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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폴 시냐크(Paul Signac 1863~1935), 키스 반 동겐((Kees van Dongen 1877~1968), 앙리 망갱(Henri Manguin 1874~1949) 등이 이곳에 화실을 마련하고 작품 활동을 했고 앙리 마티스, 피에르 보나르, 앙리 루오, 앙드레 드랭, 라울 뒤피 등 많은 화가들이 이곳을 즐겨 찾았다. 특히 1956년 브리지트 바르도가 출연한「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는 그의 남편인 영화감동 로제 바댕이 생 트로페에서 촬영한 영화로 생 트로페는 이 영화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 후 브리지트 바르도는 이곳에서 배우로서 은퇴식을 갖고 정착했다. 특히 초창기 생 트로페를 유명하게 만드는데 큰 몫을 한 사람이 여류 소설가 콜레트(Sidosie Gabrielle Colettee 1873~195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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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생 트로페에는 유명한 라농시아드 미술관(Musee de L’Annonciade)이 있다. 필자는 유감스럽게도 이곳을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지만 휴관일이나 시간이 맞지 않아 미술관을 관람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라벤더 축제로 유명한 레 미제라블의 무대인 디뉴 레뱅을 가기 위해 다시 남프랑스를 갈 때는 반드시 이곳을 찾을 예정이다.
한국일보와 서울시립미술관이 주최한(2005년 12월3일~2006년 3월5일) ‘마티스와 불멸의 화가들’ 전 등 몇 몇 대형 전시에도 라농시아드 미술관 소장품이 한국에서 전시된 바 있다. 2007년 시인이자 사진작가인 강용원 선생과도 라농시아드 미술관을 찾았지만 아슬아슬하게 입장시간을 넘겨 미술관 관람을 포기한 채 생 트로페의 아름다운 낙조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날은 일진이 계속 나빠 마르세유에서 밤기차로 숙소인 몽펠리에로 가려했으나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마르세유에서 잠을 자야했다. 그러나 호텔 잡는 것도 여의치 않아 결국 가난한 이민자들이 묵는 싸구려 호텔을 구해 새우잠을 자다가 쥐가 무섭고 주변 환경이 으스스하여 새벽 6시경, 무조건 숙소를 뛰쳐나와 옛 항구인 비유 포르(vieux port)와 칸비에르 거리(La Canboere)를 방황한 기억이 있다. 그날 새벽 거리에서 필자는 북아프리카 이민자 같은 여인을 길에서 마주 쳤는데 4자녀를 데리고 항구 쪽으로 가고 있었다. 마르세유다운 풍경이었지만 왠지 남루하고 삶에 지친 모습이 가슴 아팠다.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렀는데 다시 생 트로페로 돌아가 보자. 생 트로페는 로마의 네로황제(AD37~AD68)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위해 순교한 로마 병사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도시로 지금도 매년 5월에는 성 트로페를 기리기 위한 축제가 열리고 있다. 생 트로페와 마찬가지로 이에르(Hyres)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등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자주 찾던 휴양지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나폴레옹과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수상스키와 헬스 리조트로 유명하지만 아직 주변 경관은 썰렁하다는 느낌이 들만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공간이 많음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군사도시 툴롱(Toulon)을 잠시 살펴본 후 마르세유로 갔다가 승용차로 카시스(Cassis)로 향한다. 필자가 외진 어촌 카시스를 찾는 이유는 폴 시냐크, 라울 뒤피(Raoul Dufy 1877~1953), 안드레 드랭(Andre Derain 1880~1954) 등 유명 화가의 사랑을 받았던 마을을 보기 위해서다. 카시스는 듣던 소문이나 관광 가이드북의 화려한 설명과는 달리 지극히 평범한 어촌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이나 남해안의 어떤 마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해안마을이다. 그런데 어떤 점이 위대한 화가들을 매혹시켰는지 필자로서는 잘 알 수 없었다. 특히 폴 시냐크는 카시스를 즐겨 찾았고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곳은 낚시터로 유명하고 해산물 요리와 고급 백포도주로 소문난 곳이어서 모처럼 큰 마음 먹고 마르세유보다도 더 유명하다는 생선 스튜 부아베스와 백포도주를 주문했다. 부아베스는 숭어, 도미, 뱀장어 등 바다 생선에 토마토와 사프린, 올리브유 등으로 향을 돋운 요리로 국물을 크루통 빵과 함께 먹으면 더욱 맛있는 식사가 된다는 생선 스프이다. 그러나 상식이 부족했던 우리는 이곳 카시스에서 부아베스를 먹을 수가 없었다. 마르세유의 부아베스 레스토랑보다 고급식당인 이곳은 최소 하루 전에 부아베스를 주문해야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으며 여행자가 쉽게 먹기에는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부아베스를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 대신 여러 가지 해산물 요리를 이 지역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솔직히 카시스에 대한 아름다움이나 감흥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날은 8월인데도 바람이 몹시 심했는데 청록색 불빛과 하얀 백악질 절벽이 지극히 아름답다는 관광 안내서의 설명과는 달리 다소 쓸쓸한 풍경이었다.
