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죽음의 按排
<태행산(太行山) 부운곡(浮雲谷) 입구로 급래(急來) 할 것.
유작 친서(儒爵親書).>
* * *
밤(夜),
세우(細雨)가 촉촉히 내리는 밤이다.
밤비는 이곳 태행산(太行山)에도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오송학은 요난아의 손을 잡고
저만큼 앞서 걷는 유작의 뒤를 묵묵히 따라 걷고 있었다.
유작은 아직 오송학에게 한 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고
부운곡 안으로 발길을 옮기기만 하고 있었다.
부운곡의 양측으론 기암괴석(奇巖怪石)의 절벽이 늘어서 있고,
그 절벽과 절벽 사이로 발견하기조차 어려운 소롯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휘이이잉..
곡내(曲內)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결에 물 묻는 나뭇잎이 몸을 떨어대는 소리가 스산스럽다.
문득 앞서 걷던 유작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 아이에 대해 설명해주겠느냐?"
유작의 시선은 오송학의 손에 잡혀 귀여운 눈망울을 귀엽게 또르르 굴리고 있는
요난아를 향하고 있었다.
오송학은 일순 쓴 고소를 흘렸다.
"고행(苦行)의 동반자입니다."
"고행의 동반자라.. 역시 너다운 대답이구나."
유작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불현 듯 유백삼 유삼(儒衫)을 벗어 들었다.
"송학, 겉옷을 벗고 이 옷을 입어라."
"대사부...?"
"이 옷은 어쩌면 너의 목숨을 한 번쯤 살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유작은 자신의 유삼을 오송학에게 내밀었다.
"어서 네 옷을 벗어다오."
오송학은 유작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한지라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유삼을 벗어 유작에게 건네 주고는 유작의 유삼을 대신 받아 들었다.
유작이 스쳐 지나가듯 입을 열었다.
"천잠사(天蠶絲)로 짠 옷이다."
"헌데 왜 이걸 제게..."
오송학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유작은 오송학의 백삼을 걸치며 희미하게 웃었다.
"너는 오래 살아야 하느니라.."
유작은 말을 마치자 의문스런 표정을 짓는 오송학을 뒤로 하고
다시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오빠, 감기 들어. 빨리 입어."
요난아가 옆에서 재촉했다.
"그래, 알았다."
오송학은 그제야 서둘러 옷을 걸쳤다.
유삼은 착용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쁜하고 부드럽게 몸에 달라붙었다.
요난아가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 꼭 맞는구나. 오빠, 빨리 가. 사부님은 벌써 보이지도 않잖아."
"그래."
오송학은 유작의 뒤를 재빨리 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엇인가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대사부의 저 숙고하는 언행은 어딘가 분명 평소와는 다르다.
그는 유작이 방금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너는 오래 살아야 하느니라...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오송학은 웬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옴을 느꼈다.
얼마후 그들이 당도한 곳은 부운암(浮雲庵)이라는 조그만 암자였다.
허나 암자는 이미 폐사(廢寺)로 변한 지 꽤 오랜 시절이 지난 듯 황폐하기 그지 없었다.
불당(佛堂) 하나가 전부인 암자의 천정은
이곳저곳 구멍이 뚫려 있어 빗물이 그대로 새어들고,
석가모니불 옆으로 위치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인왕보살(仁王菩薩)은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부서져 있었다.
게다가 거미줄 사이로 왕방울만한 쥐들까지 극성으로 날뛰고 있다.
"밖을 내다보거라. 그리고 똑똑히 보아 두거라."
유작은 말을 끝내자 석가모니불 앞에 앉아 지그시 눈을 내리 감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신비스러우리만큼 장엄해 보였다.
오송학의 의혹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유작의 저 언행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는 나직이 탄식하며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오빠, 나도 같이 봐."
