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내 종교이자 남자친구, 무서운 선생님”
“오늘 강연 제목이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캐릭터’인 걸 보면, 저를 다양한 장르 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한 배우로 평가하신 것 같아요. 소재나 형식에 반복적인 요소가 있고, 그런 것들로 분류될 수 있는 게 장르일 텐데, 제가 출연한 영화 대부분이 장르에 맞추기 어려운 영화들이었어요. 왜 장르와 손 잡고 일하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면, 제가 인형 같은 외모가 아니라 사람 같은 외모를 가진 관계로 장르영화와 친해질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장르영화 배우들은 데뷔부터 정해진 타입이 있잖아요. 김지미씨는 모던 여성, 최은희씨는 고전 여성, 장미희씨는 지적인 여성, 그리고 문근영양은 국민 동생, 이런 식으로요. 저는 <오아시스>를 통해서 모든 이미지를 깨버렸다고 생각해요. 6월에 들어가는 것도 비장르영화인데, 그런 인연은 제 관심이 거기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도쿄 필름엑스에 심사위원으로 갔을 때 아시아 젊은 감독들의 영화를 보면서 자극받았고 많이 배웠어요. 돌아와서 시나리오를 보니까 천편일률적인 거예요. 아시아로 뻗어나가는 한국영화가 왜 산업 안에서 다 비슷해져가는 걸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고, 다른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졌어요. 그런 영화들이 한국영화가 발전하는 데 더 큰 디딤돌이 되고 자양분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죠. 다양한 캐릭터를 맡아한 것 같긴 한데, 그렇게 특별하거나 새롭진 않았어요. <박하사탕>의 순임이만 해도 구원의 존재로 나왔는데, 그런 캐릭터는 기존에 많았고요. <바람난 가족>은 전통적 도덕이나 관습에 저항한 캐릭터이긴 한데,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영화들에서 있어왔고요. 차이라면 결말이 다르다는 거겠죠. 옛날 같으면, 자비로운 남편의 구원을 받거나 처벌받거나 그랬을 텐데 그렇게 가지 않았으니까요. 색다른 캐릭터라면 <오아시스>와 <사과>가 그렇죠.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도 착한 이미지로 승부하지 않는, 정면으로 ‘나 재수없어요’ 하고 도전하는, 새로운 캐릭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더 새롭고 독특하고 도전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나타나고, 저도 그 안에서 할 일이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오기민 | 대학 시절 연극을 했고, 영화는 <박하사탕> 오디션을 통해서 시작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고등학교 때 최민식 선배님이 출연하신 <에쿠우스>를 보고, 엄청난 쇼크를 받았어요. 대학 가서 연극반에 들어갔고, 극단 사무실로 출근하기도 했어요. 졸업하고 나서 다시 서울예대 연극과에 합격했는데, 남자친구가 오디션 광고지를 건네주더라고요. 그래서 난 연극할 사람이다, 왜 헛바람을 넣고 그러냐, 막 화를 냈죠. 그랬는데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더 화를 내기에 남자친구 화 풀어주려고 갔어요. 대규모 공개 오디션이었는데, 1차 보고 나와서 마음이 바뀌었어요. 뭔가 해보고 싶어졌달까. 그러다 합격했죠. 감독님한테 여쭤보니까, 언제 찍을지 모르겠고, 반대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래도 연극과 가는 건 권하지 않겠다 그러셔서, 등록금 찾아다 엄마 드리고, 시간을 가졌죠. 난관을 뚫고 절 캐스팅해주셨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요. 오기민 | <박하사탕>은 사회적인 의미가 컸는데, 그런 것이 연기에 영향을 끼쳤거나, 생각에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었나요. =당시에는 무슨 얘긴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컷마다 감독님이 만족할 때까지 표현하는 게 과제였으니까요. 이 영화의 안티 스타 시스템은 제 삶에 큰 영향을 끼쳤죠. 