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 이 글을 올리기까지 몇 개월 동안 글을 쓰다가 멈추다가를 반복했다. 오늘 맥주캔 3개에 취한 술을 깰려고 쓰다가 보니 글이 길어졌다.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싶었다. 한국에선 하나를 하면서 동시에 다른 하나, 아니 두개 이상을 해야하는 상황이 매일 반복되었다. 멀티태스킹이 되지 않기에 결국 세가지 모두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상황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나의 온 몸이 한가지에 집중해서 푹 담가 적셔지고 난 후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이 곳에 올려놓은 몇개의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죽을 듯이 절망적인 상황에 두려워하는 내 자신이 보였다. 덴마크에 온 지 1년이 넘은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글과 대비되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서 다시 글을 쓴다.
1. 덴마크에서 행복이란?
우라나라에선 원래 ‘행복’이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한다.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말은 ‘만족’이다. 난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서 덴마크의 생활을 정의하겠다. 그건 ‘평화로운 만족(Peaceful satisfaction)’이다. 행복할려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소비해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한국을 떠나 여기 오기전 가족 모임을 할 때 친 형님이 나에게 물어보셨다. “넌 도대체 왜 덴마크에 갈려고 하니?” 그 때 난 ‘행복할려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1년이 지난 지금은 덴마크 사람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받고 있으며 동일한 대답을 하고 있다. 가끔씩 난 덴마크인들에게 넌 지금 행복하니? 물어본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대답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지 못하고 다른 화제로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왜 내 질문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지 그 당시엔 의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그들에게 행복이란, ‘물건’을 찾으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아, 행복해’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매 순간 만족하는 거였다. 그러니 내가 잃어버린 물건 찾듯이 행복을 정의하니 덴마크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이 뭐인지 한참을 생각하느라 말문이 막혀버린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행복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생소할 수도 있다. ‘휘게’라고 불리는 평화로움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이기에 소소하고 아주 작은 것에서 부터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보기 위해 한국에 다녀오며 전통문양을 새긴 책갈피를 사서 덴마크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무뚝뚝하지만 정많은 그들이 보여준 고마와하는 모습은 값싼 책갈피 값 치고는 참 비싼 선물이라 생각했다.
나는 지금 행복이란 단어를 잊어버리고 대신 만족이라는 푸근한 느낌을 얻었다. 기쁨에 대한 역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나도 물이 들어 버렸다. 그래서 이런 기분을 행복이라고 하나 보다 하고 그냥 산다.
2. 덴마크의 여유로움이란?
한국에선 바쁘고 쉴 틈이 없었다. 덴마크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확실히 단순하다. 한국이 ’월리를 찾아라!’라면 덴마크는 여백에서 감동을 주는 수묵화다. 아날로그 시계를 사랑하는 그들과 핸드폰의 시계에 익숙한 우리만큼 그들의 여유로움은 1분을 갖기위해 60번의 움직임을 수고하는 초침처럼 느긋한 기다림에 익숙하다. 덴마크에 와서 적응하기 어려웠던건 ‘빨리 빨리’가 몸에 밴 한국적 조바심을 버리는 것이었다.
덴마크에선 기다림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렸다면 한국에 와서 ‘새치기’에 익숙해 지느라 힘이 들었다. 일부의 사람들은 내가 가지고 싶은 내 앞의 여유로움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사람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거리는 내가 손을 뻗었을 때의 거리만큼 이다. 한국에선 그 정서적인 안정감을 아주 쉽게 박탈 당한다. 조금이라도 여유로워 지면 상대방과 나의 ‘틈’을 순식간에 메워 버린다. 그게 줄을 서는 것이든, 운전할때 끼어 들기든, 길을 걸을때 상대방과의 좁은 간격이든, 마트에서 계산할 때 내 뒤에 딱 달라붙어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것이든 말이다. 한국에서는 뭘 해도 경쟁이다. 만약 칸막이가 없는 세 개의 카운터에서 일처리를 할 때 한국에선 자연스럽게 세 개의 줄이 생긴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줄이 상대편의 줄보다 더디게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초조해진다. 줄을 바꿔 서기도 한다. 심할 경우 빨리 처리하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덴마크의 경우 한 개의 줄만 생긴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면 세 곳 중 비어있는 곳으로 카운터에서 손짓하면 찾아들어 간다. 아, 내가 한국에 있구나! 하고 느낀 건 바로 이런 차이점 때문이다.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를 잡을 때, 그들은 나의 순서를 존중해 주지 않았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나를 스치듯 앞질러서 택시로 빨려들어가는 그 들을 보면서 내가 투명인간처럼 느껴졌다. 병원에서 진찰받고 처방전을 받을 때 난 덴마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대방과 떨어져서 서 있었다. 손하나 뻗을 정도의 거리에서 조금 더 떨어진 덴마크에서는 아주 익숙한 거리다.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이 내 옆으로 와서 처방전을 타 갔다. 나도 순간 초조해 져서 카운터에 바싹 붙었다. 덴마크에서 익숙했던 상대방을 존중하는 거리는 그들에겐 자신에게 온 그냥 좋은 기회일 뿐이다.
이런 차이가 왜 생긴 것일까? 바쁜게 효율적인가? 동일한 시간에 많은 사람의 일을 처리하려면 그래야 하는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불필요한 긴장과 스트레스도 과연 정당하고 필요한 것인가? 하고 반문하고 싶다. 죽기전에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와 왜 사냐건? 그냥 웃지요 하고 싯구처럼 사는 분위기 둘 중에 어느 것에 더 끌리는가? 질문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덴마크에서는 서로가 정서적인 거리를 존중한다. 그리고 그 존중은 바로 사회적 신뢰감에서 시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널직한 차간거리와 긴 줄에서 앞 사람을 기다려주는 여유로움은 서로가 서로를 믿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그랬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처럼 타인과 소통이 자연스러울 때가 있었다. 난 지금 우리나라는 상당히 위태롭다고 생각한다. 그 위태로움을 극복하는 가장 쉬운 길은 사회적으로 서로를 믿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여유로움하면 경제적인 풍족함이 떠올라야 하는 곳에 사는 것보다, 타인을 딛고 올라서지 않아도 포도를 따먹을 수 있으며 고령 인구의 빈곤율이 최저인 덴마크에서 진정한 여유로움은 바로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한 단순함이라고 생각한다.
