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인대전 4
1
"넌 누구냐? 네놈이 둘째를 이렇게 만든 것이냐?"
당사혁이 분노해 소리쳤다.
감정이 극도로 고양된 탓에 목소리에는 내공의 힘이 담겨 있었다.
단지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당사혁의 모습이 그
럴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남자는 너무나 태연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그래, 내가 그랬지.'
"네놈..... 가만 두지 않겠다."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야."
남자가 숲 그늘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어둠에 잠겨 있던 그의 모
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음!"
당관일의 눈매가 좁아졌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평범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분명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남자의 몸에서는 무언가 불길한 냄새가 났다. 마
치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이 가장 고요하듯 남자의 몸에서는 고요한
박력이 느껴졌다.
당만혁이 남자를 보며 분노를 드러냈다.
"감히 당문의 사람을 죽이다니. 네놈이 앞으로 무림에서 발을 붙
이고 산다면 스스로 내 손목을 잘라 버리리라."
그러자 남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태곡에 들어왔던 모든 이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처참하게 죽어 가던 양민들이 당하면서 느꼈던 그 절망, 그
분노를 모두 느끼게 할 것이다. 죽어서도 오늘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
하게 만들어 주마. 비록 내가 오늘의 혈겁으로 지옥에 떨어진다 할지
라도. 이것이 나 적무강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이다."
푸드득!
그의 거대한 외침이 폭풍이 되어 숲 속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순간 새들이 기겁하여 하늘을 날고 짐승들이 그의 살기에 괴로워하며
날뛰었다.
살기가 넘치는 고함을 토해 낸 남자, 그는 적무강이었다.
소림사를 떠나 산서성에 도착해서 그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잿더미
로 변하다시피 한 문파들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로 인해 피
해를 보는 것은 인근의 주민들이었다. 관에서는 손을 놓고 그저 바라
보기만 할 뿐 개입할 의지 자체가 없어 보였다.
천왕성의 흔적을 쫓아 태곡까지 온 그가 본 것은 그야말로 목불인
견의 참상. 주민들 전체가 참살을 당한 데다 극독에 중독된 증세마
저 보였다. 주민들의 시체를 만지자마자 손끝을 타고 극독이 올라왔
다. 순간 화륜심결이 발동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주민들이나 근처에
쓰러진 무인들처럼 중독될 뻔했다. 단지 손끝의 느낌만으로도 적무
강은 그들이 얼마만한 극독에 중독되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분노했
다.
최소한의 도의란 것이 있다. 그리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제
아무리 칼밥을 먹고 칼날 위에서 잠을 자는 무림인들이지만, 자신들
끼리의 싸움에 양민들을 결코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최소한
의 도의이고, 지켜야 할 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은 그런 최소한 도의와 선을 무시했다. 양민들을 이용해 음모를 꾸미
고, 학살하고.
이들은 도대체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는 걸까? 힘이 없는 양민들
은 그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고 보는 걸까?'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적무강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서리서리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이제까지 그가 한 번도 보이지 않던 거대한 분노였다.
아직도 죽어 가던 아이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녀의 눈가
에 흘러내리던 눈물 한 방울이 적무강의 가슴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
켰다. 서문아 외에는 남의 일에 무관심했던 그의 가슴을 움직인 것은
여인이 죽어서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이었다. 그녀의 눈물이 적무강을
움직인 것이다.
적무강의 얼굴이 변했다. 그것은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
의 얼굴과도 같았다.
스릉!
그가 생사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당사혁과 당관일은 가슴의 기혈이 날뛰는 것을 느끼며 기겁
을 했다.
"너, 너, 감히 당문과 척을 지려 하느냐?'
당사혁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러나 적
무강의 눈동자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만약 오늘의 일을 당문에서 지시한 것이라면 당문도 가만두지 않
으리라."
"너 이놈! 감히.....!"
당사혁이 이를 부들부들 떨었다. 순간적으로 적무강의 기세에 위
축되긴 했지만 발밑에 누워 있는 당종혁의 시체를 보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쩌면 이곳에서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당관일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맹룡이 아니면 강을 건너지 않는다 했다. 눈앞의 남자에게서 풍기
는 기운은 분명히 맹룡의 기운이었다. 평범함 뒤에 감춰진 그 포악
한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이가 덜덜 떨려 왔다. 천왕성의 수괴도 가
슴이 떨릴 정도로 강했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 밑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스르릉!