신인감독의 가능성을 같이 열어주고 발견해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배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감독님께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이성욱 | <사과> 직전에 일상적인 연기에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다고 했는데요. 배우는 연기 속에 자신을 숨기게 되는 것 같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지. =저는 매끈하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것보다 거칠고 센 것에 더 어울리고, 그런 표현에 강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그럴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 <사과>를 택했어요. 내용도 캐릭터도 특별하지 않은데, 모든 게 어우러져서 영화가 잘 나온 것 같아요. 드러낸다는 것에 대해선, 진실이 중요하지 않은 풍토 때문에 더 감추려고 하는 것 같아요. 작품 안에서는 빗장을 열어야 하는데, 평소 닫아오던 것이 버릇돼 걱정이 들기도 해요. 오기민 | 연기 공간을 넓게 주는 이가 있을 거고, 틀을 짜주고 그 안에서만 움직이게 하는 이도 있을 텐데, 그런 기준에서 감독님들 얘기를 해주세요. =이창동 감독님과의 작업은 고난의 시간이에요. 가슴에 들어 있는 것을 코너에 몰아놓고 꼼짝 못하게 한 다음에 모든 걸 인정하고 직시하고 포기하게 하죠. 그리고 새로운 걸 연기하게 하세요. 뒤로 넘어갈 만큼 힘든데도 마약처럼 다시 당기는 그런 작업이에요. 임상수 감독님은 대사는 그대로 하게 하면서, 감독님과 비슷한 말투를 강요하세요. 몸은 자유롭게 해주는 편이고요. <효자동 이발사>의 임찬상 감독님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표현하려는 바가 있었지만, 엄마 부분은 여자를 잘 모른다면서, 제게 많이 맡겨주었어요. 오기민 | 남자 감독들이 여자를 모르고 못 다룬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분들의 여성에 대한 이해도는 어느 정도인가요. =대부분 남자 감독은 여성에 대해 판타지가 있거나, 자신을 억압하는 무서운 존재로 보더라고요. <바람난 가족> 때는 감독님을 많이 못살게 굴었어요. 멋있어 보이는 여자들의 모습을 모아서 만든 캐릭터에 불과하지 실제로 한국사회에 이런 여자는 없다고요. 여성에 대한 판타지에 강한 반면, 남자에겐 잔인하신 것 같아요. 이창동 감독님과는 나이 많은 선생과 학생이 얘기하듯 해서 잘 모르겠지만, 역시 판타지가 많으시죠. 남자의 인생을 회개하게 하잖아요. 여자가 속이 넓은 인간이다, 라고 인정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성욱 | <바람난 가족>의 캐릭터는 <처녀들의 저녁식사> 강수연 캐릭터의 아줌마 버전인 것 같아요. 지적인 자유주의자의 판타지적 측면이 있었겠지만, 진보된 여성 캐릭터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강수연씨 역할인 은호정이랑 이름도 같아서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저는 김여진씨의 아줌마 버전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몸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제로 그 여자가 얼마나 자유롭게 섹스했는지 나타나지 않아요. 감각적으로 정서적으로 예민해서, 몸이 원하는 것을 욕망을 찾아서 해결할 줄 아는 여자죠. 그게 그 여자의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살다보니 그게 어려운 일이란 걸 알겠어요. 오기민 | 가벼운 질문 하나 할게요. 촬영 없을 때 현장에서 무슨 일을 하나요. =어슬렁거려요. 차에 있는 거는 답답해서 싫어해요. 막내 스탭들 하드도 사주고, 다른 배우들 연기를 지켜보기도 하고. 오기민 | 자신이 연기한 부분을 전혀 안 보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남의 것까지 보는 배우가 있죠. =저는 보는 편이에요. 마음속엔 늘 자격지심이 있어요. 영화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고, 영화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연기는 컷할 때 즉각적으로 알거든요. 모니터 통해서는 다른 파트와의 조화를 보는 거죠. 그게 공부가 돼요.