3. 나의 근황
자의든 타의든 한국에서 맺은 인연들은 망각의 강을 지나온 듯 지워져 버렸다. 결국 덴마크에 온게 인연의 키질을 한 셈이다. 벼리는 남고 인연의 죽정이는 죄다 사라져 버렸다. 그랬더니 결국 내게 남은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 내 스스로 죽정이를 솎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냥 덴마크에 내가 간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모두들 떨어져 나갔다. 좋게 끝내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매정하게 끊기도 했다. 이제 한국에 두 번 나가서 만난 사람들은 딱 남은 인연만큼이었다. 그건 나와 어떤 모종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인연들만 날 지켜 본다는 의미였다.
한국 방문은 한 번은 치매에 걸리신 어머니때문에, 또 한번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가족과 함께 나갔었다. 가기전 맛난 걸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지만 막상 가면 한국에 있는게 여러모로 힘이 들었었고, 덴마크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코펜하겐 공항에 내리고 메트로를 타서 주위를 둘러보며 행복해 했었다. 신기하게 내 집이 있는 곳이 한국이 아니라 덴마크라고 생각하니 40년을 넘게 살아온 내 조국보다 햇수로 500일이 조금 넘은 덴마크가 더 편한 마음이 들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나는 지금껏 지나가는 바람에게도 한국에 나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은 많이 궁금할 것이다. 과연 이 사람은 현재 뭐하고 살까?하고 말이다.
A. 나의 직업
현재 직원이 1000명이 넘는 대형 체인식당에서 ‘trainee(견습생)’로 일하고 있다. 2년의 trainee 과정이 지나면 시험을 거쳐 정식 ‘line chef’가 될 수 있다. 상당히 교육이 체계적이어서 5가지의 단계를 지나면서 각 단계 당 한 번에서 두번의 교육을 받으며 모든 과정을 표준화한다. 따라서 어떤 체인점에 가서 일을 하다라도 동일한 결과물이 나오도록 지도한다. 마치 전세계 맥도날드 햄버거 맛이 비슷한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주당 약 40시간을 일하고 있으며 덴마크 최저시급에 준하는 시간 당 약 22,000원을 받고 있다. 이 시급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처음 일할 때 받는 시급보다 약간 적은 돈이다. 따라서 한 달 월급으로 세 후 280 - 300만원을 받고 있다. 월급은 일정 기간에 조금씩이지만 계속적으로 오른다. 직업의 만족도는? 글쎄, 난 만족한다. 한국에서도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키친 생활이다. 처음에는 13시간 이상을 서서 일하는 직업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적응기가 지나니 이제 천직이려니 생각하고 즐기면서 일한다. 키친에는 국적이 12개인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항상 북적인다. 덴마크,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캄보디아, 필리핀, 에스토니아, 이탈리아, 중국, 아프리카 2개국 그리고 한국 등. 여기오지 않았으면 느끼지 못했을 열두개 색깔의 조화로움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하루 하루를 보낸다.
키친에서는 원활한 의사 소통을 위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처음 일을 시작하며 난 예스, 노, 아임 소리 밖에 할 줄 몰랐다. 그래서 별명도 ‘예스맨’이었다. 누구든 내 이름을 부르면 군대에서 관등성명을 대듯 큰 소리로 ‘옛썰!’을 외쳐댔기 때문이다. 말을 잘 못알아 들으니 대부분의 경우 난 후순위였고 의견 표현에 미숙하니 손해 아닌 손해를 보기 일쑤였다. 6개월이 지나니 입이 트이고 1년이 지나니 영어가 조금씩 들려서 이젠 의사 표현도 더듬더듬 곧잘 한다. 말 그대로 ‘서바이벌 잉글리쉬’다. 키친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긴장이 숨어 있는 사바나같은 곳이라 고운 언어보단 거친 언어가 더 어울리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 이젠 손이라도 벨라치면 입에서 ‘에그머니나’가 아니라 ’쉿(Shit)’이 나도 모르게 나온다. 왠지 그렇게 말해야 ‘속(Heart inside)’도 더 시원하다. 하지만 아직도 집에선 아들한테 걸쭉한 사투리를 입에 달고 사는 그냥 촌스런 아빠다.
어느 곳이든 사람사는 곳은 다 똑같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존엄을 지키길 바라고 그만큼 상대방의 자존감을 존중할려고 노력한다. 다행히 내가 일하는 곳은 그 상식에 벗어나는 경우가 적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키친에서 내 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1년이 넘으니 비로소 나를 그대로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지금은 많은 오해로 인해 힘들게 했던 동료들과 농을 주고 받기도 하고 일이 끝난 후 맥주 몇 캔을 부딪히며 회포를 풀기도 한다. 또 아주 가끔이지만 기념이 될만한 날에 맥주캔과 독주 한병을 들고 주고 받으며 모두가 정신줄을 놓기도 했다. 이젠 내가 기대고 의지하고 걱정하고 챙겨주는 동지들이다.
B. 나의 생활
나의 월급 정도로 코펜하겐에서 30평 아파트에서 살려면 아주 빠듯하다. 따라서 맞벌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전 글에서 서술했듯이 집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조금은 초기 계획보다 60만원에서 80만원 이상 넘어선 가격의 집으로 결정했다. 어쩔 수 없었다. 오기 전에 홈페이지를 통해 미리 알아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미 와있는 분에게 집 구하는 것을 부탁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처음 집구하기는 아마 외국에 나가서 사는 사람들의 공통된 고민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잔디가 깔린 마당이 널직한 약 30평이 조금 넘는 단층집을 얻었다. 나와 아내가 키가 작으니 이 곳 사람들 처럼 키크라고 마당에 방방이(트램폴린)도 사서 놓았다.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아직 취직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한국에서 모아논 돈이 남아 있어 그 돈으로 생활비에 보태고 있다. 조만간 막내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취직을 해야 할 것이다.
취직할 곳은 많은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언어 문제만 해결되면 취직은 노력하면 된다. 그것도 전공을 살려서 안정된 직장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언어가 안되기 때문에 언어가 필요없는 직업을 구하다 보니 동유럽 이민자들과 자꾸 부딪히는 것이다. 이 곳 4년제 대학을 나온 친구들이 받는 월급이 세 후 380만원 정도된다. 안정된 직장이란 그 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 정도면 코펜하겐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3인 가족에게 충분한 공간의 아파트와 생활비로 쓸수 있다. 코펜하겐에서 살려면 부부가 일해야 한다. 실제로 이 곳 사람들 대부분 맞벌이다.