마침내 적무강이 생사도를 완전히 빼 들었다. 그리고 당관일을 가
리켰다.
"당신, 분명 오늘의 혈겁에서 양민들을 배제할 힘을 가지고 있었
다. 그런데도 당신의 조카들이 날뛰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은 전적
으로 당신의 책임이다."
"그래, 그것은 내 실수가 분명하네. 하지만 더 큰 피해를 막고자
했던 일이네. 어쩔 수 없는 일이네, 대의를 위해서는."
"대의란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역겹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소수의 사람을 희생하는 게 너의 대의냐? 아서라. 너무나 역겹고 더
러워서 구역질이 난다."
"인정하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자네가 날뛸 이유는 될
수 없네. 자네는 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니까. 설마 자네
도 협사라고 자부하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잘 보게. 저들 천왕성을
가만두면 더 큰 참사가 중원 땅에 일어날 것이네. 이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시체의 산이 쌓일 것이고, 민초들은 피눈물
을 흘릴 것이네. 자네는 그래도 좋은가? 자네도 생각이 있는 자라면
도를 내려놓게. 그리고 우리를....."
"닥ㅡ쳐!"
화아악!
갑작 거대한 살기가 밀려왔다. 이에 당관일이 기겁을 하며 몸을
피했다. 그가 삼 장을 이동해 조금 전가지 그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
다. 그러자 가로로 길게 갈라진 땅이 보였다. 만일 그가 그곳에 그대
로 있었다면 그의 몸은 두 동강이 났으리라.
자신도 모르게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더러운 궤변, 역겹다."
순간 적무강이 살기를 토해 내며 당관일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당관일이 급히 뒤로 몸을 날리며 외쳤다.
"저자와 부딪치지 말고 피해라. 현재 우리로는......"
터ㅡ엉!
"숙부님!"
당사혁이 기겁해 소리쳤다. 그의 눈앞에서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
어지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느새 적무강이 당관일의 앞에 서 있었
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그의 발차기에 이제까지 무적으로
알고 있던 그의 숙부가 저 멀리 피를 흩뿌리며 튕겨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적무강이란 남자가 악귀처럼 그 뒤를 쫓고 있었다.
쉬악!
순간, 피를 뿌리며 튕겨 나가던 당관일이 몸을 뒤집으며 혈수를
펼쳐 냈다. 비록 내공의 태반이 유실되어 제대로 된 위력은 보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 하나 죽이는 덴 충분한 힘이었다. 그러나 그
가 펼친 혈수의 기운은 적무강이 흔든 일도에 너무나 쉽게 와해됐다.
"제길!"
당관일이 이를 악물며 연신 혈수의 절초를 펼쳐 냈다. 몸이 어떻
게 되든 내공이 얼마가 남았든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눈앞
에 악귀처럼 달려드는 남자를 떨쳐 버려야 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
는 너무나 간단하게 그의 절초를 파훼하며 달려들었다.
문득 남자의 눈가에 떠오른 진한 홍선을 보았다. 마치 지옥에 흐
르는 피의 강물처럼 선명한 홍선. 그리고 유리보다 차가운 남자의 눈
동자가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 경악하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
었다.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슈각!
"크하학!"
허리부터 양단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다.
불같은 통증이 뇌리를 지배했다. 그리고 그의 몸은 바닥에 떨어졌
다.
주르륵!
눈물과 함께 핏물이 흘러내렸다.
허리가 양단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지고한 내
공 때문이다. 그는 입술을 악물며 위를 보려 했다.
그의 눈에 하늘이 비쳤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도. 남자는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애원했다.
"제...발 저 아이...들을 살려...주게. 저...들은 당...문을 이끌
어 갈....."
푸욱!
순간 적무강의 도가 확대되면서 그의 의식이 영원히 끊겼다.
적무강은 당관일의 미간에 박았던 생사도를 뽑아내며 차갑게 중얼
거렸다.
"당신과 당신 조카들이 죽음으로 내몬 그들에게는 당신처럼 애원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비록 허리가 양단된 채 그에게 애원하는 당관일의 모습이 애처로
웠지만 그의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그는 이미 살계
를 열기로 작정을 했으니까.