이성욱 | 캐릭터와의 거리나 상호작용은 어떻게 하나요. =제가 달려가서 애원하는 경우도 있고, 그쪽에서 먼저 오는 경우도 있고요. 이창동 감독님이 ‘문고리만 잡으면 된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처음부터 문을 열어서 여기 내 방이네 하고 들어가는 것보다 지켜보고 만져보고 상상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문고리가 잡히는 순간에는 몸이 짜릿하고 너무 재밌죠. 근데 어떤 캐릭터는 문고리가 없고, 어떤 건 이상한 문고리가 달렸고 그래요. 오기민 | 평범하지 않은 역할들을 했는데, 그중에서 자신과 닮은 캐릭터는 뭘까요. =다 비슷한 구석이 있죠. 내면을 따지면, <오아시스>의 한공주와 가장 비슷할 수도 있어요. 낙천적인 것도 그렇고, 가끔 잘난 척하는 것도 그렇고, 집에만 있는 것도 그렇고. 감독님이 한공주가 겉으로 다가가기 어려운 캐릭터이기 때문에 안으로 다가가기 쉽도록 저랑 비슷하게 잡아주셨어요. 제 물건을 세트에 갖다놓게도 하셨고요. 그 캐릭터가 가장 가까운 것 같아요. 송강호 선배는 <효자동 이발사> 캐릭터가 가장 가깝다고 말씀하시지만. 오기민 |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바람직하다고 보는데요, 최근 관심있는 이슈가 있다면. =다 함께했으면 좋겠는데, 저에게 집중되는 건 부담스럽죠. 서운한 건 제 이름을 사용할 생각만 한다는 거죠. 더 다양한 사람들이 남들과 생각을 나누는 풍토가 됐으면 좋겠어요. 5월21일이 문화다양성의 날인데, 유네스코에서 문화다양성 협약을 만든다고 알고 있어요. 잘 해결돼서 스크린쿼터가 힘을 받을 수 있길 바라고 있어요. 라모네 교수 초청 강연도 있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고요. 오기민 | 하고 싶은 영화, 역할이 있다면. =몸을 많이 움직이고 싶어요. 다찌마리영화도 좋고, 스포츠영화도 좋고. 몸 움직이는 게 배우에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기력 떨어지기 전에 많이 해보고 싶어요. 좋은 영화 안에서 아름다운 배우가 되는 게 좋겠죠. 이성욱 | 매니지먼트가 영화 제작에 영향을 끼치는 변화를 계기로, 스타 파워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요. =욘사마는 일본에서, 장동건씨는 중국에서, 산업적으로 다른 비전을 제시하고 있잖아요. 상당히 유용하고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배우로서 제 행보와 큰 관련은 없을 것 같네요. 작고 다양한 영화를 하는 게 제 목표예요. 할리우드는 배우들이 제작에 나서는 경우가 많던데, 그들이 제작하는 영화들 중에 색다른 게 많더라고요. 노하우를 갖고 있는 제작사가 살아남고 보호받아야겠지만, 다양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같이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관객1 | 배우가 되길 권했던 눈썰미 있는 남자친구는 어떻게 됐나요? <효자동 이발사> 캐스팅 때 야구 보다가 불려나왔다고 들었는데, 어느 팀을 응원하던 중이었나요? <씨네21>은 스스로 대단한 매체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배우들에겐 어떤 매체인가요. =<박하사탕> 촬영 들어가면서 헤어졌는데, 결혼해서 아들 낳고 잘살고 있어요. 야구는 홈경기라고 대부분 LG를 응원하기에, 저는 두산을 응원했어요. 10 대 2로 이겼다는데, 끝까지 못 봐서 아쉽죠. <씨네21>은 영화하기 전부터 연정을 품었던 매체거든요. 그래서 발전된 모습 보이지 않아도, 사서 봐요. 영화 얘기할 수 있는 좋은 동료가 아닌가 생각하죠. 관객2 | <외계의 제19호 계획>이라는 단편에 출연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독립단편영화에 또 출연할 계획이 있나요. =여섯편 정도 했어요. 최근에도 민동현 감독과 단편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일정이 안 맞았어요. <봄산에> 이지행 감독의 단편 <호랑이 프로젝트>에 ‘여배우 문소리’로 잠깐 출연하기도 했어요. 단편 작업은 영화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그것마저 메인스트림에서 가져가선 안 된다, 신인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관객3 | 현재 남자친구는 있나요? <박하사탕> 때 먼길을 돌아가겠다 했는데, 그 맘이 변치 않았는지요. =여배우는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극단적이고 정서적인 여러 가지 면을 표현해야 하고, 자유로워야 하는 직업인데, 공인이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말로, 사생활에서까지 성인군자이길 바라더라고요. 저도 많은 남자 만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오랫동안 모든 한을 일로만 풀면서 살았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웃음) 그리고 돌아가든 질러가든 상관은 없어요. 산을 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무도 보고 꽃도 보고 산삼도 캐먹고, 그런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관객4 | <호랑이 프로젝트> 엔딩 크레딧에 ‘간식 제공 문소리’라고 되어 있던데, 간식으로 뭘 제공했나요? 또 하나, 예전 <키노>에서 정성일 편집장이 즐겨하던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배우님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야식부장, 이런 직책 맡는 거 좋아해요. 피자, 밥, 정종 같은 걸 제공했어요. 영화란 뭘까요? 그거 몰라서 계속 하고 있는 건데. (웃음) 영화는 종교 같은 존재이고, 가슴 설레게 하는 남자친구 같은 존재이고, 우리 가족의 밥벌이기도 해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해주는 친구이기도 하고, 무서운 선생님이기도 하고, 감사하게도 여러 가지 것이 돼주고 있어요.
