다.
"목련사태께서 제 머리를 깎아 주셨습니다. 절 위해 고뇌하지 마세요. 머
리카락을 깎고 나니,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평화롭습니다. 사바세계를 떠
나기가 힘들 것이나, 불도에 계속 정진하다 보면 대각(大覺)하여 부처님
의 한 소리를 들을 날이 있겠지요."
산호부인은 밤 사이, 마음의 평정을 찾은 것일까?
연보라색으로 타오르는 새벽의 광휘가 그녀의 등 뒤에서 찬란하게 떠오
른다.
그녀의 얼굴은 관세음보살의 얼굴처럼 자애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 망아(忘我)라는 승명을 얻었습니다. 본시 쉽사리 되지 못할 것이 불
제자의 위치이나, 제가 간곡히 사정했는지라 사태님께서 하룻밤 사이 저
를 불제자로 삼아 주신 거지요."
정녕 맑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진정 그 처절한 한에서 해방된 듯 보였다.
그녀는 맑은 물이 든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창고 안에서 죽어 가는 동영인자들에게 깨끗하고 맑은 물
을 주기 위해 여기에 온 듯했다.
그녀는 백무영이 서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먹여 주기 시작했다.
백무영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산호부인은 자신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밤 사이 삭발해 버린 것
이다.
그녀는 다시는 강호계를 밟지 않을 것이며, 산사의 비구니로 여생을 보내
리라.
'사랑스런 여인. 아아, 내가 그대에게 미안해하는 마음만은 진심이라는
걸 알아주시오.'
백무영은 착잡한 마음으로 산호부인을 바라봤다.
그녀의 속눈썹에 맑은 이슬이 맺힌 것이 보였다. 그녀가 밤 사이 삭발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날 아침 백무영은 백치부인 앞으로 가 그녀를 버릴
수 없다고 말을 했을 것이다.
산호부인은 자신으로 인해 백가의 순수하고 웅장한 가풍(家風)에 먹칠이
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산호부인은 환자들에게 맑은 물을 준 다음에 백무영은 바라보며 합장을
다시 한 번 했다.
"잠시 후 소찬이나마 아침 진지를 드릴 테니, 승방으로 오십시오."
그녀는 맑게 웃었다.
그녀는 무림에서 가장 고독했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고요한 사찰에 자신
의 여생을 맡기리라 결심하며 마음의 안녕을 찾은 것이다.
그녀는 합장한 다음, 신형을 틀어 대응전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백무영은 그녀를 바라봤고, 구월의 햇살이 몹시 시리다고 느꼈다.
황국이 가득한 뜨락.
백무영은 백치부인을 찾아 뜨락으로 접어들었다.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나왔는데,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백무영은 인자들이 고통 없이 죽도록 치료해 주느라 한 시진 정도를 창
고 안에서 보냈었다.
백치부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준 사람은 목소리에 광동(廣東) 사투리가
역력한 모태태(茅太太)라는 참모였다.
부인은 죽림에 서 있었다.
그녀는 대나무 가지 하나를 들고 있었으며, 백무영이 앞으로 다가서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머니, 왜 거기 계십니까? 초가을이라고는 하나, 바람이 꽤 쌀쌀합니
다."
백무영이 다가설 때, 그의 가슴으로 기이한 힘이 다가섰다.
'아, 이 기운은?'
백무영은 무서운 한기에 사로잡혔다.
주위가 눈보라에 가로막힌 듯 추워진다.
그 기운은 어머니가 들고 있는 대나무 가지 끝에서 피어 오르고 있었다.
'저 자세는……?'
백무영은 어머니의 자세가 낯익다 여겼다.
그 자세는 바로 색혈일검(索血一劍)의 자세였다.
'어머니가 어이해, 색혈일검을 알고 계실까?'
백무영이 의아해할 때, 백치부인은 엄숙한 가운데 입술을 떼었다.
"난 너와 더불어 하나의 내기를 하고자 한다."
"내기라니요?"
"난 무공을 모른다. 하나, 세 가지 초식을 알고 있다. 그건 네 아버지가
전해 준 검초이다."
"그, 그런데요?"
