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 좋은 시 읽기___주경림
상처의 꽃에서 허상의 불꽃까지
주경림
무인無人 우주탐사선 ‘뉴호라이즌스New Horizons’가 태양계 끝에서 하트를 품은 명왕성 사진을 보내왔다. 명왕성을 행성에서 퇴출시켰음에도 지구인에게 사랑의 징표인 밝게 빛나는 하트를 선물했다. 실은 이 지형은 영하 230도의 명왕성 표면에 얼어붙은 가스 얼음 덩어리로 추정된다고 하지만 우연치고는 하트 모양이 너무 선명했다. 지구인들이 자신을 행성으로 명명하든 행성에서 퇴출시키고 ‘소행성134340’으로 부르든 상관없이 그 별은 우주에 존재한다. 크기가 작아서,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궤도가 다르다고, 주위의 위성들에게 지배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퇴출 이유는 지구인의 기준일 뿐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혹은 일터에서 동료를 퇴출시키는 잣대로 우주를 재고있는 것이다. 물방울 속에도 우주가 오롯이 들어앉는데 크기는 문제 될 것 없지 않은가. 수성, 금성, 지구 등과는 다른 궤도로 태양을 도는 그 별이 정형의 틀을 벗어나기를 꿈꾸는 시인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주위의 위성들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기보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자유주의자, 그래서 퇴출당하는 시인의 모습을 명왕성에서 본다.
이번 호에서는 일탈을 꿈꾸는 자유주의자인 시인들의 눈에 비친, 혹은 시인들의 마음밭에 피어난 꽃들의 이야기를 읽어본다.
■상처의 꽃과 소금꽃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꽃이다
우랄 시베리아
그 극지에서도 보란 듯이 활짝 핀다
다 받아주는 바다도
이 꽃만 피었다 하면 발광 환장한다
자양분은 꼭 상대가 뿌려준다
받아주다가, 받아주다가 받아버리는 바다
후폭풍은 진짜 무섭다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하라는 예수를 본받다가도
무료급식을 나눠주던 손이 즉시 무기로 변한다
이 꽃이 피면
심장은 아무리 떨림을 반복 훈련해도 소용없다
홀씨는 늘 가까운 데서 정탐한다
조율이 안 되는 사이에 느닷없이 뿌리를 내린다
──장상관, 「울화」, 『시와산문』, 여름호
장상관 시인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곱고 향기로운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꽃과는 전혀 종이 다른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꽃은 생장 조건이 열악해도 보란 듯이 활짝 핀다.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 피어나는 마음의 불꽃인 「울화」이다.
둘째 연부터 시인은 그 꽃의 발화 과정을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전개시켜 나간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있는데 그때 그때 풀지 못하면 만성적인 감정의 응어리인 울화가 생긴다. 울화로 인해 마음의 평정이 깨지는 상태를 “다 받아주는 바다도/ 이 꽃만 피었다 하면 발광 환장한다”라고 표현한다. 색과 향기로 주위를 아름답게 정화시켜주는 꽃의 미덕에 반하여 울화의 개화는 “발광 환장”으로 미친 듯 날뛰는 정상을 벗어난 상태로 변한다. 그래서 통제 불능으로 “받아주다가, 받아주다가 받아버리는 바다”로 뒤집힌다. 참을 만큼 참다가 폭발하는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낸다. “후폭풍”은 울화가 터져버린 후의 휴유증으로 황폐함과 상실에 대한 자책과 후회를 말하는 것이리라 짐작해본다.