C. 이사짐 이야기
처음 이사짐이 와서 6톤정도 되는 짐을 푸니 집이 꽉 찼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한 2톤 이상의 짐은 그냥 버린 것 같다. 친 형님이 이것 저것 필요한 물건 사라고 돈을 주셔서 한국에서 필요한 물건을 샀었다. 지금 무척 후회한다. 물건도 여기에 맞는 물건이 있다. 그래서 여기서 사야 한다. 덴마크 물가가 비싸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질 좋은 값싼 물건은 여기가 더 많다. 전기제품은 밥솥과 김치 냉장고 빼고는 사지 말아야 했었다. 덴마크에서 50인치 삼성 TV를 45만원 정도에 구입했다. 고성능 데논 리시버가 한국보다 싸다. 한국에서 백이십만원이 넘는 독일 칸톤 센터 스피커를 60만원에 독일 아마존에서 구입했다. 가져왔던 소파 외 많은 가구를 버리고 이케아에서 다시 샀다.
그럼 왜 그 많은 물건을 버려야 했을까? 한국과 이곳의 기후는 많이 다르다. 라이프 스타일도 다르다. 또한 한국의 생활 습관을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왔다. 일례로 유럽인을 집에 초대하면 일단 한국의 좌식 생활을 못 견뎌한다. 물론 우리도 불편했다. 바닥 난방이 되는 주택은 많지 않지만 내가 사는 집은 바닥 난방이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처럼 뜨근뜨근하지 않고 그냥 미지근하다. 그러니 바닥에 앉아 있기보단 소파에 앉아 있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고 조립이 되는 싼 기존의 것을 버리고 오래 앉고 싶은 소파로 바꾸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대나무 돗자리가 쓸모 없게 되었다. 한국에서야 더운 여름 대나무 돗자리 깔고 자면 시원하니 잠도 잘오겠지만 여기선 안그래도 추운데 쓸 데가 어디 있겠나!
덴마크가 자전거가 비싸다고 해서 70만원을 주고 한국에서 두대를 사가지고 왔다. 얼마 못가서 체인이며 쇠붙이들은 다 녹이 슬었다. 덴마크에서 산 자전거는 체인이 스텐레스여서 비를 맞아도 녹이 슬지 않았고 가격도 세일하면 한국보다 더 쌌다. 하지만 이건 알아 두어야 한다. 막상 와서 이케아를 제외하고는 물건을 어디서 사야할 지 막막했다. 1년이 지나니 생활 정보가 많아져 비로소 알뜰 쇼핑이 가능해 졌다. 그러니 이민오실 분들께 조언하자면 그 나라 기후와 생활 습관에 알맞는 현지 물건을 구입하시는 게 경제적, 시간적으로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이 곳에 오면 싫든 좋든 자연스럽게 여기 생활에 맞춰서 살아진다. 그러니 두려워 마시라. 그냥 꼭 가져가고 싶은 것만 최소한으로 챙기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을 나타낼 수 있는 이태리 타올같은 생필품은 당연히 한국에서 구입해야 한다. 여기도 때밀이 비누도 있고 목욕할 때 타월대신 긴 손잡이가 달린 구두솔 같은 걸로 몸을 문댄다. 하지만 아무래도 구두솔로 내 몸을 문지르지는 못하겠더라.
국제 이사짐 센터에선 물건을 그냥 마구 챙긴다. 그러니 이사짐 보내기 전에 철저하게 버리고, 안쓰는 물건 나눠줘야 한다. 30평에 5톤 트럭 물건 다 못들어 간다. 덴마크 30평은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작다. 그러니 적당한 톤 수는 3톤이다. 4톤 가져가면 1톤은 버리실 것이다. 카톤 계산은 어렵지 않다. 대충 줄자 가지고 다니면서 집 물건 계산 해보면 답 나온다. 생각하는 것에 +1톤은 더 나온다. 내가 모르는 숨겨진 물건이 1톤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니 카톤 계산했을 때 2톤이 넘으면 3톤이 되는 것이다.
D. 쉬는 날과 여행
일주일에 많게는 4일을 쉬기도 하고 최소 2일에서 3일은 쉰다. 일이 힘드니 쉬는 날엔 푹 자고 남는 날에는 가족들과 놀거나 아내와 손잡고 장을 보러 간다.
직장 동료들은 쉬는 날을 연장하여 여행을 자주 간다. 그래서 그런지 대화 주제가 상당부분 여행에 관한 내용이다. 작년에 가족과 함께 프랑스와 노르웨이를 다녀왔다. 가기 전, 가족들과 머리를 맞대고 여행계획을 짰다. 기억나는 몇 가지를 말해보면 프랑스에선 아침 일찍 일어나 재래시장에 갔다. 입에서 녹는 크로와상, 신선한 과일과 연어를 사서 회를 떠먹었다. 에펠탑에 가서 돈을 아낄려고 결혼식때 찍지 못했던 웨딩 포토를 찍었다. 폭풍 세일 때 덴마크에서 산 드레스를 가져가 에펠탑 옆의 우거진 공원에서 드레스로 갈아입은 다음 온 가족과 함께 웨딩 사진을 찍었다. 집에 와서 사진을 보니 아내는 팔뚝이 두껍게 나왔다고 맘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에펠탑을 배경으로 가족이 한껏 웃으며 찍은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낀다.
프랑스 파리의 들뜬 공기와 자유분방하고 어수선함도 맘에 들지만, 노르웨이의 피요르드는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피요르드의 맑은 공기는 청명한 차가움이랄까? 폐가 뻥 뚫리는 상쾌함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올해는 영국,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을 가보기로 했다. 영국행 비행기는 값이 싸서 왕복 5만원에서 7만원정도 하는데 올해는 아들이 대영 박물관을 가보고 싶어해서 함께 다녀올 계획이다. 동료들이 꼽는 최고의 여행지는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많이 걸어야 할 것 같아 막내딸이 조금 더 크면 갈 생각이다.