"네게 그것을 쓰겠다. 만에 하나 네가 초식만으로 나의 검초를 막아 낸다
면, 네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 그러나… 막지 못한다면, 넌 내 말을
들어야 한다."
"어머니께서 어이해 제 상대가 되시겠습니까? 어머님의 부탁이시라면 뭐
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내기는 필요 없을 겁니다."
"아니다. 꼭 내기를 해야 한다. 네가 비록 씩씩힌 무사로 자라났으되, 이
미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도 많다. 너와 난 너무나도 오랫동안 떨어져 살
았으며, 너도 알다시피 어미는 함백의 정실부인 노릇을 하는 치욕을 겪었
다. 함백이 내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네 아버지의 영혼에
게 큰 죄를 지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다. 난 죄인이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듯, 나약한 여자만은 아니다.
자, 너도 대나무 가지 하나를 쳐들어라."
백치부인은 항변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늘 망각과 미몽 속에서 살아왔던 그녀였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천왕의
모습처럼 웅장했다.
'차마 거절할 수 없군!'
백무영은 망연자실해하면서도 대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손에 쥐었다.
백치부인은 대나무 가지를 수직으로 세웠다.
그 자세는 색혈일검의 자세에서 조금 더 발전한 자세로, 백무영으로서는
처음 대하는 신기한 발초식이었다.
"난 무공을 모른다. 그러나 네 아버지는 천하제일검이며 고금제일검! 누
구도 그분을 막아 내지 못했었다. 이제 네게 그분의 검초를 펼쳐 보이겠
다. 내공을 써서 막아서는 아니 된다. 초식으로만 막아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백무영은 대나무 가지를 비스듬히 쳐들었다.
그는 어머니가 어느 정도 혼미한 마음상태이리라 여기고 있었으며, 정식
으로 비무를 하는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다만 어머님의 명을 어길 수 없기에, 비무하는 체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는 백치부인이 죽봉(竹棒)을 위해서 아래로 내리치는 찰나, 마
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죽봉은 아주 느리게 허공을 잘랐다.
순간, 백무영은 눈앞이 어두컴컴해져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흑벽검(黑壁劍)! 도가최상승검!"
그는 기겁을 하며 뒤쪽으로 물러나고자 했다.
그는 상승고수들과 싸우던 습관에 따라 이형환위(移形換位)로 몸을 피하
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내공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규제조항을 생각하고 보법을
밟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죽봉을 들어 금리도천파(金鯉倒穿波)의 검초를
시전했다.
그는 죽봉의 허리를 자르며 퉁기어 내는 초식을 시전했으며, 그의 예상대
로라면 두 자루 죽봉은 허공에서 부딪쳐야 한다.
하나, 죽봉은 부딪치지 않았다.
백무영이 그어 나간 곳은 허공에 불과했다.
'이럴 수가? 내가 허공을 베다니!'
그는 기겁을 하며 위로 솟구치고자 했다.
거의 반사적으로 잠룡승천(潛龍昇天)을 쓰고자 하는 찰나, 문득 내공을
사용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을 다시 기억하고 다시 몸을 고정시켰다.
'빙하천리(氷河千里)로!'
그는 죽봉을 밑으로 내리며 빙하천리검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백치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거대한 대나무의 영상이 나타날 뿐이다.
백무영이 빙하천리검으로 죽봉을 퉁겨 내려는 찰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네가 졌다. 무해(武海)는 넓다. 넌 강하나, 절정(絶頂)은 못 돼!"
순간, 백무영은 어깨에 죽봉이 닿음을 느꼈다.
내공을 쓴다면 쉽게 피해 낼 것이되, 내공을 쓰지 않는 한 죽봉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며, 백치부인은 입술이 파리해진 채
이렇게 말했다.
"색혈(索血)에서 흑벽(黑壁), 거천(巨天)이다. 네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이
다. 절대구류검(絶代九流劍)의 전삼식(前三式)이지."
"절, 절대구류검!"
백무영은 이제야 자신이 왜 패했는가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비록 내공을 모른다고는 하나, 초식에 있어서는 그를 꺾은 것이
다. 그게 바로 절대구류검의 무서운 점이다.