"이놈, 감히 숙부를 죽이다니!"
"널 죽여 버리겠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참극 앞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당사혁
과 당만혁이 적무강을 보며 소리쳤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그들의 눈앞
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정신은 그야말로 공황 상태였다.
"이야아아!"
당사혁이 커다란 고함을 내지르며 팔을 내뻗었다.
슈슈슈!
허공이 온통 비침으로 빽빽이 물들었다.
적무강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터터터텅!
순간 비침들이 그의 앞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호...신강기?"
당사혁의 눈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분명 적무강의 앞
에 나타난 반투명한 막은 호신강기가 분명했다.
소림사에서 얻은 것은 비단 생사구류도의 후삼식뿐만이 아니다.
적무강은 면벽 수련을 통해서 새로운 내력의 운용 방안을 깨달았고,
그 결과 호신강기 또한 쓸 수 있게 되었다.
"젠장! 빌어먹을!"
당사혁이 분통을 터트리며 있는 대로 암기를 집어 적무강을 향해
내던졌다. 그러나 나타난 결과는 똑같았다.
"네, 네놈은 악마냐?'
당만혁이 입술을 벌벌 떨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적
무강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희들에게만큼은 얼마든지 악마가 되어 주겠다."
"으으으!"
그 살기 어린 목소리에 당만혁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당만혁은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저자는
왜 자신들에게 이러는 것인가? 그깟 무지렁이들 몇 명 죽여다고 이
리도 광분하는 건가?
도저히 그의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천에서 그들은 무소
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몇 명을 죽이더라도 그들에게 뭐라 할 수 있
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겨우 촌무지렁
이 몇 명 죽여다고 이리 분노를 한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너?"
갑자기 당사혁이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희미하긴 했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적무강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
이다.
"넌 십자성 철방의 그 장인?"
"그래! 용케 기억하고 있군."
적무강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겨우 한 번 보고 자신을 기억
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용서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문...혁이도 네놈이 죽였느냐?"
"문혁?"
"그래! 흑기대와 같이 갔던 내 동생 말이다."
"그놈이 문혁인 줄은 모르지만 흑기대와 같이 왔던 당문의 개새끼
하나를 죽인 적은 있었다. 죽일 작정으로 팼다. 결국 눈물을 흘리며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하더군. 제발 그냥 죽여 달라고. 그래서..."
"너......?"
".....그래서 그의 소원대로 해 줬다."
"으드득!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으아아!"
당사혁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눈앞에서 당관일과 당종
혁이 죽고, 그의 사촌인 당문혁마저 죽었다. 눈앞의 남자에게 지독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가 무공이 얼마나 되든 그것은 상관없었다. 지금
은 그저 눈앞의 남자를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을 뿐이다.
그가 성난 멧돼지처럼 달려들었다.
촤아아!
그의 몸에서 다시 폭우이화정(暴雨梨花釘)을 비롯한 수많은 암기
가 쏟아져 나왔다. 마치 하늘에 꽃비가 내리는 듯했다.
"만천화우(滿天花雨)인가?"
문득 적무강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스르륵!
그의 도가 미끄러지듯 횡으로 그어졌다.
그 어떤 기세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조도 없이 들이닥친
기운은 암기의 꽃비를 횡으로 가르며 지나갔다.
투두둑!
마치 거짓말처럼 하늘 가득 내리던 꽃비가 멈췄다. 수많은 암기들
은 기세를 잃고 바닥에 떨어져 내렷다. 그리고 그 순간 적무강은 이
미 당사혁과 당만혁을 지나치고 있었다.
철컹!
어느새 생사도는 도집으로 찾아 들어가 있었다.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곧 천왕성의 무리들도 뒤를 따를 테니."
적무강은 차갑게 중얼거리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 거기 안 서! 죽여 버릴.... 테다. 널..."
당사혁이 미친 듯이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적무강은 눈을 감
았다.
"움직일 수 있다면......"
"뭐?"
"어...! 어!"
그 순간 당사혁과 당만혁의 몸이 기울어졌다. 세상이 거꾸로 뒤집
히고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모든 것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투둑!
당사혁과 당만혁의 상체가 비스듬히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빛이 가득했다.
번쩍!
그 순간 적무강이 감았던 눈을 떴다.
"이제부터가 나의 전쟁이다."