덴마크 오기전까지 캠핑을 가족과 함께 자주 다녔다. 차를 구입하게 되면 캠핑을 다니면서 유럽을 다녀 볼 계획을 하고 있다. 한국에 캠핑 장비 일체를 모두 놓고 왔다. 지금은 아내와 이야기하며 아쉬워 한다. 이렇듯 여행을 가족과 함께 다닐 수 있는 매력도 이 곳 생활의 장점이라 생각한다.
4. 덴마크의 교육
할 말 많다. 이 이야기로도 한 20페이지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기회에 좀 더 세세하게 써보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일단 몇자 적어 본다.
이 곳은 아이들의 천국이다. 딸은 주말 아침에 일어나서 유치원 가고 싶다고 조른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도 물론 마찬가지. 방과 후 집에 와선 신나서 조잘댄다. 학교가 신나고 재미있다고 한다. 아들은 아침에 도시락만 든 가방을 가지고 간다. 물론 필통에 연필도 몇 자루 있긴 하지만 공책, 연필 같은 학용품은 학교에서 다 주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물론 교과서도 준다. 아직 어려서 인지 공부는 학교에서만 한다. 덴마크어도 집에서 가르치지 마라고 한다. 집에서는 한국말을 가르치란다. 오늘 무슨 일로 공책을 가지고 와서 숙제 비슷한 것을 한다.
아들이 학교 다녀와서 하는 말은 온통 노는 이야기 뿐이다. 가서 보면 실제로 노는데 그 노는게 공부하는 거다. 한마디로 광범위한 에듀테인먼트를 실천한다. 알파벳 철자를 자기들이 교실바닥에 누워서 표현한 다음 그걸 선생님이 사진을 찍어 컬러 프린트하고 벽에 붙여놓고 알파벳을 익힌다. 이런 식이다. 수업시간에 유튜브로 져스트 댄스(춤 흉내내기 게임)를 틀어 주면 아이들이 신나서 춤을 춘다. 아들은 나보다 최신 팝송을 더 잘 안다. 그리고 흥얼거린다. 선생님이 밥 먹을때 각종 비디오 자료와 뮤직 비디오를 틀어 준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덴마크어와 영어에 노출이 되었다.
1년이 지난 지금 덴마크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딸은 알파벳도 익숙치 않는데 영어로 된 영화를 알아듣고 말한다. 이런 제길, 난 그저 아들, 딸이 부러울 뿐이다. 이젠 내가 아기가 되어서 밖에 나가면 아들과 딸이 내 통역관 역할을 해준다.
아들도 그렇고 유치원 다니는 막내딸도 그렇고 수업의 절반은 바깥에서 뛰노는 것 같다. 막내딸은 점심을 먹고 의무적으로 무조건 옷을 갈아 입고 밖에 나가서 뛰놀아야 한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뛰노니 감기도 안걸린다. 오늘도 아들은 수업을 하지 않고 밖에 호수가 있는 공원에 가서 선생님과 놀았다고 했다. 수업 시간에 배우는 게 몸에 좋은 음식과 좋지 않은 음식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서로 토론하고 음식을 직접 만들어보고 이런 거다. 다 배운 다음 학부모를 초대해서 아이들이 직접 만든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었다.
그럼 공부는 언제 하냐고? 글쎄, 공부는 대학교 가서 하는 것 같다. 초, 중, 고에 두각을 나타내는 아시아계 이민자 자녀들이 대학교에 가면 덴마크 본토 아이들에 비해 실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했다. 이유는 지식은 많지만 지혜가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암기력은 곧 실력이 되는 혼자하는 한국식 공부법과 토론하고 협력하여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해 내는 창의적 협동 학습법이 맞붙으면 결과는 예상할 수 있다. 바로 창의적 협동 학습법이 요즘 유행하는 미니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가 아닐까 한다. 옆에 친구를 라이벌로 생각해서 친구가 정리해 놓은 공책을 찢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우리나라 학교 현실과는 참으로 대비된다.
교육이 잘 못되면 그 나라 향후 100년은 암울할 수 밖에 없다. 경쟁이 효율인 시대는 이미 지났다. 혼자만 똑똑한 영웅 제일 주의는 헐리우드 영화에서만 봐야한다. 클라우드라는 말이 흔해지고 무한 컴퓨팅이 대중화 될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은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잊혀진 단어 바로 ’협동’이다. “평범한 다수가 똑똑한 소수보다 낫다”라는 명제를 덴마크 교육은 누구보다도 잘 지키고 준수한다. 내 자식들은 그 평범한 다수가 되길 바란다. 현명한 집단 지성을 어릴때 부터 몸에 익힌 선비가 되길 바란다.
4. 사색의 말
온갖 새가 노래하는 나무가지 위에는 추운 바람에 시리도록 발갛게 물이든 꽃 들이 풍성하게 피었다. 마치 나무가 노래 소리에 장단을 맞추듯 이리저리 리듬을 탄다. 달달한 연애 중인 아가씨가 3시간 남겨 놓은 통금 시간을 즐기는 것 처럼 덴마크의 봄은 어떤 봄보다도 짧은 시간을 보상하듯이 화려하고 치열하다. 머잖아 이곳 저곳 아프리카 열대림의 화려한 색깔을 곳곳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I don't want to get to the end of my life and
find that I have just lived the length of it.
I want to have lived the width of it as well."
미국 탐험가이자 작가인 다이앤 애커먼은 “내 삶의 끝에서 길이만큼 살았다면 폭으로도 살고 싶다”라고 하였다. 인생의 반평생을 바치고 남은 초라한 쳇바퀴를 버리고 덴마크에 온 것은 ‘길이’라는 2차원적인 한계를 넘어선 삶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노력으로도 안된다면 그건 문제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단추를 잘못 꿰어서 아래 단추부터 다시 잘 잠근다고 우스꽝스러운 셔츠가 바로 잡아지는 것이 아니다. 잘못 꿰어진 단추를 풀어야 한다. 잘못된 문제의 정답은 없다. 그냥 문제를 없애야 한다. 그렇다고 인생이 개판이다고 인생을 리셋할 수 는 없잖은가? 그래서 인생은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잘못든 길로 가서 목적지를 찾아봤자 헛고생이다. 목적지를 수정하여 가던 길을 계속 가거나 또는 방향을 원래 목적지로 바꾸면 된다.