셋째, 넷째 연에서는 그동안 마음을 닦고 실천해온 선행도 울화가 터지면 내공을 발휘하지 못함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용서하라는 종교적인 가르침과 무료급식을 나눠주는 자비의 손길, 나를 내려놓던 마음챙김 등이 일순간에 다 무너져버린다. 장상관 시인은 체념과 절망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울화와의 의도적인 화해를 시도하지는 않는다. 장밋빛 희망 보다는 이런 시인의 솔직함에 독자들은 더 끌린다. 섣부른 위로 보다는 아픔을 공유하는 그 자리에서 시인과 독자와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워질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울화의 홀씨는 늘 가까운 데서 기회를 엿보다 조율이 안 되는 사이에 뿌리를 내린다고 경고한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으로 점철된 삶과 죽음, 그 사이를 어떻게 조율해 나가야 하는지는 개개인의 몫일 것이다.
이어서 <정희수 시인 추모특집> 중의 시 한 편, 「내 꿈속에 꽃이 핀다면」을 읽어본다. 전북 문단 발전을 이끌며 한국녹색시인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쳐온 시인의 갑작스러운 비보가 안타깝기만하다. “시를 쓸 때는/ 유서를 쓰듯 눈물이 난다”(「유서를 쓰듯」)는 시인의 시처럼 그의 시를 읽으니 눈물이 난다.
내 꿈속에 꽃이 핀다면 촘촘히 누빈 소금밭 하얀 꽃으로 피어라
저렇듯 흰 바다 같은, 하얀 눈 덮힌 벌판 같은
하얀 눈물 가득히 천지간 일구어 하얗게 뿌려 놓은
물 속에서 흰 꽃이 되는
결정마다 반짝반짝 빛나면 가슴 속 사랑도 더디 만난 꽃일수록 더 아팠을 순도純度
짭짤한 시간이 더 할수록 간은 안으로 깊이 스며 영혼도 그리움같이 실컷 아프게 되는
사람들이 쳐놓은 그물코에 걸려 퍼득이다 미라가 된 소금꽃,
갈매기 입질에 끝내 순한 사랑은 물리지도 못하고 하얗게 표백된 상처 가슴 속에 짜디짜게 벤다
──정희수, 「내 꿈속에 꽃이 핀다면」, 『시와산문』, 여름호
정희수 시인은 시의 배경을 꿈속으로 가정한다. 분잡한 일상의 순간들에서 잠시 세속을 떠나 ‘꿈’이라는 무의식의 시공간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존재의 본질을 찾고자함일 것이다. 시인은 꿈속에서 “소금밭 하얀 꽃”으로 피어나기를 원한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희망 사항을 꿈속에서라도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다.
고운 색의 예쁜 꽃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시인은 꿈 속에서 소금꽃으로 피기를 희망했을까에 시 읽기의 초점을 맞추어본다. 둘째 연에서 소금꽃의 생성 배경으로 흰 바다, 하얀 눈 덮힌 벌판, 하얀 눈물, 흰 꽃 등이 등장한다. 하얀색에서는 일반적으로 밝고 환한 느낌과 함께 결백, 순결의 깨끗함, 청초함, 숭고함, 진실 등의 의미가 연상된다. 또한 눈물은 원초적 감정의 산물로 거짓이 없는 순수한 결정체이므로 “하얀 눈물 가득히 천지간 일구어 하얗게 뿌려 놓은 물 속”은 꿈속 중에서도 특별히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지역을 가리킨다. 셋째 연에서는 소금꽃 결정체를 이루는 순도에 대해 언급한다. 햇빛과 바람의 힘으로 바닷물의 수분을 증발시켜 얻어지는 소금 생성에 걸리는 시간이 더디게 걸린 만큼 더 아팠을 정화의 시련 과정으로 본다.
“짭짤한 시간이 더 할수록 간은 안으로 깊이 스며 영혼도 그리움같이 실컷 아프게 되는” 시련이 부패를 방지하고 그리움의 아픔까지 싱싱하게 간직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얗게 표백된/ 상처 가슴 속에 짜디짜게 벤다”는 개인적 고백의 애절함이 읽는 이의 가슴마다 소금꽃의 씨앗을 심어준다. 시적 화자의 내면적 삶의 깊이가 그대로 배어나오는 고독한 영혼이 우리가 그동안 잊고지내던 자신의 모습을 한번 뒤돌아보게 해준다.