“셰익스피어에게서 딜레마를 배웠죠”
이성욱 | 우선 <친절한 금자씨>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궁금합니다. 박찬욱 | 현재 편집까지 끝난 상태입니다. 오늘은 사운드에 대해서 처음으로 상의를 했습니다. CG나 디지털 색보정이라든가 그런 종류의 후반작업도 남아 있죠. 이 영화가 어떤 영화가 될지…. 확실한 것은 <복수는 나의 것>과도 다르고, <올드보이>와도 다르다는 점인 것 같아요. 그리고 세편 중에서 제일 이상한 영화…. (웃음) 그것도 확실해요. 이영애씨가 하는 행동이나 표정이나 말투나 이런 것이 무슨 생각으로 저러고 다니는지 잘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영화가 한 3분의 2쯤 갔을 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탁 수정하는 순간이 나와요. 갑자기 궤도수정을 하기 때문에 당황하게 될 거예요. 그것이 뭐 매력이라면 매력일 테고. 만약 그것이 실패하면 영화에 그동안 적응해온 관객은 굉장히 당황하고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다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내가 기자분들에게 미리 얘기해두겠는데 만약에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다면 그것 때문이라고 쓰시면 돼요. (웃음) 이성욱 | 7월 말이면 이 얘기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 같고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남동철 | 오늘 이 자리에서는 구체적인 영화 얘기보다는 감독님의 연출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그런 얘기가 됐으면 좋겠는데요. 먼저 과연 박찬욱 감독이 좋아했던 영화들의 궤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박찬욱 | 저는 어렸을 때는 TV의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 이런 데서 영화를 많이 봤어요. 대개가 할리우드 고전들이었죠. 제일 많이 본 영화는 어머니가 좋아했던 마빈 르로이 감독의 <애수>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수많은 서부극들이 기억나요. 서부극은 지금도 굉장히, 정말 노스탤지어를 갖고 있어요. 할리우드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자고 찾아오면 제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은 서부극을 만들고 싶다는 거예요. 정말 미국에서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고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처럼 비영어권 출신 감독이 성공시킨 전례가 있는 분야니까요. 그 다음에는 제임스 본드 영화를 좋아했어요. 예전 소년들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나 그런 것을 읽으면서 상상의 바다로 나갔다면, 저는 그런 영화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대학 들어와서 히치콕을 집중적으로 보게 됐어요. <현기증>은 그때나 지금이나 히치콕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모두가 좋아하는 그런 영화, 그런 감독이 아닌 작품들을 찾기 시작했는데, 아벨 페라라, 할 하틀리,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하게 됐죠. 그 이후에는 아주 본격적으로 영화광으로 살며 잡다하게 여러 가지 영화를 좋아하고, 반하고 그랬죠. 요즘에는 베리만 영화를 제일 좋아하고 늘 감탄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남동철 | 감독님의 영화는 모든 요소가 매끈한 채로 적당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떤 요소는 과잉된 채 존재하는 그런 영화가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그런 과잉의 영화에서 느끼는 특별한 매력이 어떤건지 궁금합니다. =어떤 영화를 만들 때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딱 생각하는 게 누구나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좀더 강하게 해야 그것을 제대로 수행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그 이유일 것 같아요. 히치콕이나 할리우드 고전감독들이 보여준, 완벽하게 안정돼 있고 조화로운 세계, 그건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 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아요. 그런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아주 한가한 짓이다라는 기분이 들어요. 적성에도 안 맞고, 지금의 격동하는 상황이 그런 조화로운 세계, 안정된 세계에 있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요. 남동철 | 미국 <빌리지 보이스>의 평 중에 감독님 영화가 현대영화의 지형도에서 셰익스피어와도 같은 영역을 차지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씨네21> 7주년 때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이야기의 갈등구조, 전개방식은 셰익스피어를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감독님이 셰익스피어에게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요. 박찬욱 | 셰익스피어가 다루는 사람들의 딜레마, 그것이 항상 그를 생각하게 하는 점이에요. 이렇게 할 것인가 저렇게 할 것인가, 지금 어떤 선택은 무시무시한 결과로 갈 수도 있고 그냥 안정되게 갈 수도 있다. 