‘왜’ 이 글을 읽고 계신가요? 백 명의 답이 다 다를 것이다. ‘왜’에 대한 정답은 없다.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이 모든 사람의 정답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중의 누군가에겐 정답이 될 수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숲 속을 거닐다가 두 갈래 길을 마주 했고 고민끝에 발자국이 나지 않은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것 처럼 말이다. 가지 않은 길의 기대감이 더 큰가, 아니면 가는 길의 익숙함을 선택할 것인가? 갈림길에서 당신은 방향 전환할 준비가 되셨나요? 그렇다면 난? 많은 물음표에 대한 느낌표는 아직 말해주기 어렵다. 내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난 그곳에서 또 다른 삶을 즐겁게 영위하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한국에서 행복이란 화두에 천착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덴마크에 와서 그 화두를 잊어버리고 살았다. 난 지금 평화로운 만족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덴마크에서 슬펐던 기억은 모두 잊었다. 아니 즐거운 느낌으로 덮어 버렸다. 하지만 너무 두툼하고 뾰쪽하고 울퉁불퉁한 부분은 아름다운 추억을 찢고 삐져 나올 것이다. 그것 마저도 관조하듯이 바라보고 싶다.
사진은 슬플때 찍지 않는다. 가장 기쁠때 잊혀지기 안타까운 순간을 다시 회상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아래의 사진들은 내 머리속의 행복 상자를 여는 열쇠같은 것이다. 그 행복 상자에는 슬픔은 담겨 있지 않다. 이제 여러분에게 그 열쇠를 건네 준다. 자, 나와 함께 지난 1년의 시간을 추억해 보자.
사진 1. 거실이 이렇게 생겼다. 이 책들 가져 오느라고 고생 좀 했다. 취미가 책 모으기다. 젊을 때 하고 싶었던게 자식들에게 물려줄 책을 모아서 동네 도서관을 만드는 거였다. 아들, 딸이 독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다행히 만화책이라도 본다. 우리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만화책이 '식객'이다. 허영만 선생님을 보고 싶다고 한다.
사진 2. 책장은 각 판이 분리되는 조립식이다. 레고 블럭 쌓듯이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이민 결정 전부터 구입해서 사용했다. 단점은 조립과 해체에 시간이 걸린다. 그것도 많이.
사진3. 집 마당이다. 봄이면 친근한 민들레가 핀다. 다른 집은 죄다 뽑아버리지만 난 그냥 보기 좋아서 두었다. 나중에는 잔디가 죽고 그 자리에 민들레가 자라나는 생태 천이가 너무 빨랐다. 결국 민들레 뽑는 기계를 사서 다 뽑아 버렸다. 올 봄에는 아내가 민들레를 버리지 않고 김치를 담갔다. 맛이 기대 된다.
사진 4. 집에 큰 소나무가 두그루 있다. 소나무를 보면 한국에 있는 것 같아 맘이 포근해진다. 이 곳에서 만난 동생 가족이 즐겁게 마당에서 뛰놀고 있다.
사진 5. 마당의 또다른 소나무. 아침 해가 뜨고 있다. 이런 맑은 날씨가 늦 봄부터 초가을까지 계속된다. 견우와 직녀처럼 우린 이 날씨를 기다리며 겨울을 견뎌 낸다.
사진 6. 여름에 소나기가 내리면 집 마당에 무지개가 걸리고 아이들은 맨 발로 마당에서 팔짝 팔짝 뛰며 좋아한다. 조그만 빨간 집은 아이들의 비밀 공간같은 곳이다. 우린 그냥 창고로 쓰고 있다. 딸이 빨리 집을 내 놓으라고 성화다. 하얀 깃대봉엔 덴마크 국기가 걸려 있다. 덴마크에서 마당에 국기봉 세워놓은 곳은 흔하다. 그만큼 덴마크인의 나라 사랑도 하늘을 찌른다.
사진 7. 많은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는데 익숙한 아이들은 마당에서 점심 피크닉을 즐긴다.
사진 8. 봄이 되면 마당에서 꽃을 따서 나에게 주기도 하고, 개미랑 이야기도 하고 오빠랑, 또는 혼자서 잘 논다. 역시 아이들의 가장 좋은 친구는 자연이다.
사진 9. 눈이 내리면 마당에서 이글루를 만들고, 눈사람과 눈싸움도 하고, 썰매를 타고 논다. 딸이 입고 있는 빨간 옷은 위아래가 한벌인데 방수가 되고 두툼하다. 야외에서 놀땐 거의 대부분 이걸 입는다. 그러니 아이들은 땅바닥에서 구르면서 논다.
사진 10. 눈 내린 날, 집 앞 공원에서 오리랑 논다.
사진 11. 오리는 사람을 좋아 한다. 덴마크 오리는 혼자 살지 못하고 덴마크 사람들이 키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완 동물 수준이다. 사람이 다가가는 게 아니라 오리가 다가온다. 사람들은 먹다 남은 빵과 비스킷을 던져 주거나 마트에서 오리에게 줄 부식을 사서 정기적으로 던져준다.
사진 12. 먹을 것을 가지고 서면 오리들은 저 멀리서 호버크래프트처럼 공중부양을 하며 모여 든다.
사진 13. 겨울은 물이 차다. 오리들도 물 위에 뜬 빵 조각을 건져먹는게 힘이 든다. 그래서 땅에 던져 놓으면 자기들이 뭍으로 올라와 주워 먹는다.
사진 14. 유치원에 있는 나무들은 어린이들에게 훌륭한 놀이기구다. 유치원 마당에 아이들을 풀어 놓으면 많지 않은 도구를 가지고 놀거나 자기들 스스로 놀이를 개발한다. 딸은 나무를 보면 자기 키보다 두배 쯤 높게 올라가서 나에게 자랑한다.
사진 15. 뒷마당의 방방이에서 나와 아들, 딸이 누워 하늘을 쳐다 본다. 무언가에 답답한 마음이 들어도 방방이에 누워 하늘을 보면 청명한 파란 물이 내려와 깨끗하게 씻어 준다. 차가 없어서 5만원인가 돈을 더 주고 배달을 시켰다. 인건비가 비싸니 배달하는 비용이 우리나라에 비해 많이 비싸다.