백무영이 만월심극혜검(滿月心極慧劍)을 썼다면 모를까, 다른 초식으로
절대구류검을 막고자 했던 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네 아버지는 인명을 아끼던 분이셨지. 그러하기에, 강호의 거마라 하더
라도 쉽게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함백이 돌아가신 네 아버지를 아직도
무서워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으음……."
"한데, 넌 대조적으로 살기가 짙다. 물론, 네 처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네
가 정녕 백가의 후예이고 대곤륜의 정신적 후계자라면, 대지(大地)에 피
를 흘리는 것을 삼가야 한다."
백치부인은 죽봉조차 힘있게 쥐지 못할 정도로 나약해졌는지라, 말을 하
는 가운데 죽봉을 미끄러뜨렸다.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려 주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모든 건 네 스스
로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피를 흘리는 건 죄악이라는 것만은 잊지
말기 바란다."
백치부인은 쓰러질 듯 휘청거렸으며, 백무영은 재빨리 다가가서 어머니를
부축했다.
모자(母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지언(無言至言)… 지금은 그 말이 적합하다 할까?
'일사부는 색혈일검을 내게 전수했다. 그는 아버지의 사형이었던 사람.
그렇다면 그는 아버지의 색혈일검을 배웠으리라. 아아, 아버님과 잠풍이
생각보다 훨씬 친한 사이였던가?'
백무영은 혈의육존을 기억했다.
그들은 이십 년 내내 참회 속에서 살아왔다.
그들은 모든 세력을 포기하면서까지 백무영의 무공 완성에 노력해 왔다.
그들이 이십 년 내내 헌신하지 않았더라면, 백무영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
다.
'그들을 용서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어찌 그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
가?'
백무영이 속으로 부르짖는 가운데, 아침이 환히 밝았다.
"오늘은 햇빛이 좋구나."
"그렇습니다, 어머님."
"녀석, 어서 떠나거라."
"떠나라니요?"
"네 어깨에 무림의 운명이 걸려 있다. 넌 나만의 아들이 아니라, 중원의
아들이다. 널 내 곁에 오랫동안 붙잡아 두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구나."
백치부인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백무영은 아버지가 왜 천하제일인이라는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어머니
와 결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냐. 하루만 머물다가 떠나렴. 지금 헤어진다면, 꽤 오래 만나지 못할
테니까."
"핫핫… 그렇게 하겠습니다."
송백림이 우거진 산길.
백무영은 묵포를 걸친 채 빠른 걸음으로 호수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그의 품에는 산호부인이 전한 환영마경(幻影魔經)의 필사본이 들어 있었
다.
백무영은 환영마경을 익히지 않아도 천하제일인이라 할 수 있으되 산호
부인의 정성을 거절할 수 없는지라, 환영마경의 필사본을 품에 넣은 것이
다.
산호부인은 그에게 운남대리국(雲南大理國)의 무림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환영마궁의 영도를 맡겼고, 모든 재산을 협의에 써 달라는 부탁을 하며
합장을 했던 것이다.
'그녀는 현명한 여인이다. 그리고 날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이다!'
백무영은 산호부인이 자신을 위해 물러나 준 것을 뼛속 깊이 감사해하고
있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남성이고, 남성을 지배하는 자는 여성이라던가?
백무영의 걸음은 느린 편이었다. 그는 장래에 대해 생각할 것이 많기에,
느릿느릿 걷는 것이다.
'일단 어머니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믿을 만한 사람은 백봉뿐이
다!'
그가 나름대로 몇 가지 복안을 세웠을 때, 문득 살기가 느껴졌다.
'추적자들이 있단 말인가?'
그가 어처구니없어 할 때였다.
츠츠- 츳-!
도처에서 독침이 퍼부어지며 쇠그물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백무영은 한순간 쇠그물 속에 갇히고 말았다.
"냉혈살흔, 잡혔다!"
"도망치지 못한다. 강호의 공적(公敵)!"
"넌 겹겹이 포위되었다. 프핫핫……!"
도처에서 무수한 무사들이 나타났다.
숲은 삽시간에 오백여 무사들에 의해 포위되었다.
백무영은 쇠그물을 뒤집어쓴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를 향해 다가서는 무사들 가운데 우두머리는 하얀 소복을 걸친 늘씬한
여인이었다.