요난아가 그의 품속으로 기어들며 같이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박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그 칠흑 속으로 번뜩번뜩 빗줄기가 칼날처럼 스쳐 내려
잡풀 무성한 공터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자신들이 조금 전 들어온 곡 입구로부터 한 명의 인영이 모습을 나타낸 것은...
발끝까지 덮은 흑장포(黑長袍)를 걸치고
허리에 한 자루 고검(古劍)을 비스듬히 메고 있는 밤을 닮은 철립인(鐵笠人),
'고수다! 지금껏 한 번도 대한 적이 없는.."
오송학은 철립인을 일견하는 순간 전신의 근육이 절로 팽팽하게 긴장되는걸 느꼈다.
상대에게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무심(絶代無心)의 경지를 초월한 초극(超極)의 경지이다.
고수는 단지 느낌만으로 고수를 알아보는 법.
오송학은 손아귀에 식은땀이 ㅁ히는걸 느꼈다
. 단지 상대의 모습만 보고 이토록 긴장한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우우우-!
어디선가 늑대의 울음소리가 밤비 속을 가르고 들려온다.
암흑마천주가 걸어오는 모습은 얼핏 보자면 매우 평범했다.
대부분의 고수는 비에 젖은 땅을 지날때에는 초상비(草上飛)의 수법을 사용해
발이 젖는 것을 피하는 법이다.
헌데 죽립인은 흥건히 고인 물바닥 위에
초혜(草鞋)를 신은 발자국을 철벅철벅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철립인의 신형이 부운암의 십여 장쯤 가까이에 접근했을 때다.
휘이익!
휘익!
돌연 일련의 파공성과 함께
세 줄기의 인영이 표홀한 바람처럼 철립인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아니...? 저들은 사혼(四魂) 중 삼인(三人)이 아닌가?'
그렇다.
나타난 세 인물은 뜻밖에도 사혼(四魂)이었다.
아니 무적패혼(無敵覇魂)이 사신도혼(死神刀魂)에게 죽음으로 해서
삼혼(三魂)이 되어버린 그들이다.
시계명과 거상시, 그리고 반강...
오송학이 어찌 그들은 못알아 볼 리 있겠는가?
이때 삼혼이 철립인을 향해 동시에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중원사혼(中原四魂) 중 삼혼(三魂)이
삼가 암흑마천주의 발 아래 뜨거운 피를 깔아 드리러 왔소이다."
말과 함께 그들은 일제히 허리를 깊숙이 꺾었다.
순간 오송학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오오...암흑마천의 천주(天主)란 말인가?'
그가 채 놀라움을 가라앉히기도 전,
"이렇게 영접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네."
암흑마천주의 음성이 철립 끝에서 나직이 흘러나왔다.
"부디 성의 있는 승부를 바라오!"
삼혼은 동시에 말을 받았다.
암흑마천주의 발걸음이 느릿하게 삼혼 앞으로 다가들었다.
순간이다.
삼혼의 어깨가 동시에 흔들 하는가 했더니
이내 창백한 세줄기 섬광(閃光)이 야공(夜空)을 찢어발겼다.
"혼천광살풍(混天狂殺風)!"
"소소삼음공(笑笑三音功)!"
"오보추혼독(五步追魂毒)!"
파파파팟!
고오오오..
밤의 색깔이 느닷없이 산산이 찢기었다.
우르릉!
삼십 장 밖 절벽이 거센 불똥을 퉁겨 올리며 쩍쩍 갈라져 내렸다.
삼혼이 사혼의 대열에 낄 수 있었던 극강(極剛)의 사도지학(邪道之學)들이
한꺼번에 펼쳐진 것이다.
암흑마천주의 모습은 이미 삼혼의 가공할 공세(功勢) 속에 가려
형체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아! 사혼의 무공은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삼혼의 무공에 경탄하던 오송학의 눈이 이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 그는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암흑마천주가 단지 오른쪽 손을 가볍게 흔든 것에 불과한데도
삼혼의 공세가 거짓말처럼 소멸되어 버리는 것을!