사진 16. 나중에 크면 아빠처럼 되고 싶다는 우리 아들. 내가 요리사가 되니 자기도 커서 요리사가 되고 싶단다. 칼 쓰는 법을 알려주고 주의사항도 잘 일러주었다. 딸은 오빠가 칼을 들면 자기도 요리한다고 칼을 든다. 엄마가 요리하면 함께 요리를 하고 만든 음식을 나눠 먹는다.
요리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감성 개발법이라고 생각한다. 칼 쓰면서 소근육이 발달하고 손 안벨려고 집중하고 물체를 썰면서 나는 소리를 듣고 눈으로 색깔을 보고 냄새를 맡고 간을 맞추면서 만들어질 음식을 상상하고 마지막에 요리를 직접 맛보면서 상상과 현실이 일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오감과 육감을 모두 자극하는 건 요리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요리는 인류가 생긴 이후로 지속적으로 발달해온 문화의 한 기둥이다. 따라서 요리를 한다는 것은 대뇌 피질과 수질을 조화롭게 만든다는 걸 의미한다. 여기에는 학원같은 곳을 가지 않으니 방과 후 집에서 이렇게 논다.
사진 17. 아이들과 함께 만든 애플파이.
사진 18. 한국이 그리운 이유 중의 하나는 MSG를 팍팍 친 자장면이다. 덴마크에 와서 면을 뽑아 먹었는데 이젠 파스타 면을 삶아서 먹는다. 맛이 밀가루 면보다 더 좋다. 쫄면 먹고 싶을 때도 파스타 면에 김치 국물 넣고 비벼 먹는다.
사진 19. 아이들과 함께 만든 케익. 케익 빵을 마트에서 판다. 생크림을 만들고 딸기를 자른 후 위에 사탕무우 가루 뿌려주면 끝이다. 그래도 한국의 생크림 케익이 그리울 때가 있다.
사진 20. 다음에 덴마크의 음악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덴마크는 음악 교습비가 한국에 비해 싸다. 한국의 반 값도 안되는 것 같다. 이유는 국가에서 음악 교육 재원을 지원해 준다. 덴마크 왕립 음악원(Danish Royal Music Academy)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선생님들 수준이 아주 높다. 아이들 눈 높이에 맞춰서 음악 지도를 해준다. 아들은 일주일에 한번 씩 오케스트라와 첼로 수업을 한다. 딸은 바이올린을 좋아해서 올해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아들은 첼로를 치다가 흥이 나면 피아노 의자에 앉아 같은 곡을 치기도 한다. 음감 교육(Music Hearing)이나 작사, 작곡 수업은 공짜다. 덴마크 음악 교육은 코뮨이라 부르는 지자체마다 각기 다르게 운영되는 것 같다.
사진 21. 오케스트라 공연 모습. 지역 어르신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음악(현대적 교황곡)을 40분간 연주했다. 음악 내용은 우리가 사는 동네에 관한 것이었다. 왼쪽에 악기 없이 모여 있는 파트가 보컬 파트다. 중앙 화면에 음악과 관련된 비디오를 재생한다. 6살 짜리 아이는 리코더를 불고 동네 어른들과 선생님들도 집에 있는 악기를 가지고 와서 함께 화음을 만든다. 난 그들이 만들어 내는 형언키 어려운 감격 속에서 덴마크의 힘과 끈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분위기를 한국에서 맛볼 수 있었으면 하는 진정한 바램이다.
사진 22. 크리스마스 시즌 때 친구들을 불러 함께 만든 음식을 나눠 먹었다. 아보카도하고 나초가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그날 처음 알았다. 술에취해 즐겁고 사람에 취해 행복했다. 한 쪽에선 이야기하고 한 쪽에선 져스트 댄스하고 있고, 기나긴 겨울을 가까이 앉아 체온을 느끼며 이겨내고있었다.
사진 23. 나랑 같이 일하는 덴마크 직원이다. 실물이 10배는 더 예쁜 엘리느는 전형적인 덴마크 얼굴을 하고 있다. 상냥하고 순박하다. 자기가 예쁜 줄 모른다. "너 한국에 가면 최고로 이쁜 여자가 될 수 있다!"고 하면 배시시 웃는다. 옆에 있는 분이 아버지인데 그날 키친으로 놀려 오셨다. 덥수룩한 이 분의 유전자 반틈이 엘리느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는다. 어제 '너 사진 한국 블로그에 올릴거라'고 말했더니 링크 주소를 알려 달랜다.
사진 24. 프레데릭스베르 궁전. 옆에 동물원이 있어서 가끔씩 가서 산책한다.
사진 25. 티볼리 놀이 공원. 덴마크는 놀거리가 많지 않다. 그래서 티볼리가 더욱 특별하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좋아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렇게 꾸며 놓고 사람들을 모아 저녁 늦게 까지 논다. 값싼 1년 무제한 이용권을 구입해서 시간 날때 마다 들러서 놀았다.
사진 26. 티볼리 공원 모습. 티볼리 내에 공연장과 레스트랑이 있어서 한번 들어가면 저녁에 나온다.
사진 27. 매년 2월에 레고 전시회가 코펜하겐에서 열린다. 자세하게 구경하면 하루가 부족하다. 아들과 딸은 공짜 레고를 많이 받아서 흐뭇해 했던 기억이 난다.
사진 28. 레고 전시회 모습.
사진 29. 국립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료가 무료라서 아이들과 무료할 땐 그곳에 가서 논다. 신화의 한 장면을 동상으로 만든 것 같다. 자식을 빼앗긴 표범의 포효와 창을 겨눈 남자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사진 30. 덴마크는 국왕과 여왕이 존재하는 군주제다. 왕실 근위병 교대식이나 열병식을 길에서 마주치기도 한다.
사진 31. 따뜻한 여름날에 일주일 정도는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간다. 딸이 분수를 보자 신발을 벗어 제끼고 올라가서 논다. 상상만 해도 따뜻한 느낌이 든다.
사진 32. 코펜하겐 하면 떠오르는게 인어공주상과 뉘하운이다. 뉘하운은 '새로운 항구'라는 뜻인데 항상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곳이다. 그 곳에 가면 아이들과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입에 크림을 묻히며 핥아 먹는다.