제 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도덕적인 딜레마는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햄릿>에서 햄릿이 숙부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지만 숙부가 기도를 하는 중이라서 물러나는 대목이 있어요. 기도하는 중에 죽이면 숙부가 천국에 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 아까운 기회를 버리는 거죠. 그 장면이 감동을 줬어요. 일단은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했어요. 약간 궤변 같고. 너무나 잔인한 생각인 게, 동기는 잔인한데 결과는 반대방향이라는 점이죠. 그런 폭력과 잔인성과 유머…. 윤리적인 문제에서 굉장히 복합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장면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언제나 폭력장면에서의 윤리성, 폭력이 수행되거나 연기될 때 윤리성에 대해 항상 생각하게 돼요. 남동철 | 또 캐릭터 형성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이나 발자크의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박찬욱 | 발자크의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의 책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니까 발자크를 통하면 수많은 사람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역시 윤리의 세계인데, 러시아 사람들의 성격은 어떤 원칙이나 세계관, 고민거리가 있을 때 대충 생각하고 치우는 게 아니고 그 근본까지 가야 직성이 풀린다고 하죠.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서는 철학, 사상이 생활이나 일상행동과 별개가 아니에요.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뜻밖에도 유머러스한 작품이 많아요. 예를 들어 <영원한 남편> 같은 것은 개그소설이라고 할 만큼. <죄와 벌>에도 웃기는 장면이 많이 나와요. <복수는 나의 것> 마지막 부분에 4명의 테러리스트가 송강호를 죽이는 장면은 어느 정도 <악령>에서 가져왔다고 할 수 있어요. 거기서도 역시 무정부주의자들인가, 그 사람들이 배신자를 처단하는 장면인데, 묘사가 너무 생생하고 긴장을 일으키는 장면이어서 마치 영화로 본 것처럼 기억이 아주 생생해요. 그때 기억을 갖고 만든 게 그 장면이에요. 남동철 | 예전에 데릭 엘리라는 평론가가 감독님 영화에 대해 ‘아시아에서 온 그리스 비극’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리스 비극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박찬욱 | 사실 <올드보이>는 노골적이라 할 수 있죠. 오대수의 혀를 자르는 행위나 딸과의 근친상간은 <오이디푸스>를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었어요. 처음부터 소포클레스를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근친상간 테마가 등장하면서 그런 시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르는 행위에 맞먹는 어떤 행위가 등장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애초 오대수의 행위는 성기를 자르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최민식씨의 반대가 워낙 컸기 때문에…. (웃음) 혀를 자르는 걸로 바뀌었죠. 그리스 비극에서는 항상 신의 의지, 농간에 의해 인간들이 움직이곤 하죠. 그러다보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질문을 던지게 돼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신들은 인간이 하는 노력을 지켜보다가 마음을 바꾸기도 하죠.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용하는 면도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신의 의지에 따르기도 하고, 맞서기도 하죠. 제가 묘사하고자 하는 주인공들은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운명과 맞서 싸우는 자예요. 패배가 예정돼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싸우려는 사람이죠. 시작할 때는 보잘것없었으나 그 투쟁의 과정에서 어떤 숭고한 아름다움을 획득하게 되는. 운명과 싸우는 사람의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숭고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남동철 | 감독님은 자신의 영화가 늘 구원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운명론이 굉장히 처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과연 어디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희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박찬욱 | <친절한 금자씨>에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웃음) <…금자씨>는 ‘복수 시리즈 에피소드3: 새로운 희망’이라고 할 수 있어요. (폭소) 아주 어리석고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행동을 하고 아주 잘못된 방식으로 속죄하려는 여자의 이야기인데, 그 여자의 구원을 향한 노력은 다 물거품처럼 돼버리죠. 그러나 관객이 금자에 대해 잘했다고는 못해도 ‘애썼다’, ‘수고했다’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라요. 그녀가 죽어서 천국에 가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는 수고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말하는 희망은 그 수고에 있어요. 그 길이 끝내 잘못됐다고 밝혀지는 길이라도 그 수고에 희망이 있다고.