암흑마천주의 억양없는 음성이 울려퍼진건 그 직후였다.
"그대들의 희생이 너무 크군."
어느새 철립인과 삼혼은 본래의 위치에서
본래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주 서 있었다.
시계명이 말을 받았다.
"강하시구료.."
무섭게 떨리는 음성,
그리고 음성이 끝나는 순간이다.
쿵..!
그의 몸이 모래더미가 무너지듯 하나의 피무더기로 변해 아래로 주저앉았다
. 믿을수 없게도 그의 전신은 수백 조각으로 갈라져버린 것이다.
그때 한차례 비바람이 몰아치는듯 하더니
거상시와 반강의 몸이 똑같이 피무더기로 변해 무너져내린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암흑마천주는 무겁게 탄식했다.
"본좌를 이길수 없다는걸 알면서도 덤벼들다니.."
그는 피에 젖은 땅을 밟으며 다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넋놓은채 지켜보는 오송학의 귓가에 유작의 무심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똑똑히 보았느냐?"
"너는 똑똑히 보았어야만 한다.
삼혼은 너로 하여금 그를 파악할 기회를 주기 위해 죽은 것이다."
유작의 음성은 매우 나직했지만 오송학의 귓에는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저것은 단지 저자의 기본에 지나지 않는다."
오송학은 유작의 말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는 암흑마천주가 펼친 그 기본이라는 검초(劍招)조차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눈앞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무학(武學)에 있어서 한 경지를 이루었다고 자부해온 자신이 아니던가.
"송학, 너는 곧 그의 진정한 위력을 보게 될 것이다."
유작의 음성이 다시 들려온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유작을 향해 돌아섰다.
"혹시 대사부께선..!"
허나 그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 암흑마천주가 이미 문 앞에까지 다가와 있음을 감지한 때문이었다.
그렇다.
암흑마천주는 입구에 마치 천년 전부터 그렇게 서있었던 것처럼
어둠을 두른채 나타나 있었다.
장내에는 숨막힐 듯한 긴장을 동반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유작이었다.
"밤길이 너무 어두웠소이다."
암흑마천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벅...저벅...
그는 거침없이 다시 세 걸음을 걸어 들어왔다.
축축이 습기찬 바닥 위에 섬뜩한 혈족(血足)이 선명하게 세 개 찍혔다.
"좋은 재목을 깎으셨소. 주대인(朱大人)."
동문서답(東問西答) 식으로 암흑마천주가 오송학을 바라보며 던진 말이었다.
유작은 자부심이 은은히 깃든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하늘을 받칠 기둥인지라 정성들여 깎았소.
천주의 눈에나 차실는지.."
"천민(賤民)의 눈이 어찌 고귀한 황친(皇親)인의 안목을 따를 수 있겠소."
"별 말씀을..황친은 이미 백오십년 전에 죽었소이다."
뼈가 박혀 있고 칼이 숨겨져 있는 대화였다.
유작이 그제서야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제 우리는 한 수의 시(詩)를 지어야 할 터...시제(詩題)는 천주께서 지어주시오."
"빗 속의 고혼(孤魂)이라 하면 적당할듯 하오."
암흑마천주는 손가락을 세워 철립을 약간 들어 올렸다.
거무스름한 수염이 까칠까칠하게 난 강퍅한 턱의 선이 강렬하게 드러났다.
오송학은 그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숨도 크게 내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최고의 예우로서 승부를 결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자신이 끼어들면 두 사람 모두에게,
특히 유작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
그는 이제서야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단지 참관인으로만 남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유작의 뜻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유작의 마지막 안배(按排)라는 사실도.
이때,
유작이 허리춤에서 한 자루의 섭선(攝扇)을 빼어 들었다.
촤르륵..
"참으로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려왔소. 천주."
"본좌 또한 중원제일혼(中原第一魂)을 상대하는 꿈을 지나친 날이 없소."