사진 33. 코펜하겐 광장에서 만난 한국 젊은이들. 팀을 꾸려 길거리 공연하고 모은 돈으로 유럽 일주를 한다고 했다. 난 일하느라 그 곳에 없었는데 아내는 한 쪽에선 덴마크 아이들이 비보이를 하고 옆에선 한국인들이 풍물을 하는 드문 광경을 보았다고 했다. 젊으니까 부러운 걸까? 용기가 부러운 걸까? 생각하게 만드는 사진이다.
사진 33. 갈데가 없으면 시간을 내서 가는 루이지애나 미술관이다. 1년 이용권을 끊으면 싸다. 이 곳에 와서 좋은 점이란, 아들이 전자기기를 좋아하면서도 잘 절제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영어, 수학 공부하느라 학원에 다닐 시간에 아들, 딸은 시간이 남으면 미술관도 가고 박물관도 가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고 놀이를 개발해서 놀기도 한다. 우리 가족은 지금 이 순간을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사진 34. 루이지애나 미술관에서 본 정말 기괴하고 신기했던 큐브 미술작품.
사진 35. 국왕과 여왕과 함께 봤던 베버의 마탄의 사수. 국립 오페라 극장이다. 국왕과 여왕이 들어오니 모두 일어섰고 내외가 앉으니 우리도 앉았다. 나갈때도 내외가 일어서서 나갈때까지 우리도 일어서서 기다렸다. 덴마크인들엔 국왕과 여왕이 송중기, 송혜교 급 연예인이다.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관심 대상이다.
드레스 코드가 캐쥬얼한 복장이라 들어서 그냥 청바지를 입고 갔는데 사람들은 모두 연미복에 드레스를 입고 왔다. 아이고, 무척 부끄러웠다. 우리만 그렇게 입고 왔으니.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우리에게 눈으로 미소를 보냈고 아들과 딸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기는 기본적으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눈을 마주칠려고 무릎을 꿇는 것 같다. 그들은 여왕과 국왕에게 받은 훈장을 왼쪽 가슴과 연미복 아래 단에 착용하고 아들, 딸에게 훈장을 받은 사연들을 이야기 해주었다. 동양인 가족이 와서 공연을 보니 신기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덴마크인은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다. 원래는 캐쥬얼한 복장인데 아마 여왕님과 국왕님 때문에 옷을 갖춰 입은 듯 했다. 공연 시작전, 중간 휴식 시간에 사람들은 와인잔을 들고 서로 담소를 나누었다. 공연 후엔 무료 뷔페가 제공되었다. 덴마크에서 음식값이 비싼 줄 알기 때문에 공연은 그냥 공짜가 되었다.
사진 36. 덴마크어로 본 '사운드 오브 뮤직' 뮤지컬이다. 앞 좌석은 발매일 며칠 만에 동이 났고 뒷 자석 윗층만 있길래 예약했더니 이렇게 아래를 굽어볼 수 있었다. 영화와 내용이 99퍼센트 같았다. 다 들 웃을때 난 멍하니 있는 느낌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들과 딸은 좋아라 했다. 아무래도 알콜이 내 머리의 언어 중추 영역 세포를 다 죽여 버린 것 같다. 덴마크인들은 예술을 사랑한다기 보다 그냥 일상이다. 우리가 배고프면 밥을 먹듯이 그들은 본능적으로 예술을 섭취한다. 아마도 어릴때 부터 학교에서 공부보다는 예체능에 더 집중해서 즐기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진 37. 이런 공원이 어딜 가든 동네에 있다. 주말이면 축구하는 사람으로 북적이고 사람들은 먹을 것을 싸서 피크닉을 온다.
사진 38. 프랑스에서 재래시장에서 싱싱한 해물을 사다가 밥을 해먹었다. 여행갈 때 아이들이 어리고 음식을 해먹고 싶어서 주로 에어비앤비를 이용한다. 지금껏 수없이 이용했지만 모두 만족했다. 아마 다음 여행도 숙박은 에어비앤비로 해결할 것이다. 덴마크는 해물이 비싸서 잘 사먹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맛있었다.
사진 39. 피요르드를 보러 간 노르웨이 베르겐 전경. 햇살이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파노라마 사진을 찍었다. 덴마크에는 없는 언덕이어서 즐겁게 올랐다.
사진 40. 아들 학교 운동장. 덴마크 학교는 이렇듯 광활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운동장이 있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운동은 단연 축구다.
사진 41. 크리스마스날, 딸 유치원에 모두 모여 트리 장식을 만들고 점등식을 하고 놀았다. 11월 부터 크리스마트 트리를 파는데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은 거의 헐값에 판다. 크리스마스 날이 지난 후 마른 나무를 패서 벽난로에서 태운다.
사진 42.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날에 쇼핑몰 광장같은 곳에서 아이들을 위한 무료 공연이 자주 열린다.
사진 43. 아이들의 우상 '스케그'라고 불리는 턱수염 아저씨. 나도 아주 좋아한다. 키가 2미터가 넘는 것 같다.
사진 44. 한산한 코펜하겐 외곽 도로 풍경. 바닥이 돌길이 많아 하이힐 신고 걷기가 불편한 것 같다. 사람이 보이면 멀리서부터 속도를 줄이고 멈추는 차들 때문에 길을 건너기가 편하다.
언제가 될 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번엔 덴마크에 살러 온 사람의 사명감을 가지고 궁금해 하시는 덴마크 교육에 관해 글을 써보겠다.
잘보고 갑니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연히 쓰신글을 보았는데, 글 솜씨 대단하시네요. 너무너무 부럽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긴글을 올리시느라 수고하셨네요~~ 그곳 생활이 무척 맘에 드시는 게 글 곳곳에 있네요 아이들에게 참 좋은 곳인것 같아요 빨리 담 글이 궁금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제 글의 일부분과 공감하신것 같아서 저도 감사합니다. 아무 이해관계 없는 이 곳에 올리는 글이 다른 분께 도움이 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맥주 한잔 했습니다.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뉴질랜드 생각하고 있다가 덴마크에 관심이 가네요..감사합니다~^^
쇼핑하듯 여러 곳을 기웃거리시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비록 풀어야할 실타래가 내 앞에 있어도 말입니다. 예영맘과 맘에 꼭 맞는 곳을 잘 선택하시길 기원합니다.