카시스에 아침 일찍 도착하여 점심 식사 후 2시간가량 휴식을 취한 다음 우리는 바로 마르세유로 향하였다. 렌트카로 약 20분 후, 마르세유 옛 항구로 돌아왔다.
마르세유 하면 떠오르는 것이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다. 1772년 프랑스 장교 루제 드 릴(Rouget de Lisle)이 작사, 작곡한 ‘라인 군대를 위한 군가’는 1792년 8월10일 국왕을 폐위시키고 9월21일 파리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을 때 마르세유를 출발하여 파리로, 또는 발미 전투로, 스트라스부르 전쟁터로 행진해 가던 마르세유 민병대(자원병)의 혁명 분위기와 사기를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엄숙한 찬미송가 대신 행진곡 형식의 이 군가는 처음에는 프랑스 공화국 군가로, 그 후 프랑스의 정치적 분위기, 계속 되는 전쟁 등으로 대중적인 인기가 높아지자 프랑스 대혁명 6주년인 1795년부터는 국민가요가 되었고, 1879년에는 국가로 공식 인정 되었다.
“내가 전진하면 나를 따르고 내가 후퇴하면 나를 죽여 다오. 내가 죽거든 복수를 부탁하오.” 프랑스의 젊은 귀족 앙리 드 라 로슈쟈클랭의 이 외침은 당시 프랑스의 정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듯이 라마르세예즈의 내용은 국가로 부적절할 만큼 호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나가자 조국의 아들, 딸들아… 시민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전투를 준비하자… 우리의 밭고랑이 적군의 더러운 피로 넘쳐날 때까지….”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이고 호전적 내용 때문에 지난번 프랑스 대통령 선거 때에도 국가를 바꾸는 문제가 쟁점으로 대두되기도 했다. 당시의 혁명적 분위기를 위대한 들라크루아의 스승이었던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Pierre-Narcisse Guérin 1774~1883)은 드라마틱한 수법의 뛰어난 역사화로 남겼다.
또 마르세유 하면 떠오르는 것이 마르세유의 축구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1899년 창단)이다. 마르세유는 프랑스의 어떤 도시 보다도 축구에 대한 열정이 많은 도시이다. 마르세유 팀은 2009~2010 리그(Coupe de la Ligue)에서 또 한번 우승하여 마르세유 시민들을 열광 시켰다. 역사적으로 마르세유에는 축구 영웅 장 피에르 파팽, 민머리 골키퍼 파비엥 바르테즈 등 스타들을 배출했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축구스타 지단(Zinedine Zidane)도 알제리 이민자 출신으로 마르세유 태생이어서 마르세유의 축구 열기는 언제나 뜨겁다.