두 사람은 죽음의 승부를 눈앞에 둔 사람같지 않게 담담히 말을 주고 받았다.
이시대 최고의 승부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유작의 학익선(鶴翼扇)이 비스듬히 위로 올려쳐졌다.
그것은 곧 한 마리의 백학(白鶴)이다. 백학은 둥실 허공 위로 떠올랐다.
꾸우웅!
백학은 날개를 너울거리는듯
, 그러나 실제로는 믿을수 없을만큼 빠르게 암흑마천주의 가슴을 노리며 짖쳐들었다.
순간 암흑마천주의 가슴의 흑포자락이 길게 베어지며 점점이 핏물이 배었다.
그는 치명상을 입는것만을 피했을뿐 전력을 다해 물러서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 순간에 드러났다.
번쩍!
한 줄기의 묵빛 섬광이 암흑마천주의 허리춤으로부터 폭사되는가 싶더니
수천 송이의 묵화(墨花)로 피어올라 허공중에 무지갯살처럼 번져오른다.
고오오..
촤아아아!
허공을 떠돌던 백학의 그림자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것은 마치 갈바람에 날리는 메밀꽃잎 같다.
허공을 부유하던 묵화는 그 메밀꽃잎을 찢고 또 찢었다.
갈가리...
산산이...
흔적없이 지는 밤이슬처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유작은 왼쪽 심장과 이마에 정확히 일검을 관통당한채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송학...명심해라...절대 천주의 호의를 거부하지 마라.."
그 말이 끝났을때,
그의 몸은 차가운 바닥위에 쓰러진채 영원히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장내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요난하는 공포로 벌벌 떨고 있었다.
오송학은 눈앞에서 벌어진 유작의 죽음앞에
전신의 모든 피가 거꾸로 흐르는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무섭게 핏발선 눈으로 암흑마천주를 노려보며 검에 손을 가져갔다.
순간 암흑마천주의 섬뜩한 음성의 울려퍼졌다.
"무례하구나. 너는 스승의 마지막 유시를 거역할 셈이냐?"
오송학의 동작이 일순 얼어붙은듯 정지되었다.
암흑마천주는 황야의 바람처럼 스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의 스승은 본좌에게 부탁을 남기고 간 것이다.
너에게 보좌를 준비할 여유를 주게 해달라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느릿하게 등을 돌렸다.
"본좌는 너를 위해 여섯 관문(關門)을 만들어 놓겠다."
오송학은 바로 앞에서 자신에게 등을 보인 암흑마천주를 망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크다.
도저히 넘볼 수 없는 태산(泰山),
바로 그것이었다.
암흑마천주는 가슴의 옷자락 사이로 스미는 핏물을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든지 준비가 되면 오너라. 하지만 너는 알아야 한다."
"본좌에게 자신감이 없다면 이 자리에서 널 죽였으리라는 사실을.
너는 아직 무강보다도 약하다."
"냉무강..?"
순간 오송학의 몸이 벼락을 맞은듯 부르르 경련했다.
암흑마천주는 느릿하게 입구를 향해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본좌의 여섯째 제자(弟子)다."
"탈혼도와 구주대전장에서 보여준 그 기세로 본좌를 실망시키지 말아주길 바란다."
"잠깐 기다리시오!"
"나는 내 스승을 죽인 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고 싶소.
철립을 벗어주시오."
"내 얼굴은 보여줄 수 없다.
하지만 너의 스승이 상처를 남긴 내 가슴을 대신 보여주마."
암흑마천주는 천천히 돌아서며
핏물이 베인 가슴의 옷자락을 손에 든 검의 끝으로 벌려보였다.
"헉...!"
순간 오송학의 입에서 불같은 헛바람이 토해졌다.
선혈과 함께 그의 가슴에 내비치는 연꽃 문양의 붉은색 반점!