안색이 파리한 여인의 얼굴은 짙은 면사에 감추어져 있었다.
"악적! 이제야 잡게 되는구나. 빠드득!"
여인의 눈에서 푸른 섬망이 퉁겨져 나왔다.
"낭자는……!"
백무영은 백의여인이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백무영에게는 첫사랑일지도 모른다.
'냉약빙(冷若氷), 집요하게도 날 찾아다니는군.'
바로 냉약빙이었다.
종대선생(鐘大先生)의 후계자이며, 대명무문(大命武門)을 이끄는 강호여
걸.
그녀는 백무영에게 몸을 더럽힌 바 있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녀에게 백무영이 첫 남자였다면, 백무영에게는 그녀가 바로 첫 여인이
라 할 수 있었다.
다만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엄격한지라, 냉약빙은 자신이 백무영에게 철
저히 겁탈당했다 여기고 백무영을 제 손으로 죽이리라 작정을 한 것이다.
그녀는 전에 비해 고강해 보였다. 그녀는 일 년 가량 칩거하며 포달랍궁
(布達拉宮)에서 흘러 나온 모니혈강(牟尼血强)이라는 절기를 터득했던 것
이다.
그 덕에 그녀의 장심 한가운데에는 진홍색 반점이 하나씩 형성된 것이다.
"호호호… 죽었더라면 서운했으리라. 호호호……!"
냉약빙의 웃음소리는 처연하고 표독스러웠다.
백무영은 그녀 곁에 선 거지 중년인을 보았고, 그가 군산에 오기 전 포구
에서 얼핏 본 자라는 걸 알고 사태의 추의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자가 냉약빙에게 연락을 했군. 몰골로 보아 개방제자인 듯한데.'
백무영을 향해 다가서는 무림인은 삼개방파 출신의 무사들이었다.
군산칠십이채(君山七十二寨)의 총본산(總本山)이랄 수 있는 해룡방(海龍
幇)의 무사들,
개방의 오대단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악양단(岳陽團)의 오결 이상 제자
들,
그리고 남해검파(南海劍派)의 동정타(洞庭舵) 무사들.
백도는 최근 들어 힘을 집결시키고 있으며, 냉약빙은 백도의 여종사로 발
돋움하고 있었다.
"냉혈살흔! 넌 천하삼대적(天下三大敵) 가운데 하나이다. 넌 잠풍, 함백과
더불어 능지처참되어야 한다."
냉약빙의 낯색이 파랗게 질리는 걸 알아보는 사람은 백무영에 불과했다.
그는 쇠그물을 뒤집어쓰고 있기는 하나,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한기가 강하고 살기가 짙은 자가 있다. 누구일까? 정파사람이라면 사용
하지 않는 마도병기를 지닌 자가 있다!'
백무영은 중인 가운데 예리한 마세를 지닌 자가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
다.
사실, 그는 미리 그것을 눈치채고 그 자의 정체를 알기 위해 일부러 잡히
는 척한 것에 불과했다.
그는 중인을 쓸어 보다가 문득 낯익은 얼굴 셋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들이 어이해……?'
백무영은 어린금창(魚鱗金槍)을 든 거인과 건곤문무차(乾坤文武叉), 척천
연자추(拓天燕子鎚)를 든 거인을 발견했다.
세 사람 모두 장대한 체격인지라, 오백여 무사들 가운데에서도 쉽게 두드
러졌다.
'금은철(金銀鐵) 삼대검왕(三大劍王), 사밀왕부의 반역자들!'
백무영의 눈에서 한망이 토해졌다.
삼대검왕은 사밀여후를 반역하고 천마왕(天魔王) 고월 쪽으로 기운 자들
이다.
그들이 배반하지 않았더라면, 사밀왕국이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을 것이
다.
'설마… 고월의 입김이 백도에까지?'
무사들 가운데 뛰어나 보이는 자들은 백도무사들이 아니라, 사밀왕부의
반역자들이다.
그들은 철목선풍에게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한 자들.
한데, 그들이 냉약빙과 더불어 나타나다니?
'고월, 네 수완답다. 사륵이 판치는 와중에 흑살마녀라는 괴존재를 내보
내어 강호정세를 교란하고, 중심이 잡히지 않은 백도를 암중에 장악하는
솜씨… 역시 너답다!'