2
장내는 이미 정리가 끝나고 있었다.
산서성에서 천왕성과 십자성의 격돌은 천왕성의 승리로 끝을 맺었
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낭혈문의 승리였다.
낭인들이 모여 만든 낭혈문, 태생이 낭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
보다 거칠고 포악했다. 그리고 피를 사랑했다. 강자존의 법칙에 그
누구보다 충실한 그들이었기에 죽은 자들을 슬퍼하기보다 살아남은
기쁨을 더욱 즐겼다.
좌천기는 그런 부하들을 보며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비록 천 명이 넘는 부하들을 잃었지만 아직 천 명에 가까운 부하
들이 남아 있다. 그 정도면 족했다. 어차피 약한 자들은 도태되고 또
다시 부하들은 보충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부하들이 진
정한 정예였다. 때문에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남들은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었지만 그것이 낭인들의 방식이
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모든 기쁨을 누린다. 죽은 자는 약해서
도태된 것일 뿐이다. 약자에게 동정은 필요 없다.
"그나저나 십팔령이 늦는군. 설마 당한 건가?"
좌천기는 아직도 귀환하지 않고 있는 십팔령을 생각했다.
실혼마인을 제조해 호위로 두는 것은 무엇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항명도 없고, 아니란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명령만 내리면 무조건
복종한다. 그래서 최측근에 놓고 쓸 수 있었다. 더구나 배신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그런 십팔령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단 한 가지를 의미했다.
"제법이군. 십팔령이 당하다니. 내 생각이 조금 짧았나 보군."
그가 내린 명령은 적들의 생포.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녀석
들이다 보니 어떤 변수에도 불구하고 생포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들이 당한 것도 이해가 갔다. 만약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
다면 한둘이라도 귀환했을 텐데.
좌천기는 입맛을 다셨다.
"쩝! 내가 부문주의 죽음에 너무 흥분했군. 하지만 사영이 그 녀석
만큼 충실한 녀석을 찾기는 힘든데. 아깝게 됐군."
그는 누구를 부문주의 자리에 앉혀야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무공
이 강한 녀석들은 많지만 교사영처럼 꼼꼼한 자는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낭혈문의 한계일지도 몰랐다.
"흠! 이번 중원 정벌이 끝나면 성주에게 우리 쪽에도 제법 머리
굴러가고, 머리에 먹물 좀 들어 있는 녀석들을 보내 달라 해야겠군."
좌천기는 그쯤에서 생각을 멈췄다. 더 이상 깊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복잡한 생각을 더 했다가는 그의
뇌 용량이 감당하지 못할 터였다.
그때 그의 부하 중 하나가 다가와 보고했다.
"문주님, 시체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이에 좌천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시체들을 모조리 태운 후 출발한다."
"알겠습니다."
부하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 후 좌천기의 시선이 숲 속을 향했다.
곳곳에 느껴지는 예리한 시선들.
"크! 저놈도 정리할 걸 그랬나?"
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십자성의 정예들은 모조리 죽였지만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십자
성이나 각 문파의 첩자들은 아직도 숨을 죽인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은신술이 뛰어나서 정체를 들키지 않고 있
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심각한 오산이었다. 만약 좌천기가
마음만 먹었다면 저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나 천하에 천왕
성의 위명을 떨치기 위해서는 저들을 모두 죽여서는 곤란했다.
"악명은 공포를 부르고, 공포에 전 상대는 상대하기가 수월하지.
크크크!"
좌천기가 키득거렸다.
그는 모사꾼은 되지 못한다. 깊이 생각해 보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으로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공포를 줄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타다닥!
시신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낭혈문의 무인들은 십자성의 시신들과 자신들의 편 중 죽은 사람
들의 시신을 한데 모아 태우고 있었다.
시신을 태우면서 지독한 악취가 숲 속으로 퍼져 나갔다. 생살을
태우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크흑!'
십자성 동천 소속의 밀영십팔호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
어막았다.
이제껏 음지에서 수많은 전장에 파견된 그였지만 이만큼 참혹한
현장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무인들끼리의 전쟁에서는 자신 편의 시
신만큼 상대의 시신도 인정해 준다. 대문에 어지간해서는 절대 건드
는 법이 없는데 눈앞의 이 늑대 같은 무리들은 그런 강호상의 최소
한의 예의마저 무시하고 있었다.