이 글을 보니 덴마크에 가고싶은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장말 부럽네요
겉에 드러나는 외모보다 마음씀씀이에 더 정이 가듯이 덴마크의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보여줄려고 노력했는데요, 그게 잘 표현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감사합니다.
저도 글 보니 덴마크에 가고 싶네요~~^^
사는 것과 보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것과 내가 현실의 주인공이 되는 것만큼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서로 함께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님 글보고 덴마크라는 나라에 상당한 관심이 생겨 이것 저것 알아보고 있습니다. 어떤 경로로 넘어가셨는지 궁금하기도하네요.
그린카드로 왔고 지금은 그 비자 제도가 없어졌으며 다른 제도가 더 생겼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알아보심이 좋을 듯 합니다.
허지무님, 걱정마세요. 너른 밭에 잡초를 뽑기 전 한숨을 쉬던 제게 어머님께서 '눈 만큼 게으른 것이 없고 손 만큼 부지런한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묵묵히 뽑다보니 결국 밭을 다 마무리 지었던 생각이 납니다. 다급하게 생각마시고 나이도 아직 충분하시니 여유를 가지고 계획을 실행하세요. 님의 건승을 열렬히 바랍니다.
귀한 경험과 지식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잘 읽고 갑니다.가족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뜻하신바 모두 이루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부자가 행복하기 참 어렵다던데 그걸 이루셨으니 저도 그 비결을 배우고 싶군요. 좋은 덕담 고맙게 받겠습니다.
글과 사진 정말 소중히 읽었습니다. 외국생활 혼자만 가 있을 때와 가족이 함께 있을때는 무척 다르군요. 덴마크 실정은 몰랐는데. 다음 기회에는 교육에 대해서 말씀해주신다니 무척 기대가 됩니다.
교육에 대해선 할말이 많습니다. 지금 제 아들, 딸이 학교와 유치원을 다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도 딸 유치원에 픽업하러 갔더니 Grandparents day라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자, 손녀와 함께 크리스마스 장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대를 이어 서로 교감하는 이 나라는 분명 우리가 잊고 있던 선대와 후대를 이어주는 전통, 얼을 지키고자 하는 강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율'이라고 부르는 크리스마스는 우리나라 설날 명절과 같지만 훨씬 시끌벅적합니다. 예수 탄생같은 종교적인 색채는 사라지고 그 곳엔 난장이와 산타가 자리잡고 있어서 누구나 분위기를 즐기는 것 같습니다.
@포필라스 네 그렇군요. 여기는 지금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하는 시간입니다.
@Jeremias 사회 근간이 흔들리고, 법과 원칙, 평등과 나눔, 공존의 가치가 무너져 버린 현실입니다.
우와...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닉네임이 보니 한국에도 있는 하리보라는 쫀득이가 생각납니다.
이민가려면 비용과 어떤방법으로 가는게 좋은지 너무 궁금하네요..ㅠ 독일과 뉴질랜드...등...결정을 못해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어요.ㅠ 부럽네요.ㅠ
이민가는 방법은 사람이 사는 모습 만큼 다양합니다.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들지만 각 국의 이민관련 홈페이지가 있습니다. 그 곳엔 대부분 영문판을 가지고 있으니 크롬으로 잘 검색하셔서 찾아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비용은 취직이 처음에 어려우니 서울에서 한달 사는 비용만큼이 외국에서도 동일하게 든다라고 생각하시고 계획을 세우세요. 최소한 1, 2년 버틸 수 있는 비용을 가져가심이 좋을 듯 싶습니다.
글 잘봤습니다~~ 처음에 고생하셧던 이야기부터 1년이 넘은 현재 가족 모두 적응해서 살아가는 이야기까지 말이에요~~ 아이들이 즐거워보여 더욱 이민떠나고 싶네요... 다음 글 기대할께요~~ 화이팅입니다!!
아이들 참 즐겁지요.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으니까요. 학교에 10분이라도 더 빨리 가고 싶어서 일찍 깨워주지 않으면 안달합니다. 아들은 새로 옮긴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아 서로 생일파티나 놀이에 데려갈려고 합니다. 다행인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덴마크에서 참 좋습니다. 다들 그 좋은 곳에서 "왜 여기로 이민을 왔나?"하고 물어보니까요.
하지만 이민 1세대인 우린 무척 많이 힘이 들지요.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을거라는 위안을 하며 생활합니다.
님의 이야기가 망망함의 등대라면...고맙습니다.
그렇죠. 어둠이 내 주위를 감싸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려 할때 사이로 비치는 성냥불만한 조그만 빛도 희망이 되는 법이죠. 다음에 땅꼼마녀님도 다른 사람의 등대가 되어주세요. 저 또한 감사합니다.
아...저도 두 자녀의 엄마.
이 글에 용기가 나네요. 저도 5년이내 이주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많은 정보 얻고 힘얻어 갑니다.
요즘에 촛불 시위 보면서 우리나라가 긍정적인 변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벅찹니다. 우리나라도 아마 살기 좋은 나라가 될거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민을 계획하신다면 5년이시라면 준비 기간 충분합니다. 자금 마련보다 더 중요한 언어에 매진하세요. 이민이 아주 수월해지실 겁니다. 언어가 되시면 초기 정착자금이 확 줄어들거든요. 왜냐하면 취직해서 본인이 스스로 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화이팅입니다.
우리의 교육 현실을 생각하면 덴마크의 행복교육이 부러워지네요. 다만 포필라스 님이 올리신 현실적 문제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장점도 있는 것도 같고...먼 이국에서 도전하는 그 삶을 응원합니다.언젠가 좋은 결실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봤어요. 우리나라엔 힘이 있습니다. 부디 그 힘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골고루 편재하길 바랍니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하던데 요즘 그 말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님의 좋은 기원이 제게 큰 힘이 될겁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도 예전에 덴마크에 살아본 적이 있어서 님 글이 반갑네요... 남편이 노르웨이에 취직이되어서 이번에는 노르웨이로 갈 예정입니다. 노르웨이 물가가 너무 비싸서 이번에가면 일을하고싶은데 취직자리구하는게 문제예요..저는 영어는 그냥 할수있는정도구요....님은 어떻게 취직이 되셨는지 궁금합니다.행복해보이시네요..저도 덴마크살때가 그립습니다..
글을 보니 덴마크 이민에 대한 생각이 더욱 확고해지네요:) 너무 행복해 보이세요~