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3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마태오 21,28-32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의로운 길’이란?
오늘 복음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이는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나갑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엔 좋다고 했지만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1-32)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이 알려준 ‘의로운 길’을 믿고 안 믿고에 따라 하느님 뜻에 순종하고 순종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느님 뜻을 그냥 따르면 되지 굳이 요한을 만나서 그가 알려주는 방법을 믿고 따라야만 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는 하느님 뜻을 따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요한이 알려준 ‘의로운 길’이 무엇일까요?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스도께 이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피를 흘려 문설주에 발라져야 하고 살이 먹혀야 하는 운명입니다.
곧 이스라엘 집과 살과 피로 하나가 되는 운명을 말합니다. 이것으로써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하신 말씀과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묵상합시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19-20)
왜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할까요?
그 이유는 그래서는 율법, 곧 하느님 뜻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입니다.
요한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자기 힘으로 하느님 뜻을 실천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하느님 뜻이 실천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행위를 중요시하는 유다인들은 요한을 믿지 않았지만, 오히려 죄인들이 요한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믿음으로 구원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스윙댄스의 대표주자인 김잔디 씨 이야기입니다.
스윙댄스는 째즈 음악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음악이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뜻을 내 몸으로 담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작정 배우면 될까요? 김잔디 씨는 처음에 남성들과 경쟁하는 업체에서 상도 많이 받고 잘나가는 직장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여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친구는 몸치, 박치였던 잔디 씨를 믿어주며 “얘는 챔피언이 될 애예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거의 남성 혐오증에 시달리던 잔디 씨는 남성들과 땀을 흘리며 손을 잡고 춤을 추어야 하는 스윙댄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의 믿음, 또 자신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3년 동안 댄스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챔피언이라는 증명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직장을 때려치우고
영어 한 마디도 못 하며 미국으로 건너가서 스윙댄스 대회에 참가합니다.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복장도 있어야 하고 준비된 음악과 남성 파트너, 그리고 잘 짜진 안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자신과 파트너가 되어주겠다는 키다리 아저씨를 만납니다.
그 미국인은 김잔디 씨가 어떤 복장의 옷을 입었는지, 그가 어떤 박자를 원하는지 딱 두 개만 묻습니다.
그리고 청바지를 입으면 안 되는 규정이 있음에도 자신도 청바지를 입고 키 작은 김잔디 씨를 자기 코트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무작정 무대로 던져버립니다.
얼떨결에 무대로 튀어나온 김잔디 씨는 어떻게 춤을 추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없이 무아지경으로 춤을 춥니다.
그리고 첫 국제대회에서 1위를 수상합니다.
째즈 음악을 춤으로 표현하려면 먼저 내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체력장 5급 받은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친구가 그랬고 처음 자신에게 용기 있게 춤을 춰 달라고 해도 믿어주고 함께 맞춰주었던 키다리 아저씨도 그러했습니다.
10년 차 때 돈이 안 되는 이 춤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90세가 넘은 스윙댄스의 전설인 노마 밀러라는
키작은 흑인 댄서의 말도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고 하며 따를 수 없는 이유는 자기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믿음을 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이 없으면 무아지경, 곧 나를 버리고 노마 밀러가 되어 춤을 출 수 없습니다.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면 하느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교회에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2017)에서는 토르는 헬라라는 엄청난 힘을 지닌 여왕과 싸웁니다.
헬라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토르를 압도합니다. 토르는 망치의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헬라가 망치를 부수어버립니다.
토르는 망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망치 없이는 이길 수 없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자기 망치에 의지해왔기 때문입니다. 헬라는 말합니다.
“나는 죽음의 신이다. 너도 무슨 신이긴 했었지?”
그런데 돌아가셨던 아버지가 나타나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망치의 신이었냐?”
토르는 사실 천둥과 번개의 신입니다.
망치는 그저 그 힘을 제어하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분명 그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떤 도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은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은 내 안에 계신 바로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은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은총으로 나와 하나가 되시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성모 마리아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신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야만 합니다.