“마지막 숨 멎을 때까지 자신을 찾는 여행”을 계속하기를 원했던 시인이기에 지금은 아마 푸른 하늘 흰 구름 밭에서 소금꽃을 피우고 있지 않을까.
■핏빛 주먹과 욕망의 불꽃
베란다의 제라늄이 2미터 가까이나 자랐다
겨우내 아기 얼굴만한 꽃판을 끝없이 밀어 올렸다
환幻을 몽이라 읽듯, 몽夢을 환이라 쓰듯
숭어리 숭어리 핏빛 주먹이었다
꽃의 역사는 철저히 투쟁적이다
안정적인 가드 자세는
주먹만한 화분 밑바닥까지 내려간 뿌리에서 나온다
어느 순간 잰걸음으로 툭툭 라이트 레프트의 잽
어퍼컷, 어퍼컷
더불 펀치를 연속으로 먹이며 방심한 허공을 가격 중이다
조이는 발목 부어오른 발등 휘어지는 허리─
아귀는 아귀를 불러
주린 짐승이 눈시울까지 번질 때
거리와 스텝이 엉길 땐 옆구리를 내주어 클린치
허공에 온몸을 던져 허공의 어깨에 기대기도 한다
점점의 환幻을 모아 한 생의 몽夢을 그리듯,
투명한 그늘을 풀어 필생의 그림자를 앉히듯
어퍼컷, 어퍼컷
두어 송이 트로피 또 밀어 올린다.
──안차애, 「어퍼컷, 꽃」, 『문학과창작』, 여름호
안차애 시인은 베란다의 제라늄이 꽃피우는 과정을 권투 시합의 공격 자세에 비유하고 있다. 하들하들한 연약한 붉은 꽃잎들이 모여 이룬 제라늄 꽃송이에 “숭어리 숭어리 핏빛 주먹”이라니 섬뜩함 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묘하게도 “핏빛 주먹”의 생소함에 강하게 끌렸다. “꽃의 역사는 철저히 투쟁적이다”라는 시인의 표현에서 꽃 뿐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무릇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의 생존 자체가 그럴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짝 「어퍼컷, 꽃」에게 다가갔다.
찰나적이고 연약한 세계, 고요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며 꽃 피우는 과정을 빨리 돌리기 영상으로 보여주듯 역동적이다. 권투시합 경기에서 들어본 펀치 날리기의 용어들, “라이트 레프트의 잽”, “어퍼컷, 어퍼컷” 등이 꽃의 생명성을 드러내는 시어로 전환되었다. 시인의 시작 노트에 의하면 조그만 화분에서 시작한 제라늄의 뿌리가 얹어두었던 밑의 화분까지 뻗쳐 잭의 콩나무처럼 자라나 꽃을 피우고 또 피워 베란다의 난초와 벤자민, 행운목을 시종처럼 거느리고 챔피언처럼 자리잡았다고 한다. 시인은 그 모습에서 모티브를 얻어 처절하고 투쟁적인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안정적인 자세로 공격할 수 있는 근원은 화분 밑바닥까지 내려간 뿌리에 있음을 상기시키는데 모든 주먹을 그대로 받아주는 허공이 있어 피우는 꽃, 그래서 더욱 환희롭다. “방심한 허공”이 바로 생명을 꽃피우게 하는 하늘의 참모습일 게다. 마음을 놓아 풀어버린 허공이 있어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는 『금강경金剛經』의 가르침처럼 환幻을 몽이라 읽고 몽夢을 환이라 쓰고 투명한 그늘을 풀어 그림자를 앉히는 꽃 피움이 가능할 것이다.