모친이 죽어가며 남겼다는 유언의 내용이 뇌리를 뒤흔든건 거의 동시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가슴에 연꽃 문양의 붉은색 반점이 있는 사람이예요.
오송학은 암흑마천주가 다시 몸을 돌려 장내에서 사라지는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이럴수가..어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오오.
이 무슨 가혹한 운명(運命)의 장난인가.
그렇다면 바로 암흑마천주가 부친이었단 말인가?
이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이건..절대 아니야.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오빠.."
요난아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오빠.."
오송학은 요난아가 무려 열 두 번을 불렀을 때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오송학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유작의 시신을 가르켰다.
"저기..손에.."
오송학의 눈에 순간 물결치듯 파랑이 일었다.
죽은 유작의 왼손에 뭔가가 쥐어져 있는걸 발견한 것이다.
그는 황급히 유작의 손에서 그것을 빼어들었다.
한통의 서찰이었다.
서찰을 펼치자 낯익은 필체가 나타났다.
<십만대산(十萬大山)에 있는 환영신부(幻影神府)를 찾아라.
예사령이 그곳의 낙안사(落雁寺)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결코 내가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나는 네가 대업(大業)을 이룰때까지 영혼이 되어 함께 있을 것이다.>
오송학의 눈에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대사부...!"
* * *
삶은 해후(邂逅),
이별 또한 해후(邂逅),
오늘은 이별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러나 너무나 무정하게 주어진 이별이다.
아아..
넌 어찌할테냐.
창공(蒼空)에 깎아지른,
태산(泰山)의 근심이라.
아아..
넌 어찌 할테냐..
구름을 잡으러 가는 바람,
바람을 잡으러 가는 구름..
눈 먼 바람,
눈 먼 구름,
그렇게 덧없이 흘러가는가.
목놓아 부르짖고 싶다.
피토하며 절규하고 싶다.
그러나,
끝내 너는 말이 없는가.
내 운명(運命)아!
아아..
넌 어찌 할테냐..
* * *
<대의(大意)는 숨어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서지 말 것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경동하지 말라.
대의정천맹(大意正天盟)에 소속된 모든 문파(門派)는
오늘 부로 봉문(封門)할 것을 명한다.>
오송학이 대의정천맹에 내린 세 번째 명령이었다.
대의정천맹-어떤 인물, 어떤 문파가 가입되어 있는지는 그도 자세히 모른다.
아니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필요할 때 서찰 하나면 얼마든지 인원(人員)을 충당받을 수 있고,
또한 그들에게 죽음의 명령도 내릴 수 있다.
안개의 장막 속에 숨쉬는 중원..
대의(大意)라는 대명분(大名分) 하나로 똘똘 뭉친 그들이기에..
그 명령에 따라,
제일 먼저 구파일방(九派一幇)이 동시에 봉문을 선언했고,
뒤을 이어 하남(河南)의 비검(飛劍), 하북(河北)의 은검(銀劍),
호북(湖北)의 예검(藝劍)등 삼검장(三劍莊)이..
계속해서 사천(四川)의 당문(唐門), 귀주(貴州)의 현문(弦門),
광동(廣東)의 독문(毒門)등 사문(四門)이..
뿐만 아니라,
문도(門徒) 십 인 정도에 지나지 않은 소문파(小門派)들로부터
녹림(錄林)의 수로맹(水路盟)까지 몽땅 봉문을 선언하니..
이것은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기사(奇事)로 기록될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운명(運命)의 날,
가정제(嘉靖帝) 오년(五年) 팔월십일(八月十日),
바로 그 운명의 날은 밝아왔다.
* * *
암흑일로(暗黑一路)는 감숙(甘肅)의 공동파를 궤멸시키고
난주(蘭州)를 거쳐 곧바로 장안(長安)을 향해 진격하라.
암흑이로(暗黑二路)는 산서(山西)의 항산파(恒山派)와
도대파(五大派)를 동시에 궤멸시키고 태원(太原)을 거쳐 낙양(洛陽)으로 진격하라.