마르세유는 인구로는 프랑스 제2의 도시이자 프랑스 최대의 항구도시로 가장 역사가 오랜 도시이기도 하다. BC 7세기에 소아시아 그리스 상인들이 건설한 마르세유는 그리스어로 마실리아로 불리었으며 BC 49년에는 로마에 복속 되었다가 15세기에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었다. 마르세유는 2600년 전부터 지중해 무역의 거점 항구로 발전해오면서 한때는 아를, 하이에, 앙티브, 라시오타, 니스 등을 식민지로 거느렸다. 북아프리카의 식민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더욱 발전한 마르세유는 나치 통치 때 레지스탕스의 중심지였고 독일군에 의해 도시 기능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산업도시이자 항구도시로 다시 큰 발전을 이룩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들은 마르세유를 예술의 도시, 세련된 문화도시라고 말하고 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마르세유는 문화의 도시, 예술의 도시라기에는 파리나 니스, 리용 등에 비해 세련되지 못한 도시라고 생각된다. 물론 마르세유에는 마르세유 역사박물관, 풍부한 소장품을 자랑하는 고대 이집트박물과, 아프리카 예술박물관, 그로메리박물관, 캉티드박물관, 모드(패션)박물관 등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내세울 것이 적은 것 같다. 그 이유는 지리적 특성상, 북아프리카의 관문이자 남부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로 여러 민족의 이민자로 이루어진 다민족, 다문화 도시인데다 항구의 거친 특성으로 마약거래 등 악명도 높아 프랑스의 시카고로 불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르세유는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도시 인구의 25%가 넘고 중동 아시아계, 이탈리아 이민자, 그리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럽 최대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도시다.
이 도시를 대표하는 예술가로는 문인이자 영화감독, 영화제작자인 마르셀 파놀(Marcel Paul Pagnol 1895~1974)과 시인이자 극작가인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 1868~1918)이 있고 조각가로 세자르 발다치니(César Baldaccini 1921~1998), 피에르 퓌제(Pierre Puget 1960~1694), 음악가로 경음악의 대부 폴 모리아(Paul Mauriat 1925~2006), 무용가 모리스 베자르(Maurice Bejart 1927~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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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조각가 세자르 발다치니는 나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필자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과장으로 근무하던 지난 1996년, 대규모 세자르 조각전(César, une rétrospective 1948~1996)이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렸다. 100여 점이 넘는 그의 대표작을 망라한 전시회로 미술계의 호응도 매우 컸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세자르 회고전 개막식에는 세자르가 직접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런 건강악화로 참석하지 못해 서운했던 기억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세자르 회고전시가 끝난 후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빌르타뇌즈의 승리의 여신상(Victorie de Villetaneuse)을 구입하여 상설 전시하고 있다.
세자르의 아버지는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로 마르세유에 정착하여 포도주통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가정 형편상 미술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던 세자르는 우연히 포도주통에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본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다. 세자르는 마르세유 미술학교와 파리미술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경제적으로 극히 힘든 삶을 살았던 세자르는 고물상 등에서 구한 철근 조각과 금속 파편, 거리의 폐품 등 버려진 잡동사니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거나 깡통을 압축하는 방법으로 조각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이는 예술적 관점보다는 경제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후 1965년 부터는 폴리우레탄 등 플라스틱을 끓여 페인트 통에 넣은 다음 액체를 바닥에 부어 흐르게 한 다음 빠르게 응고해가는 극적인 동작을 독특한 조형 방법으로 조각화함으로써 누보 레알리즘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구축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승리의 여신상)과 올림픽조각공원(엄지손가락) 등 국내에도 소장돼 있다. 여행 중 일본의 하코네 조각공원과 파리의 라데팡스에서도 세자르의 ‘승리의 여신상’과 ‘엄지손가락’ 작품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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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관에 전시됐던 엄청난 압축조각 ‘520t’을 세자르가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려 했지만 막대한 운송비와 과연 이 거대한 폐품덩어리를 받아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일부 미술계의 뜨거운 찬반 논란으로 결국 작품 인수를 포기하고 말았다.