“조이는 발목 부어오른 발등 휘어지는 허리” 등의 현실적인 곤란과 장애와 불확실한 미래를 “허공에 온몸을 던져 허공의 어깨에 기대기도” 하면서 밀어붙이는 제라늄의 꽃피우기는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을 투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생명이 자라 꽃피울 만한 옥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주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여 있는 그 자리에서 온 힘을 다해 어퍼컷, 어퍼컷 밀어올리는 것이다.
청담동 99번지에서 샹젤리제보다 더 화려한
세계적인 불꽃놀이가 열린다 하네
거리마다 구석구석 불꽃들로 즐비하고
화려한 의상의 아가씨들도 으스대며 활보하네.
뤼이비똥, 구찌, 패라가모 가방을 어깨에 메고
발은 발리신발로 동여매고, 귓불 뒤와 소매 끝에
최고의 샤넬N5 코코마드모아젤 오드를 톡톡 부려
오가는 이의 코끝을 유혹하고 있지
불꽃의 제왕들은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우며
브랜드에 빠져있는 고객들을 유혹하니
환한 보름달 한아름 안고 나온 여인천하 되어
곳곳마다 발디딜 틈 하나 없네.
불꽃들을 바라보는 생각과 미소들은
서로 다른 허상
그 허상의 불꽃을 가슴에 품겠다는 마음만은
숨길 수도 지울 수도 없겠지
그러나
불꽃들이 자신을 달구는 혼魂불이든 아니든
손끝의 향기이든 아니든 아랑곳하지 않네.
피어오를 불꽃을 마음에 떠올려 보며
불꽃들은 청담동 99번지에서
밀라노의 꿈이 익어가겠지
──류현, 「불꽃-명품」, 『미네르바』, 여름호
앞서, 안차애 시인이 제랴늄의 꽃피우기를 통해 투쟁적인 생존전략을 보여주었다면 류현 시인의 시적 모티브는 청담동 명품거리의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판매 전략이다. 식물과 상품이라는 판이한 성격이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2015년 『애지』 상반기 신인상으로 등단한 새내기 류현 시인의 눈을 따라 청담동 불꽃놀이를 구경가본다.
경기 불황에도 특수 소비층의 구매액이 꾸준히 증가하던 곳이 한국의 명품 시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명 백화점이나 청담동의 명품 판매장도 메리스의 충격으로 대규모 할인행사를 앞당긴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작년 재고가 아닌 올해의 봄, 여름 상품이라하니 귀가 솔깃해진 소비자들은 달려갈 것이다. 필자의 관심사는 아니기에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시로 돌아가보자. 청담동 99번지에서 열리는 불꽃놀이는 소비자의 마음에 불꽃 심지를 당겨 소비 욕구를 자극하고 조장하기 위함이 목적이다.
시의 상반부는 우리도 익히 들어서 알만한 상표들의 입성으로 활보하며 그 유혹에 몰려드는 여인천하를 묘사하고 있다. 생산자의 마케팅인 “불꽃의 제왕들”의 불꽃놀이 광고로 소비자를 유혹하고 여인들은 부나비처럼 몰려드는 풍경이다. 하반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명품이라 할지라도 물질이 사람의 욕망을 채워 행복하게 해줄 수 없기에 불꽃 광고와 그것을 바라보는 생각과 미소들도 서로 다른 허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줄은 알지만 “그 허상의 불꽃을 가슴에 품겠다는 마음만은/ 숨길 수도 지울 수도 없겠지”라고 유혹에 약한 소비자의 마음을 대변한다. 시인은 위압적으로 세태를 한탄하는 자세가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있다. “불꽃들이 자신을 달구는 혼魂불이든 아니든/ 손끝의 향기이든 아니든 아랑곳하지 않네”라는 구절을 읽으며 마음 한 구석이 허진해졌지만 어쩔 수 없는 허상의 불꽃놀이 신풍속도인 셈이다.