백무영은 금은철 삼대검왕이 냉약빙과 더불어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냉혈살흔! 네 심장에 비수를 찌르리라!"
냉약빙의 목소리가 고조될 때.
"후후… 대명무문주시여! 중원의 역도를 참살할 기회를 속하에게 주십시
오."
우람한 체구를 금갑(金甲)으로 휘어 감은 금갑검왕이 냉약빙 앞으로 미끄
러져 갔다.
"금갑노야! 추적에 협조해 주신 건 감사하나, 저 자를 참살하는 일은 제
가 직접 할 일입니다."
냉약빙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잠시 잠깐의 일이되, 그녀의 아미가 활처럼 굽어졌다.
그녀는 내심 초조해하고 있었다.
금갑검왕은 대명무문에 잠입한 지 이미 오래된 듯했으며, 냉약빙과도 상
당히 친한 듯 보였다.
그는 서툰 한어로나마 자신의 주장을 강경하게 되풀이했다.
"왕야는 제게 무문을 위해 공을 세워야 한다고 누누이 이야기하셨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공을 세울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 그러나……."
냉약빙이 주저할 때.
"냉약빙, 네게 죽으면 계집에게 죽었다고 무사(武史)에 기록될 것이니…
거절하겠다. 죽더라도 남자에게 죽겠다. 그게 당당한 죽음이 아니겠느
냐?"
백무영의 목소리가 무사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바보 같은 자…….'
냉약빙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백무영과 해결할 일이 한 가지 있기에, 백무영을 죽이는 척하다가
제압하여 모처로 데리고 갈 작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금갑검왕이 끼여들어 곤란해하던 차에 백무영의 호통 소리가 산
통을 깨어 버리는 것이다.
"푸핫핫… 제법 당찬 놈이로다! 푸핫핫! 중원에도 꽤나 억센 무사가 있
군?"
금갑검왕은 히죽 웃으며 백무영 앞으로 다가섰다.
백무영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더러운 반역자! 너희들을 찾고 있었지!'
그는 금갑검왕이 어린금창을 쳐들고 다가서자, 갑자기 입술을 달싹거렸
다.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고 금갑검왕의 귀에만 들리는 몽고어가 흘러 나
왔다.
"그녀는 어디에 잡혀 있지?"
"흐윽!"
금갑검왕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려 하는데, 갑자기 백무영의 오른손이
쇠그물을 찢고 그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금갑검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허공에 대롱 내걸렸다.
"케에에엑……!"
금갑검왕이 외마디 비명 소리를 지를 때, 은갑과 철갑이 장소를 터뜨리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방자한 놈! 잡히는 척 위장했었구나."
"하아앗! 사밀파천(邪密破天)!"
은갑은 건곤문무차를 풍차처럼 휘둘렀고, 철갑은 척천연자추로 백무영의
명문혈(命門穴)을 바수려 했다.
백무영은 금갑검왕의 몸뚱이를 번쩍 쳐든 자세 그대로 왼손을 우측으로
비스듬히 휘둘러 대는 자세를 취했다.
그의 손은 허공에 원형의 궤적을 그렸고,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건곤문무차와 척천연자추가 십만 관(十萬貫) 힘을 싣고 날아들다가 갑자
기 방향을 틀어 원주인의 머리를 향해 폭사되어 나갔다.
"흐윽! 사술이다."
"으아아아……!"
은갑과 철갑은 애병(愛兵)이 방향을 틀어 날아들자, 기절초풍하며 손을
놓고 도망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애병이 날아드는 속도는 던져지는 속도보다 열 배 이상
빨랐다.
퍽- 퍽-!
두 번의 둔팍한 소리가 들리며 그들의 머리통은 잘 익은 수박이 쪼개어
지듯 산산이 바수어졌다.
쿵- 쿵-!
회색 뇌수가 흩뿌려지며 서한의 몸뚱이가 거목이 도끼에 허리가 끊어져
쓰러지듯 쓰러졌다.
모든 일은 탄지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말해! 흑란(黑蘭)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백무영은 하이얀 치열을 드러내 보였다.
금갑검왕은 아무리 힘을 써도 백무영의 손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썩은 돼지간처럼 시뻘개졌다.