---암흑삼로(暗黑三路)는 산동(山東)에서 서주(西州)를 거쳐 개봉(開封)으로...
---암흑이십사로(暗黑二十四路)는 항주(抗州)로 상륙해
태호(太湖)의 수로맹(水路盟)을 궤멸시키고 안휘(安徽)를 거쳐 무창(武昌)으로 진격하라.
암흑사로(暗黑四路)는...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혼돈시대(混沌時代)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이미 변방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원 전체를 고립시켜온 암흑마천의 거대한 힘이
드디어 노도처럼 대륙(大陸)으로 밀려든 것이다.
그것은 재앙(災殃)이었다.
허나 중원(中原)은 단지 공포에 떨고 있지는 않았다.
만승일기(萬昇一奇) 갈천극(葛天極),
그는 감숙(甘肅)의 제일기인(第一奇人)으로 숭앙받던 인물이었다.
십 세에 검(劍)에 뜻을 두었고,
삼십 세에 이르자 감숙의 무적(無敵)으로 인증되었다.
그런 그가 단필 준마(駿馬)를 휘몰아 일만(一萬)이 넘는 암흑일로군 속으로 뛰어들었다.
미쳤군, 그대는!
암흑일로군의 통령(統領)은 그런 그를 향해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결코 미친 것이 아니었다.
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중원의 열혈협혼(熱血俠魂)이었다.
그는 백여 명에 달하는 암흑일로군들을 죽였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죽였다.
실로 처절한 산화(散花)였다.
그런 만승일기 갈천극의 몸은 장창(長槍)에 꿰어졌다.
암흑마천에 항거하는 자는 죽음 뿐이다!
관산제일룡(觀山第一龍) 명지강,
그는 만승일기 보다 더욱 처참했다.
그는 부인과 딸이 간살되는 광경을 보아야만 했으며, 그 역시 처참히 당했다.
암흑오로군(暗黑五路軍)에 감히 대항한 대가였다.
태극일진자(太極一眞子),
그는 대의정천맹주의 명령대로 사흘 전 봉문을 선언했다.
원래 봉문이란 당분간 스스로 무림에서 발을 끊겠단 공언하는 것이기에
누구도 어떤 상황에서든 시비조차 할 수 없는게 무림금기(武林禁忌)로 되어 있었다.
허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신도문(神刀門)은 암흑이로군(暗黑二路軍)의 폭풍에 휘말렸다
. 태극일진자를 비롯한 삼천여 제자들은 사력을 다해 싸움으로써 중원혼을 불살랐다.
그러나 결국 신도문은 스산한 바람만이 이는 폐허(廢墟)로 돌변하고 말았다.
봉문을 가장하고 힘을 축적하고자 하는 문파는 쥐 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도륙한다!
대륙행상(大陸行商),
한때 천하의 상권(商權)을 잡고 흔들던 대하(大河)나
구주대전장(九州大錢莊)의 위세만은 못했지만,
대륙행상의 부(富)는 천하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만 했다.
헌데,
무림과 전혀 연관이 없는 그 대륙행상에까지 암흑의 핏빛 폭풍은 휘몰아쳤다.
암흑십팔로군(暗黑十八路軍) 일 만여,
그들이 대륙행상의 전 식솔들을 단 반시진 만에 모조리 죽이고
대륙행상의 모든 것을 갈취해 갔던 것이다.
구주대전장이 무너졌으니 각 암흑로군(暗黑路軍)의 물자 충당은 현지 조달한다!
그렇다.
암흑마천 이십사로군은 그 어떤 것도 꺼리지 않고
예정에 따라 중토의 중앙을 향해 진격해 들었다.
하루에 정확히 오백 리씩...
그들은 하나의 전설을 창조해 내고 있었다.
피의 전설을...