시체 타는 지독한 냄새에 코가 막혀 왔다.
'젠장! 이건 강해도 너무 강하다. 그래도 혈루십삼조면 십자성의
정예 중 하나인데 이리 상대가 안 되다니. 어서 이 사실을 십자성에
알려야 한다.'
십자성에서는 지금도 싸움의 결과가 날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운을 떼야 할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자신조차도 믿어지지 않는 결과에 선뜻 발길을 돌리기가 힘이 들었
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변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천황성은 동천에서 파악한 것보다 훨씬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마도육문 중 단지 일문의 힘이 이 정도일진대 나머지 힘까지
드러나면 도대체 어느 정도나 될 것인지. 암담할 지경이구나.'
밀영십팔호는 조용히 물러났다.
이자리에는 밀영십팔호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간자들이 곳곳에 숨
어 있었다. 그들은 오늘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본 충격적인 일들
을 자파에 보고를 할 것이다.
밀영십팔호에게는 그들의 동요가 감지되고 있었다.
'이제 물러나야 할 때이다.'
밀영십팔호가 조심스럽게 은신해 있던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기이한 느낌에 이내 몸을 멈추고 전방을 바라
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벅저벅!
처음에는 그 누구도 조그만 발자국 소리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
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기이한 힘을 가지고 울려 퍼지는 발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발자국 소리에는 사람의 시선을 모으는 기이한 마력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승리의 여운 속에서 환희에 심취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씩 그의 발에 모아졌다.
저벅저벅!
"저놈 뭐야?"
"글쎄? 처음 보는 놈인데."
"그럼 뭐야?"
낭혈문의 무인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남자가
나타나면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전장은
기이한 열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흐음!"
좌천기의 시선이 발소리의 주인에게 향했다.
처음엔 웬 놈인가 했다. 그러나 한번 고정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만큼 그의 모습에는 강한 흡인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피풍의를 바람에 흩날리며 낭혈문도들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 그
러나 거친 산바람에 머리가 흩날려 본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
다. 그는 전혀 망설임 없이 좌천기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낭혈문도 중 광무와 서초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
았다.
"우리 애들 중에 저런 놈이 있었나?"
"글쎄!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인데."
"흐~응! 그렇다면 우리 측 사람은 아니라는 이야기군."
광무의 얼굴에 잔인한 빛이 떠올랐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 낭혈문의 영역에 들어선 이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광무와 서초가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어이~! 거기까지다. 이 이상은 우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거기 멈춰라."
그들이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남자는 그들을 무시하고 지
나쳐 갔다.
광무와 서초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자신들을 무시했기 때문
이다.
"이놈이......!"
"감히!"
그들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남자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그들
은 커다란 참마도를 뽑아 들며 남자를 향해 휘둘렀다.
쉬익!
거대한 참마도가 남자의 목을 부러트릴 듯 다가왔다. 그러나 남자
는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츄화학!
순간 그들 사이에서 자욱한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크하핫! 시원하다. 그러게 뭣도 모르는 애송이가 무게나 잡고 말
이야."
"하여간 저놈들 성깔은 알아줘야 해. 혹시 다른 문파의 특사일지
도 모르는데."
낭혈문도들은 성급한 광도와 서초의 처사에 웃음을 터트리거나 인
상을 찡그리며 투덜댔다. 그러나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푸스스!
자욱하게 일었던 피보라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저벅저벅!
그와 함께 다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낭혈문도들의 얼굴
에 어려 있던 웃음이 싹 가셨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상황.
남자는 계속해서 걸어오고 있었고, 광무와 서초는 입을 떡 벌린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긴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방금 전에 일었던 피보라는 남자가 아닌 그들의 가슴에서 일어난 것
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남자가 무기를 뽑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
다. 심지어는 좌천기마저도 그가 언제 어떻게 무기를 뽑아 광무와 서
초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우르르!
광무와 서초의 시신이 그제야 무너져 내렸다.
좌천기의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제일대, 놈을 잡아와라."
"존명!"
순간 좌천기의 명을 받은 제일대 이십여 명이 남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놈! 무릎을 꿇어라."
"감히 낭혈문의 영역에서 살인을 저지르다니! 네놈의 간덩이가 부
었구나."