"그, 그대가 누구이기에 흑란공주를……?"
"후후… 난주(蘭州)에서 나를 보았을 텐데?"
"으으, 그럼… 그 때 술집에서 흑란공주와 함께 나온… 바로 그 자란 말
이냐?"
금갑검왕은 그제야 백무영을 기억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모두 몽고어로 진행되었는 바, 둘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사들은 검을 든 채 두 사람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할 뿐,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어디에 있느냐, 흑란은?"
백무영은 사자후(獅子吼)로 외쳤으며, 금갑검왕의 호신강기는 음공 아래
산산이 바수어졌다.
그의 목젖 속으로 다섯 손가락이 깊숙이 파고들며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
다.
그는 철갑상피공(鐵甲象皮功)이라는 외공을 익혀 도검에 베어도 피가 나
지 않지만, 백무영의 다섯 손가락에 실린 힘을 막을 순 없었다.
"공주는… 왕야의 검비(劍妃)가 되었다."
"왕야라면… 철목선풍?"
"그, 그렇다."
"그가… 고월이냐?"
"아무것도 모른다. 그분은 워낙 신비인인지라……."
"그는 어디에 있지?"
"모, 모른다. 난 모른다. 모두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왕야는 살아 있
는 악마의 신! 그분의 말을 거역하면 죽는다. 나 혼자 뿐 아니라 구족(九
族)이 한꺼번에 몰살한다. 그래서 복종했던 것이다. 으으……!"
금갑검왕은 애절히 말했으며, 백무영은 그의 비굴한 모습에 역겨움을 느
끼며 다섯 손가락에 힘을 가했다.
금갑검왕의 목에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렸다.
힘을 조금만 더 준다면, 목뼈가 와작 바수어지리라.
백무영은 문득 어머니의 말을 기억했다. 그는 끓어오르는 살기를 겨우 자
제할 수 있었다.
그는 금갑검왕의 거대한 몸뚱이를 땅바닥에 내팽개쳤고, 금갑검왕의 몸뚱
이는 땅에 부 쳤다가 두 자나 넘게 펄쩍 퉁기어 올랐다가 다시 떨어져
내렸다.
순간 백무영의 목으로 검이 다가섰으며, 그것은 백무영의 손바닥에 가볍
게 쥐어졌다.
"냉약빙, 날 귀찮게 하지 말아 다오."
"야수 같은 자! 널 증오한다."
검을 꼬나 쥔 사람은 냉약빙이었다.
그녀는 섬전처럼 다가서며 백홍일식(白紅一式)을 썼는 바, 그것으로도 백
무영을 꺾을 순 없는 일이었다.
"넌… 세상을 몰라."
"내가 세상을 모른다고?"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과거지사는 세월과 더불어 흘러간 강
물과 마찬가지야. 날 기억할 필요 없어. 세월이 모든 걸 해결해 줄 테니
까."
냉약빙의 검은 백무영의 손아귀에 쥐어진 채 고운 가루로 바수어졌다.
백무영은 중인을 쓰윽 둘러본 다음에 천천히 걸어갔다.
냉약빙은 그의 등판에 대고 신녀장법(神女掌法)을 후려쳤고, 백무영은 피
하지 않고 일 장을 격타당했다.
폭음 소리와 함께 백무영의 상체가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뿐, 백무영은
가던 걸음을 계속 내딛었다.
"난 바빠. 기억력이 너무 좋아 잊을 일도 못 잊는 계집과 시비를 벌이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그는 조용히 말하며 숲으로 접어들었다.
모든 무사는 그의 신공절기에 기가 질려 감히 뒤쫓을 생각도 하지 못했
다.
냉약빙은 눈물을 비 오듯 흘려 면사를 눈물로 촉촉이 적셨다.
"넌… 아무것도 몰라. 흐흑… 너와 나 사이에 무엇이 만들어졌는지를…
…."
그녀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이다.
그녀와 백무영 사이에 대체 어떠한 것이 이룩되었단 말인가?
숲은 안개에 잠기기 시작한다.
냉약빙은 망부석처럼 굳은 채 오열할 뿐이고, 모든 무사는 백무영이 사라
지고 나서도 쉽게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