십팔만리 대륙천하(大陸天下)는 암흑의 공포천하(恐怖天下)로 돌변했다.
그렇게 정확히 보름이 흘렀을때
더이상 암흑마천의 앞을 막아서는 문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오..
너무도 쉽게...
너무도 무력하게 중원은 굴복하고 말았다.
거부할수 없는 숙명이었던가?
대륙은 어쩔 수 없이 굴복해야 했고,
굴복의 눈물을 흘리면서 한 사람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창람(蒼藍)의 하늘과 유일하게 비견되어온 인물,
벽라천궁(碧羅天宮)이라는 이 시대 최대의 거성(巨城)을 거느렸으며.....
백팔마녀대(百八魔女隊)의 혈사(血事)를 종식시켰던 장본이기도 한
벽라천군(碧羅天君) 금무천(金武天),
그가 끝까지 암흑마천의 싸움에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때문이었다.
* * *
후우우웅...!
곧 낙뢰(落雷)라도 떨어질 듯하다.
질풍뇌전(疾風雷電)이 하늘을 겁탈이라도 할 듯이 달려들고 있었고..
거성(巨星)의 성곽 위에 꽂힌 수만 개의 깃발이 산산이 찢길듯 사납게 펄럭이고 있었다.
무려 백여 리에 걸쳐 이어진 이 성벽(城壁)은 참으로 웅장했다.
<벽라천궁(碧羅天宮).>
성(城)은 예나 다름없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으나..
이곳의 분위기는 칠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르르-번쩍!
뇌전이 창공에 머리를 헤쳐 풀고 산산이 작렬했다.
그러자 먹장구름이 이내 거대한 폭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암흑의 저주를 받은 대지에 진정한 종말을 안겨주기라도 하려는 듯..
광풍폭우는 미친 듯이 광란하고 있었다.
쏴아아아...
만추밀모원(萬秋密摹院),
벽라천궁 후원(後院)에 위치한 거대한 정원이었다.
온갖 거목(巨木)들이 하늘마저 뻗어오른채 아래로 이어진 길을 가리고 있었다.
폭우가 퍼붓는 소롯길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이따금씩 번뜩이는 뇌전으로 인해 숲 전체가 한 순간씩 황금빛으로 물들 뿐..
빗방울마저 들지 못할 만큼 울울창창한 숲 속의 한 바위 위,
언제부터인가 한 사람이 바위와 하나가 된 듯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일신에 화려한 금색장포(金色長袍)를 걸친 인물...
호안백발(虎眼白髮)의 단정한 얼굴엔 감히 범접치 못할 위엄이 배인 듯 떠올라 있고,
전신의 기품은 물처럼 잔잔했다.
헌데,
그의 두 노안(老眼)에 어린 저 회한의 기색은 무엇인가?
"멋진 시작이었다.
유사 이래 두번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그러나 그것이 나 금무천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할 줄이야..."
금포인은 소리없는 탄식을 흘려냈다.
헌데,
오오.. 금무천이라니!
뉘라서 그 이름을 모르랴.
한때는 천하인들의 온갖 찬사를 한 몸에 받고 하늘이라고 까지 불리웠던 인물,
그러나 이제는 천하인들의 원망과 저주를 받고 있는 금무천이 바로 이 노인인 것이다.
"허허..칠십 년 동안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야.
이제 나는 그를 위한 그림자로 물러앉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무슨 말인가?
실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는데...
이때 비에 젖은 나뭇잎이 갈라지며 하나의 인영이 희끗 모습을 나타냈다.
허름한 회포(灰袍)를 걸친 삼십대 중반의 인물이었다.
차림새가 초라하고 손에 한 자루 전지(剪枝)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개 정원지기의 모습이다.
그렇다.
그는 만추밀모원을 돌보는 정원지기 왕당(王堂)이라는 자였다.
그는 벙어리였으며 백치였다.
적어도 그를 아는 벽라천궁의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알고 있었다.