그들이 흉성을 터트리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그들의 손에
는 각종 무기가 들려 있어 보기에도 섬뜩한 위압감을 풍겼다. 그러나
남자는 전혀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이십여 명이나
되는 남자들의 공세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다.
"놈의 근골을 잘라라! 목 위만 숨 쉬게 만들도록."
일대주의 명령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제야 남자의 고개가 하늘을 향했다. 짙은 음영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얼굴. 문득 그의 눈가에 차가운 빛이 감돌며 한 줄기 홍선이 드
러났다.
스릉~!
혼잡함 속에서도 남자가 도를 뽑는 소리가 유난히도 사람들의 청
력을 자극했다.
슈아악!
그리고 남자의 도가 허공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러나 그의 도에서
는 그 어떤 기세도 일지 않았다.
"크하핫! 그래 가지고 모기 한 마리라도 잡을 수 있겠느냐?"
"도는 좋구나. 놈이 죽으면 저것은 내 거다."
금세 주위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보기에는 남자가 그
저 허공에 헛손질을 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투둑! 투두두둑!
그러나 그 순간 허공에서 피의 비와 함께 육편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뭐, 뭐야?"
낭혈문의 무인들은 순간 사태를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그
러나 그들은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이 곧 자신들의 동료라는 것을 깨
닫고 경악했다.
놀랍게도 아무런 기세도 일어나지 않은 일도에 스무 명의 남자가
도륙을 당한 것이다. 충격의 물결이 낭혈문도 사이를 관통했다.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다. 더 이상 내려가는 것은 내가 용납하지 못한다."
순간 이제까지 아무런 기세도 없던 그의 몸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풍겨 나와 사방으로 번져 갔다.
"크으으!"
"흐읍!"
남자의 주위에 있던 낭혈문의 무인들이 갑자기 전신을 조여 오는
살기에 답답한 신음을 토해 냈다. 거미줄에 걸린 나방의 기분이 이러
할까. 온몸의 근육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고, 전신이 오한으로 떨려
왔다. 평생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너는 누구냐? 너도 십자서의 조무래기냐?"
좌천기의 시선이 남자를 향했다. 그의 눈은 마치 남자의 모든 것
을 꿰뚫어 볼 듯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생각보다 담담한
시선으로 그의 강렬한 눈빛을 받아 냈다.
남자는 대답 대신 도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 모았다. 순간 불길한
빛을 내뿜으며 혈옥이 출렁였다.
"이게 내 대답이다."
순간 좌천기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문득 그의 입이 열렸다.
"얼마 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뺨에 흉터가 나 있는
여인을 위해 중원을 횡단한 미친 무인이 있다고. 그는 붉은색으로
빛나는 보석이 박힌 도를 휘두르며 십자성의 천라지망을 우롱하였다
들었다. 여인을 위해 십자성과 적이 된 남자, 도마..... 네가 맞느
냐?"
"......"
"맞구나! 그 미친놈이......"
순간 남자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드러나는 평범한 얼굴.
그는 적무강이 분명했다.
적무강이 낭혈문의 길을 막아선 것이다.
"크흐흐! 좋아, 아주 좋아. 한 번쯤은 만나고 싶었다. 너같이 미친
놈을. 네놈은 우리와 궁합이 아주 잘 맞을 것 같구나."
좌천기의 눈에서 붉은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광기였다.
지독한 광기가 좌천기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적무강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라."
"낭혈문의 역사에 후퇴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가지 않는다면 모두 벨 것이다."
"흐흐! 재밌군. 좋아! 우리를 모두 베라. 그러면 네가 이기는 것이
다."
히죽거리면서 웃는 좌천기의 눈에는 한 줄기 숨길 수 없는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정말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순간 적무강의 홍선이 더욱 짙어졌다.
"그래야 된다면 그러지."
"좋아! 이제부터 낭혈문과 도마는 생사대적이다. 누가 죽든지 끝
까지 간다."
좌천기가 적무강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자 낭혈문의 무
인들의 눈빛이 더욱 흉포해졌다. 그러나 적무강의 기세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단지 그의 눈빛이 더욱 우울해졌을 뿐이다.
"모조리 베어야 물러난다면 모조리 벨것이다."
꾸욱!
생사도를 잡은 적무강의 손에 힘줄이 도드라져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