또 이곳 출신의 조각가이자 건축가 겸 선박장식가인 피에르 퓌제(1620~1694)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그가 마르세유에 건축한 비에유샤리테(구 자선원)는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17세기 당시 부랑자와 고아, 가난한 이민자를 위해 지은 것으로 4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건물이었으며 마르세유의 부호상인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었다. 지금은 지중해 고고학박물관(Musée dé Archeologie Méditerraneenne) 등 문화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또 마르세유시청의 파사드에는 피에르 퓌제가 조각한 루이14세의 조각상이 마르세유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고, 마르세유 보자르 미술관에는 루이14세의 대리석 대형 작품이 전시돼 있다. 인근 툴룽시에도 시청 입구에 퓌제가 만든 여인조각상이 있으며 루브르박물관, 베르사유궁전 등에도 크로토바의 밀로, 알렉산더 대왕과 디오게네스 등 그의 대형 조각 작품이 전시 중인가 하면 리용과 제노바 등에도 여러 작품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가 설계한 도시계획 설계도면도 롱샹궁전(Palais Longchamp) 마르세유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마르세유 출신 예술가를 꼽으라면 마르셀 파뇰이 단연 으뜸일 것이다. 그는 가장 프로방스적인 인물이자 가장 마르세유인 다운 작가이며 프랑스가 자랑스러워하는 예술인이다. 2005년 프랑스 국영2TV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100명을 선정했는데, 마르셀 파뇰은 11위로 선정되었다. 연예인이 다수 포함되는 등 선정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둘러싼 논란 여부와 상관없이 마르셀 파뇰은 프랑스인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인 중의 한명임에는 분명하다.
마르셀 파뇰은 마르세유 동쪽 오베르뉴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마르세유에서 보내고 마르세유에서 영어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곧이어 극작가로, 소설가로, 영화감독으로, 영화제작자로 왕성한 활동을 했고 큰 성공을 거뒀다. 마르셀 파뇰 자신이 스스로 마르세유의 대명사라고 자랑할 만큼 그의 작품은 마르세유의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냈다. 그는 재즈(1926년), 토파즈(Topaze, 1928년), 빵집 마누라(La femme du boulanger, 1938) 등의 잇따른 성공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1952년에 펴낸 소설과 이를 영화화한 작품 ‘마농의 샘’(Manon Des Sources)이야말로 마르셀 파뇰의 대표작이자 지역적 특성을 가장 잘 살려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6년 클로드 베리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된 ‘마농의 샘’ 또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족으로 그의 묘비명이 너무 재미있다. 자신의 영화 ‘고동’(Le Schpountz)의 한구절인 “너무나 울어야할 이유가 많았던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남자”라는 글귀가 묘비명으로 되어 있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또 마르세유 옛 항구에서 배로 20여분 항해하면 이프섬이 있는데 이곳은 바로 알렉산드로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무대이다. 이 섬의 성채는 16세기 건립 당시 스페인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요새로 지어졌으나 그 후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루이14세에게 미움을 받은 철가면이 갇혔던 곳으로 관광객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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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의 대표적인 극작가인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1868~1918)도 빼놓을 수 없다. 로마네스크(1894), 사마리아 여인(1897) 등으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 1897)을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그의 작품은 2009년 우리나라에서도 연극으로 공연되고 책으로도 출판돼 주목을 받았다.
마르세유를 빛낸 음악인으로는 197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1000회 이상 연극하며 경음악 열풍을 일으켰던 작곡가이자 편곡자요,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폴 모리아가 있다.
그는 클래식 음악가였던 부모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음악적 소양을 기르고 파리클래식 음악학교에서 공부했지만 팝과 재즈에 심취, 가장 인기 있는 폴 모리아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폴 모리아의 대표작으로는 ‘러브 이즈 블루’(Love is blue), ‘블루밍’ 등이 있으며 2006년 81세로 타계했다. 그는 또한 ‘아리랑’과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편곡하였으며 1976년부터 ‘아리랑’을 유럽에 소개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인물로 20세기 발레의 전설, 20세기 발레의 혁명가로 불리는 무용가 겸 안무가인 모리스 베자르(Maurice Bejart 1927~2007)가 있다. 그는 한국 무용 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무용단 베자르 로잔은 2005년 대전문화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갖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