벽라천군이 그를 향해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왕당, 비 오는 날도 가지를 치느냐?"
왕당은 대답 대신 백치같은 미소를 씨익 지어 보이고 등을 돌렸다.
왕당은 대답 대신 백치같은 미소를 씨익 지어 보이고 등을 돌렸다.
싹뚝! 싹뚝.!
왕당의 전지를 놀리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손놀림을 보이고 있었다.
일순 벽라천군의 두 눈에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났다.
그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왕당이 잘라낸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이어 그 가지를 살피던 그의 눈에 미미한 경악의 기색이 어렸다.
"활인신지(活引神枝).."
활인신지(活引神枝)라 했는가?
이는 잘렸으되 영원히 살아있게 된다는 나뭇가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고도의 내공(內功)이 없이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상승절예의 하나인 것이다.
헌데 그것이 왕당의 손에 의해 펼쳐지다니...
왕당이 벽라천군을 향해 시선을 던진건 바로 그때였다.
두 쌍의 시선이 허공에서 끈끈하게 얽혔다.
그리고 한 번도 열려진 적이 없었던 왕당의 입이 열렸다.
"대사백(大師伯), 그토록 기다리시던 활인신지이옵니다."
벽라천군의 백미(白眉)가 가볍게 꿈틀했다.
왕당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대사백께선 이미 저의 정체를 눈치채고 계셨으리라 믿습니다만.."
"음.."
벽라천군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무겁게 한 번 끄덕였다.
헌데 무슨 말인가?
왕당이 벽라천군을 향해 대사백이라 했고,
벽라천군이 활인신지를 기다려 왔다니..
벽라천군의 표정은 여전히 잔잔했다.
"그래. 네 말대로 이십 년 전부터 나는 너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너는 완벽하게 가장했다고 믿었겠지만 네 몸에선 간간히 네사부와 흡사한 냄새가 풍겼다."
"이제 내가 너의 사부를 위해 멋진 조역으로 등장해 줄 때가 온 것인가?
원래는 주역이 있어야 할 내가...허허..
하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모두가 나의 성급한 성격탓이었던 것이니..."
벽라천군은 느릿하게 왕당에서서 몸을 돌렸다.
"네 사부께 전해라. 사형(師兄)으로서 사제(師弟)의 멋진 진군(進軍)을 축하한다고...
아울러, 사형이 쌓아 놓았던 명예를 사제에게 바치겠노라는 말도..."
왕당은 숙연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멀어지는 벽라천군을 지켜보았다.
"정녕 크십니다. 대사백.
평소 사부께서 대사백을 존경해 마지않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요.
허나 당신은 암흑마천에서 버림받은 운명..."
오오...
무슨 말인가?
벽라천군이 암흑마천에서 버림받은 운명이라니..
바야흐로 실로 무서운 비밀 하나가 밝혀지고 있었다.
불쌍하신 분...
본래는 암흑의 대업을 스스로 이룩하셨어야 당신이었소..
하지만 당신은 태사조(太師祖)의 유명(遺命)을 어기시고
너무도 성급하게 천하를 가지려 하셨소..
그것은 암흑의 율법에 어긋난 행동,
그렇기에 암흑칠십이로의 천상암흑집회에서 천주(天主)로서의 추궁을 받으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팔마녀대를 키우신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소...
왕당은 그자리에서 언제까지고 움직일 줄 몰랐다.
헌데 벽라천군 금무천이 암흑마천의 전대천주(前代天主)라 했는가?
오오..
이는 실로 경천동지할 사실이 아닌가?
그렇다면 왕당은 또한 누구인가?
그는 말할 것도 없이 현 암흑마천주의 대제자(大弟子)였다.
백안귀재 여후량, 백빈영, 도남강, 예사령, 냉무강,
그리고 녹상아의 위에 있는 대사형(大師兄)의 신분인 것이다.
쏴아아아..
빗줄기는 도무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