그것을 각성하게 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를 찾기보다는 내가 가능한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은총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드는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말씀이 되어야 하느님 뜻이 나를 통해 이뤄집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은총이 가득하신 채로, 하지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않으신 채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다면 엘리사벳에게 어떤 도움이 되셨을까요? 인간적인 도움을 되실 수 있지만
하느님의 도움, 곧 성령으로 가득 차게 만드시는 그런 도움을 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둘째 아들이 노력으로 하려고 하다가 포기하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나를 통해 일하게 할 때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길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먼저 되어야만 하느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3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마태오 21,28-32
건방진 당나귀는 하루 온종일 불상(佛像) 대신
무거운 바위를 몸에 싣고 날라야만 했습니다!
동물 중에 꽤 재미있는 녀석이 당나귀입니다.
말과에 속하지만 말보다는 훨씬 인물이 떨어집니다.
체구도 작고 웃기게 생겼습니다.
속도도 느린 관계로 주로 짐을 운반할 때 활용됩니다.
어떤 사람이 당나귀 등에 멋진 불상(佛像)을 안치하고 돌아다녔습니다.
불심(佛心)이 있는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깊이 절을 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당나귀 목에 걸린 불전함 속에 헌금을 넣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절을 하니 당나귀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한다고 여기고 우쭐해졌습니다.
고분고분하던 처음과는 달리 당나귀는 점점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건방진 녀석으로 변해갔습니다.
당나귀는 주인이 자기 때문에 먹고 산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조금만 걸어도 힘들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좀 쉬라 소리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주저앉기 일쑤였습니다.
할 수 없이 주인은 그 건방진 당나귀를 채석장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불상을 지고 다닐 성격 좋고 고분고분한 새로운 당나귀를 샀습니다.
건방진 당나귀는 하루 온종일 불상(佛像) 대신 무거운 바위를 몸에 싣고 날라야만 했습니다.
곰곰히 돌아보니 저 역시 건방진 당나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왔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실 사람들은 제가 아니라 제 등 뒤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격려도 해주시고 도움도 주셨는데, 저는 그것을 간과하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서에도 비슷한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사제들 중에서도 수석 사제들이었으니 다들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을 것입니다.
입고 다니던 옷도 보통 사제들보다 훨씬 치렁치렁 화려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요.
처음에는 겸손하고 고분고분했을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봉사자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로서의 직분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멋진 복장에, 쩌렁쩌렁 심금을 울리는 강론 말씀에 큰 매력을 느끼고 깊은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길에서 만나면 정중하게 인사도 했습니다.
어딜 가나 제일 높은 자리로 안내를 받았고, 특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 역시 점점 건방진 당나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주인도 몰라보고, 주인께 감사하는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영적 생활이나 이웃 사랑의 실천은 잊어버린지 오래였습니다.
그저 돈만 밝히고, 잘 먹고 즐기는데만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이런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날카롭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마태오 복음 21장 31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 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보다 더 충격적인 말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개석상에서 펀치 중에서도 초강력 펀치를 한방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먹이신 것입니다.
주인도 몰라보는 건방진 당나귀 같은 그들에게 적당한 선물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면서도 메시아로 오신 당신을 끝끝내 거절하고 부인한 그들에게 ‘빅엿’을 하나 제대로 선사하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3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복음: 마태 21,28-32: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28절)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현세에서 정의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맏아들은 “싫습니다.”(29절) 하였지만, 나중에 일하러 갔다. 아버지 앞에 “싫습니다.”라는 말은 하느님과 그분의 정의를 버리고 우상숭배에 떨어진 이교인들의 모습과 같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먼저 자기 마음속으로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싫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정의를 실천하러 포도밭으로 간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30절) 작은아들로 묘사되는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와 세례자 요한에게 지시를 받았을 때,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께 거짓말을 했다.
“이 둘 가운데에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31절) 라는 물음에 그들은 “맏아들입니다.”(31절) 대답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이 비유의 뜻을 자기들한테 불리하게 해석하고 만다. 아버지의 뜻을 행한 맏아들은 다른 민족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하고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다른 민족들에게로 옮겨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절) 하신다. 이 말씀은 유다인들에게 자극을 주어 그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말씀이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32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라고 하신 적이 많다. 우리도 잘못 살면 주님께 그러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