관객1 | 혹시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에 감독님을 지탱할 가치관이 있나요. 박찬욱 | 이렇게 말로 드릴 만한 가치관을 정리한 건 없어요. 그냥 가훈이 있죠. 우리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되자마자 숙제로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아왔어요. 그래서 급조된 게 ‘아니면 말고’예요. (웃음) 그렇게 적어보냈더니 선생님이 무슨 뜻인지 알아오라고 했대요. 그래서 사람 힘으로 안 되는 일에 너무 매달려서 속썩이지 말자는 뜻이라고 했어요. 책이나 TV를 보면 뭐든지 사람의 힘으로 다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잖아요. 안 되는 걸 이룩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고 미련하고 불쌍한 일이죠. 안 될 건 빨리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하죠. 관객2 | <달은…해가 꾸는 꿈>으로 쫄딱 망하고 <3인조>로 또 쫄딱 망하고, 그런 뒤 <공동경비구역 JSA>을 하셨습니다. 그 긴 시간을 견디면서 빨리 포기하지 않은 것은 나중에 잘될 것을 알아서였나요. 박찬욱 | 솔직히 말하면 될 줄 알았기 때문에…. (웃음) 그때를 생각해보면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오기였겠죠. 그때는 곰곰이 생각해봐도 지금 활동 중인 감독이나 지망생 중 나만큼 영화를 잘 만들 것 같은 사람이 안 보였어요. (웃음) 그런데 실패한 두편을 근거로 생각해봤을 때 그렇게 스스로 믿을 만한 구석이 없더라고요. 앞으로 아주 괜찮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러니까 영화를 그만두는 것이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 과대망상이 있었으니까. 관객3 | 영화감독이나 셰익스피어처럼 학습적인 영향 말고 환경이나 주변 사람에 의한 드러나지 않는 영향도 있나요. 박찬욱 | 그건 제가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정보를 알고 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많이 하는 질문인데요. 거기에 대해서는 뭐 약간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어릴 때부터 가톨릭 분위기에서 자랐으니까. 그런데 한국 가톨릭은 좀 진보적인 성향이라 유럽인들이 제 영화를 보면서 연결시키는 그런 이미지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물론 죄의식의 문제라든가 아이콘이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풍성한 비주얼 요소는 영향이 있었겠지만.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죠. 어릴 때 동네 신부님이 부모님을 찾아와서 저를 신학교에 보내라고, 추기경감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성당에 안 가기 시작했어요. (웃음) 관객4 | 감독님은 여러 외국 웹사이트에서 추앙받고 칭송받는 수준입니다. 감독님의 작품을 사랑하는 팬 입장에서는 좀더 자본의 여유가 있고 상상력의 제한이 없는 미국에서 작품을 하는 게 세계 영화계에서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어떠한가요. 그리고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리메이크를 거절한 이유는 뭔가요. 박찬욱 | 샘 레이미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블 데드>를 리메이크해달라고 제의한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일본 감독들이 미국에서 다 공포영화로 진출하잖아요. 그렇게 아시아 감독이 공포영화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유행에 휩쓸리는 게 싫었고요, <이블데드>는 그때 그런 식으로 조잡하게 만든 게 좋았던 것 같아요. 많은 돈을 들여 만드는 건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할리우드에서 제안이 많이 들어오는데 다들 비밀로 해달라고 하니까 뭐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썩 매력적인 것은 아직 없었어요. 더불어 좋은 각본을 아직 못 읽어봤다는 것. 좋은 각본과 프로듀서가 생기고 이러면 못할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급할 것은 없다, 안 해도 그만이다, 이런 생각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