■눈사람의 다비식
아이들의 나라에
사람이 죽었다
문상 오는 사람이 없어
겨울햇살이 대신
다비를 하고 있다
나뭇가지에
참새 한 마리 날아와
짹, 짹, 짹,
몇 마디 울다 간다
한 사람의 짧은 생에가
연기 한 점 없이 타고 있다
깨끗하게 살다
깨끗하게 떠나는
눈사람의 다비식이다
──김진광, 「다비식茶毘式」, 『시와산문』, 여름호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줄 시 한 편, 눈사람을 소재로 한 아동문학가이기도 한 김진광 시인의 「다비식茶毘式」을 읽어본다. “아이들의 나라에/ 사람이 죽었다”로 시작하는 첫 연은 결론을 먼저 보여준 것처럼 사뭇 돌발적이다. 게다가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어 간결체의 문장이지만 긴장하게 된다. 그런데 “아이들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아이들의 눈높이로 낮추어야 한다. 동심으로 돌아가면 겨울햇살과 참새 한 마리가 문상객의 전부인 그 죽음 앞에 눈물과 슬픔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시인은 눈사람이 겨울햇살에 녹아내리는 과정을 “한 사람의 짧은 생애가/ 연기 한 점 없이 타고 있다”라고 시를 전개시킨다. 죽음의 무거움과 슬픔을 걷어내고 아름답고 환상적인 영상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설핏한 겨울햇살의 다비식이기에 그리 뜨거울 것도 없고 눈사람이 녹는데 연기 한 점 날 리 없지 않은가. 그야말로 눈사람이기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눈사람이 햇살에 절로 녹는 과정을 다비식으로 전환시킨 시인의 눈길이 놀라울 뿐이다. 그 전환의 과정을 통해 독자들도 삶과 죽음, 슬픔과 기쁨을 넘어서 탈속한 정신적인 고양을 경험하게 된다. 한 생각, 한 모습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에 관계없는 본래면목의 그 자리가 환하고 서늘하다.
김진광 시인의 쉽게 읽혀지는 시가 결코 쉽게 쓰여진 것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웅숭깊게 생명의 무상함에 대해 생각해온 내공이 쌓여 빛을 발한 것이다. 「다비식茶毘式」은 불교 의식의 엄숙함도 벗고 시인이 가장 낮은 자세로 얻은 순수성으로 피워낸 시의 꽃이다. “깨끗하게 살다/ 깨끗하게 떠나는” 눈사람의 다비식은 독자의 가슴에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바램과 함께 현실적인 답답함을 잠시 잊도록 한 줄기 바람을 선사한다.
■끝맺으며
장마가 끝날 즈음 한여름 뙤약볕 아래 목백일홍과 상사화가 한창이다. 목백일홍은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가을 초입까지 화려한 꽃의 향연을 펼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상사화는 잎이 다 져버려 바람에 꺾일 듯 가냘픈 꽃자루 끝에 매달린 연분홍 꽃잎이 애처로워보인다. 꽃들이 저마다의 생존방식으로 색과 향기를 발산할 때 시인들의 마음밭에도 시의 꽃들이 피어났다. 만성적인 감정의 응어리인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꽃인 장상관 시인의 「울화」, 순수의 결정체인 정희수 시인의 “소금밭 하얀꽃”, 안차애 시인의 철저히 투쟁적인 「어퍼컷, 꽃」 등이다. 또한 청담동을 배경으로 명품에 현혹되는 류현 시인의 “허상의 불꽃”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김진광 시인의 “눈사람의 다비식”으로 식힐 수 있었다.
우연히 지나가다 동네 주민센터 건물에 붙은 현수막에서 “화火를 화花병에 꽂아라”라는 글귀를 보았다. 시인과 함께 하는 마음다듬기 프로젝트라고 한다. 그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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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림 /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씨줄과 날줄』, 『눈잣나무』, 『풀꽃우주』가 있음.
출처: 시와산문 그리고 시와녹색 원문보기 글쓴이: 김명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